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이후락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이후락씨 조부모님 묘소다
일중 김충현 書라는 글귀가 보인다
아 ~~~ 일중선생의 저 뛰어난 비석문을 여기서 대하다니 !!!!
가슴이 두방망이 울렁거렸다
* 주 :
일중 김충현 (一中 金忠顯) 1921~2006.11.19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로 추대되었고,
1958년 동방연서회 이사장을 역임. 국전의 운영위원과 심사위원,
문교부 검인정 교과서 편찬위원.
1981년 회갑을 맞아 비문 등 모두 200여 점이 수록된 서집을 출간.
건좌다
박정희 시절에 나는 새도 떨어 트린다는 비서실장으로 계실때
국내 최고의 지사를 모셔와서 조부묘소를 이장한 곳이다
중산골
술을 아무리 먹어도 취하지 않는 중산골 계곡
아무도 없는 원시림 속
시원타 ㅎㅎㅎ
아예 풍덩 해버렸다
휴대폰으로 시를 한수 적고 있는 토민
나무꾼 ㅎㅎㅎ
선녀는 어디 갔노
많이 본 얼굴인데 누구시지요 ? ㅎㅎㅎ
토민 시
1.청태 낀 반석에는 학이 셋이 을렀다 심신을 풀어가며 열난 몸 식혀가자 청아한 그 물소리에 산절로 수절로라
에라 모리것다고 옷을 훌훌 벗어 버리네요 ^^*
선녀가 훔치가버리몬 우짤라꼬 ㅎㅎㅎ
고기를 잡는 포즈
물속에 항공모함만큼 큰 잉어도 댕기네요 ㅎㅎㅎ
휴대폰 메모지에 시를 적는데 여념이 없는 토민
휴대폰에 시를 적는다 !!!!!
참 기발한 생각이지 않는가
시어란 현장감이 있어야하고
번개처럼 스쳐 지나갈때 잡지 않으면
영원히 놓쳐 버리기 때문이다
휴대폰으로 애인에게 문자하나고 했드니
시한수 적고 있다고 하네요
한시간이지났을까 두시간이 지났을까
완죤히 삼매경에 들어가 버렸네요
나는 어름같은 계곡물에 취하고
토민이는 녹음속 시에 취하고
아다선은 웅촌탁배기 뻑뻑한 한잔술에 취했네
아다선도 드디어 첨벙 뛰어 들었네요
* 주석 : 화수 미제
산속에서 독촌지 뭔지 나물인지 뜯어서 술안주 했답니다
내일 아침 해를 볼란동 말란동 ㅎㅎㅎㅎ
간산을 마치니 저녁 8시
웅촌 추어탕집에서 저녁 식사는 추어탕
반주로 소주한잔 걸치고 있는데
위 사진 왼쪽에 서있는 이 회장을 만났다
'2008 대한민국 신뢰받는 CEO 대상'에서 제조혁신 부문 대상을 수상하신 분이다
우리 식사도 끝내기 전에 언제 식사와 소주값을 계산해 버렸는지 몰랏다
계산할려니 주인말이 벌써 계산이 끝났다고 했다 ...
기사랑 두분만 와서
내가 가볍게 추어탕 두그릇 같이 계산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어려운 경제에도 이천억불 수출을 하여 한국경제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귀한 분이시다
내가 계산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ㅋㅋㅋ
미안시러웠다 ㅎㅎㅎ
64. 화수미제(火水未濟)
원문 火在水上(화재수상)이 未濟(미제)이니 君子는 以로서 愼辯物(신변물)하여 居方(거방) 하였다.
풀이 불이 물위에 있는 상태. 군자는 이 괘상을 거울삼아 사물을 분별하여 각기 있어야 할 자리에 배치하였다.
