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 고공크레인에 좌우될 까미노 까미노 뽀르뚜게스를 수용하여 위험하지 않게 철길과 평행으로 가는 헤알 길(Estr.Real)이 철길을 떠나 국도(N1, IC2)에 합류한다. 부랑까에 들어서 4km 정도, 까자 까똘리꾸에서는 2km 지점에서. 진입을 환영(?)하는 것은 합류점에 서있는 'Albergaria Nova'(마을 이름)라는 4각의 안내판이다. 이 이름(알베르가리아 노바/정확한 명칭은 알베르가리아-아-노바)은 한 때는 지자체(Municipio) 알베르가리아-아-벨랴와 소 교구마을(Freguesia) 브랑까의 이름으로 쓰인 적도 있단다. 알베르가리아-아-노바는 브랑까(Branca)의 아주 작은 규모(2.42km²)의 자연마을인데도 주민수가 적지 않은(2011년현재 842명) 마을이다. 인구밀도가 113명/km²인 나라, 뽀르뚜갈에서는 밀도가 아주 높은(348.7km²) 마을. 브랑까의 인구밀도도 나라 전체의 1.6배 이상 높은데 그 1.8배 이상 더 높다. 무슨 까닭일까. 농경사회(1차산업)를 지양(止揚)하고 산업사회(2차산업)로 지향(指向)하는 이유가 답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한적한 농촌에서 산업사회의 앞잡이 고공크레인을 보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다. 환경 파괴와 오염을 막기 위해 2차산업을 거부해 온 농촌인데. 이 아득하게 높은 크레인은 낙후된 농촌을 끌어올린다는 미명을 내세워 펑화로운 마을을 분탕질 하고 환경 파괴와 각종 오염은 물론 순박한 인심에 먹칠을 하여 괴물로 만드는 악마다. 하나를 얻고 열을 잃게 하는. 인구밀도가 높아간다는 것은 이미 그 단계에 진입 중임을 의미하는데, 알베르가리아-아-노바가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자못 걱정된다. 그보다, 까미노(Camino de Santiago)는 주로 농산촌을 이어가는 길이다. 발전된 소도시도 있고 대도시의 도심도 통과하나 획정되던 당초에는 거개가 촌락이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에 크고 작은 마을들이 대소 도시로 발전하고 새 취락도 형성됨에 따라 까미노도 여러 형태로 변화하고 있을 뿐. 이 모든 변화의 바람이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불기는 했으나 무리 없는 미풍이며 순풍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미미한 변화가 있을 뿐이었다면 이 고공크레인이 일으키는 바람은 광풍이며 토네이도(tornado)에 비유될 만큼 강렬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까미노 데 산띠아고에도 예측 불허, 마(魔)의 변화가 바야흐로 오는 중임을 뜻한다. 이베리아 반도의 농어산간 벽촌이 이 크레인에 강타됨으로서 반도 전역에 뻗어있는 까미노들이 치명적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국도에 들어서기 까지 이따금 있는 바르 또는 까페 마다 들러서 샌드위치와 맥주, 빵과 꼬까꼴라, 등을 다른 날들 보다 충분히 먹고 마셨다. 전일의 무리를 상쇄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으나 한여름의 체력관리에 보다 적극적이야 한다는 신호가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걷기에 덜 열성적이면 보이는 것은 더 많아지는가. 여느 날들 보다 더 많은 뻬레그리노스와 교행하고 목표 파띠마의 순례자들도 더 많이 만난 날로 기억될 것 같다. 길에서 인심난다(길의 경제학) 버스정류장이기는 하나 승하차와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민가들도 멀찍한데 뭘 팔고 있을까. 국도 건너편의 버스정류장 옆, 나무 그늘의 가판대가 내 눈을 끌어갔다. 무단 횡단까지 하게 한 것은 판매대 위에 헝클어진 상태로 쌓여 있으며 검붉어 보이는 열매였다. 탐스런 포도송이로 착각할 만큼 농익었으며 군침이 돌게 하는 블루베리(blueberry) 열매들. 농 산 지역의 까미노에는 라즈베리(raspberry) 또는 불루베리 나무들로 된 울타리가 종종 있다. 밭 관계자들과 뻬레그리노스 외에는 이용하는 사람이 없는 논밭 길가에. 시장기 또는 갈증을 느끼며 지나갈 때는 손과 입, 수염까지 검붉게 물들도록 따먹어도, 그러라고 심어놓은 듯 밭 안팎의 아무도 시비하지 않는다. 또, 손수 구은 빵과 쿠키와 냉 식수, 더러는 유료 음료수 까지 구입하여 뻬레그리노스에게 나눠 주는 후덕한 인심들도 있다. 들어와서 쉬고 간식도 먹고 가라고 권하는 글과 약도가 있는 안내문들도 있다. 