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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다비에서 생긴 일”에서 못다한 얘기들이 있어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1977년의 아부다비는 참 나에게는 이상한 곳이었고 색다른 경험이었다. Summer of ’77 이라고나 할까?
(이보다 훨씬 후인 1984년 초부터 1986년까지 약 3년간 있었던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의 일들은 그 당시 누구나 다 가는 사우디였으므로 그리 소개할만한 큰 사건이나 남들과 다른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다고 여겨지는 가운데, 1977년 나의 첫번째 해외근무지였던 UAE Abu Dhabi에선 많은 일들이 생겼었다.)
취리히 행 대한항공을 타고 방콕에서 잠시 쉰 후 바레인공항에 내렸을 때였다. 아부다비로 가려면 이곳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므로 Transit Lobby에서 Transfer 보딩패스를 받으려 6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그곳 Duty Free Shop에서 신문을 하나 샀다. 영국의 신문인 The Times였다.
윤 정희와
그 1면에 윤 정희가 아기를 안고
기사는 “한국의 박 대통령의 연인이었던 윤 정희와 그녀의 남편인 피아니스트
나는 순진해서 그때까지만 해도 윤 정희와 박 대통령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잘 몰랐었으며 소문을 듣기는 했어도 그리 크게 믿질 않았었다. 그런데 해외의 신문기사는 그런 얘기를 기정사실화하고 큰 글씨로 인쇄하고 있었으니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나는 그 신문을 오랫동안 보관했었는데 어느 날 없어지고 말았다.
김치, 고추장, 된장 없이 2달
먼저 도착해 있던 상무가 얻어 놓은 아파트로 들어가 선발대 5명이 살기 시작했다. 아파트에서 New Market (New Suk) 거리에 있는 사무실까지는 택시로 약 10분 거리여서 멀진 않았다. 임시 사무실로서 Joint Venture社인 Cordoba Development의 본사 사무실을 썼는데 시설은 좋았다.
현장을 Open하기까지 세 달 반 동안을 하루 세 끼를 해 먹으며 출퇴근을 했는데,
- 아침은 미국식 아침 식사로 내가 도맡아서 계란 두 개씩, Beef Bacon(돼지고기는 없으므로) 두 쪽, 토스트, 그리고 오렌지 주스(가루를 물에 타서 먹는)에다 Corn Flakes와 밀크 등을 순식간에 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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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하루 세 끼를 다 자취로 하여 해 먹고 설걷이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세탁기가 없었음) 다림질도 하면서 살았는데, 가장 절실한 것이 김치요, 고추장이며, 된장이었다. 동아건설 방파제현장에 가서 구걸을 하면 좀 얻어올 수는 있겠지만 자존심들 때문에 그러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총무부장이 아부다비에 한국간호원들이 진출해 있는데 걔네 들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 말에 다 들 김치보다는 그 간호원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었다.
결국 Corniche(코르니쉬) 해변도로 끝자락에 있는 병원을 찾아가 한 간호원을 만나게 되고 그녀가 가르쳐 준 대로 찾아가 보니 그저 현지인이 운영하는 보통의 작은 동네식품가게였는데 근처에 일본인도 살고 있었고 또 그러다 보니 한국산 된장과 고추장도 몇 개씩 놓고 팔고 있었다. 그걸 사다가 그날 저녁은 된장에 배추를 넣고 끓인 배추 국에 밥을 말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그것이 아부다비 도착 후 2달쯤 되던 날이었다. 그러나 3달쯤 되던 때에 도착한 선발대 현장일꾼들과 요리사가 오기 전 까지는 김치를 먹지 못했다.
이 후 간호원들과 만나기도 하고 재미있는(?) 시간도 가졌음은 물론이다. (다 설명하기엔 지면이 모자람.)
이국 땅 바레인
이 시절에 바레인은 걸프 연안국들의 한 가운데 있어서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현대건설이 항만공사를 하느라 진출해 있어서 한국인에 대한 대접이 또한 괜찮기도 했다. 아랍토후국(UAE)의 수도인 아부다비엔 대한민국 대사관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한 달에 두 번씩 바레인의 대사관에 가서 월초에는 노무 관에게 월말에는 건설 관에게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러니 Gulf Air의 보잉737을 무수히 타게 됐었는데 그 때문에 비행기가 지겨워졌었다.
