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간의 프로화 작업
한국야구의 프로화 작업은 이미 1975년에도 있었다. 결국 '일장춘몽’처럼 끝나고 말았지만 당시의 계획은 매우 거창한 것이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재미실업가 홍윤희(洪胤熹)는 그 해 11월에 내한, 야구인들과 접촉하면서 프로화의 길을 타진했다. 당시 고교야구는 한국에서 최고인기스포츠로 자리잡고 있었고 일본 프로야구계에서 동포선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등 야구의 양적·질적 크기로 보아 프로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실업야구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승진을 위해서는 오래 선수생활을 하면서 야구인으로 꽃을 피우는 것보다는 일찌감치 은퇴해서 업무에 들어가는 편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를 정도였기 때문에 야구발전을 위해서는 획기적으로 틀을 바꿔 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지하전선관 사업을 하는 홍윤희는 국내 야구인들로부터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자 일단 미국으로 돌아가 필요경비 20만 달러를 준비해갖고 1976년 초에 재입국, 가칭 '한국프로야구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홍윤희를 회장으로 하는 준비위는 김계현(金桂鉉) 한전 감독, 이호헌 실업야구연맹 사무국장, 허종만(許宗萬) 육군 감독, 장태영(張泰英) 상업은행 감독, 박현식(朴賢植) 제일은 감독, 정두영(鄭斗永) 철도청 감독, 허정규(許正奎) 농협 감독 등 8명을 준비위원으로 선임하고 2월 5일 프로화작업 추진을 공식발표했다.
준비위는 당장 1976년을 기점으로 1980년까지 프로야구를 정착시키기 위한 5개년 계획을 밝혔다. 첫해인 1976년에는 정지작업으로 10개 실업팀을 각 시·도에 배분하고 동해리그·서해리그로 나누어 팀당 상호방문으로 130게임을 치르고 양 리그의 우승팀끼리 코리안시리즈로 패권을 가린다는 것이다.
1976년의 경기내용을 토대로 1977년에는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인천 등에 본거지를 둔 6개 프로구단을 만들어 3개팀씩의 2개 리그를 정식으로 발족시킨다는 것이 2차년도 계획이었다.
1978년에는 서울과 전주에 1개팀씩 증설하여 총 8개팀으로 늘리고 1979년에는 미국 일본 멕시코를 포함한 4개국이 참가한 월드시리즈를 추진하며 5차년도인 1980년에는 한국의 8개팀과 일본의 12개팀이 모두 참가하는 동북아시아리그를 창설한다는 것이 주요계획이었다.
선수에 대한 대우는 최저연봉을 2백40만원으로 하고 성적과 관중동원수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 선수의 분발을 촉구한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우선 10개 실업팀의 지역안배에서부터 팀간에 이해득실이 엇갈렸고 각 지방구장에 야간조명시설을 설치하는 것도 난제였다. 당시 야간조명시설이 설치돼 있던 곳은 서울운동장뿐이었다.
추진위의 이같은 계획서를 놓고 이 해 3월 3일 문교부·내무부·상공부·재무부·대한체육회 등의 관계자들이 간담회를 열었으나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했다. 특히 대한체육회는 실업 10개팀을 지방에 분산해서 경기를 치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게다가 시즌이 눈앞에 다가왔고 야구협회 입장에서는 9월에는 대만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대회의 주축이 되어야 할 선수들을 프로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첩첩산중의 벽에 부딪친 홍윤희는 두 손을 들고 3월 15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버렸고 프로화계획은 40여일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야구협회는 이런 작업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을 제재할 움직임을 보이자 대부분의 실업야구관계자들은 프로야구 추진에 공식적으로 관여한 것은 아니라고 발뺌했고 야구협회 이사회가 이 해 실업야구도 종전대로 3차리그로 치르기로 결정함에 따라 홍윤희의 프로화 작업은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민간주도의 프로화 계획은 지역연고제 등 1982년 실제로 탄생한 프로야구의 밑그림이 됐다는 점에서 의의와 보람을 찾을 수 있다.
