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분류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책소개
작가 이병욱은 소설 쓰고 싶은 갈망을 못 이겨 안정된 교사생활을 중도에 명퇴했다. 그의 첫 작품집인 『숨죽이는 갈대밭』책에는 정말 다양한 단편소설들이 담겨 있다. ‘월남전에서 중상을 입고 본국 병원으로 후송된 사내한테 친절한 미소를 띠며 접근한 간호장교가 벌이는 사건’을 다룬 「숨죽이는 갈대밭」,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그 해 우리나라 어느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현장’을 다룬 「달나라」, ‘극심한 가난 끝에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이웃동네 돈 많은 홀아비와 재혼함으로써 파탄 난 모성애’를 다룬 「박쥐가 된 아이」, ‘무능한 탓에 직장을 명퇴한 사내가 어느 날 깊은 산 속 생태학교에 잘못 들어갔다가 사나운 개에 쫓기는 절체절명 순간’을 다룬「외출」, 겨울눈이 채 녹지 않는 이른 봄 목매달아 죽을 계획으로 가파른 산을 혼자 찾은 사내의 심경’을 다룬 「두 개의 밧줄」, ‘10.26 후 난데없이 등장한 대머리 장군의 살벌한 눈길에 전전긍긍하는 어느 시골 학교 선생들의 모습’을 다룬 「노려보기 시작했다」, ‘가족들한테 버림받은 명퇴 가장이 등산으로 소일하다가 산짐승들과 대화하게 된 기이한 체험’을 다룬 「가섭별전」,‘도시의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해 자취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던 학생이 어느 날 공설운동장에서 불량배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순식간에 파멸하게 되는 과정’을 다룬 「승냥이」,‘시신을 낱낱이 잘라 새들에게 먹이로 주는 티베트 천장사 형제의 갈등’을 다룬 「라싸로 가는 길」 등.
단편소설집 『숨죽이는 갈대밭』은, 작가 이병욱의 세상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관심이 다양하게 소개된 책이다.
출판사 소개
6‧25 동란 중 태어난 그는 춘천이 고향이다. 춘천고둥학교를 졸업한 뒤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거쳐 정보과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소설 쓰고 싶은 갈증’을 못 이겨 2004년 봄에 30년 교직생활을 명퇴했다. 정년을 9년이나 놔둔 행동이라 주위에서 고개를 꺄우뚱 하는 분들이 많았다. 사실 그는 학창시절에‘소설 잘 쓰는 학생’이었다. 13회 학원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에, 17회 우석대학교 주최 현상문예 소설 장원이 입증한다.
그런데 퇴직 후 정작 소설은 한 줄도 쓰이지 않았다. 그는‘그럼, 교직 30년 동안 소설 쓰고 싶은 갈증에 시달린 것은 망상이었나?’하는 자괴감과 싸우기를 4년여. 급기야는 삶의 의욕까지 잃어 사고사를 가장한 자살을 계획했다. 눈이 채 녹지 않은 해발 500미터쯤의 가파른 산에 혼자 오른 것이다. 실수로 미끄러졌다가는 그길로 추락사다. 정상까지 올랐고 다시 하산했으나 뜻밖에‘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살조차 실패한 것이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에 절망한 순간… 소설이 쓰이기 시작했다고 그는 밝힌다. 2009년에 문예지‘뿌리’에서‘신인문학상’을 타면서 그의 소설 쓰기는 날개를 달았다. 2016년 7월에 그간의 작품들을 모아 첫 작품집‘숨죽이는 갈대밭’을 냈고 다시 2년여 뒤인 2018년 12월에 두 번째 작품집‘K의 고개’를 내기에 이른 것이다. 하필 12월 31일 발행이라 마치 일 년 전 일같이 돼버렸으니 당사자인 그는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 쓰기를‘인간의 속살을 한 꺼풀씩 드러내 보이는 작업’이라 밝힌 바 있다. ‘숨죽이는 갈대밭’ 책에 수록된 동명의 작품에서 월남전에 참전한 주인공이 애국심이나 반공정신에서가 아니라 단지‘대학 다니는 생활이 따분해서’였다는 고백이나, ‘박쥐가 된 아이’작품에서‘가난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자식들을 내버리고 잘사는 이웃 홀아비와 재혼해 사는 여자’의 파탄 난 모성애나, ‘승냥이’작품에서‘우연히 불량배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결국은 매독까지 걸리는 자취학생’의 일탈된 사춘기 등이 작가 이병욱의 수술칼 끝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번의 두 번째 작품집 ‘K의 고개’에서 또 다른 ‘속살 드러내 보이기’를 시도한다. 작품집 제목이기도 한 동명 작품‘K의 고개’에서‘자기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입 다물고 살아온’소심한 주인공 K의 창피한 일화와 어느 밋밋한 고개에 얽힌 이야기가 그 첫 번째다. 학교 교사라기보다는 댄스홀의 제비족 같은 어느 사내의 이야기 ‘허한철’도 있다. 취미로 시작한 스쿠버 활동이 자신도 모르게 쏘가리 큰 놈을 산 채로 잡는 데 집착하는 모습으로 변하면서 그 바람에 쏘가리를 산 채로 잡아 민물고기 식당을 하는 지인과 갈등이 시작되는‘수심 9미터’이야기도 있다. 미장원에 밀려 이제는 사양길에 들어선 전통 이발관의 이발사가 그동안 숨겨온 비밀이 한순간에 드러나는 ‘이발 유정’ 이야기도 있다.
