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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유 게시판 스크랩 한국사를 정립한 사람들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54 13.05.19 09: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민족사관을 정립한 사람들


민족사관은 일제가 민족 말살과 국조단군의 부정에 맞서 투쟁을 선포한 민족 인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관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을미사변 후 나인영을 중심으로 한 단군교는 일제가 단군을 부정하는데서 민족의 자존을 선포하기 위한 하나의 민족 정신의 회복운동 이었다.

일제가 단군을 부정하는 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논리 정립을 하였다.
첫째는 단군을 신화이며, 단군에게 모든 기록은 사로가 아니라 사설에 불과하다.
둘째 단군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당시 몽골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이다. 단군을 사실이 아니라 국난을 당할 때 마다 등장 하는 민족주의 현상이다.
셋째 단군은 민족전체의 시조가 이 나라 일부 북한지방의 시조이다.

이상의 논리 가운데 첫째와 둘째논리, 곧 신화이며 민족주의 소산이라는 논리이다.
이는 일제식민사관을 가장 충실히 부연하는 핵심 논리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제의 식민사관의 핵심 주제에 맞서 나인영(나철)은 [단군교 포명서]를 통해 자신의 민족사관을 제시하였고, 이 교시에 따라 민족사관 정립에 전력하였다.

나철은 일제식민사관에서 핵심으로 주장하는 논리인 단군 신화론은 한국사 왜곡으로 핵심으로 보았다.
단군 사실론이야 말로 일제와의 역사전쟁에서 승리하는 첩경이라는 인식에서 민족운동의 지표를 단군 사실론에 중심을 두었던 것이다.

민족사관은 나철의 사후에 한층 발전시킨 사람을 대종교의 2대 종사로 취임한 무원 김교헌이다.
김교헌은 [신단민사][신단실기][배달족역사]을 집필하여 나철이 남긴 민족사관을 한층 대중화하고 발전시키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3대종사의 윤세복은 민족학자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와 같은 사람을 대종교에 귀의시켜 민족사관을 정립하게 한다. 그러나 민족 사관을 제일 먼저 주창한 사람은 단재 신채호(1880-1936)였다. 20대의 단재는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위대한 민족 사학자로 만든 것이다.

신채호를 중심으로 박은식 정인보 외에도 안재홍.이상룡.유근,장도빈.황의돈등이 민족사관을 정립에 헌신한 사상가가 있다.




1. 민족사학의 선구자 단재 신채호.

아! 우리나라를 열으신 이가 단군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단군시대를 우러러 생각할 때 너무 멀고 나득하기 때문에 만신반의 하시를 마치 [구약성서]의 창세시를 읽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아! 단군시대가 과연 너무나 오래되고 불가사의한 시대이겠는가.

단군이 나라를 세운지 2000여년에 왕조가 두 갈래로 갈라졌으니 하나는 동부여요, 하나는 북부여이니 북부여가 곧 고구려이다. 단군이 고구려왕조의 직계조상인 까닭에 고구려가 남긴 글과 역사에 단군에 관한 사실들이 상세하게 실려 있었을 것이다. 아! 그러나 문서와 전고(典故)들이 적의 병화에 모두 타 없어져버려 우리 역사의 첫 장이 이와 같이 텅 비어 버렸다. -신채호의 독사신론-

20대의 신채호는 단군을 알리기를 마치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읽은 것과 같이 반신반이 하다 그 원인이 단군조선이니 멸망한 뒤 북부여와 동부여로 갈라졌는데, 그때 고구려등 북쪽갈래 나라에서 병화로 단군기록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라 했다.

신채호는 [독자신론]에서 우리 민족의 조산이 태백산이 본시 백두산 인데 어느 새 묘향산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하고, 이는 모두 우리 스스로가 저지른 사대주위적 발상의 결과라고 비판하였다.

“살펴 보건데 우리나라 역사가들이 단군이 일어난 곳을 영변의 묘향산이라 하며 국호를 정하고 정치를 베푼 곳을 평양 왕검성이라 하나. 이것은 후대 역사가들이 단지 고기에서 말하는 신인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 왔다. 는 한 구절을 근거로 태백산을 서북일대에서 두루 찾아다니다가 묘향산에 이르러 향나무가 울창한 것을 보고 이것을 억지로 태백산이라 단정하고 장백산의 옛 이름이 태백산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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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단재는 우리역사의 사대주의인 발상의 결과로 우리 역사 전반을 남이 망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손에 의해 망가졌다는 것이며. 우리 한 민족의 강역 또한 제 멋대로 대륙에서 한반도로도 축소 되었다고 비판했다.

