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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2016.05.28. 한국가람문학회 문학기행
- 해인사의 종 : 새벽3시 (33번-33천 관세음) , 11시10분전 (18번-석가 공양시간), 6시 40분(28번-도솔천의 석가에게) 합계 79번 (북 10분, 종 10분 정도 침) * 종鐘은 네발 짐승을 위함 해인사는 대웅전에 해당하는 중심법당이 대적광전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문수, 보현보살이 협시한다. 일주문의 <伽倻山 海印寺> 편액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이절의 주련에 김규진의 글씨가 많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가야산(상왕봉 1430m) 남서쪽에 있는 사찰. 해인사는 옛날에는 화엄 10찰의 한 도량이었고 오늘날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다. 해인사의 입장료는 없지만, 성보박물관은 입장료를 별도로 받는다. 이런 첩첩산중에 왜 사찰의 이름이 바다 海자 海印寺인가? 부처님께서 처음 부다가야의 금강보좌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21일간 깊은 삼매에 드셨다. 그것은 마치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이 모두 바다물에 비치는 것 같이 번뇌煩惱가 끊어진 부처님의 깊은 지혜 바다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진리가 나타남으로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용어가 나왔고, 이 해인삼매 속에서 대승경전의 최고봉인 화엄경이 설해졌다.
[창건 전설] 중국 양 무제 때 지공화상 임종시 <<동국답산기>>라는 책을 제자들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내가 열반후 신라에서 두 명승이 찾아와 법을 구할 터이니 이 책을 전하라" 중국으로 간 신라 승려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예언에 감격하여 지공화상의 탑묘에 찾아가 '사람에게는 고금이 있을 지언정 진리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라는 가르침을 생각하며 기도하기 일주일에 지공화상이 나타나 "너희는 우두산 (가야산)에 대 가람을 창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해인사 창건]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우두산에서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이마에 광명이 하늘로 뻗었다. 그 광명을 보고 찾아온 사람을 따라가서 등창이 난 애장왕의 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었다. 오색실로 궁전뜰의 배나무와 병실 문고리를 연결, 배나무가 말라죽으며 왕후의 병이 완쾌되었다.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보경당은 법회 등 행사용으로 만든 전각이다. 여러개의 벽화가 있다, 그 중에서 하나 소개한다. 다음은 불설비유경에 있는 인생에 대한 벽화이다.
1) 나그네가 벌판에서 들불과 코끼리에 쫓겨 큰 나무의 칡넝쿨을 타고 우물 한가운데로 매달려 간신히 위험을 피하였다. 2) 그러나 안도한 것도 잠시이고 우물 벽의 돌 사이에는 4마리의 독사가 있고, 우물 바닥에는 독룡이 널름거리고 있다. 3) 나무위로 쳐다보니 더욱 가공스럽다. 자기가 매달린 칡넝쿨을 흰쥐, 검은쥐가 깕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4) 갑자기 벌에 쏘여 쳐다보니 벌집에서 꿀이 다섯 방울 떨어진다. 나그네는 그 꿀 다섯 방울을 받아먹으며 잠시 공포를 잊고 매달려있다. 이것은 위태롭고 무상한 우리 인생을 비유한 것이다. ① 벌판은 무명장야無明長夜, 들불은 노병老病, 코끼리는 무상無常, ② 쫓기는 나그네는 우리 인생이다. ③ 독사 4마리는 즉 육신의 4대요소인 흙,물,불,바람이고, ④ 독룡은 죽음이며, ⑤ 칡넝쿨은 생명줄, 흰쥐 검은쥐는 세월이다. ⑥ 벌에 쏘임은 삿된 망상, ⑦ 꿀 다섯 방울은 재물, 음식, 애욕, 명예, 수면의 오욕五慾을 의미한다.
-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 1398년(조선 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 팔만대장경판高麗八萬大藏經板을 서울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후 세조가 경판전을 확장, 개수하였으며, 그의 유지를 받든 왕대비들의 원력願力으로 금당벽우金堂壁宇를 이룩하게 되었다. 제9대 성종 때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하였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 이 사찰은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화재를 만났으나 그때마다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의 3층석탑과 석등 정도가 있을 뿐이다. 가장 최근으로 순조 때 대화재로 불타고, 추사 김정희 부 김노경 경상감사의 지원으로 주창했다. 1818년 중건 상량문에 김정희 33세의 젊은 시절의 글씨를 볼 수 있다.
