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 감동 감화 그리고 감명의 나날들
김창수•이승남 가정
1. 입교 및 성화학생 2. 축복가정 부인 동원 3. 군대 생활 4. 통일신학교 5. 약혼과 축복 6. 가정출발 7. 공직자의 삶, 계시, 자르딘 추억 8. 참부모님 존영모시기 9. 목회 활동의 희비 10. 죽음에서 부활 11. 목회 재출발 12. 자녀 축복 13. 미래 비전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김창수, 누님을 따라 입교, 가난한 교회 살림을 보고 친구들이 탈락, 7년 군복무, 통일신학교 만학도, 드레스를 입은 신부들이 전철로 이동, 훈독회와 생활실천으로 자녀양육, 목회자는 교량역할, 경호임무, 참아버님께 혼난 얘기, 존영을 모시는 기적, 목회자의 고통과 기쁨, 평양방문, 후두암으로 죽음에서 부활, 목련을 통해 이주희 전도, 작은 유엔가정으로 소문, 43가정 실세화에 몰입
1. 입교 및 성화학생
나의 고향은 경기도 파주시 금촌이다. 누님(김인희. 1800가정)이 먼저 통일교회에 다녔다. 1964년 초등학교 4학년 때, 방과 후에 가정집 모양의 월세교회인 파주 통일교회(오명우 지역장)에 수시로 놀러 다녔다. 주일학교는 없었지만 집에서 10분 거리인 교회에 자주 놀러 갔다. 그런데 교회 방에는 누님이 학교에 갈 때 가지고 간 도시락이 놓여져 있는 것을 자주 보았다. 당시 중학생이 놓고 간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지역장의 심정이 애달팠을 것이다.
중학생이 된 나는 누님의 손에 이끌려 단칸방 교회(한효역 지역장)에서 입회원서(1969년 2월 2일)를 제출했다. 누님은 농촌계몽 개척 전도를 다녔다. 예배 시간에 “아버지!” 하며 기도하면, 저쪽에서도 “아버지!” 하며 우는 분위기였다. “왜 교회에서 울지? 교회는 찬송하고 기도하고 웃으면서 좋아하는 곳이 아닌가?” 나는 이해가 안 되었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아서 기도를 할 때마다 어색하였다.
우리 집은 미곡상회를 해서 성미, 떡, 부식 등을 교회에 자주 갖고 갔다. 중학생 때, 학교에서 ‘승공의 노래’를 배웠다. 교회에서 국제승공연합을 창설했다고 해서 교회와 정부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줄 알았다. “국가가 후원을 해준다면 통일교회는 급속도로 발전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성화학생들이 함께 성지기도를 했고, 등교와 하교 때에 교회를 방문하였다. 전국 성화학생 총회에 참석할 비용 마련을 위해 껌을 팔거나 잔디 씨를 파는 만물복귀 사업을 했다. 교복을 입고 불우이웃돕기 어깨띠를 하고 껌 통을 들고 서울역 주변의 다방을 다녔다. 학교 뺏지를 보고 말을 건네는 아저씨에게 은근히 껌을 많이 사주길 바라기도 했다. 길을 지날 때 경찰이 보이면 겁이 나서 피하기도 하였다. 전국 성화학생 총회에 참석하느라 거짓말로 결석하여 선생님과 아버지한테 몽둥이로 맞기도 했다. 몸은 아팠지만 속으로는 “언젠가 나의 진심을 알아주실 날이 올 것이다.”고 생각했다.
2. 축복가정 부인 동원
참부모님께서는 선배가정 부인 3년 임지 총동원령을 내리셨다.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해 임진강 물이 얼면 안 된다.”는 주제로 기도 정성을 들였다. 대원 부인들의 뜨거운 열정어린 활동으로 교회는 생동감이 넘쳤다. 주체가 매달 보내주는 생활비가 넉넉하지 않아 대원 및 교회 살림은 함께 어려웠다. 이런 모습에 실망한 친구들은 “통일교회에 다니면 가난하게 살게 될 것이다.”면서 하나 둘 떨어졌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그러한 어려운 환경이 거부감 없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뭔가 새 역사를 창조하고 개척하는 선구자들의 고난의 자세가 나에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이끌려서 집에 먹을 것이 생기면 교회에 갖고 갔다. 뭔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기쁨의 심정을 갖게 해주었다.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교회에 놓고 학교에 다니던 누님의 모습, 어린 학생의 점심 도시락을 먹어야만 하는 목회자의 심정, 어느 것 하나 풍요로운 것이 없는 교회 살림살이, 각종 경제적으로 어려운 내용들이 왜 나에게는 애틋한 정으로 받아들여졌을까? 동질감을 가질 수 있었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내가 원리 말씀의 깨달음도 없이,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누님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선한 조상들이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영육계 협동으로 나에게는 여과 없이 받아들여졌다.
성화학생 때 성지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이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늘부모님께서 소유하신 땅이 없어서 작은 성지를 정해놓은 것이 안타까웠고, 거기서 많이 정성을 들였다. 주일날 이른 아침, 성지에 올라 서울 방향을 바라보고 성화학생회 발전을 놓고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기도 중에 흰 도포를 입은 산신령 같은 분이 서울 방향의 하늘에서 나에게 다가오셨다. 신기하고 신비롭기도 하였다.
성지기도의 거룩한 마음을 간직한 채 일찍 교회에 갔다. 당시 교회는 선배가정 부인 3년 전도 기간으로 활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예배 준비에 바쁜 대원 사모님들이 갑자기 큰소리를 내며 시끄러워졌다. 참아버님께서 효진님을 대동하시고 방문하신 것이다. 대원 사모님들은 모심의 준비에 바빴다.
나는 까까머리 중학생의 모습으로 첫 경배를 드렸다. 그리고는 참아버님이 궁금해서 용안을 쳐다보았다. 참아버님의 작은 눈과 마주쳤다. 육신의 아버지 같은 자상함과 엄격한 영력이 풍겨왔다. 친아버지로 느껴졌다. 성지 기도의 거룩한 계시와 참아버님과 첫 만남은 그 이후로 내가 힘든 공적인 삶을 사는데 있어서 원동력이 되었다. 그 때는 철이 없어서 참부모님을 뵙고 경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몰랐다.
3. 군대 생활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일반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국비생으로 광운대학교 부설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국방부에서 육군 기술 위탁생으로 3년 동안 학비를 지원해 주었다. 학비 지원을 받은 만큼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서 부사관으로 복무하는 제도였다. 국가 지원을 받은 만큼 군 복무기간은 일반 근무 기간보다 3년이나 더 길었다.
