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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휴 선생과 삼척
김경식
1)삼척기행의 의미
세상살이 고단하고, 삶의 진실성이 흔들릴 때는 기행을 떠나보라.
여행을 통해 욕망과 욕심이 조금이라도 사라진다면, 일상의 삶은
삶의 성찰로 이어지는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연초록의 사월과 오월이 떠나가면, 유월부터는 짙은 녹음으로 숲속을 볼 수 없을 지경이 된다. 그런데 금년은 잠시 봄인가 했더니 이내 여름이다. 봄에도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영하의 날씨가 몇 날 계속되기도 했다. 이상기온이라 믿으며 봄을 기다렸다. 기다렸던 봄은 왔다가 서둘러 떠나갔다. 봄이 왔었으나 봄은 아니었다. 봄이었던가 했는데 어느새 초여름이다.
그런데 때 아닌 북풍이 불고 민족적인 위기감이 고조되더니 외세의 바람이 한반도로 유입되려 한다. 잠시의 바람으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피바람 불던 저 6,25 전쟁의 참상이 비극의 영상이 되어 스멀거리며 다가서는 분위기는 사뭇 비장한 마음을 간직하게 만든다.
삼척시 전경( 죽서루에서)
우리 민족은 많은 고난을 당하며 오늘을 살고 있다.
이민족에 침략과 수탈을 당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이미 사라진 민족처럼 망하지 않고, 지금도 강대국 속에서 몸을 도사리며 세계의 주역이 될 날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고난을 당해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시절에도 우리 조상들은 희망을 준비했다. 그리고 잘 나가던 옛 시절을 생각하며 역사서를 읽었다.
그런데 이런 역사책은 민족이 고난을 당하던 시대에 주로 쓰여 졌다.
우리는 역사를 잊으며 살아 왔는지 모른다. 조선 이전의 역사를 이야기 하면 그 신빙성에 의문을 가지며,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답답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단절된 오늘의 역사교육으로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직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비록 가난하게 살았어도 역사와 문학을 중시했다.
이것이 사람살이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제와 처세의 책들이 범람하고 역사와 문학은 퇴보를 하고 있다.
우리글과 역사의 퇴보는 민족의 운명을 암담하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동배바다
몽고가 피바람을 회오리바람으로 휘몰아 가며 국토를 짓밟던 저 13세기에 우리민족이 생존하기 위한 전략으로 역사서를 쓴 사람이 있다. 동안거사 이승휴 선생이다. 이승휴 선생의 삶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그래서 숭고하다.
당시 몽고의 침략으로 고려는 수난의 시대를 격고 있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은 흔들리면서 자신들의 지위에 매달려 있었다. 내우외환이 극에 달했다. <제왕운기>는 이런 상황에서 민족이 걸어왔던 사실을 기록한 역사책이다. 삼척의 두타산에서 개경과 강화도를 바라보면서 때로 전 국토를 가슴에 담으려 했던 그는 붓에 힘을 주고 밤을 낮 삼아 한시로 역사를 썼다.
동해바다가 넘실거리는 바닷가 마을 삼척은 이승휴 선생으로 인해 역사의 고장으로 조명되고, 죽서루의 시문들은 문학의향기가 은은하다.
삼척을 기행지로 삼은 이유이다.
제왕운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함께 고려의 3대 역사책이다.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상권은 중국 역사, 하권은 단군 이후 충렬왕 때까지의 역사적인 사실을 2,160구의 한시(漢詩)로 쓰여 졌다. 우리가 중국과 다른 단일 민족임을 역설했다. 고구려와 발해가 우리 민족임을 역설했다. 제왕운기를 연구하면 사악한 중국의 동북공정의 이중성을 반박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의 저서로는 내전록(內典錄),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이 있는데 동안거사집에는 많은 시들도 수록되어 있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던 것이다. 제왕운기의 고구려편 첫머리 한 구절을 소개하면서 삼척 기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麗祖姓高諡東明 (여조성고시동명)
善射故以朱蒙名 (선사고이주몽명)
“고구려 시조의 성은 고씨요,시호는 동명이네.
활을 잘 쏘아 이름을 주몽이라 불렀지.”
태백산맥 너머에 있는 삼척은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강릉과 속초는 관광지로 익숙하지만 강원도의 남쪽 끝 삼척은 아직은 일반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곳이다.
삼척 가는 길에 만난 동해바다
2) 삼척의 역사와 지리
역사적으로 삼척은 마한의 땅이었으며, 실직국이라 불렀다.
서기 468년 삼척지역은 고구려 영토였으며,505년에는 신라가 삼척을 영입하여 <실직주>라 했다.
658년에는 삼척을 <북진>이라 했으며, 삼척이란 이름이 처음 불려 지게 된 시대는 통일신라(경덕왕 16년) 때다.
고려 때 삼척의 이름은 <척주>였지만 조선이 개국된 후에는 <삼척도호부>가 된다.
삼척군이 된 것은 1895년이다. 삼척읍은 1985년 시로 승격된다. 그러나 삼척시는 1995년에 삼척군과 합하여 통합 삼척시로 거듭나서 오늘에 이른다.
삼척시(三陟市)는 강원도 남동부에 있는 2읍 6면 4동으로 이루어진 인구 7만의 아름다운 고장이다.
삼척시의 남쪽은 경북 울진군과 봉화군에 인접하며, 북쪽은 동해시, 서쪽은 정선군, 태백시, 동쪽은 동해가 일렁인다. 동해바다를 따라 남북간의 거리가 59.5 km나 된다.
삼척 앞바다
삼척에는 4개의 큰 산이 어깨를 겨루며 앉아 있다. 청옥산(1,404m),두타산(1,353m), 중봉산(1,284m), 백병산(1,259m)등이다. 이들은 태백산맥의 분수령에 해당하며 남북으로 솟아 삼척을 굽어본다.
1,000m 이상의 고위평탄면이 서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어 동해 가까이에 해안평야를 형성한다.
하천은 태백산맥 서쪽에는 남한강의 상류인 골지천이 북쪽으로 흘러간다. 동쪽으로는 짧은 급류가 흘러내리며, 오십천, 가곡천 , 마읍천은 맑고 푸른 물로 흘러 동해로 스며든다.
