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덕골을 지키는 토박이 문인, 김현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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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순의 마마보이가 바치는 사모곡 애틋
해박한 역사인식 바탕으로 기행 시 영역확장
작품 곳곳에 둔덕면에 대한 애향 느껴져
편집자주=예술과 문화의 도시 통영, 익숙한 말이다. 통영에서 문화예술행사가 열릴 때마다 그 수식어는 자연스럽게 붙는다. 반면 거제에서 예술과 문화는 익숙한 수식어가 아니다.
양대 조선으로 경제 호황을 누렸지만 거제의 문화예술 황금기가 언제인가의 물음에 과거의 언제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지, 앞으로의 거제 문화예술 황금기가 가까운 미래일 거라고 자신 하는 이는 몇이나 될지는 의문이다.
문화가 강한 도시는 결국 그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된다. 도시에 대한 자부심은 인력유출의 문제를 해소시켜줄 뿐 아니라, 고향으로의 회귀가 부끄러움이 아닌, 지역 살리기에 동참하는 소중한 인적 자산이 된다. 가까이 통영이 그렇고, 전주시의 한옥마을이, 영월군의 김삿갓면이 그렇다.
98명. 거제문인협회 소속 작가의 수다.
지역에서 활동하며 때론 시민의 삶속에 녹아든 채로, 때론 지역에서의 감흥을 예술적삶에 녹아든 채로 지역 곳곳에서 지역민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있는 작가들이 무려 98명이 현존한다.
그러나,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지역 작가와 그 작품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소중한 지면을 할애해 소개하려 한다. 지역 작가의 작품을 통해 작게는 거제예술에 대한 자부심을, 크게는 거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되길 바란다. 이 특집을 기획한 작은 바람이기도 하다.
총 8주에 걸친 이 특집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는 모를지라도, 거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제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작가 한 명의 이름은 가슴속에 새겨지기를, 우리 거제 문화가 결코 어디를 내놔도 뒤처지지 않는 고향에 자부심이 되기를 바란다.
지역 작가의 작품과 소개는 누구보다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전 거제문협 회장이자 작가이기도 한 양재성 작가가 수고를 해주시기로 했다. 양재성 작가는 거제문화예술재단·청마기념사업회 이사이자 경남문학신춘문예서 입상하고 한국문협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작품으로는 시집 ‘나무의 기억은 선명하다’, ‘지심도의 봄’ 등 다수의 작품으로 시민들에게 위안을 줬다.
김현길 작가
양재성 작가, 김현길 작가를 만나다
거제도 둔덕에는 고려시대 중기 무신정변으로 피신 왔던 의종이 기거하던 기성이 있고, 한국문단의 거목 청마 유치환 시인의 생가·기념관·묘소가 있다. 둔덕골에서 나고 자라서 숙명처럼 둔덕골을 지키는 토박이 문인이 김현길 시인이다.
2005년 시사문단으로 등단한 이래 시집으로 <홍포예찬>, <두고 온 정원>, 시조집 <육순의 마마보이> 및 수필집 <비에 젖은 편지>를 펴냈다. 나아가 의종과 둔덕골을 배경으로 한 장편 역사소설 <임 그리워 우니다니>를 출간했다. 한국문협·경남문협·거제문협·거제수필·거제시문학회·시조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랑·청마기념사업회 부회장이자 시낭송가로서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진주교대 대학원을 마친 늦깎이 학구파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삼국지의 여몽(呂夢)을 떠오르게 하는 삶의 여정이 존경스럽다. 다음은 거제시문학 7집에 실린 <칸나 꽃>이다.
훤칠한 키 쪽진 머리에
동백기름 곱게 바르고
거제면 장에라도 갔다 오남요
아니면,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영북 땅넘 친정집 나들이라도 갔다 오남요
도로명 거제남서로 3918
낡은 지붕 쓰러져가는 빈집
돌담장에 기대선 당신을 봅니다
당신 떠나던 정해년 구월 스무 여드렛날
이제 영감님 곁으로 영원히 간다며
염사가 빨간 립스틱으로
입술에 그려주던 그 꽃이
옷바위에 지는 노을 따라
곱게도 피었습니다
그리움으로 피었습니다.
<칸나 꽃 作김현길>전문
시인은 해질 무렵 오래토록 비어있어 허물어져가는 고향집을 찾는다. 담장에 새빨갛게 핀 칸나꽃을 보면서 어머니에게 어디 나들이 다녀오시느냐고 말을 건넨다. 칸나는 키가 크고 잎은 넓으며 꽃은 핏빛처럼 붉다. 어머니의 훤칠한 키, 쪽진 머리, 동백기름 곱게 바른 모습이 칸나를 닮았다. 어머니가 모처럼 단장을 하는 날은 거제면 장날이거나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를 하는 날이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떡이나 사탕 등 먹을거리를 챙겨와 기다리던 아이들 손에 쥐어주었으리라.