얌전하고 모범생 같았던 모습은 고2 학년부터 거칠어졌다. 졸업하면 군대 가서 남들보다 3년을 더해야 한다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억울하게 느껴졌다.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아서 고향 친구들과 거리가 멀어졌고 교회도 멀리했다. 사춘기의 반항이었다. 어쨌든 국가와의 약속이기에 나는 부사관으로 7년 복무를 하고 제대를 했다. 그 동안 교회는 기동대가 편성되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헌신생활을 했다.
4. 통일신학교
군 경력으로 경찰학교(졸업 후 순경)에 입학할 수 있는 특혜가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교회의 공적인 길을 택했다. 성화 친구들은 고교 졸업 후 대학진학도 안 하고 기동대 활동을 하였는데, 나는 공적인 일을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내가 진학하는 것이 친구들에게 괜히 미안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 분위기에 젖어 있었기에 경찰학교 입학보다는 공적 생활 선택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공직자 길을 결심하고 나서 7일, 21일 원리수련을 받았고, 7일 금식을 하고 수택리 통일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구리 수택리 중앙수련소가 통일신학교 강의실이었다. 학우들과 후박나무가 늘어선 교정의 벤치에 앉아 이야기꽃을 많이 피웠다.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남긴 시절이었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형 또는 아저씨로 불렸다. 군 복무를 7년 동안 했으니 동급생들은 어린 동생으로 보였다. 영어 시간에는 교수님이 나를 지적하며 출입문 위의 EXIT를 읽어보라고 했다. 출애급에 대한 내용을 영어로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교수님은 나와 나이가 비슷하셨다. 나이 들어 보이는 학생이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지적을 한 것 같다. 나는 엑시트라 하지 않고 “이엑스아이티”라고 했다. 순간 강의실은 웃음바다였다. 교수님은 멋 적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나는 부사관 시절의 자세를 고치느라고 내적으로 많은 갈등과 연민의 시간을 보냈다. 겉으로는 평온한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자신과의 싸움에 많이 힘들었다. 그러한 자세가 이요한 목사님의 말씀으로 다듬어지고 연단되었다.
5. 약혼과 축복
6천가정 축복을 위한 약혼이 시작되었다. 약혼 때가 다가와도 축복을 늦게 받고 싶었다. 가톨릭의 신부처럼 살고 싶어 독신 축복을 알아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하늘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류를 준비하고 약혼을 하고 축복까지 받게 하였다. 동료들은 냉수 목욕을 하며 정성을 들였다. 꿈에 약혼자를 미리 보았다고 하였다. 수택리 캠퍼스는 축복 준비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이야기들로 부산스러웠고, 기대와 함께 야릇한 흥분의 분위기였다.
참부모님의 매칭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중앙수련소의 승공연합 강당이었다. 중앙통로를 사이에 두고 선남선녀들이 빽빽하게 비집고 앉아서 찬송을 하며 협회장과 가정부장의 말씀을 들었다. 모두 세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복장도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체격도 든든하고 군복무도 오래한 덕분에 기숙사와 강당을 오가며 참부모님의 경호 임무를 맡았다.
참아버님께서는 쉽게 짝을 정해주지 않으셨다. 후보자들이 지쳐서 자기를 포기하고 내맡길 때까지 말씀만 하셨다. 아마도 ‘3년 노정의 탕감조건과 책임완수’를 강조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전적으로 참아들과 참딸의 자세를 회복하기까지 세속의 때를 벗게 하기 위하여 참부모님께서는 말씀을 많이 주셨다. 말씀 안에서 차츰 우중충한 영인체가 맑아지게 되었다.
뜸을 잘 들인 밥이 맛있듯이, 둘째 날 이른 아침부터 매칭이 시작됐다. 복귀된 가정과 대졸자가 먼저 짝이 맺어졌다. 나는 “참아버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있었다. 저녁이 되고 매칭된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하였다. 강당에는 차츰 빈자리가 생겨났다. 나는 수동적 자세에서 능동적인 입장으로 전환하였다.
마음을 고쳐먹고 참아버님을 향한 갈급한 그리움의 안테나를 높이며 고개를 드는 순간, 참아버님께서 나를 지적하셨다. 처음에는 옆 사람인 줄 알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옆으로 돌아다보는 너 말이야!” 하시며 다시 나를 지적하셨다. 참아버님의 작은 눈과 내 눈이 마주칠 때 몸에 전율을 느꼈다. 중앙 통로에 서 있는 여러 사람 중, 빨간색 투피스를 입은 여성과 나를 맺어 주셨다.
강단 앞으로 나와서 서로를 확인하였다. 첫 만남의 감동과 설레임보다는 명찰을 보면서 동성이 아닌 것을 확인하며 손을 잡았다. 부친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서 나는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참부모님께서 축복을 허락하실 때, 같은 성씨만 아니면 된다. 무조건 절대복종하라.”고 하신 부친의 부탁이 내 결단에 큰 힘이 되었다.
참아버님께 경배드리고 물러나오자, 이요한 목사님께서 “이렇게 예쁜 색시하고 되었네!” 하시며 축하해주셨다. 약혼이 성사된 보고를 신학교에 하자, 최정창 학감님도 “오누이같이 닮은 짝이구나.”하며 기뻐하셨다. 학우들도 축하해 주었다. 후박나무 캠퍼스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후박나무 넓은 이파리들이 바람에 찰랑거리면서 우리를 축복해 주는 듯하여 더욱 정겹게 다가왔다.
대상도 나에 대한 첫인상이 “남성 평균치 체격보다 커서 부모님께서 좋아하시겠다.”고 하며 순종하였다. 또 고향이 전북 장수인데 주체 이름도 창수이므로 발음이 비슷했다. 이 또한 천상배필이 될 인연으로 생각했단다. 인연이 되려면 이래저래 다 좋아 보이는 것인가 보다.
약혼식 후 곧바로 축복식을 하였다. 특히 성주를 마시니 뱃속으로 짜릿하게 흘러내리며 온몸을 전율시키는 감격이 있었다. 축복식에서는 세상 결혼식처럼 피로연을 하고 축하금을 받는 것이 없자 부친은 “오히려 잘됐다.” 고 칭찬하셨다. 남에게 부담을 주고 신세지는 것이 싫으신 부친의 성격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간단한 폐백으로 양가의 친지 어른들께 인사를 하였다.
잠실 체육관은 본래 운동 시설이라서 결혼식장에 맞는 부대시설이 미흡했다. 신부 대기실이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여러 신부들이 드레스를 입고 지하철을 타고 이동을 해야 하였다. 그것도 멋있고 아름다운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가 아니었다. 갑자기 단체로 빠른 시간에 지어진 예복이라서 디자인이 단순하고 좀 초라해보였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부끄럽지 않았다. 승객들이 좀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있어도 우리는 마냥 기쁘고 즐거웠다. 많은 신부들이 드레스를 입고 지하철로 이동한 것은 한국 역사에서나 하늘부모님 성회의 역사에서 특별한 기록으로 남을 사건이었다.
