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서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2021. 5. 1 – 8. 29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T.02-580-1300, 서초동)
센터뮤지엄랩, 뉴라이프그룹이 주최하고 비채아트뮤지엄이 주관하는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은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소장품 중 진품 명화를 소개하는 자리로 국립피카소미술관(Musée national
Picasso-Paris)은 유족들이 기증한 5천 여점에 달하는 피카소의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으로, 피카소 전 생애를
아우르는 회화, 조각, 판화, 데생, 도자기, 자료 등 방대한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는 미술관이다.
국내에 소개되는 이번 전시는 피카소 예술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110여 점의 걸작들로 구성된
회고전이다.
SECTION Ⅰ 바르셀로나에서 파리, 혁명의 시대
바르셀로나에서 시작된 청년 피카소의 고독을 그린 청색시대를 시작으로 미술사의 혁명을 일으킨
입체주의시대에 이르기까지 격정적 시기의 작품들을 통해 피카소가 피카소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본다.
SECTION Ⅱ 질서로의 회복, 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
1차 세계대전이후 입체주의를 마감하고 신고전주의 풍의 구상회화로 복귀와 초현실주의 경향의 몽환적
작품들이 등장하는 피카소예술의 변화의 시기를 조명한다.
SECTION Ⅲ 볼라르 연작
볼라르 연작은 1930년에서 1937년까지 제작된 100점의 판화로 피카소 판화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의미있는 판화 작업이다. 뛰어난 데생 실력과 상상력이 볼라르 연작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SECTION Ⅳ 새로운 도전, 도자기 작업
1948년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피카소는 지중해 연안의 작은 마을이자 전통적으로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발로리스에 정착한다. 이곳에서 피카소는 도자기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면서 회화, 조각의 정통예술을
넘어 창작의 다양한 분야에 도전한다. 이 섹션을 통해서 피카소의 예술이 도자분야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기회가 된다.
SECTION Ⅴ 피카소와 여인
피카소의 예술은 그가 사랑한 여인들과 분리해서 논할 수가 없다. 입체파시대를 함께 했던 페르낭드
올리비에로부터 젊은 나이에 병사한 에바 구엘, 첫 부인 올가 코클로바, 청순하고 어린 마리 테레즈 발테르,
게르니카의 산 증인이었던 도라 마르, 피카소의 두 자녀를 낳고 그를 떠난 프랑수와즈 질로,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자클린 로크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등장하는 여인들과 함께 발전한 그의 예술을
조명하는 장이다.
SECTION Ⅵ 전쟁과 평화, 한국에서의 학살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다룬 1937년 〈게르니카Guernica〉는 피카소의 삶과 예술에 획을 그은 작품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Masacre en Corea〉은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다시 한번
고발했다. 작품 제목 이외에는 내용적으로는 한국전쟁을 특징지을 만한 요소가 없다. 그의 반전 작품이
그러했듯이 피카소는 범 인류애를 실현하는 의미에서 힘 있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해 저지르는
만행을 작품을 통해 고발한 것이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SECTION Ⅶ 마지막 열정
양대전을 거쳐 격동의 20세기를 살아온 피카소는 말년을 그의 마지막 여인이자 두번째 부인 자클린와
남불에서 보낸다. 1950년대 중반부터 피카소의 예술은 벨라스케스, 들라크루와 등 서양미술의 대가들의
작품을 모방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재현하는 작업에 몰두하는 한편, 화가와 아틀리에라는 일관된 주제를
통해 자기 자신과 그림과의 대화를 그리면서 마지막 창작열을 불태운 시기이다.
이번 전시작품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6개월 지나 완성한 1951년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도 포함돼 있다.
전시의 총감독을 맡은 서순주 박사는 “우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꼭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피카소가 한국을 다룬 유일무이한 작품이다. ‘게르니카’, ‘시체구덩이’와 함께 반전예술
3대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일부에서는 특정지역 학살을 배경으로 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감상은 각자의 몫이겠으나, 피카소는 “전쟁의 모습을 표현할 때 나는 오로지 ‘잔혹성’만을 생각한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 군인들의 군모와 군복 같은 것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전시회 면면을 보면 피카소의 창작에 영감을 주었던 연인들과 프랑스 각 지역을 배경으로 한
작품도 눈에 띈다. 유화 작품을 비롯해 조각, 도자기, 판화 등 그의 창작세례를 총망라한 전시다.
