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10월22일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22일은 54회 전국마라톤 대회겸 조선일보 춘천마라톤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이곳 천안에서 춘천까지는 4시간 가량 걸리는 관계로 대회전날 청평에 있는 와이프의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천안에서 서울역, 다시 경춘선 열차를 타려 청량리역으로 향했습니다.
때가 때인지라 청량리역은 울긋불긋한 등산복차림의 등산객들이 열차 시간을 기다리느라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번잡하기가 이를 데가 없더군요.산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저로서는 그 무리에 끼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들때쯤 열차 시간이 다돼서 아쉬운 마음을 접고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청평역에서 하차해 플랫포옴을 빠져나오는데 한기가 느껴지는 것이 몸을 잔뜩 움츠리게 만들더군요. 청평에서 하루를 묵고 춘천까지는 서울에서 아침에 출발하는 분의 승용차를 얻어타고 가기로 돼 있어 이른 아침을 먹고 약속한 장소에서 합류해 춘천으로 향했습니다.
저녁에 기차를 타고 올때는 몰랐는데 경춘국도변 가을 풍경은 가히 아름다움 그 자체 였습니다. 옅은 안개에 휩싸인 산봉우리 봉봉은 형형색색 제 자태를 각기 뽐내고,굽이굽이 돌아쳐 유유히 흘러내리는 북한강변엔 모락모락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이곳이 선계인가? 하계인가?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요.
기차에 몸을 실어도 좋고,차를 몰고 드라이브도 좋고 이 가을이 다가기전 춘천으로 한번 떠나보지 않을까요? 9시30분쯤 집결지인 춘천공설운동자에 들어서자 경향각지에서 몰려든 마라톤 동호인들로 운동장은 들뜬 대회 분위기로 술렁이기 시작 했습니다.염광여상 고적대의 빵파레가 울려퍼지자 그 분위는 한껏 고조 되고 있었습니다.
16,085명의 참가자와 가족들을 생각하면 2만여명이 운집한 그야말로 국내 마라톤 대회로선 메머드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대회였습니다. 제가 처음 마라톤과 접하게 된 계기는 98년 김용준군의 권유가 계기가 되었습니다.사실 달리기라면 대입체력장 이후로 해본적이 없었고 산에 가끔다닌 다고 하지만 2~3분만 뛰어도 숨이 가빠서 제대로 뛸수 없었는데 마라톤이라니 난감하더군요.더더구나 풀코스를 신청한다는데 까마득 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98년도 춘천마라톤엔 10km구간만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참고로 국내 대부분의 마라톤 대회는 마스터스(비등록선수)부문에 풀(42.195)하프(21.0975)10km,5km구간을 치르고 있습니다. 처음 출전하는 대회인지라 겁도나고 준비도 못해 걱정이 많이 되더군요.실제로 10키로를 뛰고 나니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아랫도리는 후들거려 결승점을 밟고 나서는 한참이나 꼼짝 할수 가 없더군요.56분38초.10키로미터 첫출전 기록. 거친 숨을 돌리려 잠시 앉아 있는 듯 했는데 하프코스 주자가 벌써 들어오기 시작하고 숨돌릴 틈도 없이 2시간 30분대 마스터스 부문 참가자가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아이고 하느님!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그렇습니다.저한테는 하프코스나 풀코스주자는 하느님과 동기동창쯤으로 우러러보이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딱 이년이 흐른 지금,10키로3번 하프코스3번출전후 처음으로 하느님들과 동기동창(?) 대열에 같이 서있다니?
정각 11시가 되자 우렁찬 대포소리와 함께 출발신호가 떨어지고 트랙을 가득매운 5,420명의 풀코스 주자가 와! 하는 함성소리와 함께 42,195km의 기나긴 레이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참가자가 워낙 많아 출발 4~5분간은 걷다시피해서 공설운동장을 빠녀나와 본격적인 레이스가 시작되는 도로에 나가서는 순간 연도에 늘어선 수많은 춘천시민의 열렬한 환호와 박수소리에 뜨거운 힘을 뒤로 한채 2km부분에서 첫 경사로를 만나야 했다.