해설 未濟(미제)는 발전을 상징한다. 발전을 상징하고 있으나 완전한 발전이 아니라 미완의 발전인 것이다. 현재 진행형이라고나 할까......맨 마지막 괘이다 . 기가 세어 진행하면 건 乾이된다
선생은 1943년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경동중학교와 대전고등학교에 재직 하였으며 1957년에는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를 선생은 반세기 넘게 연구한 국.한문 각 체의 주옥같은 필적을 수 없이 발표하고 나아가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으며, 선생은 일찍이 일제 암흑기 속에서도 우리 글씨의 근원을 찾아 현대감각에 맞게 서법(書法)을 다듬었고 2) 문학세계 선생의 한문 호는 一中, 한글 호는 찬내, 딱 한번 “한계(寒溪)라는 한문 호를 쓴 일도 있으니 이는 선생은 말을 절제하시고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나무처럼 과묵하시다. 선생의 서예의 아름다움은 예술가의 천품에서 서예는 구도자의 예술이다. 구도의 경지에 따라 선생의 예술 모습이 드러난다. 선생은 이미 10대에 정인보 선생이 쓰신 책 안에는 서예인들에게 주는 노대가의 끊임없는 조언이 들어있고 그 밑 어디에는 서예라는 일중 김충현 선생은 시인적인 은유나 수사학에 개의치 않는다. 선생은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을 이어나간다. 선생에게는 예술을 하는 긍지가 있다. 아무도 선생을 오만한 예술가라 보지 않는다. 선생은 우리시대 마지막 세월은 가고 새로운 사상과 기술이 우리를 찾아온다. 그러나 선생은 잊혀져 가고 있는 우리시대의 선비정신을
4) 주요 금석문(金石文) 5) 주요 저서 외길 80년/藝에살다-漢學者 집안에서 태어나 나는 1921년 4월 21일 조선조의 고종 밑에서 형조판서를 지낸 김석진(金奭鎭)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도봉구 번동 93번지로 당시에는 한성부였으나, 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변경하여 경기도 고양군 동부면으로 격하된 적이 있었다. 해방 후 내 고향은 다시 서울시로 편입되었으니 결국 나는 서울 토박이인 셈이다. 지금도 나는 본적을 도봉구 번동의 생가에 두고 있는 데 막상 그곳에 가본 지 몇 해나 되었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내가 태어날 때에는 집에 나의 조부 김년한(金寗漢)을 비롯해 아버님 김윤동(金潤東)과 어머님 그리고 일가 친척이 한 집에 모여 그야말로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조부님과 아버님은 인근 지역에서는 이름난 한학자로 밤낮없이 책을 벗삼아 지내고 집안 생계에는 별 신경쓰지 않으셨다. 우리 집은 1백석 가량 농사를 지었으나 그때의 가세는 몹시 어려운 형편이었다. 1백 석이라면 적지 않은 농사였으나 식구가 근 40명에 이르는 데다 따로이 돈을 버는 사람이 없어 항상 쪼들렸다. 더구나 뿌리 깊은 한학자 집안으로 조부님이나 아버님은 봉제사 접빈객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터였으므로 양식이 모자라 점심은 굶기가 일쑤였다.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고 조부님의 친구분 발길이 끊이지 않아 손님접대를 하다보면 40명에 가까운 식구들 양식마저 모자라는 형편이었다. 여기서 잠시 나의 집안 내력을 이야기해 두고자 한다. 내 증조부 김석진은 고종조(高宗朝)의 형조판서로 1910년 한.일 합방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맛보았다. 일제는 합방 이후 조선조 고관들에 대한 유화책으로 합방에 동조한 고관이건 반대한 고관이건 소위 그들에게 귀족 작위를 주어 유화정책을 폈다. 나의 증조부에게도 남작(男爵)의 작위가 주어졌으나 증조부는 이를 거절하고 합방에 대한 통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일제는 다시 나의 조부에게 남작의 작위를 주고 마음을 돌리도록 종용했으나, 조부 역시 이를 거절하고 일가 권속을 이끌고 도봉구 번동으로 피신하게 된 것이다. 조부는 번동으로 옮긴 후에 일제에 대한 반발심에서 일체의 신학문을 배격하고 오로지 한서(漢書) 에만 묻혀 지내면서 찾아오는 손님들과 한담이나 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나도 어린 시절을 농사나 지으면서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고 조부와 아버님 밑에서 한문을 배우며 보내야만 했다. 수구(守舊)파의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학교에는 가지 못했지만 일찍이 붓을 들고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 일이다. 