한국에서 첫 전시회답게 반응이 뜨겁다. 한가람미술관 관계자는 “줄을 서서 입장할 정도”라고 전했다.
수식어가 필요 없는 천재 화가 피카소(Pablo Picasso)
미술의 역사를 바꾼 세기의 천재 화가 피카소
피카소(1881-1973)는 1907년 파리 몽마르트의 작업실 바토라부아르에서 〈아비뇽의 처녀들 Les
Demoiselles d’Avignon〉을 제작하며, 입체주의의 시작을 알렸으며 20세기 미술이 피카소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만큼 찬란한 업적과 명성을 남긴 작가이다. 또한 그는 한국전쟁 발발 6개월이 지난
1951년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en Corée〉 작품을 완성하고, 5월 파리에서 열린 살롱 드 메
(Salon de Mai) 전에 이 작품을 공개하였다. 한국이라는 국가를 작품 제목으로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유일무이한 작품으로 한국전쟁의 특정사건이 아닌 전쟁의 잔혹성을 예술을 통해 고발한 작품으로
〈게르니카 Guernica〉(1937,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소장)와 〈시체구덩이 Le Charnier〉(1944-1946,
뉴욕 근대미술관소장)와 더불어 피카소의 반전예술 3대 걸작으로 일컫는 작품이다. ‘한국에서의 학살’과
관련해 일부에서는 6.25 전쟁 중의 특정 지역의 학살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는 주장도 하고 있으나
피카소는 "전쟁의 모습을 표현할 때 나는 오로지 '잔혹성'만을 생각한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 군인들의
군모와 군복 같은 것들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예술에 관한 글, Paris, Gallimard, 1998, p.70에서 인용함)라고
직접 언급한 바 있다. 폭이 2m에 달하는 이 작품은 과거에 국공립미술관이 국내 반입을 여러차례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작품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작품 발표 70년 만에 한국 땅을 밟는 기념비적인
작품인 만큼 피카소가 남긴 작품을 통해 우리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 Pablo Picasso 語錄
○ "한때 회화는 발전적인 단계를 거쳐 완성에 다가갔었다. 매일 새로운 것이 생겼다. 회화는 추가의 결합이다. (그러나) 나에게 회화는 파괴의 결합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파괴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봤을 때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곳에서 빼낸 빨간색이 다른 곳에서 나타날 뿐이다. (Pablo Picasso)"
- 1934년 겨울, 리처드 프리덴탈의 "위대한 예술가들의 편지들 - 블레이크에서 폴록까지" 중에서
○ "예술은 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적들을 막아내는 공격적인 무기이다. (Pablo Picasso)"
- 1943년 3월 24일, Les lettres françaises
○ "회화는 미학적인 작업이 아니다. 이 이상하며 적대적인 세계와 우리를 중재하도록 설계된 마법의 형태이다. (Pablo Picasso)"
- 2002년 출간된 마리오 리비오의 "황금률(The Golden Ratio)"에서
○ " 입체파는 기존의 미술과 다르지 않다. 기존의 미술과 같은 원칙과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입체파는 이해되지 않았기에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이를 볼 수 없었고, 없는 것처럼 간주되어 왔다.
나는 영어를 읽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어 책은 내게는 백지와 같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내가 모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탓할 수 있겠는가? (Pablo Picasso)"
- 1923년 출간된 마리우스 데 자야스의 "피카소 어록(Picasso Speaks)"에서.
○ "나에게 미술관을 달라, 나는 그 안을 가득 채울 것이다. (Pablo Picasso)"
○ “보는 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 (Pablo Picasso)”
○ "그림은 단지 집안을 장식을 위한 것이 아니다. (Pablo Picasso)"
○ “나는 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피카소가 되었다. (Pablo Picasso)”
○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할 뿐이다. (Pablo Picasso)”
- 70여 년간 쉬지 않고 자신의 감각과 욕망을 조형적인 美로 다양한 장르에서 천재적 재능을 펼친 피카소가
남긴 말이다.
