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바로 그 평안, 어진님이 주신 하늘의 평안 때문에, 짐승에게 찢기고 불에 타고, 창검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가슴에 황홀한 희락喜樂과 기쁨이 가득 차올라, 신의 찬미가를 부르는가 하면, 스데반이라는 인물은 화살 비 같이 쏟아지는 돌들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 얼굴이 하늘 신인神人의 얼굴처럼 웃음으로 환하게 빛났다고 합니다.”
“어째서 그 사람들은 그렇게 모진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들이 무슨 대역죄를 저질렀습니까? 일전에 장생전 회합 때 그에 관해 약간 듣긴 했지만, 저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닙니다. 다만 자신들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임금님이라고 고백했을 뿐입니다.”
“그런데요?”
“지난 번 장생전 회합 때 약간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은 무지몽매해, 우리구주 예수님의 진리를 사교邪敎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구주 예수님이, 그들의 조상 대대로 섬겨오는 여러 신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신이이라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의 임금들은 자신만이 홀로 신처럼 숭배를 받고 싶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신들의 참다운 임금으로 섬기는 그들을, 반역자, 대역죄인으로 몰아붙여 그토록 모질게 박해한 것입니다.”
여미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덧붙였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반역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아니라, 서역의 임금들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늘 임금께 감히 반기를 들고 자신이 신이라고 참칭하며 백성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섬기라고 강요한 거예요. 그리고 적반하장 격으로 하늘의 임금이신 구세주를 신으로 섬기는 이들에게, 반역자의 낙인을 찍은 것입니다.”
여미아의 목소리가 가을바람에 단풍잎이 떨리듯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 샌가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무유서가 길게 탄식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구세주의 말씀을 하나만 더 들려주시오. 너무 많이 들으면 잊어버릴 것 같아, 오늘은 두 가지 말씀만 기억하겠습니다.”
여미아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거침없이 경전을 암송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무유서는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누구의 말씀입니까? 거기서 ‘나’가 누구죠?”
“물론, 저의 임금이신 우리 구세주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여미아는 이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약간 쳐들고 천정을 쳐다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에 그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정말로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본 기오한 말씀이군요. 내가 유불선 삼가三家를 포함해 동서고금의 온갖 경전 진서珍書들을 수 천 권이나 읽었는데, 그런 말은 한 번도 읽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른 성현들은 제아무리 탁월해도 일개 인간인지라 그런 말씀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여미아는 부활과 영생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며 덧붙였다.
“순교자들은 바로 이것을 믿었기 때문에 기쁨으로 죽음에 임한 것입니다.”
“사후에 귀신이 있다는 사실은, 옛날 묵적墨翟(묵자, 서기전 5-4세기경) 선생도 확언했습니다만, 영생이 있다는 게 실제의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영생은 지금부터 누리는 것입니다. 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 행복 등이 바로 영생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육신을 벗어버린 후, 저 하늘나라, 하늘임금이신 어진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극한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누가 그것을 누리게 됩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여미아가 경전의 구절을 다시 한 번 암송했다.
“아, 그렇군요. 그 분 안에 부활의 영생이 있다는 뜻입니까? 그리고 그분을 신으로 믿으며 모시고 사는 자들에게도, 그 분이 자신의 영생을 주신다는 의미인가요?”
“무 장군님은 정말 총명하십니다.”
그들이 대화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고 한 군사가 품에 무언가를 잔뜩 안고 들어왔다. 견과류와 과일, 과자 등 다양한 먹을거리였다.
일행은 마침 배가 출출해지고 있었으므로 화롯가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어느 덧 이경이 가까워오는 것 같았다.
“자,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이제 각자의 방으로 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두 분에게 너무 많은 폐를 끼쳤습니다.”
조영이 주변을 돌아보며 떠날 것을 암묵적으로 재촉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얘기라면 정말 밤새도록 나누고 싶은데요.”
무유서가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영, 사비우, 극시아 등도 잇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 때다.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며 사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주무십니까?”
여미아가 놀라 먼저 밖으로 나갔다.
“아니에요. 아직 자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문밖으로 나선 여미아가 사환을 보고 묻고 있을 때, 등불을 든 사환 뒤쪽에서 세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미아가 보니, 불빛에 비친 한 사람은 아름답게 생긴 중년여인이었고 다른 두 사람은 건장한 젊은이들이었다. 눈빛이 예리한 여미아는 세 사람을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설마······?’
