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심 2019. 11. 30. 이현래 목사
내가 대구에 올 때 서른아홉 살이었다. 청년부에 서른아홉 살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지만 청년부 집회를 한다니 감개무량하다. 병을 앓고 있던 십대, 신앙의 방황을 하고 있던 이십 대 그리고 부름을 받았을 때의 삼십 대, 이렇게 내 인생을 가를 수 있는데 삼십 대의 마지막 판에 많은 부르심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새로운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충주를 거쳐 대구로 오게 되었다. 그때마다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 십대 때 알던 사람들은 나를 전혀 모르고 이십 대 때 알던 사람들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 삼십 대 때에 알던 사람들 중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몇 사람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죽고 없다. 그런데 사십 대 때에 만난 사람들만 지금 같이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대구에서 사십 년’이라는 말을 하는데 알고 보면 서른아홉에 와서 지금 여든셋이니까 사십 년이 더 되었다. 대학교 1학년이었던 사람이 지금 예순셋이니까 그때 교회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예순셋에서 예순일곱 살까지 있다. 이것은 세대를 옮겨오면서 그냥 옮겨온 것이 아니고 내 인생에서 완전한 변화를 가지고 넘어온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팔십 대에 청년부 여러분을 만난다는 것이 대단히 감회롭다. 그때 대학교 1학년 학생들부터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예순셋이다. 지금 여러분과 얼마나 같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마지막 만나는 젊은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처음 만났던 형제들은 학생들이었으니까 지금 여러분들보다 훨씬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들은 오직 그 말씀 하나만 듣고 왔던 것이다. 그때는 교회도 아니었고 CCC 학생 모임이었는데 CCC에서 2년간 있다가 나오게 되니까 이십여 명이 말없이 따라나왔다. 그 사람들이 지금 우리 교회에 중요한 멤버가 되어 있다. 우리가 나와서 교회를 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말씀이 좋아서 따라나왔던 것이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나에게는 하나님이 특별한 말씀은 주신 것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형제들은 아무것도 없는 나를 따라왔다. 교파도 없고 교단도 없고 교회도 계통이 없는 상태였는데 나를 따라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오신 모든 분들이 오로지 말씀 때문에 와야지 다른 일로 오면 실망할 수도 있고 걸릴 수도 있는 일이 많다는 말을 미리 해 두고 싶다. 교회는 일하는 데도 아니고 사업하는 데도 아니며 클럽도 아니다. 교회는 농장과 같다. 씨를 뿌리면 싹이 난다. 옥수수를 뿌리면 옥수수 밭이 되고 콩을 심어놓으면 콩밭이 되는 것이 교회다. 그러니까 씨를 못받으면 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오래 있었는데 왜 아무것도 없는가?’ 그것은 씨를 받지 않아서다. 씨를 받았으면 뭔가 나올 텐데 씨를 받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오래 있어도 아무것도 안나오는 것이다. 씨를 받은 사람에게서는 금방 뭔가가 나온다. 그러니까 교회는 신기한 데다. 어떤 일로 모인 것도 아니고 생명의 연고로 모였기 때문에 생명을 보면 신기하다. 그러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신기한 것이 없다. 우리 교회가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알고 교회에 오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늘 우연히 성경 말씀을 하게 되었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을 해 놓은 것이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다른 책과 다른 것이 이것이다. 불교의 예를 들면 불교는 인간의 문제를 가지고 출발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싯달타가 왕궁에서 나와 보니 생노병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알아보려고 출가했던 것이다. 사면에 부딪친 여러 가지 고통이나 이런 것들 때문에 나온 것이 불교다. 그래서 불교는 계속 해서 그것을 찾고 있다. 원인이 무엇이고 해결책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이 불교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의심해 보라는 말을 한다. 왜 사람은 늙는가, 왜 병이 드는가? 이런 인간 문제를 의심하라는 것이다. 백양사로 들어가다 보면 큰 바위에 ‘이 뭣고’라는 글자를 새겨놓았다. 경상도 말로 ‘이 뭐꼬’라는 이 말은 불교를 대변하는 말이다. 불교는 모든 것을 ‘이 뭣고?’ 하며 찾는다. 염불을 하는 사람도 있고 참선을 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사람들이 있지만 다 이 문제를 찾는 것이다. 성경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다.’고 선포하는 책이다. 다른 경전들과 방향이 다르다. 그래서 이것을 계시라고 한다. 계시는 사람의 개념 속에 없는 것을 열어서 보여주는 것이다. 불교는 사람의 개념 속에 있는 것을 찾고 있는데 기독교는 사람의 개념 속에 없는 것을 선포해 놓았다. 거부할 수 없는 선포를 해 놓은 것이다. 그냥 선포만 해놓고 말았으면 모르는 일인데 선포는 분명히 일방적으로 했는데 우리가 거부하면 아무것도 안되는 문제를 선포해 놓았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고 가는 사람과 모르고 가는 사람은 천지차이가 되는 것이다. 알고 가는 사람은 인생 문제의 답을 처음부터 알고 가는 사람이다. 창세기 1장 1절에 모든 답이 다 있다. 다만 이것은 계시이기 때문에 해석자가 있어서 해석을 해 줘야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는 말이다. 그래서 먼저 본 자가 그것을 말하고 또 그 다음에 본 자가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는 것도 보는 정도가 늘 달라진다. 왜냐하면 생명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키워 보면 알겠지만 어린아이는 보는 것이 늘 달라진다. 갓 태어났을 때는 빛을 받아도 빛밖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 차츰 사물을 알아가기 시작하는데 그것도 한꺼번에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같이 보고 살지만 아기가 보는 것과 큰 아이가 보는 것과 어른이 보는 것이 다르다. 늘 있는 것이지만 어린아이 때는 안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크면서 그것이 점점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세계다. 생명이 자라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늙으면 생명이 쇠퇴한다. 그래서 옆에 있는 것도 잘 안보인다. 자세히 보면 있는 줄 아는데 시야가 좁아져서 거기까지 안보이는 것이다. 