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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스크랩 교회 용어 맞게 씁시다(이의용 장로)
물댄동산 추천 0 조회 98 08.03.04 18:4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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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용어 맞게 씁시다(이의용 장로)
조회 (37)
바른 교회 용어 | 2005/10/21 (금)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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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교회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의 하나가 ‘은혜스럽게’일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말이 어떤 일을 적당히,문제가 되지 않게,대충대충 처리하는 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스러운 게 아니라 적당주의입니다. 매사를 가장 정확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은혜스러운 일이지요.

◇‘한국교회’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다른 나라 교회와 비교할 때라면 몰라도 한국 사람이 자기 나라 교회를 ‘한국교회’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쩐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이 말을 하는 자신은 마치 외국인인 것 같은 느낌을 주지요. 그보다는 ‘우리나라 교회’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이 세상에 떡만 먹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떡’은 원래 서양의 주식인 ‘빵’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떡’이 빵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주식은 떡이 아니라 밥이지요. 그러므로 “사람이 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고 해야 합니다.

◇‘찬송’과 ‘찬양’이라는 말이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 찬송(讚頌)은 ‘기릴 찬(讚),기릴 송(頌)’으로 찬양(讚揚)은 ‘기릴 찬(讚),오를 양(揚)’으로 둘 다 하나님을 높여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찬양대가 부르는 노래는 ‘찬양’으로,일반 회중이 부르는 노래는 ‘찬송’으로 차별해서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일 하는 걸 ‘봉사(奉仕)한다’고 합니다. ‘봉사(奉仕)’란 말 그대로 받들고 섬기며 돕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찬양대원으로 봉사한다’는 말은 좀 어색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의 행위가 봉사활동일 수는 없겠지요?

◇성경에서는 주님을 ‘예수’‘그리스도’‘예수 그리스도’‘그리스도 예수’‘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등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주님의 본명이며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이’ 즉,‘구세주’라는 직책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예수님’이라고 하기보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 바른 표현입니다.
 
◇‘나귀 새끼’인가,‘새끼 나귀’인가? 말 그대로 나귀 새끼는 나귀의 새끼를 말하고 새끼 나귀는 어린 나귀를 말합니다. 어떤 이는 나귀 새끼라는 표현이 상스럽다고 합니다. 아마 그와 비슷한 욕이 연상돼서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나귀 새끼보다는 새끼 나귀라는 표현을 쓰는 게 좋겠습니다.

◇간혹 설교에 ‘장본인(張本人)’이란 말이 등장합니다. ‘장본인’은 ‘어떤 일을 꾀하여 일으킨 바로 그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로 부정적인 일을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도 ‘미담의 장본인은…’이라는 식으로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긍정적일 때에는 장본인이 아니라 ‘주인공’이나 ‘주역’이라고 해야 합니다.

◇“주여,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성 프란체스코가 쓴 ‘평화의 기도’는 가사와 노래가 워낙 유명해서 교회에서 자주 불립니다. 그러나 가사 중에 “자기를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라는 표현은 선행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천주교의 교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라는 식으로 고쳐 불러야 합니다.

◇“할렐루야!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목회자나 방송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인사말입니다. 이 말을 사용하는 이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할렐루야’가 사람들 사이의 인사말로 사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뜻이므로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하나님을 향해서 정중히 사용하는 게 좋습니다.

◇성도들끼리 사용하는 말에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가 많습니다. ‘태신자’라는 말이 좋은 예입니다. 어떤 사람을 신자로 기대하며 마음에 품고 기도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로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되었으면 하고 기도하는 대상을 ‘태목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태신자’라는 말보다는 그냥 ‘전도 대상자’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언어는 보편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개 장로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대표기도를 해주시겠습니다.” 예배 시간에 흔히 들을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기도에 있어서 ‘대표’나 ‘대신’이란 말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대표가 될 수 없다는 게 만인제사장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개 장로님이 기도 인도해 주시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마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정말 존귀합니다. 그 이름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윗사람의 이름은 ‘존함’이나 ‘성함’이라고 높여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성함은 그냥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존귀하신 이름’이라며 이상한 표현을 합니다. 어색하기는 합니다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존함으로 기도합니다”가 맞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님,개업예배 좀 봐주세요”“이번주 구역예배는 집사님이 봐주세요”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예배를 봐준다는 말은 자칫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봐준다는 느낌을 줍니다. 예배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행위이지,누가 대신 드려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목사님,예배를 인도해주세요”라고 하는 게 옳습니다.

◇흔히 주일 낮에 어른들이 드리는 예배를 ‘대예배’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들이 드리는 예배를 ‘소예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배에 큰 예배 따로 있고 작은 예배 따로 있을 수는 없지요. 예배에 등급이나 규격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한두 사람이 모여도 ‘예배’입니다. ‘대예배’라는 말보다는 ‘주일 낮 예배’ 또는 ‘장년부 예배’로 표현하면 어떻겠습니까?

◇“시간이 되었으므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어떨까요? 예배를 시작할 때 인도하는 분이 이 말을 간혹 쓰곤 합니다. 이 말은 자칫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배를 시작해야 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예배는 정해진 시각에 시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시각이 되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기꺼이 자발적으로 전폭적으로 감격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인도하시는 분들은 시간이 되었다는 이유를 달지 말고 그냥 예배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어휘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축복해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축복(祝福)’은 복을 빈다는 뜻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이것이 바로 야곱을 위한 이삭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빕니다. 다시 말해 축복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축복해 주시옵소서”라는 말은 다른 신에게 복을 빌어달라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부탁하는 셈이 됩니다. “하나님,복을 내려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게 올바른 표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나님,우리가 주님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나’의 복수를 뜻합니다. 그래서 ‘저’라고 해야 할 때에는 ‘우리’가 아니라 ‘저희’라고 해야 합니다.“아버님,저희들 왔습니다!”

