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제목은 [당신 안녕] 이다. 안녕... 그간 아무 탈 없이 무사했느냐는 물음, 혹은 앞으로 평안 할 것을 권하며 보내는 인사. 자살한 아버지에게 그들이 보냈던 인사는 안녕 이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외쳤듯이, "이제 난 죽음을 통해서 자유를 얻었다."는... 이 연극이 우리에게 전해 주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현실의 어려움? 고통, 슬픔, 상처가 가득 찬 가정의 결말? 고독... 극의 아버지는 고독을 말했다.
나는 이 연극을 통해 무엇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걸까? 다시 느끼는 것이지만 극을 볼 때마다 느끼듯이 연극은 짧고 굵다. 한편의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보다 짧은 것이 연극이지만,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작가의 의도가 하나이더라도 해석은 여러 가지. 인류의 삶이 복잡해서 일까? 연극은 삶의 압축 일 수 있다.
극의 주인공인 아버지는 아니, 남편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고 곧이어 아내가 들어온다. 교회에 다녀오는 길이라던 아내는 계단을 오르려다 남편에게 심기가 뒤틀렸는지 그의 말에 못 마땅히 응하며 내려와 의자에 앉는다. 대화가 오고 가는데 아내는 남편에게 불만이 많은 듯 험담을 퍼붓는다. 남편을 무능하게도 그리며, 가장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더욱이 자신의 처지까지 한탄하며 남편의 가슴에 못 박힐 말을 골라서 한다.
나는 여기서 주목하건 데, 왜 하필 이 여인은 교회에 갔다 오는 길인가? 나 역시 기독교 인 이다. 어려서부터 주님을 알았으며 이제 까지 내가 배운 것은 사랑이다. 그것을 실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적어도 남에게 험담을 늘어놓거나 누군가를 미워하려 들지는 않는다. 대학교수이자 극작가인 독고 영의 아내는 명색이 기독교인이면서 극 초반부터 우리에게 실망을 던진다.
아내는 극 전반을 볼 때 남편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사랑의 표현이나 그녀 앞의 현실은 미흡하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을 텐데 적어도 교회에 오래 다녔다면 그녀에게 있어 신앙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 하였다는 것이다. 대화 중에 고부간의 갈등이 나오는데 그녀는 상처를 크게도 받은 모양이다. 남편을 지극히 미워하는 것을 보면 상처는 곪아서 그녀의 성격에 치유되기 힘든 장애를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처가 기독교인인 그녀에게 치유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이 왜 하필 그녀가 교회에 갔다오는 길인가 에 대한 답으론 부족하다. 신앙 마저 치유할 수 없는 상처... 아니, 이 여인은 신앙에 또 자신의 삶에 실패한 것이다.
무엇이 그녀를 실패하게 만들었건 그녀와 또한 이 연극의 인물들은 저마다 실패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인생의 실패와 가정의 실패. 여기에 답이 있다. 이들이 실패한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독고 영은 어떠한가? 대학교수이며 극작가이다. 사회적인 지휘는 충분히 있는 격이다. 그러나 그는 자살한 인물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때때로 접할 수 있다. 사회적 성공이 개인의 성공을 말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그러한 것이 있을 지라도 삐뚤어진 내면은 덮어 줄 수가 없다. 그는 결국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고독으로부터... 그랬다. 독고 영의 성을 거꾸로 읽으면 고독이 된다.
처음 극이 시작되면 독고 영은 어딘가에 서 있다. 그리고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아 내가 곧 자유다."
마치 예수의 말씀을 인용 한 듯 그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자유라 한다. 그러나 사실 여기엔 의미가 없지 않은가. 자살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죽여 떠난 사람이, 곧 자유를 얻었노라고 하면 따라갈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왜 독고 영은 자유라 하였는가?
일단 한가지 분명 한 것은 그는 자유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에 학교란 울타리와 공부라는 족쇠 속에 갇힌 나와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는데 그때에도 줄곧 자유를 생각하였다. 감옥... 세상이 감옥이고 우리는 그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면, 다시 이 연극에서의 표현처럼 우리가 새장에 갇힌 새에 불과 하다면 방울새의 어미처럼 독을 물어다 줄 누군가를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죽은 독고 영은
"갇혀있는 새장의 방울새는 자유롭게 살지 못할 지 새끼에게 독을 물어다 준단다."
