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선생님과 함께 생각하는 이야기 38 |
내 인생의 결재인은 조국이다
김구 선생은 작별사에서 사지(=死地)로 떠나는 우리를 한 번 더 울렸다.
ꡒ… 여러분들의 젊음이 부럽소, 젊음이. 반드시 훈련이 끝나기 전에 한번 시안에 가볼 생각이오…ꡓ 그 큰 주먹을 타고 굵은 물방울이 주르르 떨어졌다. 주먹으로 닦은 눈엔 그의 사랑이 눈물로 변한 고뇌가 방울져 있었다.
김구 선생은 중국 두루마기 안주머니에서 아무 말 없이 둥근 회중시계 하나를 꺼내어 우리들 앞에 내보이셨다. 그리고는 어이없이 쳐다보는 우리들에게 그가 운 뜻을 설명해 주었다.
ꡒ오늘 사월 이십구일은, 내가 윤봉길 군을 죽을 곳에 보냈던 날이오. 또 지금이 바로 그 시각이오. 여러분도 다 알 것이오.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시로카와 대장을 죽이던 그날(=1932년)의 의사 봉길 군이 나와 시계를 바꿔 차고 떠나던 날이오. 내가 가졌던 허름한 시계를 대신 차고, 내게는 이 회중시계를 주고 떠나가던 윤군의 모습을 생각하며, 바로 같은 날인 오늘 앞으로 윤의사와 꼭 같은 임무를 담당할 여러분을 또 떠나보내는 내 심중이 괴롭기 한이 없구려.
‘선생님, 제 시계와 바꿔 찹시다. 제가 가진 것은 선생님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어차피 저는 시계가 필요 없어질 것이지만, 제 일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계가 아주 없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던 윤 의사 눈망울이 여러분의 눈동자로 빛나고 있기 때문이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반드시 하늘이 정한 뜻인가 보오.ꡓ - 장준하, <돌베개>(세계사) 중에서-
민족해방투쟁을 막으려는 일제의 감시 때문에 조선인들이 중국에 가기 어렵던 1944년 1월.
중국에 배치되면 반드시 탈영한 뒤 임시정부에 가서 독립운동을 할 생각으로 평양에서 ‘계획적으로’ 학도병으로 징집된 장준하. 그는 평양에서 훈련받고 중국의 서주 쓰카다부대로 배속되어 그 해 7월 7일 탈출하여 중경 임시정부까지 약 6천리(2천4백km) 험로를 걷는 대장정에 성공한다.
일제의 항복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1945년 2월 광복군 소위에 임관되고, 4월 29일 장준하는 김준엽(=후일 고려대 총장 역임, 자서전 <장정> 저술) 등 동지들과 함께 조국 해방 투쟁을 위해 약 3개월간의 OSS(미전략첩보대) 훈련을 떠나기 직전에 위의 연설을 듣는다.
1918년 목사의 아들로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신학교를 다녔고,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돌베개를 생각하며 결혼 2달 만에 징집되었던 장준하는 이렇게 다짐했다.
ꡒ내가 나의 죽음을 지불하면 내 능력껏 그 대가가 조국을 위해서 결재될 것이다. 나의 각오는 한 장의 정수표다. 발행인 장준하, 결재인은 조국이다.ꡓ
우리는 장준하의 ‘청년 정신’을 그의 책 <돌베개>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년 장준하 선생의 삶은, 오늘날 청년과 국민 모두가 가져야 할 올바른 가치관, 역사관, 통일관, 미래에 대한 전망 등의 입장에서 이 시대 ‘청년 정신’의 귀감이라고 할 수 있다.
<토론거리와 생각할 점>
1. 일제가 말기에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저지른 학살 등 인적, 물적 범죄를 조사해보자.
2. 참고자료를 읽고, 과거사 청산이 왜 필요한지를 이야기해보자.
3. 고등학교 졸업 후 청년 시절에 기회를 만들어 장준하 선생의 대장정 6천리를 꼭 답사해보자.
4. 나중에 저서 <민족주의자의 길>, <지식인과 현실>, 추모문집 <민족혼․민주혼․자유혼>을 읽어보자.
<참고자료 1> 식민지 시절 조선 청년의 길
최상천 전 대구 카톨릭대 교수(『알몸 박정희』의 저자)
첫째,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투쟁하는 大義의 길을 가는 것.
둘째, 개인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죽은 듯이 살아가는 침묵의 길을 가는 것.