생명은 신기하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돋보기를 쓰고 사물을 키워서 보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어려서 잘 안보이고 늙으면 늙어서 잘 안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처럼 청년기가 모든 사물이 확실하게 보이는 때다. 기능도 그러하다. 어린아이의 생명은 굉장히 왕성한 생명이다. 하루 종일 뛰어놀아도 피곤한 줄 모른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렇지 않다. 그래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돌보려면 굉장히 피곤하다. 어른이 못견딘다. 피곤하고 힘이 드니까 아이와 같이 놀지 못한다. 그래서 엄마들은 아이를 떼어놓고 같이 있지 않을 시간을 만들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어린이집도 생기고 유치원도 생기는 이유가 그것이다. 아이와 같이 놀려면 도저히 감당이 안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그렇게 힘이 좋다. 대신 어른에 비해서 기능은 훨씬 부족하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보면 아이들은 세밀하게 움직이지 못한다. 늙어도 마찬가지다. 늙으면 손가락 움직임이 둔해진다. 그러므로 젊었을 때가 한참 때다. 그때 기능이 가장 왕성하다. 생명이 지식과 다른 것이 이런 것이다. 얼마까지 할지 모르지만 오늘부터 창세기를 하겠는데 여러분이 창세기를 대할 때 다른 책과 다르게 대해야 한다. 창조론이 무엇이고 진화론이 무엇이냐는 차원으로 대하면 아무것도 모른다. 창세기를 그런 것을 위해서 쓴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학자들이 연구논문으로 발표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세계, 사람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어떤 세계를 보고 그것을 선포해 놓은 것이다. 모세의 예를 들면 이백 만이나 되는 사람들 중에 모세만이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렸다는 것은 공포가 심한 분위기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다른 사람들이 산에 올라오지 못하게 했고 여호수아도 모세와 함께 올라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안보인다는 뜻이다. 이백 만 가운데 모세에게만 보였던 것이다. 모세가 보고 내려와서 자기가 본 것을 말한 것이 출애굽기에 나오는 십계명이고 성막이다. 그래서 성막을 만들 때 모세에게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성막을 세우라고 하셨다(출26:30). 모세는 보여 주신대로 성막을 만들었다. 이것은 그가 들은 대로 말했다는 것인데 들었다는 것은 말로 들은 것이 아니다. 뭔가 어떤 광경을 보았는데 거기서 말을 알아 들었던 것이다. 또 예를 들어보면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무슨 소리를 들었다. 옆에 같이 가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울은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말을 들었다. “주여, 뉘십니까?”라고 물으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이 가던 사람들에게는 우레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무슨 소리가 났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레 소리로 들렸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말로 들렸다는 것이다. 세계가 영 다르다. 계시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오늘 다 알아들을 수도 있고 못알아들을 수도 있고 조금만 알아들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을 점점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공부하듯이 한꺼번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 안에서 생명의 경험이 생겨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말씀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지식은 외울 수도 있고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이것은 한번 부딪혀 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내 생명의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접하게 되면서 너무나 감사한 것은 이 모든 말씀이 다 내 말이라는 것이다. 어찌 이것이 다 내 말일까! 이것을 쓴 사람들이 나를 아는 사람이 아닌데 나를 어떻게 알고 내 말을 하고 있는가! 신기한 것이 이 말씀을 알면 알수록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내 인생이 환히 알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못듣느냐에 따라서 세계가 전혀 달라진다. 하루 하루가 달라지고 전혀 달라진다. 어제까지 자기 인생이 전부 원망뿐이던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원망은 어디로 가 버리고 감사가 나온다. 분명히 원망할 일밖에 없었고 ‘왜 그렇게 재수가 없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말씀이 들려오면 ‘아! 내 인생이 이렇게 행복하네. 이렇게 감사하네.’라는 감사가 나온다. 이렇게 바꿀 수 있는 말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생명의 말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잘 들어야 한다. 아무데서나 들을 수 있는 말도 아니고 내가 늘 할 수 있는 말도 아니니까 잘 들어둬야 한다. 참으로 신기하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같은 성경을 보고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할 때마다 내 자신에게 신기하다. 왜냐하면 말은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나를 점점 알아져 가고 내가 분명해져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기하고 재미있다. 공부하는 것은 지식이 쌓이는 재미가 있고 밥먹고 살려니까 배우는 것이지만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누가 들을 사람이 없는가?’ 이것을 찾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 인생을 공개하고 싶은 말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모든 말이 나를 숨기고 싶은 말이었다. 심판하는 말이고 나를 내놓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말을 하면 나를 자랑하는 것이 되니까 할수록 신난다. 이런 말은 세상에 없다. 세상에서는 자기가 한 것을 자랑해 놓고 나면 뒤에 부끄러워진다. 내가 잘했다고 자랑해 놓았는데 돌아서 보면 부끄러워진다. 그런데 이것은 자랑할수록 자기가 영광스러워진다.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까? 분명히 사람이 썼는데 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까? 그것은 들어 봐야 알 수 있다. 들어 보면 ‘아, 이래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구나. 