라고 독백한다. 이해하기 힘든 독백... 독고 영에게 독을 물어다 준 이는 없다. 그를 힘들게 한 환경과 인물들은 새장 일 뿐 독은 아니니까... 독은 그가 가슴에 쌓아둔 상처이다. 상처를 지우지 않은 자기 자신이 바로 독이다. 그가 마신 독은 그가 지기 어려운 삶의 무게인 상처이다. 결국 그는 나약했다. 굴복했다.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독 만큼이나 지독하다. 아내가 보는 앞에서 - 도대체 무엇 때문에 - 독이든 차를 마신다. 독이 몸 안에 퍼지면 어떠할 것인지 그는 알았을 것이다. 위가 녹고 창자가 탄다. 실제라면 피를 토할 걸... 몸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그가 선택한 것은 다량의 수면제도 아니라 차에 탄 독 이었다. 그는 고통에 찬 표정으로 아내를 부르고 자신의 고통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유언 마저 남기고 떠난다. 왜, 죽은 뒤 발견되는 것이 아닌, 아내가 뻔히 보는 앞에서 일그러지는 고통에 몸을 맡긴 죽음을 택하였는지... 아내에게 하고픈 말이 무엇이 기에... 혹시 자신이 삶에 미련이 있었음을 나타내려 했을까?
그룹 자우림의 [낙화]란 노래가사엔 "사실은 난 더 살고 싶었어요. 이제는 날 좀 내버려 두세요. 사실은 난 더 살고 싶었어요. 이제는 날 좀 내버려두세요."란 구절이 나온다.
자살을 택한 사람일지라도 삶에 미련이 남기 마련일까? 어쩌면 그는 고독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도 고독의 연속이 될 수 있다. 혼자 가는 길이다. 그곳에 같이 가주는 이는 없다. 그가 가서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가능할까? 죽음은 혼자 가는 길, 특히 자살은 그렇다. 그래서 어떤 이는 동반 자살을 하지 않는 가? 그렇지 않더라도 그는 과연 죽음이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죽음을 통해서 자유를 얻었다 하나 나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 한다.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이가 죽어서 자유롭다니...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연극은 의미가 없다고 단언한다.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주인공이 자유를 얻었다면 이 연극은 해피엔딩이 될 수 있지만, 게다가 많은 이들이 여기에 공감하고 동의한다면 이 연극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무 탈이 없는 선한 연극이 되어 버릴 테니까... 삶의 한 해결점을 제시하는 유익한 연극이 될 테니까... 지나친 판단일지 모르나, 작가는 윤리와 도덕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죽음 곧 자살이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는 것이기에 우리는 독고 영을 보며 더 슬퍼 할 수도 안타까워 할 수 도 있는 것이다. 독고 영 자신도 자신의 거짓말을 괴로워할 것이다. 그에게 아무런 탈출구란 없다.
그가 죽자 등장하는 최박사. 이 부분에서 나는 좀 의아했다. 왜, 갑자기 최박사가 영매가 되는 걸까? 죽은 이와의 대화라... 이것이 연극의 또 하나의 묘미겠지... 이들은 관객의 두 눈을 의식하지 않는 듯 멀쩡히 산사람과 죽은 사람이 대화를 한다. 독고에게 죽은 이유를 묻고 독고는 회상을 하며 극은 진행된다. 태연히 과거로 걸어가는 독고 영.
독고 영의 직업은 교수이자 극작가이다. 극작가가 된 이유를 들어보면 그의 어머니와 아내의 고부간의 갈등이 고조되자 이를 회피하기 위해 작품창작에 몰두하게 되었다 한다. 창작... 그는 왜 창작을 하려 했을까? 어문학 교수라서? 창작도 뼈를 깍는 고통이 있는 일이 라고 들었던 적이 있다. 그래도 자신의 세계는 만들 수 있어...자신이 직접 세계를 재창조 할 수 있다. 진정 그럴까?
어느날엔가 그에게 소영이란 작가 지망생이 찾아온다. 창조를 하고자 하는 이들의 만남. 그러나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창조가 아니라 경험이었다. 그들이 찾고자 하던 것은 작품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과 그들의 삶을 위로하여 줄 누군가 였다. 소영은 교수를 유혹 하였고 독고는 소영에게 이끌려 둘은 사랑에 빠진다. 부적절한 관계가 되어 버린다.
