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처음 술맛을 알게 되다.
내가 태어난 곳은 상당한 산골마을이다. 지리산에서 출발한 소백산맥은 덕유산과 속리산을 거쳐 소백산과 태백산까지 뻗어간다. 오늘날에는 백두대간이라는 이름으로 태백산맥과 랑림산맥, 한경산맥을 연결하고 있다. 나는 지리산과 덕유산의 중간지역에 있는 장수군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에 행정구역단위로 같은 리에 속해 있지만 신작로를 기준으로 아래 두 마을은 전기가 들어왔다. 하지만 우리 동네는 그로부터 6년 후에야 문명의 혜택을 받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중학생이 호롱불 아래에서 ‘공부했다‘라고 하지 않고 굳이 ’살았다‘라고 한 것은 중학교 시절에 집에 와서 공부를 해 본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때만해도 시골에선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졸업하고 농사일을 하거나 도회지로 나가서 돈벌이를 하는 일들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실지로 내 초등학교 동창 110여명중 고등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은 50%를 갓 넘겼을 뿐이다.
나 역시 일찌감치 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사일을 하라는 묵시적 상황을 감수하였기에 학교공부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그저 나와 비슷비슷한 형편을 가진 집안에서 그래도 고등학교는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가는 이십리길의 OO종합고등학교에 진학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학교성적은 늘 중위권 이상은 유지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을 제외하고 모두 우등상을 받은 전력이 있는 내게는 형편없는 성적이었지만 학교수업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예습, 복습, 시험공부 기억이 없는 데도 중위권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남다른 암기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학교 3학년 초겨울, 고등학교 1차 원서 접수기간중 대도시로 진학하려는 친구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내게 마감을 몇 일 앞두고 거짓말처럼 원서 한 장이 날아왔다. 당시 재무부에 근무하던 큰형이 신문광고를 보고 벽산그룹에 근무하던 작은형에게 수원에 있는 ㅇㅇ고등학교 원서를 사서 보내라 하였던 것이다. 큰형이 하는 일이라면 누구도 절대로 이의를 달 수 없는 우리 집안의 전통(?)에 힘입어 결국 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약 2주간 입시공부하기 시작했다. 시험보기 하루 전날밤에도 예비소집할 때 학교앞에서 산 예상문제집을 다 풀어보고 잤다. 그런데도 합격했다. 수원에서 직장생활하는 누나가 있어 같이 원서를 냈고, 고교 입시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같은 중학교 출신의 다른 친구는 떨어지고 말았는데 말이다. 내가 특별히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암기력이 좀 좋았던 덕분이었다.
그렇게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시작되었다. 형편상 서울에서 수원까지 집에서 버스 타고 나와서 전철을 타고 수원역에 내려 스쿨버스를 갈아타는 편도 2시간 30분짜리 등굣길은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된 농사일에서 해방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학교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선 대도시와 시골학교의 소위 도농간의 소득차이는 그대로 학력차이로 이어졌다. 나는 학원이나 과외, 참고서 등등의 혜택을 받아본 적이 없다. 두 번째는 공부하는 습관이다. 나는 학교 공부를 위해서,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대비하기 위하여 특별히 공부를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평상시 공부하는 습관이 전혀 없었다. 더욱이 고등학교 수업은 수업시간의 암기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세 번째는 새벽별보고 나와서 깜깜한 밤중에 집에 들어가 자고 다음날 다시 학교가고, 학교에선 졸기를 반복하였으니 공부할 시간조차도 없었다. 일요일엔 뭐했냐고? 나도 좀 쉬고 놀아야지................
그렇게 성적은 뒤에서 카운트 하는 것이 훨씬 빠른 상태로 1학기를 보내고 여름방학 때 나는 시골학교에 가서 전학상담을 마치고 아버지에게 말을 꺼냈다가 호되게 야단맞았다. 큰형이 공부시킨다고 서울로 데려갔는데 한학기만에 다시 시골로 내려오면 형들의 체면이 뭐가 되느냐며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나는 당초 수원으로의 진학을 만류하던 아버지에게 고집을 부린 것처럼 또 다시 시골학교로 전학와서 아버지랑 농사일 하면서 살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서울에서 큰형이 놀라서 내려왔다. 그냥 졸업만이라도 하라던 아버지와 큰형의 협박과 회유를 이기지 못했다. 그렇게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거의 존재감이 없이 3년 내내 거의 꼴찌에 머물렀다.
