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때 5월말쯤 이었습니다
시오리길 읍내 호남 중학교에서 집에오면 언제나 허기가 졌습니다
식은밥이라도 있는가하고 부억에가서 밥솥을 열어보고 식은밥이
밥그릇에 남아있을때는 아주다행 이었습니다
춘수리 유종철 유복규 장성기 유태한 임휘성
새내 이상호 박갑술 송동석 김필수 김영순
부안촌 심상복과 나까지 12명인 우리들은 항상
정읍 남산동 호남중학교 에서부터 당고개재를 넘어서 상평리 띠밧머리
재넘어 등거물을 거쳐서 허기진체 집에왔습니다
배가고프니 고등학생인 우리동내 영팔형이나 장평이형 새내 최태룡형등
몇몇은 상기동앞 재곤이형네 하꼬방에서 (구멍가게) 외상으로 빵을
사먹기도 했습니다
빵값을 약속날에 못갚은 형들은 하꼬방을 피해서 상기동 동내앞으로
돌아서 다녔습니다
어쩌다가 우리들과 만나면 아무일도 아닌듯 웃었지만 우리들도
그정도는 다알았습니다
우리들보다 4년선배인 그하꼬방 큰아들인 재곤이형은 공부를 잘해서
광주 고등학교와 고대 법대를 나와서 두번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부장판사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변호사를 하다가 지병으로 2011.7월에 하늘나라로
떠나버렸습니다
재곤이형은 74.1월 광주 보병학교에서 법무관 교육을받을때
고등군사반 교육으받던 나한테 두번이나 큰신세를 졌다고
꼭만나보고 싶다며 언제든지 교대역 앞에와서 전화를 하라고 했는데
서로가 바쁘다보니 못만나고 말았습니다
그때함께 호남중학교에 함께다녔던 심상복 박갑술 김영순 유종철은 나열된
이름 순서데로 바쁘게 하늘나라로 가버렸기에 지금은 그때의 친구들이
여덟명만 남아있습니다
그날은 너무나 허기가져서 보리라도 볶아먹을려는 참인데
제공앞 밭에나갔던 어머니는 22살 새며느리와 무슨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누면서 들어오셨습니다
두말갓지기(500평) 그밭은 근100m 정도의 기다란밭 이었습니다
대바구니와 호미두개를 헛청에 (다용도실격) 걸어두고나온 새형수는
시어머니 손씻으라고 부억에서 세면기에 물을담아갖고 나왔습니다
" 나는 두고랑을 갖고도 한나절에 네고랑도 못다메는데
너는 밥도굶은 사람이 어떻게 세고랑을 갖고도 그렇게 번개같이 멘다냐
늬덕에 나혼자는 이틀해도 못다멜밭을 반나절만에 다메버렸구나이 "
하시면서 입덧이 심해서 굶다 싶이하는 며느리를 칭찬 하셨습니다
한참후 아버지께서 숨을 헐떡 거리시면서 검틱틱한 밀가루 포대에
무엇을 담아서 새끼줄로 멜빵을한채 바쁘게 들어오셨습니다
" 어이 구상리가서 해균이한테 이야기 했더니 그러면 진직이 오제
그랫냐고 험서 두말도 안하고 쌀두말을 퍼주드만 그러고 다먹고나면
또 오라고허데 어서 밥히서 멕이소이 "
하시면서 기둥에걸린 낡은 수건으로 이마의땀을 닦으셨습니다
조끼와 저고리를 벗을때보니 새끼줄멘곳의 양쪽어께가
푹파인걸보니 한번도 안쉬고 오신것 같았습니다
그것을보니 참으로 짠했습니다
한여름에도 땀을별로 안흘리는 우리 아버지께서는 땀을흘리면서
입덧이나서 보리밥을 못먹는 며느리에게 얼른 쌀밥을 먹일려고
구상리에서 십리길이넘는 부안촌까지 뛰다싶이 오신것 입니다
행여 귀중한쌀에 땀이 스며들까봐 여러겹인 두툼한 비료포대로
쌀포대의 절반을 단단히 묵어서 짊어지고 오셨습니다
부자인 큰집에는 쌀이많이 있지만 아버지께서는 자기형과 형수님에게는
차마쌀을 꾸어달라고할 용기가 없었고 보이지안는 거리감과 자존심에
관한문제 이기도 하였던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구상리에서 제일로 부자이고 가깝게 지내던 6촌형님의 아들인
해균이 조카한테 가을에 갚기로하고 쌀을 꾸어갖고 오신것 입니다
어머니께서는 둥근 양철깡통을 잘라서만든 헛솥단지에 (밖에있는 부억)
작은 백철솥에 밥을안쳐서 금방밥을 하였습니다
그조고만 백철 솥단지는 큰형이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을때 매주면회를 가기에
닭을삶아 먹이기 위하여 아버지가 정읍장에 가셔서 큰돈을 주고산 백철솥 입니다
그당시 우리집 에서는 보물같은 백철 솥단지 였습니다