축복식 후, 고향 친구들이 우리에 대해 갖는 궁금증은 더해갔다. 약혼과정, 성별생활, 임지생활 등 참부모님에 의해 되어지는 과정들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친구들에게 많은 설명을 하며 입장 정리를 했다.
“너희들은 연애를 하면서 눈치를 보고 밀당을 한다. 만났다 헤어지며 상대를 바꾸며 교제를 한다. 나는 그런 교제가 싫다. 축복은 한번 결정되면 영원히 가는 것이라 밀당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즉 헤어질 걱정이 없어서 편안하게 교제할 수 있는 신뢰성이 있다. 또 약혼 이전의 일들을 서로 묻지 않는 인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충돌이 생겨도 마지막 말(이혼)을 하지 않는다. 이런 내용이 나의 성격과 맞다. 한번 정했으면 그만이지 피곤하게 밀당을 하고 싶지 않다.”
이러한 축복이념을 신앙으로 갖고 있는 결혼이 통일교회의 합동축복결혼식이라고 설득했다. 친구들은 이해할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새 진리를 모르고서는 축복결혼의 의미를 잘 알기가 힘든 것은 당연한 것이다.
6. 가정출발
3년 임지 동원 생활을 마친 나는 아내와 같이 신혼여행도 없이 고향 집에서 가정출발을 하였다. 축복의 가치를 따지면 스위스 몽블랑에 오르고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을 거니는 신혼여행을 다녀와야 할 것이다. 축복의 신혼 생활도 매일 웃음꽃이 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쳐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 신혼의 달콤함은 목회 생활 속에 묻혀 보내야만 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러하듯이 교회 일이나 식구 일 때문에 큰소리가 나고 침묵이 지속되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목회는 성격이 다양한 사람들을 동시에 만족시켜드려야 하는 직종인데, 이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정성과 테크닉이 요구된다.
그런 중에도 자녀가 하나 둘 늘어나며 부부의 정이 더욱 깊어졌다. 부부는 살다 보면 싫증을 느끼는 권태기가 온다고 한다. 우리 부부도 그럴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마다 자녀 탄생으로 새로워지는 날들이었다. 창조주 하늘부모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가정을 이루는 과정에서 부부 사이에 실망과 권태가 올 즈음해서 아기가 탄생함으로써 새로운 신선한 분위기를 만들도록 창조의 기교를 부리셨다고 한다. 즉 가정출발 후 2~3년마다 아기들이 탄생함으로써 늘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면서 살도록 창조하셨다.
성격이 강하고 부부싸움에 지지 않는 나에게 순종하며 묵묵히 따라주는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참아버님께서 나처럼 좀 특별한 성격을 어떻게 아시고 짝을 맺어 주셨는지 감탄하며 항상 감사드린다. 부부 갈등이 생기면 한쪽은 참아주고 품어주어야 하는데, 다행히 아내가 품어주는 스타일이라서 나는 참 고마웠다. 목회자의 여러 어려움까지 소화해 내는 것이 사모 역할이다. 그 일을 감당해 내는 아내가 내게는 큰 사랑이고 멋진 축복의 인연이다.
아내는 4남매를 해산할 때마다 건강하게 큰 어려움 없이 잘 낳아주었다. 아들을 낳을 때는 일산교회에 시무하고 있었다. 병원 해산비가 없어서 조산사(산파)가 있는 보건소에서 출산을 했다. 그 다음에 딸을 낳을 때도 해산비가 없어서 아들 낳은 보건소로 갔다. 당시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정부 정책이었다. 그런데 세 번째 출산을 보건소로 갔으니 조산사가 호적에도 올리지 말라고 했다. “셋째 출산을 보건소로 오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화를 막 내었다. 그래서 넷째는 보건소로 못 가고 병원에서 출산을 했다. 모친은 넷째가 생기니깐 “뭘 또 낳느냐?”고 하셨다. 그런데 넷째가 태어났는데 보는 사람마다 “할머니를 꼭 닮았네.”라고 하니까 모친은 기분이 좋으셔서 아기를 잘 돌보아주셨다. 독신 축복가정인 모친은 성화하시어 선한 조상으로 잘 계신다.
행복하게 사는 우리를 바라보면서 친척들이 모이면 “언제 또 애기 낳을 것이냐?”고 물으면서 은근히 부러워한다. 힘드셔도 손주들을 잘 돌봐 주신 모친께 감사한다. 모친은 회의, 수련, 교육, 심방, 행사, 축복 활동 등으로 부부가 자리를 비울 때에 불평 없이 손주들을 잘 거두어주셨다. 모친의 보살핌으로 4남매의 정서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활동하다 밤늦게 귀가해도 자녀들끼리 교회를 지키며 탈 없이 지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늘의 보살핌이다. 자녀교육에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았다. 훈독회와 생활 자체를 보고 느끼고 깨닫고 말하는 것이 최고의 후손교육이라고 믿고 실천했다.
우리들은 참부모님의 공로에 힘입어서 축복가정을 이루고, 선한 조상의 공적으로 살아간다. 축복가정의 자녀들은 부모들이 닦아놓은 터전에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성화의 용사들로 성장한다. 목회 현장의 엄격한 아빠와 요란스럽지 않게 내조하며 돌보아주는 엄마의 모습이 자녀들의 의식구조 속에 훌륭하고 멋진 모습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잘 자라준 자녀들에게 감사한다.
7. 공직자의 삶, 계시, 자르딘 추억
나의 목회 첫 임지는 경남 거제교회였다. 통일신학교를 졸업하고 낯설고 물설은 곳으로 겁도 없이 용감하게 부임한 것은 성화 학생 시절에 가졌던 첫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성화학생 시절에 협회 창립이 1954년이라는 것을 알고서 “통일교회와 나는 평생 함께 간다.”고 다짐했다. 나도 1954년생이기 때문이었다.
군 복무를 부사관으로 지낸 경력은 목회자의 길을 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부사관의 책무는 장교와 사병의 교량 역할이다. 그처럼 목회자의 책무는 참부모님과 식구를 잇는 교량 역할이다. 식구들 마음에 참부모님이 계시도록 돕는 것이 목회이다. 목회자가 자리하면 안 된다. 목회자는 부사관처럼 교량 역할에 충실해야한다. 참부모님 대신자, 대역자, 대사자는 식구들 앞에 군림하라는 것이 아니고 솔선수범하며 인도하라는 것이다. 나는 늘 교량 역할의 책무가 곧 목회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다. 군생할의 자세가 목회에도 이어지며 도움이 되었다.