이렇게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우리’와 ‘저희’를 잘 골라 쓰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저희’라고 해야 할 때 ‘우리’라고 하는 수가 많습니다. 존귀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저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주님,내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말에는 자기를 가리키는 말로 ‘나’와 ‘저’가 있습니다. 상대방에 따라 잘 골라 써야 합니다.존경하는 상대 앞에서는 자신을 ‘나’라고 하지 않고 ‘저’라고 낮춰 부릅니다. 기도나 찬양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나’라고 하지 말고 ‘저’라고 해야 옳습니다. “제가 주님을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주님 제가 여기 있사오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우리’를 낮춰 부를 때에는 ‘저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저희 나라’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주권국가는 다른 나라와 대등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을 ‘저희 하나님’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 ‘저희’라는 표현은 상대와 상황에 맞게 잘 선택돼야 합니다.

○…“당회장님께서 설교해 주시겠습니다.” 사람은 그 역할에 따라 호칭이 달라집니다. 자녀들에게는 아버지이지만 회사에서는 과장님,교회에서는 집사님이라고 합니다. 목사님도 제직회 때는 제직회장,당회 때는 당회장이 됩니다. 그러나 예배 때에는 ‘당회장’이 아니라 ‘담임목사’라고 불러야 옳다고 봅니다. 회의가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웃을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요즘 교회 안에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남을 위한 기도를 흔히 ‘중보기도’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중보(中保)’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하지요. ‘중보’라는 말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말이니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중보기도’라는 말보다는 ‘이웃을 위한 기도’ 또는 ‘도고’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합시다.

○…담임목사를 보좌하는 목사를 보통 ‘부목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목사’라는 말은 ‘조교수’‘부교수’‘정교수’같이 계급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신분을 뜻합니다. 안수를 받는 순간 목사가 되는 것이지 ‘副목사’를 거쳐 ‘正목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한번 목사가 되면 영원히 목사인 것입니다. ‘부교역자’나 ‘부목회자’라는 말은 몰라도 ‘부목사’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부목사’라고 하지 말고 ‘목사’로 호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면서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또 주인과 종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에는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목회자를 포함하여 주님을 위해 일하는 모든 일꾼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간혹 ‘주님의 종’을 높여 부른다며 ‘종님’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지요. ‘종’은 종이지 ‘종님’이라고 하면 그는 이미 종이 아닙니다. 그냥 ‘주님의 종’이라고 하면 됩니다.

○…공중 기도를 하다보면 곤란한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 장로 등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우리 어법에 따르면 더 높은 분 앞에서는 아랫사람에게 ‘님’자를 붙여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를 하면서 담임목사나 장로,성도에게 막상 ‘님’자를 붙이지 않으면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도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높이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표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신자’들이 모여서 ‘성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신도’니 ‘사도’니 하는 말도 ‘무리’를 뜻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란 말은 어법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구태여 ‘성도’를 ‘성도들’로,‘신도’를 ‘신도들’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나 ‘신도’라는 말 자체가 복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 형제’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형제’라는 말은 ‘자매’‘남매’와 마찬가지로 ‘형과 아우’ 두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를 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오빠가 여동생을 ‘남매’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색합니다. 영어권에서는 상대가 남자이면 형이든 동생이든 ‘브라더’(Brother)로,여자이면 ‘시스터’(Sister)라고 하는데 이것이 ‘형제’와 ‘자매’로 잘못 번역된 것같습니다.‘○○○ 형제’라는 말 대신 ‘○○○ 씨’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형’‘누나’‘오빠’라고 하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일일이 간섭해주시고” 원래 ‘간섭(干涉)’이란 남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지나치게 간섭한다”고 할 때 이 말을 사용합니다. ‘간섭’을 ‘참견’이라고도 하는데 두 말 다 남의 영역에 끼여든다는 느낌을 줍니다. 우리 삶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밖에서 우리의 삶을 참견하거나 간섭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저희 삶을 주관해주시고”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도전을 주셨습니다” ‘도전(挑戰)’이란 말은 서열이나 지위 등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겨루어 승부나 우위를 가리려 하는 것입니다. 또‘신기록에 도전하다’라는 말처럼 이루기 어려운 일이나 대상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맞닥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도전의 삶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도전하셨다”는 의미로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전을 주셨다’는 말보다는 ‘내 마음에 도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해마다 12월31일 밤이 되면 교회마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예배의식을 갖습니다. 보통 ‘송구영신예배’라고 하던 것이 요즘에는 ‘자정예배’‘영시예배’ 등으로도 불립니다.그러나 ‘영시예배’나 ‘자정예배’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다고 봅니다. 단순히 예배가 시작되는 시간을 예배의 명칭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에서 ‘송구영신예배’가 좋지 않을지요?

○…“성경말씀을 봉독해 올리겠습니다.” 성경 봉독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받들어 읽는 매우 중요한 예배의 순서입니다. 이 순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내려주신다는 매우 엄숙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는 이 순서에는 전 성도를 자리에서 일어나게도 합니다. “봉독해 올린다”는 말은 인도자가 성도에게 말씀을 ‘읽어드린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받들어 읽겠습니다.”가 바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불신자’라고 합니다. 그들 중에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들도 많습니다. 그들을 모두 ‘불신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아직은 비신자일 뿐이니까요. ‘불신자’라는 말보다는 ‘비신자’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소경’‘장님’‘문둥병자’‘절뚝발이’…. 우리는 아직도 이런 말을 씁니다. 개역성경에 이러한 표현이 가끔 나오다보니,예배 중에도 이런 말이 여전히 사용되곤 합니다. 이런 호칭은 상대방을 비하하는 말로서 교회 바깥에서도 이미 사용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먼저 장애인을 비하하는 이런 말들을 듣기 좋은 말로 고쳐 써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소경’이나 ‘장님’은 ‘시각장애인’으로,‘문둥병자’는 ‘한센씨병환자’로,‘절뚝발이’는 ‘지체장애인’ 같은 말로 바꿔 써야겠지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보통 ‘사회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司會)’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서는 ‘사회자(Presider)’라기보다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Worship Leader)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모든 예배의 진행자는 ‘인도자(引導者)’,성례전과 같은 예전의 경우는 ‘집례자’로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배를 진행하는 이는 ‘사회자’가 아니라 ‘인도자’라고 해야 합니다.

○…예배순서 중에 ‘개회’와 ‘폐회’라는 말이 사용되곤 합니다. 그래서 “아무개 집사님이 기도해 주심으로 예배를 개회하겠습니다”“아무개 장로님 기도로 폐회합니다”라고 합니다. 예배는 회의가 아니기 때문에 ‘개회’나 ‘폐회’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아무개 목사님의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예배가 아니라 회의를 시작하고 마칠 때에는 ‘개회기도’나 ‘폐회기도’를 사용해도 좋겠지요.
 