어머니는 조고만 소반에 하얀 쌀밥과 묵은지와 맛있는 빨간 무우짱아치를
올려서 며느리의 신혼방인 아랫방에 넣어주고는 며느리손을 끌다싶이잡고
데리고가서 방으로 밀어넣고는 문을 닫아주셨습니다
" 먼디서 갖고온 쌀로 너먹일라고 밥을 했은게 다먹어야 헌다이 "
하셨습니다
그때는 집에 손님이오면 쌀을조금 넣어서 밥을해서 대접해야 하기에
비상식량 격으로 보관했던 약간의쌀은 새며느리가 입덧이 나면서부터
진직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때 우리집에 오시는손님은 대략 부안 남포리 할아버지나 백산 외삼촌과
만수동에서 문중일로 오시는 해관형님일행과 수꿀 사돈정도 였습니다
만수동 에서오는 손님들은 당연히 큰집이나 문중일을 맞아서 하시는
오동촌 작은집으로 가셔야 하는데 무뚝뚝하고 껄끄러운 큰아버지나
너무나 잘난체 하시면서 앞서가는 작은아버지 때문에 그손님들은
언제나 우리집으로 오셨습니다
새며느리는 뱃속의 아기를 위하여 보리밥을 억지로 먹고난후 10분정도
지나면 어김없이 우엑 우엑 하면서 전부토해 버렸습니다
토하는 소리가나면 토방에서 잠자던 메리는 먹을것이 있다는걸 귀신같이
알고서 정지를 (부억) 거쳐서 뒤안으로 뛰어가서 토한것을 깨끗시 다줏어
먹어버리기에 청소할일이 없었습니다
메리덕에 토사물을 해결할 몽당 빗자루와 함석 쓰레받이는 언제나 그자리에
있기만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마음을 졸이며 날마다 무엇을 해먹이면 좋을까하고
서로 걱정만 하셨습니다
큰형이 정읍 약국에서 사갖고온 무슨 영양제 든것도 아무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정읍 한약방에 가셔서 입덧난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한약 한제를 (20봉지) 지어 오셨습니다
가을에 주기로하고 외상으로사온 비싼한약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3봉지를 억지로달여 먹였으나 전부 토해버렸습니다
한약 냄새만나면 토가 더나온다니 더먹일수도없고 난감했습니다
어머니는 3봉지값만 돈으로 갔다주고 약을 물리면(반품) 어쩌까이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이가 없어 하시면서 입맛을 다시며
" 나는 못가것은게 자네가 한번갔다 와보소 "
하셨습니다
남들에게는 대수롭지안고 하찮은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저는지금
그때의일이생각나서 가슴속 어딘가가 뭉쿨하고 목이 메이면서
이글을 씁니다
1899년생인 우리아버지는 8남매중 셋째였습니다
1895년생 큰고모님 1897년생 큰아버님 다음 었는데
1914년생 막내고모님만 제외하고는 모두 며느리를 두셋 씩이나얻고
손주들도 여럿인 형제들을 항상 부러워 하셨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오재학님 께서는 부안촌에서 10리쯤 떨어진 해주 오가들의
집성촌인 만수동 출신인데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공부는 어떻게해서 많이 하셨는지 총각때인 21살에 서당 훈장님으로
우리 부안촌 전주이씨인 기회네 집으로 초대되어서 오셨다고 합니다
그덕에 다음해에 기회네 증조 고모할머니와 결혼하여 부안촌에다 터를
잡으신 것입니다
그후 딸 아들 아들 딸 아들 딸 아들 딸 도합 4남4녀를 낳으셨다고 합니다
열을 낳았는데 둘은 어릴때 죽었다고 했습니다
아들들의 이름은 東鎬 西鎬 南鎬 北鎬 입니다
큰아들은 공부를 많이 해야한다고 하던시대라 큰아버지는 어릴때부터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숙식을 함께하면서 공부를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큰아버지는 미리가 둔했던지 공부를 못한다고 수시로
매를맞았다고 했습니다
담뱃대가 얼마나 튼튼했던지 담뱃대통으로 머리를 두들겨 맞아서 머리가