석회암층으로 형성된 카르스트지형에는 석회굴이 발달되었다. 다른 동해안처럼 삼척시의 58.4km의 해안선은 극히 단조롭다.
삼척 연안은 수심이 깊고, 계절에 따라 한류와 난류가 교류하여 어족이 풍부하다.
태백산맥이 겨울의 북서풍을 막아주고, 푄현상 때문에 같은 위도상의 서해안에 비해 1월 평균기온이 3.1℃나 높다. 특히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기행은 이렇듯 답사지의 인문지리와 국토지리를 확인하고 떠나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제대로 볼 수 없다면, 풍경속에서 역사성과 문학성을 찾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3) 삼척과 동해바다의 문학작품을 찾아서
우리에게 동해바다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물론 서해가 있지만 깊고, 넓고, 맑음에 있어
동해에 비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청년시절에 삶이 고단하고 절망으로 희망으로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나는 동해바다를 그리워했다. 동해바다를 찾아가면
용기가 나고 힘이 솟았다.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과 망망대해는 사람살이의 치졸하고 옹졸함을 지워주었다. 욕심과 욕망도 순식간에 동해바다는 삼켜주었다.
오히려 역사성과 사람살이의 진정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 당시 흥얼거리며 부르던 노래가 있다.
김민기 시에 송창식이 부른 노래 <내 나라 내 겨레>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피맺힌 투쟁의 흐름 속에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앞길에서 환히 비추이나
찬란한 선조의 문화 속에 고요히 기다려 온 우리 민족 앞에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 김민기 시, <내 나라 내 겨레>
송창식이 부르는 이 노래는 나의 머리로 들어와 가슴을 타고 온몸에 전율을 일으키곤 했다.
나는 아직도 동해바다를 보면 이 노랫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다.
노래는 추억을 기억하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 노래를 들으면 우리 조국이
더욱 소중해 진다.
수난의 역사속에서도 살아남았던 우리 민족은 찬란한 문화를 오롯이 남겨 두었다.
고귀하고 순결한 사람들이 살다가 떠나간 우리 국토에는 피와 땀과 눈물이 담겨져 있다.
동해에서는 매일 태양이 떠오르고, 우리의 앞길을 환히 비추고 있지 않은가.
숨죽이던 숨소리가 커지고 맥박이 힘차게 뛰며 웅비하고 있는 이때
때로 먹구름이 앞길을 막으려 한다.
그러나 동해에 떠오른 태양은 우리의 앞길을 환히 비추게 될 것이다.
내가 동해바다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유이다.
삼척과 동해를 선양한 조선의 시인은 송강 정철이다.
그는 ‘바다 끝은 하늘인데 하늘 끝은 어디인가“라는 철학적인 물음으로
동해의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보았을 동해를 나는 휴게소에 차를 주차하고 바라본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워 있었더니
관동 팔백리에 방면을 맡기시니
아아, 성은이야말로 갈수록 끝이 없구나.
--정철의 관동별곡 중에서
조선의 유명한 시인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이 쓴 '관동별곡(關東別曲)'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관동팔백리는 강원도의 최북단 고성에서부터 최남단 삼척까지이다.
관동별곡을 읽어보면 송강 정철은 한양에서 왕에게 인사를 한 후에 지금의 남양주와 여주를 거쳐 원주에 닿는다.
원주에는 당시 강원도 관찰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감영 안이 무사하고 시절이 삼월인 제"
원주에서 내금강을 통해 금강산에 입산한 후에, 만폭동, 진헐대 등 금강산 절경을 두루 관람한다. 그는 외금강을 걸어 나와 강원도의 동해안으로 기행처를 선택한다. 고성 삼일포와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를 거쳐 삼척 죽서루에 오른다.
관동별곡 이후에 아마도 금강산과 관동팔경의 탐방은 선비들의 답사지였다.
우리의 국토를 직접 걸으며 속 좁은 기운을 버리고 호연지기를 키우려 했던 옛 사람들의
정서를 내가 높이 사는 이유다.
송강 정철은 자신의 관할 구역을 여행하면서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여행도 하면서 순시도 하는 일석이조의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낭만적이며 호탕한
성격 때문이었다. 걸어서 관동팔경을 답사하는 것은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아마도 한 달 이상 걸렸을 것이다.
현재의 시간개념으로는 도무지 가늠할 길 없겠지만 당시의 여행이야 말로 진짜 기행이라 여겨진다.
삼척 동해바다가에 세워진 임해정
동해바다에 서면 시 한편이 떠오른다.
신동엽 시인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이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시인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시인의 시집 ‘금강’에 수록되었던 이 시가 동해바다에 오면 생각난다.
송강 정철 처럼 동해바다가 하늘과 닿아 있기 때문인가.
세상살이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오해하고 비판하며 가슴 조였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부질없는 생각이 들 때에 이 시는 가슴을 흔들곤 했다. 나에게도 ‘먹구름’과 ‘쇠 항아리’는 언제나 존재했다.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리라.
동해바다를 보고 거닐면 맑은 하늘과 자유와 평화의 기상이 가슴을 흔들며 흐른다.
아직도 우리 민족에게는 전쟁의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
고단한 민중들의 삶에 대한 신동엽 시인의 슬픔과 관심을 표현한 이 시는.
짧은 시행과 잦은 쉼표로 시상을 전개하며 삶의 바른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먹구름'과 '쇠 항아리'는 자신의 실천적인 삶을 통해 제거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이 시는
자유와 평화의 강렬한 의미를 담고 있다.
남북 분단하에서 민족사적 과제는 통일이다. 냉전의 대결구도에서 희생자는 힘없는 민중이기 때문이다.
'먹구름을 닦고 쇠 항아리를 찢'는 실천적인 행위가 있어야 하는 이유다. 평화공존을 위해 대결구도를 종식하고, 인내와 타협으로 자유의 푸른 바람을 북녘에도 불게 해야 한다.
이승휴(李承休1224~1300])는 고려시대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주로 강원도 삼척에서 여생을 보낸 사람이다. 고려의 대문장가였던 그는, 5언시와 8언시로 제왕운기라는 역사책을 저술한다.