"우리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는 조선사를 저작한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더 많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기왕의 조선의 역사가들은 매양 그가 지은 역사를 자신의 목적에 희생시켜 도깨비도 하지 못하는 땅 옮기기 재주를 부렸다.
아사달을 떠나 황해도 구월산에 갖다 놓으므로서 조선의 강역을 압록강 이남에 국한하여 “더 크지 말고 더 작지도 말아라”는 식의 역사를 만들었다.
_신채호의 조선사 총론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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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 역사가 우리 손에 의해 축소되고 스스로 국토를 버리게 된 것은 첫째, 우리의 잃어버린 사서 때문이다. 본시 [신지비사][산한 고기][해동고기][삼국사]등이 있었는데 다없어지고 지금은 단지 [삼국사지]와 [삼국유사]만 남아 있다. 그 원인이 사대주의 때문이다. 조선의 역사 기록을 신지에서 시작되었는데, 신지는 사람이름이 아니라 수두임금인 단군의 자장 높은 벼슬의 이름이다. 역대 신지들이 매년 10월 수두대제 때 노래 한 것을 후세에 이 두문으로 기록해 둔 것이 신지비사 또는 해동비록이다

*고려에 와서 작가 미상의 [삼한고기][해동고기][삼국사]등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가 있었으나 지금에 전하는 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분이다. 그 전하고 전하지 않는 이유는 그 저작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고려의 국시인 사대주의를 밑바탕으로 해서 썼기 때문이다.-신채호의 [조선사]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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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의 이와 같은 고발은 [조선왕조 실록]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있다.
곧 조선 초기 세조 예종 그리고 성종(1455-1494)연간에 세 차례 전국에 수서령을 내린 일이 있다.
이때 수서령이 내린 책들의 제목을 보면「조선비사」「대변설」,「조대기」「통천록」,「지공기」 「표훈선사」「삼성밀기」「도증기」.「지화록」등의 열 책들이 었다. 그런데 예종 1년5월 두 번째 수서령에서는 위의 10책 가운데 [지공기].[표훈천사].[도중기].[지화록]등 다섯책을 들어 그해 연말까지 어김없이 바치라고 명하고, 숨긴자가 있으면 참형에 처한다고 위협을 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상의 고조선비기 다섯 책을 모두 수거 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아울르는 민족주의적인 역사를 발전시킨 것이다.

단재의 민족사관의 정립은 그의 연구 저서에서 잘 나타타있다.
1930년대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연제한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연구초]등에서 단재 역사관을 볼 수 있다.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을..보면
첫째는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둘째 당시 일본사학자들의 조선사 연구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써 성격이 강하게 나타내며, 셋째는 조선의 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내며
넷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실증을 강조하게 되었다.

단재는 민족주의적 이념에서 한국사관을 정리하였는데 단재 신채호가 한국사를 기술한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단군, 부여, 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 하였고,
둘째는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 만주중심의 종래의 학설을 벗어나 중국의 동북지역과 요서지방가지 확대하고 있으며
셋째 한반도내의 존재하였다는 한사군의 위치를 반도 밖에 존재하거나 혹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 했으며,
넷째는 상고시대 조선족과 삼국시대의 백제가 중국의 산동반도에 진출하였다는 것이며,
다섯째는 삼한의 이동설 및 전후 삼한설을 주장하였고,
여섯째 부여와 고구려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한 것이다.


2, 박은식의 한국통사

백암 박 은식(1859-1926)은 .황해도 황주 출생으로 국권을 잃은 후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할 때 박기정이라 이름을 쓰기도 했다. 백암 이라는 호와 함께 태백광노 또는 무치생 이라는 별호를 쓰기도 했다.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고, 그해 11월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만민공동회에서는 문교부장급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1898년 9월 남궁억, 유근, 나수연,등이 황성신문을 창간하자 얼마 후장지연과 함께 주필(논설위원)되었고,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당한 후에는 1900년부터는 경학원 (經學院) 강사와 한성사범학교의 교수로 역임하였다.

1904년 양기탁과 베셀 등에 의해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지냈다.

1906년3월에는 대한자강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가 1906년에는 10월에는 성우학회를 조직하여 기관지 <서우>의 주필이 되어 국민의 계몽할동에 노력 했다.

당시의 박은식의 논설에서는 국권회복의 실려배양을 위한 신교육구국사상.실업구국사상.사회관습개혁사상.애국사상.대동사상등 애국계몽사상을 서류파하고 애국사상을 적극 고취함으로써 한말 애국계몽사상가로 큰 영향을 끼치었다.