찾아가면 대접이 후할 뿐 아니라 간식거리를 챙겨주기도 한다(가장 인상적이라고 기억되는 집은 내 집 마당처럼 앞 마당에 만개한 영 자산홍을 비롯해 여러 꽃들이 피기 경쟁을 하고 있는 집) 교회를 지날 때 미사가 진행중이면 걷기를 중지하고 그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내 까미노 일과의 한 부분이다.(예배중인 개신교회를 만나는 일은 하늘의 별 따오기와 같다 할까) 미사 말미의 인사 나누기 때는 양 옆, 앞뒤의 신도들과 동작 큰 목례를 주고 받고 악수도 하고 인 사말도 나누는데 뻬레그리노스에게는 식사대접을 하거나 한사코 식대를 주고 가는 신도도 있다. 일본의 시코쿠헨로(四國遍路)에도 길(遍路) 따라 감(枾)나무 밭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 더러 있다. 헨로상(遍路樣/巡禮者)들이 시장기가 들거나 갈증을 느낄 때 따서 먹게 하는 배려의 감밭이란다. 농촌의 노변에 더러 있는 휴식용 원두막에는 바구니에 과일들이 담겨 있기도 한다. 헨로상들에게 휴식과 간식 후 배낭에 넣어 떠나기를 권하는 후덕한 글과 함께. 시장기나 갈증을 풀어주는 것은 그 열매들이라기 보다 훈훈함을 느끼게 하는 인심일 것이다. 달려와서 적은 액수지만 금전을 손에 쥐어주는 나이 든 이들도 더러 있다. 자신의 특기로 만든 소품을 배낭에 달아주거나 몸에 지니게 하며 축수하는 이들도 있다. 건강하지 못하거나 체력이 달려서 직접 동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행한다는 마음을 담았다는 것. 헨로상의 일상에 필요한 것들을 들고 츠야도(通夜堂), 젠콘야도(善根宿)를 방문하는 이도 있다. 나는 무사히 순례 마치기를 축원하는 글이 쓰인 봉투(1000엥 지폐가 들어있는)도 받았다. 언듯 보았을 뿐이나 맵시와 언행이 차분하고 중후한 중년 여인이 중형 승용차를 운전하며 정중히 건네주는 이 봉투를 낯 모른다 해서 사양해야만 하는가. 일본인의 글씨가 하나같이 달필인 것을 나는 소학교 때부터 익히 알고 있지만 언행만큼이나 중후 하고 정성스러움이 글자마다 꽉 차있는 듯 한 명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글씨로 또박또박 내려쓴 축원이 담긴 하얀 봉투를. 일본인은 부유하고 사회적 신분이 상당해도 소형승용차를 선호하는 검박한 사람들인데 중형차를 운전하는 것이 괴이쩍기는 했지만.(메뉴 '시코쿠헨로' 33번글 참조) 한사코 뿌리쳐도 6000엥(5000+1000)을 기어코 받게 한 이도 있다. 가공스런 태풍과 폭우 직후라 말이 아닌 내 몰골에 동정한 것일까. 1000엥 또는 5000엥 지폐 1장이면 될 텐데 각 1매씩인 까닭은? 부모님 모시듯 해야 하나 일 때문에 그러지 못해 죄송하다며 괜찮은 호텔의 1박요금이 6000엥쯤 이기 때문에 각 1매씩을 드리는 것이라고. 가식이나 외식적(外飾)인 행위가 아니고 정중하고 진심어린 축수라고 느껴져서 받기는 하였으나 이 7000엥(여인의 1000엥 포함)은 내 책꽂이에 꽂혀서 합당하게 쓰일 데를 기다리고 있다. 까미노나 헨로에서 순례자에게 식사를 제공하거나 금전을 건네는 것은 동정 행위가 아니고 전통 으로 정착되어 있는 순례문화의 일면이란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부득이한 사유로 동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심정적 동행을 의미하는. 또한, 까미노와 헨로변(邊)의 낙서할 만한 공간에는 예외없이 격려의 글귀(animor, 頑張れ, お元氣 기타)가 씌어 있다.(Animor, cheer up/Camino de Santiago. 頑張れ,お元氣/四國遍路) 국내, 각종 이름의 길들(백두대간과 정맥들, 十大路와 둘레길 등)은 어떤가. 사람들이 애써 걷는 길들에 이같이 포근한 인심이 왜 없고, 각박하고 흉흉한 경고문(고발과 벌금) 이나 온갖 볼멘 소리뿐일까. "제발 조용히 / 우리 아이들 공부 좀 합시다" 또는 "제발 쓰레기를 버리지마세요" "주택가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조용히 가세요" 그밖에도 읽기 거북한 말들 일색이다. 심야에 떼로 고성방가하며 가는 것이 아니고 낮시간대에 모두가 왕래하는 길을 지나갈 뿐인데도 무엇이, 왜 마뜩찮아서 옹졸하게도 당치 않은 소리를 써붙였을까. 마치 공붓벌레인 아이가 보행자들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고 있는 듯이, 그래서 가해자(보행자) 로부터 피해자(자식)를 구출하려는 호소(부모의)인 양. 그러나, 꼬로나19 때문에 재택 공부하는 아이가 더러 있는 이즘과 달리 낮에 집에서 공부하기는 커녕 집 안에 있기나 하는 아이들인가. 하학(下學)하면 이런저런 학원순례 아니면 스마트폰에 매달리느라 공부할 빈틈이 있기는 한가. 그러므로, 이 볼멘 소리는 터무니없는 억지다. 노상에 쓰레기와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는다고 프랑스 노동자들이 가두시위를 한 적이 있단다. 