'제왕운기'는 몽고 침략시기였던 13세기의 중국사를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정리한 대 서사시이다. 더구나 이승휴는 단군을 시조로 한민족 역사의 정통성을 정립한 학자이며 문인이다. 그는 중국 민족과 우리 민족이 확연히 다른 독립국가임을 천명했다. 잊혀 질 뻔 했던 발해를 우리 민족의 역사에 편입시켰다. 결국 그의 역사의식은 삼국시대 이전 우리가 간직했던 잃었던 땅을 찾아야 한다는 회복의지를 제시한다. 작금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제왕운기는 우리에게 희망의 길을 예비하게 될 것이다.
역사책을 시로 쓴 것은 그의 탁월한 문학적인 성과다.
옛 사람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국토를 답사하면서 문학과 역사책을 읽었다.
몽고침략시기에 그가 한시로 역사책을 쓰면서 살았던 장소에서 나는 민족문학과 역사의 소중함을 깨닫고 돌아왔다.
해가(海歌)로 불리는 수로부인을 위한 노래가 불렸던 장소를 가노라면, 삼척이
바닷가 마을임을 알게 된다.
수로부인공원 (해가사터)
동해시에서 삼척 시내로 가는 길은 7번 국도를 타야 한다. 삼척 시내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으로 군부대 벽이 길게 이어져 있다. 문화방송 삼척지사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약 3km를 가면 수로공원이다.
수로부인공원은 해가사터인 임해정은 삼국유사 <수로부인전>에서 있는 “해가”라는 설화를 토대로 복원되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삼척시 증산동 30-23번지 증산해수욕장 옆이다.
위치가 확실하게 <해가서터> 인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설화는 역사와 다르기 때문이다.
동해가 넘실거리며 옛 이야기 많은 증산마을은 집을 짓고 살고 싶은 마을이다.
동해의 푸른 바다를 모두 담을 수 있을 정도의 전망 좋은 정자는 <임해정>이다. 이곳에서 동해를 바라보면 추암 촛대바위도 선명하게 관람할 수 있다.
사랑의 여의주라는 “드래곤볼”을 돌리다 보면, 이곳이 연인들의 사랑과 소망을 기원하는 장소임을 알게 된다.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약인부녀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남의 아내 앗은 죄 그 얼마나 큰가.
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憲) 네 만약 어기고 바치지 않으면
입망포략번지끽(入網捕掠燔之喫)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
-- 해가(海歌), 삼국유사
해가
어린 시절에 냇가에서 모래를 두드리며 불렀던 이 노래는 해가(海歌)였다. 배경 설화는 아득하다.〈삼국유사〉 기이편 ‘수로부인조’에 이 가사의 유래가 실려 전하기 때문이다.
신라 성덕왕때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던 길에 자신의 아내인 수로부인이 바다속으로 끌려간다. 순정공은 주변의 백성을 모아 해가(海歌)를 지어 막대기로 땅을 치면서 노래를 부른다. 얼마 후에 수로부인은 바다에서 구출된다. 전설같은 이 노랫말을 흥얼거리면, 역사의 숨결이 동해바다와 함께 출렁거림을 느끼게 된다. 이곳에서 촛대바위를 바라보면, 푸르른 동해 바다와 함께 자연이 만든 조화의 극치에 탄성이 나온다.
문학적인 이야기는 결코 죽지 않는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책을 통해서 전달되어 수천년을 이어진다. 해가(海歌)를 탄생 시킨 이 장소의 의미는 그래서 대단하다.
4) 이승휴의 삶과 제왕운기
이승휴(李承休,1224~1300) 경북 성주출신이다. 그러나 그는 강원도 삼척 두타산에 은거하며 제왕운기를 저술한 고려시대의 문신이다. 어려서부터 그는 외가 마을 삼척에서 성장한다. 현재 그의 선대에 관한 기록은 없는 상태이고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문헌이 전할 뿐이다. 9세부터 독서를 시작하여 유학자 신서(申諝)에게 좌전과 주역을 배웠다.
14세에 부친이 사망하자 종조모인 복원군부인 원씨가 양육한다. 이 무렵 고려의 조정은 바람앞에 등불의 신세였다. 몽고 침략으로 개경에서 강화도로 도읍지를 옮기며 간신히 고려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때다. 그러나 강화도에서는 학자들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9개의 사학에서 학생들이 공부했다. 일명 ‘9재’라고 한다. 이승휴는 9재중 하나인 낙성재 도회소에서 수업하면서 인맥을 형성한다. 특히 최자와의 인연은 운명적이었다. 최자는 이승휴를 과거 시험에 합격시킨 인물이다. 최자는 당시 이규보에 이어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다.
이승휴가 과거시험에 합격한 해는 1252년 그의 나이 28세 때다. 최자가 주관한 과거시험이었다. 이때 이승휴와 함께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최수황과 박항이다. 고려시대 과거시험을 조선시대와 다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과거에 합격시킨 인물에 대해 절대 복종하면서 섬기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하생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같이 합격한 이들과는 형제처럼 지내며 친밀한 유대를 형성한다.
이승휴 선생 연표
이승휴는 과거에 급제하자 삼척에 살고 있는 어머니가 한 없이 그리웠다.
삼척을 향한 그리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1252년(고종39) 문과에 급제한 이승휴는 다음 해에 삼척현에 홀로 살고 있던 홀어머니께 인사하러 길을 떠난다. 그러나 몽고의 침략으로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힌다. 구동(龜洞)에서 어머니를 모시면서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였다.
1254년(고종41년)에는 몽고의 제5차 침입이 있었다. 삼척에 내려와 있던 이승휴는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힌 것을 알고 삼척 요전산성에서 몽고군과 항전한다. 몽고군이 퇴각한 후에 강화도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자신을 주도적으로 도와 주웠던 최자의 죽음으로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삼척 두타산 구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부양한다. 몇 명의 노비들과 함께 자가 경영방식으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한다. 그가 훗날 간장사에 자신의 토지 8결을 기부한다. 1결이 대략 4500평이니, 대략 3만평의 대토지였다.
