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 이야기
히말라야로 떠난다고 한 달 전부터 설레던 마음이 마침내 하루 앞으로 다가오면서 심장의 박동이 가까이서 울려댄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소리가 들리지 않겠지만 나지막한 율동으로 전해지는 다소 긴장을 동반한 흥분이 분명 전신을 감싸고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남들이 요즘 내 얼굴을 본다면 분명 한줄기 흥분이 가미된 밝은 기운을 감지할 것이고, 그리고 사는 것에 생기가 돌고 있음을 읽어낼 것이다. 그렇다. 분명 히말라야로 가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다.
사람들은 왜 히말라야로 가는 것일까? 히말라야의 무엇이 사람들을 끌어당길까? 히말라야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티브나 책 또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 그의 이미지는 안개와 눈보라에 끼여 아스라하지만 어느덧 하나의 실체로서 부풀어 올랐고, 그리고 그 이미지는 나를 부르는 소리로서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이 속삭임과 나를 부르는 소리는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로 다가왔다.
‘히말라야’라는 이름, 그 굴곡진 이름 위에 눈보라가 휘날린다. 첫음절 ‘히’ 위로 바람이 인다. 마치 말이 ‘히히힝’하고 고개를 틀며 말발굽을 치켜들 때, 말갈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 같다. 동시에 오색 룽다가 바람에 펄럭이는 이미지가 중첩된다. 이렇게 연상하는 것도 그 다음 글자가 ‘말’이 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히말’이란 말 뒤에 다시 ‘-라야’가 이어지면서 히말라야 산등성이를 넘어오던 바람이 산등성이를 쓸고 넘어가면서 저쪽으로 사라지는 소리이다. ‘-라야’에서 아스라한 소리의 여운을 듣는다. 마치 겨울 창가에 입김이 사라지는 소리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여름날 한줄기 소낙비가 긴 치맛자락을 대지에 끌면서 저쪽으로 쓸려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저녁은 두타산악회원 여러 명이 랑탕 히말라야로 간다고 사정상 가지 못하는 회원들이 출정식 겸해서 저녁을 사주었다. 몸보신을 하고 가라는 의미에서 삼척 시내에 있는 염소탕 집에 갔다. 회원 가운데 홍돌배씨가 오늘 저녁을 쏘겠다고 했다. 메뉴는 염소탕 6,000원, 염소갈비탕 10,000원, 염소 전골 13,000원이었다. 일행 일곱 명이 좌정을 하고 메뉴를 주문할 때 우리 돌배씨는 당연지사로 6,000원 짜리 염소탕을 시키려 했고, 나는 오늘 같은 날 품격을 높여 염소 갈비탕 만원 짜리는 먹어야 된다고 돌배씨 말을 자르며 끼어 들었다. 돌배씨는 ‘뭐 만원짜리냐? 육천원짜리도 고기 많이 준다’고 하면서 아줌마에게 육천원 짜리를 가져오라고 소리친다. 이와 동시에 나머지 다섯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만원짜리 갈비 한번 뜯어보자고 맞장구치면서 결국 만원짜리 갈비염소탕이 결정되었다. 사람 좋은 돌배씨는 허허 너털웃음을 웃고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이 다수의 여론에 승복하고 만다. 우리는 염소 갈비를 두손과 입으로 뜯으며 역시 고기는 갈비 맛이 제일이라고 낄낄거리며 만원짜리 행복에 젖었다.