셋째, 조선총독부의 들러리가 되어서 개인과 가족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小我의 길을 가는 것.
넷째, 일본군국주의를 숭배하고 그 전위대가 되는 사냥개의 길을 가는 것.
<참고자료 2> 책 <돌베개> 보충 설명, 장준하 선생의 일생 종합
(장준하기념사업회 홈피 http://peacewave.or.kr/에서 요약)
ꊱ. “못난 조상이 또다시 되지 말아야 한다.”는 각오로 중원 대륙의 수수밭 속에 누워 침이 바짝 마르는 추격을 받고, 눈 덩이를 베개 삼아 얼어 죽을 기로에서 밤을 새우고, 수 천길 낭떠러지 길을 넘어 끝내 임시정부에 도착한 장준하의 1944년-1945년의 치열한 삶의 회고록이 <돌베개>다.
ꊲ <돌베개> 저술 목적
임정 요인들의 야심 때문에 빚어진 정쟁과 이합집산(離合集散)도 기록한 이 책의 후기에서 장준하 선생은 많은 사람들이 해방 직후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하거나 ‘광복군’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광복군 모자는 썼지만 과연 어떤 일을 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쓴 것이라고 한다.
ꊳ 독립운동을 했던 부친 장석인 목사
1920년 독립운동 혐의로가 일제 경찰에 쫓겨 의주에서 삭주로 모든 식구들이 이사한다. 1934년 신성중학교의 교목이 되면서 소년 장준하도 부친을 따라 평양의 숭실중학교에서 신성중학교로 전학한다. 중학교 졸업 후 1938년부터 정주소학교에서 3년간 교사를 하다가 1941년 일본 동양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이듬해 일본신학교 신학교 신학과로 옮긴다.
ꊴ 1944년부터 한국전쟁까지
1944년 광복군 훈련반 시절에 김준엽 등과 함께 「등불 1-2」호를 발간함. 1945년 소위 임관 후 「등불 3-5」호 발간한다.
그 해 5월 1일 중위 진급. 8월 4일 국내 침투를 위해 대기 중 「제단 1-2」호 발간하고, 8월 18일 철기 이범석 장군, 김준엽, 노능서 등과 여의도 착륙하였으나 일본군의 제지로 중국으로 돌아간다.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귀국하여 김구 선생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한다. 1947년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조선민족청년단(족청) 참가, 중앙훈련소 교무처장을 역임한다. 1949년 2월 한국신학대학 편입하여 그 해 6월에 졸업한다.
ꊵ 1950년 이후 활동
문교부(= 오늘날의 교육부) 국민정신 계몽담당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서무과장, 사무국장 역임. 1952년 9월 부산에서 국민사상연구원 지원으로 월간지『사상』발간(12월 재정난으로 중단) 1953년 4월 국민사상연구원을 사임한다.
월간지 『思想界 사상계』창간. 1958년 이승만 자유당 독재를 비판하는 다른 사람의 글을 실어줬다는 이유로 연행. 1959년부터 본격적인 자유당 비판 시작. 1960년 3월 자유당 정권 신랄히 비판. 5월 UNESCO 한국위원회 한국위원회 중앙집행위원 피선, 홍보분과위원장 역임한다.
ꊶ 4월 혁명 직후 활동
196년 1월 장면 정권 하에서 국토건설본부(본부장 장면)의 기획국장으로서 식민지를 겪은 나라의 근대화 방안으로서 ‘경제개발 3개년 계획’ 추진을 담당한다. (훗날 박정희 정권이 이 계획을 고스란히 넘겨 받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무리하게 급한 계획으로 바뀜!)
ꊷ 1962년 6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 수상(언론․문학 부문)
1965년 3월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와 박정희 정권 비판 전국 순회강연 70여 회. 4월 사상계를 증간하여 매국외교를 비판하고 정면으로 반대한다. 1966년 10월 26일 특정 재벌의 밀수와 월남전 파병에 대하여 박정희 정권 비판 연설을 했다는 혐의로 구속된다. 이듬해 2번째 구속(국가원수 모독). 신민당으로 옥중 출마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국회의원 당선된다. 1968년 1월 『사상계』 발간을 타인(부완혁 씨)에게 위임한다.
