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세 태위 위양공 휘 란(蘭) ▣
청주한씨(淸州韓氏) 시조이신 위양공(威襄公, 853∼916년)께서는 고려 태조 왕건을 보좌하여 고려를 건국한 공로로 벼슬이 태위(太尉) 삼중대광(三重大匡:정일품)에 오르고, 개국 벽상공신(壁上功臣)에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청주 인물로 기재되어 있다.
위양공(威襄公)께서는 청원군 남일면 방서리 방정부락(일명 대머리)에 거주하시면서 무농정(務農亭)을 세우고, 농민 자제들을 모아 교도하고 농도를 강의하였으며 농장을 경영하여 수 만석을 수확하는 부자였는데,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청주(淸州)를 지날 때, 마침 군량미가 떨어져 군사들이 끼니를 거르게 되었다. 이때 위양공(威襄公)께서 무장을 갖추고 나가서 이들을 맞이하여 주었다. 또한 창고의 곡식을 풀어 삼군을 배불리 먹이고 사기를 북돋운 후에 아래 사람들을 거느리고 곧바로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워 고려 왕조의 터전을 닦았다. 위양공께서 벼슬에 오르신 후에도 높은 덕(德)과 어지심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은 위대하신 분이시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산 18번지에 있으며, 뛰어난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방정리가 폐허가 되었고, 그 사이에 산소를 잃게 되었다. 이를 애석하게 생각하는 후손들이 모여 매년 한 차례씩 제사를 지내다가, 문헌에 나오는 “묘재가산(墓在嘉山)”이라는 구절을 참고로 평안도 가산, 회인(懷仁) 가산 등 이름이 비슷한 지역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러나 큰 인물의 묘소는 인멸하는 법이 없다. 인물의 탁월한 명성과 묘역의 웅장한 규모가 평민의 무덤과는 달라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서기 1688년(조선 숙종 14년)에 위양공 묘소 아래에 있는 민가(民家)에 한(韓)씨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동리 사는 노가(盧哥)가 위양공 산소 봉분을 파괴하고 묘갈(墓碣)은 중간을 절단하여 우물 바닥에 깔아치운 후에 산소 뒤에 묘를 썼고, 노가가 죽자 그 아들은 위양공 묘소 앞에다 노가의 묘를 썼다.
이 사실을 안 한씨가 즉시 방정리로 찾아와서 성헌(聖憲)에게 소상하게 알렸다. 성헌이 이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가산(嘉山)의 ‘嘉’자와 가산(駕山)의 ‘駕’자는 음이 서로 같고, 가산(駕山)은 방정(方井)에서 가까운 곳이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청주병사(淸州兵使)로 재임 중인 후손 근(根)에게 제보하고, 근(根)과 더불어 가산에 달려가 조사하니, 비석은 비록 중간이 끊어졌으나 글자가 분명하여 위양공의 묘소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익년 을사년에 후손 참판 성우, 장금(掌今) 형(濙), 군수 숙(塾) 등이 연서로 관에 제소하니, 마침내 상감께서도 알게 되어 조정에서 경조랑을 파견하여 간악한 범행을 적발하고 광중(壙中)을 열어보니 지석이 발견되었다. 이리하여 투총(偸塚)을 굴거(掘去)하고 모역(墓域)을 개봉축한 후에 표석을 세우고 지석을 매장(埋葬)하였으며, 전(祭田)과 묘직(墓直) 재실(齋室) 등을 차례로 마련하고 그 후 영조 때인 1768년에 신도비를 세웠다.
정조 때인 갑인년(1794년) 및 순조 때인 경신년(1800년)에 후손들이 합력하여 제전(祭田)을 더 마련하고, 순조 경오년(1810년)에 세일제(歲一祭)를 복구하고, 경인년(1830년)에 농무정과 신도비각을 중건(重建)하였으며, 광복 후 1976년 및 1980년에 종친회(宗親會) 주관으로 묘역 조경과 비각을 개축하였다.
후손으로는 교위공(校尉公) 휘 영(潁)과 광록소경 휘 총예(聰禮) 두 분이 계신다. 매년 10월 1일에 묘제를 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