내 고등학교 시절, 정확히 말하면 공부와는 완전 담쌓고 살게된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1학년 가을 소풍이었다. 소풍 장소는 수원에서 1번국도인 경수고속국도를 타고 서울가는 방향으로 가다보면 지지대고개가 있고 그 지지대 고개에는 프랑스군 참전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광교산아래 저수지가 하나 있는데 소풍장소는 바로 그 파장저수지 주변이었다. 정말 소풍갈 곳이 그렇게 없었는지 모르겠다. 원천저수지(당시 유원지), 광교저수지 등 3년동안 저수지 주변외에 다른 곳에 간 기억이 별로 없다.
반에서 키가 세 번째로 작고, 체격도 왜소하며, 소심하기까지 한 나는 어찌하다보니 반에서 주먹깨나 쓰고 선생님말이라면 귓등으로 듣고 마는 무리들과 한 조가 되어 소풍 도시락을 먹게 되었다. 그 중 한 친구가 짠하고 꺼내든 것은 4홉짜리 빨간 두꺼비 한 마리였다. 그 친구는 벤또라고 말해야 그 생김새를 바로 떠오를 텐데 하여간 도시락 뚜껑에 소주를 부어 마시기 시작했다. 않마시겠다고 하는 놈은 건너뛰고 1순배를 마치고 나니 소주는 4분의 1정도 남아있는데 날더러 다 마시라 권유반, 강요반 했다. 나는 첨이라 무쟈게 쫄았지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은 유전자의 힘을 믿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그들이 주는 대로 나머지를 다 마셨다. 입안이 쓰고 타는 듯했다. 하지만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순간 싸한 느낌이 들더니 이윽고 어떤 알 수 없는 자극이 위장 전체로 넓게 퍼지는 듯 했다. 그 순간 입안에서는 다시 달콤한 뒷맛이 남아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이 엄청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술이란 이런거구나.
첫 모금을 입에 머금었을 때의 타는 듯한 쓴맛,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의 싸한 느낌, 위장에 넓게 퍼질 때의 어떤 자극 그리고 입안에 여운처럼 남아있는 단맛,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겠다는 무모한 자신감 등등...............
자유로운 점심시간이 끝나고 이어 그 뻔하디 뻔한 장기자랑과 오락시간을 마친후 소풍이 파하자 그중 너댓명은 자연스럽게 함께 행동하였다. 당시 그 일대는 포도밭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이목리 포도밭하면 데이트 코스로도 애용될 정도였다. 우리는 포도밭 둥근 테이블에 앉아 당시 몇 백원을 내고 두송이를 사먹었는데, 포도 넝쿨에는 완전 끝물이라 상품성이 없는 포도송이가 많이 매달려 있었다. 포도밭 주인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우리는 말라 비틀어지기 직전으로 탄력을 잃은 포도송이를 따서 이빨과 혓바닦이 보라색으로 변할 만큼 많은 양을 먹었다. 생전 그렇게 많은 포도를 먹어본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집에 가는 전철안에서 교련복을 입은 채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손발이 내 의지대로 제어가 되지 않았다. 매달린 채로 발효하기 시작한 포도가 처음 마신 낮술에 더해 상승작용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전철에서 내리기까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쪽팔렸다. 청량리역에 내려 도저히 버스를 탈 용기가 나지 않아 일부러 먼 길을 돌아 두 시간을 걸어 집에 갔다. 멀쩡한 척하느라.............
결국 나의 음주 흑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976.10.2 가을소풍중에, 지금보니 정말 애기다 애기!!!!!!!
첫댓글 두꺼비가 뱃속에서 포도를 만나면 와인이 되는건가?? 우여곡절을 거치고 간 학교에서 일찍 시작하셨네.
재미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