집에서 웬만큼 한문도 배우고 붓글씨도 익히자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조부와 부친에게 학교 보내 줄 것을 간청했고 또 주위 사람들이 조부께 권유한 덕분인지 나는 14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청진동에 있는 삼흥보통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간단한 시험과 함께 3학년에 편입한 나는 뒤떨어진 공부를 위해 퍽 열심히 공부했었다. 당시의 우리 집에서 청진동까지는 아주 먼 길이었지만 힘든지 모르고 통학했다. 번동에서 혜화동 까지는 걸어 왔고 창경원부터 청진동까지는 전차를 타고 다녔다. 새벽에 집을 나서야 학교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는 데 그래도 집에서 혹시 학교를 그만두랄까 두려워 힘들다는 말 한 마디 못 해 보았다. 그때 이미 나는 한문 글씨를 열심히 공부 했는 데 어떤 때는 연습할 종이가 없어 분판을 사용하기도 했다. 분판이란 하얀 분칠한 판으로 그 위에 먹으로 글씨를 연습하고는 물걸레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삼흥보통학교 6학년을 마친 나는 1938년 중동(中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계속_ ★외길80년/藝에살다-혼자 한글 서예 연구 18세란 늦은 나이에 중동학교에 입학한 나는 다른 공부보다도 서예에 퍽 열심이었다. 중동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동아일보사에서 전조선 남녀학생의 작품전이란 걸 개최한 일이 있다. 동.서양화는 물론 조각.서예에 이르는 각 부분에서 학생작품을 공모하는 규모가 큰 행사였는 데 나는 평소 공부한 것을 시험도 해 볼 겸 별 다른 생각없이 서예부문에 작품을 내놓았다. 그런데 내 작품이 전시회 최고상인 특상을 받게 되었다. 비록 학생 신분이었지만 갑자기 내 이름이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아마도 내가 평생 동안 서도(書道)를 걷게 된 것은 이 학생미전에서의 입상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한문 서예는 물론 궁체서예(한글서예)를 홀로 공부해 오던 나는 동아일보 공모전의 입상 이후 더욱 열심히 글씨 공부를 했다. 내가 혼자서 한글 서예를 연구할 때는 일제 말기여서 적당한 참고 서적은 물론, 정확한 한글 교본을 구하기 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나는 한글 서예를 공부하며 국문 서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랏글씨에 대한 사랑이나 애국심에서 한글 서예를 몰래 혼자서 공부했다기보다는 우리 글을 내가 써보지 않으면 누가 쓰겠는가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 한글 서예를 꾸준히 계속했다. 그러나 아무런 지침서나 선생도 없이 혼자 서예를 터득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글씨 쓰는 틈틈이 국문 서법을 내 나름대로 정리, 국문서예 연구서를 따로 준비하고 있었다. 중동학교를 졸업한 것은 43년의 일로 이 당시에는 이미 국문서법 연구서가 완성되어 한 권의 책으로 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원고를 국학자(國學者)이자 시조시인인 정인보선생에게 들고 가 보여드리고 의견을 묻기로 했다. 내 원고를 자세히 살펴본 정 선생은 훌륭한 일을 해냈다고 극구 칭찬하며 즉석에서 내 책을 위한 서문을 지어 주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정인보 선생과 나는 이후로도 각별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시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책은 일제하에서 빛을 못 보다가 3~4년 후에 해방을 맞아 초판본이 간행 되었다. 이 책의 초판본은 거의 유실되어 지금 내가 1 권을 보관하고 있을 뿐인데 6.25 후에 재판을 간행, 지금까지 한글 서예의 지침서로 널리 쓰이고 있다. 중동학교를 졸업한 나는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형님이 하는 채석장 일을 도와 생활을 꾸려갔다. 중동학교를 다닐 때 부모님이 맺어준 집사람 송용순과 혼인을 해 가장이 된 나는 미아리의 채석장 옆에 있는 집으로 분가해 한동안 열심히 일했다. 채석장에서는 집짓는 돌이나 토목공사용 석재를 캐다가 팔았는데 그런대로 장사가 잘 되어 이때부터는 끼니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채석장은 우리 집안과 깊은 관련을 가진 장소로 나는 여기서 다시 우리 집안의 내력을 밝히고자 한다. 당시 채석장이었던 도봉구 미아4동 8의 16에는 현재 창문여자 중.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학교의 설립자가 나의 부친이다. 부친은 지난 71년 가세가 어느 정도 일어서서 순국선열이신 오천(梧泉) 김석진의 유업을 이어받고자 학교 설립을 결심하고 우리 집안 재산인 채석장 자리에 학교를 세운 것이다. 창문학교의 초대 이사장에는 우리 형님 김문현(金文顯)이 부임했고 교장은 내 동생인 김창현 (金彰顯)이 맏아 집안 식구들의 힘으로 학교를 발전시켰다. 