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점: 전신 마비환자 한 달 간 침 맞고 걸을 수 있게 돼 중풍·관절염·디스크·간장병·심장병 치료에 능해 나쁜 피는 관절 등에 뭉쳐 있기 때문에 부항이 효과적
침술 공부에 미쳐 산 인생, 침구서 탐독만도 수백 번을 했다.
서울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대방동의 이만호(李萬鎬, 취재 당시 70세) 옹은 우리 나라 대표적 침법인 사암침술(舍岩鍼術)의 명인(名人)이다.
이 옹은 비록 의사면허는 없지만, 서른 살 무렵 터득한 독특한 침술로 40여 년 가까이 고질병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는 재야의 용한 의사로 소문이 나 있다. 허리 디스크로 수 년 간 고생한 사람이 몇 달 간 노인에게 침을 맞은 끝에 낫고,
무릎 관절염으로 다리가 퉁퉁 붓고 끊어낼 지경에 이른 사람이 다시 활동하게 되었다는 등 이 옹의 주변에는 수많은 구료담이 있었다.
이 옹이 침술하는 곳은 해군본부 후문 앞에 있었다. 이 옹은 이곳에서 20년 넘게 은둔(?)하며 침 하나로 난치병 환자를 고쳐 오고 있다. 2평 남짓한 허름한 방에는 아침 일찍부터 이 옹의 침을 맞기 위해 몰려온 환자로 가득 차 있고, 문 앞에도 몸이 마비되고, 뒤틀리고, 퉁퉁 부은 환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순번을 기다리고 있
었다. 이 옹은 그 가운데에서 열심히 환자들에게 침을 놓고 있었다.
"어디가 아프오." "어깨가 빠지게 쑤시고 아파요. 할아버지 5년 넘게 이러는데 나을 수 있을까요." "나헌테 낫겠다 싶으면 침 한 번 맞아 보고, 그렇지 않으면 이 병원 저 병원 다 다녀 보고 그때도 낫지 않으면 나헌테 와봐요.
" 노인은 어깨가 아파 애절해 하는 허름한 차림의 쉰 살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 물음에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간 여기저기 다녔어도 낫지 않으니 여기 왔지요. 할아버지 나을 수 있게 침 좀 잘 놔 주세요." "한 보름 간 열심히 다녀 봐요. 그러면 알 터이니. 그때 가서 낫지 않으면 돈 안 줘도 되고……."
이 옹은 조급해 하는 50대 아주머니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고는, 어깨와 팔에 5대의 침을 깊숙이 꽂아 놓았다. 그렇게 침을 찌른 채로 10분쯤 있었다. 50대 아주머니에게 침을 다 놓은 이 옹은 무릎이 시리고 조이는 것 마냥 당긴다는 정미순(취재 당시 56세 여자, 서울 신길동) 씨의 무릎에 침을 여러 군데 찌르더니 부항으로 피를 빨아 냈다.
부항기구에는 이내 검붉은 피가 가득 고였고, 10여분 만에 치료가 끝난 정씨는 아까와는 달리 "시원하다"며 다리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였다. 정씨는 전에도 허리와 어깨 등이 아파 이 옹의 침을 맞고 나은 경험이 있다고 들려주었다.
"피가 나올 데에선 피가 나오는 게 좋아요. 그건 좋은 피가 아녀요. 좋은 피는 돌아다니기 때문에 부항의 힘이 져요. 나쁜 피는 돌지 못허고 관절 같은 데 뭉쳐 있어요. 그러니 몸이 아파 올 수밖에……." 이 옹은 시원해 하는 정미순 씨를 바라보며 그 이유를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40살이 넘어 보이는 여자가 한마디 거들었다.
"지난 여름 어떤 아주머니가 무릎이 퉁퉁 부어 업혀 왔는데, 할아버지가 침을 놓고 부항을 뜨니 피가 쫙 빠지며 고무풍선처럼 납작 졸아 붙더라고요. 그 아주머니가 여기 보름쯤 다녔을까, 나중엔 다 나아서 혼자 걸어 나가는 걸 봤어요."
이 옹의 의술도구는 몇 개의 침과 부항기구 등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옹의 손을 거치면 현대의 의술장비로도 어쩔 수 없는 고질병을 고쳐 내는 보도(寶刀)가 되었다. 의술 도구는 비록 간단하지만, 이 옹의 침을 맞고 병이 나아가고 있다는 말은 그날 만난 여러 환자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서울 구로동에서 왔다는 이순복(취재 당시 62세 여자) 씨는 처음에는 걷지도 못하고 등이 당기고 팔도 움직이기 힘들었는데, 일주일째 매일 와 침을 맞은 결과 움직이기가 여간 수월찮다고 했다.