박은식은 일제가 1910년8월에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로 병탄한 직후 <황성심문>.<서북학회월보>를 비롯한 모든 잡지를 비롯한 신문등이 폐쇄 할 때 박은식이 저술한 모든 저서들은 일제에 의해 금서(禁書)가 되었고, 박은식 역시 체포당했다.

박은식은 일제의 이러한 무단탄압에 의해여 한국민족의 국혼(國魂)이 들어 있는 역사책들이 모두 압수, 소각됨으로서 국민들과 다음세대들이 한국민족의 역사를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매우 우려 “국체는 비록 망했지만 국혼이 소멸당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국혼인 역사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없다.”고 탄식하였다.

박은식은 1911년 4울 독립운동과 국혼이 담긴 역사서를 쓰기위해 망명을 결행하였다.
박은식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을 밟고 보니 바로 그곳도 우리의 땅이 더라” 라고 술회하였다.
당시 박은 식의 심경은 바로[역사가]에 담겨 져 있다.

“어화 우리청년들아 / 고국산천이 땅이라,
북부여 단군자손 / 2000여년 형국일세.
동명성왕 북래하여 / 고구려를 건설하고
환도고성 찾아보니 / 광개토왕 비문이라.
용천부를 돌아보니 / 발해 태조 사업일세.
우리 동족 금 태조/ 백두산에 터를 닦아
2,500 정병으로 / 호시천하 광장하다.
우리오늘 건너온 일 / 상제명령 아니신가.
아무쪼록 정신 차려 /조상 역사 계승하세.”

박은식은 동지 윤세복과 함께 1년 동안 정력적인 저술활동을 한다.
<동명성왕실기><발해 태조 건국기><몽배 금 태조><명림답부전><천재소문전><대동고사론>등이다.

특히 “꿈속에서 금 태조를 보다”(몽배금태조)에서는 대륙의 땅을 잃어버리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조상들! 그리고 스스로 소 중화라 자처하며 자랑하다가 나라가 망한 것을 통탄하였다.

“무릇 백두산은 대 황조께서 발상하신 땅이요. 북으로 흑룡강이 이르는 광활한 대륙은 모두 우리조상들이 개척하신 땅이다. 어찌하여 자손 된 우리들이 조상의 피와 땀을 이어가지 못하고 압록강 이남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 것으로 만족하는가? 이로써 볼 때 1000년 이래에 우리민족은 조선의 죄인이요. 우리 역사는 타국의 노적이다. 그 조선의 죄인된 것은 반성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동발예의 지국이라 자랑하며 타국의 오예가 된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스스로 소 중화라 하였다.”- 박은식 [몽배금태조]-

박은식은 1912년 상해로 가서 심규식등 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하고 동포들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박달하교를 설립하였고. 1914년 홍콩으로 가서 중국어 잡지 <향강>의 주간이 되어 활동하다가 ,향강>이 패간 되자 다시 상해로 돌아와 <안중근전>을 집필하고 꾸준히 역사집필을 하였다.

1915년 중국인 출판사에 발행된 <한국통사>를 완성한다.
한국통사는 3편 114장으로 구성된 대작으로서 1864년부터 1911년까지 한국근대사를 ①일반근대사. ②일제침략사, ③독립운동사의 3면에서 일제 침략사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체계로 서술한 것이다.

그는 <한국통사>에서 첫째 대의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과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 규탄하고, 둘째 대내적으로 국민들에게 ‘통(痛)을 가르쳐주어 민족적 통분의 격발에 기초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공급하며, 셋째 국혼과 국백(國魄)을 나누어 일제에게 빼앗긴 것은 ’국백‘분이요 ’국혼‘은 남아 있으니 ’국혼‘을 잘 유지, 강화하여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도록 교육하고 넷째 자손만대에 일제이게 침략당한 아픈 역사의 교훈을 세기고 반성을 촉구하려 하였다.

<한국통사>는 일제가 준비해 온 <조선반도사>를 수정하여 <조선사> 37권으로 편찬한 동기를 제공한 셈이다.
박은식은 <한국통사> 결론에서 발해사와 금사를 우리 한국사 속에 집어 넣어려 했고. 나라는 곧 육체요 역사는 혼이라 했다.
발해가 망한 것은 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혼이 살아있는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고 밝혔다.