1988년 2월 참부모님 집회에 목회자들이 참석했다. 참아버님께서는 말씀 도중에 “이북 출신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는 ‘부모가 이북인 사람은 일어나라.’고 하셨다. 어느 지역이냐고 물으시며 “오늘 내가 상을 주겠다.”고 하셨다. 내 차례가 되었다. “장단입니다.”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어디라구?” “장단입니다.” “뭐… 장단? 내가 피난 나올 때, 장단에서 청년들한테 곤욕을 치렀다구.” 하시며 혼을 내셨다. 나 때문에 다른 이북 출신이 상을 못 받은 것 같아 미안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혼을 내셔도 내가 도망갈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믿어주신 참아버님의 따뜻한 정(情)이 느껴졌다.
1998년 10월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농장에서 이상가정 교육 40일 수련을 3차 때 받았다. 2천 명이 넘는 교육생이 강당에 가득 찼다. 참아버님께서 말씀을 하시면서 아내와 나란히 앉은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여자들이 스타킹을 신을 때, 신발은 뭘 신지? 고무신인가?” 물으셨다. “네… 하이힐입니다.” “그래, 하이힐을 신을 때 스타킹을 해야 멋이 나지.”라고 하시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셨다.
갑자기 다가오셔서 다정하게 소근소근 말씀하셔서 심장이 쿵쿵거렸다. 대답을 잘못하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주간 뉴스에 크게 방영되었다. 동료들이 나에게 “참아버님께서 뭐라고 하셨냐?”며 부러운 질문을 하였다. 참부모님께서 다정하게 우리 부부에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방송을 타게 되었다니,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되었다. 일평생, 아니 영원히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교육 후반기에 많은 교육생들이 참석했다. 참부모님을 모시고 가정 단위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비가 오는 날씨라 강당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나는 스탭으로서 봉사하였다. 흙이 바지에 묻어서 양말 속으로 접어 넣었다. 이 모습을 보신 참어머님께서 “그러고 찍으면 안 돼.”라고 하셨다. 옆에 있던 정원주 실장이 “스탭이라서 활동하다보니까 그런가 봅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참어머님께서 지긋이 바라보시는 눈빛이 얼마나 자애로우신지 성령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참어머님의 눈빛과 용안에 피어난 아름답고 멋진 표정은 언제나 잊혀지지 않는다.
2012년 3월 1일 천정궁 훈독회 시간에 앞자리 하나가 비었다. 석준호 협회장님께서 나를 가리키며 “앞에 나와서 앉으세요.”라고 하셨다. 나는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어서 싫다고 했더니 강제로 끌어당겨서 앉히셨다. 참아버님이 나오셔서 말씀을 한참 하시고는 나를 가리키시며 (뭔데 앞에 앉아있느냐는 표정으로) “너는 뭐냐?”고 무섭게 지적하셨다. 벌떡 일어서서 ”인천 계양 교회장입니다.”라고 얼굴이 벌겋게 변해 당황스런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쓰윽 쳐다보시고는 다른 말씀을 하셨다.
훈독회 시간이든 다른 자리이든, 참부모님 존전에 가까이 가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즉 그만큼 정성을 많이 드려야 된다는 것이다. 신인일체의 경지에 계시는 참부모님 앞에 사탄 혈통이 남아 있는 얼룩덜룩한 추하고 냄새나는 모습으로 어떻게 가까이 갈 수 있겠는가? 그 날에 내 자신의 정성이 부족했음을 깨닫고서, 더욱 정성을 많이 드리기로 결심했다.
2013년 1월 실체성신 독생녀 참어머님 앞에서 원리강의를 하였다. 인천교구 대표로 유•무형 실체세계 10분 원리강의를 하였다. 그 영광이 내 가슴속에 길이 남아 있다. 그 당시는 참아버님 천주 성화 이후에 시묘 정성을 드리시는 기간이었다. 천일국 안착을 경륜하시며 목회자 역량 강화를 하시기 위하여 마련된 원리강의 대회에서 내가 출전한 것은 값진 장면이었다.
참부모님을 모시고 찍은 사진은 우리 가문의 보배이다. 1998년 자르딘에서 참부모님께서 함께 촬영해주신 사진, 2003년 천일국 주인상 사진, 2014년 천운영세(참부모님 직인 보) 수상 사진, 천보등재 가정사진, 등은 우리 가정의 보물이요 가보이다. 이보다 더 큰 재산이 없다. 이 상들은 우리 부부와 가정에 있어서 영원할 것이며, 자녀에게도 귀한 유산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감격과 감동 감화와 감명의 순간들은 목회 현장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목회자가 환고향으로 교회 문을 닫았을 때, 구조 조정으로 부교회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 교회 살림이 어려울 때, 건강이 안 좋아 힘들 때, 인사 발령이 힘들 때도 주저앉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목회 임지를 지킬 수 있었다. 참부모님과 종적으로 맺어진 나만의 노하우로 목회의 내공은 그렇게 깊고 넓고 높아졌다.
8. 참부모님 존영모시기
1991년 봄, 참부모님 존영 모시기 활동을 하면서 나타난 현장의 사례이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열강하였다. “남북총선거시 북측 운동원이 가정마다 파고들어 선거운동자금으로 백만원의 거금을 줄 때 안 받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철저한 승공주의자로서 공산주의의 아성(牙城)인 평양에 가셔서 목숨을 걸고 김일성 주체사상을 질타한 참부모님의 존영을 모신 집에서는 북한공산당 운동원도 물러가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강연을 하면서 참부모님의 존영을 모시도록 인도하였다. 만세삼창을 할 때 하나님 만세, 참부모님 만세, 다음에는 그 가정의 가장(家長) 이름을 부르면서 만세를 했다. 반응이 너무나도 좋았다. “세상에 대한독립 만세는 했어도 내 이름 만세는 난생 처음이다.”며 계면쩍은 표정으로 고맙다고 했다.
적성면 60대 할아버지는 “자식들과 동네 사람들의 놀림 때문에 존영을 장롱 서랍에 며칠 동안 보관한 뒤로 잠이 오지 않고 매사가 불안한 생활이었는데, 방에 존영을 모시고부터는 마음이 편하고 잠도 잘 옵니다.”고 고백하였다. 처음에는 주위 눈치 보느라 존영을 외면했는데, 번민 끝에 주위의 이목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참부모님의 존영을 머리맡에 두었더니, 마음이 편안하고 모든 생활이 즐거운 생활이 되었다고 토로하였다.