마구 버리라는 데모(demo/demonstration)다. 진위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버리지 않으면 청소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게 되는 것이 이유였다니. 거세진 금연바람에, 급기야 법이 날을 세우게 되었는데 그 전에 빠리(France)에서 들은 이야기다. 그러고도 남을 프랑스인들이라고 수긍되었다. 단언컨대, 쓰레기나 담배꽁초는 부지불식간에 버려질뿐, 부러 지니고 다니다가 대중이 이용하는 길바닥에 버리는 의도적(故意的)인 정상인은 없다. 야간산행이 일상화되었던 때 이 등산의 폐해 중 하나가 고산 심산의 산길에 쌓이는 오물이었다. 주말의 교통체증이 낳은, 백해무익한 변칙산행이었는데 고의로 버린 것이 아니고 양심의 감시를 받지 않는 밤길이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버려진 것들이다. 따라서 노상(노변)에 쌓이는 쓰레기의 범인은 특정인이 아니고 그 길 주변 거주자를 포함하여 그 길 이용자 모두다. "이 쓰레기 더미에 내게서 나온 것은 결단코 없다"고 목청을 높일 자신 있는가. 역사가 숨쉬고 어떤 의미를 가진 길이 자기 마을, 자기 집 주변으로 나는 것이 경사(慶事)가 되고, 그래서 그같은 길을 끌어가려고 음양으로 애를 쓰는 사람들. 까미노와 헨로 주변의 사람들이다. 그랬기에 그런지, 그들은 길손들(Peregtinos, お遍路さん)을 위하여 갖은 정성을 쏟고 있다. 노상 음수대를 설치하고 오염 방지를 위한 주변 청소에 열성적이며, 아무나 판독이 쉬운 이정표 와 편안한 휴식을 제공하는 그늘막과 벤치가 있는 길, 철따라 꽃이 피는 길을 꾸미고 있다. 이처럼, 길손을 위한 가시적 환경의 조성에 최선을 다함에 더하여, 그들의 호의와 후의는 환영과 환송의 진정성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동냥을 주기는커녕 쪽박을 깨고 있다. 그들은 그런 길을 끌어가려고 애쓰지만, 이들(우리 주변 사람들)은 이 길들을 밀어내려고 터무니 없는 구실들을 내세우고 있다. 그 길들은 보고 읽을수록 기분이 좋고 격려가 되는, 고마운 그림과 글귀로 장식되고 있지만, 이 길들에는 그럴(보고 읽을)수록 더 불쾌하며 맥이 빠지는, 야속한 악담 뿐이니. 까미노와 헨로, 그들의 길 주변에도 일어탁수에 해당하는 상혼이 있고 악의적인 면도 있다. 순례자 음식, 순례자 용품 기타 순례자를 위하는 듯이 포장되어 있으나 실은 순례자를 등쳐먹는, 양두구육의 짓을 이따금 겪거나 보게 되니까. 다과, 대소의 차가 있고 기준에 따라 상대적이기는 해도 선과 악이 모든 곳에 있음을 의미한다. 성선설(孟子)과 성악설(荀子)이 각기 설득력 있게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된다. 이처럼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과 백해무익한 것이 공존하며 사람의 호오(好惡) 정서를 자극한다. 그럼에도 한쪽은 선이고 다른 쪽은 악인 듯이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다같이 경도(傾倒) 현상이 뚜렷하지만 저쪽은 보다 더 적극적인 선에 악이 흡수되고 있다면 이 쪽은 보다 소극적 선이 악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선과 악의 공존 현상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이미 언급한 대로 시한적이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이 뽑히는 불행을 막기 위해서 추수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러므로 순례자의 영성 수련에서 인내는 필수 중 필수라야 한다. 3번 참으면 살인도 피할 수 있다잖은가. 모든 덕목을 갖추었다 해도 인내가 빠지면 그 영성의 와해는 찰나적이기 때문이다. "광(곡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다. 비(非) 활성적인 농경사회(1차산업시대)에서는 그랬으나 지금은 3차산업시대다. 미국에서는 이미 국민총생산의 3분의 1이 종사하고 있다는 4차산업(정보. 지식산업)시대. 그런데도,몸은 스마트폰에 매달리면서도 생각은 1차산업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체의 산업이 길에서 이뤄지며 인심은 길에서 나건만 길의 경제학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으니 오호 통재로다(嗚呼痛哉). (사람의 일상을 편하게 할 뿐 아니라 경제적 기여도도 막대하여 소홀히 다뤄서는 안되는 길. 대소 도시와 도농을 망라하여 우회로 개설을 요구하는 데모가 유행병처럼 확산된 때가 있다. 표에 휘둘리는 정치가들이 모르쇠 할 수 있는가. 