○…어떤 교회의 주보를 보면 예배 중에 ‘헌금’ 순서가 들어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헌금’이란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는 ‘봉헌’으로 고쳐야 합니다. ‘봉헌’은 단순히 돈이나 예물을 드리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모두 포함합니다. 예배자들은 돈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도 함께 봉헌해야 합니다. ‘헌금’은 ‘봉헌’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헌금’이라고 하지 말고 ‘봉헌’이라고 했으면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목회자에게 매월 제공하는 생활비를 ‘봉급’이나 ‘월급’,‘임금’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용어는 회사같은 데에서 일한 대가를 지급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교회가 성직자나 사역자들에게 제공하는 돈은 단순한 생활비나 대가,보상의 차원을 넘어야 합니다. ‘월급’이라는 말은 ‘삯’이라는 의미가 크므로 ‘사례비’(謝禮費)라는 말을 쓰는 것이 낫겠습니다. ‘사례비’란 감사의 예로 드리는 것이니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서로 고마워하는 마음도 함께 주고받아야 하겠지요.

○…우리는 ‘결혼예배’와 ‘결혼예식’,‘임직식’과 ‘임직예배’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배와 예식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돌 추도 입학 결혼 임직 교회창립 등의 행사는 ‘예배’(worship)가 아니라 ‘예식’(ceremony)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람을 위한 모임이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에 ‘예배’라는 말을 붙이면 진정한 예배의 의미가 희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예배’가 아니라 ‘결혼예식’입니다.

○…“교우 여러분,목사의 아내인 사모(師母)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사모’란 스승의 부인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스승을 높여 ‘사부’(師父)라 하였는데 이는 스승은 아버지와도 같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모란 말도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사모’라는 말이 교회 내에서도 잘못 쓰이고 있습니다. 성도가 목사 부인을 ‘사모님’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대중 앞에서 자기 아내를 ‘사모’라고 하고 목사 부인이 자신을 ‘사모’라 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교우 여러분,제 아내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심코 ‘재수 없다’,‘운이 좋았다’라는 말을 사용하곤 합니다. 이런 말은 다른 종교에서 나온 것으로 기독교 교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들입니다. ‘손이 없는 날’‘사주팔자’‘운명’‘운수’‘명당자리’‘도로아미타불’‘공염불’‘신주를 모신다’는 말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재수 없다’라는 말은 아예 쓰지 말아야 하며 ‘운이 좋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다’고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장의문화에는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영결식’(永訣式)은 ‘영원한 이별’이라는 뜻이고 ‘영면’(永眠)은 ‘영원히 잠들었다’는 뜻으로 ‘부활’을 부정합니다. ‘명복’(冥福)은 죽은 뒤 명계(冥界)에 가서 받는 복이니 아예 다른 종교의 용어입니다. ‘영구’(靈柩)란 말도 죽은 사람의 혼백을 넣은 관이라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의 영을 관에 가두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영전’(靈前)‘영좌’(靈座)‘영구차’(靈柩車)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가려서 써야 하겠습니다.


○…‘성가대’인가,‘찬양대’인가? ‘성가대’라는 말은 이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가’라는 말은 불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합니다. ‘성가’는 노래 자체를 말하지만 ‘찬양’은 예배하는 행위를 말하니 의미가 다릅니다. 더구나 성경에는 ‘찬양’이라는 용어가 많이 나옵니다. ‘성가’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1960년대 이전에는 찬양대라는 말이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성가대’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성가대’보다는 ‘찬양대’로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복권이 사람들을 크게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매우 낮은 당첨 확률이지만 어떻게든 뽑혀보려고 야단들입니다. 성도는 무슨 일이든 그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비신자들은 그 결과를 우연의 일치로 보고 ‘운이 좋았다’‘운이 나빴다’고 합니다. ‘행운’이니 ‘우연’이니 하는 용어는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행운상 추첨’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안식일’과 ‘주일’이라는 용어가 마구 섞여 쓰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초창기까지는 십계명에 따라 토요일을 안식일로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지금도 유대교에서는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일요일에는 일을 합니다. 그후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시면서 일요일을 ‘주일’로 정하고 예배를 드리는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였습니다. 주일과 안식일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옛날 안식일에 그랬던 것처럼 주님의 날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일요일’보다는 ‘주일’이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간혹 직장에 전화를 걸어 “아무개 집사님 좀 바꿔주세요”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역할이 달라집니다. 호칭도 거기에 맞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집사이지만 가정에서는 아버지,직장에서는 과장입니다. 직장에서는 그곳에서의 역할과 상황에 맞게 호칭하는 것이 좋습니다. 직장에 전화를 걸었을 때에는 ‘아무개 씨’ 또는 ‘아무개 과장님’으로 부르십시오.

○…비신자들은 조상이 돌아가신 전날밤에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祭祀)’는 조상신을 섬기는 전통종교의 용어여서 기독교인들은 보통 ‘추도식(追悼式)’이라고 합니다. 추도(追悼)란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돌아가신 분들을 추억하며 슬퍼한다는 것은 좀 어색합니다. 그러니 ‘추도’보다는 ‘그리워한다’는 뜻을 가진 ‘추모’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사’가 아니라 ‘추모식’입니다.

○…기도는 은밀하게 하기도 하고 여럿이 공개적으로 하기도 합니다. 또 조용히 하기도 하고 부르짖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부르짖는 기도를 할 때 ‘주여 삼창’이란 걸 외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여!”라는 말을 크게 세 번 외치고 나서 기도를 시작하는 겁니다. 이에 대해 우려를 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기도가 자칫 자기 최면이 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예수님을 믿는 종교단체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 종류 만큼이나 이름도 여러 가지입니다. 크게 신교와 구교로 나뉘는데 구교는 ‘천주교’로 불립니다. 그러나 신교에는 마땅한 이름이 없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등의 이름이 말해주듯 ‘기독교’라고도 하고 ‘예수교’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란 말은 이미 구교는 물론 그리스정교회를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신교’든 ‘기독교’든 ‘예수교’든 하나의 이름을 속히 정해야 하겠습니다.