터지는일이 밥먹듯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새신랑이 공부하다가 방에서 큰소리가나며 목침이나 담뱃대통으로 맞아서
피가줄줄 흐르면서 손으로 감싸고 나오면
새댁인 큰어머니는 처음보는 일이라 무서워서 벌벌 떨고만 서있었는데
시어머니 께서는 알아들을 수도없는 큰소리를 지르면서
" 너 지금 멋허고 자빠져있냐아 얼렁 쑥뜯어와 쑤욱 쑤우욱 "
하셨답니다
달음질을해서 (달리기) 밭뚝에가서 쑥을 뜯어오면 시어머니가 확독에 (돌확)
찧어서 주시기에 소리내어서 울지도 못하고 훌쩍 거리면서 눈물만 흘리며
덜덜 떨면서 신랑머리에 소금넣고 다진쑥을 붙이고 헝겁과 끈으로 동여메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난리를 서너번 겪고나서는 요령이나서 치마하나 잘라서 긴호따이를
(지금의 붕대) 서너개 만들어 놨었답니다
요즈음의 골프채 10번이나 11번만은 조금 못해도 거의 4촌정도는 될성싶은
놋쇠로된 담뱃통은 솔차니 무서운 흉기로 보아도 될것입니다
큰아들이 장가간 후에도 그무서운 흉기인 담배댓통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두들겨 팻다고 했습니다
큰아버지보다 한살더먹은 큰어머니는 만수동 옆동내인 고부면 입석리
노씨네집 무남독녀 외동딸 이었는데 자기집에서는 금이야 옥이야하고
항상 웃고만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집와서보니 날마다 동내가 떠나가게 큰소리가나고 열흘이나
보름 거리로 새신랑이 아버지한데 매맞고 머리가 터져서 피가철철 흐르기에
하루 하루가 무섭고 겁만나고 끼니를 걸러도 배고픈줄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어저께 가르쳐준것도 모른다고 목침을 집어던져서 어느때는 앞머리가
또 어느날은 뒷머리가 터진일도 셀수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무서운일이 한달에 두번도있고 세번도 꼭있었다고 했습니다
둘째 아들인 우리 아버지도 미련하다고 수시로 담뱃통으로 매를맞고
목침으로 (나무로만든 벼개) 머리를 맞아서 꽤큰 흉터가 다섯군데나
있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때 아버지 머리를잡고 이리저리 돌리면서
그상처들을 여러번 세어봤었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입을조금 내미시면서 빙긋이 웃으시던 모습이
선하며 지금도 짠하답니다
큰아버지께서는 우리아버지보다 흉터가 배는 많았다고 했습니다
14살 나던해 봄에 할아버지는 너는 미련해서 공부를 못하니 이제 공부는
작파하고 (그만두고) 논일과 밭일이나 하라고해서 열살부터 4년동안이나
매를맞으면서 그무서운 공부를 하다가 공부를 그만 하라고하니 얼마나
좋은지 날라다닐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보다 여섯살 덜먹은 오동촌 작은아버지는 아주영리 하셔서
매를 한번도 안맞았다고 했습니다
작은 아버지께서는 그날 배운것을 공부가 끝난후에도 항상혼자 복습도하고
궁금한것을 물어도보니 할아버지 께서는 좋아하시면서
수시로 큰아버지한테는
" 이놈의 새끼야 또망에가서 (변소) 南鎬가싼 똥이나 줏어 퍼먹어라 "
라고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월홍리 막내 작은아버지는 막내라고 많이 봐주었다고 했습니다
공부하다가도 한나절이면 변소를 대여섯번씩가고 할아버지가 악쓰고
때릴려고하면 번개같이 도망가 버려서 매를 안맞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영리하여서 오동촌 작은 아버지와 둘이는 머리에 흉터가
하나도 없으셨답니다
큰어머니 이야기로는 퍽영리했다는 서당촌 고모인 큰딸한테는 공부를많이
가르쳐 주셨다고 들었다고 했습니다
둘째와 셋째딸은 아들들 공부때문에 제쳐 두었다고 하셨으며
유일하게 언제나 볼때마다 웃으면서 예뻐해 주시던 막내딸 한테는
하늘天 따地부터 소학 대학 명심보감 등등 세살때부터 시집갈때까지
이런저런 큰공부를 다가르쳤다고 했습니다