많은 돈을 들여서 길(우회호)을 만든지 불과 몇년에 그들은 다시 깃발을 들었다. 그 길을 없애라는 데모였으며, 다급하게 느낀 사람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실력행사에 돌입했다. 앞 데모는 차량 공해 때문이었고 뒤의 그것은 경기 침체 때문이었다. 공해는 막았으나 살 길이 막막해졌다는 것이다 외지 차량들의 왕래를 막았기 때문에 영업장들이 개점 휴업 상태가 됨으로서 여우는 피하였으나 호랑이굴로 들어간 꼴이 되었다는 것. 길의 경제학에 눈을 떠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건만.) 블루베리 한 봉지의 힘 1kg에 1.5€라는 가격표시판이 붙어있는 판매대. 금액 단위가 아니라 양(量)이 단위다. 500g이면 족할 듯 했으나, 거스름으로 푼돈(동전) 받지 않으려고 1€치 줄 수 있는가 물었다. 쭈그러진 얼굴 주름으로 보아서는 내 연배 같으나 세센땅(sessentão/60대)이라는 영감은 손대중 으로 한 움큼 집어서 비닐 봉지에 넣었다. 그러나, 이럴 수가? 거스름으로 푼돈을 받지 않으려고 1€치의 양을 주문하였는데 도중에 이것저것 사먹느라 주머니 안의 동전들이 다 청소되어 한푼도 없으니(euro동전이) 어찌한다? 달러화는 1$부터 지폐인데 유로(euro)화의 지폐는 5€가 최소 단위다. 1$, 2$(.(소장용이 되어 거의 통용되지 않지만)가 모두 지갑 안에 모셔지는데 반해 모두 동전인 1€, 2€는 지갑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호주머니 안에서 아무렇게나 딩굴다 사라진다. 유로화가 달러화에 비헤 헤프게 취급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그 지갑을 열고 꺼내야 하는 지폐와 호주머니 안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지는 동전과 같은 비중일 수 있는가. 5€ 지폐를 내밀며 면구스러워 하고 있는 내게 영감이 물어왔다. "빠라 파띠마?"(para Fatima/파띠마로 갑니까) 이 영감도 산띠아고 보다 파띠마가 더 거륵하다고 믿으며 파띠마 순례자에게 더 호의적인 토종 뽀르뚜게스 중 하나? 그래서, 내가 역방향으로 가다가 무단 횡단하는 것을 보았기에 확인하려고 물었는가. 그리고, 스페인어도, 영어도 몰라 대화는 못하지만 호의를 베풀고 싶었는가. 영감은 5€ 지폐와 봉지를 함께 내 손에 쥐어주며 그냥 가라고 떠밀어내는 시늉을 했다. 지폐를 받으라는 나와 잔돈이 없다는 마임(mime)을 하는 그, 그렇다면 그냥 가겠다는 나와 봉지를 들고 가라는 이 영감, 어이없게도 실랑이하다가 내 불통 고집이 그의 순금 호의에 지고 말았다. 지나다가 이 광경을 본 행인에 의뢰해서 함께 사진 몇컷 찍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 그 행인의 도움(통역)으로 사진을 프린트하여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주소 성명을 받았건만 또 하나의 절통한 일이 되었다. 알메리아의 도둑이 이 심정을 알았겠는가. 알았다면 도둑질을 할 수 없었겠지. 상대방(인물, 시일, 장소 등)이 다를 뿐 같은 까미노 뽀르뚜게스(2011년 5월 12일의 뽄떼베드라) 판박이 인연(메뉴'까미노이야기'60번글 참조)은 해를 거듭할수룩 더 돈독해 가고 있건만. 한낮을 막 넘긴 시점인데, 이 곳(Albergaria-a-Nova)에서 알베르가리아-아-벨랴(Albergaria-A-Bel ha)까지 7km 남짓 되므로 전일과 달리 여유로웠다. 어제 초과한 10km의 효과가 오늘 발휘되는 것이다. 약간 떨떠름은 해도 갈증 해소의 특효(이미체험)를 가진 블루베리. 한 뽀르뚜갈 영감의 순금(순도99.99%) 호의가 담긴 열매를 씹으며 N1(국도)의 갓길(人道)을 걸을 때 모처럼 여유로웠고 온전하게 행복했다. 블루베리 1봉지의 힘? 차등화되어 가는 알베르게 우측으로 N1-12가 분기하는 지점, 국도 변의 교회를 지났다. 기쁨의 성모 예배당(Capela de Nossa Senhora da Alegria)이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절대 우위인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교회 개념(외형)을 이탈한 건물이기 때문에 이색적으로 보이는 예배당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 예배당도 그 중 하나다. 그 보다, 예배당(Capela)으로 분류된 것이 이해되지 않을 만큼 큰 규모의 본당이 부속 건물들을 거느리고 있는데도 여전히 예배당인 이유가 무엇일까. 뽀르뚜갈 교구의 일을 왈가왈부하려는 나야 말로 이해되지 않을 극동 늙은이? 촬영 위치가 다를 뿐 동일한 사진의 설명에 까뻴라(Capela de Nossa Senhora da Alegria)외에도 이그레자(Igreja de Albergaria-a-Nova)가 등장한다. 