문산읍에 사는 소연 엄마도 말씀을 듣고, “토정비결에 운수대통 한다고 나왔길래 무엇 때문일까 했는데, 이제 보니 바로 이 존영 같군요.”라고 하면서 아주 반가워하였다. 존영을 아이들 방에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감리교회에 다니는 아주머니 한 분이 집에 놀러 와서 참부모님의 존영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까무러치면서 “어째서 이단의 괴수 사진을 걸었어요?”라고 하며 근거 없는 험담을 늘어놓았다. 이에 발끈한 소연 엄마는 “어떻게 당신들은 진정한 의미도 모르면서 밑도 끝도 없이 훌륭한 애국자를 함부로 욕할 수 있느냐?”고 소리쳤다. 그리고 감리교 목사에게 찾아가 그 사실의 진의를 캐물었다. 소연 엄마는 통일교회에 다니는 식구가 아니다. 다만 참부모님의 말씀과 활동이 훌륭해서 존영을 집안에 모셨을 뿐이다.
탄현면에서도 강연을 했다. 강연을 끝내고 인원 동원을 한 사람에게만 대표로 부모님 존영을 주었다. 그런데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느냐?”고 항의를 해서 참석자 모두에게 존영을 전달해 준 일도 있었다.
하루는 교하동에 있는 노부부를 찾아갔다. 할머니는 일산 천주교 신자이고 할아버지는 개신교 집사이다. 방안에는 온통 천주교 성물과 개신교 물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참부모님에 대한 말씀을 거부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초종파주의로 남북총선거에 대비해야 한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서 하나님주의를 선포한 문선명 선생님이야말로 가장 기독교적인 분입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반응이 좋았다.
그 할아버지는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도 통일교회 문선명 선생님의 업적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많은 것을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5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기성교회 사람이라고 다 부정적이지 않고 몇몇 사람들은 통일교회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실로 고마운 일이었다.
금촌동에 사는 젊은 아주머니도 말씀을 듣고 참부모님의 존영을 화장대 위에 올려 놓았다. 하루는 이웃 친구들이 놀러와 존영을 가리키며 “이 분이 누구냐?”고 물어 보길래, 통일교회 교인도 아닌 입장에서 대답하기가 곤란하여 순간적으로 “친정 부모님이셔.”라고 했다. 친구들은 “정말로 멋쟁이 부모님을 두었다.”고 부러워했다. “친정 부모님이라고 대답한 다음 존영을 보니 정말로 선생님 내외분이 친정 부모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였다.
통•반활동을 하면서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참부모님의 존영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식구들 중에서 활동을 안 하고 존영을 집에 모셔만 둔 가정은 우환이 겹치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그렇다! 참부모님은 온 인류의 부모님이시다. 우리는 복이 많아서 참부모님을 아버지, 어머니로 부르면서 친부모님 이상으로 모시고 있다. 우리 축복가정들은 앞으로 효정의 실적을 봉헌하는 자식이 되어야겠다.
9. 목회 활동의 희비
1991년 8월 환고향 섭리로 목회 단상을 떠나야 했다. 당시 고향 교회는 파주 금촌에 있었다. 환고향 시절에도 목회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통일교회 목사로 알려져서 다른 일을 하려고 하면 오히려 참부모님과 교회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입장이 된다. 지역에서 관공서와 동문, 종족과 이웃들로부터 통일교회 목사가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인식되어있다. 그런데 장사를 한다든가 다른 일을 하면 말이 많아지게 마련이었다.
은행 임원인 형님은 교회 사은비 보다 많은 월급과 상여금, 자녀 교육비, 퇴직금이 있는 직장을 연결해 주었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목회의 길로 나선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목회 현장의 경제적 어려움은 많았다. 전도 활동을 열심히 해서 식구가 많아지면 사은비도 늘고, 활동비도 있을 텐데,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다. 식구 몰래 공사 현장에 나가 일을 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어느 해 봄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다. 작은 아이가 자동차와 접촉사고가 나서 합의보상금으로 해결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내용들이 전통으로 목회현장에 연결되어 왔다. 그렇다고 목회현장이 어려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어려움의 고비 고비마다 특별헌금을 하는 식구가 나타나서 감동을 하곤 했다. 지나놓고 보면 하늘의 가호가 있었던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축복받은 당사자가 자녀를 데리고 와서 인사를 할 때는 그 동안의 고통이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하였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보람을 느꼈다. 목회 현장에 새로 부임한 젊은 후배 목회자가 재정난으로 후퇴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절대복종으로 잘 인내하면 보람과 기쁨의 나날들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목회가 아닌 일상의 직장생활에서도 삶의 희비곡선은 그려지게 마련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팍팍하다. 누구는 “인생살이가 고추보다 맵다”고 노래도 했다. 그러나 이왕 힘들게 살더라도 뜻을 위해 목회를 하며 어려움을 부딪치고 돌파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고, 그런 만큼 우리 부부는 보람과 자부심을 갖는 삶을 살아왔다.
1994년 1995년 인천교구 부흥단장 시절, 3만가정 36만가정 한국부인 대원들과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했다. 대원들이 매일 전도 대상자를 데리고 오면 축복설명회를 목이 아프도록 하곤 했다. 그 때의 대원들도 이제는 엄마들이 되어 자녀 축복에 정성을 들일 것이다. 보고 싶고 그리운 얼굴들이다.
1997년 봄과 여름에 식구들과 함께 열심히 종족적 메시아 160가정 축복활동을 했다. 우수한 실적으로 수상한 협회장 상과 반지를 받았다. 지금도 그것을 보면 힘이 솟는다.
2003년 10월에는 평양 관광을 다녀왔다. 평양시내 관광과 을밀대로 소풍을 나온 북한 주민과 우리는 하나라며 함께 춤추었다. 김일성 생가, 김일성 광장, 주체사상탑, 대동강변의 옥류관 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현장을 직접 답사하였다. 거리의 북한 여성과 청년 대학생과 사진도 함께 찍었다. 평화자동차 공장 방문, 동평양극장의 공연 관람, 김일성, 김정일 기념관과 보현사의 구층탑과 묘향산 등산 등은 참부모님의 공로에 의해 이루어진 북한 방문이다. “남북통일은 참사랑으로!” 라는 구호를 실현하는 짜릿한 순간을 체험하였다. 하나님주의 두익사상으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포용하고, 공생 공영 공의로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여 천일국을 창건하시는 섭리에 나도 작지만 기여를 하였다.