1263년(원종4년) 그의 나이 40세에 강화도로 돌아간다. 강원도 안집사로 부임한 병부시랑
이심이 추천을 하였기 때문이다. 강화도에서 그는 이장용, 유경, 최윤개, 유천우, 허공, 박항 최수황에게 구관시를 지어 보낸다. 구관시는 관리가 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 보내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친구나 자신의 후원자에게 구관시를 써 보내곤 했다. 결국 그는 이장용과 유경의 천거로 경흥도호부판괌겸장서기라는 직위를 얻는다. 경흥은 오늘날 강릉이다.
1273년 원나라에서는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한 사실을 고려에 알려온다.
이승휴는 서장관에 발탁된다. 그는 원나라에 가서 문장으로 원세조와 신하들을 감동시킨다.
1274년은 원종이 사망한다. 원종의 죽음을 원나라에 알리는 책무를 가지고 그는 다시 원나라로 향한다. 그는 원나라에 머물던 세자가 호복을 입고 장례를 치를 것을 염려하여 고려식으로 할 것을 건의한다. 이 세자가 훗날 충렬왕이다. 충렬왕은 몽고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있어 모든 풍속을 몽고식으로 하려했다.
양광충청도안렴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근무할 때, 뇌물을 받은 관리 7명을 탄핵하고 가산을 몰수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동주부사로 좌천된다.
동주는 철원이다. 이를 비탄하며 그는 자신의 호를 짓는다. 동안거사이다. 자신의 삶이 평탄하지 않을 것이란 징후를 느끼고 지은 이 호는 그대로 적중한다.
삼척 죽서루 내부
1280년(충렬왕 6년) 감찰사의 관원과 함께 국왕의 실정과 측근 인물들을 비판하는 글을 10개조로 작성하여 상소한다. 이승휴는 파직 당한다.
그는 삼척의 두타산 구동으로 향한다. 유년의 추억과 어머니의 그리움이 남아 있던 정신적인 고향 삼척은 그를 품어주었다. 작은 집을 지어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 현판을 걸었다. 이곳에서 그는 고려 정치에 관심을 버리고 안빈낙도의 삶을 선택한다. 독서를 하면서 몽고침략으로 상처받은 국토와 고려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리 역사를 바로 잡고 민족의 정기를 세우기 위해 붓을 들었다. 드디어 제왕운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1289년 보광정기를 짓는다. 정치적인 풍랑에 휩싸여 휘돌아다니다가 삼척의 두타산에 은거하면서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던 모습을 보여준다.
1290년에는 빈왕록을 편집하는데 이는 그가 서장관으로 원나라를 다녀온 기행문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신의 기행문이 될 것이다.
1294년 안빈낙도하는 가운데 그는 불심이 더욱 깊어져서 자신이 살고 있던 용안당을 간장사로 고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이곳에 기부한다.
1300년(충렬왕 26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 77세였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서사시 형태로 서술되었다. 고려시대 이후 한말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우리 민족사의 대중화에 기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제왕운기'는 민족 대서사시다. 이규보의 '동명성왕'의 정통을 가지고 있으며, 조선시대 '용비어천가'의 창작에 지대한 영향을 준 문학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이다.
동안거사 이승휴 유허지에 세워진 사당
이승휴는 신진사족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개혁을 주장하고 무신정권에 반대했다. 왕권 강화는 찬성했다. 그러나 충렬왕의 측근정치에 반대하였으며 부패하고 무능한 현실 정치와 타협하기를 거부하였다. 그의 정치활동은 직언과 파직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승휴는 고려 후기에 활동한 역사의식을 가진 문인으로 조명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개국에 대한 설화가 실려 있는 ‘제왕운기’를 썼기 때문이다. 더욱 대단한 것은 제왕운기가 시로 쓰여 진 <민족대서사시> 란 점이다. 국문학에서도 제왕운기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이유이다.
이승휴는 최씨무인정권의 시기였던 1224년에서부터 원나라의 간섭기였던 1300년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76년의 삶 중에서 그는 우리의 민족성 회복을 위해 말년의 대부분을 보냈다. 고려말 몽고의 끊임없는 침략과 간섭 속에서도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시련견디며 와신상담으로 제왕운기를 저술한다.
당대 최고의 문인인 최자(崔滋)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극하지만 최자가 세상을 떠나고 몽고의 침입과 가난 등으로 시련의 세월을 인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몽고의 침략으로 국토가 수난을 당하는 속에서 일반 민중이 겪어야 했던 고초를 맛보며 저술 활동을 할 동에도 전념할 수 있었다.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며, 자는 휴휴이다.
앞에서도 서술하였지만 고려 충렬왕 때 왕의 실정을 비판하고 바른 소리를 하다가 파직되었다. 이 파직은 민족을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것이다.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두타산 천은사 주변은 이승휴의 삶터이다. 파직당하고 그가 찾아든 이곳에서 몽고침략으로 고난 받는 자신의 조국 고려를 위해 붓을 들었다.
제왕운기를 쓴 천은사를 답사해야 할 이유이다.
이승휴 유허지
5)천은사에서
천은사 가는 길은 삼척에서 태백 방향으로 이어진 38번 국도를 타고 간다. 미로 사둔리에서 오른쪽으로 진입하여 5.5km정도 산마을들을 스치고 들어가면 천은사 입구에 닿는다.
천은사의 행정구역 주소는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785번지다.
신라 흥덕왕 4년(829)에 백련대(白蓮臺)로 창건되었다.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가 간장암(看藏庵)으로 중건한다.
우리민족의 대서사시 ‘제왕운기’ 보물 제 418호 제왕운기가 탄생한 장소 천은사는 소박한 절이다. 고려말 이승휴 당시에는 이곳에서 대장경을 다 읽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는 ‘간장암’으로 불렀다. 천은사는 서산대사와도 인연을 맺었다. 그는 절을 중건하고 서남쪽에 보이는 산 빛이 검푸르다 하여 ‘흑악사’로 불렀기 때문이다.
1899년 이성계 4대조의 묘인 목조의 능을 미로면 활거리에 조성한다. 천은사는 이 능의 중심사찰로 삼는다. ‘하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지금의 ‘천은사’라 불리게 된다.
이승휴 선생 기념비
6.25 한국전쟁 때 완전 폐허가 되었지만 1983년 문일봉 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천은사의 계곡에서 나는 그의 시 구름을 읽는다.