○…간혹 교회에서 나오는 상패 문안 같은 것을 보면 그것을 주는 사람을 ‘아무개 목사’라고 쓴 것을 보게 됩니다.

공중이나 윗사람 앞에서는 자신을 칭할 때 자기 성명 뒤에는 직함을 붙이지 않습니다. ‘아무개 목사’가 아니라 ‘목사 아무개’라고 해야 합니다. 상을 받는 사람도 ‘집사 아무개’식으로 해야 합니다. 저자의 표시나 공고문의 표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윗사람이 아랫사람이나 비슷한 위치의 사람에게 자기을 칭할 때에는 ‘아무개 목사’라고 해도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부를 때에는 상대방 성명 뒤에 직함을 붙여야 합니다.

○…“묵도하심으로써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시작할 때 ‘묵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배학자들은 ‘묵도’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묵도’라는 말이 일본 신사참배 순서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성경에도 ‘묵도’라는 말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묵도’인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묵도’라는 말보다는‘묵상’이란 용어를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믿는다.’ 이런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말은 있어도 ‘교회를 믿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말도 애매한 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나는 크리스천이다”“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우리는 생활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많이 폅니다. 우리가 가진 물질을 이웃과 나누는 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거나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들을 ‘불우 이웃’이라고 불러서는 안됩니다. 누가 진짜 불우 이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존중하는 것이 진정 그를 돕는 일입니다.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issa)의 합성어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번역하면 ‘성탄기념예배’ 정도가 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라는 뜻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성탄절을 X-mas라고도 하는데 X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희랍어 크리스토스(kristovs)의 첫 글자입니다. 그러나 X는 미지수나 부정의 기호로도 쓰이므로 ‘성탄절’‘성탄일’‘주님 오신 날’ 등으로 부르면 좋겠습니다.

○…히브리서 1장에는 “경주를 경주하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경주를 경주한다는 건 표현이 어색합니다. 이는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로 고치면 좋겠습니다. 또 찬송가 가사 중에 ‘거칠은 광야’는 ‘거친 광야’로,“버리신 그 사랑 고마와라”에서 ‘고마와라’는 ‘고마워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시작할 때 인도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묵도하심으로써 예배를 시작하시겠습니다.” 그러나 예배학자들은 이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묵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묵도’는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으로 하는 기도’인데 이왕이면 초신자도 알기 쉽게 “마음으로 기도하심으로써”나“조용히 기도하심으로써”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어제 내용 중 ‘성경에도 묵도라는 말은 없습니다.’는 착오였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세 번,개역개정판에는 두 번 나옵니다. 그리고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묵도’를 ‘기도’로 바꾸었습니다.

○…“예수 천당,불신 지옥” 아마도 이런 외침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자주 들어봤을 것입니다. 전도용으로 자주 사용되는 이 짧은 표어에 대해 신학자들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천당’이라는 말보다는 성경에 나오는‘천국’‘하나님의 나라’‘하늘나라’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그리스도인들끼리 무심코 자주 쓰는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한다는 건 좀 어색합니다. 어찌 보면 인사는 정확히 자기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우리의 이름으로 안 되는 경우에만 쓰는 겁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라고 하는 게 적합합니다.

○…우리는 예배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자주 욉니다. 그때마다 인도자는 “주기도문 하시겠습니다”“사도신경 하시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겠습니다”라고 구체적으로 인도해주면 어떨까요? 그리고 주기도문은 마침용 기도가 아니므로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용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성도들이 열심히 들고만 다니는 것이 성경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암송만 하는 건 사도신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도신경이란 기도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문입니다. 따라서 눈을 감기보다는 오히려 두 눈을 바로 뜨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사도신경으로 자기의 신앙을 또렷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곳곳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있습니다. ‘훤화하다’는 ‘떠든다’는 뜻이고 ‘신묘막측하다’는 ‘신기하고 묘함이 측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숙곳에서 발행했다’는 말은 ‘숙곳에서 출발했다’는 뜻이고 ‘영솔하다’는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이런 어려운 말들을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 쉬운 말로 고쳐 써야 복음이 전달됩니다.

○…성경에는 ‘구속’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 말은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구속’(拘束) 즉,사람을 체포해서 신체를 속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속’(救贖)은 사람을 구한다는 뜻과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제받는다는 뜻이 합쳐진 것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을 ‘몽학선생’(蒙學先生)에 비유합니다. ‘몽학선생’이란 고대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의 가정에서 소년들을 돌보기 위해 고용되었던 노예 가정교사를 말합니다. ‘몽학선생’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개역개정판에서 수정한 대로 ‘초등교사’로 바꿔 써야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사랑의 흉배’가 나옵니다. 흉배는 관복의 가슴과 배에 붙인 표장을 말합니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에서는 이를 ‘사랑의 호심경’으로 바꿨습니다. ‘호심경’은 갑옷에 호신용으로 붙인 구리조각인데 이 뜻을 아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겁니다. 모두가 아는 쉬운 말을 찾아 써야겠습니다.

○…‘성령 축제’‘부활 축제’ 등 언제부터인지 교회 안에서 ‘축제’(祝祭)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일본에서 유래되었으며 제사의 의미가 포함돼 있습니다. ‘전야제’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축제’는 ‘성령 잔치’로,‘부활절 축제’는 ‘부활절 절기 행사’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우리가 기도할 때 자주 사용하지만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관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기도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표현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라면 ‘저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명확히 표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기도하는 대로 무작정 따라 하지 말고 뜻을 잘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인가,‘하느님’인가? 애국가를 부를 때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고쳐 부릅니다. 초창기 성경에서는 하나님으로 표기됐으나 아래아가 없어지면서 ‘하나님’과 ‘하느님’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하느님’이 맞지만 신교는 유일신을 강조하기 위해 문법을 초월해 수사에 존칭접미사를 붙여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우리말로 주님을 다르게 표기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란 호칭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일학교’인가,‘교회학교’인가? 언제부터인가 ‘주일학교’라는 말 대신 ‘교회학교’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주일학교’는 영국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어린이들에게 학교교육과 성경교육을 시켜줌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주일학교’는 일반 학교교육을 전제로,‘교회학교’는 교회교육을 전제로 하는 용어입니다. 교회교육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주일학교’보다는 ‘교회학교’가 적합하다고 봅니다.