10. 죽음에서 부활
2004년 봄부터 목이 이상해졌다. 그해 12월에 내시경 검사 결과, 성대 위쪽에 결절이 생겨 수술을 해야만 했다. 2005년 1월 4일 조직검사를 했다. “살펴보니깐 후두암입니다.”는 의사의 말이 냉정하게 들렸다. 그 순간, 나 자신을 걱정하기보다 “환자에게 암 선고를 해야 하는 의사도 많이 힘들겠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났다. 의사는 “상태가 나빠지면 성대를 들어내고 ‘가성기’를 부착해야 합니다. 그러면 터미네이터처럼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납니다.” 하면서 겁을 잔뜩 주었다. “열심히 뜻을 위해 일한 나에게 암이라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목사에게 목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은퇴를 의미하는 것이다. “천명으로 알고 출발한 목회자의 길을 접어야 하는구나.”고 혼자 말했다. 그런데 병 상태가 진정되기 전에는 내 심장이 폭발하여 터질 것만 같았다. “의사가 오진한 것은 아닌가?” 그렇지만 현실은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가 목회를 잘못했나? 부흥단장 시절 매일 판서 강의를 너무 큰소리로 해서 그런가? 남에게 아픈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나?” 이런 저런 지난 일을 회고하면서 주변 정리를 하나하나 했다. 그때만 해도 의료기술이 덜 발달하여서 암은 곧 죽음과 일치하였다.
죽음이 어둠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원리를 통해 영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계에서 나를 필요로 하여서 부르면 가야지. 가긴 가는데 지금은 아니지 않을까? 내 나이가 이제 51세인데, 아직 이르다.” 혼자 중얼거리면서 잠이 잘 오질 않고 밤새 뒤척거리곤 했다.
무엇보다도 자녀들의 앞날이 걱정이었다. “아비 없는 자식으로 정서 결핍이 올 것이고, 경제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축복 결혼은 누가 보살펴 줄 것인가?” 걱정이 한 둘이 아니라 줄줄이 머리에 떠올랐다. 4남매는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이었다. TV 연속극에서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배우자를 만나 부모님 산소 앞에서 단정히 서서 “이럴 때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좋아하실 텐데…” 하며 울면서 참배를 하는 장면을 보면서 가슴 저리고 눈물이 났었다. 그런 장면이 떠오르면서 “내가 죽으면 우리 아이들도 저렇게 하겠지.”하면서 눈물이 흘렀다. 마음이 울컥하며 약해졌다.
어떻게든 절망에서 희망으로 마음을 정리해야만 했다. 목회 병가를 신청했다. “지금은 읍면동 훈독회를 하는 목회 현장이니 아무 걱정 말고 병이나 얼른 낫게 치료하라.”는 큰 배려를 받았다. 자연히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다. 힘들어하는 사모는 여기저기 연락하며 암에 좋은 약을 구하기 바빴다. 섭생(攝生)을 통해 녹즙을 매일 아침 먹었다. 6개월 복용하니 몸무게가 10Kg 줄었다. 얼굴은 탈북자처럼 야위었다.
의사는 “목사님이라 정신력이 강해서 치료에 효과가 있어 좋습니다.”고 칭찬해주었다. 살아갈 의지를 잃고 죽음만 바라보는 환자는 보통 환자보다 체력과 정신력이 약하다. 그러면 의사가 환자에게 최선을 다할 수 없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살고자 하는 정신으로 암을 이기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절망에 빠지지 말고, 포기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마라톤 선수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까? 운동으로 몸을 덥게 하면 암세포가 분해됩니다.”고 하였다. 암세포는 35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한다.
순간 참부모님 말씀이 떠올랐다. 그 말씀이 나를 살렸다.
“오목 볼록이 만날 때, 하나님은 53도가 넘고 축복가정은 43도라 했다. 그럴 때 몸속의 나쁜 균이 죽는다. 그 뜨거움이 결핵균도 죽이고 세균도 죽인다. 나쁜 바이러스, 악성 종양을 죽이거나 번식을 막는다.”( 《평화의 주인 혈통의 주인》, 63쪽,115쪽)
참부모님의 말씀은 질병 치유의 방법을 일깨워 주었다. 암을 레이저나 방사선으로 치료하는 것보다 몸속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열기가 약이 된다는 이치이다. 이 말씀이 혼란스런 생각들을 정리하게 만들었다. 죽음이라는 절망의 짙은 어둠의 장막 사이로 희망의 빛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참부모님 말씀에 “이 땅에서 할 일을 하고 가지 않으면 영계의 대기실에서 참소 받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설교를 할 때에 탕감은 축복이다!”라고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암에 걸렸다고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었고, 그렇게 사명을 못 다하고 영계로 갈 수는 없었다.
몸을 덥게 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달리기를 10Km씩 일주일에 4~5회를 하면서 삶을 위한 의지를 불태웠다. 마라톤 동호회원은 달리는 것이 취미 생활이지만, 나에게는 목숨을 건 사투(死鬪)였다. 힘들거나 피곤하다고 쉴 수 없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어느 날 몸속에 불을 받은 것처럼 감자 크기의 뜨거운 덩어리가 나타났다간 사라졌다. 치료를 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기독교에서 성령의 역사에서 불을 받은 사람은 평생 괴롭히던 병이 갑자기 치유되는 증거가 있다. 뜨거운 불을 받는 것은 곧 치유의 능력이 발휘된다. 그 성령의 능력이 내게도 임하였다.
2009년 12월, 의사는 “이제 진료 예약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암을 극복한 또 한 명의 환자입니다. 축하합니다.”라고 말했다. 감사와 안도의 정서적 안정감이 왔다. 참부모님께 달려가서 감사의 눈물로 크게 경배를 드리고 싶었다.
수술실에서 전신 마취하며 숨이 넘어가는 순간, “죽음 앞에서는 돈 명예 권력 자존심 욕심 혈기 등이 아무 필요 없다.”는 것을 나는 체험했다. 평소 급하고 거친 성격이었던 나 자신이 수술대 위에서 한없이 낮아졌고, 심정은 더 깊고 넓어졌다. 남이 보면 어리숙하게 지냈다. 될 수 있으면 스트레스 안 받으려고 상대방에게 내 권리, 내 권한, 내 주장을 포기하고, 양보하고 바보처럼 지냈다. 알고도 모른 척,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나 한사람 희생 양보하면 전체가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교의 보왕삼매론에 “몸에 병 있음을 약으로 삼으라.”고 한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지난날들이 순식간에 지나가면서 나는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였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감자 크기의 뜨거운 덩어리, 성령의 불덩어리가 나를 감쌌고, 그 이후로 병세는 호전되었다. 정상이 된 다음부터는 그런 신기한 현상이 없었다. 완치는 아니지만, 수술 후 5년 만에 일상성을 회복하였다. 지나고 보니 암 선고 이후로 진행된 생활 속에서 하늘의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었다. 그동안 옆에서 말없이 내조한 사모가 귀하고 고맙고 사랑스럽다. 내가 투병을 하면서 짜증이 나고, 신경이 예민해져 날카로워도 화내지 않고 나를 잘 받아주었다.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하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고 했다. 건강상태가 좋아지니깐 “나”라는 자존심이 다시 올라왔다. 암 선고 받고 투병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낮아진 자세가 된 것 같았는데, 병세가 호전되니까 다시 자존심이 고개를 들고 “나”를 내세우려고 한다. 또 주위 사람에게 혈기를 내기도 한다. 타락성을 가진 인간이 참사람이 되기 위하여 때로는 병고(病苦)도 필요한가 보다.
