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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雲峰大禪師
죽어서 무엇이 되겠는가
불교의 선종사 속에는 전설의 미학같은 法談이 한마리 짐승처럼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것은 禪學史를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미화시킨 전설이 아니라 일생동안 자기 존재의 실존을 규명하다 남겨 놓은 정신적 삶이 불교적 공간속에 풍화되지 않고 하나의 뼈대로 남아 있는 것을 다시 그들을 추앙하던 후학 사문들이 전수하여 우리들 가슴속에 충격과 감명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雲峰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권 전에 태어났다가 가난한 초가집에 등불 하나를 달아놓고 사라진 사문이란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년전 선산 도리사에 있을 때 그의 제자 香谷和尙을 통해서 그를 다시 떠올리면서 근대 선종사에 정신적 一木을 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또 하나 雲峰이 오랫동안 도리사에 주석했다는 전언을 들으매 문득문득 그를 나의 정신적 내안에서 기억해 보기도 하였다. 雲峰은 근대 선종의 중흥조 鏡虛와 慧月의 법맥을 상승한 ①法燈이기도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鏡虛와 같은 삼천대전 세계를 때려부수고 다시 구성하는 인력은 없는 것 같고 다만 불교적 공간속에서 자기 존재에 도달하는 통로를 만들어 놓고 그 통로를 조용히 왕래하는 차분한 禪僧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 香谷이 전한 雲峰의 면목은 나의 뇌리에 전율로 남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가 ②입적의 문턱에서 제자 香谷의 질문을 받고 참으로 자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스님] 향곡의 질문을 그는 귀로 듣지 않았고 가슴으로 받았다.
[涅槃路頭가 있습니까?]
삶을 길들이고 죽음을 향해 길들이며 사는 사람에게도 죽음이란 큰 문제이다.
葉不見花 花不見葉의 질서 속에서도 삶과 죽음의 공간이 있듯이 사실 인간은 삶을 통해서 죽음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또 죽음을 통해서 이 삶의 실체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과 죽음의 심연이 우리들 가슴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슴속에 죽음과 삶을 초월한 길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雲峰은(아야 아야)하고 대답하였다.
香은谷 何處去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스님께서 돌아가시면 어데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이웃 마을 시주네 집의 물소가 되리라.]
[그러면 스님을 소라고 불러야 하리까? 스님이라고 불러야 하리까?]
[풀을 먹고 싶으면 풀을 먹고 물을 먹고 싶으면 물을 마시리라.]
雲峰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이 내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자기 질서에 구애됨 없이 자재한면을 보여주었다고 그의 행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만의 자재할 수 있는 허공을 키웠든 禪師란 위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의 스승 鏡虛마냥 천기를 누설하고 자연의 질서를 마구 부수는 그런 야성적 면모가 없다.
禪師에게는 우주공간을 마음대로 유영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중국 丹霞天然(단하천연)처럼 문수보살의 성상을 타고 [문으로 나가라. 문으로 나가라] 하는 불교적 허상을 파괴하는 힘이 있어야 하고 木佛을 태우고 나서
[이놈들아! 이것이 어찌 너희들이 찾는 眞佛이냐. 眞佛이라면 木佛에게 사리가 있어야지] 하고 외칠 수 있는 야성이 있어야 한다.
鏡虛는 주막에서 酒母의 양귀를 잡고 입을 맞추고 동네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고 실신하였다가 일어서며 제자들의 위로를 받을 때 [이놈들아! 여자 입 한번 맞추고 이것도 안맞아] 하는 無碍가 있었다.
중국 雲門禪師는 오늘날 佛陀의 신비한 인격을 증언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의미의 허구성을 일갈로 부수어 버린 일이 있다.
