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중구 전통문화 발굴 보전 사업을 위한 강연회
주 제: 서울에서의 중구의 위상
초청강사: 김일림 교수
(상명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강사약력▶
주요경력: 동국대학교 문학박사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전문위원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총무이사
서울문화사학회 운영이사
중랑향토사연구소 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저 서: 명동변천사 등 저서 20여 편
남산 바로 알리기 등
『한국의 향토문화자원』- 서울시편
일 시: 2006. 8. 25(금) 오후 2시
장 소: 중구 구민회관 소강당
주 최: 중구 토박이회
협 찬: 사)서울토박이 전통문화진흥회
만담가 토박이 장소팔 추모사업회
후 원: 중구청
서울에서의 중구의 위상- 으뜸 중구의 자랑
상명대학교 김일림
1. 중구의 행정중심
조선시대에 한성부 남부의 광통방, 회현방, 명례방, 태평방, 훈도방, 낙선방, 성명방과 서부의 양생방의 일부, 반석방의 일부지역이었다.
1943년 6월 10일에 구제가 실시됨에 따라 경성부에는 7개구가 설치되었는데, 중구를 비롯하여 종로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용산구, 영등포구가 출발하였다. 이때 중구는 서울중심의 으뜸이라는 가장 중심부에 있는 구로 의미 칭하게 되었다.
광복 후에 1945년 10월 16일 경성부를 서울시로 개칭하고, 이어 1970년 5월 18일에 명칭이 일치하지 않는 법정동과 동사무소의 이름을 일치시키는 작업을 하였고, 2006년 현재 중구는 행정동이 15개동이며, 인구는 13만 6천 585명, 세대는 5천 44세대로 총면적이 9.97㎢ 로 서울 25개 구 중에 가장 면적이 작지만 실질적인 도시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현재 중구는 서울의 25개구 가운데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청계천을 경계로 서울분지의 남쪽 반을 차지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청계천과 종로구, 남쪽으로는 남산의 정상과 응봉의 분수령을 따라서 용산구와 접해 있다. 동쪽은 신설동로타리에서 매봉산과 응봉을 잇는 난계로를 경계로 성동구와 이웃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만리동, 중림동과 서대문 로터리를 경계로 서대문구에 경계를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소공동과 명동 을지로는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고, 신당1-6동과 황학동 그리고 중림동은 거주인구가 많은 곳으로 크게 대별된다.
* 도성건조
봉건전제국가를 상징하는 궁실과 종묘ㆍ사직이 축조되면서 국가권위의 상징이자 수도방어의 필수조건인 도성의 영건이 요망되었다. 정도전이 백악ㆍ인왕산ㆍ남산ㆍ낙산에 올라 실측한 결과 사산(四山)을 연결한 총길이 59,500척이었다. 여기서 중구지역과 관련해 보면 4개의 산 가운데 남산을 중심으로 좌우능선으로 이어진 성곽이 중구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도성길이의 45% 이상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의 도성과 궁성도 태조 5년에 1월부터 7년 3월까지 약 2년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 숭례문(남대문) 건립
규모가 큰 흥인문은 태조 6년에, 숭례문은 태조 7년에 각각 완공되었으며 남소문은 후에 별도로 세워졌다. 숭례문은 서울지방을 도성의 안과 밖, 그리고 도성 안을 흐르는 청계천 수계와 용산 방향으로 흐르는 만초천(샛강) 수계를 나누는 언덕 위에 건립되었으며, 국보 제1호로 보존되고 있다.
<그림 1 - 서울의 경계변천도>
도성 성곽과 더불어 중구지역에는 도성 8문 가운데 4대문의 하나인 숭례문과 광희문ㆍ남소문ㆍ소덕문 등의 소문이 완성되었다. 이들 성문은 태조 5년(1396) 제1차 축성 때부터 도성과 더불어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성문은 특별한 기술을 요하는 공사였고 또한,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1차 축성 때는 완성되지 못하고 같은 해 실시한 제 2차 공사 때에 대체로 완성하고 성문의 명칭도 명명하였다. 숭례문은 도성 8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인데 그것은 문화재적 가치에 의한 것 이외에도 수도의 위치상으로 경복궁의 앞쪽이 되는 남쪽에 있어 수도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교통 상으로도 가장 중요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숭례(崇禮)라는 편액은 예절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림 2 - 서울성곽과 4대문 그리고 4소문도>
2. 중구의 지리학적 위상
1) 풍수지리적 입지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할 때 내사산으로 북악산(북) 낙타산(동), 인왕산(서), 목멱산(남)으로 성곽을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보았다. 따라서 풍수지리상에서 북한산은 진산으로 남산(목멱산)은 안산으로서 한양을 중심으로 보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보면 ‘목멱산은 곧 도성의 남산인데,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인경산: 밝은 산, 상서로운 산, 서울의 안산인 밝고, 양지바른 목멱산, 곧 남산이
고, 길이 길이 경사스런 일들을 끌어 들이라는 축원의 뜻
* 목멱산: 목밀산(木密山)은 한자음으로 밀자와 멱자가 같은 밝음이라서 목멱이 됨
며, 나무가 빽빽하게 무성한 산을 의미한다.