“미운 사람이 있으면 참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좋아하자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내가 좋아하면,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내가 세 번 이상 좋게 대해 주면, 그가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만 잘해주면 고개를 숙입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잘못했는지 잘했는지 빤히 안다는 것입니다.” (《세계경전》Ⅱ, 132쪽)
11. 목회 재출발
참어머님께서는 천원궁 승리봉헌 결의식에서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천심원 천보수련원에서 교육을 받아 개인 가정 교회가 새로워지라.”고 하셨다. 이를 위해 자존심보다 자긍심이 향상되어야 한다.
2009년 6월 전국 교회 구조 조정으로 부교회장 발령을 받았다. 일산교회와 서일산교회의 통합이 있었다. 교세가 작은 교회의 목회자가 부교회장이 되는 원칙이다. 일산교회장은 2세이며, 나이로 보면 조카뻘 정도가 되었고, 목회 경력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부교회장이 되었다. 주위로부터 “목회 능력이 부족하여 부교회장이 됐다.”는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건강관리에 더욱 열심히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마음을 비우고 건강관리에 신경쓰며 목회를 하였다. 인사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자세를 가졌다. 교회장과 부교회장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식구들의 말에 2세 교회장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시련과 연단으로 크게 키우고자 하시는 참부모님의 역사하심으로 서로가 극복하였다.
2015년 8월 인천 계양교회장 시무를 하면서 전도 우수상을 협회장으로부터 받았다. 12명 이상 전도한 부분이 인정되어 100일 활동기간에 수상한 것이다. 전도는 생명력이다. 새 식구가 생겨야 교회에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고 활력이 넘친다. 새 식구가 많아진 교회는 부흥 성장하는 것이다. 교회 식구 노령화를 막는 것은 청년 전도가 필수다. 모두가 전도에 전념해야 한다.
실체성신 독생녀 참어머님께서는 2017년 12월 15일 한국협회를 5지구로 나누셨다. 2지구는 경기, 강원 지역으로 국화는 목련이다. 각 교회마다 목련나무를 식목하였다. 2021년 4월 동두천 교회는 백목련 1그루. 자목련 2그루의 묘목을 주문하여 식목을 하였다. 교회 마당에 자리가 부족하여 백목련은 안마당에 심었다. 자목련은 울타리 밖에 심었다. 1년생 묘목이라 뿌리내리라고 물을 주면서 정성을 들였다. 다행히 뿌리를 내려 잎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물을 주려는데 울타리 밖의 자목련 1그루가 없어졌다. 울타리 끝이라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남의 손을 탔나보다. “아! 누가 식목한 목련을 뽑아갔나?” 하면서 투덜거렸다. 그렇게 1년이 지나서 자목련을 갖고 간 사람을 만났다. 이주희 여사였다. 자목련 인연 사건이 생겼다.
사모는 지역 봉사 활동을 다닌다. 이주희 여사를 만나 전도하려고 정성을 드린다. 그녀는 기성교회를 다녔는데 제직회 결산보고 할 때마다 다투어서 쉬고 있다. 아내는 이여사와 친해진 다음에 자기가 통일교회 사모임을 밝히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사모에게 전화를 했는데 이여사가 아내의 핸드폰을 보았다. “목사님이시네…”라고 하였다. 사모의 핸드폰에 목사님이라 표시되어 있어서 눈치를 챘던 것이다.
이여사는 “어쩐지 보통 여성과 어딘가 다르다고 느꼈어요. 어느 교회에요?”라고 물었다. 난감해진 사모는 자신있게 “통일교회에요.”라고 하였다. 이여사는 “우리가 불편해 할까 봐 통일교회라고 알려주지 않았네요. 통일교회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 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아요. 남편 회사에는 스님이 와서 멘토를 해주고 있어요.”라고 했다. 열려진 마음을 가진 그녀는 거부감 없이 통일교회를 받아들였다. 사모를 자기 집에 초대하고 남편이 속상하게 하는 내용을 털어놓는다. 아내와 이여사는 상당히 친해졌다.
하루는 사모가 웃는 얼굴에 감격스럽게 놀랜 표정을 지으며 잃어버린 목련나무 이야기를 했다. 이여사가 자기 집 마당에 잘 자란 목련나무를 가르키며 “2021년 봄에 보영중학교 후문 근처에 야생으로 자라고 있어서 뽑아다 심었어요.”라고 했다. 보영 중학교 후문은 바로 교회 근처이다. 즉 우리가 심었던 목련을 주인 없는 야생 목련나무로 보고 이여사는 그것을 뽑아서 자기 집에 심었던 것이다. 딸을 데리러 왔다가 학교 후문에 주차를 하고는 잠시 이리저리 걷는 중에 우리가 심어 둔 목련나무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야생목련으로 보고 이여사가 캐간 것이었다. 하늘의 안내로 이여사로 하여금 주인 없는 야생 목련나무로 보이게 하여 뽑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그날은 이여사의 집안이 참부모님과 영적으로 연결된 날이었다.
평소에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이여사의 성품은 남의 것을 함부로 갖고 올 사람이 아니다. 친정엄마를 모시고 사는 효녀다. 사람을 만나면 낯설지 않고 정들게 한다. 인상도 좋고 미인형의 예쁜 얼굴이다. 경우가 밝고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항상 베푸는 스타일이다. 받기 보다는 주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다. 선한 조상이 함께하는 사람이다. 목련나무 주인이 우리 교회임을 알았다면 이여사는 가져가지 않았을 것이다.
독생녀 참어머님께서 나와 하나 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셨다. 우리 부부가 실체성신 독생녀 참어머님과 종적으로 정렬되어 있으니까, 목련을 매개로 하여서 사모가 이여사와 만나는 전도의 기적이 일어났다.
이주희 여사는 영기(靈氣)가 있는 여성이다. 어떤 사람을 보면 영적으로 보일 때가 종종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을 몸이 받아들이지 않으니깐 건강상 힘든 것 같다. 이주희 여사는 딸 둘을 제왕절개로 낳아서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상태다. 그런데 꿈에 5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이 집에 들어가 살고 싶다고 한다. 안된다고 하였다. 아이는 소원을 들어 줄테니 살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렇다면 가족이 건강하고 남편 사업이 잘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몇 주 후 임신을 하고 사내 아기를 자연분만으로 낳았다. 꿈이 너무나 신기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지소민)은 집안 분위기를 환하게 한다. 엄마 일을 가장 많이 도와준다. 이러한 가족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와 아내는 이여사가 예사로운 사람은 아니라 하늘이 준비해 오신 여인임을 직감하였다.