이병욱. 그는 끊임없이 인간의 속살을 드러내는 데 전념한다. 이번의 두 번째 작품집‘K의 고개’가 주목받는 건 그 때문이다.
책속에서 & 밑줄긋기
첫문장 나는 월남에서 돌아왔다.
10
나는 푸른 하늘 아래, 본부의 연병장을 걸어가고 있었다.
태양의 무수한 조각들이 땅바닥과 야자수의 푸른 이파리들과 쇳덩이 포신들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나는 걸어가고 있었다. 월남의 태양은 강인했다. 철모를 부술 듯 하늘에서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영내 가득히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나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걸었다. 온몸의 세포들이 꿈틀대는 게 역력했다. 밀림의 모기들처럼 군복을 사정없이 꿰뚫고 들어오는 뜨거운 열기. 땀이 흘렀다. 영내는 넓었다. 적막은 넓었다.
적막 속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내 발끝에 무엇이 걸렸다. 나는 눈을 거의 감은 채로 그것을 걷어차 버렸는데…… 고막의 한계를 넘는 폭음과 함께 미쳐 날뛰는 한쪽 다리와 태양을 보았다. 걷어찬 것은 수류탄이었다. 적막은 찢어졌고 찢어진 틈새로 태양의 비늘들이 가득 퍼부어졌다.
그리고 내게도 훈장이 수여됐다. 정말 애매한 훈장이었다. 내 손아귀에 들어가는 그 쇳덩어리의 면적은, 내 한쪽 다리와 한쪽 눈알을 보상해주기엔 너무 좁아 보였다.
―『숨죽이는 갈대밭』 중에서
31
그 때 걔가 나지막하게, 그러나 분명한 발음으로 내뱉었다.
“씨발 놈들아, 조용하지 못 해?”
점심시간이었다. 애들 대부분이 미리 도시락을 먹었으므로 정작 그 시간에는 여기저기 몰려 앉아 떠드느라 바쁜데 그렇듯 걔가 쌍소리를 내뱉은 거다. 전체를 상대로 한 쌍소리는 처음이었기에 교실은 찬 물을 끼얹은 듯 일시에 조용해졌다. 미처 못 들은 애들이 ‘누가 뭐라는 거야?’작은 소리로 쑤군댔다. 그러자 걔가 다시 한 번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씨발 놈들아, 내 잠 깨울 거야?”
교실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쌍소리의 출발지를 확실하게 두 눈으로 확인한 애들은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고 몸을 움츠렸다. 복도 쪽 분단의 맨 뒤에 앉은 거대한 체구의 존재가 무섭게 노려보는 데에야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나는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걔의 그 쌍소리를 등 뒤로 생생하게 들었다. 마치 아프리카 초원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던 맹수의 으르렁거림 같았다고나 할까. 초식동물들처럼 일제히 기죽던 가여운 우리 반 애들.
나는 떠들고 있던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니 걔의 낮잠을 깨운 씨발 놈들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애써, 편치 않은 자존심을 자위하며 앉아 있는데…… 건너편 창가 분단의 맨 뒤에 앉은 큰 애가 자존심의 손상을 견디기 어려웠던지 한 마디, 그러나 조심스레 쌍소리는 빼고 내뱉었다.