교수님께서 이 연극을 소개 하셨을 때 그저 가정 문제를 다룬 평범하고 쉬운 이야기라고 여겼었다. 허나, 연극을 막상 관람한 뒤 가정이라는 테두리 뒤에 숨은 어른들의 이야기가 보였다. 그동안 이곳 저곳을 통해 말로 듣고 간접적으로 눈으로 보아오던 어른들의 뒷모습을 나는 새삼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들도 방황이란 걸 한다. 아니, 그보다 무언가에 목말라 한다. 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설령 알아도 그들은 어리석어서 그대로 끌려간다. 독고 영이 찾은 것은 외도였다. 그가 말하던 고독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을까? 그는 무엇을 얻었지?
소영은 작가 지망생이다. 그것도 드라마... 그녀는 여성들에게 불합리한 사회구조에 대하여 도전하기 위해 작가가 되고자 한다.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으며 그녀는 작가를 지망했다. 그래서 그녀는 독고 교수를 찾았지만 여전히 만족이 될 수는 없었다.
독고 영은 우유부단하다. 세심하지 않고 단지 시간에 몸을 맡길 뿐이다. 그는 앞으로의 일이 두려워서 선뜻 이혼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만 흘려보낼 따름이다. 소영은 기다리다 지쳐서 그녀를 좋아하는 한 남자와 폴란드로 떠난다. 기다리다 지쳐서? 소영은 왜 떠났을까? 그녀가 원하던 사랑은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아기를 낳지 않아도 되는 사랑이다. 여자로서의 희생이 필요 없는 그런 사랑이다. 그러면서도 독고가 아내와 이혼하길 바란다. 왜 일까? 소유욕 때문일까? 왜 소유해야만 하는 걸까?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인가.
독고 영의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챘으면서도 가정을 걱정해서 인지 모른 척 한다. 헌데, 그 사이에 독고의 어머니가 죽자 독고는 원인을 아내에게 돌리는 데 이른다. 갈등은 깊어 질 수밖에 없고 이내 이혼이란 말까지 들먹거리는 지경에 이른다. 독고의 아들은 따로 집을 얻어 나가고 딸 역시 집과는 멀리 하고 만다. 집에 남은 것은 단 두 명 이들 부부이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다치게 하였기에 가정은 해체되어 간다.
사람들의 문제라면 대개 어떤 경우라도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상황을 판단해 버리는 것이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생각하기 편한 대로 자신에 생각을 맞추어 간다. 섣불리 판단하므로 오해를 낳고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는 말 한마디로 의는 상하기 마련이다. 언제나 자신만이 중요 할 뿐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중요치 않은 사람. 이는 어쩔 수 없다는 논리가 옳은 걸까? 저마다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디나 갈등이 있고 더군다나 자신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란 소리를 듣는다. 물론 의미는 다소 다르지만, 독고 영에게 아내가 힘든 것과 그녀의 생활은 중요치 않다. 그저 자신이 갈구하는 고독에서의 해방과 교수, 작가로서의 명예와 자유...이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도 인상적이다. 싸이클을 타고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독고영의 모습은 출입구쪽 좌석에 앉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태연스럽게 들어와 인상적이지만, 독고영의 싸이클은 나이를 속일 수 있고 언제나 혼자 할 수 있어 좋다고 하는 말에서 나는 의아해 한다. 그는 이 부분에서 고독을 즐기듯 묘사된다. 그렇게 보이고 만다.
참 우습다. 인간은 고독을 싫어하면서도 때론 고독을 즐기기 원한다는 것이다. 나이를 속이는 거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 좋다지만 혼자가 되어서 좋다는 것은 스스로 고독을 택하여서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걸까? 고독을 즐기기 위해서는 고독한 상태에 있어야 하고 그것을 이미 경험해서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 고독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고독해서 무언가 믿을 만한 경험이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말하는 고독이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귀담아 듣거나 이해해서 평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독고영을 생각 할 때, 가끔은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을 생각 할 때, 그것은 어쩌면 포기가 아닐까 한다. 고독한 가운데에서 포기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은 고독할 수밖에 없고 이윽고 그것을 즐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일종의 체념으로써 본연의 자아는 그것을 원치 않으나 인생의 쓴맛을 보고 너털웃음을 짓는 사람의 마음처럼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독고영은 가족을 떠났다. 그의 마음속에서 이미 가족에 대한 어떠한 그리움 내지 안타까움은 엿보이질 않는다. 그의 맘에는 상처 외에 분노가 있다.