요지로 이빨을 쑤시며 다시 집으로 돌아와 카고백을 돌아본다. 일주일 전부터 싸기 시작한 카고백이지만 도무지 마무리가 되질 않는다. 우기 동안에 트레킹을 하기 때문에 모든 물건들을 비닐팩에 넣고 다시 커다란 비닐 봉투 안에 넣고 카고백에 넣어야 한다. 처음에 19kg에 맞추었는데 가기 하루 전에 김대장이 카고백 무게를 15kg에 맞추라는 전갈을 받았다. 5kg를 줄여야 하는데 마땅치가 않다. 다시 카고백 전체를 뒤집어 엎는다.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가 신경 쓰인다. 아마 거실의 아내는 무슨 짐을 싸는데 일주일 전부터 저 난리인가 하고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아내를 두고 혼자 여행하는 마음이 가볍지 않은데 이놈의 비닐 팩은 왜 이리 부스럭거리는 것인지...... 뒷통수가 불안하지만 그래도 가야한다. 히말라야가 나를 부르고 있질 않은가?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짐승이 되어서 돌아오겠다.”고 했고 아내는 웃으며 “기대하겠다.”고 대답했다. 말이 풍기는 뉘앙스가 참 묘하다는 생각을 하며 밤 열시가 넘어 집을 나섰다.
인천공항까지 이야기
2009년 8월 2일 23시 5분 동해역에서 청량리행 밤 열차에 몸을 실었다. 두타산악회원 몇 분이 동해역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다. 저녁밥 사주고 이 야밤에 전송을 위하여 역까지 나와 준 사람들의 정이 도탑다. 사람 사는 정을 새삼 느낀다.
청량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우리 일행 4명은 시간을 뭉게기 위해 처음에는 담소로, 그 다음에는 식당칸으로 가서 맥주 한잔으로, 다시 자리로 돌아와 고개를 등의자에 붙이고 눈도 붙여 보면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시간을 지우고 있었다. 사실 이 밤 시간만이 문제가 아니다. 인천공항에서 7시간 비행기로 날아 카두만두에 도착하고 다시 10시간 버스를 타고 트레킹 시작 지점인 둔체로 가야한다. 그러니까 꼬박 24시간을 기차, 비행기, 버스를 타고 게겨야 한다. 나는 몸으로 때우는 일에 익숙치 않다. 잠자리가 변해도 잠을 들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이라 걱정이 없질 않다. 그러나 이번에는 몸으로 게기고 때우는 일에 왠지 자신감이 생긴다. 왜냐하면 히말라야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전 6시 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고, 우리는 9시 카투만두가는 비행기를 기다린다. 그 사이 카일라스 투어 김수현사장과 전라도 순천에서 온 정부장, 부산에서 오신 교직에서 퇴직한 칠십대 여교장, 양양에서 오신 윤교장 그리고 카이라스투어 김사장 동기생인 이여사 등 삼척에서 온 우리 일행 4명을 포함해서 9명이 모두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부산에서 오신 칠십대 여교장 선생님과는 재작년 티벳 트레킹 때 함께한 동지이기에 더욱 반가웠다. 악수를 하면서 다른 손으로 이분의 손등을 쓰다듬고 비비면서 안부를 물으니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다시 만나서 너무 반갑다고 하신다. 이분은 정년 퇴직을 하고 세계 도처를 여행한 베테랑 여행가로서 젊은 우리들 보다 더욱 젊게 인생을 사시고 계신다. 얼마 전 아프리카 킬라만자로 그리고 에베레스트 트레킹과 카일라스 트레킹을 했고, 이번에 랑탕 히말라야를 가고, 9월 달에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신청한 상태로, 전세계 60여개국을 둘러본 대단한 분이다. 그러면서도 말씀하실 때는 항상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올려주는 미덕을 보여주시면서 젊은 후학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해 주신다.
우리는 간단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이 있는 공간에 대기 중이다. 소형카메라를 하나 살려고 집에서 인터넷을 뒤져 조사해온 쪽지를 펴들고 카메라점을 찾았다. '삼성 블루 WB1000'이라는 신모델을 딸레미가 추천해 주었는데, 다른 일제 카메라보다 성능이 뛰어나다는 입소문도 듣고, 무엇보다 동영상이 HD급 수준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 삼성코너로 갔다. 인터넷에서 조사해온 가격은 390.4000원이었다. 디자인은 세련되게 깔끔했고 색깔은 은색과 검정색 두가지가 있었는데 나는 은색이 마음에 들어 선택을 하면서 얼마냐고 물었더니 달러를 한화로 계산하더니 440,000원이라고 여종업원이 일러 주었다. 나는 인터넷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아무래도 면세점에서 구입하면 몇 만원 더 헐하게 구입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무려 오만원이나 더 비샀다. 말도 안됀다. 어떻게 면세점이 바깥 세상보다 더 비싸단 말인가?