나와 같은 생각인 사람임을 뜻한다면 미구에 후자(Igreja)로 통일되지 않을까. 100여m 후에 국도를 떠나 좌측 길(R. Velha)로 접어든 까미노 뽀르뚜게스. 국도의 이면로에 다름 아닌 벨랴 길 500여m가 끝나고 다시 국도에 합류하여 잠시(500m쯤) 국도 를 따르다가 분기하는 좌측길로 나간다. 이 후, 지도(Google)를 추적하다가 발견한 공동숙소(Albergue/Albergaria-a-Nova). 국도를 떠나기 100여m 전의 좌측, 국도 지근에 자리하였는데 2015년 10월에 오픈했다니까 내가 걷던 당시(2015년 6월 20일)에는 보지 못한 알베르게다. 이 알베르게가 태어나기 4개월 전이었으니까. 올리베이라 지 아지메이스 ~ 알베르가리아 아 벨랴의 20여km 사이에 알베르게가 2곳(Branca와 Albergaria-a-Nova)이나 증설되었다. 신설 개업이 휴 폐업을 크게 능가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뻬레그리노스에게 다다익선일 듯 하나 유감스럽게도 반길 일이 되지 못하는 실상이다. 내가 까미노에서 보낸 기간은 2011년의 2.5개월에 이어 2015년의 5개월인데, 알베르게 시장의 부정적 변화 실태가 4년에 불과한 그 사이를 엄청 긴 세월로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알베르가리아-아-노바의 신설 알베르게를 검색하다가 기겁한 것은 순례자를 위해 있는 숙소가 일반 숙박업소처럼 이용(숙박)료가 다른(10€, 30€) 침실 구조로 되어 있는 것. 더욱 실망스런 것은 신설 알베르게 뿐 아니라 기존 알베르게들이 이같은 차등 구조로 개조되고, 도나띠보(donativo/기부숙소)들도 차등 정액제로 바뀌는 등 변질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풍찬노숙하며 형극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던 구도자(Peregrinos/Pilgrims)에게 오아시스(oasis) 에 다름 아니던 알베르게까지 등급사회(자본주의)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가는가. 까미노의 알베르게들이 열악하다 해도 풍찬노숙보다 더하랴 마는 불만을 토로하며 고가의 상급 숙박소를 찾아가는 사람(peregrinos)이 적지 않을 뿐 아니라 날로 증가하고 있다. 까미노 주변에 비교 우위의 일반 숙박업소들이 늘어나는 까닭이 될 것이다. 알베르게들이 차등 시설을 갖추게 되는 이유도 이탈하는 고객(?)을 붙잡기 위함이라면 부득이한 고육책이라 할 수 있으나, 그래서 얻은 효과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까미노에서 기존의 알베르게 보다 좋은 시설과 환경을 원하는 뻬레그리노스와 그 같은 조건들을 갖춰놓고 고객을 기다리는 업자(숙박)는 닭과 달걀의 관계? 전자와 후자,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 좋은 여건의 숙박소가 있기 때문에 선호하게 되었는가(없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니까) 그 같은 숙박소를 원하는 고객들에 부응하는 것일까.(원하지 않는다면 만들 까닭이 없으니까)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같은 차등화는 계급사회와 무관하고 평등사회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다. 더 좋은 서비스를 받을 자격(권리)이 신분 아닌 경제적 능력에서 나오며, 서비스와 대가((報酬)의 관계가 비례적이기 때문이다. 동가홍상이라잖은가. 같은 값이라면 더 좋은 숙박소, 같은 류의 숙박소라면 보다 저렴한 곳을 찾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런 행태에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이지 않은 나를 서글프게 하는 것은 이 행태가 까미노 와 뻬레그리노스까지 사로잡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왜냐하면, 초탈적 구도의 길(Camino) 걷기를 표방하고, 사망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형극의 길 인데도 피하지 않고 걷는 사람들(Peregrinos)의 영혼을 파멸의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잠자리를 가리면 먹거리도 가리고 사람까지 가리게 된다 유유상종(類類相從/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이라잖은가. 게다가, 말 타면 종 두고 싶어지는 것도 사람의 기본적 본능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순례길은 무엇이며 왜 걷는가. 