[네 앞에 다시 석가모니가 나타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친다면 한 몽둥이로 때려잡아 주린 개에게 주겠다] 고 선언하여 뭇사람들에게 무서운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사실 충격이 아니라 자기 속박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인간회복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出家와 悟道
光武년호를 만들기 이전 우리 근대사에는 너무나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이 있었다. 金玉均의 암살사건, 김해지방의 거센 민란, 그리고 白山의 東學 전투, 원세개(袁世凱) 大鳥圭介 (오토리 게이스케) 朴泳孝, 金弘集 인물들이 연출한 사건이 있었는가 하면 서재필 같은 인물들이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구국의 열정을 외롭게 태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 사회의식의 구조적 주역자들은 각기 자기 안녕을 전제로 하여 민족의 주체자인양 설치기도 하였다. 특히 甲午更張이후에도 조씨 민씨의 척족들의 암투와 유림 출신들의 수구적 자세로 인한 친로파(親露派)형성과 (春生門) 사건 이후 高宗의 겁에 질린 소심으로 인해 야기된 아관파천등 사건이 이제 우리 민족사의 비극이 되고 있다. 이런 과도기에 미국 망명 십년을 지낸 1896년 1월 서재필은 미국 민주주의와 근대적 의식체험을 한몸에 지니고 금의환향 하지만 조국은 그의 열정을 위로할만한 역활을 하지 못하였다. 다만 개화 내각 金弘集 유길준 등이 구내각과 상치한 상태에서 적대하여 倭城의 품에 의존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조야를 막론하고 서로 모해하고 서로 살해하는 일은 옛날이나 다름 없구나.] 하고 탄식과 환멸을 가지고 다시 도미하였다. 이런 사회적 정황속에 불교적 공간 속에는 동양이 원초적으로 만든 虛無와 불교적 無常이 한데 엉켜 이것이 불교적 허무주의가 되어버리니 힐의식을 앓고 사는 사람들은 다행이었으나 사문의 본분을 잃고 사치와 방종에야 합한 승려들이 불교권속에 너무 많이 있었다.
이조 상궁들의 나들이처인 서울 봉익동 대각사 종로 안국동 禪學院에는 白龍城 金南泉 金寂音 등이 장안불교를 담당하고 있었고 金南泉 金寂音등은 고독한 尙宮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서 尙宮들의 향수냄새를 맡으며 달콤한 치마바람의 常樂我淨을 소유하기도 하였다. 그와 반대로 충남 洪城에서 태어나 간디와 같이 조혼한 萬海는 아내 貞淑에게 산고의 뒷바라지를 위해 시장에 간다고 속여 五臺山 五歲庵에 들어가 득도한 후 고독과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훈련한 짐승마냥 조국 산야를 주름잡으며 방황하고 있었고, 경허, 만공, 혜월, 萬花, 連谷과 같은 수행의 거목들은 불교 법맥의 수호를 위해 친일과 야합하지 않고 저항하였다.
雲峰은 이런 정황이 만들어지고 있는 전후의 공간을 움켜쥐고 大韓 光武 乙丑 12월 7일 모친 동래 정씨의 꿈에 서기가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잉태되어 태어났다.
스님의 이름은 性粹(성수)라 하였고 훗날 雲峰이란 법호를 받았다. 그의 득도 배경속에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절망과 고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부친을 따라 銀海寺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입산의 인연을 갖게 되었다고 행장은 간략히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열 세살때 [김일하]스님 슬하의 제자가 되고 십년이 흐른 후 스물 세살 때에 금정산 梵魚寺에서 萬化에게 구족계를 받고 원적사 석교화상밑에서 律과 禪을 실참실구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雲峰和尙이 선을 시작한 것이 이십대 후반이라면 1920년대의 전후를 말한다. 이 시기라면 김홍집 내각이 물러서고 朴定陽 내각이 들어설 무렵이다 그리고 수원 龍珠寺 주지 姜大蓮같은 친일승이 매국노 李完用의 양자로 입실하여 불교탄압과 아울러 왜색불교를 주창한 시대이며 鏡虛, 滿空이 덕숭산에서 부처를 죽이고 조사도 죽이는(殺佛殺祖) 선기(禪機)를 개산하여 원초적 인간의 안목을 보다 깊이 개안시키고 있을 무렵이다. 이때 雲峰의 스승 慧月은 경허와 만공의 총애를 받으며 해미(海彌)술집을 찾아다니며 자기 실험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개화기의 역사 속에서 민족탄압의 대열에 가담하지 않고 수행자가 가는 통로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雲峰禪師에게는 민족이나 사회의 절망을 체험한 흔적보다 자기 구제의 열정만 상흔마냥 깊게 행상에 남아 있다. 그러나 모든 禪師들의 행상이 천편일률적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그의 행상과 연보도 상세하지 않는 반면 선지식으로 북가시키는 공모된 구성만 남아 있다. 그러나 雲峰은 다행스런 구도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화려한 각광을 받으며 조명되고 있는 萬海의 횡포와 함정에 빠져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1909년 하르빈에서 안중근이 일본의 명치말기 중신 이등박문을 살해한 일년 후 萬海는 한일 합방의 민족비극을 참지 못하고 석왕산에서 뛰쳐나와 실의에 빠져 있다가 다시 表訓寺에서 萬海의 불명예가 된 승려의 결혼을 해야 불교가 발전한다는 내용이 담긴 건백서를 중추원 의장 金允植에게 제출하여 호응을 받아 사문이 다투어 결혼을 할 때, 雲峰은 자기 내부의 절망과 싸우면서 구도자의 자의식을 버리지 않았다. 이때 萬海는 김윤식에게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으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김윤식의 말대로 불교계 천하 문장가란 자부심에 빠져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석전 박한영은 萬海를 보고 [자네 미쳤나. 참으로 돌았군] 질타를 할 때이다. 누구보다 친일을 반대한 萬海가 일본이 시도한 대처승화를 동조한 건백서를 제출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칼하다.