* 마뫼 : 문일평은 목멱을 마뫼하고 하는 순수한 남산의 고어이다.
* 종남산:
《한경지략》
‘목멱산.... 흔히 일컬어 남산이라고 하는데 마치 달리는 안장을 벗은 형상이고, 산마루에는 봉수대가 마련되어 있다. 남산의 서쪽 봉우리 중에서 바위가 깎아지른 듯한 곳을 누에머리, 곧, 잠두하고 한다. 여기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이 좋다.’
《동국여지비고》
‘목멱은 곧 서울의 남산이요, 일명 인경산이라고 하며, 도성이 지나간다. 인왕산 산맥이 나지막하게 남쪽으로 비스듬히 잇따라 뻗어 내려오다가 동쪽으로 불쑥 일어나는 것이 남산이 되었다.’라고 기록에 남아 있다.
이렇듯 중구의 중심인 남산의 절대적인 의미는 서울의 중구와 용산구의 두 구에 걸쳐있다. 이중에 중구에는 남대문로 5가, 신당동, 남창동, 남산동 2가, 회현동 1가, 예장동, 필동 2가, 장충동 2가 등이 속해 있다.
그러나 중구의 상징적인 중심인 남산은 과거 조선시대에는 수도의 남쪽의 안산이라는 평안함을 주는 의미의 산을 뜻하였고, 현재는 서울의 절대적인 의미에서 서울의 중심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5방향(5처)에서 오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는 산으로서 나라의 모든 중대사는 남산을 통하여 알게 되는 정보의 중심지이었으며, 현재는 서울타워가 들어서 있어서 서울을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수평, 수직적인 면에서 중요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중구이다.
따라서 중구는 상대적인 의미에서도 민족적인 의미에서도 성스러운 장소이며, 풍수 지리적으로도 상징적인 중심을 의미한다. 과거나 현재, 절대적이나 상대적이나, 어떤 측면에서도 남산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중구의 중심적인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서울의 중심의 있는 구이다.
2) 자연지리적 입지
중구의 지질은 남산의 산정부에서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호상흑운모편마암이 일부 분포하는 것 외에는 구의 전역이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형적으로는 남부의 산지와 북부의 저지로 대별 할 수 있다. 산지는 주로 구의 남부 남산지역에 해당되며, 북부의 저지는 남산에서부터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경사도 5°미만의 평탄한 지역으로 중구의 대부분의 시가지가 발달되어 온 터전이 되었다. 이러한 평탄한 지형은 하천에 의해 퇴적된 충적지형이 아니라 기반암이 침식된 침식평탄면으로 건설에 안전한 기반이 될 뿐 아니라 홍수나 산사태 등과 같은 자연재해를 방지하는 구실도 한다. 중구는 인근 구에 비해서 고도가 높으며 평지의 비율도 작아서 홍수, 범람 등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다.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남산은 중구의 주봉으로 응봉과 능선으로 이어져 용산구와의 경계가 되며 이들 두 산은 화강암 지층이 장기간에 걸친 침식작용에 의해 잔구로 남은 것이다. 또한 중구의 유일한 하천인 청계천은 서울 시내의 한복판을 흐르며 중구와 종로구의 경계를 흐르는 하천으로 개천이라고도 하였다. 청계천은 마장동까지 복개되었던 것이 최근 복원되어 다시 하천으로 거듭나고 있다.