“원, 나 참!”
걔의 처사가 못 마땅하다는 소리였으므로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쪽과 걔를 번갈아 살폈다. 걔는 책상에 상체를 엎드린 채로 그 창가 쪽을 사납게 노려보며 다시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뜳어? 씨발 놈아?”
그 말에 창가 쪽의 큰 애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며 침묵했다. 그 순간 우리 반에서 가장 주먹이 센 애가 누구라는 게 결정된 것이다.
―『달나라』 중에서
84
나비 나라를 사분지 일쯤 봤을 때, 기분 나쁜 이상한 소리가 나지막하게 그의 귀에 들렸다.
누렁개가 허연 이빨을 드러낸 채‘나비 나라’밖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입구 쪽을 보았다. 다행히 미닫이문이 닫혀 있었다. 누렁개가 침까지 질질 흘리며 신음하듯 으르렁거렸다.
‘이거, 어떡해야 하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누렁개도 밖에서 따라 움직였다. 나비 나라 구조물이 둥근 유리통 같은 형태라, 서로를 보며 빙빙 도는 꼴이었다. 누렁개 목에는 이 미터 남짓한 줄이 달려 있었다. 어딘가에 매여 있다가 줄이 끊기며 이곳으로 달려온 게 아닐까?
바깥, 오십여 미터 전방에 조립식 주택이 하나 있었다. 여기 행복 생태학교 교장의 사택으로 여겨지는 그 주택의, 개집에 줄로 매여 있었던 개일 듯싶었다. 그는 주택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무도 그 주택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가 정문 옆 쪽문을 통해 들어올 때부터 자신의 발걸음 외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행복 생태학교 교장이 가족과 함께 읍내로 일 보러 나간 것일까? 최소한의 보안을 위해 누렁개 한 마리 남겨 놓고서.
‘그래서, 방문 전 예약해 달라고 홈페이지에 밝혀 놓았던 걸까? 젠장! 그러려면 그 문장 앞에 반드시라는 부사를 적었어야지!’
누렁개와 그는 유리를 사이에 두고 눈길이 마주쳤다. 파란빛으로 적의에 불타는 누렁개 눈깔. 그를 도둑으로 여기는, 터무니없는 오해라니…….
‘행복 생태학교 약 2KM’란 팻말을 보고 어귀로 들어섰을 때부터 터무니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무엇 하나 마음 편하게 그를 맞아주질 않았다. 그는 ‘아악!’외마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외출』 중에서
90
가구들 대부분이 불 꺼져 있는데다가 보안등까지 고장 난 게 많아 아파트 단지는 ‘어둠의 단지’가 되었다.
철지난 검은 동복 차림에 뒤축이 반쯤 닳은 운동화를 신고서 어둠의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온 아이. 삼십여 분 전에 ‘돌발사건’을 겪어서 경황없는 정신상태다. 이상한 것은, 그런 정신상태가 되자 아이는 이곳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걸어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아이가 걸어올 때 도로 변 전주에 있는 불법주정차 단속카메라나 상점들의 방범카메라, 심지어는 지나가던 차량들의 감시카메라에도 그 모습이 잇달아 찍힐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면 돌발사건 현장에서 부근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그 골목은 감시카메라 하나 없이, 비좁고 긴 터널 같은 길로 이어져서 도피 로로써는 최적이었다. 아이는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넓은 보도를 걸어서…… 어둠의 단지 앞 정문으로 들어온 것이다. 정문이라고는 하지만 기둥 구조물들만 남은 열린 공간이다. 게다가 양쪽 기둥 구조물에 설치한 등 두 개도 그 중 하나는 아예 켜지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제 촉광을 잃고 일대의 어둠에 눈치 보듯 아주 흐릿하게 켜져 있었다. 지친 모습으로 들어서는 아이를 아무도 보지 못한 까닭이다.
