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세종대왕이 18남을 2열 횡대로 세운 이유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2.07.18ㅣ주간경향 1486호
얼마 전 ‘인종대왕 태실’과 ‘장조(사도세자)·순조·헌종 태봉도’가 보물로 지정예고됐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왕실의 태를 묻은 태실(인종태실)과 태실의 그림을 그린 태봉도 3점(장조·순조·헌종)의 문화유산 가치를 평가한 건데요.
태는 태아를 싸고 있는 조직입니다. 태아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태반과 탯줄’을 가리킵니다. 궁금증이 생기죠. 아무리 조선 임금과 왕족의 태라지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국가지정문화재로 대접해준다는 말입니까.
경북 성주 선석산 세종대왕 왕자 및 원손(단종) 태실의 배치도. 사진 아래쪽은 나이 순으로 진양대군(수양대군·세조)부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등을 배치했다. 위쪽은 후궁이 낳은 서자 중 가장 연장자인 화의군부터 막내인 왕자 당까지 11명의 태실을 나란히 조성했다. 원손인 단종의 아기태실은 영응대군 태실에서 11.2m 정도 떨어져 있다. / 경북 성주군청·심현용 한국태실연구소장 제공
태를 묻는 이유
1570년(선조 3) 2월 1일 <선조수정실록>을 볼까요.
“태실을 마련해 태를 묻는 풍습은 신라와 고려 사이에 생겼는데, 예부터 중국에는 없었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595~673)의 태를 높은 산(충북 진천)에 묻었는데, 지금(고려)도 이 산을 태령산(胎靈山)이라 한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고려사> ‘지리지·진주(진천)조’에는 “김유신의 태가 신령으로 변했다”고 부연 설명했습니다.
‘태를 신령한 존재’로 본 겁니다. <세종실록> 1436년 8월 8일자를 볼까요.
“사람이 ‘현명할지 어리석을지(賢愚)’, ‘잘될지 못 될지(盛衰)’가 모두 탯줄에 달려 있습니다.”
<세종실록>은 “탯줄이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해져 학문을 좋아하고 구경(九經·9개 유교경전)에 정통하며, 원만하고 마음이 밝고, 병이 없게 되며,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게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자의 태도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해 남들이 우러러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세종실록>은 “길지란 땅이 반듯하고 봉긋하게 솟아 위로 공중을 바치는 듯해야 한다”고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이걸 ‘돌혈(突穴)’이라 합니다.
그후 잇단 정변(계유정난·1453, 중종반정·1506, 인조반정·1623)의 패자(안평대군·연산군·광해군) 태실이 예외없이 파괴·혹은 훼손됐는데요. 태실의 파괴는 곧 조상과 이어지는 핏줄을 끊는다는 뜻이죠. 태를 왕조의 혈통, 즉 정통성의 상징으로 여겼던 겁니다.
왕자들의 태실과 떨어진 곳에 조성된 원손 단종의 태실에서는 “1441년 윤 12월 26일 원손의 태를 묻었다”는 아기태비가 보였다. 1453년 즉위한 단종의 태실은 군주의 격식에 맞게 가봉된 뒤 인근 성주 법전리 법람산으로 이안됐다. / 경북 성주군청 제공
2열 횡대로 집합한 세종의 아들들
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역시 세종대왕입니다.
태실 제도를 확립시킨 분이니까요.
경북 성주 선석산(해발 742.4m) 끝자락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태봉(258.2m)이 있는데요. 태봉의 정상부 평탄지(남북 50m·동서 20m)에 세종대왕의 아들(18명)과 원손(단종) 등 모두 19기의 태실이 ‘2열 횡대’로 있습니다. 왕통을 이은 문종(재위 1450~1452)의 태실만 경북 예천(명봉산)에 따로 조성했고요. 다른 대군(7명)과 군(11명)의 태실이 두 줄로 서 있습니다.
앞줄은 왼쪽에서 진양대군(수양대군~세조, 1417~1468)~안평대군(1418 ~1453)~임영대군(1420~1469)~광평대군(1425~1444)~금성대군(1426~1457)~평원대군(1427~1445)~영흥대군(영응대군으로 개봉·1434~1467) 등의 순으로 조성했습니다.
뒷줄은 왼쪽에서 화의군(1425~?)~계양군(1427~1464)~의창군(1428~1460)~한남군(1429~1459)~밀성군(1430 ~1479)~수춘군(1431~1455)~익현군(1431~1463)~영풍군(1434~1457)~영해군(1435~1477)~담양군(1439~1450)~왕자 당(1442~?) 순이고요. 앞줄은 정부인(소헌왕후·1395~1446)이 생산한 적자를, 뒷줄은 후궁들이 낳은 서자를 태어난 순서대로 배치한 겁니다.
원손인 단종(1441~1457·재위 1452 ~1455)의 아기태실은 영응대군 태실에서 서북쪽으로 11.2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정체를 드러낸 세종의 19번째 아들
세종의 자녀가 18남 4녀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리겠네요. 세자인 문종의 태실이 다른 곳에 조성됐다면 선석산 태실에는 17기(단종 태실 제외)만 남아 있어야 하는데, 왜 18기일까요. 이 선석산 태실의 배치도를 보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종대왕의 숨겨진 아들이 한분 더 있다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왕자 당(?)’인데요.