포기하고 돌아섰다. 돌아서서 담배 한대 피우며 다시 생각해 본다. 랑탕히말라야를 가면서 카메라도 없이 간다는게 말이나 되냐 말이다. 다시 면세점을 찾아간다. 나는 조사해온 쪽지를 내 놓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는 말을 중얼거려 보지만 여종업원은 철벽이다. 그들은 항상 철벽이다. 나는 벽 앞에서 절망한다. 저 벽은 논리로도 감성적 호소로도 무너뜨릴 수 없다.
간혹 큰 회사를 상대로 전화를 해보면 굴곡 없는 사무적인 목소리가 수화기고 흘러나오고 무슨 용무는 몇 번, 이런 용무는 몇 번을 눌러 달라는 목소리를 쫒아 ‘0’번도 누르고 ‘1’번도 눌러 보았지만 끝내 살아있는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삐삐거리는 수화기에 절망한 그 때처럼 내 앞의 벽은 견고했다. 사기는 사야 되는데 너무 억울했다. 돈이 오만냥이면 자동차 기름을 한 번 가득 넣을 수 있고, 마누라 데리고 횟집에 가서 폼 잡고 회 한 사라를 시킬 수도 있는데...... 그도저도 아니면 그냥 뒷주머니에 찔러 놓으면 근 열흘은 어깨 펴고 시내를 활보할 수도 있는데......
나는 어쩔수 없이 고개를 떨구고 매장 안을 이러저리 서성거리다가 아무리 되뇌어 봐도 랑탕히말라야를 카메라 없이는 갈 수 없는지라 다시 기수을 여종업원 쪽으로 돌렸다. 나는 다시 한번 푸념조로 사정을 한다. 오랜만에 여행가는 놈이 카메라없이 여행갈 수도 없고 사자니 너무 억울하고 마치 똥 밟은 사람처럼 중얼대며 아가씨를 올려다 보았다. 아가씨도 어느 사이트에 그 가격으로 파는지 묻는다. 어느 싸이트 할 것 없이 모든 싸이트에 그 가격에 나와 있다고 하자 아가씨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면서 어디론가 간다.
저쪽에서 검은 양복에 넥타이 맨 남자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무엇을 확인하고는 다시 넥타이 맨 남자랑 무슨 말을 주고 받더니 돌아와서 정가에 5%를 DC해 주겠다고 한다. 5%면 이만이천원 와우 이게 어디냐 DC를 해주지 않아도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인데 이만이천냥이나 깍아주다니 나는 갑자기 막 행복해졌다. 다리가 부러져도 그만하기 천만다행이라 하는데 다리도 안부러진 상태에서 돈 이만이천냥을 그냥 벌다니! 세상은 살아 볼만했다. 이렇게 갑자기 행복과 다행이 불쑥 찾아오다니 그것도 면세점에서 물건 값을 깍다니! 나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깍은 이만이천원에 삼천원을 더 보태어 8기가 메모리를 샀다. 8기가 메모리를 만지면서 마치 공짜로 얻은 듯 기분이 좋았다. 메모리 걱정없이 랑탕히말라야를 마음껏 찍어야지 하면서 보무도 가볍게 카투만두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포장도로와 버스 이야기
대한항공 비행기는 마침내 카투만두의 튜리반 공항에 내려앉는다. 평소에 그리도 오고 싶었던 곳. 히말라야가 시작되는 네팔 카투만두. 그 이국적 지명에 첫발자국을 디딘다. 네팔 카투만두에 내리자 우리 일행을 기다리던 현지 가이드가 환한 얼굴로 반기며 우리 목에 흰색계통에 마후라를 한 사람씩 목에 걸어준다. 네팔 땅에 온 것을 환영하면서 신의 가호를 담은 의미란다. 별것 아닌 평범한 목도리에 지나지 않지만 낯선 타국을 여행하는 여행객으로서 평범한 네팔 시민이 환영의 목도리를 걸어주니 그 정이 더욱 따사롭다.