2. 프로야구의 밑그림
프로야구 창설의 청사진을 만들고 기초작업을 펼친 사람은 이용일(李容一)과 이호헌(李虎憲)이었다. 엄밀한 순서로 말한다면 이호헌이 최초로 정부당국과 선이 닿아 프로화를 추진하면서 서울대 상대 동창으로 야구행정에 뚜렷한 수완을 가진 이용일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이들은 1979년 통합야구협회의 전무와 운영부장으로 각각 일하다가 1980년 10월 이른바 사회정화 차원에서 야구행정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야구 사업에 관한 기획이나 추진력은 비상했다.
문화방송(MBC)은 1981년 5월경 창사 20주년 기념사업으로 프로야구팀 창단을 구상, 이호헌에게 구체적인 창설계획을 요청했다. MBC의 구상은 현재처럼 전국에 프랜차이스를 분할, 조직적인 프로야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축구의 할렐루야팀처럼 우수선수만을 모아 1개팀만 구성, 프로야구의 싹을 틔우겠다는 계획이었다. MBC에서 야구해설을 맡아 기회 있을 때마다 야구의 프로화를 부르짖어온 이호헌은 MBC의 요청을 흔쾌히 승락하고 대략적인 설계도를 만들어 주었다.
같은해 7월경 정부 쪽에서도 주요 스포츠의 프로화를 꾀하면서 청와대비서실 이상주(李相周)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이 업무를 주관했다. 그는 스포츠 프로화에 고심하고 있다가 마산 출신인 우병규(禹炳奎) 정무제1수석비서관으로부터 동향 출신 야구인 이호헌을 소개받아 프로야구 창설에 관한 협조를 요청했다. 때마침 MBC 이진희(李振羲) 사장이 프로야구 창립계획을 정부에 보고함으로써 야구의 프로화 움직임은 한층 활기를 띠게 됐다. 이호헌은 8월에 접어들면서 이용일을 이상주 수석에게 소개, 함께 손을 잡으면서 작업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게 됐다.
이용일은 한국야구의 실정과 성향에 맞춰 20일간의 작업 끝에 '한국프로야구창설계획서’라는 18쪽짜리 청사진을 완성시켰다. 이것은 1975년에 재미실업가 홍윤희(洪胤憙)의 주도로 추진됐던 민간 차원의 프로화 작업내용을 기초로 한 것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정부측의 스포츠 프로화는 야구뿐 아니라 축구도 동시에 검토하면서 관련 체육단체에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이런 구상에 대해 대한축구협회는 전용구장 건설 등 어마어마한 재원이 필요하다며 현실성이 희박한 부정적인 방향으로 건의했고 야구쪽에서는 기존구장에 야간조명시설만 추가하면 당장 프로야구를 치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 야구가 먼저 프로화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이용일의 이 계획서는 1979년부터 실시해온 야구대제전(野球大祭典)이 대성공을 거둔 것에 기초를 두었다. 이 대회는 대학·실업선수들이 출신고교별로 모여 모교 유니폼을 입고 야구의 전통과 기량을 겨루는 것으로서 각구단의 본거지를 지역별로 안배하면 모교와 제 고장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프로야구팬으로 흡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용일은 야구가 국내 최고인기종목으로 성장한 원동력은 모교애 30%, 향토애 70%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즉 프로야구가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향토애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용일은 500여명의 실업·대학선수명단을 놓고 출신고교별로 분석한 결과 서울·경기·강원을 한 팀으로 묶고 충남·호남, 대구·경북, 부산·경남 등 4개팀으로 나누면 각 지역별로 전력의 균형이 맞는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프로야구는 흥행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각팀간 전력의 균형이 다소 무너지더라도 서울, 경기·강원, 충·남북, 전·남북, 대구·경북, 부산·경남 등 6개팀으로 나눠야 한다고 계획서를 수정했다.
