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업도 1박 2일 일정이 강풍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3박 4일이 되었습니다.
김준영 세르파님께서 저에게 굴업도 탈출기를 써보라 하셨습니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써서 남겨둘 글을 쓰고 이곳에 글을 옮겨야 하나 망설이다 옮겨보기로 했습니다.
글이 무지 길고 저의 입장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 글의 성격이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암튼 명령 수행 차원에서 올려보기로 하겠습니다.
4일간의 굴업도 섬살이
○ 일자 : 2017.11.13. - 11.16.
○ 장소 : 굴업도
○ 날씨 : 맑다가 흐리다가 바람 세차다
○ 일행 : 도봉산악회 섬산행 동행(석훈,서정,선희,원규,준영,미숙,현남,영신,영식)
2010년에 인천공항으로 발령을 받고 먼저 내가 한 일은 서울 주소지를 공항신도시 운서동 관사로 옮긴 일이었다. 인천 시민들에게는 섬으로 가는 배삯을 절반으로 해주는 혜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공항에 근무하는 동안 서해안 지역의 섬은 모두 섭렵하고 말리라. 그런데 공교롭게도 섬으로의 꿈같은 여행에 잔뜩 부풀어 있던 그때 연평도 포격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선 순위로 가보고 싶었던 서해안 북단의 백령도와 대청도 그리고 연평도는 더 이상 내 여행 목록의 상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서해안에는 그 섬들 말고도 무수히 많은 섬들이 있지만 그 섬들은 백령도와 연평도에 비하면 옵션에 불과했다. 한동안 서해안 섬여행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어 관심이 없다가 늦으막한 2016년 드디어 2박 3일간 백령도와 대청도를 여행할 수 있었다. 백령도와 대청도는 나름 큰 섬이어서 자전거를 가져가 캠핑을 하거나 민박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만약 자전거 없이 백패킹을 했다면 2박 3일은 어림도 없다. 백령도와 대청도 여행을 끝내고 슬슬 서해안의 작은 섬들을 돌아볼 참이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덕적도와 굴업도였다. 백령도와 대청도를 다녀온 지 얼마 안되어 다시 덕적도 자전거 여행을 위해서 표를 끊었다. 당일 자전거에 캠핑 장비를 달고 어렵게 인천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한 후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배에 자전거를 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애원해도 안된다고 했다. 백령도와 대청도는 자전거가 되는데 덕적도는 왜 안되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울릉도 가는 쾌속선에도 자전거를 싣고 간 적이 있었다. 하여간 눈물을 머금고 덕적도를 포기한 후, 며칠 후 굴업도 백패킹을 하기로 했다. 굴업도는 백령도와 대청도를 가기 전에 일단 맛뵈기로 가보고자 했던 섬으로 2012년쯤이던가 표까지 다 구입해 놓고 짙은 안개로 선박 출항이 불가능하여 되돌아 온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에도 똑같은 이유로 굴업도에 갈 수 없었다. 굴업도에 가려면 직항 배편이 없어 덕적도에서 배를 갈아타야 한다. 나올 때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도봉산악회에서 굴업도 백패킹 공지가 떳다. 바로 들어가 보았으나 매일 공지를 확인하지 않는 게으름 때문에 이미 마감이 되어 자리가 없었다. 인천여객선터미널로 가는 차가 도봉산역 부근에서 출발하여 같은 장소로 돌아오는 것이니 나로서는 아주 편리한 여행이 될 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대기자로 이름을 올려놓았는데 운이 따라주어서인지 포기자가 나와 드디어 굴업도 백패킹 여행은 이루어졌다. 굴업도! 두 번이나 실패했던 섬이다.