서울 개봉동에서 온 박성운(취재 당시 64세 남자) 씨는 왼쪽 팔을 반밖에 못 올리고 팔이 쑤시고 아렸는데, 3일째 침을 맞은 결과 통증이 약간 내리고 가슴 갑갑한 것이 없어졌다고 들려주었다.
또 용산에서 온 70세 가량의 할머니는 처음에는 등과 다리가 당기고 일어서기 힘들었는데, 4일 간격으로 한 달 간 침을 맞은 지금은 일어서고 걷기가 수월하다고 했다. 동네 환자를 데리고 온 서울 수유리에 사는 김인순(취재 당시 50세 여자) 씨는 수년째 고생한 허리 디스크를 이 옹에게 한 달 간 침을 맞곤 이제는 깨끗이 나았다고 말해 주었다.
한편 고아로 자랐다는 박성문(취재 당시32세 남자) 씨는 26세 때 혀가 굳어지고 몸이 마비돼 쓰러졌는데, 한 달 간 매일 와서 침을 맞은 결과 이제는 목발을 짚고 스스로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어눌하지만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부모도 없고 돈도 없는 자신을 이 옹이 무료로 돌봐주고 있다며 이 옹을 "참 고마운 할아버지"라고 떠듬거리며 말하였다.
이 옹이 여러 난치병을 치료하며 쓰는 침법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침법인 사암침법(舍岩針法)이다. 그는 우리 나라와 중국의 여러 침법들을 다 환자 치료에 이용해 보았지만, 사암침법이 효과도 제일 좋고 부작용도 적다고 말한다.
사암침법은 4백 년 전 사암도인(舍岩道人)이 득도(得道)를 하여 밝힌 침구비결(針灸秘訣)이다. 사암도인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사명당의 수제자로, 석굴 속에서 득도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사명당이라는 해석도 있는 등 신비의 인물로 꼽히고 있다. 사암침법의 요체는 인체의 장부를 금·목·수·화·토 오행(五行)으로 나누어, 오행의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원리에 따라 인체의 균형을 찾아 주는 것이다.
즉 비장 허(虛)해서 온 병은 비장이 토장부(土臟腑)이므로 화생토 (火生土)의 원리에 따라 화경(火經=心臟經)의 화혈(火穴)을 보(補)해 주고, 토(土)는 목(木)에 의해 제압되기 때문에 목경(木經=肝臟經)의 목혈(木穴)을 사(瀉)해 주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를 풍·습·한·조·서·화의 육기(六氣) 에 따른 병의 원인과 결부시켜 사암가(舍岩歌) 1백2가지를 지었다.
이 옹은 자신으로서는 이미 예전의 도인(道人)들이 터득하여 책에 기록해 놓은 것 이상으로 침법을 더 깨친게 없다고 말한다. 다만 연륜이 쌓이다 보니 환자의 상태와 병의 원인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은 생겼다고 한다.
"침술은 경험이 많아야 혀요. 진단이 중요헌디 나는 진단을 맥보다는 성별·연령·문진(問診)·찰진(察診)· 환부를 만져 보는 방법으로 혀요. 환자를 많이 다루고 오래 허다 보니 환자를 척 보면 병 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게 내 특기라면 특기라 헐 수 있어요.
똑같은 병이라도 저리고 아픈 게 있고, 시큰거리고 아픈 게 있고, 열나고 아픈 게 있고, 냉허고 아픈 게 있는디, 이것을 잘 진단하여 해당되는 곳을 짚어 놔야 병이 제대로 나을 수 있어요."
이 옹은 침을 놓을 때 보통 오른쪽에 통증이 있으면 왼쪽에 침을 놓고, 왼쪽에 통증이 있으면 오른쪽에 침을 놓았다. 이것은 아픈 쪽에 침을 놓으면 재발의 우려가 있고 더욱 아프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침 놓는 자리가 몸통일 때는 특히 조심해야 하고, 가급적 삼가야 한다고 말한다. 5장 6부에 직접 관여하는 혈에 침을 놓으면, 몇 시간 만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 옹은 침을 2~3cm가량 되게 깊이 찌르는데, 요즘 대개 살갗만 살짝 찌르는 침법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렇게 깊이 찌르면 환자의 기력이 달리지 않느냐고 물으니, 사암침법을 잘 보면 놓으라는 혈자리 중 대개 3개는 보(補)하고 2개는 사(瀉)하는 것이라 큰 문제는 없다고 말한다.