옛적 발해의 대씨가 대륙의 5000리 강토를 영유하며 300년간 나라를 누렷다.
발해는 무공과 문물을 함께 떨쳐서 해동성국이란 말을 들었는데 나라가 멸망한 뒤 발해사가 후세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무릇 역사가 보존되어 있는 것은 나라의 ‘혼’이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중국의 ‘혼’은 문헌에 의탁하였고 돌궐의 ‘혼’은 종교에 의 탁하였다 중국은 허다한 외침을 받았으나 타국에 동화되지 않았고, 마침내 타족을 동화하여 하나로 할 수 있었다. 선비. 거란. 몽골.과 같은 나라는 바야흐로 그 전성기에는 큰 땅을 정복하여 위엄을 떨쳤지만 무력이 한번 쇠약해지자 국명도 다하게 되는데, 이는 “백”이 강한 나라이다. 대개 국교 와 국학, 국어, 국사는 ‘혼’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 성지. 함선. 기계 등은 ’백‘에 속하는 것이다.

‘혼’이란 것은 ‘백’이 죽고 사는데 따라 죽고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다. 오호라! 한국의“백‘은 이미 죽었으나 ”혼“은 남아 있는 것인가. 없어진 것인가.

박은식의 역사관은 발해사와 금(金)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려 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한곳에 머물려는 반도사관을 벗어나 대륙사관을 민족사관으로 정립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사관과는 확연히 구분한 것이다.

또 한 나라의 영토보다는 민족사에 흐르는 정신사적인 민족혼을 내세움으로써 나라를 잃은 백성들에게 독립의 의지를 일깨우는 민족사상가 이자 역사가로 평가 되고 있다.


3. 계 연수 <환단고기>

1909년 3월 16일 대한자강회의 李沂(이기) 선생은 계연수, 김효운, 이정보 등과 함께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 일제가 말살한 단군 조선 삼한의 역사 회복을 위해 “ 단학회 ”를 조직하였다. 李沂(이기) 선생은 단학회 발기총회를 앞두고 한일합방의 국치에 비분을 참지 못하여 서울의 모 여관에서 단식 중에 7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이기 선생이 단식 끝에 운명하시자 계연수 선생이 이기 선생의 뜻을 이어 받아 2대 단학회 회장이 되었다.

1910년 10월 3일 단학회 제 2대 회장에 취임한 계연수 선생은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천의식을 마치었다.

나라를 빼앗긴 대한제국의 주체성은 상실되고 모든 백성들이 암울한 시대에 모든 백성들은 슬픔에 잠겨있었다. 특히 지식인들은 단군조선의 역사 말살에 울분을 참지 못하였다. 계연수 선생은 나라의 독립은 오로지 민족역사(민족정기)로부터 시작되고 오직 단군사상을 회복하는 것만이 우리민족의 살길임을 직시하고, 일제가 말살한 환인, 환웅, 단군 조선 삼한의 역사를 한 대 묶어 “桓檀古記(환단고기)를 편집했다.

환단고기는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4부로 나누어져있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이자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맥(李陌)이 편찬했는데, 환국(桓國) 신시시대. 고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삼신오제(三神五帝)를 중심으로 한 신시시대와 단군조선의 삼한과 고구려. 발해. 고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환인의 신시부터 전해 내려온《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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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의 가치

첫째, 반도사관에 찌든 현대사학에 올바른 역사 강역을 제시 해주었다.

둘째, 한국12연방에 보이는 수밀이의 놀라움이다, 물론 수밀이는 슈메르 이다.

셋째. 아담과 이브의 신화는 한국에 있었던 것이 아니가 하는 의문의 제기이다 복희와 여와 인데, 여와는 태호 복희의 누이다.(여와는 흙을 빚어 사람의 형태를 만들고 이에 혼을 불어 넣어 7일 만에 사람을 만들었다)

넷째 건원칭제 새로운 명칭들이 많이 소개 되었다는 점이다.
예) 고주몽 성제 1대 동명왕 다물 B.C97-19
태조무 열제 6대 태조왕 강무 서기 53-146
광개토경호태 열제 19대광개토왕 영락 서기391-412
장수홍제호태 열제 20대장수왕 건흥 413-491
-( 환단고기 주해.번역한 임승국 교수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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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단학회 회장 계연수 선생은 곧바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선생 등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일제가 말살한 삼성(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 “ 환단고기 ” 30권을 편찬하였다. 30권의 환단고기는 대부분 일제에 압수 당해 불태워 졌고 몇 권은 독립운동가 안창호 신채호 등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신채호는 장차 우리나라가 멸망하는 것이 기정 사실화 되자 1910년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등과 중국에 망명해 있었다.