13일 오전 6시 20분 도봉산 부근 출발지에 도착해 보니 함께할 일행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6시 30분에 출발하려던 두 대의 차가 다 도착하지 않아 좀더 기다렸다. 10분 늦은 6시 40분에 차 한 대가 도착하여 5명이 한 조가 되어 먼저 출발했다. 또 한 대의 차가 와야 나머지 인원이 출발할 수 있다. 그러나 차는 7시가 넘어도 오지 않더니 7시 10분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산행대장 원규님이다. 인천여객선터미널에서 우리가 탈 배 편은 오전 8시 30분 출발이었다. 내비로 찍어보니 우리가 도착하는 시간은 8시 38분이었다. 정속으로 가면 배를 못 탈 건 뻔한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차를 운전하는 산행대장님은 악셀을 마구 밟아대며 질주했다. 신호도 무시하고 좌우로 다른 차들을 추월하며 곡예 운전을 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지만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처럼의 백패킹이 수포를 돌아가는 걸 모두 원하지 않는 눈초리였다. 나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에 못 가면 세 번째 못가는 것이 된다. 굴업도가 이렇게나 먼 섬이었던가. 천신만고 끝에 차는 여객터미널에 8시 20분에 도착했다. 이미 개표가 시작되어 있었다. 차에서 배낭을 꺼내고 짐을 챙겨 개표를 하면서 뭐 빠진 거 없나 다시한번 둘러보는 순간 아뿔싸!! 카메라를 안 가져온 것이었다. 가져왔는데 혹 중간에 어디 떨구고 온 건 아닐까 곰곰 생각해 보았다. 집에서 나와 차를 타는 곳까지 중간에 선 기억도 없고 배낭을 내려놓은 기억도 없다. 차에서 배낭을 꺼낼 때는 샅샅이 다 훑어 보았다. 그렇다면 집에서 안 가져온 게 분명하다. 이번에 카메라를 안 가져온 것은 정말 큰 실수다. 야간 사진과 하늘의 별을 촬영해 보겠다고 모처럼 삼각대와 광각과 단렌즈 2개의 렌즈도 챙겨두었고 밧데리도 여분으로 두 개를 더 챙겨 배낭에 넣었었다. 특히 카메라를 잊지 않기 위해 배낭 옆에 고이 모셔두었었다. 그리고는 아침에 두 눈 벌겋게 뜨고도 배낭만 달랑 메고 나온 것이다. 참으로 웃기는 코미디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갈까? 아니야 배낭도 무거운데 가방은 놓고 가야지. 망원렌즈, 광각렌즈, 단렌즈 모두 가져갈까? 아니야 망원렌즈는 쓸 일이 별로 없을 테니 빼야지. 바람이 많이 불면 카메라가 흔들릴테니 크고 안정적인 삼각대를 가져가야겠지? 아니야 바람이 뭐 얼마나 많이 불겠어 조그만 삼각대로도 충분할 거야. 이러면서 가방과 카메라와 렌즈와 삼각대를 들었다 놨다 하기를 얼마나 했던가. 그런 카메라를 잊어? 나이가 좀더 들면 백패킹을 가면서 배낭조차 메지 않고 문을 나서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코리아나호가 덕적도에 10시에 도착 한후, 1시간 20분을 기다려 11시 20분에 다시 굴업도로 가는 나래호로 갈아탓다. 12시 20분에 나래호가 굴업도에 도착하자 몇몇 1톤 트럭이 대기하고 있다. 우리는 장할머니댁 민박집 트럭을 탓다. 트럭은 이장댁 트럭과 장할머니댁 트럭이 나래호가 도착하면 상시 대기하고 있는데 누구나 무료로 탈 수 있다. 다만 성의 표시로 조금 비싼 생수며 라면 쌀 맥주 등 부식을 구매할 수 있고 식사를 시켜 먹을 수도 있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시켜 먹었고 생수와 가스 등을 구입했다. 굴업도에는 선착장에서 굴업도 해변까지의 약 1.3km만 포장되어 있다. 마을과 민박집도 오직 굴업도 해변가에만 있다. 장할머니댁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우리는 곧바로 개머리 언덕으로 올랐다. 해변에서 개머리 언덕 올라가는 입구에는 철창이 쳐 있고 문이 달려있다. 문은 누군가 열어놓았는데 옆에 출입금지 표지판이 서있다. 오래 전 이곳에 골프장과 리조트를 짓겠다며 섬 전체를 구입한 CJ그룹 계열사의 경고 표지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패커들은 이 문을 수시로 드나드는 것 같다. 우리도 스스럼 없이 들어갔다. 꽤 가파른 언덕을 올라 고개를 넘으면 갈색 물결이 일렁인다. 수크렁과 억새밭이 강풍에 누워있다. 갈색 물결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다닌 길이 뱀처럼 꼬부랑거리며 이어지고 있다. 우리들도 그 길을 따라 걸어갔다. 우리는 모두 10명인데 남자 5명 여자 5명이다. 어찌 이리 성비가 완벽한지 모르겠다. 모두 아줌씨 아저씨들이다. 나포함 60대가 2명, 50대가 7명, 40대가 1명이다. 모두 기혼자들이고 손자 손녀를 본 사람도 두 서넛 된다. 그 중에 완벽한 백수는 나 혼자다. 