이래서 나를 보고 한 말씀이라고 하는구나.’라고 알게 된다. 이런 생각으로 여러분이 성경을 대해야 한다. 창세기 1,2,3장은 전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그 중에서도 창세기 1장 1절은 더욱 중요한 말씀이다. 우리가 다 알게 된다면 창세기 1장 1절만 가지면 된다. 마태복음도 있고 요한복음도 있는데 제 1장이 가장 중요하다. 논문은 끝에 가 봐야 결론이 나지만 성경은 맨 처음에 가장 중요한 말을 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연역해 나가는 것이니까 첫 장을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첫 장이 제일 어렵고 제일 쉽고 단순하다. 창세기도 1장 1절이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이것이 없으면 전 성경이 안된다. 그만큼 중요하다. 이번에 여러 가지 문제로 유명한 신학자들의 논리를 검토해 보았다. 그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고 백 년, 이백 년에 한 사람 날까 말까한 천재들이다. 기독교 신학계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서 몇 명 안되는 사람들이다. 칼빈 같은 사람은 스물일곱 살에 서른 권의 기독교 요강이라는 책을 쓴 천재 중의 천재다. 이런 사람들 몇 명이 기독교 신학의 사상을 주름잡고 있는 것이다. 그 책들을 다 본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구속론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찾아 보았는데 그렇게 머리가 좋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쓴 것인데 뭔가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그것은 근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신학자들이 대부분 창세기 1,2,3장을 신화로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도무지 뿌리없는 나무와 마찬가지로 답이 없었다. 씨가 심어져서 나와야 답이 있을 텐데 씨가 심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답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문제만 제안해 놓았다. 여러분이 앞으로 읽어 보고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칼빈, 바르트, 볼트만, 퀼리히, 몰트만 같은 사람은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구원론, 구속론을 검색해 보면 전혀 답이 없다. 문제만 제시했지 답은 없다. 시험 문제를 출제를 잘못해 놓으면 답이 안나온다. 여러분 중에 선생님들이 많은데 출제를 잘못해 놓으면 답이 없다. 잘못된 출제를 받은 학생은 황당할 것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답이 없는 문제를 출제해 놓은 것을 보면 황당해서 무슨 답을 써야 할지 모른다. 이것은 심각하게 들어야 할 문제다. 아주 중요한 문제다. 나는 그런 신학자들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도 없어서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에 구속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야, 이거 이상하네. 나는 이 때까지 이 길을 걸어왔는데, 그리고 길을 걸어온 중에 가장 가깝고 가장 쉽다고 해서 내놓았는데 이상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거기서 뭔가 나타나지 않았다. 성경은 예수께서 죽으셔서 우리의 죄가 없어졌다고 하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제물이 되셨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가 나를 위해서 죽은 일도 없고 예수님이 죽으셨어도 내 죄가 없어진 일도 없었다. 그래서 이것이 고민이 되어서 이 문제를 알아 보려고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답을 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잘 들어야 여러분이 정상적인 통로로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문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고 길이 있어야 갈 수 있다. 성경은 길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것이다. 불교는 없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갈수록 어렵다. 없는 길을 찾아가야 하는데 없는 길을 찾겠는가? 그래서 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이미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만 열어주면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하셨지만 들어가고 보면 아주 넓은 길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은 넓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문이 없으니까 나오기가 어렵다. 유럽의 대학들이 그렇다고 한다. 들어가는 것은 마음대로 들어가는데 졸업은 마음대로 못한다. 그러니까 더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학은 시험만 한번 잘 봐서 합격하면 그 다음부터는 놀면서 다녀도 되는데 유럽의 대학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지만 졸업하기 어렵다. 유럽에는 십 년씩 대학을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학위도 못받고 아무것도 못한다. 교수가 사인을 안해 주면 그만이다. 우리처럼 논문 심사위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담당 교수가 사인을 안해주면 십년을 다녀도 졸업을 못한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은 어려운 것 같지만 아주 쉽기도 하다. 이미 길이 있으니까 쉽다. 고속도로가 이미 나 있다. 단지 이 길을 모르고 다른 길로 가고 있을뿐이니까 이 길을 한 번 알면 쉽다. 이보다 쉬울 수는 없다. 그러니까 딴 머리를 굴리면 안된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하던 생각을 갖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 보고 연구하라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있는 것을 보라는 것이다. 성경은 없는 것을 말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창세기 1장 1절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경의 맨 첫 줄이 이 말씀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는 분의 칭호지 그분의 이름이 아니다. 군을 다스리는 사람을 군수라 하고 시를 다스리는 사람을 시장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여호와’는 그분의 이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이 아니다. 그러니까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태초에 전능자가’라는 뜻이다. 창세기 1장 1절은 전능하신 이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미국과 같이 기독교가 왕성한 나라에서도 창조가 맞느냐 진화가 맞느냐 하며 대혼란을 겪고 있다. 너무 논쟁이 심하니까 미국에서는 교장 재량대로 가르친다고 한다. 