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효도관광을 맏사위 가족과 함께했다. 서귀포 색달 해변에는 7월 초에 이미 해수욕 개장으로 청춘남녀가 쌍쌍을 이루어 북새통이다. 노인과 바다! 어쩐지 쓸쓸하다. 외롭게 자라는 외둥이 손자와 노인과 바다를 조합하여 ‘바닷가 삼합’으로 만들어 놀자. 태원이는 다섯 살의 어린아이라 수영은 할 수 없어 할배와 같이 모래사장에서 동무삼아 장난친다. 햇살에 익은 모래 뜸질 구덩이에 태원이를 파묻었으나 여린 피부에는 불감당이라 피하고 달아나 밀려오는 파도물결 따라 천방지축 덤벙대기 바쁘다.
글씨 공부시킬 요량으로 모래톱에다 ‘양 태 원’ 이름 석자를 새겼다. 모래 위에 이름자를 쓰고 지우고 반복하는 글씨 공부를 태원이에게 거듭 시켰다. 여울물결이 느닷없이 밀려와 글씨 자국을 순식간에 휩쓸어 버린다. “아!파도가 지우개네” 태원이가 스스럼없이 불쑥 던지는 말 한 마디는 시상(詩想)이 묻은 표현이였다. 이름자도 모르는 철부지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생각이 엉뚱하고 기발한 표현이 참 기특하다. 시(詩)적인 감응은 천진난만한 동심에서 생기나보다. 감동적인 시구(詩句)를 태원이가 말할 때에 “같은 놀이를 한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였소?” 추궁하는 투로 마누라가 묻는다. “괘씸한 것! 이라는 마음뿐이었소” 어른이 쓴 글씨를 감히 함부로 지우는 바닷물이 볼썽사납게 본 것이다. “당신은 평소에 뭘 사유하는 대상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핏줄이 당기는지 외손자 말재간을 치켜세우고 싶은 트집일거다. 어린 태원이의 감성은 보드랍고 싱그러운 떡잎이라면, 이 할배는 고목나무 밑둥치처럼 딱딱한 껍질에 세월의 때 자국이 덕지덕지 쌓여있을 뿐이다. 정서가 메마르고 굳었으니 감정마져 무감각할 뿐이다. 뭣이든 다 받아주는 바다, 온갖 상념일랑 다 바다에 버리고 다음 목적지로 떠나자.
서귀포시 서광리에 조성된 유기농 다원(茶園)‘오설록’에 들렀다. 태평양화학(아모레퍼시픽)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께서 척박하기로 이름난 황무지를 1979년 부터 20년간이나 개간한(100만평) 녹차 밭이다. 광활한 규모의 차 문화 종합전시장이다. 체험공간과 휴식장소 티 뮤지엄(2001년)으로 개방하는 관광 명소가 됐다.
서성환회장은 한국차(茶) 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독보적인 ‘다인(茶人)’으로 평가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나라를 가도 나라마다 독특한 차가 하나씩은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없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의 전통 차문화를 정립하고 싶다.
사람이 살면서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처럼 흔하다는 것을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 일컫는다. 다례, 다갈색, 다홍치마와 같이 차와의 인연은 우리 생활과 함께하고 있다.
넓은 차밭 고랑에 철주를 촘촘히 세워 대형 바람개비를 장착한 제상기(除霜機)가 마치 풍력발전기 모양으로 세워져있다. 중국이나 보성 차밭에서도 보지 못한 특이한 장치물이다. 이른 봄에 눈이나 무서리가 잎사귀에 달라붙는 것을 바람개비 힘으로 흩뜨리어 냉해를 예방하는 동력설비이다. 일찍 채취하는 참새 혀 모양의 자색 잎 첫물차(雨前茶)가 맛좋은 작설차로 깊은 향을 선사하는 최고품질의 재료로 확보한단다.
이토록 서리와 눈(雪)을 싫어하는 농장주 태평양화학은 ‘설록차’(雪錄茶)라는 티백제품인 눈(雪)과 연관된 상표명으로 기이하게도 녹차시장을 장악하여 국민건강에 기여하고 있다. 또, 아모레퍼시픽은 ‘설화수’(雪花水)라는 화장품 브랜드로 ‘세상을 아름답게 라는’ 광고와 함께 한류 붐 'K-뷰티'를 타고 주식시장 최고 주가에 상장되었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묘한 것. 냉해를 입히고 금기시하는 눈(雪)은 상극인대도 오히려 신선하게 느낄 수 있는 역 발상의 상표명이 전화위복이 되어 대박 터진 회사로 급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양태원 꼬마시인이 차밭에서 본 대로 느낀 대로 또 재잘거린다. “할아버지! 풀잎을 다 따버리면 토끼나 조랑말은 뭘 먹고 살지? 바람개비로 벌레를 왜 쫒아? 나는 벌레를 많이많이 좋아하는데...” 어린 아이가 보기에는 어른들의 말 과 행동은 이해 못할 일이 많은가 보다. 인간은 자연의 순리를 역이용 하기도 하는 존재임을 깨우치기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나이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하기만 한 귀염둥이 태원이가 점차 세상살이에 물들어야하는 앞 날, 시상(詩想)이 무디워 질까 걱정스럽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는 약삭빠른 깍쟁이가 선점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는 말이 괜히 나왔으랴, 천량 빚도 갚을 수 있으니 말이다. 단 한마디로 상대방을 웃고 울게 만드는 것이 언어의 힘이다. 언어의 힘을 이용한 브랜드명으로 번창하는 영업 밑천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