정문을 지나자마자 왼편으로는 단지 내 상가가 있다. 열 개 점포 중‘2단지 슈퍼마켓’하나만 전등불을 켜놓아서 단지 내 상가임을 겨우 알리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서 어둠 속 보도를 이십 미터쯤 걷던 아이는 문득 멈춰 섰다. 긴 밤을 노숙하려면 아무래도 맨 정신으로는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아이는 동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폐 한 장을 확인했다. 지난번에 학교에 잠깐 들른 형이 비상금 하라며 쥐어 준 돈 만 원이다. 형은 시내 독서실에서 총무를 맡아 그곳에서 먹고 자며 한 달에 사십 만원 받는다는데, 아이와 함께 지낼 십 평 원룸의 전세 보증금 오백만 원을 목표로 그 돈 대부분을 예금하고 있다 했다.
아이는 방금 지나친 상가 쪽으로 되돌아 걷는다. 어두운 바닥의 보도블록도 깨지거나 파인 것들이 많아서 걷기가 편치 않다.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로 내려와 걷는데 그 때, 정문 쪽에서 웬 차 한 대가 전조등 불빛을 두 눈처럼 부라리며 들어왔다. 아이는 경찰차가 아닌가 싶어서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차는 전조등 불빛을 쏘면서 아이 가까이로 다가오더니, 휘발유 태우는 시큼한 냄새를 남기고 옆으로 지나쳐 갔다. 아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다시 상가 쪽으로 걷는다.
지린내 가득한 상가로 들어섰다. 문 닫은 점포 개수만큼이나 공허한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2단지 슈퍼마켓’. 무덤덤한 표정으로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앉은 주인 영감은, 아이가 소주 한 병과 오징어 구운 것 하나를 고른 뒤 만 원을 건네자 잠시 갈등했다.‘까짓 거, 학생복을 입었다고 해도 부모 심부름으로 온 줄 알았다 하면 되는 거다’고 속으로 다짐한 뒤 돈을 받았다.
아이는 상가를 나와서 다시 걷는다. 105동 아파트를 향하는 걸음이다. 그 몇 분 사이에 더욱 무거워진 어둠.
―『박쥐가 된 아이』 중에서
117
마침내 아침이 훤하게 밝았다. 천장 터 사방에 뼈다귀들, 머리카락들, 천 조각들, 잿더미, 부러진 도끼자루 등이 낱낱이 드러났다. 이전에 천장을 치른 흔적들이다. 천장 터 한복판의 너럭바위 위에 놓인 시신이 알몸이라 춥다고 온몸을 구부리며 엎드린 것 같다. 아침 햇살이 길게 쳐들어와 큰형의 그림자가 너럭바위를 넘어서까지 드리워졌다.
큰형은 도구들 중에서 먼저 작은 칼을 쥐고 여인의 머리카락들을 잘라낸 뒤 다음에는 갈고리로 등뼈 윗부분에서 아랫부분까지 일자로 그어 절개했다. 드러난 살덩이의 핏물로 너럭바위가 붉게 젖어들 때 작은형이 큰형의 갈고리와 작은 칼을 넘겨받고는 대신 장도를 건넸다. 큰형은 장도로 허공을 향해 한 번 크게 휘두르고 나서는 힘주어 ‘탁 탁 탁!’ 사지를 절단했다. 작은형은 잘려진 사지들을 갈고리로 하나씩 끌어다놓은 뒤 작은 칼로 살과 뼈로 나누었다.
술병과 찻잔을 양손에 나누어 든 나는 간간이 형들한테 마시기를 권하면서 스님들의 경을 따라 외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형들은 술과 차로 번갈아 목을 축이면서 쉴 새 없이 칼을 부렸다. 독수리들 대부분은 거리를 두고 때를 기다리는데 두어 놈만 뒤뚱 걸음으로 너럭바위 밑까지 다가왔다. 나는 발로 그놈들을 밀어내면서 다시 경을 소리 높여 따라 외었다.
“철벅!”
소리와 함께 피 묻은 내장들이 너럭바위 옆 구덩이에 뭉텅이로 떨어졌다. 작은형이 그것을 갈고리로 찍어 나중에 독수리들이 먹기 좋게, 가지런하게 늘어놓았다.
“처걱! 처걱!”
큰형이 작은 도끼를 들어 굵은 뼈들을 토막 내는 소리다.