1914년 단학회 계연수 회장은 5,6명과 함께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을 참배하고 남만주 관전현 홍석납자로 옮겨가 독립운동단체인 천마대, 서로군정서, 의민사, 벽파대, 기원독립단 등과 연계하여 무장독립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계연수 선생이 편찬한 환단고기는 단군 조선 삼한의 역사를 말살하려던 일본제국의 흉계에 큰 위협 요소가 되었다.

1923년 계연수 선생은 결국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일본인 밀정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나라를 강탈한 일본인들은 계연수 선생을 처형한 뒤 머리와 사지를 절단한 후 머리는 대동강물에 던지고 몸통과 사지는 압록강에 버린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계연수 선생의 서거 이후 단학회는 독립군 천마대(天摩隊)대장 최시흥(崔始興)선생이 단학회를 계승하였으나 이석주 이상룡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다 취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역시 일본 밀정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다시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과 함께 혁혁한 무공을 세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이덕수(李德秀)장군에게 단학회가 이어졌으나 이덕수 선생 역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단학회도 침체되고 환단고기도 유실되었다.

당시 단군교는 대한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단군교는 1900년에 羅鐵(나철)이 창설하였다. 환인, 환웅, 단군을 삼신일체의 하느님으로 받들어 숭배하였다. 일제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 조상신을 숭배하는 민족 종교의 단군교가 창설되자 국민들의 큰 관심 속에 당시 신도 수는 약 2백만 명으로 급속히 확산되어 한 민족의 구심점으로 등장하여,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발판이 되었다. 일본은 급기야 단군교 말살 정책으로 전환되면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저명한 인사들은 피살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게 된다.


4.문일평(1888-1939)

호암 문이평은 평암북도 의주출신으로 1905년 유학를 떠나 일본의 메이지학원에서 춘원 이광수와 같이 공부 하였다.

1908년 귀국하여 평양의 대성의 주의 양실, 서울의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한편 광문회에도 관여 했다. 1912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생활하였다.

중국신문사 대공화보에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홍명희 조소앙, 정인보등과 동거,교학하였고, 박은식, 신채호, 신규식과 박달학원을 세워 후진야성에 힘썼다.

문일평은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로 우리 민족구성에 대하서 단군의 직손이 주류를 이루어 주변의 여러 부족이 지류로 합류한 것이라고 넓게 해석하였고 우리 민족의 원류에 대해서도 단군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신교(神敎)가 바로 그 원류라고 주장하였다.

문일평의 역사 연구는 주로 1930년대에 이우러 졌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정신적 내면적 침략이 갈수록 심화되어 국학연구가 그 밑바탕에서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연구를 통해 언어의 의미를 강조 하였다. 역사적 연구의 사실의 근원적 연구보다는 역사성의 부여에 관심을 두었으며, 역사적 지식의 정리와 의미의 보급에 더 힘을 쏟았다.
그의 논술이 지닌 성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분야의 다양성이다.
그의 역사연구가 지니는 궁극적 목적이 역사지식의 보급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자연. 사적, 예술, 풍속,등 남들이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는 분야를 두루 섭렵한 것은 민족의 장점을 발견하여 이를 민족미래 개척에 활용하고자 함이다.

둘째 논술의 제목자체가 서술성을 지니고 있다.
<한양조정치가 군상>.<사상의 기인.><사(史와시(詩)의 도(都)강화>등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민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제목을 취했다.

셋째, 거의가 단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대미관계 50년사>응 몇 편을 제외하고 단문으로 구성되었다.

넷째, 평의한 문체로 서술했다. 그의 역사적인 큰 장점은 역사적 사실을 거의 소화하여 이를 쉽게 표현했다는 점이다.

다섯째. 지극히 객관적인 논조위에서 민족적 긍지를 고양시켰다.

여섯째 민족사 중에서도 대외관계사, 특히 근세외교사연구에 힘을 썼다. 이처럼 역사는 반성적 측면과 민족혼을 우선 발굴하는 측면에서 이루어 졌다.

문일평의 역사관은 우선 민중우선 실리우선을 했다는 점과 순수성보다는 강한 현실성을 띠고 있다는데 주목한다. 민족사를 반성하고 민족혼을 발굴하는 궁극적 목표로 하면서도 과대 부회 독단을 배제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문일평은 그의[조선역사강좌]에서 민족사적 강역을 한반도와 만주 대륙이라 주장하고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분리 될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옛날 조선은 백두산 남쪽, 압록강 동쪽인 한반도뿐만 아니라 저 만주대륙까지 합하여 칭한 것이기 때문에 압록강은 대동강이나 한강 같은 국내 강 이었다. 그럼으로 조선의 역사의 출발점은 반도 안에서 찾으려함은 옳지 못한 곳이다. 반도와 만주대륙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5. 정인보 와 민족사관

민족사관은 위당 정인보(1892-1950)에 이르러 대성되었다.