카투만두 튜리반 공항은 붉은 단층 건물로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우리는 목도리를 걸고 공항을 향해 기념촬영을 하고 대기하고 있던 봉고차로 이동했다. 봉고차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처음 와보는 카투만두가 보고 싶어 재빨리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앞자리에 앉아야 시내 풍경을 차 전면 통유리를 통해 잘 볼 수 있고, 그리고 사진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팩키지 여행을 하던 트레킹을 하던 재빨리 차의 앞좌석을 차지하고 앉는 것도 여행을 잘하는 하나의 비결로 습관이 되어 가고 있다.
봉고차 앞 통유리를 통해 펼쳐지는 카투만두 시내 풍경은 그야말로 난장판 수준이었다. 버스 트럭 오토바이 릭샤 자전거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은 무슨 짐보따리가 그렇게 많은지 이고 지고 차들이 일으키는 먼지 바람 속에 뒤엉켜 모든 차들이 제자리 걸음수준이다.
교통 순경이라고 도로 가운데 서서 호르라기를 불며 나름대로 교통지도를 하고 있으나 중앙선도 없는 도로에는 일단 차머리를 들이대고 보는 차들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서 있다. 그리고 차마다 눌러대는 요사스런 차의 크락숑 소리는 시각적으로 어지러운 도로 사정을 청각적으로 한층더 어지러움을 증폭하면서 하나의 골 때리는 풍경을 완성하고 있었다. 차마다 눌러대는 크락숑 소리는 구부러지고 비좁은 파이프를 통해 나오는지 이차에서 ‘삐리리리릭’하고 울리면 맞은편 차에서 대답이나 하는 듯이 ‘삘리리삘리리릭’하고 어김없이 반응을 한다. 아마도 운전수끼리 마치 크락숑 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아마 크락숑 소리를 번역하면 ‘야, 임마 니가 좀 비켜라’라 하면 맞은편 차는 ‘내가 왜 비키냐? 니가 비켜라. 이짜샤’ 등으로 번역이 될 것 같다.
나는 이 난잡한 교통 상황을 보면서 왠지 입가에 웃음이 흐른다. 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상황에서 인간적인 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소위 선진국에서 이루어지는 교통 상황은 중앙선과 횡단보도 신호등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오히려 드라이하고 가식적이고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늦은 밤이나 새벽에 차도 교통순경도 없는 텅빈 도로에서 그 싸늘한 신호등에 걸여서 얼마나 지루하고 긴 시간을 문명인이란 겉포장에 묶여 서 있었던가? ‘그냥 가버릴까 말까’ 사이를 얼마나 지겹게 되뇌였던가?
도시 생활을 하는 소시민은 이렇게 왜소해져 간다. 도시를 떠나고 싶은 이유도 이런데 있다. 끊임없이 타인을 의식하며 끊임없이 질서과 규칙과 법을 지키기 위해 도시의 네온사인 불빛처럼 파리해져 가는 소시민들. 나를 동여매고 있는 수많은 끈들을 일거에 잘라버리고 자연 속으로 훌훌 떠나고픈 핏기 없는 얼굴들. 그러나 떠나지 못한다. 그들은 길들여져 있다. 어쩌면 자신을 통제하는 그 구속이 익숙하고 편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구속이 없는 편안한 자유가 좋다. 책임과 구속이 따르는 자유는 불편하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원초적 본능의 자유, 통제되지 않는 자유, 자유라는 이름에 걸맞는 겉치장이 없는 자유, 그 자유를 카투만두에서 본다.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긴다. 흥겹고 자유로운 풍경이 아닌가? 고삿갓이 카투만두에서 그냥 갈 수 없다.