○ "평생 나는 사랑만 했다. 사랑없는 삶은 생각할 수가 없다. (Pablo Picasso)"
✺ 일화
○ 피카소 그림의 값: 아름다운 한 여인이 파리의 카페에 앉아 있는 파블로 피카소에게 다가와 자신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으며 적절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말했다. 피카소는 몇분 만에 여인의 모습을 스케치해 준
다음 50만 프랑(약 8천만 원)을 요구하자 여자가 놀라서 항의했다.
"아니,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는 데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잖아요?"
피카소가 대답했다.
"천만에요. 나는 당신을 이렇게 그리는 실력을 얻기까지 4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 바닷가: 피카소가 바닷가에 놀러갔는데 어떤 아이가 종이와 펜을 들고 나타나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물론 아이의 부모가 피카소를 알아보고 아이에게 시킨 것. 피카소는 종이 대신 아이의 등에다 그림을
그려서 돌려보내고는 "저 애 부모는 저 그림 지우지 못할걸."이라고 말하면서 낄낄거렸다고 한다.
○ 고양이 그림: 피카소가 큐비즘 작품으로 화제가 되고 있을 때, 어느 한 화가가 실사로 데생한 고양이
그림을 들고 와 피카소 앞에서 "그런 아이 같은 그림을 그리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전 이만큼 그릴 수
있습니다." 라며 피카소의 그림을 비판했다. 피카소는 몇 분간 화가의 말을 들으면서 스케치를 했는데,
잠시 후 "이런 그림 말입니까?"라며 화가가 들고 온 고양이 그림을 똑같이 그려냈다.
파불로 피카소, 15살 때 자화상, 1896 / 파불로 피카소, 20살때 자화상, 1901
파블로 피카소, 89살 때 지화상, 1971/ 파불로 피카소, 90살 때 자화상, 1972
피카소를 천재라고 하는 이유
피카소 역시 초기에는 여느 화가와 다를바 없이 평범한 회화를 그렸다. 물론 아주 잘 그렸다.
화가 지망생이 었던 아버지는 어린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네가 내 꿈을 이뤄다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신동이 었다. 학생 시절 남들은 며칠씩 걸리는 과제를 몇 시간만에 완수해 월반을 하거나 13세에
개인전을 열 정도로 학교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피카소는 자신에 대해 “나는 아홉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데생을 했다” 고 말했다니 그 수준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태어나고 자란 스페인을 떠나
무일푼으로 파리에 정착하며 겪은 힘든 시절을 푸른색의 그림으로 표현한 ‘청색 시대’, 여러 명의 여인에
얽혀 염문을 뿌리며 생의 의지와 영감을 얻은 ‘장밋빛 시대’로 불리는 시절을 지나 예술계의 절대적인
권력자로 살면서 피카소의 열정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92세에 타계하기 전까지 피카소는 유화
1만3,000여 점, 판화 10만여 점 등 생전에 약 20만 점이라는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로 기네스북에 올랐으니
말이다. 동시에 3가지 그림을 그리고, 작업에 들어가면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며,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온갖 기행을 90세 넘어서까지 이어간 피카소. 타고난 재능과 불타오르는 창조성은 그를 천재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회화, 조각, 판화, 도자기 등 피카소 예술의 총망라
피카소는 끝없는 혁신과 창조적 재생산으로 모더니즘을 지배한 예술로 서양미술사의 오랜 전통을 존중하며
전통을 교훈 삼아 창작적 진화를 도모하였고, 예술을 통해 삶을 파괴하는 악을 고발하였으며 행동하는
예술가로서 인류애를 실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예술가로 회화 뿐만 아니라 천부적인 데생 실력으로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집요한 창작열로 수만 점에 달하는 종이 작품을 남겼으며 조각과 도자기,
무대디자인과 장식, 사진 등 전방위 예술을 지배하였다. 이번 전시는 7가지 섹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화 작품 뿐만 아니라 그의 다양한 재능을 광범위하게 보여주는 전시로 조각의 걸작으로 널리 알려진
〈염소 La Chèvre〉, 다양한 채색의 도자기, 그리고 7년에 걸쳐 완성 〈볼라르 연작 Suite Vollard〉과 함께
그의 창작을 총망라한 전시가 될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 1937, 캔버스에 유화
©2021-Sucession Pablo Picasso -SACK (Korea)/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캔버스에 유화, 243.9*233.7cm
문제작이자 입체주의 탄생을 알린 ‘아비뇽의 처녀들’
그래서 그의 여러 작품이 프랑스에서 탄생했다. 미술의 역사를 바꾼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아비뇽의
처녀들>은 1907년 프랑스 파리 몽마르뜨 작업실에서 완성했다. 작품성과 대중성 둘다 거머쥔 피카소의
매력은 독창적인 화풍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은 26세에 완성한
작품이다. 미술사가 들은 이 작품을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평가한다. 전통적인 회화 스타일을
버린 혁명적인 작품이기 에 그렇다.
