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사도행전 제24강
말씀 / 사도행전 28:1-31절
요절 / 사도행전 28:30,31절
로마의 셋집에서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드디어 사도행전 마지막 강의입니다. 6개월의 긴 여정을 통해 풍성한 말씀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처음 사도행전을 시작했을 때, 위대한 사도들의 스피릿을 따라갈 수 있을까? 많은 부담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말씀을 따라가다보니, 미래를 통찰하고 전략적으로 파고든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닌 반전의 이야기였습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의 박해를 사마리아와 유대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동력으로 만든 반전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역사에 쓰임받는 사도들도 그러합니다. 사도들이 예측하고 전략을 짜서 이룬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돕게 된 것이나 바울이 에베소 역사를 섬기게 된 것도 그러합니다. 이런 저런 사건에 떠밀려 가다보니 일어난 반전의 역사였습니다. 오늘 최종말씀에서 바울이 로마에 오게 된 것도 그러합니다. 바울이 이런 모습으로 로마에 오고 셋집에서 이런 모습으로 복음역사를 섬기게 될 것을 누가 예측했습니까! 한마디로 반전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판단미스와 시행착오가 있을지라도 너무 염려하거나 불안할 필요가 없음을 배웁니다. 다만 때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고자 하면, 주님은 늘 반전의 역사를 이루심을 배웠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이 담대한 마음을 갖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믿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알고보니 바울이 구조된 섬은 멜리데였습니다. 지도를 보면 시칠리아 남쪽입니다. 하지만 때는 겨울에 가까웠고 비가 왔기에, 기온은 차갑고 우중충했을 것입니다. 원주민들이 난파당한 사람들을 동정하여 불을 피우고 영접해 줍니다.(2) 바울은 추위를 쫓기 위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었습니다.(3) 그런데 하필 나무 사이에 독사가 있었습니다. 열 받은 독사는 바울의 손을 물어버렸습니다. 나뭇가지와 뱀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부주의가 낳은 인재였습니다. 바울은 정말 억세게 운이 없어 보입니다. 왜 하필 뱀은 그 시간에 나뭇가지 사이로 파고 들어간 것입니까! 왜 하필 바울은 많고 많은 나뭇가지에서 그 나뭇가지를 주워 든 것입니까! 원주민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한마디씩 했습니다.(4) “이 사람은 진짜 죄를 지은 것이 맞는 것 같아, 풍랑을 피해도 땅에서는 못 피하네”, ‘언제 부어오를까, 곧 있으면 입술은 파래지고 온 몸은 한기로 벌벌 떨겠지’ 원주민들이 시간을 재며 바울을 지켜보는데, 도무지 쓰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더욱 생생해져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5) “혹시 불에 넣어 구워먹을 것 없어요? 제가 뱀고기 먹을 만큼 비위가 강하지 않아서...” 원주민들은 다시 한번 놀랍니다.(6) “이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독사에 물림으로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의 초대를 받게 됩니다. 바울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고생하는 자기의 부친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8) 보블리오는 바울 일행을 영접하고 사흘이나 극진히 대접했습니다.그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안수하자, 부친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섬 사람들이 다른 병자들까지 데려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9) 순식간에 보블리오의 집은 바울한의원이 되었습니다.(10)
결과적으로 독사에 물린 사건은 섬에서 바울을 높여주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이 사건은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당장에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새 역사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고 해서 사건 사고에서 면제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신자들은 겪어보지 못한 사건 사고를 만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겪어보지 못한 질병을 앓기도 하고 마음의 상처나 경제적인 손해를 만나기도 합니다. 독사의 독처럼 치명적인 고난을 만나기도 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사건 사고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당신의 종들을 사건 사고로부터 면제시켜 주지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0:13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독사에게 물렸는데도 죽지 않은 사건은 로마에 들어가는 바울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로마사회는 물질주의의 독, 쾌락주의의 독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다면, 복음 전파는 고사하고 개인 신앙조차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스런 곳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기에 악한 문화를 견디고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병든 세상을 견딜 수 있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치열한 경쟁사회는 염려와 두려움의 독을 뿜어냅니다. 세속주의와 지구환경의 위기는 불안과 우울함의 독을 뿜어냅니다. 아주 똑똑한 청년이 치솟는 집값과 비전 없는 현실에서 오는 무의미와 절망의 독에 쏘였습니다. 그는 매일 술로 무의미와 허무의 고통을 잊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 염려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목자들을 보며 놀랍다는 말을 했습니다. 말씀이 충만하고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하면 그 모든 독들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찬송가 445장입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을 가도 빛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 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세상은 두려움과 염려의 독이 가득합니다. 그럴수록 말씀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건강하고 가장 안전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석 달이 지나고 겨울이 끝났습니다. 