―『라싸로 가는 길』 중에서
148
당신의 자식들에게 무능하기 이를 데 없었던 아버지. 그 겨울방학에는 당신의 일방적인 생각 하나로 아들을 편치 않은 큰집에 두 달이나 짐짝처럼 맡겨두었었다. 내가 자의식이 팽창하던 사춘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아버지를 경멸하거나 외면하기로 일관한 것은, 그 겨울방학에 눈 내리는 허허벌판을 보며 가지게 된 감정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나를 짐짝처럼 내던져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겨울에.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할아버지의 당부로 가미가제 특공대에 갈 수밖에 없었다는데…… 감히 그런 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 겨울 서울의 미아리 큰집에 잘못 배달된 물건처럼 혼자 가 있던 아들의 심정을 어쩜 그리도 당신은 헤아리질 못했을까?‘헤어지기 섭섭해서 망설이는 나에게, 굿바이 하며 내미는 손, 검은 장갑 낀 손…….’눈 내리는 허허벌판에 서 있을 때 들려오던 그 노래. 다시 생각해 보면 부근에 전축가게 따위가 있을 데가 아니었으니까 내 마음 속으로 떠올려 보던 노래일 가능성이 높다. ‘할 말은 많아도 아무 말 못하고, 돌아서는 내 모양을…….’
“아니, 너 웬 눈물이냐?”
형님이 묻는 말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숯불이 매워서…….”
내 말에 형님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 둔다. 그런 형님의 얼굴이, 옆의 창으로 깊이 비껴드는 햇살에 이마 부분 윤곽이 짙어지면서 그 옛날의 큰아버지 얼굴 모습과 더욱 닮았다. 이런 이상한 생각이 든다. 큰아버지와 우리 아버지 둘이 햇살 따듯한 창가에 다정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나는 다시 눈물을 글썽거리고 형님은 난감한 낯으로 그런 나를 지켜본다.
―『떠나온 그 겨울』 중에서
163
문득 오줌이 마렵다. 허연 김을 날리면서 흰 눈밭에 검은 구멍을 송송 만드는 오줌줄기. 더하는 한기에 몸을 떨고서 김 과장은 바지춤을 여몄다. 여유를 갖고 경이로운 눈길로 산 아래 마을 쪽을 내려다본다. 산기슭의 많은 집들이 지붕이나 옥상을 보이며 어둑한 산그늘 속에 있는데 오직 도로 건너 한 집만 햇빛을 받고 있다. 차를 두고 온 그 식당이다. 그 옆의 검붉은 한 점처럼 보이는 그 차. 서쪽에서부터 긴 땅거미가 깔리고 있어서, 그 식당이 혼자서 받는 지금의 햇빛도 한낮처럼 밝고 투명한 빛이 아니다. 불그레한 게 왠지 불길하다. 어둑한 산그늘 속의 집들보다, 지는 햇빛을 받는 그 식당이 오히려 음울하게 보이는 이 기괴함이라니.
지금 몇 시나 됐을까? 폴더에 시간이 나타나는 휴대폰을 바지주머니에서 찾았는데, 없다. 어떻게 된 걸까? 분명 바지주머니에 있었는데…… 차에서 내릴 때 떨어트렸나? 이럴 때가 종종 있다. 무슨 생각에 골몰하면서 차에서 내리다 보면 휴대폰이 자기도 모르게 운전석 밑에 떨어져 있었다. 이따 내려가서 찾아 봐야지. 결국 김 과장의 음울한 목적은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하긴 다부지게 자살할 사람이었다면 오직 죽겠다는 마음 하나로 이 산을 올랐어야 하지 않을까? 아까 민박집들 골목을 빠져나올 때부터 이런저런 것들에 신경을 썼으니, 솔직히 그 때부터 김 과장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하산하느냐이다. 취해서 휘청거리는 몸에, 가파른 비탈길에, 어두워지는 시간에, 휴대폰도 없는 처지에.
김 과장은 취기가 빠지느라 그런지, 아니면 해가 지느라 그런지 더욱 오싹한 한기에 몸을 쭈그리고 앉아서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생각해 본다. 그렇다. 술이 더 깰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때 내려가자. 갖고 온 밧줄을 이용해서 참나무에 걸었다가 풀기를 반복하면서 비탈길을 내려가면 되지 않을까? 괜히 서둘렀다가는 참나무들에 부딪치며 굴러 떨어질 텐데 중상을 입기 십상이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 서두르지 말자. 깨끗하게 죽느니 만도 못한 몸의 꼴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김 과장은 민망하게도 자기 목에 걸려고 준비했던 밧줄을 믿고 이 험난한 비탈길을 내려갈 참이다.