막내 고모가 공부하던덕에 큰아버지는 매를훨씬 덜맞았다고 했습니다
막내 고모는 시집갈때까지 춘향전 장화홍련전 홍길동전 등등 여러가지책을
수무권도 더썼다고 (필사본) 했습니다
한지에쓴 그책은 인쇄소에서 인쇄한것이나 다름없이 아주 잘쓴글씨 였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해마다 정월달에는 거의 한달동안은 막내 고모가쓴
그춘향전과 장화홍련전을 아주 큰소리로 읽으셨습니다
그책중 춘향전은 큰형님네 3째딸 봉숙이가 소성중학교에 갔다주었고
장화홍련전은 새내 이모님이 우리 어머니의 여러가지 유품과함께 어머니가
지팡이짚고 거너다니시든 냇가 다리위에서 불태워 버렸답니다
그때는 TV는 물론이고 라디오도 없던시절 이기에
그춘향전을 들으려고 글을 모르는 큰어머니와 수랑골아짐과 정모난댁
동천댁 석산댁 흥덕댁 광주꿀이모 새끼춘아짐 등 몇몇 분들은 책읽는
소리가나면 거의가다 우리집으로 오셨습니다
정월이라 가마니 짜는일 외에는 별로 할일도없고 그재미있는 춘향전을
들어보고 때되면 밥도 잘얻어 먹으니 좋았을것 같습니다
그런날은 집에온 사람들에게 언제나 점심부터 저녁까지 대접해 드렸답니다
큰어머니께서는 몇번이나
" 자네목청 소리보다 자네집양반 목청소리가 훨씬 더좋네이 "
하시면 어머니께서도 항상
" 예 그려라우 (예 그래요) 저이가 목청은 참 좋아라우 "
라고 동의를 하셨습니다
그칭송을 들으신 아버지께서는 신이 나셔갖고 더큰소리로 읽으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막내딸보다 석달먼저 태어난 손녀딸은 공부하는 사랑방옆에는
얼씬 거리지도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큰아들과 큰며느리가 키가컷기에 손녀딸은 막내딸보다 훨씬컷다고 합니다
동갑짜리인 어린것들이 마당에서 놀다가 싸워서 막내딸이 우는소리가나면
할아버지께서는 놋쇠 잿털이나 목침을 마당으로 집어던지며 막둥이가
왜 우냐아 하면서 큰소리로 악을쓰면 온식구가 모두들 아주 겁이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날에는 장술누나는 (성내면 장술로 시집갔움) 할아버지한테 혼나고
부억으로 잡혀와서 큰어머니한테 매를많이도 맞았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와 큰어머니는 아홉살 차이인데 평생 얼굴을 한번도 안붉히고
60몇년을 아주 잘지냈다고 합니다
우리 동내에서 1,5km 쯤떨어진 오동촌에 사시는 작은 어머니나
내장면 월홍리에 사시는 막내작은 어머니와는 나이 차이도 있지만
서로가 껄끄러워하며 1년에 한번정도 볼때도있고 그냥 지나기도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와는 수시로 큰어머니의 그고생했던 시집살이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흉을잘도 보았습니다
큰어머니는 우리어머니에게 내가 들은것만해도 열번도넘게
조선 천지에서 우리 시아버지같이 나쁜사람은 없을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장술아를 옆에 앉아서 구경만하게 했어도 공부를 배웠을 것인데 공부하는
사랑방 옆에는 얼씬 거리지도 못하게 하였다고 하시면서
" 낫놓고 기역자도 모른채 시집보낸것이 지금도 짠해서 죽것네이 "
하셨습니다
그 나쁜 DNA가 아버지 代와 우리들 代에까지도 흘렀기에 참으로 안타깝고
참으로 서글픈일로 생각됩니다
제가 해주오씨 학정공파 29代니 30代부터는 모두들 고창 흥덕출신 청도김씨
오삼순 누나네 김재경 매형이나 오해윤 누나네 종암 남양홍씨 홍봉표
매형같이 같이 형제간에 사랑하고 우애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이책을 읽어보는 30代 이하 후손들은 형제간과 사촌간에 꼭 우애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삼순 : 오동촌 3째누나 오해윤 : 큰집 2째누나 )
전두환 대통령시절인 82.1.1.부로 통행금지를 해제 한다고해서 전남북 해안가에
배치되어있는 전투경찰대의 각중대에서 절반씩을 서울로 파견하여 절도와 폭력을