하늘은 준비된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 역사하신다. 하늘부모님께서는 지명만•이주희 부부를 택하시고 참부모님 품 안으로 부르셨다. 이들을 위한 안내자가 우리 부부였다. 사모가 이주희 여사를 처음 만날 때 통일교회를 감추었다. 그런데 하늘은 기묘한 방법으로 우리가 하늘부모님성회의 목회자라는 실체를 드러나게 하셨다. 놀랍다. 무형의 하늘이 주관하시는 섭리 역사의 중심인물이 우리 가정인 것은 아주 큰 영광이다.
2021년 9월 1일부터 박형덕 평화대사와 함께 동두천시장 당선을 위한 기도회를 매월 초하루 효정문화센타에서 했다. 마침내 2022년 6월 1일 전국지방자치 선거에 동두천시장과 시의원으로 출마한 평화대사가 당선되었다. 동두천 시장실에서 하늘부모님과 천지인 참부모님 앞에 승리 보고를 하였다. 그는 네 가지를 약속했다. 첫째, 참부모님 호출에 언제든지 달려간다. 둘째, UPF 평화대사 협조와 활성화한다. 셋째, 동두천 VIP 모임을 결성하여 평화대사로 연결한다. 넷째, 매월 초하루 시장실에서 기도회 모임 갖는다. 이는 동두천을 하늘부모님과 천지인 참부모님 앞에 봉헌을 하려는 다짐이었다. 7월1일 취임식 후, 내 손을 꼭 잡고 사진 촬영하는 시장에게 참부모님의 천운이 함께하시라고 축원하였다. 동두천이 천일국 지방자치단체로써 천지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사모는 교회 천심원 기도실 앞에 참부모님 자서전을 놓고 정성을 드린다. 아침 저녁 기도회 시간마다 지명만•이주희 부부 이름을 호명하면서 기도한다. 아내인 사모는 전도 대상자를 만나면 자서전을 전달한다. 그 다음에는 평화대사 세미나에 참석시키고, 원리수련을 받게 한다. 이여사에게도 이 방법을 쓰고 있다. 새로운 믿음의 자녀가 될 이들과 앞으로 어떤 감격과 감동 감화와 감명의 보고가 나올지 기대된다.
12. 자녀 축복
2010년 10월 큰딸 예화가 축복을 받았다. 참부모님께서 절대축복으로 축도해 주셨다. 우리 가족의 대를 이어서 축복 결혼을 해주시는 참부모님의 정성에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사위는 독일 호프만 헬무트 가정의 장남 복근이다. 내 딸이 선문대 순결학과를 졸업하고 목회자의 자녀라는 것을 안 사위는 더 이상 묻지도 않고 그저 감사했다고 한다. “독한(獨韓)가정으로 출발했으니 독일에 가서 독(毒)하게 살아야 향수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나는 독일로 가는 딸에게 말했다. 독일에서 아들만 셋을 낳았다. 삼형제를 키우는 딸은 힘들 것이다. “딸을 하나 더 낳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딸을 낳는다는 보장만 하면 낳겠다.”고 한다. 나를 할아버지로 진급시켜준 손자들에게 정이 흠뻑 간다. 혈육의 심정이 이런가 보다.
2018년 8월 둘째 딸 이선이 축복을 받았다. 부모 매칭으로 한국 김교원 가정의 차남 성원이다. 1년여 동안 교류하더니 축복을 받고 가정출발을 하였다. 아직 손주 소식이 없지만 곧 태어날 것이다. MZ세대라 그런지 아이 낳는 것도 마음대로 조절을 한다.
2022년 4월 아들 수영이 일본 여성과 축복을 받았다. 일본에 가서 미쓰비시 회사원으로 근무하더니 한·일 가정이 되었다. 히로시마 교회 가정부장의 소개로 마스다 아키지가정의 장녀 쿠니에를 만났다. 축복 후 내가 영상 통화를 하였는데, 며느리는 아기를 네 명 이상 낳고 싶다고 한다. 며느리가 기특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아들에게 “미쓰비시 회사에서 일할 때에는 그 회사가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대해 행한 일들을 탕감하고 해원하는 심정으로 근무를 하라.”고 권면하였다.
2023년 5월 천원궁에서 거행되는 참부모님 효정 천주 축복축제가 있을 예정이다. 막내 이정이 축복식 참석하려고 한국가정의 장남과 교류하고 있다.
나와 아내가 4남매를 낳고 키울 때에 하늘부모님의 자녀를 대신 양육하는 자세를 갖고서 효정을 나누었더니 어느덧 세월이 흘러서 이제 다 자라서 2세 국제축복가정을 이루었다. 주위에서는 우리 가정을 ‘작은 UN’이라고 한다. 이런 칭찬을 받는 것도 다 참부모님 덕분이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13. 미래 비전
2020년 10월 천보등재 가정으로 입적을 했다. 참아버님의 유훈대로 430가정 축복완료를 하였다. 부부 8줄기 430대 조상축복을 위해 종횡무진 활동한 결실이다. 이제는 신종족메시아의 사명 완수로 해방·석방의 길을 가고 있다. 우리가 지상에서 실질적인 기반을 닦는 것은 앞으로 천상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기대가 조성된다.
참아버님의 유훈은 교회에 출석하는 축복가정을 만들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430가정 축복활동이 어려웠다. “교회 출석하지 않는 430가정 축복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런데 참어머님께서는 이런 것을 아시고 “행정완료를 했으니 이제부터 43가정 실세화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천보가정들이 43실세화를 완료하면 천일국 창건의 기반 조성이 가속화될 것이다.
발왕산 아버지 왕 주목 나무를 잡고 사모와 간절한 기도를 했다. 그렇다 전도가 정답이다. 전도는 이론이 아니고 정성의 실천이다.
Home Church. 360가정 교회 운동. 통반격파. Home Group. 종족적 메시아. 160가정 축복활동, 신종족적 메시아. 훈독회. 430가정 축복활동. 43실세화. 천보가정교회. 모두가 같은 내용이다. 명칭만 다를 뿐이지 다 전도하라는 것이다. 전도는 가정연합의 미래요, 희망이요, 영원성이다. 영계의 자산으로 전도만이 살길이다.
예수님의 33년 공생애 노정이 십자가 역사로 매듭을 지었다. 나는 33살에 목회 첫 임지로 출발했다. 시무한 교회마다 천정과 인정을 나누었던 식구님들이 그립다. 만나서 따듯한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 협회 창립 제68주년 기념식에서 목회 33년 장기 근속상을 받았다. 이제 목회 33년의 매듭을 짓고 새 출발의 정신으로 전도하는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는다. 2027년 천일국 신통일한국 안착 승리까지 60개월 대장정의 출발을 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