○…‘교사’인가,‘반사’인가? 교회학교에서 ‘반사’와 ‘교사’라는 말이 함께 쓰입니다. ‘반사’는 분반공부 때 반을 맡아서 가르친다는 의미이고 ‘교사’는 교회학교를 전제로 한 말입니다. ‘반사’보다는 ‘교사’가 적합합니다. 그러나 교회학교 ‘교사’는 일반 학교 ‘교사’와는 그 역할이 달라야 합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어느 초신자가 여집사님을 ‘아주머니’로 호칭해서 한바탕 웃었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은 교회에서 사용되는 모든 용어가 낯섭니다. ‘롬’‘살전’처럼 성경을 가리키는 약자는 암호같고 ‘기립’이나 ‘착석’같은 말도 어렵습니다. 교회는 가급적 누구나 알 수 있게 쉬운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주일은 쉽니다’라는 광고 카피가 인구에 회자된 일이 있습니다. ‘주일’이라는 표현 때문이죠. 주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요일’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일요일은 7일의 첫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입니다. ‘일요일’을 ‘주일’로 부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도 ‘주일’로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공관복음에는 ‘세례 요한’이라는 호칭이 자주 나옵니다. 다른 ‘요한’과 구별해서 그렇게 부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베토벤을 ‘음악 베토벤’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음악가 베토벤’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도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지금도 시골 교회에 가보면 ‘00예배당’이란 간판이 붙어있습니다. 요즘에는 예배당이란 말 대신 교회란 말이 많이 쓰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백성들의 모임’‘교인들의 무리’를 가리키고 ‘예배당’이나 ‘교회당’은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나 건물을 말합니다.

‘예배당’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교회는 움직인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예배당’이나 ‘교회당’은 건물이나 장소의 의미로 ‘교회’는 교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구분해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요즘 ‘성전’과 ‘교회’라는 말이 혼용되고 있습니다. 성전은 지성소를 모신 하나님의 집을 뜻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이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가 신앙의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는 데에는 신학적으로 무리가 있습니다. 성전이라기보다는 예배당이나 교회당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양과 목자에 관한 비유가 자주 나옵니다. 여기서 양은 우리를,목자는 주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목사를 목자로 오해하고 목사도 교인을 자기 양으로 착각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목자는 주님뿐이시고 목회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양일 뿐입니다. 이 땅에서 양들을 양육하는 심부름을 맡은 목사가 교인들을 두고 내 양이니 네 양이니 한다면 잘못된 일이지요.

○…‘바로’는 이집트의 왕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원래 헬라어로는 ‘파라오’라고 합니다. ‘바로’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직책 이름입니다. ‘대왕’이나 ‘임금’이란 뜻이지요. 그러니 ‘바로왕’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바로’라고 해야 합니다.

○…‘예배하다’인가,‘예배 드리다’인가? ‘예배하다’보다는 ‘예배 드리다’가 겸손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예배 드리다’는 뜻이 중복되므로 어법상으로는 ‘예배하다’가 좋은 표현입니다. 마찬가지로 ‘축하 드리다’‘찬송 드리다’‘기도 드리다’도 ‘축하하다’‘찬송하다’‘기도하다’로 고쳐 쓰면 좋겠습니다.

○…목회자들이 무심코 ‘내가 세운 장로’‘내가 세운 권사’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 자신이 목회하는 동안에 세운 직분자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자신이 임직시켰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세운 장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장로’입니다.

○…주일 예배는 ‘예배에의 부름’이라는 순서로 시작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에 초대하심을 뜻합니다. ‘Call to worship’입니다. 그런데 ’예배로의 부름‘이나 ’예배에의 부름‘은 일본식 표현으로 우리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부름‘보다는 ’부르심‘이 더 정중한 표현입니다. ’예배로 부르심‘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하나님,우리 제단을 축복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제단’은 ‘교회’라고 바꾸는 게 좋습니다. 또 ‘우리’는 ‘저희’로 ‘축복’은 ‘복을 내려주소서’로 바꾸는 게 적합합니다. “하나님,저희 교회에 복을 내려주소서.”

○…“지금은 예배하는 처음 시간이오니 마치는 시간까지…” 예배중 공중 기도를 인도하시는 분들이 습관적으로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보다는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하는 게 적합합니다. 사실 기도 순서는 예배의 처음이 아니라 중간에 진행되니까요.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개에게 세례를 주노라.” 목회자가 세례를 베풀 때 하는 선언문입니다. 세례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세례는 누가 주는가보다 누구의 이름으로 주는가가 중요합니다. 세례를 주는 사람이 드러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베푸는 사람을 가리키는 ‘내가’라는 말을 지나치게 강조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내가 아무개에게 세례를 주노라”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축도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에 근거합니다.그런데 교단에 따라 목회자의 축도문이 다릅니다. 개역성경 본문과 같이 ‘-있을지어다’로 축복자의 권위를 나타내며 선언을 하는가 하면 “-를 축원하옵니다”로 기원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앞의 본문은 표준 새번역 성경,현대어 성경,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빕니다’로 개정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이면서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통일된 축도문을 마련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우리 제단을 축복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제단’은 ‘교회’라고 바꾸는 게 좋습니다. 또 ‘우리’는 ‘저희’로 ‘축복’은 ‘복을 내려주소서’로 바꾸는 게 적합합니다. “하나님,저희 교회에 복을 내려주소서.”

○…“지금은 예배하는 처음 시간이오니 마치는 시간까지…” 예배중 공중 기도를 인도하시는 분들이 습관적으로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보다는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하는 게 적합합니다. 사실 기도 순서는 예배의 처음이 아니라 중간에 진행되니까요.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개에게 세례를 주노라.” 목회자가 세례를 베풀 때 하는 선언문입니다. 세례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세례는 누가 주는가보다 누구의 이름으로 주는가가 중요합니다. 세례를 주는 사람이 드러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베푸는 사람을 가리키는 ‘내가’라는 말을 지나치게 강조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내가 아무개에게 세례를 주노라”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축도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에 근거합니다.그런데 교단에 따라 목회자의 축도문이 다릅니다. 개역성경 본문과 같이 ‘-있을지어다’로 축복자의 권위를 나타내며 선언을 하는가 하면 “-를 축원하옵니다”로 기원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앞의 본문은 표준 새번역 성경,현대어 성경,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빕니다’로 개정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이면서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통일된 축도문을 마련했으면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25:2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작다’의 반대되는 말은 ‘많다’가 아니라 ‘크다’입니다. 그러니 ‘많은 것’보다는 ‘큰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교회를 치게”(20:25)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양을 친다’라는 말은 있어도 ‘교회를 친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교회를 치게’는 ‘교회를 돌보게’와 같은 말로 고쳐야 합니다.