그의 결혼설은 "남녀가 그저 떨어져 살다가 필요할 때만 만나면 된다."이며, 사랑은 법, 이성, 규칙, 학문 등의 것들도 다 필요 없게 만든다고 정의한다. 또한 세상에 며느리를 사랑하는 시어머니는 없다고 역설함으로써 그의 내면에 이미 여성과 어머니 특히 시어머니란 존재에 대한 경멸이 있음을 관객들에게 들키게 된다. 독고영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만세를 불렀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극의 인물들은 상처에 매여있다. 사실 상처 없는 사람은 현실에 없겠지만 연극을 통해 인간의 모순과 나약함을 다시금 확인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상처를 받게되면 이를 준 사람에게 그만큼의 상처를 갚고 만다. 상처를 주고받는 사이. 부부, 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에 관계없이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아 되돌려 주거나 다른 곳으로 전염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분노가 싹트기도 하고 서로를 미워하는 지경에도 이르는 것이다.
독고영의 아내가 극 초반부터 쏟아 놓던 불만과 모욕들은 그 아내자신의 모습이다. 진심은 사랑했다거나 표현을 못해서란 자기변호도 그녀의 입 밖에 난 말 한마디마다 상처를 분노로 표출한 흔적이 역력하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교만치 아니하며 자랑치 아니하며 불의에 기뻐하지 아니하며... 인간이 이 말씀의 사랑을 하기란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진정 사랑을 깨닫지 못해서? 알지 못해서... 독고영은 아내를 사랑했을까? 소영은? 아내는 독고영을? 아들과 딸은 아버지를 사랑하였던가?
분노가 얼마나 사람을 좀 먹게 하는 지를 새삼스레 느낀다. 미움, 증오... 그러한 감정들. 이를 통해 한 가정은 무너져 내리는 것이겠지...
"죽으려면 일찍 죽지 재혼이라도 하게."
아내는 가정이나 자녀에 앞서 본인의 인생을 생각하고, 이대로 죽어버리는 남편에게 원망을 가지게 된다. 사랑? 없었을 것 같다. 있었다면 이런 독백이 가능할까? 사랑이 있었으나 세월과 고부 갈등이 이를 식게 만들었을 것이다. 남편은 그녀의 마음에 머무를 수 없고 회복시키지 못했다. 시간 앞에 무기력해지는 독고영이다. 오히려 가정 불화라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았던가. 그는 우리가 기대하는 가장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힘없이 삶을 종료한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 인물이다. 그가 아는 것은 어두운 가정의 단면과 상처와 분노에 희생된 본인의 모습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주는 존재가 아닌 서로에게 받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상대는 만족이 될 수 없었고 스스로 원치 않던 가정 분위기와 불화에서 그들은 그것을 용납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떠나는 밑바탕에 안타까움보다는 탈출의 의욕이 더 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랑을 몰랐고 여느 가정이 그렇듯이 화목하기에 부족한 자아와 훈련되지 못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그들이 실패자임을, 그들 자신이 돌아본다 해도 스스로 실패한 삶임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가운데 자살을 택하는 이는 정신병자 외에는 없겠지... 불행이 그들 가정에 있었음과 아무도 그 불행을 치유 할 수 없었고 그러할 능력도 없었음이 보는 이들의 마음엔 어떻게 작용했을까? 나에게 있어 안타까운 마음과 저들을 정죄하는 마음이 엇갈리기도 하였다. 어리석은 사람들... 그들은 얻기 위해 잃었다.
많은 학생들을 당혹스럽게 한 장면도 떠오른다. 사실상 이 연극에선 필요 없는 부분이다. 성인 룸싸롱을 표현하고 싶었던지 여자 둘이 나와 몇 분 동안 춤을 쳐 대는 데 이 부분을 삭제해도 연극 진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쨌든 그곳에서 아내와 남편의 친구인 최박사와 만난다. 남편의 외도를 안 이후의 복수심리인지 그녀는 최박사와 어울리다 뜸금없이 러브호텔에 갈 것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최박사의 유혹에 스르르 몸을 맡기는 그녀... 그녀의 체념은 무엇인지... 반항 심리일까? 어쨌든 그녀 또한 그렇게 망가진다.