교장이 진화론을 믿으면 진화론을 가르치고 창조를 믿으면 창조론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니까 선생이 하고 싶은 대로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이 말씀은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하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말인데 이것을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표현했을 뿐이다. 창조했다는 말은 없는 것을 있게 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아무도 모르는 말이다. 우리는 창조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난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창조를 알겠는가. 만약 우리가 태어나서 부모가 없이 자랐다면 우리는 부모를 알 수 없다. 자기 부모를 만나도 모른다. 사람이 별 것 같지만 멍청하다. 짐승들은 어느 시기까지는 자기 부모를 안다는데 사람은 모른다. 키우면서 “내가 네 엄마다. 내가 엄마다.”라고 알려주니까 엄마를 아는 것이지 낳아놓기만 하면 모른다. 개는 자기 새끼가 다른 집에 좀 있다가 오면 냄새를 맡아 보고 자기 냄새가 안나면 물어버린다. 짐승들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냄새로 아는 것 같다. 그러니까 사람보다 더 정확하다. 냄새를 맡는 신경이 더 깊은 데 있다고 한다. 사람은 자기가 낳은 자식도 십 년 후에 만나면 모른다. “이 아이가 당신이 낳은 아이요.”라고 알려줘야 알 수 있지 감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창조를 알 수 없다. 어떻게 우리가 창조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전능하신 자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말해 놓았다. 그리고 창조했다는 말이 맞다. 다 있지 않은가! 하늘도 있고 땅도 있고 사람도 있고 다 있다. 그러니까 이 근원을 설명하려면 창조했다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저절로 생겼다고 해도 안되고 아메바가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안되고 원숭이가 진화했다고 해도 안된다. 다 안맞는다. 그런 것을 연구한 사람들은 남의 일로 생각하고 연구한 것이다. 강아지를 연구하듯이 한 것이지 자기로 연구한 것이 아니다. 자기로는 연구를 할 수 없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아메바의 새끼요. 아메바의 후손이여, 안녕하신가.”라고 하면 펄쩍 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진화론을 하도 주장해서 그 부인이 그를 동물원에 데리고 가서 침판지를 보고 “여보, 당신 조상이 저기 있네.”라고 했다고 한다. 나도 침판지를 처음 보았을 때 인간과 침판지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승은 젖가슴이 밑에 있는데 침판지는 사람처럼 젖가슴이 위에 있고 새끼를 안고 젖을 먹인다. 시커멓다는 것 외에는 사람과 다른 것이 없다. 그 사람은 침판지 앞에서 “저것이 당신 조상이네.”라는 말을 듣고 “내가 왜 침판지 후손이냐!”며 펄쩍 뛰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식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객관화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빼놓는다. 자기가 아메바 새끼라면 누가 연구를 하겠는가? 하던 것도 불살라 버릴 것이다. 전능하신 이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이 말씀이 얼마나 복된 말씀인가! 깡패가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원숭이가 우리 조상이라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어떻게 그런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는 빼놓고 그런 말을 마음대로 한다. 그런즉 “전능하신 이가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말씀은 참 좋은 말이다.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말을 왜 하는가? 그것은 나를 만들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만물을 만들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전능하신 이가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을 연구하려고 쓴 책이 아니니까 나를 전능하신 이가 만들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전능하신 이가,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는 것보다 복된 일이 있는가! 마귀가 지었다거나 귀신이 지었다거나 우연히 생겼다면 내 인생은 근거가 없기 때문에 비참해진다. 나는 이십 대에 고민이 있었다. 교회를 열 살 때부터 다녔는데 이십 대에 들어서 의문이 생겼다. 갑자기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를 모르겠던 것이었다.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 우리 집에서 예배당에 가려면 거리는 얼마 안되지만 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는데 계단 중간 쯤에 서서 ‘내가 왜 예배당을 가지?’ 하던 때가 여러 번 있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까 그랬던 것이다. 나는 스무 살 때 죽을 병에서 해방되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이 나를 고쳐주셨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뒤에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니까 감사하고 말고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부름받을 때 친구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하나님이 너를 죽을 자리에서 살려주셨으니까 이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 있으면 얘기해라. 그러면 내가 길을 주선해 주마.”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셨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온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어려서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니더니 하나님이 살려주셨다.’고 알고 있었다. 그 동네에서 내 또래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나는 그 교회의 창립 멤버였다. 첫날 교회 모임을 하는데 옆집 아줌마가 오라고 해서 갔고 끝까지 다닌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내가 믿음이 좋고 신앙심이 좋은 사람이라서 살려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완전히 죽게 되었으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만 그런 생각을 못해보았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친구의 편지를 받고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죽을 자리에서 살려 주셨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이미 내가 하나님을 인정한 후였다.