승려 취처론이 대두되자 수행만을 일삼던 사문들은 萬海를 타도해야 한다고 외쳤고 삼십삼인의 한 사람인 白龍城 스님은 [龍雲이 그럴 줄 몰랐어 佛家 마군 이었군.] 하고 탄식하였다. 이런 萬海를 오늘에 와서 그를 불교권 속에서 새로운 위상에 올려 놓고 조명을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다만 그것은 春園이 아내 白惠順을 버리고 허영숙과 북경으로 피난을 하였다가 1919년 3월 1일 조국과 민족의 가슴에 총과 칼이 마구 난무할 때 초기의 아내를 버리고 허영숙을 받아드려 행복을 만들어 민족 개조론을 발표하여 조선독립에 찬물을 끼얹게 한 불명예와 동급하다고 볼 수 있다.
雲峰은 정직한 사문이었다. 근대사의 비극을 가슴에 묻어 두고 자기 확인의 고행을 계속 감행하였다. 금강산 오대산 묘향산 지리산 등을 거쳐 때로는 부처를 만나고 때로는 祖師를 만나면서 자기 내면에서 들려 오는 번뇌를 확이하고 삼천대천 세계가 보살의 땅이고 그대로 부처임을 開悟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전남 백암산 운문암(雲門庵)에 주석하고부터 생멸로 이끌려가는 자기 허망을 자기 내면에 버리고 眞我로 구재성하는 정진을 감행하였다. 그해 12월 15일 일상을 통해 참구해 오던 공안이 깊은 심연속에서 와해되어 감을 확인하다가 그는 참으로 자유스런 문을 발견하였다. 이때의 즐거움과 悟道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出門舊然寒徹骨(출문구연한철골)
豁然消却胸滯物(활연소각흉체물)
霜風月夜客散後(상풍월야객산후)
彩樓獨在空山水(채루독재공산수)
문밖에 갑자기 나왔더니
서릿빛 기운 뼈속에 사무치네
가슴속에 오랫동안 쌓였던 물건
홀연히 사라져 자취 없고
서릿발 날리는 달밝은 밤
나그네들 헤어져 떠나가고
현란한 단청빛 누각만
텅빈 산 물가운데 서 있네
이해가 雲峰和尙이 서른 다섯살 되던 해이다.
우리가 그의 悟道頌에서 색다른 충격과 감동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다른선사에 비해 완벽환 서정과 자연을 직관하고 있는 자의식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대해왔던 禪詩인 悟道頌들은 지나친 알레고리에서 빚어진 관념으로 사물과 자연을 접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 이였지만 그는 완벽한 서정속에서 사물을 해체하여 재구성하고 자기 확인에서 얻어진 자의식을 도입시키고 있다.
수행하는 사람에 있어 자연과 사물은 하나의 화두이다. 그것은 자기를 참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새롭게 분석되고 해체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雲峰和尙의 悟道頌은 위와같은 면에서 상당히 새로운 면을 보였다고 할 수 있으나 약점으로 등장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지나치게 전경 묘사만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함정의 공간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나 격외의 카데고리를 관념으로 형상화하지 않고 서정속에 정밀된 시어로 압축과 암시로 선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는 점이 우리를 주목케 하고 있다.
서정의 세계
滿山雪景一峰路(만산설경일봉로)
幾傷時人目前機(기상시인목전기)
驀然一度飜身轉(맥연일도번신전)
白花粉飛松又蒼(백화분비송우창)
타고있는 눈빛속에 한봉우리 드러났네
보는 사람 눈빛들은 황홀하고
문득 한생각 바뀌고 생각하니
백화송이 떨어지는 자리에 솔잎만 더욱 푸르다.
