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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다, 어린시절 배공순 모처럼 거실 소파에 앉았다. 아침햇살의 부드러움 때문인지 여유롭고 안온한 분위기에 젖어든다.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 사이로 커피 잔에서 나온 하얀 김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다. 마을 뒤로 흐르던 황룡강의 아침 물안개 같다. 황룡강을 떠올리는 순간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 집 풍경도 그리움으로 함께 다가온다. 내가 자란 곳은 백여 호가 되는 마을로 작은 평야처럼 논밭이 마을을 빙 둘러 싸고 있었다. 마당을 합쳐 이백 평 규모의 집이었지만 고르게 자란 탱자나무가 텃밭과 집을 에워싸며 울타리를 이루었다. 울타리를 따라 감나무와 왕벚나무가 있었고, 뒷곁 장독대 옆에는 포도넝쿨이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봄철이 되면 하얀 탱자 꽃과 벚꽃이 피어서 내 마음을 환하게 열었고, 가을이 되면 새콤한 향내가 물씬 나는 노란 탱자가 수없이 열렸다. 가지마다 촘촘히 솟아 있던 탱자가시도 때로는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었다. 여름에는 강에서 잡은 다슬기를 잡아서 삶아 먹었는데 그 다슬기를 까먹는 도구로는 탱자가시만 한 게 없었다. 가시로 눌러 속살을 고정시킨 다음 살살 돌리며 빼 먹었다. 온 식구들이 다 모여 앉아 다슬기를 까먹던 밤이면 하늘에는 은하수가 아득히 흐르고, 쏟아질 듯 수많은 별들이 빛났다.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저쪽 남쪽 끝에서는 별똥별이 한 줄기 선을 그으며 순식간에 스러져 갔다. 말린 쑥에 불을 놓아 식구들 쪽으로 연신 부채질을 해가며 모기를 쫓아주던 엄마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개구리가 목청껏 개굴개굴 울어대는 초여름이 되면 어른들은 모내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그 무렵 감나무에는 감꽃이 피었다. 나는 감꽃을 실에 꿰어 목걸이 삼아 걸고 다녔다. 어느새 풋감이 통통해지면 잠이 덜 깬 눈을 부비며 아침마다 감나무 밑으로 달려가곤 했다. 소금물 담긴 오가리에 떨어진 감을 담가 놓기 위해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맛이 있을까 싶지만 떫은맛 가신 감을 골라 먹는 것 또한 꽤 재미 졌던 모양이다. 마당이나 골목을 몰려다니며 뛰노는 친구들의 그림자가 짧아지면 어느새 여름이었다. 더위를 피해 강으로 몰려가 놀았고 물놀이에 지치면 강가에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로 올라가곤 했다. 우람한 나뭇가지 등걸에 누워 뭉게뭉게 피어나며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나도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저 구름을 따라가면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자못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공주가 아닐까, 그럼 언젠가 이웃나라 왕자가 데리러 오는 걸까?” 내가 동화 속 주인공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그런 상상 속을 헤매다 보면 눈앞에 보이는 마을도, 강물도, 나무들도 마치 꿈속의 풍경인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겨울이 오면 놀이터가 달라졌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논들이 꽁꽁 얼면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썰매를 타고 놀았다. 솜씨 좋은 아버지가 직접 만든 썰매는 겨울 날 최고의 놀이기구였다. 두 뺨은 겨울바람에 빨갛게 익었다. 썰매를 타느라 넘어지기 일쑤여서 젖은 엉덩이 마를 새가 없었지만 그저 신바람이 났다. 밭에서는 자치기를 했다. 딱! 따닥!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나무 막대기를 쫓아다니며 추운 줄도 모르고 겨울을 보내곤 했다. 거의 사내아이라고 해도 무방했을 어린 시절이었다. 울타리 아래 잔설이 녹고 아지랑이를 따라 봄이 오면 아버지와 나는 꽃밭에 꽃씨를 뿌렸다. 사내아이처럼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놀았지만 소녀는 소녀였던가 보다. 봄비가 내리고 난 뒤 부드러워진 땅을 밀고 새싹들이 쑤욱쑥 올라오면 아버지와 나란히 꽃밭 가에 앉아서 봉숭아다, 아니 채송화야, 이건 맨드라미네, 우겨대며 꽃 이름 맞히기도 했었다. 그립다. 어린 시절을 보낸 그 마을풍경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온 세상이 복사꽃처럼 아름답기만 하여 들로 강가로 쏘다니던 어린 시절의 내가 그립다. 강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나물도 캐고 산딸기도 줍던 그 시절이 50년을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달빛이 휘영청 밝은 날은 강둑을 내달리며 친구들과 손잡고 놀던 그때가 그립다. 하얀 찔레꽃과 보라색 구절초가 무리지어 피었던 강변도 어저께인 듯 눈앞에 펼쳐진다. 어린 딸과 놀기를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그립다. 외삼촌의 북장단에 무릎을 치면서 ‘쑥대머리 귀신형용....’ 〈춘향가〉 한 대목을 구성지게 뽑으시던 그 모습. 아버지가 떠나신지 삼십여 년이 지났건만 어디선가 그와 비슷한 소리만 들려와도 아버지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생각해 보면 북장단에 흥겨워 〈춘향가〉 소리를 하실 때, 비틀배틀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오는 어린 딸을 보며 아버지도 행복했을 것임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차 한잔을 앞에 놓고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노라니, 성장통을 겪으며 힘들고 슬펐던 일들은 커피 잔에 어리는 하얀 김처럼 사라지고, 나의 어린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마는 각자에게 그 기억이 소중하듯이 내게는 참으로 좋은 기억들만 차곡차곡 남아 있다. 그 기억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 그래서 나는 더욱 그날이 그리워질 뿐이다.