창문여중고의 교무실에는 벽오산(碧梧山)이라 쓴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까만 나무에 양각(陽刻)된 이 글씨는 조선조 철종비 (哲宗妃)인 철인황후(哲仁皇后)의 어필(御筆)로 나의 증조부 오천에게 하사된 것으로 창문학교재단인 오산학원의 상징적인 유물이 되고 있다. ★외길80년/藝에살다-집안에서 세운 梧山學園 철인왕후가 나의 증조부에게 친필로 쓴 "벽오산"이란 현판을 하사하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나의 생가인 도봉구 번동은 순조(純祖)의 둘째 공주인 복온(福溫)공주와 부마 창녕위 김병주 (昌寧尉 金炳疇) 내외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조선조 때는 창녕위궁(昌寧尉宮) 또는 궁동(宮洞) 이라 불렀다. 증조부님 김석진은 바로 창녕위의 사손(嗣孫)으로 을사보호조약 이후에는 일가를 이끌고 이 곳으로 은퇴하였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음독 자살, 지금도 이 곳에 유택이 모셔져 있다. 철인왕후는 증조부의 아호인 오천을 생각하고 이 곳을 오현(梧峴)이라 명명하시고는 이내 벽오산 이란 글을 써서 하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조의 유래와 함께 시작된 창문여중고는 현재 5,845 평의 교지에 학생수가 4천 명에 이르는 학교로 발전되었다. 오산학원의 초대 이사장이었던 나의 형님이 별세하자 나는 지난 75년에 학교의 2대 이사장으로 부임해 오늘날까지 교육사업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창문여중고 옆에는 지금도 내가 채석업을 할 때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이 집은 40여 년 전에 채석장에서 캐낸 돌로 지은 집으로 현관에 "오산봉포(梧山鳳苞)라고 돌에 음각된 글씨가 보인다. 이 글은 아버님이 친필로 자식에게 집을 지어 주며 기념으로 써 주신 것이다. 아무튼 채석장에서 4년 가량 살던 나는 45년 8월 14일 저녁 , 가까운 친구인 신창순이란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미아리에 있는 친구 집에는 당시 퍽 희귀하던 라디오가 있었는데, 방송을 한동안 듣고 있노라니까 내일 정오에 중대 방송이 있다는 예고를 했다. 나는 이튿날 정오에 잔뜩 부푼 기대를 안고 친구 집에 다시 갔다. 24세였던 나는 같은 또래의 친구 몇몇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까 일본 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한다는 문서를 읽어내려 갔다. 나와 친구들은 환희에 넘쳐 한동안 어쩔줄을 몰랐다. 집주인 신창순은 "이제 살았구나"하면서 기뻐했고 나는 "이제는 우리가 할 일이 많구나" 하고 새로운 각오를 했다. 그 당시의 감격을 맛본 젊은이들은 누구나 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해방되던 해 경동학교의 국어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채석장 일보다는 뭔가 뜻깊은 일거리를 찾던 나는 일본의 식민지교육의 때를 씻어내고 민족교육의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나랏말의 담당 선생이 할 일이 많을 것 같아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의 경동학교는 한국인 학생과 일본 학생이 반반이었느데 해방이 되자 일인(日人)선생과 학생이 일시에 쫓겨나 학교가 텅비게 되었다. 해방 직후에는 일인 학생만 다니던 경성(지금의 서울고), 용산 같은 공립학교는 한동안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러나 한국 학생이 남아있는 경동학교는 당장 학생을 가르칠 선생을 모집해야만 했다. 다행히 나는 일찍부터 한글서예를 연구했고 국어에 대한 지식이 있어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칠 수가 있었다. 많은 학교들이 문을 닫은 형편이어서 경동학교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선생들도 열과 성의를 다해 학생을 가르쳤다. 나는 국어 선생을 하며 경동의 새로운 교훈을 만들어 붓글씨도 써 주었고 교사도 내가 작사했다. 경동의 교가를 내가 짓게 된 것은 직원 회의에서 나의 시를 교가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도 아닌 내 작품이 뽑혀 송구스러운 마음에서 교가 가사를 들고 육당 최남선 선생을 찾아가 의견을 물었다. 육당은 "이만하면 훌륭하다"면서 한 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넘겨 주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경동중고교의 교가는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 |
첫댓글 워매...시원하셨겠습니다...선녀가 있었으면 수영도 못 즐길뻔했습니다..ㅎㅎㅎㅎ
그러게요 ㅎㅎㅎ 천만 다행이였답니다 옷 훔치 갈까봐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