걸을 이유가 사라져버린 길(Camino)을 걷는 것이다. 알베르가리아 - 아 - 벨랴 국도(N1, IC2)를 떠나 좌측의 길을 택하는 까미노는 폐(?) 철길을 건넌다. 다시 좌측 길을 따라서 북상과 동남진하여 포장도로가 끝나기 직전에 우측 유칼립투스 삼림길로 남하와 동남진, 남하를 계속해 포장도로(EM556)에 합류한다. 1km가 넘는 숲길이다. 뽀르뚜갈 땅의 까미노 뽀르뚜게스에서는 처음 걷는 긴 숲길이며 포장길의 지루함 또는 피로감을 날려버리는 길. 그러나 지도에 없으며 위성(satellite)도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도 이 구간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시코쿠헨로(日本)에서, 휴대전화(handphone/mobile phone/cellphone)의 GPS에 의존하는 헨로 상들이 이같은 산간 구간에서는 속수무책의 시청각 장애인 처럼 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여기, 이 길(EM556)에도 개간, 개발의 파도가 밀려올 것이다. 그 때에는, 모든 길이 천대받아 까미노도 지그재그가 될 운명의 길이기도? 합류한 EM556길 따라 남남동진하기 1km 미만의 지점. 여러 갈래 산촌길의 꼭짓점(중앙)에는 성모 마리아의 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입상의 북동 산부리(bico)에는 '상뚜아리우 지 노사 세뇨라 두 소꼬후'(Santuario de Nossa Se nhora do Socorro/교회)가 있다. 동쪽에는 마리아 상을 건립한 '까자 지오쎄자나 노사 세뇨라 두 소꼬후'(Casa Diocesana Nossa Senhora do Socorro)가 있고. 마리아 상을 합해서 3곳이 다 '노사 세뇨라 두 소꼬후'(救濟의 성모)가 주제다. 이 산촌이 길의 성시를 이루는 까닭도 이 주제와 직결될 것임이 틀림 없다. 이같은 생각이 나를 그 곳으로 가게 했을 것이다. 오늘의 일정이 빠듯하다면 사치(奢侈)가 되겠지만 여유로운 시간의 소화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일거양득의 선택이 될 것이기에 지체 없이 방문했다. 야산의 정상부를 절개해 조성하였을 뿐 성역(聖域)이라는 느낌을 줄 만한 특징은 보이지 않으나 18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단지다. 당시, 이 지역을 맹타한 꼴레라(cholera/전염병)의 재앙이 끝나게 해달라고 서원했단다. 그 서원의 이행으로 교회의 건축이 시작되어 이듬해(1857년)에 완축, 봉헌하였으며 1858년에는 형제단(uma confraria)이 탄생하였다. 이 모든 것이 그 꼴레라의 결과물이라는데, 그 후손들은 2020년을 분탕질하고도 끝이 보이지 않 는 꼬비드(COVID)-19에 무슨 서원을 하고 그 결과로 언제쯤, 무엇을 남기게 될까. 까미노는 성모 입상 앞에서 남동으로 난 세뇨라 다 루스 길(Rua Sr.ª da Luz)을 따른다. 300m쯤에서 우측 숲길로 들어가며 다시 비포장 길이지만 유칼립투스 길이 이어진다. 좌회전과 급격한 우회전으로 날카로운 예각 길이며, 세뇨라 두 소꼬후 길(R. Sra. do Socorro)을 따라 들어선 집들의 뒤안길이 되다가 그 길에 합류한다. 곧, 그 길을 떠나 우측 길로 N1(IC2) 국도를 입체(지층) 통과한다. 이어서, 대형 원형교차로의 반을 돌아 동진과 남하(R. 1ºde Dezembro ~ R. Dr. Alexandre Albu querque ~ R. Hospital ~ Largo Primeiro Dezembro)를 한다. 지자체와 동명인 소교구 알베르가리아-아-벨랴의 다운타운 진입 1km 전이다. 왜 여인숙, 빈민구호소(숙박소) 등 알베르게(albergue)와 같은 뜻인 알베르가리아(albergaria)가 지자체와 소교구 마을의 이름이 되었을까. 대부분의 이름에는 연유가 있는데 하필 숙박소와 관련된 이름일까. 오래되었다는 뜻을 가진 벨랴(velha)가 합성되었으며 짧기는 해도 병원을 뜻하는 길(R. Hospital) 도 있는 등 이름의 시사(示唆)가 심상하지 않은 지역이다.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랬다. 뽀르뚜갈의 초대 왕 아폰수 1세(Afonso I/Henriques/1109~1185)의 어머니 떼레사(Dona Teresa) 가 이 곳에 가난하고 병약한 순례자들을 위해 숙소(albergue) 짓기를 원했다. 귀족 곤살로 에리스(Gonçalo Eriz)에게 많은 땅을 부여한 떼레사는 여행자를 위한 쉼터를 마련하 겠다는 약속을 이달고(hidalgo/귀족)로부터 이미 받아둔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알베르게가 건립되었고 마을 이름을 알베르가리아(Albergaria)라 했다. 1117년의 일인데, 오래되었다 해서 그런 뜻인 벨랴(Velha)가 추가된 것이다. 