‘왕자 당’의 아기비와 태지석에는 “1442년 7월 24일 오전 3~5시 사이에 태어났고, 태는 그해 10월 23일 묻었다”고 했습니다.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를 묻은 선석산 태실에는 세조의 태실(아기태실+가봉태실)이 다른 형제들과 함께 그대로 남아 있다. 즉위 후 ‘가봉(加封·군왕의 격에 맞도록 태실을 별도의 길지에 옮기고 치장)’ 태실을 조성해야 했지만 세조가 “임금의 격에 맞게 석물만 따로 만들고 태실을 옮기지는 마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세조는 “형제들의 태가 여기 있는데 굳이 따로 태실을 옮길 필요가 있느냐”면서 형제애를 나타냈다. / 경북 성주군청 제공
그런데 왕실족보인 <선원보>에는 적·서자를 통틀어 ‘막내(18남)=담양군 거(1439년생)’라 했습니다. ‘1442년생 당’은 왕실 족보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 18번째(문종 제외) 태실의 주인공인 ‘당’은 과연 누구일까요.
없는 자식의 태를 묻지 않았다면 자명해지죠. 마지막 태실(18번째)의 주인공은 1442년에 태어난 세종대왕의 막내, 즉 19남인 왕자 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왕자 당’은 왕실족보에 오르지 못했을까요. <세종실록> 1446년 3월 28일자를 볼까요. 즉 세종은 부인(소헌왕후·1395~1446)이 승하했을 때 “겨우 8세인 담양군(이거)은 가장 어리니 상복을 입지 말라”는 명을 내렸는데요. 그렇다면 담양군보다 3년 뒤에 태어난 ‘왕자 당’은 1446년 이전에 죽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심현용 한국태실연구소장은 “다섯 살도 채 안 돼 죽은 왕자였기 때문에 왕실 족보에도 올라가지 않거나 누락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그게 맞다면 18남 4녀로 알려진 세종의 자녀는 19남 4녀로 고쳐야 할 것 같네요.
세종은 세자를 빼고도 아들 18명의 태가 묻힌 선석산을 생각하면 얼마나 흐뭇했을까요. 날로 번창해가는 왕실을 떠올렸겠죠.
아닌 게 아니라 세종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총명했습니다.
세자인 문종을 볼까요.
그분의 치세는 짧았지만(2년 3개월) 대리청정(8년)까지 포함하면 10년간 세종의 치세를 완성시켰고요. 세자 시절, 측우기를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수양대군(세조)은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편찬하고 훈민정음으로 번역했고요. 셋째인 안평대군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서예와 시문, 그림, 가야금 등에 두루 능한 절세의 팔방미인이었죠.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등도 똘똘하기 이를 데 없었죠. 다른 군들의 능력 또한 아버지(세종)를 닮았다면 한결같이 빼어난 재주를 지녔을 겁니다.
조카, 동생들을 죽인 세조의 형제애?
선석산 태실에서는 또 하나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있습니다. 세조, 즉 진양대군(수양대군)의 태실입니다. 조카(단종)를 죽이고 등극한 세조라면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태실을 따로 옮기고 화려하게 치장했을 것 같죠.
그런데 왜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그런 논의가 일었는데요.
세조는 “가봉(加封·임금의 예에 따라 석물을 얹어 치장)은 하되 옮길 필요는 없다”(<세조실록> 1462년 9월 14일)고 손사래를 칩니다. 결국 세조의 명에 따라 비를 세워 다른 왕자들의 태실과 구별짓는 것으로만 끝냈는데요. 세조의 한마디가 재미있습니다.
최근 보물로 지정예고된 장조(사도세자)와 순조, 헌종의 태봉도. 한결같이 풍수상 길지로 여겨진 곳에 조성돼 있다. / 문화재청 제공
“형제들의 태가 여기 같이 있는데 어찌 옮기겠는가. 다만 ‘수양대군(진양대군)의 비’라는 표석만 없애고 비석만 세워라.”
비석의 내용도 의미심장합니다. “아아! 빛나는 오얏나무(李·이씨 왕조를 뜻함), 1000가지 1만 잎사귀라… 성태(세조의 태)를 옮기지 아니하니… 검소한 덕이 더욱 빛난다”고 했습니다.
가히 눈물 나는 형제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조의 형제애는 진심이었을까요.
그보다 4년 전인 1458년(세조 4) 7월 8일 실록 기사를 볼까요.
“선석산에 주상(세조)의 태실이… 난신 이유(금성대군)의 태실이 섞여 있고, 법림산(성주 가야산 기슭)에는 노산군(단종)의 태실까지 있습니다…. 유(금성대군)와 노산군(단종)의 태실을 철거하소서.”
무슨 말일까요.
원손 시절 단종의 아기태실은 세종의 아들(문종 제외 18명)과 함께 선석산에 묻혀 있잖아요.