당시만 해도 프로야구가 직업으로서의 안정성이나 흥행사업으로서 정착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실업선수들을 프로로 전향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금전적으로 프로전향을 유발할 만한 액수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따라 이용일은 1981년 현재 한국화장품 선수로 뛰고 있던 김봉연(金奉淵)의 수입을 기준으로 연봉을 책정했다. 당시 그의 총급여는 보너스를 합쳐 4백80만원이었는데 프로 선수는 정년까지 직장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10년에 벌 것을 1년에 벌도록 한다는 계산 아래 계약금 2천만원에 연봉 2천4백만원으로 특급선수에 대한 대우의 기준을 삼았다. 이것은 특급선수에 한한 것이고 그 뒤로는 A급에서부터 F급까지 등급을 정해 대우에 차등을 두었다.
그밖에 각 구단의 선수·임원 편성, 프로야구 육성 9개년계획, 총수입 예산 및 1백억원 달성 5개년계획 등 관련사항들을 설계했다. 이웃 일본을 교과서로 삼되 각 연고지의 시장규모로 볼 때 지역별로 큰 차이가 나는 것이 불가피하므로 전체 6개 구단의 수입을 동일하게 분배하는 '공동채산제’ 등 국내 실정에 맞게 변형시켜 놓았다.
그러나 프로야구 창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므로 창립계획은 현실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시행과정에서 수정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17년이 지난 1998년에 와서도 이상과 현실에는 여전히 커다란 거리가 남아 있게 되었다.
당초 계획은 출범 첫해부터 일본처럼 연간 130게임을 치른다는 것이었으나 80게임으로 줄여야 했고 특급선수(계약금 2천만원, 연봉 2천4백만원)도 팀당 1∼2명씩 두도록 정했으나 1982시즌에 이런 대우를 받은 것은 6개 구단을 통틀어 오로지 OB 박철순뿐이었다.
3. 구단 창설 과정
프로야구 창설에 가장 어려웠던 작업은 프로야구단을 창설하겠다는 기업의 물색이었다. 당시는 소주주들의 출자로 대자본을 형성하는 시민구단 따위는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고 1982년 출범을 목표로 한 마당에서는 대그룹을 포섭하는 방안밖에 없었다.
구단을 맡을 기업체의 선정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① 재무구조가 튼튼한 대기업을 총수의 출신도별로 선정한다.
② 경쟁상대인 동업종을 가급적 피한다.
③ 전체 그룹의 종업원수가 3만명 이상인 대기업체를 우선으로 한다.
④ 프로야구 발전에 관심과 성의가 있어야 한다.
이런 원칙 포섭 대상기업의 우선순위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기업체 유치작업은 애당초 순조로울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창업에 필요한 자금은 선수계약금과 연봉, 선수단 운영비와 구단의 경상지출 등을 합쳐 연간 7억원이 소요되는 데다 신생 레저산업인 프로야구가 과연 망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인가 하는 점에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공교롭게도 1981년은 제2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 전반적인 경제 사정이 어려웠던 시기여서 당초 지목했던 기업들의 호응도가 무척 떨어졌다. 불과 한 시즌을 치르고나자 "50억원을 준대도 구단을 팔지 않겠다”고 할 만큼 프로야구 프랜차이스의 인기는 급등했지만 창설시기에는 당장 계획대로 되더라도 3년간 수억대의 적자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각 기업은 냉담한 반응을 보여 당초 1, 2순위로 교섭대상에 올랐던 기업 중에서 참여 의사를 나타낸 곳은 세 곳밖에 되지 않았다.
서울지역은 MBC가 이미 독자적인 프로야구 창단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순위로 창설의사를 밝혔다. 사실 서울은 한국시장의 노른자위라는 점에서 MBC로서는 권고하지 않더라도 우선권을 주장하고 나설 판이었다.
실업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던 롯데도 국내 제2의 도시 부산을 연고지로 한다는 점에서 쉽게 프로 전환에 동의하고 나섰다. 다만 롯데는 나중에 연고지를 놓고 약간의 이견을 내세웠다가 곧 수그러드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뒤에 설명하기로 한다.
삼성도 대구에 팀을 창설한다는 데에 흔쾌히 동의했다. 다만 삼성측에서 뒷날 밝힌 불만은 프로야구에 동참하는 기업들이 대그룹이 아니라 '조무래기’들이라서 더불어 야구할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냥 불만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듯이 8월부터 시작된 프로야구 참여 권유작업은 불과 10일만에 3개 기업을 포섭하는 것으로 급진전을 보았다.