○…디모데전서에는 “하나이신 하나님”(1:17)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미 ‘하나님’이라는 말에 ‘하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를 강조해야 한다면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역대하에는 ‘불가능수’(대하 12:3)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라는 뜻으로 쓴 것 같습니다. ‘부지기수’(不知其數)라는 말은 있어도 ‘불가능수’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냥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면 좋겠습니다.

○…아모스에는 “포도원을 심었으나”(5:11)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포도나무를 심을 수 있으나 포도원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포도원을 가꾸었으나”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사사기에는 “모세의 장인 호밥”(4:11)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의 장인은 이드로이고 호밥은 처남입니다. 그러니 ‘모세의 장인 이드로’나 ‘모세의 처남 호밥’으로 고쳐야 합니다.

○…성경에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많습니다. “번병의 체번”(삿 7:19)은 ‘보초 교대’라는 뜻이고 “설만하게”(느 9:18)는 ‘모독하게’라는 뜻입니다. “준승”(욥 38:5)은 ‘측량줄’을 뜻하며 “자여손”(출 34:7)은 ‘자손의 자손’을 뜻합니다. “전집하지 말지니”(신 24:6)는 “저당잡지 말지니”라는 뜻입니다.

○…찬송가 중에는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내게 만족하오니”(409장)는 “내게 만족 주시니”로,“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364장)은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으로 다듬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즐기는 제물로는”(167장)에서 ‘이 세상이’는 “이 세상에서”로 바꿔야 하고 “삼위일체 되신 주”(9장)는 “삼위일체이신”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원히 방패요 또 산성이신”(31장)에서 “영원히”도 “영원한”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찬송가 중에는 어휘가 잘못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주의 전에 모여서 크신 축복 빕니다”(56장)에서 “축복 빕니다”는 “복을 빕니다”로 해야 합니다.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186장)에서 ‘튼튼히’는 ‘든든히’로,“내 마음 귀가 열리면 그 말씀 밝히 들리네”(75장)에서 ‘밝히’는 ‘잘’ 혹은 ‘똑똑히’로 고쳐야 합니다. “주 널 위해 비네 늘 빌으시네”(412장)에서 ‘빌으시네’는 ‘비시네’로 고쳐 써야 합니다.

○…‘사단’인가,‘사탄’인가? 개역성경은 약 100년 전의 우리 말을 토대로 번역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어렵고 낯선 표현이 적지 않습니다. ‘사단’은 그 당시 표기법에 따른 것으로 요즘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사탄’이 맞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개역개정판 등 새로운 성경에서는 ‘사탄’으로 고쳤습니다. ‘사단’이 아니라 ‘사탄’입니다.
○…“다같이 박수를 쳐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을 격려해줄 때 우리는 ‘박수를 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박수(拍手)’가 이미 손뼉을 친다는 뜻이므로 ‘박수를 친다’는 말은 ‘손뼉을 친다’로 고쳐써야 하겠습니다. 요즘 ‘파송의 노래’가 교회에서 많이 불립니다. 이 노래 중에 “거칠은 광야 위에 꽃은 피어나고”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거칠은’은 ‘거친’이라고 고쳐 써야 합니다.

○…“우리의 바램은 주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바라다’라는 말의 제일명사형을 ‘바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램’은 ‘바람’으로 해야 맞습니다.

○…“이 찬양을 누구와 듣고 싶으세요?” 가끔 방송에서 듣는 표현입니다. ‘찬양을 듣는다’는 말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이 노래를 누구와 함께 듣고 싶으세요”라고 하든가 “이 찬양을 누구와 함께 드리고 싶으세요?”로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이 표현은 엄밀히 말해 상대방이 좋은 하루가 되라는 뜻입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도 마찬가지로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좋은 하루 맞이하세요”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도신경 중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이란 성구의 앞의 ‘사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고 뒤의 ‘사는 것’은 영원한 삶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 또는 “몸의 부활과 영생”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아무개 집사님이 특송을 해주시겠습니다” 흔히 예배 중에 회중이 부르는 노래는 ‘찬송’으로,찬양대가 부르는 노래는 ‘찬양’으로,다른 노래 순서는 ‘특송’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찬송에 ‘특별송’이 있고 ‘보통송’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예배 순서는 모두 특별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 데나 ‘특’(特)이란 말을 남발하지 말고 누가 부르든 똑같이 ‘찬송’ 또는 ‘찬양’이라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참 좋은 찬송이죠. 그러나 ‘우리에게’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향하다’의 목적어는 ‘우리에게’라기보다는 ‘우리를’이 어울립니다.‘우리를 향하신’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찬송가 중에 ‘앞길의 장애를 두려말아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두려’라는 말은 ‘두려워’라는 말을 잘못 쓴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말아라’는 ‘두려워하지 말아라’로 바로잡아야겠습니다.

○…흔히 교회마다 ‘안내위원’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인들에게 주보를 나눠주거나 처음 온 이들에게 교회의 이모저모를 알려줍니다. 우리가 교인들을 맞이한다는것은 단순한 안내에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안내위원’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영접위원’이라는 말을 쓰면 어떨까요?

○…사도신경 중 “그의 외아들”은 ‘그분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정중합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에서 ‘이는’도 ‘그분은’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성령’은 ‘성령님’으로,‘죽으시고’는 ‘돌아가시고’라고 고쳐 써야 합니다.

○…사도신경 중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는 누가 누구에 의해 잉태를 하였는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고치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시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사도신경 중 ‘동정녀 마리아에게’와 ‘빌라도에게’는 조사를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나 ‘동정녀 마리아로부터’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는 ‘본디오 빌라도로부터’나 ‘빌라도에 의해서’라고 해야 맞습니다.