ꊸ 1971년 <돌베개> 출간 이후 의문사까지
1973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10월 유신’ 반대하여 통일당 창당 후 다시 탈당하여 민주회복운동 계속한다.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최초 구속 징역/자격 정지 15년 선고되었으나 12월 지병으로 형집행정지로 출감한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 파주군 천주교 묘지 안장된다.
<참고자료 3> 장정 행로
<참고자료 3>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생 요약
(주미대사 출신 양성철 교수의 논문, 강정구, 강준만, 서중석, 한상범, 한홍구 교수 등의 책 종합)
⑴ 청년기에 그만 둔 소학교 교사
1917년 11월 경북 선산 출생하여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제의 이름으로 창씨 개명한 박정희는 황국신민화 정책(조선인의 의식을 뜯어고쳐 일본 국민처럼 만들기 위한 식민정책)의 맨 앞에 있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문경보통학교(=소학교, 오늘날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그만 둔다.
⑵ 군관학교 입학까지
스물네 살의 나이와 조선인으로서의 사상 검증을 돌파하기 위하여 호적을 고쳐 나이를 줄이고 손가락을 베어 1940년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 ‘충성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개인의 이익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힘쓰겠다.’)"이라는 혈서를 써서 <만주일보>에 대서특필 된다. 이것으로 일제를 감동시켜 그해 4월 4일 만주에 있는 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한다.
⑶ 군관학교 졸업식 선서
제국주의에 철두철미한 충성과 열성적인 훈련으로 1942년 예과 수석 졸업생이 되어서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1932년에 세운 괴뢰정권 만주국 황제에게 금시계를 선물 받는다. 그 자리에서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하여 만주일보에 다시 대서특필 된다.
군관학교 우등 졸업생에게 주어지는 특혜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훈련을 받아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육군대신상을 받는다. 당시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 육사교장은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 …”라고 극찬까지 받는다.
⑷ 독립군 토벌부대 중위 박정희
일본 본토의 14연대에 배속된 후, 철저한 일본 군인정신을 인정받아 만주 관동군(=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제8연대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근처 영안에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이 부대는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 출정함. 조선인 출신인데도 다카키 마사오는 토벌에 열심인 대가로 1년 만에 중좌(=중위)에 진급. 또한 항일세력인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게릴라 등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인만 뽑아서 만든 특수부대(=간도특설대)에 뽑혀 독립군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⑸ 토벌부대 시절의 일화
백악관 출입기자이며 정치 망명자인 문명자 씨의 40년 취재 파일『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 워싱턴에서 벌어진 일들』(월간 말 편집부)에서 박정희와 함께 지냈던 장교 출신의 증언.
“… 다카키 마사오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돌아버린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
⑹ 두 번째 창씨개명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에는 본관이 고령(高靈)인 박정희(朴正熙)라는 조선인의 냄새와 뿌리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 두 번째로 스스로 지어서 바꾼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에는 일본의 혼만 있을 뿐이다. 조선인의 흔적과 냄새를 지우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거듭 나고 싶어 했던 박정희의 본심의 발로로 볼 수밖에 없는 대목으로 해석된다.
⑺ 해방 후의 행적
군복을 민간복으로 갈아 입고 관동군 부대를 탈출한 박정희는 피난민 틈에 끼어 북경에 가서 슬그머니 광복군에 합류한다.(<돌베개>의 저술 목적이 이것 때문인 듯?)
미군정청 통계로, 좌익이 남한 사회의 90%를 뒤덮던 1947년, 전남 여수, 순천지역에서 터진 좌익장교들의 반란(=여순 사건) 때 좌익장교였던 박정희는 72명(1천여 명 주장도 있음) 동료들의 명단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기만 살아남는다. 그 후 고향에 있던 그는 한국전쟁 당시 장도영의 추천으로 군대에 다시 들어와 우익장교가 된다.
1952년 뜻을 이루지 못한 쿠데타를 1961년 5월 16일에는 성공하여 정권을 장악한다. 그후 군부세력의 과거 친일 자료를 모두 소각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내세워 자신의 과거, 즉 반민족적인 황군장교, 뿌리가 뽑힌 좌익장교의 경력을 모두 꼭꼭 은폐시키고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다. 한 마디로 그는 변신의 귀재요, 천재적인 기회주의자이다!
⑻ 박정희의 일본 향수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사무라이 영화를 구경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박정희의 취미 생활이었음. 그는 여전히 다카키 마사오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 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고 한다. 일제에 대한 향수를 가진 다카키 마사오였던 것이다.