- 특히 국보 제32호인 대장경판과 제52호인 대장경 경판전 및 석조여래입상(보물 264)은 유명한데, 불가사의한 일은 몇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있는 일이다. - 그 밖에 주요 문화재 ; 보물 제518호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128호인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 - 3보사찰 ; 통도사通度寺-불보佛寶사찰, 해인사-법보法寶사찰, 송광사松廣寺-승보僧寶사찰
▣ 고려의 대장경조판에 대하여 대장경 의미 ; 경(경전), 률(계율), 논(연구서) 3장의 불교경전 총칭 , 목적 : 불력을 통한 국난 극복, 불교 교리 정리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은 현종~선종, 1011년(현종 2) 거란의 내침을 계기로 거란족 격퇴 염원으로 시작, 1087년(선종 4)까지 7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존, 총 6,000여 권, 몽고 침략으로 소실되었다. 문종의 제4왕자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송, 요, 일본 등지에서 불경 수집,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라는 목록을 만들고, 1091년 선종 8년에 4,857권의 속장경續藏經판본을 완성하였으나 역시 몽고난 때 불탔다. 몽고난 때, 강화천도시에 몽고 격퇴를 염원한 최우에 의해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새로이 설치하고, 1236년(고종 23)부터 1251년(고종 38)사이에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다. 보존 ; 강화 선원사禪源寺→ 조선 초기에 서울의 서대문 밖 지천사支天寺→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로 옮겨 보존. 1. 중생의 번뇌煩惱 법문이 8만4천1백 종류 2. 고려 고종 23년 1236~1251완성, 16년간, 개태사 승통 守其, 이규보 기고문 “나라와 백성을 오랑캐의 침략에서 구원” 호국안민의 염원 3. 강화도에 대장도감, 진주 남해에 분사 4. 조선 태조 때 1398 해인사에 옮김, 남사고 10대 보신지중(첫번 째가 풍기)에 속한다. 서울에서 한강→낙동강 수운을 이용하여 고령의 개포(開經浦)에 닿고 해인사로 운반했다. 5. 1511부, 6805권, 경판수는 81,137 / 81,340 판 (8톤 트럭 35대 분) 한면이 322자씩 → 약 5200만자 분량) * 1일 1권 읽어도 18년 이상 걸린다. 마음心자 한자 위에 있다. 한면에 14자 23행, 양면 644자 경판의 글자가 오자, 탈자없이 꼭 한 사람의 필적같다. 추사 김정희 “이것은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하늘에 내려와 쓴 것” 6. 경판무게 3.5kg, 길이 67cm, 너비23cm, 두께3cm, 자작나무, 구양순체, 방충을 위해 옻칠 7. 경판전 건립 : 성종 10년 1488, 숯 석회, 소금 등 다져 습도조절, * 7차례의 화재도 경판전을 범하지 못했다. 6.25 때 안개로 공습 피함. 현대식건물 지어 옮겨 봤으나 이내 곰팡이→ 본래대로 두었다. 700년 판전안에 거미줄 하나 없고 창문개방에도 날짐승이 침범치 않음 8. 음력 3월 10일 : 호국 8만대장경 봉찬기도 법회 9. 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 목조건축물 팔만대장경 경판전(국보 제52호․ 1488년 건축) 은 자랑스런 유네스코지정 세계 문화유산이다.