예방히기 위해서 야간순찰을 시킨다고 했습니다
저는당시 전남 107 전경대 작전관을 맞고있었기에 81.12중순 서울 시경회의에
참석하고 서울에오면 기거할 동대문구 창신동 산비탈에있는 기동대 막사도
둘러보고 전철과 시내버스 번호와 노선도 확인하여 노트에 적었습니다
시간이 널널하기에 구경도할겸 창신동에서 충신동까지 약4km 정도를 걸었습니다
충신동에는 4촌간 이지만 친누나같은 인정많은 삼순이 누나가살고 있었습니다
누나집에 갔더니 모두들 아주 반가워하며 좋아 했습니다
그당시 아주 바쁜직책이고 요직인 서울시경 특수 수사대에 근무하던 매형께서는
부산 출장을 다녀왔다고 모처럼 집에서 저녁을 잡수고 계셨습니다
매형은 한달이면 집에서 아침밥은 10번정도 저녁밥은 1-2번밖에 못먹을 정도로
바쁘다고 하셨습니다
손님이 왔다고 80살이 넘으신 매형 어머님까지 모두 일어나서 반겨주시는데
매형께서는
" 어이 반가운 손님이 왔는데 미안혀 나는 우리상전 때문에 못일어나네이 "
하셨습니다
상전인 주환이는 매형 남동생의 아들입니다
큰아버지가 큰집에 놀러온 막돐지난 조카를 무릅에 앉혀놓고 조카가
좋아하는 반찬을 골라서 밥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 어이 이렇게 이쁘고 잘생긴놈을 어디서 본일있는가 우리 사무실이 서대문인데
내가 종로통 남대문 동대문을 다돌아 봤어도 우리 주환이같이 잘생긴놈은
한번도 못봤네이 "
하시면서 자기밥은 거의 못먹으면서 어린 조카한테 밥을 먹이고 계셨습니다
나는 그신선하고 존경스럽고 충격적인 광경을보고
우리 아버지나 큰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들
그리고 우리 형들이나 사촌형들 한테서는 볼수가 없었던 참으로 부러운모습
아름답고 훌륭한 모습이 한없이존경 스럽기만 했습니다
큰집 둘째사위인 종암누나네 홍봉표 매형께서는 가난하게 살면서도
처갓집동내 부안촌에 가뭄이 들어서 모가안자라서 모를 못심는것
같으면 자기동내 종암과 인근마을에서 모를구해서 아들들과함께
시오리길까지 (6km정도) 지게바작에 모를 짊어지고와서 심어주던
참으로 훌륭한 사위였습니다
서울 방학동으로 이사와서 살면서는 길눈이 어두운 해윤이 누나가
충신동에사는 사촌동생 삼순이 누나네집에 가보고 싶다고하면
방학동에서 시내버스를 몇번을 갈아타고 충신동 삼순이 누나집에
대려다 주었답니다
다섯밤자고 간다면 닷세후에 충신동으로 데리러오는 모범남편
이었답니다
그일을 일년이면 너댓번씩을 꼭 하셨드랍니다
처갓집 애경사에는 한번도 빠지는일이 없었기에 그매형과 누나가
돌아가셨을때는 우리3형제는 그분의 인품과 인정많음을 이야기
하면서 꼭함께 참석 하였습니다
고부면 종암에 살으시가 독일탄광을 거쳐서 미국에가서 살고있던
큰아들 홍윤상과 작은아들 홍일상이 서울 방학동에 집을사주어서
서울로 이사와서 살면서는 할일이 없으니 달리기를 하셨드랍니다
그래서 전국의 70세이상 노인들의 달리기 대회에서 1등은 못했지만
3등과 2등까지는 하셨드랍니다
70년초에는 우리집에 오셔서 우리 아버지의 허름한 사진을 가지고
가셔서 아주멋있는 당상관급 큰벼슬을하던 대감들이쓰던 관을쓴
멋진 사진으로 만들어 오셨드랍니다
우리 아버지는 무지하게 좋아하시면서 우리집에오는 여러사람들에게
계속하여 사진을자랑 하시면서 조카사위 홍서방을 칭찬 하셨다고합니다
처삼촌묘에 벌초하듯이란 말이있는데 우리 사촌매형인 홍봉표님
같은분이 또누가 있을까 궁금하네요
얼마후에 우리 어머니와 이야기중 삼순이 누나네 이야기를 하였더니
" 그김서방이 얌전허고 똑똑허다는 소리는 죽은 너그작은 아버지가
몇번이나 자랑해서 들었어도 그렇게 양반인줄은 몰랐다이
늬성들이랑 오가들이 모두다 그김서방한티 꼭배와야 (배워야) 쓰것다이
내가 전에도 이야기 안허디야
춘수리 우리 사촌동생 종선이네 성제간들봐라 얼마나 우애를 잘험서
서로 애끼면서 잘사는가 말이여
항골 늬큰뉘네 유씨들과
수꿀 늬큰성수네 나씨들이나
역전 늬작은성수네 안씨들
허는것 봐라 큰소리 한번이나 나디야 얼마나 양반들이냐
그런디
너그 오가것덜은 저밖에 모르는 머거지 (멍청이) 같은것들 이어야 "
그때 어머니 말씀이 아주 정답인것 같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