이 곳 알베르게의 이름에도 왕모의 이름 떼레사가 들어있고. 인구도 10.568명으로 6개 소교구 인구의 합계인 지자체 전체인구(25.252)의 41.85%나 된다. 주택과 상가, 아파트가 고루 들어서 있고 뽀르뚜갈 특유의 포장 갓길이 완비되어 있으며 까미노 안내 표지도 양쪽 길에 균형 있게 부착되어 있으므로 불편한 점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왜 불만스러웠을까. 이 아이러니의 원인은 보행에는 포장로 보다 피로를 덜 주는 비포장로의 맛을 적잖이 보았으며, 무엇보다 거듭 걸은 삼림(유칼립투스) 길일 것이다. 도중에 2번 안내를 받은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Rainha Dª Teresa)가 다가오고 있다 는 느낌을 주는 지점(R. Hospital)에서 다시 물었다. 까미노가 '오스삐딸 길'에서 '라르구 쁘리메이루 제젬브루'로 바뀌는 삼거리의 분수대 앞에서. 어린 아이를 안은 젊은 여인은 무척 친절했으나 허사였다. 동쪽으로 짧은 거리지만 알베르게 앞까지 함께 가는 수고를 했음에도 그 곳은 음식점을 겸하는 집(Pensão Restaurante Parente)이며 1박 15€의 펜션이니까. 내가 원하는 알베르게가 아님을 알게 된 젊은 오스삐딸레이라(hospitaleira) 역시 친절했다. 내 목표지(Albergue de peregrinos Rainha Dª Teresa)가 보이는 지점까지 안내하고 갔을 만큼. 까미노 뽀르뚜게스는 분수대가 있는 쁘리메이루 제젬브루 광장에서 우측 길을 택한다. 바로 이어서 나뽈레앙 루이스 페헤이라 레앙 로(Av. Napoleão Luiz Ferreira Leão /우측)와 산뚜 안또니우 길(R. Santo Antonio/좌측) 중 전자를 따라서 프라사 페헤이라 따바레스(Praça Ferreira Tavares/광장) 끝의 로터리를 직진, N16-2 도로에 진입한다. 내가 점 찍은 알베르게는 이 지점에서 남서쪽으로 300m쯤 전방에 있다. '베르나르디누 마시무 지 알부케르케 로'(Av. Bernardino Máximo de Albuquerque) 라는 이름을 가진 N16-2 도로를 따라 폐 철길과 조형물 분수대가 있는 로터리를 지나 100m 전방 우측에. 자그마한 간판(까미노의 심벌인 '조가비+ALBERGUE')이 높이 1m쯤의 간이담에 가로로 붙어있을 뿐이라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일 알베르가리아-아-벨랴의 시립 알베르게. 들어서는 내게 "안에서 어떤 행사가 진행중이므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라는 듯 한 반(半) 마 임(mime)의 뽀르뚜갈 말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젊고 상냥한 듯 하나 무정한 오스삐딸레이라. 아직 100일도 채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운영의 미숙으로 인한 불편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 라고 생각된 신설 알베르게의 자그만 사무실. 장마당처럼 소란스런 분위기를 느끼며 기다린 한참 후에 온 그녀. 내 백팩을 메고 2층의 한 너른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모두 행사에 참석 중이기 때문인지 휑하게 빈 방. 함께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입실료라며 8€를 요구했다. 내게 있는 이 알베르게 정보는 81일 전(2015년4월1일) 오픈했으며 도나치부(donativo/도나띠보/ 자발적기부)로 되어 있는데 어느새 바뀌었는가.(내가 수집한 정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그 제도가 여전한데 내가 인색해 보였기 때문에 8€ 요구의 반칙을 했는가. 그랬다면 그녀가 실수했다. 유로화 지폐의 기본 단위가 5€와 10€로 되어 있기 때문에 도나치부 박스에 넣는 지폐는 10€가 일반적이다.(5€를 넣을 때도 있으나 지극히 저기압인 경우에 한하며 오늘은 고기압권인데다 블 루베리 영감이 사양한 5€를 도중에 사용했기 때문에 내 지갑 안의 최저액 화폐가 10€니까) 나는 당당하게 2€를 거슬러 받았다. 그러나, 무정하다는 첫 이미지와 달리 세심하고 친절한 오스삐딸레이라. 슈퍼가 400m 이내에 있지만 토요일이라 쎄하르(cerrar/close) 시간이 빠르단다(18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빨리 다녀오라는 뜻이다. 바게트와 잼, 맥주 등 저녁 먹거리를 샀다. 가이아(Vila Nova de Gaia)에서 로저의 생일선물(wine)을 사기 위해 그와 함께 슈퍼에 들르기는 했으나 뽀르뚜갈 땅에서 생필품을 사기는 처음이다.