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 이것을 몇 년을 찾아 보아도 알 수 없었다. 책도 읽어 보았고 사람들 말도 들어 보았고 토론도 해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 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신학교 다니던 친구와 밤새도록 토론을 한 적이 있었는데 “믿어. 믿으면 알아.”라는 것이 그의 마지막 대답이었다. 믿어야 알지 안믿으면 모른다는 것이었다. “야, 이 사람아. 나는 지금 믿고 싶어서 묻는 거네. 안믿으려고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고 싶은데 몰라서 이렇게 묻는 거네. 그런데 어떻게 무조건 믿으라고만 하나.”라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둘의 얘기가 평행선이고 끝이 안났다. 그랬던 사람인데 어느 날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어왔다. ‘야, 나는 내일 일도 모르네.’라는 생각이다. 그것이 은혜였던 것 같다. 그때 나의 형편은 내일 일을 모르고 살던 형편이었다. 내일 일도 모르면서 우주적인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 나는 아무 자격이 없다. 나는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며 논의하고 생각할 자격이 없다. 내일 일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할 자격이 있는가.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 것 같은가? 사람은 다 아는 것 같지만 내일 일을 모른다. 하루살이와 파리가 만나서 하루 종일 토론하다가 헤어지면서 파리가 “해가 저물어가니까 내일 다시 만나자.”고 하니까 하루살이는 “내일이 뭐냐?”고 묻는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다. 인생이 그와 같다. 아침에 멀쩡하게 밥먹고 출근한다며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죽어 버린 사람도 있고 멀쩡하게 나갔다가 병신이 된 사람도 있다. 우리는 내일을 모른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시면 이에 대해서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가 즉결재판소 2층에 있을 때였는데 어떤 중학생이 찾아와서 고민이 있다고 하기에 무슨 고민이냐고 물었더니 어떤 여학생과 사귀고 있는데 그 여학생이 다른 남학생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여학생에게 양단간에 결정을 하라고 했더니 이틀 후에 결정해 주겠다고 했다며 이틀을 기다리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는 것이었다. 심각하게 묻는 그 학생에게 넌지시 “성경에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는 말이 있다.”는 말을 했더니 그 학생은 “그 말씀이 꼭 나 보고 한 말 같네요.”라고 하였다. 그 뒤로 소식을 몰랐는데 십여 년 후 김혜순 자매 아버님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갔는데 그 사람이 그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목사님, 여기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인사를 하는데 보니 그 녀석이었다.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입원했는데 옆에서 젊은 여자가 간병을 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과연 그때 고민하던 그 여학생이었는지 아닌지 차마 물어 볼 수 없었다. 내일 일을 모르는 것이 사람이다. 내일 어찌 될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사람이다. 내일 일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그때 처음으로 ‘나는 피조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조물이니까 당연히 모르지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자를 알 수 있느냐?’라는 생각이다. 그때 그 생각이 그냥 생각이 아니었다. 그렇게 헝클어져서 아무리 생각해도 쳇바퀴 돌 듯이 돌기만 하던 머릿속이 정리가 되었다. ‘아! 나는 피조물이구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안단 말인가’ 이 생각이 드는데 정리가 되는 것이었다. 마치 삶아놓은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이 졸졸 빠져나오는듯한 느낌이었다. 뭔가 살살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일단 내 마음이 정리가 되어버렸고 그렇게 시끄럽던 내 마음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아, 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구나. 그러면 교회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세례를 거부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무슨 세례를 받느냐며 거부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겸손하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확신이 없어서 세례를 못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뭔지는 모르지만 교회에서 하라는 것이니까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교회에서 보면 그런 사람이 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데 아주 긍정적으로 바뀐 사람이다. 그 뒤로 생명의 말씀을 먹지 못해서 자라나는데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을 믿고 완전히 뒤바뀌어서 순수하게 된 사람이다. 나도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한참 신나게 교회생활을 했고 교회에서 하라는 것은 다 했다. 조그마한 교회에서 서리 집사도 했고 무엇이든지 교회에서 하라는 것은 다 좋았다. 그럴 때 내가 부름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왜 부름받았는가? ‘아, 나는 피조물이구나. 나는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 되는 사람이지 내가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며 따질 능력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잘 지냈는데 얼마가 지나니 ‘그러면 하나님이 왜 나를 지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해 보았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니까 못해 본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무엇 때문에 지으셨을까? 왜 나에게 이 생각이 특별했느냐 하면 내 형편이 살기 어려운 때였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데 뭐하러 나를 지어 놓았는가? 이렇게밖에 못사는데 나를 왜 지어놓았느가?’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열심히 기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 내 일기장에 보면 ‘이렇게 아무 데도 쓸데 없는 나를 왜 지었습니까? 