바레인공항에 들러 아부다비로 온 후 처음 바레인에 입국을 위해 출장을 간 날 3일 유효의 임시입국비자를 받으려고 공항의 입국심사대에 제출하고 대기의자에 앉아 있는데, 해외여행을 처음 한 듯한 일단의 한국인들이 우르르 심사 대에 몰려가서 안 되는 영어로 뭔가를 질문하고 있었는데 그 아랍복장에 벙거지를 쓴 바레인 이민국직원이 유창한 한국말로 “거, 앉아서 좀 기다리세요!” 라고 큰 소리로 명령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 한국인들이 움찔하면서 우르르 제자리를 찾아 앉는 것이었다. 그 광경이 어찌나 우습던지 잊혀지질 않는다.
현대건설이 바레인에 진출하고 한진 그룹이 바레인 공항 하역을 맡으면서 한국어가 이곳의 공용어가 되다시피 된 것이었다.
공항을 나가 택시를 타고 한국대사관을 가자고 했더니 택시 운전사가 “O.K.” 하면서 날 데려다 준 데는 북한대사관이었다. 내가 “꾸리아 알 잔누비야(South Korea)”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냥 Korean Embassy라고 한 게 잘못이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바레인 시내를 두리번거리는데 Chinese Restaurant이 하나 있어 그리로 들어갔다. 메뉴를 보니 짜장면은 없고 알 수 없는 요리들이 잔뜩 써 있었는데, 그 중 ‘안전’하게 Fish 어쩌구 라고 써있는 음식을 시켰다. 한 30분을 기다리니 큰 타원형 접시에 퉁퉁하게 생긴 커다란 생선 한 마리가 세워진 채로 삶아져서 눈을 똑바로 뜨고 나왔는데 한 12인분은 되는 크기였다. 아마 그 중국집 종업원들이 속으로 웃었을 것이다. 결국 그 생선의 옆구리 한 쪽 구석을 조금 먹고는 값을 치르고 나왔다. 그 이후로 바레인에 가면 Wimpy 햄버거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바레인 거리의 어린이들은 나를 보면 한국말로 “안뇽하세요?”라고 인사들을 했다. 현대건설의 영향이었다.
박 대통령 하사품
그 어느 날이었다.
아파트로 자그마한 소포들이 도착했는데, 내 앞으로도 한 개가 왔다. 발신인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뜯어 보니, 마늘장아찌 통조림 한 개, 깻잎 통조림 한 개였다.
아파트 주소를 청와대에서 어찌 알았는지 정확하게도 왔다. 아마 본사를 통해 알 수 있었으리라.
김치도 없이 겨우 고추장으로 찌개를 끓여 먹던 시기라서 그 깻잎과 마늘장아찌를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대통령 하사품이라는 데서 감격을 했다.
며칠 후 간호원들을 만나서 물어보니 걔들도 개개인이 모두 받았다는 것이었고 그 당시 아부다비에 개인적으로 진출(?)하여 술집(술이 금지된 이 나라에도 외국인 전용 Bar가 있었는데 한국이나 일본출신 여종업원들이 바텐더 등을 하면서 2차로 나가기도 했다.)에서 일하던 한국여인들에게 까지 정확히 배달됐다는 것이었다. 그 한국여인들은 한국의 자기 가족들도 주소를 모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고 소포를 보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그들과 절친했던 간호원의 말이었다.
며칠 후 바레인의 한국대사관에 가서 물어보니 박 대통령이 중동에 나가 있는 모든 한국인 근로자에게 추석선물로 배달되도록 하라는 특별지시가 있어서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받도록 했다는 것이다. 모두 개인적인 소포로. 당시 중앙정보부의 정보력을 실감케 했다.
Sharjah로 가는 길
아부다비에서 북동쪽으로 약 130km 떨어진 곳 두바이를 좀 벗어난 곳에 Emirate중 하나인 샤르쟈(Sharjah)가 있는데 그곳에서 1977년 9월 군시설 현장설명이 있었다.
