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0일 금요일 오후 5시 12분
청취자 질문
1. 저는 사실 아직 스스로 불자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수행을 실천하면서 진정한 불자가 되려고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수행에서 위빠사나 수행과 사마타 수행이 있다는데, 어떤 점이 다른지 궁금합니다.
- 부처님께서는 모든 수행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는 사마타 수행이고 또 하나는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구분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빨리어 경전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수행에 대한 상세한 기록인 청정도론이라는 주석서가 역시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수행의 분류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빨리어 경전과 주석서가 번역되었습니다. 또 1988년에 미얀마 마하시 명상원에서 한국에 오셔서 위빠사나를 처음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용어와 분류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라서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지 않고 만약 내가 모르는 것이라고 배척하거나, 또 우리 것이 아니라고 거부한다면 바른 것을 알지 못하도록 스스로 눈을 가리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생각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모르던 진리라면 천년 세월을 뛰어넘어서라도 얻을 수 있는 의지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반드시 우리 것이어야 하고, 꼭 내가 알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면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진리에는 네 것, 내 것이 없습니다.
그럼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간략하게 비교해보겠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대상과 하나가 되어 선정의 고요함을 얻는 수행입니다. 이때의 집중은 근접집중과 근본집중을 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색계 4선정과 무색계 4선정을 하는 수행으로 주석서에 밝혀진 수행방법은 40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행을 모두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서, 또 스승에 따라서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수행자가 처음에 수행을 하면 나타나는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하는 수행입니다. 다섯 가지 장애는 감각적 욕망, 악한 의도, 혼침과 게으름, 들뜸, 회의적 의심입니다. 수행을 하려면 이것들이 발목을 잡기 때문에 이런 번뇌를 억누르기 위해서 사마타 수행을 하라고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관념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대상과 하나가 되는 밀착수행을 합니다. 강력하게 붙들어서 번뇌를 억누릅니다. 그래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깊은 집중에 의해 선정의 고요함을 얻습니다. 하지만 통찰지혜를 얻을 수가 없어 최고의 선정에 올라가도 윤회를 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을 하신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시면 단계적 과정에 의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사마타 수행이 대상과 하나가 되어 근본집중을 하는 수행이라면 위빠사나 수행은 어떤 집중을 하며 무슨 수행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 수행은 고따마 싯달타가 보살로 수행할 때, 고행 끝에 연기를 발견하셨고 그 연기 속에서 발견한 느낌을 통하여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과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찰나집중을 찾아내셨습니다. 이 찰나집중으로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입니다.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분리해서 보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보살께서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셨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선정의 고요함을 얻는 수행으로 그치지 않고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립니다. 존재하는 것의 고유한 특성이란 무상, 고, 무아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무상, 고, 무아를 알아서 집착이 끊어집니다. 집착이 끊어져야 열반에 들어 윤회를 하지 않는 깨달음에 이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통찰지혜 수행이라 하고 사마타 수행을 선정수행이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몸과 마음인데 구체적으로 분류하면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지혜수행입니다. 이러한 위빠사나 수행을 팔정도라고도 합니다. 불교의 핵심교리인 고집멸도 사성제 중에서 마지막 도성제가 팔정도입니다. 이것이 중도이며 다른 말로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합니다. 팔정도의 도성제가 없으면 열반인 멸성제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은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이 어떤 특정한 종단의 독단적 교리가 아니고 누구나 가야되는 깨달음의 길목에 있는 관문이라고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간에 빨리어 경전을 볼 수가 없어서 이런 사실을 몰랐는데 이제 우리가 빨리어 경전을 보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이런 수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천태종의 천태지관법이 바로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지관이라고 할 때 지(止)는 멈춘다는 뜻으로 고요함에 머무는 사마타 수행을 말합니다. 그리고 관(觀)은 마음으로 본다는 뜻으로 지혜수행인 위빠사나 수행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이미 천태지관법이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용어가 달라서 위빠사나라는 말이 생경하게 들릴 뿐입니다.
3. 깨달음으로 가려면 사마타 수행과 함께 위빠사나 수행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반드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병행해야 하는가요, 아니면 사마타 수행을 하지 않고 위빠사나 수행만 해도 열반에 이를 수 있는지요?
- 중요한 지적입니다. 열반에 이르는 길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마타 수행을 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둘째,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사마타 수행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셋째,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병행하면서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순간순간 병행하는 스승들이 계시고 또 어떤 스승들은 일정기간 사마타를 하고 위빠사나를 하는 스승들이 계십니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틱냣한 스님은 순간순간 병행하시고요, 모곡 사야도나 파욱 사야도 같은 분들은 일정 기간 사마타를 한 뒤에 위빠사나로 넘어오는 수행을 하십니다. 그리고 네 번째 사마타 없이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순수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열반에 이르는 수행의 길은 이렇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에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네 가지 길 중에서 세 가지만 포함됩니다. 네 번째 방법은 사마타 수행 없이 처음부터 순수 위빠사나로 시작해서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마타 수행을 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셨지만 그 이후에 많은 제자들이 사마타 수행을 하지 않고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부처님은 사마타를 하셨지요.