카트만두에서
카트만두 차라리 너는 카오스다. 소리와 먼지와 움직임이 삼중주로 뒤엉켜 저마다 제 목소리를 높이는 곳
마치 파도치는 바다를 보는 듯하다. 살아 있는 생선처럼 비린내를 풍기는 풍경
그 풍경 위로 먼지가 끼이면서 너는 어느덧 화석이 되고 만다. 카트만두 |
시내를 빠져나온 봉고차는 대기하고 있던 대형 버스로 우리를 인계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둔체 샤브르베시까지 장장 10시간 동안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한다. 버스는 차의 경적소리처럼 총천연색으로 색칠을 해서
정신이 없는데 어떻게 보면 그림 같고, 어떻게 보면 글씨 같고 도무지 어떤 회화적 감각에서 표현된 칼라인지 모르겠다. 차 귀퉁이 마다 두껍게 칠한 페인트가 떨어나간 자리에는 녹이 슬어 그 차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차령은 수 십 년은 족히 지난 박물관에 갈 차인데 아직도 현직으로 뛰고 있는 것이 대단했다. 우리 여행객은 9명이고, 거기에 가이드 2명, 포터 7명, 쿠커 3명 그리고 운전수, 조수 두 명 포함해서 총24명이 버스를 타는데 카고백과 배낭을 버스 뒷자리에 놓고 앞쪽은 우리 여행객과 가이드가 차지했다. 나머지 인원 포터와 쿠커들 대부분은 버스 지붕 위로 올라가 자리잡고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7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온 처지라 갑갑하던 차에 버스를 타고 흙냄새를 맡으며 숲속을 달리니 살 것 같았다. 카투만두에서 트리슬리까지 50Km는 대충 포장이 되어 있어서 그런대로 숲속을 기분 좋게 달려왔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버스로 50Km를 오는데 3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에서 그 포장도로의 진면목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아직 둔체 샤브르베시까지 120km가 남아 있고 이 120km를 7시간 동안 가야한다. 버스는 시속20km 정도로 달리는데도 이 고철 덩어리는 공중으로 점프를 하고 좌우로 트위스트를 추며 몸체를 울렁출렁거리며 끌려가는 소처럼 머리를 쳐박고 눈알은 위로하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지붕에 탄 포터들은 그 출렁거림에 따라 몸이 공중에 튀어 올랐다 다시 지붕위에 떨어지고 버스가 트위스트를 추면 그 리듬에 맞추어 앉은 채로 엉덩이는 좌우로 크게 트위스트를 추고 머리는 조금씩만 움직인다. 버스 출입문에 매달린 조수 놈은 버스 문짝을 열어 놓은 상태로 매달려서 원숭이 휘파람 같은 소리를 두 입술에 연신 토해내고, 차의 옆구리를 연신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운전기사와 약속된 어떤 신호들을 주고 받는다.
버스는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의 허리에 난 한줄기 실오라기 같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울렁출렁 잘도 간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우리가 지나가는 도로를 보면 천길 낭떠러지다. 낭떠러지 아래로 트리슬리강(Trisuli River)이 도도하게 흐른다. 도로는 산사태로 임시 복구한 곳이 많아 임시로 돌을 채워 차량을 소통시키는데 부실하게 쌓아 놓은 돌 위로 버스 뒤바퀴가 여분을 한뼘도 안되게 남기고 꿀렁거리며 지나갈 때마다 현기증이 일어난다. 히말라야 탐험으로 죽어간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름난 등산가들인 그들은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칸첸중가 정상에서 또는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오는 하산 길에서 본의 아니게 생명을 반납한 다. 신문과 티브에서는 그들의 도전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언론사마다 특집으로 꾸며 며칠씩 재조명을 한다.
그런데 이름도 지명도도 없는 평범한 소시민인 내가 에베레스트는 커녕 히말라야문짝도 못 열어 보고 그 발치에서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폐차장에 들어간 고철 덩어리처럼 너덜너덜 사라져버린다면 이건 너무 억울한 일이다. 그렇다고 어느 누가 나의 이 탐험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언론에 재조명해 줄 사람도 찾기 어렵다. 이때 한줄기 소낙비가 내렸다. 나는 살아야 한다.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훔치며 고개 들어 비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내 생명을 꽉 부여잡았다.