다만 침 맞을 때 금기 사항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닭고기·돼지고기·밀가루 음식·부부관계·술등이라고 한다. 또한 피로하거나 수면이 모자라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침술로 그가 잘 고치는 병은 중풍·신경통·관절염·디스크·간장병·심장병 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병도 고질화될 대로 고질화된 상태로 오기 때문에 여간 애 먹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 오는 환자는 대개 다른 데서 못 고치고 병을 4~5년 묵혀서 와요. 빨리 오면 3~4일 만에도 고칠수 있으나, 병뿌렁이가 깊으면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어요. 삐고 체헌 건 침 한 방이면 그 자리에서 금방 낫고, 협심증도 보름 정도면 완치된다고 보고, 황달 같은 것도 걱정 안 혀요.
나도 간디스토마 걸린 적이 있는디, 자침(自針)혀서 고쳤어요. 디스크·중풍·신경통도 많이 나아서 가는디, 제일 힘든 게 고혈압이예요. 당뇨병도 합병증이 온 단계면 잘 안 듣고, 다만 침으로 병이 더 못 가게 잡고 있을 뿐이에요."
이 옹의 고향은 전북 군산이다. 그가 침을 배우기 시작한 건 1941년 열여덟 살 무렵이다. 그는 집안의 외동아들로 소학교 3학년에 다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퇴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한창이던 때 일본의 징용을 피해 만주로 건너가 신문 보급소에서 일했다.
그런데 평소 몸이 자주 아팠던 그는, 아무도 돌봐 주지않는 객지에서 자신의 몸은 자신이 돌봐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인근의 침술학원에 나가 틈틈이 침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복 후 국내에 들어와 닥치는 대로 침구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에게 침술을 깨치게 한 게 사암침술 책이었다. 그가 사암침법을 터득하기 위해 책을 읽은 횟수는 수백 번에 이르고, 베껴 놓은 공책이 지금도 그의 집에 가득하였다.
침술의 원리를 터득하기 위해 노력하던 30~40대 무렵을 그는 침술에 미쳐 지내던 시기였다고 말한다. 침술에 미친 그는 쉰 살이 돼서야 결혼을 했고, 일흔 살이 된 이제사 침술의 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이나마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침술로 환자를 고쳐 주기 시작한 건 6·25전쟁이 끝난 직후이다. 당시 그는 고물상 총무로 일하고 있었는데, 고물 장수들이 근육 타박통이다 신경통이다 관절염이다 소화불량이다 하여 잔병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그때가지 자신이 알고 있는 침술을 동원하여 그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나중에는 점차 침술이 용하다는 소문이나 그는 본의 아니게 '동네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는 침 놓는 장소가 따로 없고 환자가 오면 마당에서도 침을 놓고 길을 가다가도 침을 놓았다.
그러다 점차 환자가 밀려들어 그는 고물상 일보다는 침 놓는 일이 많아졌고, 결국은 고물상을 그만두고 침 놓는 일에만 매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40년 가까운 의술인생 동안 손 봐준 고질병 환자는 수만 명에 이른다. 그는 이 과정에서 무면허 의료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5차례나 경찰서에 끌려가야 했고, 침통과 그가 고쳐 준 환자의 임상기록들을 빼앗기기도했다.
그러나 찾아오는 환자를 막을 수 없어 그는 벌을 각오하고라도 그들을 고쳐 주고 있다.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차라리 몰랐으면 그럴 수도 있었으나, 침을 몇 대 놓으면 나을 수 있는 것 뻔히 알면서 고통 속에 신음하며 찾아온 환자를 차마 되돌려 보낼 수 없었다고 한다. 최근에도 그는 면허 없이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는 이유로 즉심처분을 받고 1백만 원의 벌금 통지서를 받았다.
이 옹을 옆에서 지켜 본 결과 그는 탐욕이 나서 침술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질병 환자를 손봐 주고 이 옹이 받는 돈은 담뱃값이나 하라고 환자들이 놓고 가는 삼사천 원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받지도 않는다.
그나마 그 돈이 이 옹의 생활비에 보탬이 됐을지는 모르지만, 이 옹이 환자와 시달리며 치르는 대가는 그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의료법 위반이라며 벌금을 내고, 짓궂은 사람들의 협박을 받은 등의 수모를 생각한다면, 이 옹의 침술대가는 더욱 보잘 것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옹이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아픈 사람을 돌보고 있었던 건 자신의 조그만 능력이라도 병고로 신음하는 사람에게 도 움이 되길 바라는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아침 8시에 시작하여 정오에 진료(?)를 마친 이 옹은 이제 쉬어야겠다며 주섬주섬 침통을 챙겨 들고 자신의 보금자리인 14평 임대아파트로 총총히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