▣ 경판전의 과학성 가야산 해발 730m 지점에 위치한 단순 투박하고 엉성해 보이는 이 경판전은, 팔만대장경을 5백 여 년 완벽하게 지켜온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신비의 환기창이다. 경판전은 마주보는 두개의 긴 일자형 건물과 그 좌우의 작은 건물로 이뤄져 있다. 긴 건물중 앞쪽이 수다라장修多羅藏, 뒤쪽이 법보전法寶殿. 두 건물의 앞뒷벽 위아래엔 각각 붙박이살 환기창이 있는데 이것이 비밀의 실체다. - 특히 창의 크기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 그 핵심. 수다라장 앞쪽벽 남향창은 아래창이 위창의 4배이고 뒤쪽벽의 북향창은 위창이 아래창의 1.5배 정도. 법보전도 각각의 크기는 좀 다르지만 비율은 비슷하다. 내부로 들어온 공기가 아래위로 돌아나가도록 하고 동시에 공기 입량과 유출량을 조절함으로써 적정 습도를 유지하도록 절묘하게 고안한 것이다. - 각 건물 앞쪽 벽창과 뒤쪽 벽창 전체의 크기(위 아래창 모두 합친 것)를 비교해보면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법보전은 뒤쪽벽 위아래창 전체 면적이 앞쪽보다 1.38배 넓고 수다라장은 뒤쪽이 앞쪽보다 1.85배 넓다. 이는 법보전이 수다라장에 비해 뒤창으로 들어온 공기가 앞창으로 많이 빠져나가고 내부에 남는 양은 적다는 것을 뜻한다. 왜 그랬을까. 김동현 국립 문화재 연구소장(한국 건축사)은 '법보전이 수다라장보다 뒤쪽 계곡에 가까이 있어 주변 습기가 많은 점을 고려, 공기의 잔량을 적게 함으로써 습기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 당시 건축인들은 이처럼 경험과 직관을 바탕으로 창의 크기와 위치를 조절, 완벽한 통풍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겉보기엔 그저 숭숭 구멍 뚫어놓은, 무심한 창같아 보이지만 당시의 탁월한 건축술이 살아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 또 건물 내부 장식을 피하고 지붕 바로 밑 공간을 크게 만들어 놓은 것도 공기가 충분히 돌아나가고 불필요한 습기가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건물을 서남향으로 배치, 건물 주변 어느 곳에도 영구적인 그림자가 생기지 않도록 했다. - 그리고 건물 내부 바닥엔 숯 횟가루 소금 등을 뿌려 습도를 조절하고 해충을 막아내고 있다. 자연에 의지하고 귀의하면서도 자연을 극복해낸 신비의 건축물 팔만대장 경판전. 그 비밀은 결국 자연과 인간, 정신과 기술의 조화였던 셈이다.
▣ 소설 팔만 대장경 ※ 해설 : 때는 1232년 고려 고종 19년 몽고의 2차 침입 때 일이다. - 지운스님 : 불제자가 부처님 말씀 지키는 것은 당연한 도리다. 한갓 티끌에 지나지 않는 목숨을 부처님의 공덕을 위해 바치자. 죽음으로써 부인사 대장경을 지키자! - 여러 승려 : 둥둥둥...와와와, 으악, 불이야, 대장경이 불탄다. 나무관세음보살... - 살리타이 : 저자가 이 절의 주지란 말이냐? 괘씸한 것 같으니라구. 어찌하여 감히 항전을 도모했단 말이냐. 기왕에 이 꼴이 될 것을 이 절을 모두 불태워라! ※ 해설 : 한편 강화도에 천도한 조정에게는 - 최우 : 몽고 오랑캐 놈들이 대장경을 불태운 것은 이 나라를 수호하는 불력을 없애고자 함이요, 이는 곧, 만백성을 와중으로 몰아 넣자는 작전이었소. 이 나라 백성이 그나마 견디어 온 것은 제각기 불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소. 이제 새로이 정성을 다해 대장경을 만들까하오. - 수기대사 : 대감은 대장경 불사를 빙자하여 패전의 책임을 은폐하고 권력을 존속시키려 함으로써 상감과 사직에 죄를 범하고 있소. 전란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노동과 과세를 강요하여 도탄에 빠지게 하려고 하고 있소 - 최우 : 닥치시오 대사는 어찌하여 나의 충정을 몰라주는 것이요 ※ 해설 : 그 후 최우는 여러번 수기대사에게 도와주기를 간청하였다. - 스님들 : 1. 대사님 장경불사에 참예하십시오 2. 대사님께서 참여하시지 않는다 해도 불사는 추진될 것이며 장경 제작이 허술할까 염려되옵니다. ※ 해설 : 기왕에 이루어질 불사라면 손색없이 제작되어야 그나마 백성들의 희생의 값진 사 주로 바뀔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고치고는 대장경 대역사의 총지휘자로 참여하였다. - 최우 : 대사 고맙소 힘껏 도와주시오. 그럼 준비기간이 대략 얼마나 걸리게 될까요? - 수기대사 : 3년은 걸립니다 먼저 수록할 정전을 정리해야 되고 글씨가 뛰어난 필생을 100 명정도 뽑아서 필체를 통일하는 훈련을 3년은 해야하고, 경판에 새기는 각수를 300명 정도 3년은 훈련시켜야하며 그밖에 많은 목수가 필요합니다. 나무는 단단하고 결이 좋으며 옹이가 적은 자작나무를 써야 할 것입니다. 바닷물 에 3년 담가 판목이 뒤틀리는 것은 막고 그늘에 말려 판목을 만든 다음 소금물에 끊여 부패와 좀을 막아야 합니다. - 최우 : 대죄를 졌습니다. 나는 그렇듯 공들여 만든 것인 줄도 모르고 소실 당하게 하였으니... ※ 해설 : 최우는 고개를 숙이고 고통스러워했다. 수기대사는 기뻤고 법열(法悅)란 이런 식으로 오는가 싶었다. - 수기대사 : 대감 장하십니다. 참회는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 해설 : 그 뒤 최우는 예를 잃지 않았고, 수기대사는 언제나 겸양의 덕을 보냈다. 필생과 각수를 사백여명 선발하여 규칙적인 생활로 뼈를 깎는 훈련을 해 나갔다. 이들은 대개 승려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의 각수가 하루 50자를 새기게 되면 앞 뒤 양면의 경판 한 장(약 644자)을 보름만에 완성한다. 각수가 300명이므로 보름동안에 300여장의 경판이 만들어지고 하루 단위로 환산하면 매일 20여장이 완성되는 셈이다. 진주에 대장도감의 분사가 두어져 자작나무 원목을 거제도, 완도, 지리산, 사천 등지에 채취하여 판목을 만들어 강화도까지 수송되었다