一片纔從泥上生(일편재종니상생)
東西南北已縱橫(동서남북이종횡)
謂爲霖雨蘇群枯(위위림우소군고)
空掩中天日月明(공엄중천일월명)
한 조각 구름이 땅에서 피어오르더니
사방으로 피어 올라 하늘로 퍼지네
비가 되어 식물들을 살리나 했더니
오히려 하늘의 해와 달을 가리는 구나
-- 이승휴의 한시 운(雲) 김경식 번역
이승휴의 시 우제(偶題)를 읽는다.
그가 제왕운기를 짓기 위해 오고 갔을 계곡을 걸으며 읽는 그의 시들은
결코 그의 삶을 알지 알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제(偶題)도 그런 시다.
閉戶端居念更新(폐호단거념갱신) : 문 닫고 단정히 앉으니 생각이 다시금 새로워져.
幾廻廻想暗傷神(기회회상암상신) : 몇 번이고 회상할수록 남몰래 상하는 마음이여
不如不有胸中策(불여불유흉중책) : 가슴 속에 계책 없었던 것만도 못하니
不獨無功返累身(부독무공반누신) : 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걱정만 되었네.
--우제(偶題), 우연히 짓다-이승휴(李承休) 진성규 번역
동안사
이승휴는 자신과 함께 과거시험에 급제한 친구였던 김시어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애도하는 시를 쓴다.
김시어의 이름은 김상국이다. 그는 34세에 세상을 떠났다. 풍채가 좋고 영리했으며 재주가 뛰어난 친구였다. 그의 상여가 떠나던 날에는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장사에 조문 온 선비들과 승려들은 모두 옷이 젖었다. 그러나 모두들 그의 슬픔을 애도했다.
푸른 산 짧은 기슭에 관을 묻고 나니
술잔 앞의 우아안 미소 한 번 더 보기 어렵네
묘당은 어떻게 옥돌을 마련하리
왕의 값진 보배를 땅속에 묻어 버렸네
끝없는 인생길 오히려 슬프거늘
아 흘륭한 문도들 아무리 학문을 좋아하여도
이 세상에는 다시 스승을 찾을 길 없네
서로가 뿌린 천 섬의 눈물
빗물로 흩날려 물가에 쏟아붓네
침침한 염누 속 불러도 일어나지 않으니
하늘은 왜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는가?
돌아와 보니 만사가 모두 부질없고
이 몸이 어찌 뜬 구름만이나 하랴.
공명과 부귀란 짐시도 못 가는 것
석화전광엔들 어찌 비길 수 있으랴
우리들 같이한 즐거움 너무 짧구나
--이승휴 의 시 ‘김시어를 애도하다“ 중에서, 진성규 번역
이승휴는 원나라의 수도를 드나들었다. 그것이 서장관으로 가든 다른 직책으로 떠나든 그 길은 고단한 길이었다.
개경에서 북경까지 걷는 길이 수월할 리 없다. 그는 꼼꼼하게 기록하고 기행 길의 험난한 고난의 길을 한시로 기록했다.
1273년 6월29일 많은 비가 내려 요하가 넘실거렸다. 그 강을 건너야 했다.
그래서 장마로 8일간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병까지 걸렸다.
그의 기행시에는 이때 당한 고난의 심정이 절절하다.
상서시랑에게 보고서 형태의 시를 쓴다. 상서시랑은 상서성의 정4품의 관직이다.
온종일 거센 바람 불어 비를 내리니
평지가 내가 되어 조천 길을 막는구나.
다시금 묻노니 요하를 어떻게 건너리
하늘도 삼킬 듯 성난 물결 넓고도 넓어라
외마다 가을 소리 뜰 앞에 나무에 먼저 찾아드네.
천년을 두고도 이 심정 알아줄 이 없어
이래저래 마음 펼 곳은 전혀 없어라.
--이승휴 시 ‘상서시랑께’ 중에서 진성규 번역
십 년 간 강호에 방랑하다가
다시 서울에 있은들 무슨 영광 있으리.
오래 거쳐한 청산 기슭이 생각나고
새로운 일이라 서울 거리 놀라 바라보네.
고국의 법도는 날을 딸아 변하고
만년의 벼슬은 구름처럼 가볍구나.
무거운 군은을 갚지 모해서이지,
임천에 정 붙이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네.
---이승휴의 시 ‘서울에 들어와 다시 행자 운을 쓰다’ 중에서
진성규 번역
삼척 천은사
이승휴에게 <제왕운기>라는 대서사시가 없었다면 그는 이미 잊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제왕운기를 읽다보면, 그가 우리의 역사를 모두 외우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遼東別有一乾坤(요동별유일건곤) : 요동에 별도로 하늘과 땅이 있으니
斗與中朝區以分(두여중조구이분) : 중국과 구분되어 나누어져있네.
洪濤萬頃圍三面(홍도만경위삼면) : 큰 파도 물결들이 땅의 삼면을 두르고
於北有陸連如線(어북유륙연여선) : 북쪽으로는 육지가 있어 실처럼 연결되네.
中方千里是朝鮮(중방천리시조선) : 중앙으로 천리이니 이 땅이 조선이며
江山形勝名敷天(강산형승명부천) : 강산 아름다워 그 이름 천하에 알려졌네.
耕田鑿井禮義家(경전착정예의가) : 밭 갈고 우물 파는 예의의 나라이며
華人題作小中華(화인제작소중화) : 중국 사람들은 작은 중화라 불렀다네.
羅與麗濟相次興(나여려제상차흥) : 백제 고구려 신라는 부흥하였고
自分爲郡至羅起(자분위군지라기) : 저절로 나누어 고을이 되니 신라가 건국되었네.
計年七十二算零(계년칠십이산령) : 햇수로 계산하면 칠십 이년이며,
新羅始祖赫居世(신라시조혁거세) : 신라의 시조는 혁거세였네.
所出不是人間系(소출불시인간계) : 태어난 것은 인간 계통 아니었으며,
有卵降自蒼蒼來(유란강자창창래) : 알이 있어 하늘로 부터 내려왔네.
其大如瓢紅縷繫(기대여표홍루계) : 그 크기는 박만하고 붉은 실로 매이었다
箇中長生因姓朴(개중장생인성박) : 그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 성을 박이라고 했네.