1907년 피카소는 파리의 트로카데로 민속박물관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아프리카 조각과 가면 등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새로운 스타일을 꾀한다. 그렇게 탄생한 ‘아비뇽의 처녀들’ 속 새카만 머리카락과
까만 눈을 가진 인물들은 감성적인 인상주의, 아름다운 낭만주의가 만연한 파리 예술계에서 본적없는
기이한 모습이 었다. 500여 년 동안 내려온 서구 미술의 전통을 무시 한 채 원근법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해부학적으로도 엉망인 인물을 배치해 공간을 뒤틀어놓았다.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캔버스에 맞게
해체한 다음 늘어놓았더니 선이 강한 화풍은 더욱 원시적 감각으로 충만해졌다. 이는 시각적인 도전이자
관람객에게 다양한 관점으로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자유의지를 안겨준다.
넘치는 창조성과 열정때문에 마치 작품에 끌려가듯 생을 살아낸 피카소는 “회화는 나보다 훨씬 강하다.
나는 회화가 원하는 것을 할뿐이다”라고 말했다.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고 담아내는 화가의 역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우주를 만들어낸 창조자였기에 피카소는 오래도록 천재로 기억된다.
피카소는 1930년부터는 노르망디 지역 부아젤루 성을 새로운 작업실로 사용하면서 조각 작업에 몰두했다.
이때 당시 연인이었던 마리 테레즈 모습에 영감을 받아 ‘여인의 상반신Buste de Femme’ 조각상을 완성했다. 1948년부터 1955년까지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작은 마을 발로리스에 정착해 조각과 세라믹으로
예술 범주를 확장한다. 이때 동물을 소재로 조각에 몰두해 ‘염소Picasso goat’를 작업했다. 말년에는 칸느와
보브나르그로 옮겨 3m에 가까운 초대형 작업 ‘보브나르그의 식탁’을 제작했다.
파블로 피카소, 편지읽기, 1921, 캔버스에 유화(왼쪽) ©2021-Sucession Pablo Picasso -SACK (Korea)/ 파블로 피카소, 만돌린을 든 남자, 1911, 캔버스에 유화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입체주의의 시작
입체주의는 20세기 초반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 사조 중 하나로, 오랫동안 이어져온 사실주의적인
원근법, 명암법, 감정적 표현 등을 지양하고 사물을 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방향에서 본 모습을 한꺼번에
담아낸 화풍이다. 즉 하나의 그림에 여러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통해
입체주의를 열었다는 평가를 얻는다. 이후 좀 더 심화된 형태인 분석적 입체주의에 빠져드는데,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을 담아내기 위해 대상을 네모, 세모 등으로 단순화했다. ‘만돌린을 든 남자’가
분석적 입체주의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이다. 악기 만돌린과 남자를 완벽하게 해체해서 본래
형태를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수직으로 긴 병풍 모양의 캔버스는 피카소 작품 중 이례적인 모양인데,
미국인 수집가가 장식용으로 주문 제작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그린 이후 원래 이미지를
알 수 없는 분석적 입체주의가 지나친 추상으로 흐르 는 것을 경계해 다시 형태가 구분되는 이전 스타일로
돌아갔다.