레이스 초반이라 힘도 넘치고 가뿐하게 언덕길을 오르자 내리막길의 시작. 애초에 용준이와 4시간 30분을 목표로 레이스를 펼치자고 했기 때문에 자칫 초반 내리막길에서의 오버페이스는 낙오의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내리막길을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하자 말로만 듣던 전설처럼 느껴지던 환상의 의암호 순환코스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 했습니다.영롱한 햇살에 비친 호수의 수면은 부서질듯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서서히 호수를 돌아 7.5km부근에 다다르자 호수를 감싸고 우뚝 서있는 삼악산 단풍물결이 파노라마처럼 다가오기 시작 하는데 달리는 것도 잠시 멈추고 정취에 흠뻑 빠져 들고 싶은 유혹이 나를 자극하더군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멀고 험난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달려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전 혼자 달리고 있었지만 이미 혼자가 아닙니다. 연도에 늘어선 수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박수가 있고 성원이 있는한,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사히 완주하기를 쏜꼽아 기원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한,레이스 도중 지친가운데에도 힘들어 하는 주자에게 힘내세요 하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는 동료 주자가 있는한 결코 혼자가 아닌 우리인것 입니다.
10km지점을 지나 하프지점까지는 무난하게 의도했던 페이스를 유지하며 통과했는데 그때 랩타임이 2시간8분여.용준이와 난 서로에게 대견한듯 이 페이스대로 가면 4시간 30분대엔 들어가겠지? 하고 눈길을 주고 받으며 부족한 수분과 영양(초코파이)를 섭취한 후에 후반 레이스에 들어갔습니다. 25km지점을 지나 30km를 향해 달려갈쯤 첫번째 고비길이 나타나기 시작 했습니다.
대부분의 마스터스 참가자들이 고통에 직면하게 되는 지점인데 의암호 코스는 공교롭게도 오르막길이 겹치고 있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엎친데 덮친격이라니....... 지금 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체력으로 달려왔다면 여기서부터는 진검승부.진정한 자기와의 싸움이 시작되는 고통의 순간이었다.
숨은 거칠어지고 다리는 이미 감각을 잃어 한발짝 내딛는 것 조차도 고통의 연속이었다.그러나 또 우리앞에 얼마나 인내와 고통이 필요한지 아직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다리를 끌다시피해서 30km지점을 간신히 통과하자 무감각이었던 다리가 약간 풀리는 듯해 다시 전진.그러나 이내 다리를 끌기 조차 힘들어지고 주저앉고 싶은 유혹이 끊임없이 나를 놔 주지 않기 시작했다.
순간 왜 내가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는거지? 포기 해버릴까?아니지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순 없지 하는 갈등이 끊임없이 내 머리를 뒤흔들어 놓았다. (어!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데 대학때 친구녀석한테 안부전화가 걸려왔습니다.죽지 않고 살아있냐고?)그 순간 준비 없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좀더 준비를 해왔더라면 연습을 좀더 열심히 해 왔더라면 이렇게 까지 고통스러워 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하면서 이를 다시 악물기 시작했습니다.그야말로 남은 레이스는 악이고 깡으로 버텨야만 되는 길이었습니다. 억지로 걷다 뛰다 시피 해서 소양2교를 지나 이제 마지막 고비 38km 지점을 통과할 쯤 이미 시간은 4시간 30분이 다돼가고 4km가 남았습니다.