昔氏金氏相承遞(석씨김씨상승체) : 석씨 김씨가 서로 교대로 왕이 되었지.
二十九代春秋王(이십구대춘추왕) : 이십 구대 되는 김춘추왕이
請兵於唐平麗濟(청병어당평여제) :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 백제를 평정하였네
文章何臣動中華(문장하신동중화) : 문장으로 어떤 신하가 중화를 움직였는가.
淸河致遠方延譽(청하치원방연예) : 청하 최치원이 명성을 날리었네.
釋焉元曉與相師(석언원효여상사) : 스님으로는 원효와 의상대사가 있었고
心與古佛相符契(심여고불상부계) : 그들은 옛 부처와 서로 맞았다네.
麗祖姓高諡東明(여조성고시동명) : 고구려 시조의 성은 고씨, 이름은 동명인데
善射故以朱蒙名(선사고이주몽명) : 활을 잘 쏘아 주몽으로 이름 지었다네.
父解慕漱母柳花(부해모수모유화) : 아버지는 해모수고 어머니는 유화였네.
聖子類利來嗣位(성자류리래사위) : 성인의 아들 유리가 와서 왕위를 잇고
枝繁葉茂承承理(지번엽무승승리) : 무성한 나무처럼 대대로 이어 다스려
時與江水爭澄淸(시여강수쟁징청) : 때로는 강물과 맑음을 다투었네
蓋蘇文者乘時進(개소문자승시진) : 연개소문이란 자 때를 타서 나와
令色巧言爲寵卿(영색교언위총경) : 웃는 얼굴 교묘한 말로 총신이 되었다네.
共計二十有八王(공계이십유팔왕) : 고구려의 왕은 모두 28명이고
七百五年題太平(칠백오년제태평) : 칠백 오년 태평을 누리다네.
爾後二百三十一(이후이백삼십일) : 이후에 이백 삼십 일년 동안
地爲羅人之所倂(지위라인지소병) : 고구려는 신라에 병합되었다네.
唐昭大順元庚戌(당소대순원경술) : 당나라 소종 대순 원년 경술에
稱後高麗立王旌(칭후고려입왕정) : 후고구려라 일컫고 왕의 기틀 세웠네.
初屯金城日闢土(초둔금성일벽토) : 처음에는 금성에서 시작하여 지경을 넓히고
轉宅鐵郡新開京(전택철군신개경) : 철원으로 도읍지를 옮겨 수도를 열었네.
百濟始祖名溫祖(백제시조명온조) :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며
東明聖帝其皇考(동명성제기황고) : 동명성제는 그의 아버지였네.
其兄類利來嗣位(기형류리래사위) : 형 유리 돌아와서 고구려 왕이 되니
心不能平乃南渡(심불능평내남도) : 화가 나서 남쪽으로 내려왔었지.
唐高顯慶五庚申(당고현경오경신) : 당 고종 현경 오년 경신년에
羅王申奏邀天討(나왕신주요천토) : 김춘추는 당나라 왕에게 부탁하네
命蘇定方下熊貔(명소정방하웅비) : 소정방에 명하여 웅비를 거느리고
水陸矢石粉如雨(수륙시석분여우) : 땅과 바다로 화살과 돌이 비처럼 쏟아졌네.
幾多紅粉墜淸流(기다홍분추청류) : 얼마나 많은 궁녀들이 백마강에 떨어졌던가.
落花巖聳大王浦(낙화암용대왕포) : 대왕포에 낙화암이 솟아 있네
六百七十八年中(육백칠십팔년중) : 육백 칠십 팔년 동안
三十四王受天佑(삼십사왕수천우) : 삼십사 왕이 하늘의 도움을 받았었네.
爾後二百三十二(이후이백삼십이) : 이후 이백 삼십 이년 동안
地爲羅人之所撫(이후라인지소무) : 백제땅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네.
前麗舊將大祚榮(전려구장대조영) : 고구려 장군이었던 대조영은
得據太白山南城(득거태백산남성) : 태백산 남쪽 성에 자리를 잡았었네.
於周則天元甲寅(어주칙천원갑인) : 주즉천 원년 갑인년에
開國乃以渤海名(개국내이발해명) : 개국하여 발해라고 했네.
至我太祖八乙酉(지아태조팔을유) : 우리 태조 팔년 을유에 이르러
擧國相率朝王京(거국상솔조왕경) : 거국적으로 서로 도와 수도를 건설하고
歷年二百四十二(역년이백사십이) : 이백사십이년 동안에
共問幾君能守城(공문기군능수성) : 발해의 왕은 몇 명이었던가.
惟願億萬年(유원억만년) : 오직 바라건대, 억만년 동안
長守富與貴(장수부여귀) : 부귀를 오랫동안 지켜가소서.
梁唐晋漢周(양당진한주) : 양나라와 당나라, 진나라와 한나라 그리고 주나라
宋金皆失轡(송금개실비) : 송나라와 금나라는 모두 사라졌네.
歷遠御群民(역원어군민) : 오랫동안 백성을 섬겨온
仁邦能有幾(인방능유기) : 어진 나라가 몇이나 있었던가.
自慶逢明時(자경봉명시) : 평화시대를 만난 것을 경축하며,
臣承休謹記(신승휴근기) : 신하 이승휴는 삼가 역사를 기록하네.
-- 이승휴의 <제왕운기> 중에서 번역 김경식
6) 죽서루에서
송강정철 가사문학비
죽서루(竹西樓)는 삼척시 서쪽 오십천(五十川)이 흐르는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유명한 누각이다. 1275년에 이승휴가 창건하였으며, 1403년에 삼척부사 김효손이 중창하였다.
죽서루에는 어제시(御製詩)와 허목이 쓴 죽서루기(竹西樓記)를 비롯하여 13점의 편액이 걸려있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시 500여수가 지어졌다고 하니
이곳은 문학의 배경지로 최적의 장소라고 볼 수 있다.
서예가 김충현이 쓴 어제시를 번역해 읽어본다.
바위와 절벽을 다듬어 누각 하나,
죽서루 옆은 푸른 바다이고 바다에는 갈매기가 날아가네.
이 누각이 서 있는 삼척의 태수는 어느 집 아들인가.