여자 중에는 현직에 있는 사람도 있고 가정주부도 있지만 가정주부도 일종의 직업이라 감안하면 나 혼자 백수라는 거다. 그러니까 완전한 자유인은 나 혼자라는 것. 나는 누가 제지할 사람이 없다. 현직에 있는 사람들은 직장이 가정이, 가정주부는 남편이 자식이 제지하지만 나는 제지할 사람이 없다. 아내도 나를 제지하지 않고 자식도 나를 제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나를 강력하게 제지하는 놈들이 몇 있다. 이 놈들은 내가 청춘기를 지나면서 공들여 키워놓은 놈들인데 나이 들어서는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간섭하고 나를 묶어두려 하고 나를 붙잡아 두려 한다. 이 놈들은 사람도 아닌 것이 사람보다도 더 단단하게 나를 제지한다. 나의 양심과 나의 양식 그리고 나의 이성이 그것이다. 이 놈들은 나의 감성이 자칫 막무가내의 자유를 찾아 헤메일 때 강력하게 나를 제지한다. 절제된 자유만을 누리라고. 그것이 절제된 자유라면 무한히 확장되는 건 용인해 준다고. 나는 사실 내심 파격과 일탈의 행위를 하면서 뭔가 짜릿한 느낌을 받고 싶기도 한데 내가 키운 이 놈들 때문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반항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놈들에게 순응하는 것이 내 자유의 진수를 누리는 것이라고 자위한다. 그리하여 수크렁 물결 위를 거닐며 나는 무한히 확장된 자유를 만끽하려 한다. 경관을 보며 경관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자유로운 자의 극치의 자유다. 그러나 ‘나는 자유다’를 외치며 앞서가는 저 일행들의 자유도 오늘만큼은 나의 자유와 대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나의 자유보다 더 큰 자유를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직장과 가정에 한쪽 발 담구고 있는 자의 자유는 담겨진 한쪽 발을 빼는 순간 미사일보다도 더 빠르게 공간을 날아다니며 자유를 만끽하고자 한다. 그래서 나는 안다. 저들이 외치는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개머리 언덕에 다달아 텐트칠 곳을 물색했다. 바닷가 바로 옆 둔덕에 텐트를 치기로 하였으나 바람이 너무 심하다는 의견에 따라 좀더 높은 곳 전망 좋은 곳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하나씩 자리를 잡고 텐트를 치기 시작하는데 바람이 어찌나 심한지 팩을 꼽기조차 힘들다. 대장은 가져온 타프를 설치하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네 사람이 달라붙어 간신히 타프를 설치할 수 있었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불며 타프를 넘나들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다. 심하게 펄럭이는 타프가 곧 찢겨 날라갈 것만 같다. 강풍에 아랑곳 없이 해는 서녘으로 기울며 황혼을 드리우고 있다. 개머리 언덕에서 탁트인 바다를 향해 눈을 돌렸다. 덕적군도는 남동쪽으로 줄지어 서 있다. 남쪽 백아도와 인근 작은 섬들 그리고 더 먼 남쪽에는 울도가 바다 위에 떠 있다. 선갑도와 각흘도가 사선을 그리며 북동쪽으로 올라와 앉았고 각흘도 앞에는 우뚝 삼형제 바위가 솟아 있다. 아까 배에서 보던 삼형제 바위는 키가 작아졌다. 바다에 물이 차오른 게 분명하다. 눈이 닿은 모든 곳에는 이처럼 섬들이 떠있다. 섬들은 누워있지 않고 불쑥불쑥 솟아 있어 선명하게 눈에 와 찬다. 장관이다. 사진에서 보던 굴업도는 굴업도의 진면목이 아니었다. 당연하다. 사진이 어찌 광할한 풍경을 좁디 좁은 사각의 프레임에 다 담아낼 수 있겠는가. 그렇더라도 저 풍경들을 조각조각 사진에 담고 심었지만 카메라가 없다. 고성능의 카메라를 가져온 사람들이 세 사람이나 있으니 나중에 사진을 얻을 수야 있겠지만 그건 내 눈이 직접 가 닿아 담아낸 것이 아니기에 쉽게 잊혀질 수 있다. 같은 장소를 찍었다 하더라고 내가 찍은 사진만이 오로지 내 눈이 가 닿아 담아낸 것으로 그 사진에라야만 내 감성이 깊숙이 녹았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잊고 이 아름다운 굴업도에 당도한 것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타프 아래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그렇게 심한 바람에도 회장님은 바람을 막아 버너를 켜고 밥을 하고 된장국을 끓였다. 참, 국은 내가 끓였다. 바람을 막을 길이 없어 내 텐트로 버너를 옮겨 된장국을 끓여 내었다. 물론 재료는 영신님이 따로 챙겨온 것이다. 찬 바람을 맞아 가며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 바람을 피해 일행의 텐트 중에서 좀더 넓은 텐트 안으로 들어가 술 한 잔씩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하늘의 별이 보이기는 했지만 주변의 어선 집어등 때문에 밝게 빛나지는 않았다. 