부처님 제자 중에 아누룻다 존자 같은 분은 사마타 수행으로 신통한 힘을 키우신 분입니다. 부처님께서 근기를 보고, 사마타 수행을 하고 위빠사나로 넘어오게도 하시고 또 근기가 좋으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게도 하십니다. 처음부터 이 네 가지 길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저도 미얀마에서 순수 위빠사나를 하는 스승을 만났기 때문에 이 수행을 했을 뿐이지, 제가 어떻게 알아서 구별했겠습니까? 이런 수행방법도 업의 과보로 만나게 된다고 봅니다. 또 제가 스승한테, ‘왜 우리는 순수 위빠사나를 합니까?’라고 질문했더니, 우리 스승이 순수 위빠사나를 했기 때문에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또 부언하자면, 사마타 수행은 집중을 위한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반면 위빠사나는 지혜수행이기 때문에 매우 빠르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실 미얀마에서 수행을 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 보면 2개월 만에 열반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그 나라 사람들은 순수해서 빨리 열반에 들어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세세생생 열반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오랜 세월 동안 노력을 해도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이렇게 빨리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 순수 위빠사나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근기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이제 사념처 수행 중에서 계속해서 느낌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맨느낌이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으로 진행되는 것이 연기의 회전하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윤회가 계속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윤회를 하는 것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는 연기의 회전 때문이라고 알았습니다. 여기서 범부는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 윤회를 하고, 성자는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윤회가 끝나는 해탈의 자유를 얻는다는 말씀까지 해주신 것 같아요.
- 네, 그게 바로 느낌의 중요성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해야 합니다.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사는 범부는 맨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해 육체적인 느낌으로 진행되면 근심걱정을 하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 가슴을 치고 통탄합니다. 느낌이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가슴을 치고 통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에 대해 분노하고 강력하게 저항하게 됩니다. 이때 단지 저항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순간에 저항하는 잠재적 성향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은 행동으로 그치지 않고 잠재적 성향을 키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의식 안에 이 힘을 더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항하는 것이 습관이 됩니다. 이렇게 저항하는 마음이 커질 때는 극단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파괴적인 투사가 됩니다. 그러므로 잠재적 성향이 생긴다는 것은 괴로움을 더욱 키우는 결과가 됩니다.
괴로운 느낌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도 부족해서 괴로움에 저항하는 잠재적 성향까지 만들면 결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모든 일을 사사건건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행동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더 나쁜 윤회를 하고 더욱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신음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두 맨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생기는 느낌의 폐해입니다. 이처럼 느낌은 계속 진화하기 때문에 괴로움도 계속 진화합니다.
괴로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저항하는 잠재적 성향이 생기면 다음에는 극단적으로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극단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의 극단은 반드시 또 다른 극단을 부릅니다. 괴로움으로 인해 저항하는 잠재적 성향의 극단에 빠지면 반사적으로 즐거움을 누리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합니다. 그래서 맨느낌에서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으로 다시 정신적인 느낌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느낌을 키웁니다. 그러면 즐거운 느낌을 집착하는 잠재적 성향이 생겨서 양쪽에 중독이 됩니다. 괴로움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괴로운 만큼 즐거움을 선택하면 이미 중독자가 된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더 큰 즐거움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즐거움은 얻지 못
하면 오히려 괴로움을 키우는 결과가 생깁니다. 그래서 괴로워서 즐거움을 찾다가 괴로움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결과가 생깁니다. 술이나, 도박이나 다른 감각적 쾌락에 중독된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단지 자신의 파멸뿐 아니고 가족의 괴로움과 함께 사회적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모수 사소한 맨느낌으로부터 시작된 느낌의 진행 속에서 생기는 느낌의 실상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양극단을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것이 아니면 저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실로 숨 막히는 일입니다. 사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시각이 있지만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피난처를 모르고 삽니다. 중도적 입장에 있는 사람을 회색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양극단을 왕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간에 있는 피난처를 찾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시계추처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든가 극단적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바른 견해는 아닙니다.
첫댓글 2013년 9월 20일 <무명을 밝히고-지금은 수행시대, 위빠사나49> 입니다.
이 법문은 mp3 파일로 내려 받을 수 있으며 스마트폰에서도 재생이 됩니다.
∴미얀마에서 위빠사나 수행자중에는 2개월만에 열반에 들어가기도 합니다...범부와 성자는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는지 여부에 따라 윤회와 해탈이 결정된다...凡人이 감각적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더 큰 즐거움을 찾기 때문이며 결국 감각적 쾌락과 극단적 행동이라는 양극단을 왕복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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