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제와 후불제
중국에서 아들이 몇 개월째 머무르고 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아들집을 방문했다. 북경변두리 낡은 아파트가 그의 거처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 곳도 중심가와 마찬가지로 8차선이나 6차선 대로, 자전거도로, 보행자도로... 등등... 큰길들은 잘 갖춰져 있지만 골목길을 들어서면 어수선하고 지저분해서 이 곳이 중국 수도인가 싶게 정리가 안 된 느낌이다.
아들집은 7~8평쯤 되는 공간이다. 겉모습은 짓고 나서 한 번도 손질을 안 한 듯 우중충하다. 현관문은 부서지고 유리는 깨지고...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아파트다.
임대료가 우리 돈으로 환산하여 월30만원정도라는데 우리나라 원 룸 비슷하여 침대, 소파, TV, 냉장고, 옷장... 생필품이 비치되어 있다.
내 아들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에겐 딱 맞는 장소다.
아마도 가까운 곳에 북경외국어대학이 있어서 이런 독신자 아파트가 생긴 것은 아닌지 내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이 나라에선 모든 공공요금이 선불제로 되어있단다.
월세는 물론 선불이고 전기나 수도요금도 일정금액이 들어있는 카드를 사서 계량기에 키워 넣어야 사용할 수 있는 선불이다.
지난겨울에 아들은 전기사용카드에 충당금이 다 된 것을 몰라서 어둡고 추운 밤을 보냈단다.
그 후 자주 카드를 체크하면서 여분금액을 점검해왔다는데 이번엔 수도요금이 바닥났나 보다. 수도가 나오지 않는다.
수도가 안 나오면 일상생활이 마비된다.
먹는 물은 생수를 사다 먹을 수도 있지만 설거지나 세숫물까지 생수로 쓸 수는 없다.
아들은 카드체크 하러 아파트 관리소로 달려갔다.
그런데 컴퓨터에 문제가 발생해서 돈을 넣을 수 없다고 내일 오라고 했다니 내일이나 되어야 물을 쓸 수 있게 된 셈이다. 예치금이 바닥나면 컴퓨터가 그것을 인지해서 즉각 단수조치가 된다고 한다.
이건 너무 몰인정한 조치가 아닌가. 주민들 불편은 전혀 생각지 않는 기계 같은 중국인들이다.
이 곳에서는 물 사정이 나빠서 그런지 종종 카드잔액과 상관없이 단수되는 때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은 세탁기에다 물을 받아 두곤 한다는데, 그 물로 양치질하고 고양이세수하고 꼴짝꼴짝 설거지를 하면서 하루를 버텼다.
다음날도 컴퓨터의 문제점이 해결되질 않았다니 물은 언제나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화장실 변기에 내리는 물이다.
생리현상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도 없고, 여기가 외국인데 낯선 이웃집 문을 두드려 볼 수도 없다.
물 안 나오는 변기지만 그냥 거기서 해결하는 수밖에... 집안은 화장실 냄새로 가득 차 가고... 이건 사람 사는 곳이 아니다.
아들은 "하필이면 엄마 아버지 오셨을 때 이 모양이야! 전엔 잠시 끊겼다가 나오곤 했는데..."라면서 그게 제 죄라도 되는 양 미안해한다.
다음날도 물은 나오지 않았다.
생수를 사다 아침밥은 해먹고 나서, 설거지거리는 싱크대에 쌓아 놓고, 우리는 찜질방으로 향했다.
중심지를 가로질러 버스로 한 시간이나 걸려서 찾아간 곳은 한국인 촌이라고 한다.
큰길가엔 높은 상가 건물들이 늘어섰는데 한글간판이 많이 눈에 들어온다. 아파트 단지도 많다.
아들 말에 의하면 저 아파트 절반은 비어있다고 한다. 이유인즉 요즘 환율이 올라가서 한국인의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드는데 아파트에 세 들어 살던 유학생이나 사업가들이 학업이나 사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버렸기 때문이란다.
찜질방은 한산했다. 종업원이 더 많다. 입구를 들어섰을 때 뭐라 외치던 청년들, 여탕 입구에 서있는 소녀들, 때밀이 아줌마들... 이들 모두 중국인일 것이다.
손님이라곤 젊은 여인 두 명과 나 밖에 없다.
나는 허공에 대고 "여기 한국말 하는 분계세요?" 라고 외쳤다.
손님 중 한 여인이 "네! 왜 그러세요?"라고 답해준다. 반가웠다. 남탕으로 간 가족을 30분 후에 만나기로 했는데 여기가 목욕탕인지 찜질방도 겸한 곳인지를 물었다.
들어 올 때 땀복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그냥 목욕탕이란다.
그렇다면 30분에 목욕을 마칠 수없다. 한 시간에 걸쳐 씻고 나와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서 가족이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종업원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다. 나는 남탕 쪽을 가리키면서 손짓 몸짓으로 "두 사람이 나왔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신발을 달라는 뜻의 몸짓을 보여 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계산을 해야 주겠다는 것 같았다.
아니 여기는 후불제였나? 아들이 계산하고 들어간 줄 알고 있었는데...
잠시 후 우리말 하는 조선족인 듯한 여인을 데려왔고, 문제는 해결 되었다. 찜질방이 맞다고...
나는 땀복으로 갈아입고 찜질방으로 가서 기다리는 가족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찜질방에선 선불을 받고 땀복을 내 주고 신발도 본인이 간수하도록 열쇠를 주는데, 우리 것을 따라 생겨났다는 중국 찜질방에선 요금수납 방식은 후불제로 택했나 보다.
손님신발을 종업원이 가져다 간수했다가 돌아갈 때 요금을 받고 내준다.
그들에게 그 방식이 나쁠 건 없다. 신발 없이는 다라날수도 없는데 받을 돈 떼일 일은 없을 테니까.
후불제는 정감이 있다.
옛날 우리가 가난했던 시절에 외상장부가 그 대표적인 후불제의 증거다. 외상장부를 들고 전방을 전전하다가 월급 타면 정리하고...
그렇게 살아가던 서민들, 가난했지만 선량했던 사람들을 배려해서였을까. 우리나라에선 수도료 전기료가 미납됐다 해도 당장 끊어 버리지는 않았다. 몇 차례 독촉장을 보내서 소비자가 준비하기를 기다려 준다. 이처럼 융통성 있는 후불제가 인본주의 제도일 듯 하다.
그런데 선불제는 어떤가, 쓰려면 돈부터 내라는 것은 너무 비정한 것 같다.
그런 선불제도사회 북경에서도 외상거래가 이루어질까? 외상은 고사하고 컴퓨터시스템에 이상이 생기면 돈이 있어도 수도 물을 사용할 수 없는 곳이 중국북경이 아닌가. 불편함을 호소해도 누구 하나 귀 기우려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곳, 담당자를 찾아가도 그저 '기다려라'면 그만이고 서둘러 개선할 성의조차 없으니 정말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것 같다.
그들이 선택한 선불제가 말해주듯 돈 없으면 살수 없는 삭막한 곳이 북경이었다.
2009. 3. 21. 글: 이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