버스는 다시 움푹 파인 웅덩이를 지나며 낭떠러지 쪽으로 버스 몸체 전체 무게가 쏠리면서 기우뚱 넘어간다. 나는 순간 어금니를 깨물었다. 버스는 떨어지던 몸체에 반동을 주어 다시 반대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긴다. 살았다 죽었다를 반복할 때마다 어금니를 깨물어 아래턱이 얼얼하다. 결국 위험할 때마다 어금니를 깨문 덕분에 나는 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무지막지한 버스에 대해 점차 신뢰감이 생겼다. 오고 가는 버스들이 모두 한결같이 낡고 투박했고 그리고 연세가 많았다. 수 십 년 동안 수 백 번 수 천 번 덜컹거리는 이 도로를 오고 갔을 텐데 아직 은퇴하지 않고 현장에 활동하는 것이 대견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 버스 이름은 인도에서 만든 'TATA'였다. 버스 이름이 ‘타타’여서 그런지 오고 가는 버스에 인간들이 많이도 탔다. 전세 버스인 우리 버스는 그래도 신사적이다. 지나가는 로컬버스에는 피난 열차처럼 문짝에 서너명이 붙어 있고 유리창에도 매달리고 지붕에도 빈틈이 없이 매달려 있다. 멀리서 이풍경을 보면 매미 같은 큰 곤충에 새까맣게 붙어 있는 개미떼를 연상시킨다. 지나가는 버스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소처럼 큰 수 많은 눈망울들만 보인다. 눈이 참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물기가 촉촉하게 도는 깊은 산속 옹달샘 같다. 저런 눈빛을 가진 사람과 사랑하고 싶다.
이렇게 어렵사리 이름도 모르는 한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서는 축제가 열리는지 우리네 봉산탈춤과 비슷한 가면을 쓰고 공연을 도로 위에서 펼치고 있다. 차는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섰다. 이색적인 구경거리가 생겼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마을 주민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통행료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냥 도로를 점거하고 돈내라 하면 강도짓이나 다름없으니까 강도짓이 진화하여 하나의 축제 형식을 빌려 돈을 뜯고 있다. 처음에는 우리 쪽도 버티다가 버스로 밀어붙여 보았지만 어디 한번 깔아뭉갤려면 뭉개보아라는 듯이 막무가내다. 할 수없이 1인당 200루피 전체 금액 2000루피를 헌납하고 통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통행세를 헌납하고 두세시간을 갔을까. 제 흥에 겨워 쿨렁대며 가던 버스가 갑자기 섰다. 우리 앞에도 서너대의 버스가 서있다. 앞쪽에 도로가 유실되어 중장비로 도로를 보수 중이란다. 히말라야 쪽을 여행하려면 우리가 알고 있던 시간관념이나 거리개념은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 속이 편하다. 시간과 거리 개념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요인들이 곳곳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갑자기 불쑥불쑥 나타난다. 이때마다 우리는 절망한다. 지금은 절망이고 한숨이고 고생이지만 여행의 묘미는 또한 이런 것에 있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지그시 현실을 수용할 뿐이다.
금방 보수가 될 것 같이 얘기하던 길이 반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우리는 버스에 내려 바깥 바람을 쐔다. 버스에서 벗어나니 살 것 같다. 마침 버스 뒤쪽에서 마을 사람들이 길가에서 버팔로를 잡고 있다.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벌써 다리 네 개는 해체된 상태다. 해체된 허벅지 근육에서 힘줄이 펄떡이며 살덩이가 한번씩 부르르 떨고 있다.