제175호 신인상/심사평
수상작 배공순 - 〈그립다, 어린 시절〉
50년전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쓴 글이다. 작자는 중견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최근에 퇴직하고 지금은 수필 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이전에 일에 필요한 글을 썼다면 이제는 일에 필요한 글이 아니라 작품을 위한 글을 쓰고 있다. 생활에 꼭 필요한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을 나눈다면 수필은 후자에 속한다. 수필은 삶 자체를 놓고 볼 때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내 삶을 풍요롭게 한다. 작자는 차분히 앉아 여유를 자지고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고 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어린 시절을 뒤돌아 보고 있는 작자의 모습이 눈에 보이도록 그려져 있다. 어린 시절의 집 주변, 뛰놀던 동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들이 정감있게 그려져 있다. 글을 읽으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함께 묻어나고 있다. 어쩌면 작자에게는 인생에 있어 새로운 전환점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글쓰기에 전념한다면 우수한 공무원 시절 못지않게 행복한 삶을 누릴 것으로 기대한다.
신인상 당선 소감
배공순
“아니, 내가 신인상을 받게 되다니. 이럴수가!” 기쁨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내 안의 감성과 그 간의 사회경험을 글로 써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수필교실 첫 수업을 하던 날, 그저 얼떨떨하면서도 첫사랑을 만난 듯 설레이던 느낌이 떠오릅니다. 나와 마주앉아 속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내 속에 켜켜이 쌓인 뭔지 모를 것들을 담백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풀어 내 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아득한 어린 시절의 행복을 반추하며 또 다른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정쩡하게 들고 서있는 정으로 묵묵히 글을 다듬어 보려 합니다. 아름다운 날, 바람이 불어옵니다. 꽃잎이 포물선을 그리며 기쁨인 양 흩날립니다. 한없이 부족한 저에게 격려하며 이끌어 주신 교수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다정하고 때로는 적절한 조언으로 도움주신 문우님들께도 마음을 담아 고마움을 전합니다. 감히 은은한 향내가 나는 나만의 수필을 써보고 싶은 욕심을 내 보면서, 보고 싶은 아버지와 94세로 아직 정정하신 친정엄마, 그리고 시어머님께 이 소식을 전하려 합니다. 주름진 얼굴에 환히 빛나는 웃음을 보고 싶습니다.
약력
전남, 광주 출생 명지대학 사회복지과 졸업 원석문학회 회원 서울특별시청, 종로구청 등 근무(2015년 종로구 문화관광국장 정년퇴임)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본포럼 문화분과위원(2015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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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필과비평> 175호로 등단하신 배공순님, 축하합니다.
우리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어린시절을 추억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글 많이 쓰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더 축하합니다.
송화선생님,
축하해주심 너무 감사합니다.
부족함이 많습니다.
앞으로 따금한 조언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배공순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그립다,어린시절>을 읽다보니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생깁니다~^^
해바라기 선생님,
닉네임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노오란 해바라기가 웃고 있는 풍경이 연상되어서요.
축하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배공순님.
늦었지만 신인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내 어릴적 추억이 떠올라 우리 고장이 아닌가 착각했어요.
어릴적 추억을 떠올리며 잘 읽었어요. 앞으로 좋은 글 많이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