파블로 피카소, 마리 테레즈의 초상, 1937, 캔버스에 유화 ⓒ2021-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왼쪽)/ 파블로 피카소, 피에로 복장의 폴, 1925, 캔버스에 유화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SACK (Korea)
파불로 피카소, 거울 앞 소녀, 1932/ 파불로 피카소, 오렌지 베레모를 쓴 여인, 1937
파불로 피카소의 파란 모자를 쓴 여인 상반신, 1944 ©2021-Sucession Pablo Picasso -SACK (Korea) / 파블로 피카소, 창문 앞에 앉아있는 여인, 1937
파불로 피카소, 시계를 찬 여인/ 파블로 피카소, 꿈, 1932
피카소의 뮤즈들
열정과 부, 명예를 거머쥔 예술가 피카소 곁에는 늘 여자가 끊이질 않았다.
정식 부인 2명 외에도 알려진 것만 5명의 여인이 더 있다. 이들은 피카소 곁에서 모델이자 뮤즈로서 함께했다. 첫 번째 부인 올가 코클로바는 피카소가 무대 디자인과 의상을 맡은 발레 ‘퍼레이드’의 발레리나였다.
올가와의 사이에 첫아들 파울로를 두었지만, 피카소는 44세 때 고작 17세밖에 되지 않은 프랑스 여인
마리 테레즈를 만나게 된다. 피카소 곁을 스쳐간 여러 여인 중에서도 마리 테레즈는 특히 매력적인 여성으로 알려졌는데, 피카소에게도 큰 영감을 주어 그녀를 모델로 삼아 ‘꿈’, ‘거울’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마리 테레즈의 초상’은 1937년에 그린 작품으로, 감각적인 색채와 생동감 넘치는 곡선을 활용해 신비한
분위기를 지닌 피카소만의 여신을 표현한 작품이다.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도 같은 시기에 그린 것.
하지만 마리 테레즈를 만난 초창기의 그림과 비교하면 그림 속 여인은 점점 웃음을 잃어가고,
색 역시 어두워짐을 알 수 있다. 초월적인 아우라가 사라진 이면에는 그사이 피카소에게 새로운 연인인
사진작가 도라 마르가 생겼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결국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를 떠났고, 이후 그녀는
우울증을 겪다 자살하고 만다. 촉망받는 사진작가였던 도라 역시 훗날 자신을 버린 피카소 때문에
정신병원을 전전했고, 두 번째로 결혼한 아내 자클린 로크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피카소는 항상
새로 만난 젊고 아름다운 연인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세기의 걸작을 완성했다. 그를 거쳐 간 여인들의
슬픈 삶은 여전히 그림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합판에 유화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전쟁의 기억
갑옷과 투구를 쓴 군인들이 천진난만한 아이와 임산부에게 총구를 겨눈 채 대치하고 있는 이 그림은
‘한국에 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이다. 1951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그 다음 해에 이미 세계 현대미술의 최고
거장으로 군림 하던 피카소는 지구 반대편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터를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가로 210cm, 세로 110cm 의 대작이다. 스페인 내전의 참혹상을 그린 피카소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게르니카’(1937)처럼 전쟁의 잔혹성을 예술을 통해 고발했다. ‘한국에서의 학살’과 관련해 일부에서는
‘한국전쟁 중 북한의 특정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이 배경이다’, ‘총구를 겨눈 군인은 미군이다’ 등 논란이
많았지만, 피카소는 “전쟁의 모습을 표현할 때 나는 오로지 ‘잔혹성’만을 생각한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 군인들의 군모와 군복 같은 것들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예술에 관한 글’,
Paris: Gallimard, 1998, p.70에서 인용)라고 직접 언급한바 있다. 작품 발표 70년 만에 국내에서
이 작품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파카소는 스페인 사람이지만,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한 까닭에 주한스페인대사관 뿐 아니라
주한프랑스대사관도 이번 전시회를 후원한다. 피카소 작품을 감상하고, 그가 활동한 두 번째 조국
프랑스를 한국에서 즐길 방법을 소개한다.