⑼ 기막힌 증언 1 <중알일보>(1991. 12. 14)
“ …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 정신병자로 밖에는 볼 수 없는 18년간의 무자비한 군사독재자!
⑽ 기막힌 증언 2
게다가 일본 방문 시 동경의 어느 요정에서 일본어로 했던 발언은 일본인들까지 놀라게 했다.
“…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
⑾ 기막힌 증언 3
1963년 12월17일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는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 자민당의 간부들은 박정희와 일제의 군대 생활을 같이 했던 동료요 상관이었다.
⑿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등용
그들을 인재로 등용하여 박정희는 민족정기를 고칠 수 없을 지경으로 흐려 놓았다.
그 뿐이랴. 그는 5.16 직후 우방국에 친선사절을 보냈는데 제일 먼저 일본에 보내고, 일본을 제일 먼저 국빈으로 방문했다. 또한 최초로 밝힌 대외정책이 한·일 교섭의 재개였다.
⒀ 굴욕적, 반민족적인 한․일 협상
경제개발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합리화 하겠지만, 일본 군국주의 세력에 대한 정신적 유대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이 때 그는 식민지 시절의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박정희는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보상 명목으로 ‘한일 경제협력을 위한 지원금’ 3억 달러 정도를 받고 끝낸다.
장면 정권 시절의 8억 달러나 이승만 때의 80억 달러의 요구에 비하면 너무나 헐값이다. 일본은 이때 우리에게 준 3억 달러로 식민지 지배 피해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말한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10년 넘게 수요일마다 시위를 해도 일본은 앞으로 한 푼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가장 큰 원인은 반민족적 일본군 장교 출신 다카키 마사오에게 있다.
⒁ 조국 근대화의 두 얼굴 - 경제성장의 ‘빛’과 검은돈의 ‘그림자’
박정희 정권은 18년간 장준하 선생 등이 만들었던 경제개발 3개년 계획에 기초하여 높은 경제성장으로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조국 근대화의 일대 전환점을 만든다.
그러나 1973년 서울 지하철 차량 186량(1량=1대)을 부정 도입한다. 일본에서 1대에 3,204만 엔 하는 차량을 6,350만 엔이란 1대당 두 배 정도 비싼 가격으로 계약한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뒷거래가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일협상 과정에서 일본이 거액의 대가를 박 대통령과 당시 총지휘자였던 김종필 등에게 주었음을 암시하는 증언을 당시 일본 관계자들이 올해 KBS 8․15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한 바 있다. 국민의 배고픔 해결을 구실로 쿠데타 세력은 60년대 후반까지 정치자금 확보를 위해 많은 ‘사건’을 벌여 종신 집권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한다.
즉 4대 의혹 사건(증권 조작, 새나라 자동차 사건, 워커힐호텔 건설, 파친코 도입사건)과 ‘3분 사건’(밀가루, 시멘트, 설탕 밀수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월남전 파병, 한일회담 등을 통해 수억 달러의 검은 돈을 챙겨 스위스은행 감췄던 것이 79년 대통령 암살 후 조금 드러나기도 한다. 성장의 ‘빛’ 뒤에 드리워진 황금만능주의 풍조와 최고 지도자의 타락의 ‘그림자’였다.
⒂ 얼어붙은 ‘겨울공화국’
1972년 10월에 이른바 ‘유신헌법을 공표한 뒤, 일본제국주의시대의 폭압적이고 획일적인 전체주의적인 방법에 의해 숱한 인권 유린과 수백 명에 달하는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고 노동자 농민 학생 등의 인권을 유린하는 등 민주주의는 퇴보한다. 지금도 학교와 사회 곳곳에 남은 군사문화의 찌꺼기는 18년간의 장기집권 때 뿌리내려 사회의 체질마저 바꿔 놓게 된다.
<참고 자료 5> 만주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들의 행적
1기생부터 7기생까지 군관학교 출신은 약 50명 정도라고 한다. 이들은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방장관, 군 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군사령관, 군단장, 연대장, 고급 참모 등 정부와 군의 요직을 모조리 맡는다. 일제의 황군(皇軍)이었던 자들이 1965년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체결하는데 앞장서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자신들의 경력을 감추려고 반공주의로 변신한다.
그들이 지배세력이 우리나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10여 년 전까지도 친일파 연구자를 감시하던 그들이 이제는 과거사 청산을 반대하는 언론이나 원로인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