신채호와 매우 가까운 친구로서 많은 일화를 남기었고, 또 절친한 친구 최남선이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자 위당 정인보는 모든이 들에게 최남선은 사망했다는 부의를 돌린 일화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어 정인보의 민족사관과 민족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인보의 역장[5천년간조선의 얼] 당시 단재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분을 참지 못해 쓴 글로 당시 [동아일보](1935-1936)에 연제한 글이다.

3.1운동의 함성이 울린 지도 어언 16년이 지나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 동화정책에 허리를 굽혀 굴복하려는 하던 순간이었다. 지식인이 굴복하면 그대로 조선인은 이 지상에서 모두가 일본인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맞이하여 “조선의 얼”을 절규했던 것이다.

“갈수록 민족정신이 흐려져 가고 있는데다가 자기를 너무 모르는 사람들이 적(일제)의 춤에 맞장구를 쳐서 우리들‘마음속영토’마져 나날이 말려들어가는 그런 때였다. 비리비리한 한인(恨人)의 고분을 무엇으로도 헤칠 길이 없었다”

정인보는 [5천년의 조선의 얼]에서 다음과 같은 두 마디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우리에게 5천년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둘째는 우리에게 조선의 얼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곧 조선의 얼이란 5천년의 조선의 역사인 것이다. 그 역사 없이 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민족의 얼은 우리 5언년 역사 속에서 살아 숨어있다는 것이었다. 자고로 우리 선비들은 우리국사를 경시하고 중국의 역사를 존경하여 온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일제 식민사학에 물들어 자화상은 초라하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조선의 얼을 담겨 있어야 할 그릇이 곧 우리의 국사인데, 우리국사의 진실은 어디로 가고 허와 가식만 가득 차 있었다.

이때 조선총독부의 비호를 받은 일제식민사학은 [조선사]라는 책을 매면서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고, 이에 맞서서 싸워야 할 조선인의 조선학 또한 조선사도 결코 조선의 얼을 담지 못하고 있었다. 이른바 실증사학이라는 이름아래 우리의 국사가 도리어 훼손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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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얼을 ?밟는 사학은 일제의 식민사관과 더불어 백운학의 유물사관이다.

백운학은 정인보 와 같이 연희전문 교수로 당시 마르크스 주위에 심취한 경제학 사학자이다.
백운학은 1933년[조선사회경제학](일문)이어 1937년[조선봉건사회경제학](일문)을 출간하였고, 193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으나 광복이 되자 경성대학 교수, 근로인민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뒤 1948년 월북하여 북한정권의 교육상, 과학원장, 최고임민회의 의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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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는 바로 옆에 우리 국사를 훼손한 적을 두고 이 글을 쓰게 되었는데,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깊이 잠들고 있는 ‘얼’ 이 ‘얼’이야 말로 우리민족의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 믿었다.

그러면 민족의 ‘얼’은 과연 어떤 사상에서 비롯된 것인가?
얼의 뿌리가 불교인가 유교인가? 만일 ‘조선의 얼’이 불교나 유교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마음마저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며 정신마저 외국제가 된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마저 우리의 것이 아니라면 굳이 독립해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한국의 불교는 이 나라에 들어와서 우리민족의 혼을 죽여 버렸고, 유교는 사대주의라는 고질병을 안겨주어 우리민족 고유의 ‘얼’을 해친 사상이요, 종교였다.

정인보는 [조선불교의 정신문제]라는 논설에서 “누구나 조선의 고(故)문화를 생각할 때 조선불교의 공적을 잊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불교는 중국불교와 달리 조선의 참다운 정신에서 우러나온 조선의 불교라야 할 것이다“

1930년대 조선불교는 조선의 참다운 정신에서 우러나온 종교가 아니라 일제에 아첨하는 불교로 타락하고 있었다. 유교 또한 그러 하였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참다운 정신 즉 참다운 ‘조선의 얼’은 석가나 공자의 가르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원적으로 국조 단군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단군의 가르침 홍익인간

정인보는 홍익인간이라는 단군의 가르침이 고려시대의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나올 정도라면 그것은 그때 이미 민족의 공통의 가르침 즉 국교로 정착되었었다고 본다고 말한다,
홍익인간은 곧 고려시대에서 갑자기 나온 말이 아니라 반드시 오랜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홍익인간 하라’ 또는 ‘홍익인간이 되어라’는 국조 단군의 가르침은 대대로 부조모계로 전승되어 내려왔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찌[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나[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가 이 말을 지어낼 수 있겠는가? 지금 일제는 홍익인간의 교의가 고려의 항몽기에 지어낸 고려 민족주의 소산이라 왜곡하고 있다. 이 같은 경솔한 해석은 일제식민주의 사학들의 단군말살음모이다.