예정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었고 마음은 조급 해지기 시작했습니다.제한시간 5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이미 체내에 축적된 에너지원은 이미 고갈돼 버린것 같고 그마저 남아 있던 악도 이젠 끝인가 생각할쯤 하늘은 노랗고 앞이 캄캄 해지기 시작했습니다.정말 여기 까지 왔는데 포기하고 회수차에 실려가야 하나?아니면 기어서라도 가야하나?
to be or not to be! 그래 저에겐 젖먹던 힘이 남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마지막 4km는 죽음의 레이스라 생각될 정도로 힘겹고 고통스런 구간이었습니다.40km지점을 지나고 시외버스터미널 앞을 지나는데 그때까지도 손을 흔들며 화이팅을 외쳐주는 시민들의 응원도 귀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하프지점 까지는 손을 들어 화답하곤 했는데 정말 팔을 어깨위로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남은 2km. 골인지점인 공설운동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어렴풋이 운동장이 눈에 들어오는데 가는 길이 왜 그렇게 먼지?
땅바닥에 붙어 버린듯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끌고 드디어 메인 스타디움 앞! 그러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고 환호 하는관중 속을 헤치고 마지막 남은 400m 트랙에 발을 디딛는 순간 안도의 마음과 함께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흐느적 흐느적 골인 지점을 통과한 시간이 5시간6분9초.5시간여의 기나긴 레이스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10km를 1시간7분에 완주하고 날 기다리고 있던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잔디밭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털석 주저앉은 잔디밭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마라톤을 한다고 했을때,더군다나 풀코스를 신청했다고 했을 때 주위의 반응들은 각양각색 이었다.
와 대단하다군!,뭐 그렇게 힘든걸 뭐 하러해 아랫것들이나 시키지(?)등등... 또 마라톤을 뭐 하러 하느냐는 물음을 자주 받게 된다. 산에 다니는 사람한테 왜 산에 다니냐고 물어보면 그 대답 또한 가지각각이다.건강을 위해서,자연과 호흡하기위해서,산이 거기 있으니까 등등 ... 나에게 마라톤을 왜 하느냐고 하면 피식 웃으면서 그냥한다고 할 경우가 있다.물어보는 어투에 그딴걸 왜 하느냐는의도가 보이는 사람한테는.....
그러나 정말 내가 마라톤에 심취하게 된 동기는 따로 있다. 거창하게 마라톤을 인생에 비유하곤 하는데 첫째는 건강이다.아직 우리 나이가 건강에 신경쓸만큼 나이가 든것도 아니지만 지금당장 거리에 나가 10분만 뛰어보자.자신의 체력 테스트겸.심각한 정도는 아니겠지만 다들 한창 때 같지 않음을 절감할 것이다.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고 설파한 유베날리스의 설파가 아니더라도 건강할 때 일에 대한 의욕도 삶에 대한 의욕도 치열해질 수가 있지 않을까요?
둘째는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기 까지 기울이는 노력입니다.이번처럼 풀코스를 뛰고 난 다음의 성취욕도 중요하겠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절제된 생활을 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도한 즐거움 그 자체 입니다.
세째는 좀 거창하지만 달리기를 통해 인생을 배우는 것입다.처음에 불가능할 것 같은 풀코스 완주였지만,처음부터 자신의 한계를 훌쩍 뛰어 넘어 뭔가를 이룰 순 없지만, 한 단계 한 단계 계단을 밟듯 과정을 거치고 나아간다면 인간의 능력도 노력에 의 해 얼마간의 향상이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네번째, 마라톤을 통해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풀코스를 완주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오늘 네가 풀코스에 완주했다고 해서 5km나10km를 뛴 사람들을 무시 하지마라. 그 사람들도 언젠가는 풀코스에 도전할 사람들이고 좋은 기록으로 뛸 잠재력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다만 우리가 조금 먼저 시작 했을 뿐이고 경험이 좀더 있을뿐이라고 항상 겸손하라는 그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새삼 사람에긴 능력이 생각보다 많다는 생각들을 해봅니다.그 능력들을 밖으로 끄집어 내어 현실화 시키는 노력이 중요하겠지만 말입니다. 마라톤에 혹시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아래 사이트에 가시면 많은 도움을 받으실수 있을겁니다. http://marathon.pe.kr 어젠 집에 돌아오니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간단히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우니 온몸이 쑤시고 천근만근 같았지만 마음만은 홀가분 하고 맑은 머리로 잠자리에 들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