(바게트, 식빵 등은 배달 차에서 샀으니까) 계속되는 프랑세사와의 악연, 이딸리아에 의해 전화위복 알베르게에서는 한 소동이, 뽀르뚜갈의 물가가 스페인에 비해 비싼 듯(10% 이상?) 하여 구입을 자제하고 돌아오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가. 무심코 침실(2층)로 들어가는 나를 여인들이 제지하며 힐책이라도 할 듯 한 기세였다. 실은, 그네가 잔뜩 벼른 것은 무겁고 큰 백팩의 주인은 당연히 젊은 변태남이라고 단정, 벼르고 있었는데 까미노와 알베르게에서 보기 드문 할아버지라 맥이 빠진 상태가 된 것이란다. 나의 선택이 아니고 오스삐딸레이라의 배정인데 그녀는 왜 나를 여자전용실로 안내했는가. 그녀(hospitaleira)는 이 알베르가가 남녀의 침실을 따로 운영하는 드문 알베르게들 중 하나라는 것을 정녕 모르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이 날이 첫 출근일이거나 이 알베르게의 운영에 무관심한 일용직 또는 아르바이트? 내개 잘못이 있다면, 단지 방 문 위에 붙어있는 남녀 구분표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라 하겠는데 안내를 받으며 그것을 확인할 책무가 뻬레그리노스에게 있는가. 나를 더욱 경악하게 한 것은 이 소동의 주인공도 프랑스 여인들이며, 노르떼 길 비얄바(Villalba) 사태의 완벽한 재판(再版)이라는 점이었다.(메뉴' 續까미노이야기'32번/31회글 참조) 그들은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남의 눈 속의 티를 보고 질타할 정도로 밝은 눈이라면 제 눈은 불문곡직 깨끗하게 정리해야 하며 우선 순위로는 후자가 앞서야 하는데도 자기의 과오는 모르쇠하고 남의 허물만 질타한다. 까미노 처럼 다국적 인종이 혼합하는 곳일 수록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역지사지의 매너다. 대부분의 시비와 불란은 그 것(易地思之의 manner)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인데, 저간의 내 경험 에서는 프랑스인들에게 그 매너가 절대적으로 부족한데다 독선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떤 행사'로 표현한 그 모임은 파띠마(Fatima)로 가는 이딸리아와 프랑스, 뽀르뚜갈 등 다국적 초로의 여성(단체) 순례자들이 가진 중도 단합 성찬인 듯이 보였다. 1.200km 시코쿠헨로(日本)에서도 88사찰을 버스 투어(tour)하듯 탐방하는 단체 헨로상들이 대부 분의 사찰들이 운영하는 경내의 호화 슈쿠보(宿坊/hostel)에서 만찬을 즐긴다. 양쪽 다 '순례자'(Peregrinos/お遍路さん)라는 명칭이 민망할 정도지만 현실이다. 그렇기는 해도 그들(단체) 덕분에 내가 호식했고, 소동은 전화위복이 되었다. 옮긴 방이 나를 포함해서 정원의 7분의 3(Australiano, Sueco와 나)만 들어서 오붓했고, 이딸리아 여인들이 직접 만든 오리지널 피자(pizza)로 저녁식사를 했으니까. 저녁을 먹으려고 간 구내 식당에서 마주친, 뒷정리를 하던 이딸리아나들(italiana)이 자기네끼리 무슨 말을 나눈 후 내게 중형 쇼핑백 하나를 주고 갔는데 그것이 이딸리아 피자(pizza)였다. 밀가루 반죽 위에 토마토, 치즈, 피망, 고기, 향료 등을 얹어 둥글넓적하게 구운 파이(pie). 이딸리아(남부Napoli) 음식인데 우리 빈대떡과 흡사하여 나는 이딸리아 빈대떡이라고 부른다. 국내의 피자집이 무수하나 사이비가 하도 많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멀리하게 되었는데 이딸리아 여인들의 즉석구이 피자를 2끼 이상 먹게 되었으니 횡재가 아닌가. 초로의 두 동숙자(호주,스웨던)도 할아버지 덕에 맛 좋은 피자를 거저 먹게 되었다며 고마워했다. 내가 늙은이라는 것이 까닭인가. 잔치가 진행중인 까미노 마을들을 지날 때도 나를 거의 강제로 합석하게 하고 실컷 먹고 마시게 한 후에는 배낭에 잔뜩 넣어주는 일이 거의 매번 반복되었다 알베르게에서 나눠먹을 때는 하나같이 자기네는 받아보지 못한 후대라며 나를 부러워했는데, 이 알베르게의 밤에도 그랬다. 밤이 깊어갈 때, 소동을 보고 나를 위로했던 초로의 수에꼬(Sweden 男)는 여전히 잠 못리루고 있는 내게 자기의 코골이가 심하다며 매트(mat)를 들고 나갔다. 아마도, 내가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까닭이 자기의 코골이 때문으로 생각한 듯. 그의 코골이 때문이 아닌데도, 화장실 옆 공간에서 자고 있는 그가 나를 뭉클하게 했다. 까미노에서 드물게 예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의 갸륵한 처신에 감동하여 생각이 더 깊어감으로서 잠을 더욱 이루지 못했음에도 나의 이 밤은 그에 의해서 행복했다.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