입관할 때 염사가 어머니의 입술에 곱게 칠해주던 빨간 립스틱을 칸나꽃으로 비유했다. 아마도 생전에 어머니가 칸나를 심었으리라. 그 칸나가 홀로 빈 집을 지키면서 지는 노을 따라 곱게 피었다는 것이다. 아련하고 애틋한 그리움이다. 어릴 적 불렀던 동요 ‘꽃밭에서’가 생각난다. 시인은 육순을 넘었지만 시조집 제목처럼 스스로를 ‘마마보이’라고 자칭한다. 육순의 마마보이가 그려내는 사모곡이다.
백두산 서쪽능선 흐드러진 야생화
말갈 족 머리댕기 붉게 어린 참나리 꽃
가녀린
에델바이스
무서워라 매 발톱
대조영의 윗저고리
미나리 아재비며
천지 못 신비한 물길
만주벌을 적셨는데
독방 창 오랑캐꽃은 어디에도 없구나
옛 조상의 얼이 배인 의연한 구상나무
미끈한 자작나무 할 말 많은 풍도목
역사 속
한 서린 등걸
고구려의 넋이여!
<백두산 서쪽능선을 오르며 作김현길> 전문
예로부터 중국은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 하에 주변 민족을 오랑캐로 취급했다. 그런데 근자에는 오랑캐 취급하던 그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키고자 동북공정 운운하는 술수를 부리고 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시인이 청마의 발자취와 윤동주의 숨결을 느끼고 백두산을 오른 시기는 늦봄 언저리쯤이다. 산을 오르는 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를 회상하게 된다. 광활한 만주와 요동을 주름잡던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과 대조영의 발해가 성큼 다가온다. 주변의 초목들 모두가 역사적인 상관물로 비유 또는 대치되면서 자긍심과 비애감의 혼재로 가슴이 뭉클해진다.
흔히들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이유는 역사는 반복되고 이를 통해 교훈을 얻거나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행을 주제로 시를 맛깔나게 쓰기가 어렵다고 한다. 자연풍광이나 역사적 사실의 나열에 그치기가 쉽고, 짧은 시로서 전체를 함축하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그런데 이 시는 ‘아는 만큼 느낀다’라는 말처럼 해박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기행시의 영역확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형시이다.
김현길 작가
선선한 바람 불면 우리
공주샘에 가 보자
우물 속 가을하늘엔
고려가 펼쳐지고
우두봉
황성의 서답줄에는
곤룡포가 펄럭인다.
천남성 달개비꽃
들깻잎에 호박넌출
숨어 핀 오랑캐꽃
담벼락에 오미자
공주는
구절초로 환생하여
미소하며 반기더라.
<고려 공주샘 作김현길> 전문
인용 시는 ‘백두산 서쪽능선을 오르며’보다 형식면에서 한결 자유스러워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종장이 정형시의 기본 운율에서 살짝 비켜난 여유로움이 보인다. 이는 시대적 흐름을 수용한 멋 내기의 일면으로 이해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의종의 역사적 평가는 논외로 하고 개인적으로는 불운했던 임금이다. 둔덕 우두봉에 있는 기성은 의종이 거제로 와서 지냈던 성곽이다. 둔덕지역 곳곳에 의종과 관련된 지명이나 유적이 많이 남아있으며 해마다 의종을 기리는 추모행사도 치러지고 있다.
시인은 청마기념관이 있는 방하마을의 공주샘 가에 앉아 타임머신을 타고 고려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첫 연의 ‘선선한 바람 불면 우리/공주샘에 가 보자’는 청유형이지만 자신에게 이르는 독백이다. 청명한 가을하늘이 비친 우물 안 스크린에는 빨랫줄에 널린 의종의 곤룡포가 한가로이 펄럭이고 있다. 성곽 밖에는 사약의 재료인 천남성 붉은 열매가 독기를 품으며 은근히 의종을 위협하고 있다. 와중에도 시종들은 들깻잎이며 호박넝쿨을 길러 자급하면서 담벼락에 열린 오미자로 차를 끓여 왕을 모셨으리라. 의종이 경주로 떠나고 비운을 맞은 공주가 다시 구절초로 환생하여 미소로 시인을 반긴다는 설정이다.
시공을 초월한 사랑의 스토리텔링이다.
시적 상상이 그려낸 이미지가 생생하다. 실루엣처럼 흐릿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또렷하다. 역사물인 공주샘에 대한 감상적 연민을 현장감 있는 이미지로 그려낸 한 폭의 역사화다.
시인은 기행을 통해 대마도, 북만주, 진주성, 경주 등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시 삼매경에 흠뻑 젖어있다.
해설 양재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