겨울 풍랑으로 막혔던 바닷길이 열렸습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배를 타고 다시 로마로 향합니다. 중간 경유지 노선은 이러합니다. 시칠리아의 수도 수라구사에서 사흘(12)을 보낸 후 레기온에서 하루를 보내고 드디어 보디올에 이릅니다.(13) 보디올은 김민재선수가 뛰었던 나폴리의 작은 항구도시입니다. 보디올에서부터는 항해 길은 끝나고 육지로 걸어서 240km 떨어진 로마로 향합니다. 대락 열흘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백부장이 바울을 배려하여 일주일 휴가를 줍니다.(14) 바울은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초대를 받고 함께 머물며 교제합니다. 그 후에 로마의 대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바르네라는 이름이 나옵니다.(15) 로마로부터 70km 정도 떨어진 곳인데, 로마 장군들이 개선행진을 시작한 곳입니다. 로마시민들이 여기에서부터 도로 양편으로 마중 나와 환호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곳에서 로마성도들의 환영을 받습니다. 로마의 개선 장군들은 생명을 죽이고 영광을 차지했지만, 하나님의 일군들은 생명을 살리고 하늘의 영광을 차지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로마 개선장군을 환호하는 행사에 비하면, 마중 나온 형제들의 환영은 정말 작고 초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습니다. 여기에도 믿음의 사람이 있다는 것, 로마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나 한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것 그 자체가 세상을 향한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경민목자는 지난 주부터 육사에서 근무를 시작했는데, 식당에서 만난 화랑센타 목자를 보며 담대함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경민목자 또한 육사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감당하는 모습이 뒤이어 들어오는 누군가에게 담대함과 위로를 줄 것입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도록 허락 받았습니다. 사흘 후, 바울은 유대인 중에서 높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로마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합니다.(17) 이스라엘 백성이나 조상들의 관습을 배척하는 마음으로 로마황제에게 상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총독은 바울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고 석방하려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끝까지 반대하며 죽이려고 했기로 어쩔 수 없이 상소한 것입니다.(17,18)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이 이단적인 가르침을 전파했기에 배척당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소망했던 것을 동일하게 소망했기 때문에 고난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바울의 사상을 들어보고자 날짜를 정하여 모입니다.(21-23) 23절을 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 율법과 선지자의 말 = 예수님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 하면 잘 먹고 잘 사는 강대국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 어디에도 그렇게 증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비롯하여 많은 선지자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고 나서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의 종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는 하나님의 나라를 끊임없이 증거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그런 확신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로마에 온 것입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바울의 집에 모여든 유대인들중에서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서로 의견이 분분하며 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아무 결론 없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분열과 다툼의 원인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으며, 유대인들은 더 이상 공식적으로 바울을 찾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또다시 낙심하고 절망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사야서 6:10절 말씀으로 사건을 해석합니다. 26,27절입니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모든 수치와 조롱을 기꺼이 감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배척이 이사야의 실패나 이스라엘 불신앙의 승리가 아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완악한 마음을 갖고 배척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끝내 돌이키지 않음으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처절하게 고통하고 실패함으로써 겸손해질 것입니다. 밑바닥까지 내려가야만 가난해지고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반전을 통해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됩니다. 열두 제자들이 나오고 바울 같은 세계선교의 일군이 나오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반전의 역사입니다. 우리도 끝까지 자기 고집대로 달려가는 양들을 보면, 목자는 실패하고 양의 고집이 이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배척하고 망가지는 과정 또한 섭리와 주권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믿음으로 현재의 결과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악함과 어리석음 위에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지금 할 수 있는 사명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8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28) 실은 위의 고백은 1차 전도여행 때부터 드렸던 고백입니다.