오염되지 않은 싱싱한 고기를 보면서 군침이 돈다. 그 옆에는 빈들거리는 간덩어리가 다른 내장들 속에서 햇빛을 튕기고 있다. 우리 김형민단장님도 입에 군침이 도는 모양이다. 나는 바람을 잡는다. 저것 좀 사서 구워먹었으면 좋겠다. 김단장님은 한술 더 떠서 쐐주 한잔에 저 생간을 짤라 소금에 찍어 먹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는 카일라스투어 김사장에게 가서 고기 좀 사자고 제안을 한다. 김사장은 내 말을 듣고서 쓰다달다 반응 없이 은근슬쩍 넘어가 버린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돈 문제가 걸려 있다. 내가 김사장에게 고기 좀 사자는 제안은 김사장이 사라는 얘기가 되고 만 것이다. 내가 살려고 해도 현지인과 대화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식구가 포터를 포함해 24명이니 24인분 고기를 사야하는데 장난이 아니다. 일행과 더불어 산다고 해도 여행객 9명이 모두 갹출에 동의를 해야 한다. 이런 이치를 깨닫자 바람 잡을 일이 아니란 걸 어렴풋이 느끼며 나는 조용해졌다.
가지고 사골곰탕을 우려내 먹자는 둥 떠벌리며 버스로 돌아왔다. 도로가 유실된 것이 오히려 행운을 가져 왔다고 저마다 한마디씩 거든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삼십분 달렸을까 이번에는 도로가 계곡 위쪽의 계곡 물길에 휩쓸려 완전히 사라지고 소용돌이 물살이 흐른다. 물살 속에는 굵은 돌들이 구르면서 서로 부딪혀 뒷골 때리는 소리를 내며 흙탕물이 기세 좋게 흘러간다. 어쩔 수 없이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건넌다. 이것도 장난이 아니다. 나는 또 어금니를 깨물고 목숨을 단단히 부여잡고 물을 건넜다. 까딱 잘못하여 물길에 휩쓸리는 날이면 여기서 영원히 아웃이다. 히말라야로 가는 길은 초입부터 호락호락하지 않다. 길이 끊어진 것은 유독 우리 일행만이 당하는 예외적 상황이 아니라 히말라야로 향하는 수많은 트랙커들이 일상적으로 맞이하는 어려움이다.
도로가 유실되면서 둔체로 올라가는 버스도 못 가지만 내려오는 버스도 발이 묶인다. 물을 건넌 우리 일행에게 가이드는 맞은편 쪽에 있던 한 버스로 우리 일행을 안내해 타라고 한다. 이런 일이 다반사로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일처리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애초 예상은 카투만두에서 둔체 샤브루까지 170km 구간에 10시간이 소요된다지만, 어둠이 내리도록 11시간을 와도 겨우 100km 남짓 왔을 뿐이다. 김사장은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더 가서 롯지를 얻어 숙박하려고 밀어부쳐 컴컴할 때 한 롯지에 도착했으나 빈 롯지가 없었다.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 내려와 빈 롯지를 얻었다. 롯지 수준은 최악이었다. 퀴퀴한 냄새나는 화장실 옆방에 7명이 한방에서 숙박했다. 촛불 아래 현지식 달밧을 시켜 한쪽 귀퉁이만 대충 파먹고 저녁을 때웠다. 숙박시설이 엉망이니 음식 맛인들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잠만은 달콤하게 잤다. 24시간 동안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수많은 난관과 위험을 극복하며 이까지 왔기 때문에 육신 그 놈도 휴식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다음날 천근 같은 몸으로 비몽사몽하는데 쿠커들이 차를 한잔씩 타주며 잠을 깨운다. 새벽같이 다시 출발이다. 버스로 두세시간 달려서 마침내 둔체에 도착했고 이곳 랑탕뷰호텔에서 달밧점심을 먹는다. 같은 달밧인데 어제 밤에 먹던 달밧과는 차원이 다르다. 깨긋한 접시에 정갈한 음식이 나온다. 그렇다고 고급 음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제에 비해 좋다는 얘기이지 우리네 호텔 수준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
첫댓글 고세환입니다. 글은 썼는데 올릴 줄 몰라서 김대장에게 좀 올려달라고 했습니다. 랑탕히말라야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들 모두 보고싶습니다. 조선팔도에 흩어져 있더라도 우리들 정분 잊지마시고 건강하게 안녕히 계십시요. 나마스테~
고선생님의 감칠맛나는 표현이 담긴 랑탕 탐방기를 원본대로 올리고 있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십시오.
고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