―『두 개의 밧줄』 중에서
184
국장이 치러진 직후에 텔레비전에는 난데없이‘머리가 많이 벗겨진 사내’가 등장하여 누군가를 노려보는 표정으로 사건의 경위를 밝혔다. 범인으로 드러난 중앙정보부장이 초췌한 모습으로 포승줄에 묶인 채 범행을 재연하는 현장 장면도 방영되었다. 당일의 술좌석은 핏자국이 흥건했다. 그런 화면들을 말없이 지켜볼 때 서무과 박 주사가 황급하게 교무실로 들어오더니 교감선생한테 전언통신장부를 전했다. 교감선생은 장부를 펼쳐 한 번 보고는 당신 등 뒤에 있는 작은 칠판에 백묵으로 두 줄 적었다.
1. 고(故) 박대통령을 추모하는 분향소를 읍사무소에 개설했음.
2. 비는 시간들을 이용해서 각자 분향소에 다녀오기 바람.
교사들은 술렁거렸다. 읍사무소가 학교에서 오 리 넘게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그 먼 데까지 시간을 내어 다녀올 수 있느냐는 불평불만이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수업이라도 한 시간 빼 버리고 단체로 다녀오게 했으면’하는 바람이었다. 흐물거리는 몸짓이지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교감선생이 한 마디 하였다.
“뭐, 자전거 타고 가면 그리 먼 거리가 아닙니다. 자전거가 없는 분은 학생들 거라도 빌려 타고 다녀오시든지.”
그분이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교감선생님, 분향소에 다녀오는 것이 의무입니까?”
물문어 교감선생은 당황하여 의자에 앉았는데도 휘청거렸다.
“뭐…… 의무라고는 쓰여 있지 않으니까…… 알아서 판단하세요. 나는 전언통신장부에 있는 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장부를 돌려받고도 남아 있던 박 주사가 호들갑스레 나섰다.
“아니에요, 가야 할 겁니다. 거기에는 자기 직장과 이름을 적어놓는 방명록이 있는데 나중에 그것을 관계기관에서 회수해 간다는 말이 있어요.”
박 주사는 서무과 말직에 있는 노인네였다. 예우상 주사라고 불러주지만, 실상은 고용직 서기였다. 정년이 일 년 남아 있었다. 그분은 교감선생에게 향했던 자세를 박 주사 쪽으로 바꾼 뒤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박 주사께서는 참석하실 겁니까?”
박 주사는 당연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아무 말 없이 서랍에서 담배 한 가치를 꺼내어 피워 물었다. 길게 내뿜는 연기가 그분의 머리 위로 올라가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그 연기를 신호로 삼은 듯 교련선생이 애들 같은 장난기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빌 때 빨랑 자전거 타고 다녀와야지!”
각자 수업이 비는 시간들을 이용해서 읍사무소를 다녀오기 시작했다. 학생과장은 교무과장에게 ‘가서, 내 이름이나 대신 적어 줘.’ 부탁하고 앉아 있다가 아무래도 찜찜한지‘에이, 까짓 거 구경삼아 가보지 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앞서 출발한 교무과장을 허겁지겁 뒤쫓아 갔다.
나는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지겨운 눈길을 당사자가 죽은 뒤에도 대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까짓 거 될 대로 되라지. 분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파면이야 시키겠나.’
교재연구에 몰두해보지만 아무래도 편치 않은 마음이었다.
‘이런 일로 내 자신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각오까지 다지며 비는 시간마다 그대로 교무실에 남아 있었다.
―『노려보기 시작했다』 중에서
198
사실 그 날, 그분이‘미술반에 들 거지?’하고 물었을 때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겠다고 응답한 것은 얼떨결에 이루어진 느낌이 컸다. 소란한 교실을 일시에 제압하던 낭랑한 목소리, 깔끔한 포마드머리의 젊은 모습, 허연 얼굴빛과 간간이 빛나던 눈빛 등의 분위기가 나를 다른 대답할 겨를이 없도록 만든 게 아니었을까?