(13:46) 그런데도 바울은 여전히 회당을 돌며 동족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에까지 왔고, 여전히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의 동족 애착의 끈질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때가 아니면 아닌 것으로 매순간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바울 개인의 측면에서 사도행전을 본다면, 유대인바라기 바울에서 하나님의 사람 바울로 터닝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신앙성숙의 길을 가리키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 안에서 반드시 이루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쟁취하고 싶은 성공의 목표일 수 있고, 양이나 가정의 복음화일 수도 있고 커다란 부흥의 역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위해 열정을 쏟아부어야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최종적인 신앙의 그림이 어떠합니까! 30,3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더라” ‘이태’란 2년을 말합니다. 셋집이란 세를 내고 빌린 집으로서 통상 작은 집입니다. 보통 재판이 지연되고 한 곳에 갇혀 오랜 시간을 지내게되면, 답답함과 조바심에 짓눌리게 되고 정신적으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을 다 영접했습니다. 목자로서 이런저런 사람을 영접하려면 보통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심정과 열정을 준비해야 하고 말씀이 있어야 하고 기도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누구든지 가라지 않고 다 영접했습니다. 목자로서 항상 자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가르칩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당한 수많은 고난들, 동족들에게 배척을 받고 배가 파선하고 뱀에게 물리고..., 그러한 고난들이 바울을 망가뜨리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로마의 쾌락적인 분위기, 셋집의 답답함도 바울을 가두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몸은 셋집에 갇혀있는데, 바울의 스피릿은 셋집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셋집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목자의 심정으로 온 힘을 다해 돕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난 모습입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의 마지막 이야기를 바울의 셋집 이야기로 끝낸 이유입니다. 사도행전의 시작은 예루살렘에서 삼천명, 오천명 회개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더 큰 역사, 삼만명, 오만명이 로마교회로 몰려오는 이야기로 끝을 맺어야 스토리의 구성상 맞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 ‘바울의 셋집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큰 세력을 얻었더라’, 그런 표현이라도 써주어야 뭔가 메시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창대한 시작과 비교하면 정말 초라하게 보일 수 있는 셋집에서의 말씀공부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겉으로는 초라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통찰력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커다란 모임이 만들어지는 것 그 자체를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 교회사에서 중세교회가 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을 따라가는 한 사람, 거기에 복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거대한 로마제국과 바울의 셋집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세상은 로마제국같은 거대함에서 비전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도 로마처럼 거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규모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은행도 대형화되고 마트도 대형화되고 대학도 몸집부풀리기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외대는 학교 주변에 땅을 사고 기숙사를 짓고 부속 건물을 때마다 짓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도 살아남으려면 몸집을 키워야한다고 말합니다. 쾌적한 예배당과 넓은 주차공간과 편리한 교통 요건을 가진 인프라를 구비하고 세상에 뒤처지지 않는 스펙을 갖춘 교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덩치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놓쳐버리면, 그러한 생각 자체가 올무가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적으로 변화된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단순하고도 분명한 진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셋집에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희망입니다.
바울이 셋집에 갇혔듯이, 사람마다 자기를 구속하는 셋집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거칠고 메마른 직장이라는 셋집에 갇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좋지 않은 스펙이 자기 인생을 한계 짓는 셋집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현실문제가, 어떤 이는 풍랑 치는 사회적 분위기를 셋집처럼 생각합니다. 때마다 우리를 구속하고 한계 짓게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셋집을 벗어나야만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셋집에 갇혀 있음에도 낙심하거나 한계 짓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지금 오는 사람들을 영접하고 힘써 돕는 그 일에 충성합니다. 바울의 셋집에 누가 왔겠습니까! 가장 확실한 사람은 감시병 군인들입니다. 그들은 간수 갑이며, 바울은 죄수 을입니다. 제일 친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인데, 바울은 담대하고 거침없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을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자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희망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6절에서 증거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우리들도 한계에 갇히지 않는 복음의 능력을 믿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줄기차게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실 것을 믿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으로 우리 믿음과 소망을 새롭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배운 말씀이 헛되지 아니하여 바울과 사도들이 갔던 믿음의 여정을 한걸음, 한걸음 따라가게 하시고 그 가운데 풍성한 믿음의 비밀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한 사람 하나하나가 이 시대의 진정한 희망임을 믿고 담대하게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