여인들 태우고 밤을 세우며 뱃놀이 하는구나.
--죽서루 정조 어제시 중에서
화가 '김홍도'가 그린 죽서루 그림을 보고 정조가 쓴 시다. 정조의 낭만적인 품성이 잘 드러나 있다.
칠언 절구로 노래한 정조의 이 시에는 오십천을 바다로 혼동하고 있다.
죽서루
죽서루는 삼척시민들의 휴식처다. 자유개방으로 누구나 앉거나 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공간이다. 나는 죽서루의 마루에 앉아서 삼척기행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송강정철의 관동별곡에는 죽서루가 등장한다.
그가 아름답고 의미 있는 명승지를 찾아 떠나 8곳을 선정할 때 다른 정자들은 모두 바닷가에 있음을 알았다. 다만 삼척의 죽서루는 오십천 층암절벽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오십천에 비친 태백산맥의 아름다운 경치를 임금께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사에 담았으니 그의 왕에 대한 충성을 엿볼 수 있다. 하긴 담양의 송강사에서 파직당하고 3년의 세월을 보낼 때에도 그는 사미인곡을 지어 왕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지 않았던가.
낭떠러지 밑으로는 오십천의 푸른 물결이 흘러간다.
죽서루는 향연과 휴식을 목적으로 지어진 누각이다. 조선의 유명화가 겸재 정선도 이곳에 와서 아름다운 죽서루의 그림을 남겼다. 고려시대 이후 많은 시인들이 죽서루를 찾아와 자신의 작품을 남기고 떠났다. 그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한시와 그림들은 남아 예술이 길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죽서루 창건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고려 때 학자인 이승휴가 고려 원종 7년, 죽서루에 올라 시를 남겼다는 기록이 있으니, 고려시대 전에 세워진 것은 분명하다.
죽서루의 1층은 자연 암반과 땅을 이용해 기단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낮고 기둥이 높이가 다르기 때문에 활용이 어렵다. 암반과 지형을 있는 그대로 이용하다 보니 기둥이 13개이며, 2층은 20개이다.
출입은 계단 없이 지상에서 바로 2층으로 누각을 진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남쪽으로 암반이 있어 바로 2층 마루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죽서루 현판
죽서루의 천정 서까래에 수많은 시제들과 현판 그리고 중건기가 걸려 있다.
많은 누각들을 탐방하였지만 이렇게 많은 현판들이 걸린 곳은 없었다. 이곳에 많은 시인들이 방문하였다는 상징일 것이다. 시인들의 작품들은 이승휴부터 조선 정조 임금의 어제시까지 17 작품이 걸려있다. 현판도 미수 허목과 이성조의 글씨 등 5점이나 된다. 미수 허목의 죽서루기로부터 1991년 삼척시장 김광용이 쓴 것까지 6점의 죽서루 중건기를 확인하고 읽다보면 하루를 꼬박 걸려야 할 것 같다.
누구나 죽서루에 올라와 앉고 눕고 할 수 있다. 휴식의 공간과 대화의 공간으로 활용이 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눕고, 앉아서 조상들이 만들어 준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역사유적이 살아 실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는 현장이 죽서루였다.
미수 허목(1595-1682)은 삼척부사로 근무할 때 죽서루기(竹西樓記)를 썼다. 1662년(현종 2년)에 쓴 죽서루기에는 관동지방에 8경이 있지만 죽서루가 가장 으뜸이라고 기록했다. 또한 죽서루의 풍광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십천과 깎아지른 절벽, 울창한 숲과 사람 사는 마을이 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68세의 노인이 이곳에 와서 자신의 삶의 지혜를 가지고 삼척의 지방관이 되었다는 것은 이 지방의 복이었다.
<제일계정> 허목의 글씨
미수 허목은 1660년(현종1년) 9월 노론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하여 삼척부사로 좌천된 것은 삼척 백성들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삼척에서 많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향약을 제정하고 리(里) 단위의 협의체인 이사(里社)를 만들기도 했다. 두타산(頭陀山)과 동해 바다를 답하한 후 동해송(東海頌)을 창작한다. 1662년(현종3)에는 척주지(陟州誌)를 완성한다. 미수 허목은 파직되어 고향인 연천으로 돌아갈 때까지 삼척을 위해 최선을 다해 지방관의 임무를 다한 인물이다.
'제일계정(第一溪亭)' 현판 글씨는 미수 허목의 글씨다. '시냇가에 있는 첫째가는 정자'라는 뜻을 지닌 그의 글씨체는 서예의 문외한이 사람들에게도 힘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죽서루에는 미수 허목의 편액 외에도 네 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숙종 36년(1710) 삼척부사였던 이성조(李聖肇)가 쓴 '죽서루'와 '관동제일루'라는 편액 글씨도 명필이다. 행서체로 쓴 이 현판의 글씨를 읽다보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 삼척부사였던 이규헌의 글씨이다.
7)삼척에서 만난 여류 시인 이옥봉의 삶과 문학
죽서루에서 나는 한 여류 시인을 생각한다.
조선조의 여류시인 중에 가장 슬프게 삶을 마감한 이옥봉이다. 그녀의 이름은 원(媛)이고 호가 옥봉이다. 옥봉은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과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옥봉은 유년 시절부터 천재적인 머리에 시문에도 능하였다.
부친은 옥봉을 사랑하였으며, 딸을 위해 책들을 건네 주었다. 미모에 교양이 있던 그녀는 좋은 집안에 출가하였지만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문학적인 재능에 부친은 조원(趙瑗1544-1595)이 옥봉을 소실로 삼아 줄 것을 부탁한다. 조원은 당시 뛰어난 문장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원은 이를 거절한다. 우여곡절 끝에 옥봉을 부실副室로 맞아들인 조원은 옥봉에게 글을 쓰지 않는 조건으로 옥봉을 부실副室로 맞아들인다.
옥봉은 조원의 소실과 그의 풍류반려로서 원만하게 살아갔다.
그녀의 시중에서 소낙비[(雨])를 읽은 허균은 이 시를 보고 감탄한다. 허균은 옥봉을 대단한 시인으로 평가하였다.