만약 후줄근한 옷차림의 노인 선생님이 우리 학급을 찾아와서, 소란스런 애들을 제압하느라 내 이름을 고래고래 불러서 데리고 갔더라면 나는 미술반에 들지 않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미술실이라니. 작은 석유곤로 하나가 교탁 부근에 불피워있긴 했지만 겨우내 방치된 탓에 아무래도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노인 선생님이 그런 미술실에 있었더라면 더욱 춥고 더 을씨년스레 보였을 텐데……다행히도‘그분’이었기에 덜 춥고 덜 을씨년스레 보인 거라고 나는 회상한다.
전학 온 처음에는, 방과 후 미술반 활동 같은 것도 없는 시골학교라서 나는‘뭐, 이런 학교가 다 있나?’하며 허탈했었다. 한 학기가 지나자, 만화책도 마음껏 보고 애들과 늦도록 놀기도 하며 방과 후 시간을 편하고 즐겁게 보내는 평범한 생활에 젖어서…… 그분이‘미술반 활동을 제대로 해 보겠다’는 어조였을 때 ‘저는 독서반을 할 건데요’하며 응하지 않았을 법했다. 그러기는커녕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 출신이라는 사실까지 상세히 말씀드렸으니, 고생 많았던 방과 후 미술반 활동을 그 순간 나는 깜박 잊었던 걸까? 전형적인 미술선생님의 풍모를 갖춘 그분과 맞닥뜨린 순간에 별 망설임 없이‘네에’하고 미술반 활동에 참가하겠다고 답한 건 그 까닭일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날의 내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분을 기억하다』 중에서
218
지팡이에 의지해 조심스레 산을 오르던 K는 봉우리가 보이는 오솔길에 이르렀을 때 꿩 가족과 맞닥뜨린 것이다.
좁은 오솔길을 어미인 까투리가 막 건넜는데 새끼인 꺼병이들이 미처 뒤따르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K가 갑자기 나타난 탓이었다. 하긴, 소나기까지 내린 평일 오후에 등산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안전한 수풀 속에서 새끼들과 잘 지내던 꿩 가족이 마음 놓고 바깥여행에 나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사람의 등장에 놀라 좁은 오솔길을 넓은 횡단보도인 양 건너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꺼병이들과, 가슴 졸이며 지켜보는 까투리. 애타는 장면을 얼떨떨하게 지켜보고 선 K에게 까투리가 불쑥 말했다.
“좀 봐 주세요. 우리 애들 길 좀 건너게요.”
흉측한 생김의 뱀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K는 난데없는 까투리의 말에 놀라긴 했지만 소름끼치지는 않았다. 아무 동작도 않고 장승처럼 서 있음으로써, 까투리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꺼병이들이 부리나케 오솔길을 건너 어미 곁으로 가더니 함께 숲속으로 사라졌다.
예전의 K였더라면 까투리와 꺼병이들을 잡으려고 난리쳤을지 모른다. 잡아 봐야 제대로 요리해 먹을 수도 없으면서, 피 끓는 수렵본능에 피투성이 참극을 저질렀을 게다. 그러나 이 년째 산을 다니면서 K는 자신도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K는 꿩 가족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는 생각에 흐뭇한 마음으로 봉우리에 올랐다. 소나기에 한층 푸르러진 주위 풍경을 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빗물에 젖은 하산 길은 몹시 미끄러웠다. 지팡이를 짚어가며 한 발 한 발 내려오다 결국 젖은 돌에 미끄러져 진창길에 주저앉았다.
과연, 우천 시에 등산하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뱀들을 만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뱀들은 소나기에 체온이 저하되자, 바위 아래 같은 데 들어가 어서 볕이 쨍쨍 나기만을 바라고 있지 않을까?
K는 진흙 묻은 바지와 등산화를 냇물에 닦으며 뱀들의 처지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참 이상한 K의 변화였다.
―『가섭 별전』 중에서
236
그런데 일이 묘하게 되었다.
2학기 들어서 새끼와 내가 창가 분단에 같이 앉게 된 것이다. 담임선생이 자리 배치를 다시 한 결과였다. 그것도 하필, 내 자리 바로 뒤로 새끼가 앉게 되었으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창가 분단은 1,2교시 수업 때 칠판 글씨가 푸르딩딩하게 보이는 어려움이 있는데 유리창을 통해 밀려드는 현란한 아침 햇살 탓이다. 쉬는 시간에 뒤돌아 앉아 얘기 나누다보면 그 햇살은 새끼의 빡빡 깎은 머리통부터 시작해서 한쪽 뺨, 한쪽 어깨, 오른손 손등으로 발광페인트처럼 흘렀다.