3) 인문지리적 입지
중구지역은 자연적인 입지보다는 인문적 입지에 의하여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울성곽 안에 이웃해 있는 종로구 지역은 자연적 입지가 양호하여 궁궐ㆍ사직ㆍ종묘ㆍ관아, 그리고 양반들의 거주지로서 도성의 모든 인구를 수렴할 수는 없어서 점차적으로 중구지역이 주거지로 변모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노폭이 17.5m인 대로에는 경복궁에서 황토현(광화문 네거리)까지의 길, 동대문에서 경희궁에 이르는 길, 대광통교(종로 네거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길이 있었으며, 중구지역의 발전은 대광통교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오늘의 남대문로에 의해 조성되었다.
조선왕조는 도시계획을 하면서 종로 일대에 운종가(雲從街)라고 하는 시전을 주로 설치했지만 광통교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남대문로 주변에도 시전 행랑을 조성하였고, 청계천변의 광통방, 대평방, 훈도방에도 장시를 개설토록 하였다. 도로가 개설되어 물화의 교류가 용이하여서 점차적으로 주거지화 되어 가면서 많은 소비를 하는 인구가 집중하게 되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이 지역에는 상업인구가 밀집되는 상업지역으로 변모해 갔다. 따라서 중구지역은 지형적 여건뿐만 아니라 도성 안이라는 입지성격 때문에 1차산업인 농경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경제활동은 주로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가 되었다. 도심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가 무너지면서부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고 할 수 있다.
3. 중구의 위상학적 집결지
1) 경제의 중심지
한반도 경제침략 3대 본거지인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회사가 남대문로, 을지로에 위치했다는 것은 이 곳을 중심으로 서울의 금융지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남대문로에 조선은행을 위시한 몇몇 은행의 본점건물들이 입지해 가는 한편으로 이들 금융기관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대기업체와 백화점도 동시에 입지해 갔었다. 오늘날의 증권거래소의 전신인 경성주식현물취급시장이 1920년 명동에 개설되었고 현 한국 전력의 전신인 경성전기주식회사의 본사 사옥이 남대문로2가에 1927년 준공되었다. 현재는 신세계백화점이 된 三越(삼월) 경성지점이 1929~1930에 충무로1가 현 위치에 건립되었고 삼중백화점의 6층 건물이 1932~1933년에 충무로2가 24번지에 건립되었다. 또한 일제시대 서울시내 3대 임대 빌딩이었던 3개 건물 중 천대전빌딩이 1932년 남대문로2가 10번지에, 금천대회관의 5층 건물도 남대문로 4가에 건립되었다.
중구는 대한제국시대부터 상업지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곳이다. 조선말 개항장의 설정과 함께 1882년 서울에 시장이 형성 되었을 때 일본상인과 청국상인들은 각각 자국의 정치적 세력을 등에 업고 일본상인은 충무로 2가의 진고개 일대에, 청국상인은 수표교와 남대문일대에 그들의 상권을 형성해 나갔다. 처음에는 청상의 세력이 일상보다 강하여 대규모의 청상이 조선의 전통상가인 종로에까지 침투한 뒤에는 주한 청국관헌의 보호 속에 남대문시장으로 진출하였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남대문 일대의 상권이 일상에게로 넘어가 서울의 중심상가는 충무로와 남대문 일대의 일본인 상가, 소공동일대의 청국인 상가, 종로 일대의 한국인 상가로 나누어졌다. 이와 같이 상업활동이 진전됨에 따라 이 일대는 금융기관이 설치되어 업무지역을 형상함으로서 도심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따라서 광복 후에 서울로의 인구집중이 가속화되어 중구의 인구밀도는 더욱 조밀하여 졌으며, 1960년 이후부터 산업형 도시구조로 바뀌면서 새로운 상업시설과 각종 업무기관이 입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중구지역에는 중심업무시설인 사회, 문화, 산업, 금융, 언론 등의 각종 기관과 시장, 백화점, 호텔, 오락시설이 집중하였다.
중구는 서울의 관문인 서울역이 중구에 위치해 있으므로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의 서울의 중심부인 서울역을 거쳐야만 된다. 이렇듯 경부선이 개통되고 교통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지하철은 1호선부터 6호선이 중구를 통과하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퇴계로, 을지로, 청계로가 중구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다. 이렇듯 경제뿐만 아니라 교통망까지도 잘 정비되어 있는 경제, 교통, 문화, 언론, 출판, 인쇄 및 유통의 중추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다.
최근에는 남대문, 북창동, 명동이 관광특구로 지정, 국제적인 명소로 주간활동인구가 500여 만 명에 이르는 서울의 중추적인 지역이다.