구름 흩어진 가장자리, 햇빛이 새나오고/雲葉散邊殘照漏
하늘 가득 은빛 댓가지, 강을 가로지르네./漫天銀竹過江橫
하늘에 먹구름이 떠간다. 그 사이로 햇살이 환하게 새어는 장면을 포착한 옥봉의 관찰력으로 이 시는 살아 있다. 강물이 흘러간다. 그곳에 소낙비가 내린다. 빗방울은 강물에 가득히 꽂히는 순간적인 소낙비를 묘사하였다. 허균이 극찬한 시구임에 틀림이 없다.
신흠(申欽1566-1628)도 옥봉의 시 구절을 ‘천고의 절창切創’이라고 하며 그녀를 극찬했다.이런 옥봉이 삼척의 죽서루에 올라 시 한편을 남겼다. 조원이 한 때 삼척부사로 근무할 때 지었을 것이다.
강은 갈매기 꿈을 품어 넓고/江涵鷗夢闊
하늘은 기러기 슬픔에 들어와 멀구나./天入雁愁長
--이옥봉의 시 ‘죽서루’ 중에서
죽서루
자연과 인생 우주에 관한 폭넓은 세계관을 표현한 단 두 줄의 시를 음미하면
그의 천재적인 문학적인 재능을 이해하게 된다.
그녀는 정이 많았던 여인이었다. 그래서 한 송사에 휘말린다.
어느날 산지기의 아내가 찾아와 억울한 사연을 옥봉에게 말 한다.
자신의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관원에게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부탁을 하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옥봉은 붓을 들어 파주목사에게 시 한 수를 써 보낸다.
세수 대야로 거울을 삼고
물로 기름삼아 머리 빗었네.
내 몸이 직녀 아닌데
낭군이 어찌 견우가 되리오.
‘세수 대야로 거울을 삼고’는 정직하고 청렴함을 표현한 것이며, ‘낭군이 어찌 견우가 되리오’는 남편이 소를 도둑질한 견우(牽牛)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시를 읽은 파주 목사는 누명을 벗고 풀려난다. 그러나 옥봉이 파주목사에게 한시를 써서 송사로 활용한 이유를 들어 옥봉을 집에서 내 쫓는다. 옥봉은 사죄하였지만 조원은 끝내 옥봉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옥봉은 뚝섬에 움막을 짖고 미친 시를 짓고 살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미친 여인으로 취급했다. 부군에 대한 그리움과 고독은 깊어 갔다. 여인의 한 이란 그의 시에는 당시 그녀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평생 이별의 한은 몸에 병이 되었어요 平生離恨成身病
술도 위로가 되지 못하고 약으로도 치료가 되지 않네요 酒不能療藥不治
이불 속에서 흘리는 눈물은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과 같아요. 衾裏泣如氷下水
밤낮을 길게 흘러도 그 누가 이런 사연을 알아 주겠어요. 日夜長流人不知
--이옥봉의 시 ‘閨恨’ 김경식 번역
그리움이 가득담긴 그녀의 시에는 호소력이 간절하다. 그러나 조원은 그녀를 끝내 받아 들이지 않았다.
최근의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신지요. 近來安否問如何
창문에 달빛 어를 거리면 그리움이 몽실거리네요. 月到紗窓妾恨多
만약 꿈속에 혼백이 가는 길에도 흔적이 남는다면 若使夢魂行有跡
집 앞 자갈길은 절반은 모래로 변했겠지요. 門前石路半成沙
---이옥봉의 시 ‘夢魂’ 김경식 번역
조선 인조 때 승지 조희일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다. 명나라의 원로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조원을 아느냐"는 질문에 조희일은 자신의 부친이 바로 조원이라고 대답한다.
한 대신이 서가에서 <이옥봉시집>이라는 책 한권을 꺼내 보여 준다.
이때 조희일이 놀란 것은 당연하다. 이옥봉은 자신의 부친 조원의 소실로 생사를 모른지 40여년이 넘었기 때문이었다. 조희일은 옥봉시집이 간행된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원로대신은 그에게 시집의 발간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죽서루 오십천
40년 전 쯤 흉칙한 시체가 해안을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신은 온 몸을 종이로 감고 있는 여인의 시신이었다. 끈을 풀어 몸을 둘렀던 종이를 벗겨 보니 종이마다 빼곡하게 한시가 적혀 있었다. <해동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라는 기록도 보였다. 대신의 집안에서는 종이를 말리고 모아 책을 만들었다.
옥봉은 고독과 가난으로 몸부림치면서 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생 쓴 시를 온 몸에 감고 투신하였던 것이다. 그 시신은 한강 하류를 거쳐 서해 바다를 떠돌다가 명나라로 건너가 시집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렇게 이옥봉은 중국에서 시인으로 등극된다.
내가 문학에 감동을 받을 때는 이런 작가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읽을 때다.
죽서루는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누각이다.
삼척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학적인 이야기들이 동해바다의 넘실거림과 함께 이어져 왔다.
문학은 비타민과 같은 존재이다. 현실이 냉혹하고 비정하다면, 아름답고 그리움에 가슴이 타도록 인내했던 옛 문인들의 삶과 흔적들을 찾아보라.
그곳에서 연민과 사랑의 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꽃은 현실을 밝고 긍정적으로 인도하며 당신의 미래를 아름답게 가꾸게 도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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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학은 사람다운 삶에 중요해요.
문학기행은 그 삶에 맑은 샘을 마구 흩뿌져주어, 마음에 흥건한 흐림을 닦아줍니다. 진정 실처럼 연결된 김경식시인님의 단아한 기행글의 매력속에서 아침을 맞이해요. "사랑의 여의주" 드레곤볼처럼요.
이승휴의 민족대서사시 제왕운기부터 "빗물에 흩날려 물가에 쏟아붓..."는 이승휴의 벗 김시어의 애도의시 "서로가 뿌리 천섬의 눈물"처럼 더불어 고개를 숙입니다. 또한 온몸에 종이를 감고 투신했다는 이옥봉의 "꿈속에 혼백이 가는 길"까지 조근조근 읽어내려가며, 삼척을 향한 이승휴선생의 문학기행을 기다립니다. 은혜로운 아침을 맞이하기를 소망드립니다.
오랫만입니다. 선생님,
답사기 읽어주시고 후기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