母花爲子去(모화위자거)
匣浮水上在(갑부수상재)
擬若得巴鼻(의약득파비)
蹉過便失命(차과변실명)
에미가 늙어 아이가 되어가니
껍데기만 물위에 떠돈다
코끝을 잡으려고 생각을 몰면
벌써 어긋나 목숨만 잃는다.
淸風不得靑蘿結(청풍부득청라결)
明月那有白雲解(명월나유백운해)
若能放下二邊心(약능방하이변심)
到處張三李四歌(도처장삼이사가)
청풍이 칡넝쿨에 걸리잖는데
명월이 어떻게 백운을 풀겠는가.
만약 양쪽 놓아 버리면
간 곳마다 사람들이 노래 부르네.
萬丈碧水徹底淸(만장벽수철저청)
堯風舜雨定乾坤(요풍순우정건곤)
一朝毒龍來飜動(일조독용래번동)
惡氣吐噴幾身新(악기토분기신신)
깊은 못 푸른 물속
바다밑 맑고 밝아
우순 풍조 천하태평터니
홀연히 나타난 독룡 한마리
꿈틀거리며 품어내는 毒氣속에
무엇이 새로우냐
雪月窮壑絶人蹟(설월궁학절인적)
孤雁寒聲虛空裂(고안한성허공열)
淨飯血脈星下落(정반혈맥성하락)
誰知殃及千秋孫(수지앙급천추손)
눈빛 환한 산골짝 인적은 없고
외기러기 울음소리 빈 허공을
별을 보고 개오를 이루니
천추에 그 재앙 아손에게 충만하다
하늘을 토하고 땅을 삼키는 솜씨 모르면
거의 그 함정에 빠지리라.
非山又非野(비산우비야)
庵隱松竹岑(암은송죽잠)
僧睡雀復啼(승수작복제)
且道是何心(차도시하심)
산도 들도 아닌데
임자만이 솔밭 속에 숨어 있네
스님은 앉아 졸고 참새는 노래한다.
일러라 이것이 어떠한 마음인가.
이상 인용한 雲峰의 시들은 대부분이 앞에서 지적했듯이 서정을 통해서 구도자가 갖는 자의식을 개입시켜 직유적으로 사물을 지적하면서 자연이 소유하고 있는 분위기 속에다 심상풍경을 등장시키고 있음이 특징이다. 그래서 그의 시적 구성속에는 내면세계를 떠올리는 장인 의식이 있는가하면 나아가서 서정속에 미적 감각으로 悟道의 의미를 확대하고 그 오도의 의미를 깨어 있는 귀를 가진 자만이 雲峰 자신의 육성을 듣게 하고 있다.
진흙 밭에 개가 뛰니 자욱마다 매화(梅花)가 핀다
禪宗의 話頭속에는 부처를 죽이고 祖師를 죽이는 함정이 있는가하면 자유스런 삶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수행자는 이 자유스런 삶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화두의 함정속을 스스로 찾아들고 있다. 그러나 그 화두가 갖는 의미는 미오의 입장을 떠나서 볼때 너무 관념적인 데가 있는 반면 우리의 日常의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話頭를 사용하는 그 의미속에는 논리적 유추가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雲峰은 중국선종이 만들어 놓은 함정에서 벗어나 생생한 자기 육성을 가지고 있음을 다음과 같은 문답에서 읽을 수 있다.
[부처님 태어나시기 전 한모양이 있었는데 그 모양을 가르키는 뜻은 어떤 것입니까?]
[늦 더위가 찌는근 부채질이 바쁘다]
[더위와 상관없는데 부채가 필요 있습니까?]
[더우면 부치고 시원하면 버려라]
[풍월을 읊는것은 어떻습니까?]
[진흙밭에 개가 뛰니 자욱마다 매화가 핀다.]
[세존이 꽃을 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토끼 뿔 속에 달이 떴느니라.]
雲峰은 이렇게 자신이 확보해 놓는 공간 속에서 실상의 자유스런 모습을 들어내고 있다. 그는 1912년 경허가 입적하고 적막해진 禪宗의 분위기속에서 외롭게 오도의 주역을 담당하고 있는 慧月선사를 찾았다. 혜월은 부산 선암사에 주석하고 있었고 처음본 운봉이 훌륭한 법기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어느곳에서 안심입명하고 계십니까?]
라고 혜월에게 첫 질문을 던졌다. 모든 부처와 祖師들이 어느 곳에서 해탈을 얻었느냐고 물은 것이다.