그런 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법림산에 따로 가봉태실을 꾸몄거든요. 그런데 1453년 일어난 계유정란에 안평대군이, 1455년 단종복위운동에 금성대군을 비롯해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등이 연루되죠.
역적죄를 뒤집어쓴 안평대군의 태실은 이미 훼손됐고요. 1458년의 실록은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금성대군 등 형제 4명의 태실까지 파괴했다”고 기록한 겁니다. 선석산에 조성된 단종의 원손 시절 아기태실은 그냥 두었지만, 법림산(성주)에 따로 조성된 (단종의) 가봉태실은 이때 훼손된 거고요.
2차례의 정변에서 파괴된 선석산의 대군·군 태실 5기는 산 계곡 아래까지 굴러떨어져 있었는데요. 1977년 대대적인 보수·정비 때 그중 일부가 수습돼 지금처럼 복원됐습니다. 그런데도 세조는 ‘형제들과 함께 있겠다’고 형제애를 운운했군요.
‘악어의 눈물’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뭐 달리 볼 수도 있겠죠. 조카와 동생들을 죽이거나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죄를 뒤늦게나마 반성한 참회의 몸부림을 친 것일까요.
정조도 끊지 못한 안태의 폐습
세종 이후 왕실 자손의 태를 묻는 풍습은 성종(재위 1469~1494) 때 그 범위가 공주까지 확대되는데요.
세종이 세운 원칙, 즉 왕실의 태실을 한곳에 묻는 전통은 이어지지 못합니다.
풍수상 좋은 땅과 혈처 역시 단 한곳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죠.
그래서 세종 이후 임금들은 대부분 1인 1곳의 태실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니 폐단이 말도 못 했죠.
왕자·공주가 태어날 때마다 그들의 태를 묻는 안태 행렬을 맞이해야 했던 농번기 백성들의 번거로움은 물론이고요. 태실로 낙점되면 200~300보 거리의 사유지가 하루아침에 농사는커녕 출입도 불허되는 금단의 땅이 됐습니다.
훗날 영조(재위 1724~1776)가 나서서 “하나의 태봉에서 위부터 아래까지 차례차례 묻으라”(1758), “궁궐의 후원에 태를 묻어서 폐단을 없애라”(1765)는 지시를 잇달아 내리는데요. 영조의 뜻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정조(재위 1776~1800)가 1785년(정조 9) 아버지(사도세자·1735~1762)를 위해 가봉태실을 조성하면서 무너지고 맙니다. 사도세자는 왕위를 잇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가봉태실(왕위를 이은 뒤 치장한 태실)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거든요.
정조는 ‘할아버지(영조)-손자(정조)’로 이어진 비정상적인 정권 이양이 아니라 아버지(사도세자)를 거친 정통성을 갖춘 승계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겁니다.
일제는 서삼릉에 새롭게 조성한 왕과 왕자(공·옹주 포함)의 태실 공간을 한 일(一)자 형태로 구분했다. 일본을 상징하는 ‘날 일(日)’ 자 형태이다. 지하의 형태도 마찬가지다. 원형의 시멘트 관에 태지석과 태항아리를 묻고 그 위를 날 일(日) 자 형태의 시멘트 덮개를 씌웠다. / 심현용 한국태실연구소장 제공
날 일(日) 자로 복원한 일제
이렇게 전국 곳곳의 길지(명당)에 봉안돼 있던 조선왕실의 태실은 국권침탈 후 일제에 의해 제자리를 잃고 맙니다.
1929년 전국의 태봉 39곳을 훼철한 뒤 그곳에 조성돼 있던 태실 54위(태항아리 위주)를 경기 고양 서삼릉에 집단 이주시킨 겁니다. 조선 왕조의 만세안녕을 기원하며 봉안한 조선왕가의 태를 죽음의 공간인 무덤(서삼릉)에 묻어버린 셈이죠.
일제는 그렇게 꾸민 왕과 왕자(공·옹주 포함)의 공간을 한 일(一) 자 형태로 구분했다죠. 멀리서 보면 일본을 상징하는 ‘날 일(日)’ 자 형태입니다. 지하도 원형 모양의 시멘트 관에 태지석과 태항아리를 묻고 그 위를 날 일(日) 자 형태의 시멘트 덮개를 씌웠습니다. 심현용 소장은 “땅 위에서 땅 밑까지 조선 왕실의 생명성을 상징하는 태를 일본 안에 가둔 셈”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개 중에는 이런 말도 나올 것 같아요. 세종대왕이 쓸데없이 풍수지리가 접목된 태실 제도를 만들어 갖가지 폐단을 야기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 말입니다. 일리 있는 비판 같아요. 그러나 달리 생각할 필요도 있어요. 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태아와 엄마를 하나의 생명공동체로 묶어준 매개체죠.
한마디로 생명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제대혈을 보관하는 이들이 있다죠. 제대혈에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을 만드는 조혈모세포가 풍부하고, 연골·근육·뼈·신경 등을 만들 수 있는 간엽줄기세포가 다량 함유돼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제대혈 보관은 1400년 가까이 이어온 안태의식의 현대적 버전이 아닐는지요.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