2) 문화콘텐츠의 중심지
중구의 을지로와 충무로를 중심으로 인쇄업체가 밀집되어 있다. 작은 명함이나 서류용지, 광고지, 선전책자 등을 제작하고 있으며 전국 인쇄물의 70%를 담당하고 있으며, 중구에는 언론 및 출판사도 집중되어 있다.
과거 명동은 문화예술의 메카로 많은 문인과 예술인들의 터전이었던 다방과 예술 공연장과 소규모의 무대 등이 젊은이들을 모이게 한 장소로 유명하다. 이 뿐만 아니라 명동에는 패션문화의 중심지로서 1990년 중반에는 문화예술인의 거리, 유흥의 거리, 패션이 메카, 단골시위장소로 세월 따라 변화되어 왔지만 이젠 젊은 유행정보 발신지로 다시 만개하고 있다. 현재 명동에는 대형패션전문점이 확산되고 있다. 단일브랜드 판매에서 벗어나 다양한 브랜드를 갖추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원스톱쇼핑(One-Stop)이 특징이다. 따라서 과거부터 패션의 일번지로 양복, 양장, 양화점의 중심지였다. 이렇듯 한국유행의 첨단지역으로서 대중문화의 변화상을 명동을 통해서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북적되는 지역이다. 최근에는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구에는 문화재로는 국보 서울 숭례문(제 1호), 사적 서울성곽(광희문포함, 제 10호), 덕수궁(제 124호), 원구단(제 157호), 약현성당(제 252호), 구러시아 공사관(제 253호), 정동교회(제 256호), 명동성당(제 258호), 한국은행 본관(제 280호), 서울역사(제 284호), 중요무형문화재는 서도소리(이은관, 제 29호),유형문화재는 장충단비(제1호), 성제묘(제 7호), 수표교(제 18호), 숭정전(제 20호), 서울성공회성당(제 35호), 중명전(제 53호), 구제일은행 본점(제 71호), 기념물(시지정)은 손기정월계관수(제 5호), 남산봉수대지(제 14호)이고, 민속자료(시지정)는 와룡묘(제 5호), 관성묘(제 6호), 오위장 김춘영가옥(제 8호), 부마도위 박영효가옥(제 18호), 도편수 이승업가옥(제 20호), 해풍부원군 유택영제실(제 24호)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상황이며, 이외에도 상당히 많은 문화유산이 잔존하고 있으므로 민족적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구이다.
따라서 중구는 서울역을 중심으로 한 북창동과 숭례문일대와 명동과 충무로 일대, 그리고 남산의 상징적인 의미, 그리고 신당동 등을 중심으로 각각의 지역적 특징을 살려서 대중과 함께하는 살아있는 문화콘텐츠를 개발한다면 지금뿐만 아니라 향후에도 다양화된 문화 ․ 관광중심지로서 거듭나는 구가 될 것이다.
3) 미래의 중심지 - 천년의 타임캡술
중구 필동 2가 84-1번지 한국 한옥마을 내에는 1994년 11월 29일에 서울 1000년 타임캡슐을 매설하였다. 1994년에 서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생활물품, 풍습과 관련되는 것, 인물, 문화예술 등 당시를 상징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수장하였다. 이는 600년 기념행사로 향후 400년 후인 2394년에 개봉하기도 하여, 400년 전의 서울의 모습을 후손에게 재조명하려고 하는 의도에서 행해졌다.
이렇듯 미래에 과거의 모습을 현존하는 중구에서 찾기를 원하는 당시의 중심이기도 하는 미래지향적인 중심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중구의 지역적인 특징은 첫째, 경제 ․ 문화 ․ 언론 및 유통의 중추기능이 집중되어 있으며, 둘째는 주간 인구 뿐만 아니라 야간인구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역이다. 셋째는 기존주택지역과 현대식 고층빌딩이 혼재되어 있는 지역이며, 넷째는 신당동, 중림동의 거주밀집지역과 회현동, 충무로, 명동 등에 유입인구가 많은 지역으로 대별된다.
따라서 중구는 과거부터 경제의 중심지로서 이를 중심으로 언론, 출판, 문화, 예술 등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구로 거듭나기 위하여 지금도 지속적인 노력이 돋보이는 구이다.
즉, 중구는 서울의 상징이자 한국의 상징이므로 미래 행복의 열쇠가 있는 장소로 우리 구의 자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