그녀가 놀라 말을 못하고 있을 때 중년여인이 여미아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입술에 대더니 자기 앞에 등불을 들고 서 있는 사환에게 말했다.
“이제 가도 좋네.”
사환이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중년여인이 여미아에게 물었다.
“안에 누가 있는가?”
목소리와 얼굴을 식별한 여미아가 급히 무릎을 꿇고 절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천녀가 속히 알아보지 못한 죄, 죽어 마땅하옵니다.”
여미아는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차분하게 절한 후 대답했다.
“안에는 극시아 마마와 저의 주인아씨 외에 여러 장군들이 있습니다.”
방문을 나와 현관문 밖으로 향하던 손님들도 여미아와 중년여인의 대화를 듣고 모두 아연해 하다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절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쉿! 마마라 부르게.”
경고 후 무 태후가 덧붙인다.
“내가 선남선녀들의 은밀한 만남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중년 여인, 무 태후의 목소리가 겨울 한기처럼 차가웠다.
“아닙니다. 마마께서 친히 찾아주시니 너무 영광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루하가 급히 입을 열어 손님을 맞았다.
“마마, 날씨가 몹시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드셔서 몸을 좀 녹이십시오.”
무 태후는 사양하지 않고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녀를 따라온 두 젊은이도 안으로 들어갔다.
방을 떠나려던 손님들은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고 있을 때, 태후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들렸다.
“모두 좀 들어왔으면 좋겠네.”
무 태후가 상석에 앉은 후, 그녀 옆에 함께 따라온 젊은이들 둘이 앉고 나머지는 원을 그리며 앉았다.
“마마, 혹시 시장하시다면 뭐 드실 것 좀 올릴까요?”
“괜찮네.”
그녀가 짧게 대답한 후, 방안에 널브러져 있는 먹다 남은 과일들과 견과류, 과자들을 훑어보았다.
조영이 무 태후와 함께 온 젊은이들을 바라보니, 그들은 다름 아니라, 신창 이해고와 승려 회의였다. 회의는 평복을 입고 머리에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있었다. 그 때 무 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자네는 여색에 홀려, 내 명을 어기고 밤늦도록 아예 여인네들과 함께 어울려 놀고 있었구먼?”
조영은 깜짝 놀라 무 태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태후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얼굴을 돌려 보니 무유서가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사옵니다.”
“듣기 싫네!”
무 태후는 그의 말을 한 마디로 자르고 고개를 돌려 조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마치 한설처럼 싸늘했다.
“자네들은 여기서 밤늦게 남녀가 한데 어울려 무슨 말을 나누고 있었나? 혹시 반역모의라고 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조영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마마, 저희들은 여미아 아가씨에게 경교의 도리를 듣고 있었사옵니다.”
“그래? 아직까지 그 경교 이야긴가?”
무 태후가 잠시 끊었다가 물었다.
“나도 좀 들을 수 없겠는가?”
무태후가 여미아를 바라보자 여미아가 고개를 숙여 공손히 절한 후 대답했다.
“마마께서 원하신다면 들려드릴 수 있습니다.”
경교진리에 관한 여미아의 짤막한 설명을 듣고 난 후 무 태후가 대답했다.
“하지만 난 그걸 믿을 수 없네. 세상에 그런 엄청난 사랑과 엄청난 행운이 존재한다는 것을.”
무 태후가 여미아의 설명 끝에 입을 열어 대답했다.
“마마,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저는 지금 감히 마마 앞에 거짓말을 아뢰고 있으니, 능지처참을 당해야 마땅할 것이옵니다.”
여미아는 대담하게도 무 태후 앞에서 배짱 좋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게 참되고 올바른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마마께서 믿으실 수 없는 것은, 마마께서 아직 그 진리를 아시지 못하기 때문이옵니다.”
여미아의 의연한 태도에 약간 놀란 눈빛으로 무 태후가 되물었다.
“나는 지금 너에게 그 진리를 들었지 않느냐? 그런데 왜 모른다고 하느냐?”
“진정으로 아는 자는 믿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마마께서 믿지 못하시는 것은, 참으로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셨기 때문이옵니다.”