만일 실수해서 지으셨으면 그냥 데려가셔도 무방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고 있는데 나를 부르신 것이다. 마치 엿듣고 있다가 부르셨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친구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만나지 못하던 사이였고 그런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는데도 어떻게 귀신처럼 알고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며 떠 보는 편지가 왔던 것이다. 나는 “나는 이렇네. 아무 희망도 없고 소망도 없네.”라며 그때의 심정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에게서 “하나님이 너를 죽을 자리에서 살려주셨으니까 이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 있으면 얘기해라. 그러면 내가 길을 찾아보마.”라는 편지가 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거기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은 나에게 너무나 귀중한 구절이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이 성경 구절은 알고 있었으니까 딱 맞으면서 ‘나는 피조물이구나. 내일 일도 모르는 자구나.’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사람이 피조물이라는 것만 확실히 알아도 인생이 바꿔진다. 이것을 아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인생이 확 바꿔진다. 모든 문제가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대로 시인하게 된다.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있으면 그것이 시인이 된다. 전에는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시인이 되지만 내 마음에 안드는 것은 시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부터는 내 마음에 들고 안드는 것이 없이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모든 것이 시인이 되었다. 물건을 보아서 시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내 인생에 있어서 지금까지 되어진 모든 일이 긍정적으로 시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일도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요즘 빈부격차의 문제로 말이 굉장히 많은데 가난한 사람도 이유가 있고 부자인 사람도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억지로 누군가가 목을 비틀어서 가난하거나 부자인 것이 아니다. 이렇게 긍정적이 되니까 사물을 보는 것이 단순해졌다. 나는 피조물에 불과하니까 사물을 이념의 생각으로 복잡하게 보지 않고 단순히 있는 대로 보게 되었다. 처음 9급 공무원으로 취직하면 자기 위에 계장도 있고 과장도 있고 국장도 있다. 그런데도 직장생활을 잘 못하는 젊은이들은 계장이나 국장이 자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학벌도 비슷하고 다 비슷한데 직급 하나 높다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꼴이 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제대로 못하게 된다. 그런데 긍정적이 되면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오! 나보다 먼저 왔으니까 계장이 된 것이구나.’라고 인정하게 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쉽다. 이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왜 못살겠다고 하는가? 사회만 원망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지금도 오라는 데는 많은데 갈 데가 없다. 외국에서 온 근로자가 250만 명이나 된다는데 우리나라에 실업자가 100만이 안된다. 오라는 데는 많지만 갈 데가 없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긍정적인 사람이 되면 내 형편대로 할 수 있다. 그래도 그것이 부끄럽지 않고 창피하지 않다. 성실하게 일하면 되지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것은 문제가 안된다. 좋은 직장에 간다고 인간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름 있는 직장에 간다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 똑같다. 거기서 진실하게 살고 참되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월급을 얼마나 받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열심히 일하면 월급을 준다. 열심히 일하는데 쫓아내는 사장이 있는가? 아무리 악질 사장이라 해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한다. 어느 직장에 가든지 주인처럼 일하면 나가라고 할 사장은 아무도 없다. “태초에 전능자가 나를 지으셨다.” 간단한 말 같은데 이것이 모든 내 인생을 점령하는 말씀이다.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말씀이다. 나는 모든 것이 감사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하고 싶다. 바울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아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되겠는가? 이것은 기술이나 재주로 배워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만족하기 때문에, 존재적인 만족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는데 대해서 만족한다. 침판지가 나를 지었다면, 아메바가 자라서 내가 되었다면 내 인생을 어디 가서 내놓겠는가! 지금 나는 당당하다. 왜냐하면 나를 지으신 이는 전능자시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를 지으신 분은 시시한 분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한 분이다. 군수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다. 대통령이 만든 아들도 이보다 영광스러울 수 없다. 전능자가 나를 지으셨는데 내가 어디 간들 꿀리겠는가. 이 한 구절만 알아도 인생이 확 달라진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퇴계 이황이라면 여러분은 자부심을 갖고 ‘내 아버지는 퇴계야.’라며 자랑하고 다닐 것이다. 하물며 전능자가 나를 지으셨는데, 전능자의 필요에 따라 나를 지으셨는데 내가 어디 가서 꿀리겠는가. 이것을 시인하지 못하니까 열등감이 생기고 자존감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존감을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사람이 비참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종속되면 비참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안될 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필요하다. 땅에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안된다. 그런데 이것은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게 두신 계획이 있다는 말이다. 