그런데 하필 새끼의 눈동자 색이 멸건 잿빛이었다.
현란한 햇살 속에서 이상스레 빛나는 잿빛 눈동자는, 골목어귀나 쓰레기장에서 맞닥뜨리곤 하던 허연 눈깔의 잡종 개를 연상케 했다. 얘기를 나누다 말고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나의 괴상스레 변형된 얼굴이 새끼의 그 기분 나쁜 잿빛 눈동자 속에 빠져 있어서…… 나는 ‘야, 이 새끼야 네 눈깔 빛깔이 뭐 그러냐?’칵 내뱉고 싶은 충동이 일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새끼와 친해진 거다.
―『승냥이』 중에서
78
아내가 출근하면 혼자 남는 아파트라, 아무도 그의 집필활동을 방해할 수 없었다. 절간처럼 고요해진 아파트 안에, 그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밖에 다른 소리는 존재할 수 없었다. 직장에 나갈 일 없이 집필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이뤄진 것이다.
그러자, 작품이 쓰이지 않았다.
‘거리의 끝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휴지와 라면 봉지와 빈 캔과 짝 잃은 양말 한 쪽까지 훑으며, 사내가 멈춰 서 있는 데까지 끌고 오고 있었다.’
처음 두 줄 이상 나가지 못했다. 그는 당황했다. 완벽한 집필 환경이 갖춰진 순간, 문장이 더 이상 나가지 않다니.
당황하면 당황할수록, 두 줄 이상의 문장은 떠오르지 않았다.
장편소설 집필에 대한 강박증일까?
한 번 바깥바람이라도 쐬어야 할 것 같았다. 한 달째, 그는 아파트 문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옷장에서 연푸른색 춘추 양복을 꺼내어 입고 거울 앞에 섰다. 헝클어진 머리도 빗으로 다듬고 외출할 채비를 마쳤다. 그 때 ‘띵똥’하고 비디오폰이 울었다.
문밖에 누가 온 것이다. 쉬 문을 열어주기에는 세상이 험했다. 그는 문 앞 장면이 나타나는 비디오폰의 화면 스위치를 누르며 말했다.
“누구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화면에도 나타나는 이 없이, 화사한 봄 햇살만 보였다.
그의 아파트는 십층인데 문 앞으로 복도가 있었다. 그 복도의 외부 창으로 봄 햇살 한 무더기가 들어와 빛나고 있었다.
동네 장난꾸러기 아이가 비디오폰의 바깥스위치를 누르고 달아난 걸까?
그는 비디오폰 화면으로 봄 햇살을 지켜보다가…… 양복을 다시 벗어 옷장 안에 넣었다. 명퇴자가 화창한 대낮에 외출할 용무는 딱히 없었다. 소파에 맥없이 앉아 텔레비전의 리모컨을 찾았다.
-「외출」 중에서
265
“홀딱 벗고!”
검은등뻐꾸기가 숲 어디서 그렇게 울기 시작했다. 아내를 보았다. 밭 둘레에 조성한 꽃길 주변을 김매느라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아내는 지인들을 밭으로 초대할 계획이었다.‘산비탈 밭이지만 넓이가 팔백 평이나 되는데다가 꽃들로 아름답게 단장된 곳’이라며 자랑하고 싶은 걸까.
“홀딱 벗고!”
그럼, 아내는 과연 이 밭을 농사지을 의지가 있었나? 남편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밭에서 고생하는데, 자기는 지인들한테 꽃단장 된 밭 풍경을 보여주려고 바쁘다니. 작은 가방 속에 갖고 다니는 부동산 책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든 아내의 요즈음 행동이었다. 문제는 잡초들이 아내와 나의 미묘한 갈등과는 상관없이 사나운 기세로 창궐했다는 현실이다.
“홀딱 벗고!”
아침 햇살이 훤하게 들어차면서 주위의 풍경이 밝고 어두움을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나는 다시 삽자루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는, 생각지도 못하게 농사일에 휘말린 내 팔자를 향해― 단단히 고랑 에 뿌리박은 잡놈의 풀들을 향해 사납게 삽날을 휘둘러댔다.
“홀딱 벗고!”
―『잡초』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