포섭팀은 삼양사(三養社)를 호남지역을 맡을 팀으로 포섭하기 위해 당시 대한야구협회 부회장이던 김상겸(金相謙)과 접촉했다. 김상겸은 삼양사 김상홍(金相鴻) 사장과 사촌형제간이었다. 포섭팀은 프로야구 활동이 제품판매 신장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면서 김사장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만약 삼양사가 광주에 팀을 만들었더라면 "해태, 해태” 하는 호남야구팬들의 구호가 "삼양, 삼양!"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김상홍 사장은 자신이 운동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운동부를 설치할 용의가 없음을 확실히 밝히면서 거절했다.
이렇게 되자 이용일-이호헌으로 이뤄진 권유팀은 제2방안에 따라 금호그룹을 접촉했다. 금호실업의 박삼구(朴三求) 사장은 창단이 어려운 사안이긴 하지만 참여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사촌형 박상구(朴相求 전 삼양타이어 사장)와 의논해서 부친 박인천(朴仁天)을 설득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이렇게 호남팀에 대해 반내락을 얻어놓은 채 포섭팀은 인천과 대전지역을 맡을 기업을 찾아나섰다.
인천의 제1순위에 오른 현대는 프로야구에 애당초 관심이 없었다. 정주영(鄭周永) 회장은 곧 닥쳐올(9월) 바덴바덴 IOC총회에서 88올림픽 서울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라 프로야구는 완전히 관심 밖이었고 현대건설 이명박(李明博) 사장은 수영연맹회장을 맡고 있던 터라 올림픽 메달획득에 전력투구하겠다며 프로야구팀 창단을 거부했다.
대전을 연고로 하는 기업을 물색하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제1순위로 꼽힌 동아그룹의 계열사인 대한통운의 김경태(金慶泰) 전무는 권유팀으로부터 취지를 설명듣고는 독단적으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므로 사장단회의에 부치겠다고 밝혔다. 마침 사장단은 프로야구 창설 계획에 동의했으나 최원석(崔元碩) 회장은 생각이 달랐다. 탁구협회장을 맡은 그는 올림픽에서 탁구로 금메달을 따는 데 매진하겠다며 사장단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아건설 포섭에 실패한 관계자들은 제2방안으로 한국화약 그룹과 접촉할 요량이었다. 한국화약그룹 창업주 김종희(金鍾喜)는 천안 북일고를 창단하면서 야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때 프로야구가 창설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두산그룹이 동참할 의사를 스스로 밝히고 나섰다. 두산은 당초 서울 지역의 제2 권유대상이었지만 MBC가 이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프랜차이스를 얻을 기회를 잃고 있었다. 두산그룹은 그 전까지 야구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박용곤(朴容昆) 회장은 미국 워싱턴대에서 유학하면서 미국사회에서 프로야구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마침 박용곤과 이용일은 경동고 선후배라는 학연을 갖고 있었다. 이용일은 "서울은 MBC, 인천은 현대로 확정됐으니 대전을 맡을 용의가 있느냐”고 의사를 타진, 박용곤으로부터 승락을 얻어냈다.
이 때는 현대가 인천에 대한 창단거부 의사를 확실하게 밝히기 전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현대가 뒤로 물러서면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인천이 '사고지역’이 됨에 따라 권유팀은 한국화장품과 접선했다. 당시 대한야구협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아마추어 실업팀을 운영하고 있던 임광정(林光廷)은 프랜차이스를 서울에 두고 기존멤버를 그대로 유지시켜 줘야만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두가지 조건은 권유팀이 구상하고 있던 프로야구창설 기본틀에 모두 어긋나는 것이었다.