아직도 뜨거운 이 때 얼마전에 산 Oldsmobile 스테이션 웨건을 타고 무면허에 교대운전을 하며 고속도로로 나갔다. 그러나 길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아주 심한 아지랑이 현상이 일어나 고속도로 앞뒤로 약 2km지점에서 길이 끊겨 있는 듯이 보였고 양 옆의 사막은 물바다의 모습에 약간 높은 모래언덕만이 섬처럼 보이는 광경을 경험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바다요 섬이었다.
멀리 앞에 가던 차가 왼쪽으로 휘어져 갔는데 그곳에 도달해 보니 고속도로는 오른쪽으로 휘어 있었다. 사막의 신기루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너무 뜨거웠던 아부다비의 여름
겨울엔 그래도 좀 선선하기도 했지만 11월까지의 아부다비는 맹렬한 여름이었다. 한여름의 기온은 섭씨 43~45도를 웃돌고 습도는 걸프해안의 영향으로 98%를 웃돌았다. 98%의 습도가 어떤 것이냐 하면, 나는 진바지를 즐겨 입어서 매일 빨아서 다려 입었는데 밖에 나가자 마자 뜨거운 물속과 같은 습도속에 바지가 젖어서 다리에 붙은 채로 휘감겼다. 안경 쓴 사람들은 밖에선 벗어야 했다. 유리에 허옇게 안개가 껴서 안경을 끼나 마나 하게 됐으니까.
샤워시 수돗물은 옥상의 물탱크가 뜨거워져서 뜨거운 물이 쏟아지고 물 성분이 어떻게 된 것인지 비누는 잘 풀리지도 않는 가운데 그럭저럭 그 현실속에 적응하는 수 밖에 없었다.
The King
록큰롤의 제왕이었던 Elvis Presley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내가 Abu Dhabi 에 도착한지 2주정도 되던 날이었다. 그는 The King이었다. 그의 노래가 그곳의 서방계 FM방송에서도 몇주일 동안 계속 흘러 나왔다.
그러나 곧 그를 잊고 그 해 개봉된 Star Wars가 아부다비에 들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절실했던 영어 공부
한국에서 팝쏭을 부르고 AFKN TV를 즐겨 보며 카투사시절 유창한 미국식 욕지거리를 배웠고 딴에는 영어 좀 한다고 깝죽대면서 아부다비에 왔지만, 실제 해외공사 업무에서 그런 영어 갖고는 어림도 없었다.
우선 엊그제까지 대한주택공사 설계과에서 한글로 된 설계도면을 그리다 왔으니, 영어로 된 건설용어에 익숙할 리가 없었다. 터 파기가 영어로 뭔지도 생각이 안 났으며 복잡한 기술용어들을 외운 것도 아니어서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한국에서 올 때, Harris – Dictionary of Architecture & Construction, Graphic Standards 6th Edition 등의 해적판 책들을 가져 왔고 서한문을 위해 청계천 헌 책방에서 샀던 시사영어사의 1969년도 발행 ‘상업무역 실무영어대전’을 가져 왔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매일같이 있는 Joint Venture사 직원들과의 회의, 감독관과의 회의, 발주처와의 회의등이었다.