“호, 그래? 그대 입심 한 번 좋구나. 그럼 어떻게 하면 내가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지?”
“빛을 받아야 합니다.”
“······?”
“우리의 시력이 제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빛이 없는 깜깜한 곳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해력이 제아무리 탁월하다 하더라도 내적이고 영적인 빛이 없으면, 이 진리를 보고 깨달을 수 없사옵니다.”
“호오, 그거 참 일리 있는 말이로군. 그럼 너는 어떤 신령스런 빛을 받아서 그 진리를 보는데, 나는 그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진리를 볼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는 말이지?”
“네, 마마의 이해력은 너무나 탁월합니다. 단지, 빛만이 없을 뿐입니다.”
“그럼 나도 어떻게 하면 그 이상한 빛을 받아,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
“그 깨달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둘이옵니다. 둘 중 하나도 없어서는 아니 되고 둘 다 반드시 필요하옵니다. 둘을 동시에 자물쇠에 꽂아야 그 깨달음의 보고寶庫가 열리옵니다.”
“허어, 별스런 보고도 다 있나 보구려. 그래 그 열쇠가 뭐란 말인가?”
“희랍어로, 하나는 ‘로고스’라는 열쇠이고 다른 하나는 ‘프뉴마’라는 열쇠입니다. 로고스는 곧 하늘임금의 말씀을 의미하고, 프뉴마는 하늘임금의 현묘한 바람, 현풍玄風, 거룩한 영靈을 가리키옵니다.”
“그럼, 그 두 개의 열쇠를 동시에 꽂아야 내게 깨달음이 열린다는 뜻이렷다?”
“그렇사옵니다. 마마께서 지금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신 것은, 하나의 열쇠만을 꽂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열쇠?”
“로고스, 즉 그 분의 말씀을 저에게서 들었사오나, 프뉴마의 열쇠가 아직 마마의 심령에 꽂히지 않았다는 뜻이옵니다. 다시 말해, 하늘임금의 신령한 바람, 거룩한 영이 마마의 심령 속에 들어가 빛을 비추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진리를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시는 것이옵니다.”
“그러면 묻겠네. 어떻게 하면, 내게도 그 빛이 들어올 수 있는가?”
“하늘 임금이신 메시아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임금, 나의 하나님으로 진심眞心 속에 모시고, 과거의 모든 죄를 그 분 앞에 낱낱이 참회할 뿐만 아니라 지금부터 그 분의 명에 따라 사시면 됩니다.”
여미아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아주 예민한 것을 용기있게 말하고 있었다. 왕 황후와 소 숙비를 처참하게 죽인 무 태후의 죄악에 대해서는 세상이 다 알고 있었다.
“나는 이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데, 어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경교의 신을 하늘의 임금이라며 내 마음에 모실 수 있겠는가?”
“그 분은 세상 모든 임금들의 머리가 되시는, 임금들의 임금이십니다.”
무 태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실내는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이따금씩 세찬 늦가을바람만 문풍지를 후볐다. 그 때 누군가가 그 정적을 깨뜨렸다.
“마마, 마마께서는 어인 일로 이 밤에 여기까지 납시었습니까?”
모두의 눈길이 발언자에게 쏠렸다. 조영이었다. 무 태후가 조영을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들을 보내놓고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내가 친히 왔네. 그대들이 대하大河(황하)를 건너는 것을 보고 돌아갈 작정이네.”
그녀가 말을 끊고 잠시 여미아와 이루하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말을 이었다.
“두 아가씨는 나와 함께 신도神都(낙양성)로 돌아가는 게 좋겠네.”
그녀가 친히 조영 일행을 부리나케 좇아온 목적이, 결국 이루하와 여미아에게 있었던가? 이루하의 얼굴이 금새 어두워졌다. 여미아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으며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무릎을 꿇고 무 태후에게 절한 다음, 자신의 사정을 아뢰었다.
“마마, 천녀가 조부 곁을 떠날 때, 살아있거들랑 정해년 설에 꼭 집에 들러 인사를 여쭈라고 조부께서 이르셨습니다. 오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간주하겠다고요.”
무 태후가 놀란 얼굴로 여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어처 극시아와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네 얼굴이 극시아하고 많이 닮은 것 같은데?”
“마마, 소녀가 어찌 폐하를 속일 수 있사오리까? 극시아는 저의 친 아우이옵니다.”