포섭팀은 대한항공으로 기수를 돌렸다. 대한항공은 이 신종사업에 대단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조중훈(趙重勳) 사장은 마침 해외에 출장중이어서 최종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천을 사업의 발판으로 삼은 조중훈은 반응이 달랐다. 유류파동으로 1980, 81 두 해에 걸쳐 연간 2백억원씩의 막대한 적자가 난 마당에 계획서상으로도 5년간 10억원 이상의 적자를 감수해야 하는 프로야구단을 창설한 다는 것은 도저히 주주총회의 승인을 얻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한두 해만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권유팀에게는 그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아무튼 인천은 현대, 한국화장품, 대한항공이 모두 거부하는 바람에 가장 고민스러운 지역이 돼버렸다. 그렇더라도 1981년 10월 25일의 시점에서는 ▲서울=MBC ▲부산=롯데 ▲대구=삼성 ▲광주=금호 ▲대전=두산 등 인천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대체적으로 포섭작업이 마무리돼 있었다.
4. 작업의 혼선
은밀히 진행되던 프로야구 창설작업은 10월 28일 동아일보가 특종보도함으로써 만천하에
공개됐다. 삼양사는 동참을 거부하면서도 프로야구에 관한 정보만은 관계자들의 입을 거쳐 같은 계열인 동아일보에 흘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보도는 그동안 진행해온 작업에 또 한번의 뒤틀림을 가져왔다.
첫째는 금호의 불참 선언이었다. 동아일보는 호남지역을 맡을 기업이 금호라고 보도했으나 이때는 박삼구가 그룹 총수인 부친 박인천에게 프로야구 사업에 관해 보고하지 않은 상태였다. 80고령의 박인천은 자신도 모르는 대사업이 뒷전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에 진노했다. 게다가 어느 일간지는 금호가 재무구조가 허약해 프로구단을 운영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보도, 이 기업을 더욱 자극했다.
금호가 참여를 거부하자 권유팀은 호남에 대한 제3의 카드로 대한교육보험과 접촉했다. 교보는 이 문제를 이사회에서 논의했으나 결국 창단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럴 즈음 현대마저 인천연고를 맡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두산은 '꿩 대신 닭’이라는 의미에서 서울은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대전이 아닌 인천으로 프랜차이스를 정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권유팀은 그럴 경우 대전에 또다시 새로운 기업을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서울의 선수자원에서 3분의 1(2―1 비율로 드래프트)을 분할해주고 3년 뒤 서울로 본거지를 옮기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두산의 본거지 이동에는 이미 서울에 본거지를 확보해놓은 MBC의 동의서가 첨부돼 있었다.
그런 가운데 광주지역의 연고기업을 물색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김종태(金宗太) 전남야구협회장과 아마추어 롯데 감독을 맡았던 김동엽(金東燁)이었다. 이들은 경복고 동문이라는 학연을 가진 박건배(朴健培) 해태제과 사장과 접촉, 프로야구 활동이 기업홍보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역설했다. 박건배는 광주지역에 프랜차이스를 개설하는 전제조건으로 김동엽이 창단감독을 맡는 것과 재무부로부터 40억원의 구제금융을 알선받는다는 두가지를 내걸어 모두 동의를 받았다. 포섭팀은 경쟁적인 동일업종의 가입은 가급적 피한다는 선정기준마저 어기면서 롯데와 제과업계 라이벌인 해태를 끌어들인 것에 안도의 한숨을 돌렸지만 실질적으로 프로야구의 홍보효과를 가장 크게 즐긴 기업이 '억지춘향’으로 뛰어든 해태였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해태의 가입수락에 따라 11월 10일께는 인천을 제외하고 다시 5개 도시에 연고기업을 갖추게 되었다. 프로야구 참여를 확정지은 일부 기업의 실무자들은 인천은 아예 빼버리고 5개팀만으로 출범하자는 의견도 내세웠으나 삼성은 그렇게 된다면 자기들도 창단을 포기하겠다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매듭이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자 11월 17일로 예정된 대표자회의는 유산되고 말았다.
관계자들은 대책없이 날짜만 허비할 게 아니라 일단 11월 25일 하오 5시30분 신라호텔에서 정식 모임을 갖기로 합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5개팀만으로 출범하는 것도 불사하기로 의견을 모은 상태였다.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긴장된 모임에 극적으로 반가운 동참자가 나타났다. 바로 삼미그룹의 김현철(金顯哲) 회장이었다. 경기중을 졸업,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유학하면서 야구에 매료됐을 뿐 아니라 삼미목재, 삼미해운 등으로 인천과 연고를 갖고 있던 김현철은 인천지역을 맡을 연고기업이 없어 프로야구가 출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보도를 접하고 이 지역을 떠맡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직접 회의장에 나타났던 것이다. 김현철이 권유팀에 참여의사를 밝힌 것은 이날 회의가 벌어지기 불과 6시간 전인 상오 11시였다.