기술자로서 영어를 할 수 있는 자는 나 혼자였기 때문에 공사에 관한 거의 모든 회의를 새파란 27세의 총각이었던 경험 없는 내가 감당해야 했다. 상대방 직원들은 모두가 팔레스타인 사람들로서 테러나 하는 줄 알았었는데 영어는 영국인보다 더 유창하게들 했고 발주처(아부다비 정부)의 아랍인 관리도 영어가 미국사람과 똑같았다. 그들의 유창한 영어에 약이 올라 더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다. 따라서 그 다음날 아침의 회의 주제를 가지고 그 전날 밤 아파트에서 예상되는 모든 질문과 대답들을 영작을 해 보고 그 중에 막히는 단어가 없도록 한영사전 영한사전 건설용어사전등을 총 망라하여 이런 경우 저런 경우의 대답과 질문에 대한 씨나리오를 연습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때는 밤을 꼬박 새우기까지 했다. 그랬어도 처음의 약 한 달은 어렵기 짝이 없었다. 내 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회의에 들어간 영어 못하는 분의 통역까지 감당을 했으므로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당시의 모든 통신은 Telex가 사용되었으므로 이의 사용법도 배워야 했다. 한국본사와 통신하는데 죠인트벤쳐사 직원이 보면 안되므로 직접 오퍼레이션을 하느라 구멍 뚫린 Perforator Tape만 봐도 읽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더 있었다. 매일같이 10여건의 문서를 주고 받게 되고 기능공 송출과 비자문제 면허문제 보험 등등으로 관공서에도 많은 문서를 넣게 됐는데, 타이피스트로 고용한 인도인 알리(Ali)라는 직원(남자로서 봄베이대학원을 나왔음)은 내가 작성한 Letter를 보고는 “아니, Mr. Lee, 당신이 한국에서 대학을 나왔다는데 영어가 이게 뭐요?” 라면서 빨간 펜으로 찌익 긋고는 멋대로 고치는데 고친 걸 보면 그럴 듯 했고 문장이 황홀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카투사시절 나도 미군헌병사령부에서 진술서 번역 등을 했고 영문행정도 제법 했었으므로 자존심이 상한 게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알리의 가르침으로 많은 걸 배우게 됐다. 그 알리에겐 다달이 내가 죠니워커 한 병씩을 사다 바쳤다. (아부다비에선 일정직위이상의 외국인 직원들은 한달에 400 Dirham 어치의 술을 살 수 있는 큐폰을 발급받았었다.)
이 당시 아부다비에서 6개월 동안 공부한 영어는 내가 중학 1년부터 대학 4년까지 공부했던 영어공부의 몇 배를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미국에 10년째 살면서도 아직도 영어는 나에겐 쉽지만은 않다.
그 외
많은 에피소드와 한국과 아부다비의 여인들에 얽힌 사연들도 많았지만 나머지는 만나서 얘기해 주겠다.
주절 주절 긴 내용을 읽어 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바로 아래 사진 왼쪽으로부터 경리 이 부장, 나, 박 동선씨 회사인 Eastern Enterprise의 유 이사, Cordoba 직원 , 내가 데리고 썼던 제도사 모하멧드 (1977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파티를 아파트에서 양주와 케잌 그리고 과자류로 했다.)
저 밑의 사진은 아부다비시절 수주상담차 사우디출장시 구 리야드공항에서 찍은 것.
08_-_all_time_high_(from_octopussy)_-_james_bond_[soundtrack]r.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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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84년~1986년이면 36~38세쯤이었을 터인데... 돈주고도 살수 없는 값진 경험을 하였구나! 좋은 글 잘 보고간다. 다음에는 "미국에서 겪은일" 을 기대하며... 아름답고 멋진 노후를 보내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1984~1986년은 그 훨씬 후인 사우디아라비아 현장에 있을 때고, 여기의 이 글은 1977년 아부다비에 있을 때를 쓴 것이다. 27살 때였지.
어쩐지 사진에 보이는 모습이 히피스타일의 머리에 20 대 청년처럼 보인다고 생각했었지... 후편이라고 하길래...
경우야 ! 이것도 다 기억이냐 아니면 메모에서 나온거냐 ? 연도,달까지 제시하는 뽐세가 얼마후 네 자서전 발간에 대한 준비 아니냐? 재미있어 더 깊은 얘기 나올까 싶어 따라가다보니 결론이,숨겨진 뒷얘기는 만나서 얘기 하겠다 ! 동기전체 만난지도 꽤 된것같은데 한번 모여야겠다.최은호가 뉴욕동문회장 끝나기전에 귓뜸해 줘야지 경우야 빼지마라! 부부동반은 아닐테니!!
원래 일기를 잘 안 써서 잊어버리기 전에 이런 곳을 빌려서 기록을 남기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하여 써 본 것이다. 이것들이 좀 특별해서 기억을 하는 것이지 내가 기억력이 좋은 것은 아니다, 종구야. 나머지 뒷얘기들은 만나서 얘기 해 줄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