이 계획을 갖게 되면 사람이 아주 달라져 버린다. 나는 지금 나이도 많고 병도 있어서 바깥에 나가 보지 못한지가 몇 달이 되었는지 모른다. 오늘도 여러분과 같이 만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못해서 이렇게 인터넷을 이용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라도 하니 좋다. 그리고 나에게 중요한 사명이 있다는 생각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그 가치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서 그분의 죽으심의 가치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에게 필요하면 나를 더 있게 해 주시고 당신에게 필요 없으면 데려가셔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은혜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니까 하나님께 어느 것이 유리한지 계산해 보고 하십시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쓸만 하거든 남겨 놓고 쓸 수 없으면 그냥 데려가셔도 괜찮습니다.” 병원에서 의사에게도 나는 죽을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까 솔직하게 안되겠으면 안되겠다고 얘기하라고 했다. 그래야 나도 준비를 더 할 것 아닌가. 모르고 있다가 죽는 것보다 미리 알면 그 동안에 할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다만 하루 이틀이라도, 내가 내일 죽는다고 생각되면 오늘 할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자기 앞에 중요한 일이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다. 내일 죽어도 오늘 내가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이 걸리겠는가! 누가 걸리고 누가 꼴 보기 싫겠는가. 옛날에 본 성경 구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내가 얼마나 살 것인가를 계산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천년만년 살 것 같으니까 이런 생각을 못한다. 그런데 시간이 가고 보니까 시간이 참으로 귀중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든지 우리 집에 오면 나는 무조건 내 이야기를 한다. 듣든지 말든지 내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해야 한다.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할 말이 있어서 왔겠지만 내 이야기부터 한다. 왜냐하면 내 이야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더 중요한 이야기니까 잘 들으면 가지고 왔던 문제가 없어진다. 다 해결되어 버린다. 여러분도 살면서 ‘가장 긴급하게 꼭 하지 않으면 안될 말이 나에게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이것이 있는가? 그러면 이것이 자랑꺼리가 된다. 쓸데 없는 소리를 만날 하면 뭐하겠는가? 귀한 시간에 시간만 넘어갈뿐이지 아무 소용이 없다. 시간이 짧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귀중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니까, 하나님의 목적을 가진 사람이니까 나는 귀중하다. 헛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불교에서는 헛된 것을 벗겨내느라고 맨날 가죽 벗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업을 벗겨내느라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만 알면 벗을 것도 없다. 내가 지금 마지막 복음이라고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데 이것을 알면 벗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저절로 벗어져 버리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벗겠는가? 빈 그릇이 되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애쓸 필요가 없이 저절로 빈 그릇이 돼 버린다. 빈 그릇이 되면 그 안에 좋은 요리가 들어올 것 아닌가!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최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좋은 요리를 가진 사람이 보면 지저분한 것이고 시래기 국 같은 것이다. 지금 요리사는 아주 맛있는 요리를 준비해 놓았는데 그릇이 차 있어서 주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이 요리해 놓으신 것은 너무 좋은 것이다. 감사한 것이고 꿀맛 같은 것이다. 그릇에 다른 것이 있으니까 못들어오는 것이지 그릇만 비워져 있으면 좋은 것으로 금방 금방 채워진다. “태초에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 전능하신 이가 나를 지으셨다.” 이 한 구절만 가지고도 평생 이야기해도 된다. 이것이 있어야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알아진다. 이것이 제대로 안되면 아무리 공부를 해도 안된다.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들의 책을 보니 다 이것이 없다. 뿌리가 없다. 거창하게 말을 시작했는데 마지막에 보니 답이 없다. 여러분 인생이 답이 있으려면 뿌리가 정확해야 한다. 출발이 정확해야 하고 길이 정확해야 답이 있지 엉뚱한 길로 가 버리면 평생 동안 답이 없다. 목회자들이 모이면 그렇다고 한다. 요즘은 65세가 정년이고 길어야 70까지 할 수 있는데 65세가 안된 목회자들이 모이면 정년퇴직을 하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한다는 것이다. 정년퇴직한 목회자들은 주일 날이면 갈 데가 없다. 자기가 있던 교회를 가자니 눈치가 보이고 남이 하는 교회에 가자니 이상하고 안가자니 뭔가 죄를 지은 것 같다. 그렇다고 노인당에 가겠는가 어디를 가겠는가? 곤란하니까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진짜로 할 말이 있으면 고민할 필요가 없이 어디 가서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될 텐데 할 말이 없으니까 고민하는 것이다. 꼭 목회자들만 그러겠는가? 학교 선생님들도 정년퇴직하면 할 일이 없다. 교장선생님으로 있다가 퇴직하고 나오면서 쓰러진 사람도 있다. 퇴직하고 집에서 애나 볼 생각을 하니 아찔했던 모양이다. 우리 시대에는 삼십 대에 교장이 되어서 평생 교장을 한 사람도 있다. 교장 선생은 신문이나 보고 출장이나 가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 그렇게 하다가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허무해지는 것이다. 이병철씨 같은 분은 우리 반만 년 역사에 처음 난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 세계적인 기업을 이룬 사람이다. 그분이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가 되니까 허무해서 인생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고 한다. 천주교 신부에게 스물네 가지의 질문을 적어 보내고 답을 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신부가 답을 해 준 것을 보니 시원치 않다. 확실한 답을 해 줘야 하는데 답이 제대로 안됐다. 자기 인생에 답이 있어야 남에게도 답을 줄 수 있지 내 인생에 답이 없는데 어떻게 남에게 답을 주겠는가! 