파불로 피카소, 늙은 기타리스트, 1903, 청색 시대, 파불로 피카소, 머리를 땋은 여인, 1906, 장미빛 시대
파불로 피카소, 여인의 상반신, 1931/ 파불로 피카소, 기타와 배스 병, 1913
파불로 피카소의 꽃병(1953), 사각 그릇(1953), 타원형 그릇(1955)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Guernica, 1937
파블로 피카소, 언덕 위의 집, 1909
파블로 피카소, 칸느 해안, 1958
피카소, 인물에 둘러싸여 누워있는 누드, 1908, 파리,목판에 유화
©2021-Sucession Pablo Picasso -SACK (Korea)
파블로 피카소의 도예 및 조소 작품들
파불로 피카소의 드로잉
파블로 피카소, 그림자 L'Ombre, 1953, Huile et fusain sur toile/ 블로 피카소, 술단지와 해골, 1945
파불로 피카소, 파불로 피카소 도자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
파블로 피카소, 목욕하는 여인 장식의 꽃병, 1929
파불로 피카소, 무릎 꿇은 여인 술병, 1950/ 파블로 피카소, 두 팔을 벌린 여인, 1961
파블로 파카소, 파라렐로의 콘서트카페 , 1900-1901
파블로 피카소, 보브나르그의 식탁, 1959
파블로 피카소, 알을 품은 비둘기, 1953
파블로 피카소, 염소, 1950
파블로 피카소, 콧수염이 있는 남자, 1914/ 파불로 피카소, 앉아있는 여인 Femme Assise, 1909 이 그림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이 그린 <예술가들의 그룹(Group of Artists)>이라는 작품이다. 중앙에 <미라보 다리>를 쓴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있고 뒤에 서 있는 여인은 마리 로랑생이다. 피카소가 그의 개와 함께 그려져 있고 턱을 괴고 있는 여인은 피카소의 연인이자 그의 주옥같은 작품의 모델이었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커플 인증샷과 같은 이 그림은 커플 초상화이다. 기욤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은 달콤한 시간들만큼 가혹한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 자연의 법칙인가보다.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기욤은 어처구니없게도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둘 사이는 더욱 벌어진다. 진범이 잡혀 누명은 벗었지만, 주변 친구들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는 결국 파국을 맞는다. 이별 후, 기욤이 그녀를 생각하며 쓴 시 <미라보 다리>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가 되었다. "사랑은 흘러간다.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기욤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심각한 상처를 입고 회복 도중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고 만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가 죽고 몇 해 후, 피카소와 마티즈가 그림 한 점씩을 팔아 그 돈으로 초라한 기욤의 묘에 묘비를 세워 주는데, 그 묘비에 들어간 글이 기가 막히다. "무게 없는 인생을 나는 얼마나 많이 손으로 달아 보았던가." 읽는 순간 신음 같은 것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것저것 저울질 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잃어버렸는지. 이 무게 없는 인생을 살면서. 글 출처: 오마이뉴스 2018년 8월 14일<파국 맞은 사랑, 범인은 '모나리자'> (문하연 시민기자) [자료출처 및 참고자료: 월간전시+가이드 (이문자, 전시가이드 편집장)/ KB 국민은행 GOLD & WISE 2021년 8월호(이지윤 에디터)/ <할아버지가 꼭 보여주고 싶은 서양명화 101> (김필규 지음, 마로니에북스 펴냄), <현대 미술의 결정적 순간들> (전영백 지음, 한길사 펴냄), <알수록 다시보는 서양 미술 100> (차홍규·김성진 엮음, 미래타임즈 펴냄)] |
첫댓글 파리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 들린적이 있는데요. 잔뜩 기대하구요.
아고. 그냥 그랬습니다.
제 눈 높이가 낮아서인지는 몰라두요. ㅋ
근처 로뎅이 훨 좋았지요.
그러셨군요 대단하셨네요
상세한 해설과 작품들 감상할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다녀가주셔서 고맙습니다 맛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