혜월은 침묵(良久)으로 그의 질문을 막아 버렸다.
운봉은 혜월이 만들어 놓은 침묵의 공간이 함정인 줄 알고 있었다. 조그마한 분노가 운봉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침묵을 유지하는 혜월을 한대 갈기면서 [산 용이 어찌하여 죽은 물에 잠겨 있습니까?] 하고 힐난하였다.
[그럼 너는 어쩌겠느냐?]하고 그는 재빨리 불자를 들어 보였다. 그 찰라에 서로 속일 수 없는 해탈의미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혜월은 [아니다]라고 부정하였다.
[스님 기러기가 창밖에 지나간 것을 모르십니까?]
하고 근본에 도달하는 질문이 떨어지자.
[너를 참으로 속일 수 없구나] 하며 운봉에게 모든 것을 전수하여 주었다. [일체 함이 있는 법은 본래 진실상이 없는것, 저 이상에 만일 상이 없으면 곧 그대로 견성일 것이니라.]
전법계를 주며 雲峰堂이란 법호를 주었다. 이후 운봉은 도봉 만일 선원에 白龍城을 친견하고 다시 덕숭산에서 수행을 한 모범적 수행인이다. 이때 운봉의 禪眼을 만든 계기 하나가 있었다.
운거 和尙의 회상 뒷산 암자에서 한 수행인이 조용히 靜觀을 계속한다는 소식을 듣고 스님 한 분이 옷 한벌을 보낸 일이 있었다. 옷을 받은 사문은 그 옷을 반환하면서 [우리 부모가 원초적으로 준 옷만해도 입고 남거늘 썩고 없어질 이런 옷은 필요없습니다.]
하고 거절하였다.
[그러면 부모에게 태어나기 전에는 무슨 옷을 입었는가?] 하고 그의 면전에다 ③父母未生前의 소식을 들이대었다. 이러한 話頭의 일화를 접한 雲峰은 내가 그때 있었드라면 [여름에는 안동포를 입고 겨울에는 진주목을 입는다고 했을 것을...]
명확한 자기 세계를 들어내 보였다.
이후 그는 수행하는 위상에서 다시 남의 안목을 개안시키는 선지식의 위상으로 세계가 전환되어 중생의 부름에 쉴날이 없었다. 그도 서서히 늙어갔다. 雲峰의 가슴에 진한 석양이 물들여지고 있었다. 이러한 스승의 노환을 걱정한 제자 향곡은 雲峰을 동해안을 안고 노인처럼 누워 있는 원래 관음사로 모셨다. 관음사로 옮긴 운봉은 자기 혼자만이 알고 있는 세계로 발길을 옮기고 있음을 향곡은 간파할 수 있었다.
[스님 언제 입적하실렵니까?] 삶과 죽음이 없는 마을로 갈 스승의 임종을 물은 것이다.
[토끼꼬리 빠지는 날 갈련다.] 雲峰의 입적한 이월은 묘(卯)월이었다. 그는 입적하기 전 제자 향곡에게 임종계를 남겨주었다.
향곡혜림에게 부치노라.
서쪽에서 온 문채없는 법인은
전할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것일세
전하고 받는 것을 버리면
해와 달은 동행하지 않으리라.
힘이 빠진 손으로 향곡의 손목을 잡고 위의 임종계를 건네주자 향곡은 재빨리 [스님께서 돌아가시면 누구를 의지하리까?] 오열을 씹으며 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향곡의 스승에 대한 애정이었다. 운봉은 지그시 눈을 감고 갑자기 참으로 깊고 난해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저 건너 갈미봉에
비가 묻어 오는구나
우장 삿갓을 두루고서
김을 매러 가야겠다.
노래를 그치자 향곡의 오열이 엉킨 통곡이 쏟아졌다.
[스님!]
[날 불러 뭣하려고?]
숨소리가 운봉의 가슴에서 뚝 그쳤다. 동해의 파도가 운봉의 가슴속 심연에서 앓고 있었다. 다시 무량으로 가고 오는 윤희를 만들고 있었다. [법신이 무엇입니까?]
[부처와 조사가 지옥으로 꺼꾸러져 갔나니라...]
註 : ① 법등(法燈): 부처님이 말씀하신 교법. 희미한 세계의 캄캄한 마음을 없애는 것을 등불에 비유함
② 입적(入寂) : 입멸(入滅) 시적(示寂)이라고도 한다. 승려의 죽음을 경칭함
③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 부모에게서 태어나기전 자기자신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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