내가 길을 알아야 남에게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지 내가 길을 모르는데 어떻게 남에게 길을 가르쳐 주겠는가! 자기 자식에게도 길을 가르쳐 줄 수 없다. 자기가 가시덤불을 잡고 헤매고 있는데 어떻게 자식에게 길을 가르쳐 주겠는가. 단순한 말 같지만 “태초에 전능자가 나를 지으셨다.”라는 한 말씀에 다 들어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깊이 더 깊이 상고하기 바란다. 누가 나를 지었는가? 전능자가 지으셨다. 전능자가 나를 지었으면 공연히 지었겠는가! 신학교에 갔을 때 나는 분명히 부름을 받고 갔었다. 그 전에는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될 생각은 꿈에도 꿔 본 적이 없다. 그것이 좋고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전혀 그럴 수 없는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스물일곱 살에 신학교에 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 스물한 살에 왔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삼 년씩 기도하고 왔다는 것이었다. 속으로 그 나이에 어떻게 주의 종이 되겠다고 했는지 대단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 교단이 교회도 몇 개 안되고 재정도 별로 없고 이름도 없어서 건전하기는 한대 장래성이 없는 교단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수군거렸다. “졸업하면 뭐 하지? 어디로 가지?” 이런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삼 년씩이나 기도하고 왔다면서 무슨 기도를 했는가? 이상하네. 기도하고 왔다면서 왜 저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회사에서 사람을 뽑아도 일이 있으니까 월급 줄 계산을 하고 뽑는데 일이 없는데 사람을 뽑겠는가? 그들과 비교해 보니 나는 너무 뻔뻔했다. 일이 있으니 오라 하셨지 하나님이 나를 공연히 오라 하셨겠는가? 나는 그런 문제로 걱정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교회를 배정받았다. 나와 한 방에 있던 사람은 공부를 잘했는데 항상 초조해했다. “이 선생은 불안하지 않습니까?”라고 묻기에 뭐가 불안하냐고 했더니 그 사람은 “불안하고 누가 올 것 같아서 침대 밑에 칼을 넣어 놓고 잔다.”는 것이었다.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하고 온 사람이 그런 말을 했는데 여름방학 때 죽어 버렸다. 자살은 아닌데 죽으면서 자기를 화장해서 온 사방에 뿌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죽어서라도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허망한 일이다. 하나님이 불렀으면 왜 불안했겠는가? 전능자가 나를 지으셨는데 왜 불안한가! 사람이 사람을 불러도 생각하고 부르는데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나를 지으신 것이고 나를 부르신 것이지 공연히 불러 놓았겠는가. 나는 누구 보고도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는 말을 못해 보았다. 왜냐하면 한 번 오라 했으면 평생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하나님은 오죽 하겠는가! 오라 해 놓고 밥 굶으라고 하겠는가? 나는 이런 기도를 했었다. 그때는 십자가를 잘 모를 때였는데 “십자가의 고난을 내게 주신다면 내가 이해하고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끌고 가시면 내가 그 자리에 가서는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내 발로는 못가지만 억지로 끌려간다면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는데 내 입에 망을 씌우면 그때는 할 수 없이 나가서 돈벌이를 해야 되니까 하나님이 이해하십시요.”라는 조건을 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굶은 적이 없다. 우리보다 먼저 아신다. 하나님이 나보다 먼저 알고 계신다. 그러니 선포하신 것이지 왜 일방적으로 선포하셨겠는가. 우리를 다 알고 계신다. 나를 오라 하실 때는 나를 먼저 알고 계신다. 그래서 오라는 것이지 그냥 오라는 것이 아니다. 나도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고 하지 모르는 사람을 보고 같이 살자고 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선포다. 나에게 물어보지 않고 선포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 말씀을 알아들어야 되는 것이다. 나를 알고 하신 말씀이니까 그 안에 절대로 하자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하였다(롬11:29). 절대로 후회하심이 없다. 확실히 부르셨다면 완전하게 보장하고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냥 부르시겠는가? 내가 해도 못하겠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는가. 태초에 전능자가 나를 지으셨다. 이보다 큰 축복이 없다. 우리 교회에 온 청년들이 지금부터 이 축복을 가지고 산다면 인생이 얼마나 행복하겠는지 생각해 보자. 이것 자체가 축복이니까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해 주셔도 상관없다. 전능자가 나를 지으시지 않았다면 나는 아메바 새끼, 침판지 새끼가 될뻔했다. 이 말씀이 없으면 내 근거가 어디 있겠는가. 지금은 조상들 이름을 내고 내 근거를 내세울 때가 아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했지만 지금은 “나는 누구 누구의 자손이요.”라고 해 봤자 알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오늘은 1절만 하는데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평생 복음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아! 그때 이 말씀이었구나.’라고 살면서 계속 알아가게 될 것이다. 오늘은 다 모르더라도 계속 알아져 가게 된다. 나는 지금도 이 말씀이 늘 알아져 간다. 신기하다. 자꾸 알아지고 더 알아지고 더 알아진다. 같은 말인데 자꾸 자꾸 깊어지니 신기하다. 이렇게 하다 보면 창세기 1장을 백 년 해야 될 것 같다. 이 첫 절이 가장 중요하다. 요한복음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한 마디가 가장 중요한 말씀이고 마태복음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는 한 마디가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모든 것이 그러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된다. 1장은 총론이고 1장 1절은 총론 중의 총론이다. 나는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랑방에 글을 써도 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앞부분만 읽고 ‘이 말이구나.’라고 생각하고 만다. 앞부분이 중요하면 뒷부분은 더 중요하지만 앞부분이라도 듣는 것이 낫다. 앞부분을 알아듣기 쉽게 자꾸 말하는 것이니까 앞부분이라도 듣고 ‘이 말이 전부구나.’라고 알아도 된다. 창세기는 1장이 제일 중요하고 그 중에서도 1절이 제일 중요하다. 내 평생에 영원토록 있을 말씀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한 말씀이라고 할 수 없다. 누가 그것을 보고 썼겠는가, 누가 천지를 창조한 것을 보았겠는가!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