나는 못 하는 술 한 잔에 예의 그 취한 상태가 되어 졸음이 쏟아졌다. 하는 수 없이 내 텐트로 돌아와 귀마개를 한 후 취침에 들었다. 귀마개 덕에 바람 소리도 사람들 소리도 모두 잦아들어 곤한 잠에 들 수 있었다. 자다가 눈을 떠보니 새벽 3시쯤 되었다.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그믐달이 떠있다. 그새 환하게 집어등을 켠 어선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고 하늘의 별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믐달은 무수한 별들 아래 양 단에 날카로운 창끝 모양을 하고 미인 눈썹을 달고 있다. 아니 하얀 앞니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으며 입꼬리를 들어올린 오드리의 입술을 닮아 있다. 이 밤, 자다가 일어나 그믐달을 보며 오드리의 입술을 생각하다니....
일찍 잠에 들었던 덕에 일찍 깨어서는 다시 잠들 수 없었다. 텐트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어둔 개머리 언덕을 배회했다. 멀리 인천 앞바다의 불빛이 여기까지 도달한다. 일행들의 텐트가 옹기종기 모여있고 몇몇 텐트에서는 아직도 코고는 소리가 새어나와 정적을 깨고 있다. 엊저녁 맹수처럼 할퀼듯 불어대던 바람은 잦아들었다. 6시쯤 되자 일행들이 하나둘씩 텐트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7시쯤 되자 멀리 덕적도와 문갑도 사이 수평선으로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다. 이런 광경을 배경으로 장풍에 쓰러지는 모습을 연출하려던 세르파 찍사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노인네들의 뜀박질은 중구난방에다가 힘도 없어 펄쩍 뛰어오를 수가 없던 까닭이다. 사진을 찍던 포토세르파의 안색은 실망으로 가득찼다. “노인네들하곤 참....” 그러나 포토 세르파도 역시 노인네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입장을 바꾸어 저기 가서 한번 뜀박질을 해 보시라. 생각처럼 안될 걸!
아침 식사 후 텐트를 걷고 섬산행 인증을 위해서 덕물산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일행들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날아들었다. ‘금일 나래호는 기상으로 인해 통제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한 아줌씨 환호를 지른다. 서정님이다. “야호! 웬 떡이냐.” 그러더니 엉덩이를 흔들흔들 춤까지 춘다. 나머지 아줌씨들 그러니까 회장님, 미숙님, 현남님, 영신님도 모두 덩실거린다. 아저씨들이야말로 모두 하루 더 묵어가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눈초리였다. 나는 사실 굴업도 1박 2일이 아쉬움이 많을 거라 생각하고 일생들이 다 가고 혼자 하루쯤 더 있다 가겠다고 말해보려던 참이었다. 말 안해도 절로 그리 되었으니 나야말로 웬 떡이냐 싶다. 우리는 굴업도 해변으로 가서 다시 텐트를 쳤다. 텐트를 친 후 덕물산으로 섬산행 인증을 하러 갔다. 덕물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목기미 해안을 거쳐가야 하는데 이 해안은 모래가 쌓이고 쌓여 바다를 둘로 갈라 놓은 지형이다. 이 해안의 사구에는 나무 전봇대가 이어져 있는데 지금은 폐 전봇대가 되었다. 전봇대가 있다는 것은 저쪽 해안에도 사람들이 살았었다는 증거지만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 모래는 쌓이고 쌓여 폐전봇대의 키가 작아졌다. 안타깝게도 사구에는 각종 쓰레기들이 떠내려와 볼성 사납게 쌓여있다. 목기미 해변을 걸어가다 보면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꽤 높은 산이 보인다. 섬산행 인증은 덕물산인데 우리는 미숙님을 따라 왼쪽 산으로 향했다. 누군가 거기가 아닌가벼 하며 오른쪽 산으로 향했다. 우리도 따라갔다. 덕물산으로 오르는 산길은 높지는 않으나 꽤 가팔랐다. 정상에 오르자 돌무더니 위에 덕물산 팻말이 있다. 인증 사진을 찍고 내려와 제법 긴 목기미 해변을 걸었다. 오다가 상괭이의 시신을 발견했다. 토종 돌고래인 상괭이가 왜 해변에서 죽어있는지 모르겠다. 껍질의 일부가 벗겨져 나갔고 나머지 껍질을 만져보니 마치 두꺼운 비닐을 만지는 듯 매끌매끌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술판이 벌어졌다. 나는 슬쩍 빠져나와 텐트로 돌아왔다. 바람은 텐트를 강타하며 다시 요란하게 불어왔다.