일제 식민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단군의 교의인 홍익인간은 고려 때 조작된 것이라 왜곡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서기 5세기 초의 광개토대왕비문에 ‘이도흥치’(爾興治)라는 말이 나온다 이 “도로써”아는 말은 노자의 가르침인 도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군의 가르침을 뜻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직 도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일이고 만일 도교였다고 하더라도 중화족과 치열한 투쟁기이게 과연 도교를 국교로 삼겠는가? 그러므로 단군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고구려가 살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단군교의는 도라는 보통명사로 표시되고 태학이라도 표현 되었는데, 단군의 가르침인 홍익인간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인보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예로 들고 있다.

첫째로 최치원(875-?) 의 난낭비서을 들고 있다.

“우리나라에 본시 현묘한 도가 있었으니 이름 하여 풍류라 하였다. 이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선교(仙敎)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유불선)를 포함하려 중생을 교화하였다. 그리하여 그들(화랑)이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가서는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같고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이 말없는 교훈을 실천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 그대로이며 악한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만 하라는 것은 석가의 가르침 그대로 이다”__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__

둘째로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를 들고 있다.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두 젊은이가 스님을 찾았다.
스님에게 평생에 경계가 될만한 말씀을 해주십시오“라고 졸랐다. 이에 원광법사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불교에는 보살계십계가 있으나 너희에게 맞지 않고 비금 세속에는 오계가 있다.
첫째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일이오. 둘째는 효로 부모를 섬기는 일이오. 셋째는 신의로 벗을 사귀는 일이오. 넷째는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일이오. 다섯째는 함부로 생물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니 너희들은 이일을 실행하는데 소홀히 하지 말라”__ 삼국유사 4의해 5원광서학_

구당서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고구려의 습속은 서적을 매우 좋아하며 문지기. 말먹이와 같은 미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거리마다 경당이라는 큰집을 지어놓고 자제들이 혼인할 때까지 밤낮으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주서(周書) 이성이전 백제 조에는“ 백제의 무기로는 활. 칼. 창이 있다. 그들의 습속은 기사를 숭상하고 아울러 경전과 사서(史書)을 애독하니 뛰어난 사람은 제법문장을 엮을 줄 안다. 도한 음양오행도 이해하였다”

이 같은 삼국에 관한 중국 측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단군의 “현묘지도”와 “세속오계”는 분명 삼국시대에 새로나 온 가르침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존재해 온 고조선 고유의 교의임을 틀림없다,

이것을 고려시대에 처음 나타난 애국사상으로 보는 것은 단군의 교의 홍익인간을 왜곡 한 것이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중 넷째 덕목에 입전무퇴“다 들어 있는데 이는 불교에도 유교에도 없는 우리나라의 고유덕목이라 할 수 있다. 임전무퇴의 가르침은 “모름지기 문약하지 말고 강맹 분발 하라 그것이 홍익의 실(實)을 거주는 것이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임전무퇴 정신을 고조선의인들의 기풍인 것이다.

삼신사상 과 제천의식

정인보는 고조선을 국명으로 보기보다는 강역의 명으로 보았다.
즉 고조선 안에 많은 소국들이 있었고 한(韓)이라는 군주가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분립이 되었으나 문화적으로는 하나의 공통체 이었다. 곧 여러 소국이 하나로 얽어준 공통의 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제천행사라는 것이다.

부여는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는 무천등 모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행사인데 이것은 모두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온 유습이었다. 그래서 이승휴가 [제왕운기]에서 ‘신라 고구려, 옥저, 예 ,맥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말한 것이다.

제천행사는 천산에서 복을 비는 일종의 기복행사이며, 동시에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는 보본의 행사이다. 이것은 우리 고유의 문화로 중국에서 들어 온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의 하나가 우리의 천신 신앙이 삼신신앙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천신신앙과는 다르다. 중국의 천신신앙은 교천(郊天)이라 오직 한분이신 상제를 모신다.