○…사도신경 중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는 부분은 문맥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능동태인 ‘장사한 지’는 수동태인 ‘장사되신 지’로 바뀌어야 합니다. ‘죽은 자’도 ‘죽은 사람’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신경 중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서 ‘저리’가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저리로서’는 틀린 번역이므로 ‘거기로부터(from thence)’로 고쳐야 하겠습니다.

○…사도신경의 끝부분인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는 문맥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룩한 공회를 믿고 성도간의 교통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신명기에는 “너의 진 밖에 변소를 베풀고”(23:12)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음식을 베푼다”고는 해도 “변소를 베푼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변소를 마련하고”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민수기에는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25:11)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질투심으로 질투한다’는 표현도 어색하지만 전체 문맥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느하스가 한 일을 보아서 내가 더 이상 이스라엘 자손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

○…역대상에는 여두둔의 여섯 아들 이름이 나옵니다. “여두둔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25:3) 그런데 아무리 세어봐도 다섯 사람밖에 되지 않습니다.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찬송가 370장에는 “낮에는 골몰하나”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여기서 ‘골몰하다’는 ‘연구에 골몰하다’처럼 한 가지 일만 깊이 생각하며 거기에 파묻히는 걸 뜻합니다. 그러니 여기에 ‘골몰하나’라는 표현은 ‘부지런히 일하나’처럼 고쳐 써야 합니다.

○…사무엘하에는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2:14)는 표현이 나옵니다. ‘소년들로 일어나서’는 ‘소년들을 일어나게 해서’나 ‘소년들이 일어나서’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난하게 하자’는 ‘겨루게 하자’라고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마 25:2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작다’의 반대되는 말은 ‘많다’가 아니라 ‘크다’입니다. 그러니 ‘많은 것’보다는 ‘큰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교회를 치게(행 20:25)’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양을 친다’라는 말은 있어도 ‘교회를 친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교회를 치게’는 ‘교회를 돌보게’와 같은 말로 고쳐야 합니다.

○…디모데전서에는 ‘하나이신 하나님(딤전 1:17)’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미 ‘하나님’이라는 말에 ‘하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를 강조해야 한다면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역대하에는 ‘불가능수(대하 12:3)’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라는 뜻으로 쓴 것 같습니다. ‘부지기수(不知其數)’라는 말은 있어도 ‘불가능수’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냥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면 좋겠습니다.

○…아모스에는 ‘포도원을 심었으나(암 5:11)’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포도나무를 심을 수 있으나 포도원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포도원을 가꾸었으나’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사사기에는 ‘모세의 장인 호밥(삿 4:11)’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의 장인은 이드로이고 호밥은 처남입니다. 그러니 ‘모세의 장인 이드로’나 ‘모세의 처남 호밥’으로 고쳐야 합니다.

○…성경에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많습니다. ‘번병의 체번(삿 7:19)’은 ‘보초 교대’라는 뜻이고 ‘설만하게(느 9:18)’는 ‘모독하게’라는 뜻입니다. ‘준승(욥 38:5)’은 ‘측량줄’을 뜻하며 ‘자여손(출 34:7)’은 ‘자손의 자손’을 뜻합니다. ‘전집하지 말지니(신 24:6)’는 ‘저당잡지 말지니’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25:2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작다’의 반대되는 말은 ‘많다’가 아니라 ‘크다’입니다. 그러니 ‘많은 것’보다는 ‘큰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교회를 치게”(20:25)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양을 친다’라는 말은 있어도 ‘교회를 친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교회를 치게’는 ‘교회를 돌보게’와 같은 말로 고쳐야 합니다.

○…디모데전서에는 “하나이신 하나님”(1:17)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미 ‘하나님’이라는 말에 ‘하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를 강조해야 한다면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역대하에는 ‘불가능수’(대하 12:3)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라는 뜻으로 쓴 것 같습니다. ‘부지기수’(不知其數)라는 말은 있어도 ‘불가능수’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냥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면 좋겠습니다.

○…아모스에는 “포도원을 심었으나”(5:11)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포도나무를 심을 수 있으나 포도원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포도원을 가꾸었으나”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사사기에는 “모세의 장인 호밥”(4:11)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의 장인은 이드로이고 호밥은 처남입니다. 그러니 ‘모세의 장인 이드로’나 ‘모세의 처남 호밥’으로 고쳐야 합니다.

○…성경에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많습니다. “번병의 체번”(삿 7:19)은 ‘보초 교대’라는 뜻이고 “설만하게”(느 9:18)는 ‘모독하게’라는 뜻입니다. “준승”(욥 38:5)은 ‘측량줄’을 뜻하며 “자여손”(출 34:7)은 ‘자손의 자손’을 뜻합니다. “전집하지 말지니”(신 24:6)는 “저당잡지 말지니”라는 뜻입니다.

○…흔히 ‘주님의 성령’이라는 표현을 듣게 됩니다. 성부님 성자님 성령님은 동격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성령’은 해석 여하에 따라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또는 ‘성령님’,또는 ‘주님 성령님’이라고 하면 무난할 것입니다.

○…방송 설교를 듣다보면 우리말의 발음을 틀리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를 ‘처채’로,‘육이오’를 ‘융니오’로,‘효과’를 ‘효꽈’로 발음하는 수가 있습니다. 설교자의 발음은 그것을 듣는 사람들과 사회의 언어문화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설교문안과 함께 정확한 발음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혈통이 다른 종족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우리는 ‘혼혈아’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사람은 ‘혼혈아’가 아니라 ‘혼혈인’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혼혈아’나 ‘혼혈인’이라는 말에는 당사자를 낮잡아보려는 뜻이 숨어 있으므로 가급적 이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요즘에는 박사학위를 받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무개 목사님 박사학위 수여’라는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수여’(授與?confer)는 학위나 상을 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무개 목사님 박사학위 수여’라는 표현은 ‘아무개 목사가 박사학위를 줬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렵고 헷갈리는 말보다 쉽고 정확한 말을 쓰면 좋겠습니다. ‘아무개 목사,박사학위 받아’라고 하면 됩니다.

○…“하나님,우리 제단을 축복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제단’은 ‘교회’라고 바꾸는 게 좋습니다. 또 ‘우리’는 ‘저희’로 ‘축복’은 ‘복을 내려주소서’로 바꾸는 게 적합합니다. “하나님,저희 교회에 복을 내려주소서.”