아침에 일어나자 바람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일행 중 몇 명은 일찍 깨어나 굴업도 해변을 서성거리다 7시 정도쯤 붉디 붉은 일출 장면을 목도했다. 검붉은 해는 떠 다니는 구름에 가렸다가 다시 떠올랐다. 모두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고 있다. 아침은 간단하게 누룽지로 해결했다. 모두들 천천히 텐트를 걷고 짐을 정리했다. 이제 아쉬운 굴업도를 떠나기 위해 선착장으로 가야한다. 배낭들을 메고 몇 발자국 걸어가던 순간 또 문자가 날아들었다. ‘금일 나래호는 오후 기상 악화로 인하여 통제되었습니다.’ 순간 장내는 일거에 조용해진다. 어제는 제법 춤까지 추며 신나하던 아줌씨들도 말이 없다. 어떻게 할 것인지 설왕설래하던 차에 장할머니댁 주인장이 낚시배에 연락하면 덕적도까지 나갈 수 있다고 했다. 낚시배는 밑 부분이 물에 많이 가라 앉아 있기 때문에 덜 위험하다는 거다. 운임은 50만원이라고 했다. 나는 일단 낚시배로 나가는 것에 반대했다. 그 큰 나래호가 위험하여 못 나가는 판에 조그만 낚시배에 목숨을 맡길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다. 대부분의 아줌씨들이 나와 의견을 같이 했다. 더구나 낚시배는 파도에 출렁거릴 게 뻔한데 그 멀미를 어떻게 수습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이번 섬산행을 주선한 세르파님은 꼭 타고 나가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직장 때문이리라. 그러나 나를 포함한 몇몇 아줌씨들은 안돼요 했다. 이런저런 말이 설왕설래하는데 옆에서 듣던 장할머니댁 주인장이 이런다. “나갈 수 있을 때 나가세요. 내일도 나간다는 보장이 없어요.” 이 말이 나오자 일행들은 일시에 조용해진다. 내일도 나간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에 분위기가 싸해진 것이다. 그러더니 좌장이신 석훈님께서 근엄하게 이러신다. “오늘 낚시배라도 타고 나갑시다. 내일도 나간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나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아무도 이의를 제가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그러마했다. 결국 낚시배를 타기로 했다. 낚시배에 전화를 하고 기다리던 중 또 연락이 날아들었다. 낚시배는 덕적도까지만 가는데 덕적도에서 인천으로 갈아 탈 배가 풍랑으로 출항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러니 우리가 가봐야 덕적도다. 흐미... 이 무슨 하느님의 조화로 나의 의중을 이리도 잘 알아주실까나. 그리하여 최종 결론은 우리가 하루 더 이곳 굴업도에서 머물 수밖에 없다는 거다.