“조선의 제천은 중국의 교천과 달라서 시조단군을 하나님과 일체라고 생각하여 환인. 환웅. 단군왕검을 다같이 천왕 또는 천신으로 모셨다. 그러므로 단군 이후에 여러 나라에서 거행된 제천행사가 내외문헌에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에서는 한인, 한웅,과 함께 단군까지도 아울러 모시는 것이며, 천신이라 일컫는 말 중에는 단군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제천의 유적은 도처에 있다. 유적이 있다고 해서 모두 백산으로 볼 수 없다. 백산의 이름은 두산(머리산). 관악 국사봉 천신산(대마도) 수리산(오키나와)등 그 이름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 성산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동북삼성, 남으로는 일본 열도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정인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계우리 조상들이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로 남하하여 이곳저곳에 퍼져 살게 되었는데, 이주한 초기에는 그 전부터 전해 받은 삼신신앙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정착하는 곳마다 반드시 산에 제천단을 설치하고 거기에다 옛 이름을 붙였으며 온갖 유속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니 가는 곳마다 제천단 이오, 이르는 곳마다 백산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굳고 변함이 없는 삼신신앙을 입증하여 주는 것이다.”

소도와 소도정신

소도는 우리 민속에 ‘솟대라는 말로 전해지고 있다.
솟대는 재료에 따라 나무. 돌무더기. 선돌 그리고 고인돌등 여러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이 소도가 우리 민족문화의 원류라는 사실에 주목한 학자는 신채호 와 정인보 였다.
신채호는 ‘수두’라고 해석 했고, 정인보는 ‘수리두레’로 해석하였다.
정인보는 소도는 제천의식을 행하는 신성한곳. 곧 신역이라는 것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 에서는 각각 한사람씩 세워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이라 한다.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긴다. 다른 곳에서 그 지역(소도)으로 도망 온 사람은 누구든지 돌려보내지 아니하므로 도적질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세운 뜻은 부도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점이 다르다”

정인보는 삼국지위지동인전의 소도를 색다르게 해석하였는데, ‘소도’의 소는 우리말로 ‘수리’라는 것인데 ‘수리’란 신산(神山)이라는 뜻이다. 소도의 ‘도’는 우리말로 ‘두레’다. ‘두레는 사
라는 뜻으로 소도라는 말은 결국‘수리두레’이다.

‘수리두레’란 신산의 제단이라는 뜻이다. 다시 설명하면 수리는 천신제를 지매는 성산. 곧 백산 또는 백악이며, 백악에는 반드시 신단수가 있고 제단이 있다. 또 하나 신당이 있다. 이처럼 수리산 에는 반드시 신단수, 제단 산신당이 있는데 이 수리산을 지키는 마을이 있기 마련이다.

이 마을을 별음이라 하여 신성시 했다.
이 별읍은 삼신을 모시고 천제를 지내는 특별한 신의 마을인 신읍(神邑)이었고 소도였다. 그리고 신읍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특별시하여 소도인 또는 신민이라 하였다. 소도인 들은 일반인들과는 달리 특별한 기질과 기풍이 단군의 가르침인 홍익인가의 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바로 이것이 우리민족의 ‘얼’의 원천이라고 해석했다.

1930년대 정인보는 이든바 조선학을 진정한 국학이 아니라 일본학에 지나지 않는 다고 비판을 했다. 그의 비판의 글을 보면“ 오호라 수 백년간 조선의 역사는 실로 ‘없는 것을 사실처럼 얽어서 만든’허와‘있는 사실을 거짓이라 꾸민’ 가로서 연출한 자취라 할 것이다.

조선왕조 수 백년 간의 학문은 오직 유학이 하나 있을 뿐이요, 그 중에도 주자학을 신봉하였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영국이나 프랑스학자들이 주장하는 언설. 즉, 그들의 말을 ”말씀“으로 알고 그대로 옮기는데 급급하게 되었다.

영국의 모 학자, 프랑스의 모 대가, 독일의 모 박사, 러시아의 모 동무말씀(언설)이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더 이상 따질 것이 없다. 우리의 마음이야 어찌되었건 저들의 “말씀”이 세계적인 대 학문이니 맹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심은 죽고 남들의 타설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위의 글에서 정인보는 국학이 갖는 두 가지 결함을 지적하고 있다. 곧 하나는 조선유학의 고질인 사대주의요, 다음 하나는 개화기 이후 서학을 맹종하는 또 하나의 식민주의 조선학의 추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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