이렇게 해서 6개 구단의 프랜차이스가 정립(定立)돼 모든 문제가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이번에는 또다른 잡음이 생겼다. 롯데의 불만이었다. 해태가 등장한 것은 △ 경쟁적인 동종업계를 가급적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원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프로구단 운영이 가져오는 광고효과로 벌충할 수 없을 정도로 판매전략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고 △특히 호남지역의 롯데 대리점들은 지역감정 때문에 시장점유율이 더욱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며 본거지를 서울로 옮겨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권유팀은 롯데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룹 전체의 사세에는 결코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과 회유를 하고나서 1981년 12월 11일 프로야구 창립총회로 밀어붙였다.
5. 창립총회
이날 하오 2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는 김병주(金丙注 MBC 관리이사) 권태명(權泰鳴 두산그룹 기획상무) 이혁근(李赫根 삼미사 관리이사) 김동영(金東永 삼성 동방생명이사) 한영국(韓英國 롯데제과 상무이사) 김명하(金明河 해태제과 관리이사) 등이 구단주들을 대신해서 모여 김병주의 사회로 프로야구의 골격을 이루는 정관을 통과시키고 한국반공연맹이사장 서종철(徐鐘喆)을 초대 총재로 추대했다. 총재 후보로는 최규하(崔圭夏) 전대통령, 김정렬(金貞烈) 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 신현확(申鉉碻) 전국무총리 등이 물망에 올랐으나 전두환 대통령은 서종철의 이름 옆에 낙점의 ○표를 했다.
프로야구 출범의 산파역을 맡은 이용일은 사무총장, 이호헌은 사무차장으로 선임됐다.
백발의 국제신사 서종철은 취임사를 낭독했는데 이 취임사는 프로야구의 '독립선언문’과 같은 것으로서 프로탄생의 동기와 존재이유가 밝혀져 있다.
"오늘은 이 땅에 프로야구가 처음으로 탄생하는 기념될 날이며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그 산파역으로서의 기쁨과 증인으로서의 책임을 함께 갖게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한국야구는 그 어느 스포츠보다도 우리 국민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아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야구를 통해서 고향땅의 풋풋한 흙냄새를 되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 순수한 향토애와 젊은 시절의 정열을 바탕으로 이제 우리 야구는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략) 앞으로 우리 한국야구는 한계점에 다다른 아마추어 야구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고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꿈을 키워주며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에게 밝고 건강한 여가선용을 약속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야구는 규칙의 경기이며 페어플레이의 경기입니다. 프로야구에 관여하는 모든 선수와 임원, 그리고 관중들은 야구경기를 통하여 규칙을 지키고 페어플레이를 몸에 배게 해야겠습니다. 프로야구에 관여하는 모든 선수와 임원, 관중은 가장 건전한 시민이며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신사들이라는 것을 본인은 확신합니다. (하략)"
대통령이 이 정도로 프로야구 발전에 호의를 갖고 있었던 터라 당시 각 구단주나 KBO관계자가 좀더 프로야구 발전에 좀더 거시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더라면 전용구장 건립도 이룰 획기적인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창단의 포맷
프로야구 6개 구단은 1982년 1월 15일 OB 베어스를 필두로 순차적으로 창단식을 갖고 팀으로서 출범했다. OB는 김영덕 감독을 사령탑으로 하는 코칭스태프 3명과 김우열 윤동균 박철순 등 선수 25명으로 구성됐다.
그뒤 MBC 청룡은 1월 26일 문화체육관에서, 해태 타이거스는 1월 30일 해태제과 본사에서, 삼성 라이온즈는 2월 3일 호텔신라에서, 삼미 슈퍼스타즈는 2월 5일 인천상공회의소 강당에서 각각 창단식을 치렀으며 롯데 자이언츠는 가장 늦은 2월 12일에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에서 창단식을 거행했다.