간당간당한 밧데리 때문에 이틀 동안 핸드폰을 열지 못하다가 켜보니 아내에게서 전화가 여러차례 들어와 있다. 겁이 덜컹 났다. 아내와 딸은 결코 나에게 전화하는 법이 없다. 내가 전화해야 한다. 아내와 딸에게서 전화가 오면 나는 겁부터 난다.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전화를 하니까. 다른 사람의 핸드폰을 빌려 아내에게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아내는 받자마자 마구 웃어댄다. “살아 있었네? 지금 실종신고하려던 참이었어.....” 그래서 내가 그랬다. “밧데리가 다 돼서 전화를 받지 못했거든...” 그런데 아내는 말을 가로채며 이런다. “됐어 됐어, 살아 있으니.... 지금 바쁘니까 전화 끊어.” 아내는 저런다. 남편이 어디를 갔고 왜 전화를 안 받았는지에 대해서 그리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다. 자기가 무슨 덴마크 왕자 햄릿이라도 되는 냥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setion)만 외치냔 말이다. 내가 설명을 좀 하려는데 전화 끊으란다. 위대하신 마눌님께서 끊으라는데 별 수 없다. 전화 끊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가 굴업도에 들어온 날 아내는 김장을 담가 집에 가지고 왔던 모양이다. 캠핑 장비 챙기느라 집안이 어수선하기도 했을 것이고 남편은 없고 전화해도 안 받고 또 다음 날 전화해도 안 받으니 덜컥 겁이 났으리라. 실종신고 직전 전화를 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쪽팔림을 당해도 크게 당할 뻔 했다. 섬에 가는 사람이 그래 아무한테 말도 없이 가냐? 또 전화기는 폼으로 들고 다니냐? 신고를 받고 조사를 했다면 경찰들이 아마 나를 이렇게 다그쳤을 것이다. 나는 전화 올 곳이 거의 없어서 전화기가 거의 방치 상태에 있곤 한다. 지인들의 카톡이나 문자도 제때 받는 적이 거의 없고 항상 뒷북치기 일쑤다. 게다가 스마트폰은 하도 오래 써서 밧데리가 엄청 빨리 닳아버린다. 이참에 스마트폰을 최신형으로 바꿔볼까 생각중이다.
할 일이 없어진 우리는 땅을 파고 캠프 파이어를 했다. 바람이 세차고 종잡을 수 없는 바람은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니 불 옆에 앉아있던 우리 일행은 너나할 것 없이 연기에 중독될 뻔 했다. 그런 와중에도 장할머니댁에서 감자를 얻어온 회장님은 호일에 싼 감자를 익혀 일행들에게 나누어 준다. 회장님은 왜 언제나 아랫것들 시키지 않고 자기가 손수 다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지금 저렇게 코며 입이며 눈가에 숱 검댕이를 묻히고 고양이 모습을 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리고 감자를 구웠으면 자기가 먼저 먹어봐야지 왜 허구헌날 남들부터 먼저 멕이냐 이런 말이다. 좌우간 어찌되었던 우리 회장님께는 황공무지로소이다. 다시 장할머니댁에서 쌀과 계란과 배추 등을 가져와(물론 돈을 주고 애원하며 산 부식이다) 점심과 저녁을 해 먹었다. 캠프 파이어는 지속되고 술이 돌 즈음 나는 조금 일찍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다음 날 아침은 바람이 많이 잦아들었다. 오늘도 또 문자를 받을까 걱정을 했으나 다행이 문자는 오지 않았다. 텐트를 접고 짐을 모두 정리하여 미숙님의 안내로 물 빠져야 갈 수 있는 토끼섬으로 갔다. 토끼섬 인근 바닷가는 모두 돌덩이로 덮여 있다. 참 가다가 막내 영식씨가 낙지 한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뒤따라 오던 회장님도 어디선가 낙지 한 마리 또 잡았다. 이 놈들은 나중에 산 채로 다리 절단 몸 절단 되면서 두 분 입 속으로 게눈 감추듯 빨려 들어갔다. 몸보시는 바로 이런 것이렸다. 두 마리 낙지들이여, 저 불쌍한 인간들에게 몸보시 하였으니 부디 천당가시라. 천당 갈 생명은 또 있었으니 회장님께서 잡아 온 바닷소라들이다. 한 웅큼 잡아온 소라들은 바로 끓는 물에 투하되어 일행들의 입으로 넘어갔다. 위험한 갯바위들을 넘나들고 절벽을 기어오르며 해안가를 돌아 드디어 선착장에 도착했다. 배 시간이 남아있어 현남씨는 저기 선착장 옆에 떠있는 어선의 어부들에게 소리친다. “여기요, 고기 잡은 거 있어요?” 옆에서 듣고 있으니 참 우습다. 저 아기 목소리가 저기까지 도달할 가능성 영프로이니 현남씨는 죽을 힘을 다해 소리쳐도 소용없다. 