하얀꽃은 산딸나무
하얀꽃은 불두화
이 학사대는 신라말의 고운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이다. 1. 출생은 857년 (문성왕 19)이지만 말년에 해인사에서 은거하였기 때문에 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2. 본관 ; 경주(慶州) 최씨 시조. 호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부산의 해운대는 최치원 선생의 호에서 지은 지명이다. 3. 벼슬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 부성군 태수 등을 역임했다. 관등은 아찬, 6두품으로 승진에 제한이 있었다. 아찬은 신라 17관등중 6번째 관등이며, 6두품(준 귀족) 출신이 올라갈 수있는 상한선이다. 4. 저서 작품 ;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 당간지주 幢竿支柱 ; 깃발당/ 장대간/ 가지지/ 기둥주 1.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깃발을 달았다. 그 깃발을 당이라고 한다. -당 2. 그 깃발을 높은 장대에 꽂아서 세웠다. -간 3. 그 깃발 장대는 없어지고. 그것을 지탱해준 돌 지주만 남아있다.-지주 지주는 대개 돌로 되어 있으나, 쇠로 된 것도 있다.
부도탑 ; 해인사 고승들의 골과 사리를 모신탑 즉, 고승들의 무덤이라고 할 수있다.
다음은 해인사 사이트, 해인사 안내도.
- 부속 말사(末寺)는 75개에 달하고 부속 암자 16개가 있다. 백련암白蓮庵은 성철스님의 거처였으며, 홍제암弘濟庵은 선조가 사명대사를 위해 지어 주었고,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이다. 허균이 지은 사명대사비가 있다. 원당암은 신라왕실의 원찰이었으며, 약수암(藥水庵) 등이 있다.
김영환 장군 공적비
읽기 힘들다. 아래에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 잘 보이도록 하였다.
최치원崔致遠과 홍류동紅流洞 해인사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신라 시대에 살다 간 최치원(857~?)이다 신라 하대의 학자, 관리. 최치원 선생은 慶州崔氏의 시조. 자 孤雲․ 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 표수현위가 된 후 승무랑 전중시어사내공봉으로 도통순관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 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서서감지사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하였다. 大山 등지의 태수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6두품 출신인 그의 출생신분의 한계와 혼란한 사회를 통탄하고 그는 결심하여, 관직을 내놓고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伽倻山 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등의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해인사 가기 전 2Km쯤에는 홍류동이라는 곳이 있다. 봄에 꽃이 냇물에 떨어져 흐른다하여 붙인 이름이거나, 아니면 가을에 단풍 든 나뭇잎이 흐르는 물에 붉게 수놓아 붙인 이름일 거다. 최치원이 아직 속세에 있을 때 어느 스님에게 지어준 시,
최치원은 나이 40세(896년) 전후해서 번뇌망상煩惱妄想의 세상을 버리고, 해인사로 들어가서, 진실의 세계, 자연에 귀의하게 되었다.
이 시는 지금 홍류동 계곡의 바위 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최치원이 이 시를 지은 뒤에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시에 차운하였다. 후대 사람들은 이 시 결구結句의 ‘농산籠山’이라는 말을 따서 그곳에 정자를 세우고 그 이름을 ‘농산정籠山亭’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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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이재익 선생님의 역사해설에 찬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정리를 잘 했습니다.
역사기행 잘합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