폴란드로 떠났던 소영이 돌아오지만 그녀도 망가진 모습으로 돌아오고 더군다나 독고영은 힘을 잃고 늙어가고 있다. 소영은 타국 생활에서 자신보다 학업에만 관심 있는 남자친구에게 회의를 느끼고 무료한 나날들과 고독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모아둔 알약으로 자살을 시도하고 손목도 그어보지만 제 뜻대로 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 독고영 앞에 모습을 보이게 된다. 매번 부활한다던 그녀는 이제는 늙고 지쳐가는 독고영에게 자신의 감춰져 있던 비밀을 고백한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버려진 뒤 입양되어 자랐으며 그 집 오빠에게 성적 노리개가 되고 괴로워 가출해 살아왔다 한다. 또한 원조교제로 돈을 벌어 대학에 들어갔다. 이 땅에 서기에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가 하면 그 자체가 힘겨운 여성의 지위를 바라보며 세상은 냉소하는 그녀... 그녀 또한 삶이 그녀에게 관대하지 않다.
이 연극은 지극히 극단 적일 수 있다.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정의 불화와 삶의 냉소와 염세적 내용들이 적나라하게 복합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물론 그 자체를 나쁘게 보는 것만은 아니다. 연극이기에 가능하다. 허나, 이 연극의 주제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게 하는 요소의 일부로 복잡한 개인의 상황과 배경을 이야기 할 수 있겠다. 지나치게 복합적이어서 간단히 주제를 언급하기 힘들고 과연 무엇이 이 연극의 핵심이며 중요한 내용은 무엇인가에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내가 무지한 것일까? 어찌 되었든 이 연극은 내 생각에 빗대어 우리가 실로 흔히 접하는 어른들의 이야기, 불륜, 이혼, 중년 남자의 자살, 원조교제 등을 한 대 모아 놓았다는 것... 짜 맞추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소영은 그리도 큰 충격적인 경험들과 그녀를 시들게 하는 삶의 무료함 때문에 무너져 간다. 그녀는 두려워했다. 젊다는 것. 그녀는 자신이 젊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했다. 내일에 대한 희망도 무엇보다 확신과 자신이 없다. 갈곳을 모르고 방황하는 새. 꿈이 없는 삶은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 젊음은 가능성이라는데 또 도전의 시기라는데 소영은 그녀의 삶을 회의한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무엇 때문에 자신이 거기에 있는지 모르는 그녀...
아울러, 독고영은 예술이 자신에게 속임수라면 사랑도 속임수라고 말한다. 속임수... 진리가 아닌 것, 사실이 아닌 것. 독고영은 자유롭지 않을 뿐, 세상이 그에게 새장이 되어서 사실은 고독 한 것을 그는 사랑과 예술로 감추려 했다는 말인가? 고독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그는 속임수라고 표현한다. 적어도 독고영 자신은 사랑하고 있고 예술을 하고 있다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 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말이다. 허나, 그는 무책임하다. 혼자만 자유를 얻었다 할 뿐, 그의 가족에게 그는 너무나도 무책임하다. "가정은 새장이고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이다." 라는 말로 연극의 막이 내린다.
현대사회에는 이런 모습이 많다. 연극처럼 극단 적이진 않지만... 아버지는 하루종일 밖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셔야하며 어머니는 집안일과 TV를 보시며 나른한 이상을 보내시거나 혹은 맞벌이로 일하시느라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 일쑤고 각 학교로 흩어져 낮 동안의 집안은 횡 하다. 이러한 가정에 대화의 시간이 많을리 없다. 그래서 다들 고독하다. 함께 하기 위해 있어야 할 가정에 그저 하룻밤 잠자고 다음날 일하기에 바쁜 도시의 이상이란 우리들에게 때론 삭막하고 허전한 마음을 더한다. 어느날 그들이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오더라도 개인의 시간에 이미 깊이 적응해 버린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이 연극이 가르쳐 주는 것은 사랑 없이 상처를 키워나가고 타인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분노를 삭히는 것은 결국 파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보다 다양한 주제가 있고 내가 발견 못한 면이 많겠지만 연극의 묘미와 감동과 재미를 다시금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사랑 그것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순간 실로 어려워진다. 무슨일이든 그렇겠지만 작은 사랑을 크게 키워나가서 나의 가정과 부모님과 형제와 자매와 친구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