옆에서 내가 거들었다. “여보시오 어부님들, 거기 물고기 잡은 거 뭐 있어요. 좀 사게요.” 어부들은 잘 안들리던지 발동기를 끄고 다시 우리를 쳐다본다. 그래서 내가 재차 반복했다. 그랬더니 새우 잡은 게 있는데 잠시 후 선착장에 배를 델테니 그때 오라고 한다. 배가 선착장에 대자 현남씨 달려가 새우를 사온다. 그런데 에게게 그냥 새우젓 담그는 새우다. 현남씨는 어쨌든 그거라도 샀다. 병어 새끼와 쥐치는 덤으로 주었다. 새우는 생으로 먹거나 삶아 먹었고 병어와 쥐치는 그 자리에서 회떠 삽시간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일행들은 껠껠거리며 재미있어 하고, 하늘은 맑고 시간은 멈춘 듯 굴업도에 평화가 흐르는데, 배는 마침내 들어왔다. 3박 4일간의 굴업도 섬살이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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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업도 해변 옆에는 고씨 민박집이 있는데 주인장 고씨가 명언을 말씀하셨다. 명언을 그냥 버릴 수 없었던지 자기 집 벽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읽고 되새김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여기에 적는다. 아래 명언 중에서 내가 써먹고 싶은 건 딱 하나 6번이다. 으하하....
◎ 고씨 명언 ◎
1. 세 번 참으면 호구된다.
2. 지금 공부 안하면 더울 때 더운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데서 일한다.
3. 감사의 표시는 돈으로 하라.
4. 개천에서 용난 사람 만나면 개천으로 빨려 들어간다.
5. 티끌 보아봐야 티끌.
6. 남친과 놀러와서 자고 가고 싶으면 가방 속 세면백을 자연스럽게 보여줘라.
7. 굴업도 즐거운 여행 되세요.
첫댓글 6번 문구는 정말로 명언~ㅋㅋ
60대는 3명
60대가 3명이요?
음...대충 누구인지 알겠네요 ㅋㅋ
구구절절 노심초사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구구절절 고맙습니다. ㅋㅋ
이제나 저제나 .. 기다리던 안춘헌님 후기가 드디어 올라왔네요.. ㅎㅎ 굴업도 바람소리와 좋은 추억 만드는 소리가 시공을 초월해서 여기까지 들리는듯합니다 너무 재미있게 읽었네요 짧은 단편소설 한편을 읽은 느낌입니다 역시 최고의 스토리텔러 이십니다 ㅎㅎ
송광호님을 보면 세상이 사뭇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안사람이 한 미모하면 바깥사람이라도 한 뜨악해야 하는데 부부가 어찌 그리 선남선녀인지. 게다가 댓글을 이리 멋들어지게 쓰시니 이것까지도 사실 좀 못 마땅합니다. ㅋㅋ 그래도 역시 칭찬은 짖던 개도 웃게 한다는데 저 역시 절로 미소가 나네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누구는 (?) 365일 세면백을 가지고 다니던데.. 왜 그런지 이제사 그뜻을 알게 되었네요..ㅎㅎ
일단 웃음부터 ㅋㅋㅋ 그 분이 아마 세상을 떠돌다 굴업도에 가서는 고씨 양반 앉혀놓고 한 수 가르쳐 주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떤 분인지 대단하십니다. ㅎㅎ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굴업도 취소한 사람입니다
걱정 많이 하였습니다
글을 읽고나니 다소 위안이됩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대신 가서 잘 놀다 왔습니다.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다음에는 함께 하셔야죠.
굴업도편 소설한편 읽은듯합니다.
저도 그자리에 있는듯한 생생한 스토리네요 ㅎㅎ
주말 백패킹이어야 참석 가능한 저로서는 함께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사모님께 집떠나있을땐 어디 가신다고 알리고는 다니셔야 걱정안하시죠~~~
아하 주말이어야 가능하신 거네요.
다른 분들도 혹 그런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주최측에 함 건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담부터는 1박 이상일 경우에는 아내에게 간다고 말해야 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