무 태후는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무유서, 사비우, 이해고 등도 아연해 마지않았다. 무 태후가 여미아와 극시아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냉정을 되찾고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면 마침 잘 됐구나. 극시아가 가서 여미아는 동도 낙양성에 잘 있다고 조부에게 전해주면 되지 않겠느냐?”
“그래도 가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반드시 제 얼굴을 보여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사옵니다. 조부께서 저를 보자고 하신 것은, 단지 생사만을 확인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여미아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자 무 태후는 불쾌했으나, 이는 인륜지도덕에 관한 문제이고, 또한 무 태후 자신이 비록 대당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자라 하더라도 죄 없는 사람의 신상을 마음대로 구금하는 건 부당불가한 일이었으므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송막도독 이진영의 딸 이루하는 비록 자의반 타의반으로 낙양성에 머물고 있긴 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볼모가 아니었다.
“정사만 바쁘지 않다면, 나도 너희들과 함께 가서 그 어르신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한번 뵙고 싶구나.”
침묵 후에 무 태후가 뱉은 말은, 그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좀 뚱딴지같은 소리였는지라, 그녀는 뒤끝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여미아가 한 술 더 떴다.
“마마, 마마께서 저희 조부를 만나신다면, 조부께서 저희를 보살펴 주신 마마의 은덕에 크게 감읍해 마마를 융숭히 대접하실 것이옵니다. 정사가 과히 염려되지 않는다면, 기왕지사 이렇게 미복차림으로 나오셨으니 저희와 함께 몇 달 여행을 하시는 게 어떨지요?”
여미아의 대담한 조언을 들은 무 태후의 낯에 미미한 웃음이 번졌다.
“무유서, 그대는 신도로 돌아가 무후군을 이끌고 우림군과 함께 궁을 잘 지키게. 대신들에게는 내가 곧 돌아간다고 전해주게나. 나의 행방에 대해서는 극비에 붙이고 미복잠행(비밀 민정시찰)에 나섰다고만 전해주게.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 중대사는 재상들이 협의해 처리하도록 이르게. 알겠는가?”
그녀는 여걸답게 결단하는 것도 빨랐다. 그녀가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덧붙여 말했다.
“내가 이미 조정에 말해두었지만, 궁에 돌아가거든 각지에 파발마를 띄우는 일, 나의 비밀 잠행에 대해 각 지방의 수령들이 철저히 대비하는 일, 특히 어느 고장에서 반역의 기운이 생기지 않도록 수령들이 각별히 조심하는 일 등에 대해 내가 다시 신신당부했다고 전해주게나.”
무 태후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본 후, 한 마디를 더 붙였다.
“내가 없는 동안 혹시 이李씨들이 준동하지 않는지 내밀하게 감시하게.”
이씨들이란, 황가의 종친들을 이름이다.
즉석에서 그녀는 문방사보를 가져오게 해 무유서에게 친서를 써 주었다.
“날이 새는 즉시로 그대는 군사들과 함께 이곳을 떠나게. 우린 좀 쉬었다가, 갈 곳으로 갈 터이니.”
무 태후는 무유서에게 명을 내린 후 승려 회의와 신창 이해고를 데리고 방에서 총총히 걸어 나갔다.
무 태후가 낙양성을 떠나기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옹주雍州(경사 장안성 일대)의 신풍현에서 산봉우리가 튀어 오르자 무 태후는, 현의 이름을 경산慶山현으로 바꿨다. 이에 대부분의 신하들은 아첨하며 축하했지만, 오로지 한 사람, 유문준兪文俊만은 서한을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이것은 결코 축하해야 할 경사로운 일이 아니다. 땅의 기운이 조화롭지 못하면 산이 솟아오르는 법이다. 태후는 음의 기운을 지닌 여자로서 군주가 되어 양陽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땅의 기운이 막히고 산이 재난을 일으킬 수 있다.
계속해서 유문준은 무 태후에게, 이건 하늘의 꾸짖음이니 마음을 기울여 덕을 닦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유문준은 독야청청獨也靑靑으로 혀를 잘못, 아니 의롭게 놀렸다가 무 태후의 노염을 사서 멀리 귀양을 가게 되고 결국 무후의 세력에게 피살당한다.
(다음 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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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4. 19.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