각 구단의 원년 선수단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가나다순)
◇롯데
▲구단주=신준호 ▲대표이사 단장=조동래 ▲구단이사=정학재 ▲감독=박영길 ▲코치=김명성 최주억 ▲선수=최규옥 노상수 천창호 김문희 김덕열 방기만 이진우 이윤섭(이상 투수) 차동렬 최순하(이상 포수) 김정수 김일환 김용철 이성득 김용희 정학수 권두조(이상 내야수) 김성관 박용성 엄태섭 정문섭 김재상(이상 외야수)
◇삼미
▲구단주=김현철 ▲단장=이혁근 ▲야구부장=차호용 ▲감독=박현식 ▲코치=이선덕 이춘근 ▲선수=인호봉 이동주 박경호 김동철 이하룡 한상연 김재현 감사용 오문현(이상 투수) 최영환 김진철 금광옥(이상 포수) 김구길 김경남 이철성 송경섭 조흥운 장정기 허 운 이찬선 한인철 김무관(이상 내야수) 양승관 문주모 김호인 이경수 박준영(이상 외야수)
◇삼성
▲구단주=이건희 ▲단장=이수빈 ▲구단이사=김동영 ▲감독=서영무 ▲코치=우용득 임신근 ▲선수=이선희 황규봉 권영호 성낙수 박영진 송진호(이상 투수) 이만수 손상대 손상득(이상 포수) 배대웅 함학수 박정환 천보성 김한근 오대석 서정환(이상 내야수) 정현발 정구왕 김휘욱 박 찬 허규옥 장태수(이상 외야수)
◇MBC
▲구단주=이진희 ▲단장=조광식 ▲야구부장=손영식 ▲감독 겸 선수=백인천 ▲코치=유백만 이재환 한동화 ▲선수=이길환 이광권 차준섭 유종겸 김시철 정순명 하기룡 박석채(이상 투수) 최정기 유승안 김용운 신언호(이상 포수) 김인식 김용달 정영기 김용윤 박재천 이광은 조 호 김재박(이상 내야수) 이종도 송영운 김봉기 배수희 최정우(이상 외야수)
◇OB
▲구단주=박용곤 ▲단장=박용민 ▲사무국장=이민우 ▲감독=김영덕 ▲코치=김성근 이광환 ▲선수=계형철 황태환 박상열 박철순 김현홍 강철원 선우대영(이상 투수) 조범현 김경문 정종현 김진홍(이상 포수) ▲선수=이근식(大) 신경식 김광수 구천서 양세종 박종호 유지훤(이상 내야수) 윤동균 이홍범 김유동 정혁진 이근식(小) 구재서 김우열(이상 외야수)
◇해태
▲구단주=박건배 ▲단장=박종세 ▲야구부장=김현진 ▲감독=김동엽 ▲코치=조창수 유남호 ▲선수=김용남 강만식 이상윤 신태중 방수원(이상 투수) 박전섭 김용만 김경훈 홍순만(이상 포수) 김봉연 차영화 김성한 최영조 조충렬 임정면(이상 내야수) 김준환 김우근 김종모 김종윤 김일권(이상 외야수)
김일권은 대표선수 이탈로 대한야구협회로부터 징계를 받고 있던 중 3월 28일 개막전에서 해태가 롯데에게 142로 대패하면서 선수부족증을 호소, 야구협회의 제명 결의를 거쳐 3월 31일 MBC전부터 해태선수로 뛰게 됐다.
그리고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신기(神技)의 번트’로 동점을 빼내는 수훈을 세운 김재박은 정규시즌 종료를 앞둔 9월 30일 MBC와 입단계약, 맛뵈기로 3게임을 뛰는 것으로 원년에 데뷔했다. 성적은 13타수3삼진, 안타는 0.
이 자료의 출처는 (한국야구사)임을 밝힙니다.
한국야구사의 자료를 그대로 올리는 관계로 한국프로야구의 산파역이셨던 이호헌 선배님과 우병규 선배님께 존칭을 표하지 못하였슴을 양지하여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