○…“지금은 예배하는 처음 시간이오니 마치는 시간까지…” 예배중 공중 기도를 인도하시는 분들이 습관적으로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보다는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하는 게 적합합니다. 사실 기도 순서는 예배의 처음이 아니라 중간에 진행되니까요.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개에게 세례를 주노라.” 목회자가 세례를 베풀 때 하는 선언문입니다. 세례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세례는 누가 주는가보다 누구의 이름으로 주는가가 중요합니다. 세례를 주는 사람이 드러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베푸는 사람을 가리키는 ‘내가’라는 말을 지나치게 강조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내가 아무개에게 세례를 주노라”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축도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에 근거합니다.그런데 교단에 따라 목회자의 축도문이 다릅니다. 개역성경 본문과 같이 ‘-있을지어다’로 축복자의 권위를 나타내며 선언을 하는가 하면 “-를 축원하옵니다”로 기원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앞의 본문은 표준 새번역 성경,현대어 성경,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빕니다’로 개정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이면서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통일된 축도문을 마련했으면 합니다.

○…‘바로’는 이집트의 왕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원래 헬라어로는 ‘파라오’라고 합니다. ‘바로’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직책 이름입니다. ‘대왕’이나 ‘임금’이란 뜻이지요. 그러니 ‘바로왕’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바로’라고 해야 합니다.

○…‘예배하다’인가,‘예배 드리다’인가? ‘예배하다’보다는 ‘예배 드리다’가 겸손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예배 드리다’는 뜻이 중복되므로 어법상으로는 ‘예배하다’가 좋은 표현입니다. 마찬가지로 ‘축하 드리다’‘찬송 드리다’‘기도 드리다’도 ‘축하하다’‘찬송하다’‘기도하다’로 고쳐 쓰면 좋겠습니다.

○…목회자들이 무심코 ‘내가 세운 장로’‘내가 세운 권사’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 자신이 목회하는 동안에 세운 직분자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자신이 임직시켰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세운 장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장로’입니다.

○…주일 예배는 ‘예배에의 부름’이라는 순서로 시작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에 초대하심을 뜻합니다. ‘Call to worship’입니다. 그런데 ’예배로의 부름‘이나 ’예배에의 부름‘은 일본식 표현으로 우리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부름‘보다는 ’부르심‘이 더 정중한 표현입니다. ’예배로 부르심‘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하나님,우리 제단을 축복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제단‘은 ’교회‘라고 바꾸는 게 좋습니다. 또 ’우리‘는 ’저희‘로,’축복‘은 ’복을 내려주소서‘로 바꾸는 게 적합합니다. “하나님,저희 교회에 복을 내려주소서.”
○…신약성경의 공관복음에는 ‘세례 요한’이라는 호칭이 자주 나옵니다. 다른 ‘요한’과 구별해서 그렇게 부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베토벤을 ‘음악 베토벤’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음악가 베토벤’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도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요즘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으로 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게 모르게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은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들이 ‘탈북자’라는 호칭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한 자유이주민’으로 부르기로 했답니다. 이미 ‘탈북자’라는 말이 익숙해졌지만 당사자들이 원하는 대로 ‘북한자유이주민’ 또는 ‘자유이주민’으로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사장님!’하고 부르면 여러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고 합니다. 이젠 사장이란 호칭도 여간 흔해진 게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선생’이란 호칭이 그렇게 쓰이고 있습니다. ‘집사’가 아닌 젊은 사람들을 쉽게 ‘김 선생님!’‘이 선생님!’하고 부릅니다. 마땅한 호칭이 없어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20대 초반 청년에게조차 ‘선생(先生)’이란 호칭을 쓰는 건 어색합니다. 아직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는 ‘아무개 씨’라는 호칭이 적합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교사 선생님’이라는 말은 뜻이 중복되니 ‘교사’든 ‘선생님’이든 하나만 써야겠지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사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바울,요한,베드로,야고보 같은 사도들의 이름을 자주 인용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칭할 때 너무 가볍게 이름을 부르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을 성명만 부르지 않고 ‘이순신 장군’ 같이 직책명을 붙여서 예를 갖춥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높임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보다는 ‘바울 선생’이라 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요즘 해외여행이 늘어나면서 선교지를 방문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이나 청년들이 선교 현장을 찾아갑니다. 이런 경우 언제부터인지 ‘선교 여행’ 또는 ‘단기 선교’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러나 실제로 선교를 하러 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단순한 여행이거나 선교현장을 견학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도 ‘선교여행’이나 ‘단기선교’라고 하는 건 어색합니다.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아니면 그냥 ‘여행’이나 ‘선교현장 견학’이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선교현장을 많이 견학하시기 바랍니다.

○…“찬양대의 찬양에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배시간에 인도자가 무심코 하는 말입니다. 찬양은 기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면서도 회중들에게도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찬양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며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찬양대가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무난할 것입니다.

○…비신자들은 보통 장례를 마친 후에 초우(初虞),재우(再虞),삼우(三虞)라고 하여 세 번 제사를 지냅니다.

이 중 장사 지낸지 3일만에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는 걸 ‘삼우제’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그걸 따라서 ‘삼우제’라고 하는 건 잘못입니다. ‘삼우제’는 다른 종교의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삼우제(三虞祭)’ 대신 ‘첫 성묘(省墓)’라고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개 집사님이 소천(召天)하셨습니다.” 교회 내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소천(召天)’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입니다. ‘소명(召命)’이란 말의 구조가 이와 비슷합니다. 이 경우 “나는 소명받았다”고 하지,“나는 소명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소천했다”는 표현은 “소천을 받았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말보다는 ‘별세(別世)하셨다’‘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를 살펴보면 도무지 어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창검이 겁 없네’는 ‘창검에도 겁 없네’고 해야 합니다. 사람도 아닌 창검이 겁을 먹을 리가 없습니다.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는 ‘나의 귀를 막지 마소서’가 옳습니다. ‘황무지가 꽃 피니’는 ‘황무지에 꽃 피니’가 맞습니다. 황무지가 어떻게 꽃을 피우겠습니까? ‘보혈의 피’는 그냥 ‘보혈’이 맞습니다. 보배로운 피가 곧 보혈이니까요.
 


 

이의용<교회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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