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두와 아란야(Galduwa Arañña)
이곳은 갈두와 전통의 아란야 사원이다.
다음날, 나는 본격적으로 개인 수행처
인 꾸띠(개인 토굴)를 찾아나섰다.
오늘은 왼쪽 산에 밀집된 꾸띠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갈두와 전통은 스리랑카 종단의 한 파로
숲 속 전통 사원을 의미한다.
어느 부유한 사업가 한 분이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려는 수행승들을 위하여
1969년 키린디윌라(Krindiwela)의 숲
속에 이 아란냐를 설립하고, 자신도 아란
냐 수행승이 되었다.
‘열반 아니면 죽음(Nibbana or Death)’
이것은 아란야 사원의 주요 원칙이다.
이들이 얼마나 진지하고 철저하게 수행했
는지 다음 원칙을 보면 알 수 있다.
“① 한 번 이 아란냐에 들어온 비구는 果位를 성취하기 전에는 아란냐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② 재가자든 승려든 아란냐 밖의 사람들과 말하지 않을 것이다. ③ 불교의 제반 문제에 대해서 기사나 편지를 쓰지 않을 것이다. ④ 숨이 다할 때까지 수행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⑤ 해탈을 하기 전에는 법을 설하지 않을 것이다.”
-Mitirigala Arañña의 원칙 중에서-
스리랑카는 동남아가 아니라, 인도 아래
에 있는 남아시아에 속하는 섬나라다.
그래서인지 확실히 동남아인들과는 기질
이 다르며 식문화도 다르다.
태국은 대부분의 음식이 육류지만 스리랑
카는 거의 채식주의자라고 할만큼 야채와
유제품, 그리고 여러종류의 커리가 주를
이룬다. 대부분이 채식주의다. 육류로는
가끔 생선조림과 말린 생선포가 전부다.
왜 이런 음식을 주로 먹는지, 또 그것이
수행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
차후 수행의 조도품에서 설명할 것이다.
이곳 사원의 일과는 너무 심플해서 외울
것도 없다. 아침공양 후 그 다음날 아침
공양까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예불이나 울력, 탁발도 없으며 온종일
개인 수행시간이다. 일체 공양은 승가의
보시회에서 책임진다.
테라와다 불교엔 원래 예불이나 기도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개인적인 수행
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수행을 하든, 누워 자든 그것은 강요없이
전부 개인의 의지에 맡긴다. ‘타인이 아닌
오로지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마하야나(대승)는 자리이타로써
나와 남이 함께 성불하자는 의미로
‘타인에 대해 개입을 한다’는 면에서
테라와디와 마하야나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개인의 해탈에만 초첨이 맞춰진
불교를 소승이라 하고, 나와 남이 같이
해탈하자는 자타성불도를 대승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더 낫다라고 단정할 순 없다.
둘 다 일장일단이 있으니 오로지 자신의
성향에 따라 선택하면 될 것이다.
소승의 부족한 점을 대승에서 채우고
대승의 부족한 점을 소승에서 채우면서
완성해 나가면 지혜롭다 할 것이다.
숲 속에 산발적으로 흩어진 꾸띠를
찾기 위해서는 저 외다리를 건너 밀림 속
으로 들어가야 한다.
써커스를 좋아하는 나로써도 솔직히 살짝
식은땀이 났으나 목숨?을 걸고 건넜다.
스리랑카 사원 꾸띠는 한 사람이 들어가
수행하기 적당한 크기로 마당 한 편에는
경행장이 조성되어 있다.
태국과 비슷한 형태의 구색이지만 태국
보단 스리랑카가 훨씬 실용적이고 정교
하게 지어졌으며 철저히 수행자 입장에서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길이 사방에 여러갈래로 나눠져
있었으나 그냥 발길 닿는데로 걸었다.
위에 움막엔 영국출신 비쿠가 머물고
있었는데, 비가 쏟아지는 날엔 매우
습하고 거머리가 온몸에 달라 붙는
매우 여락한 환경이었다. 그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었는데, 제일 무서운
건 밤마다 찾아오는 코끼리라고 했다.
나는 그를 보면서 나 스스로 자부했던
자만에 대해 부끄러웠다.
대략 10개 정도의 꾸띠를 둘러봤으나
대부분 사용 중이었거나 부재 중이었다.
그래서 다음엔 오른 쪽 산에 밀집된 꾸띠
를 찾기로 했다. 오늘도 역시 달라붙는
거머리에게 다나를 300cc정도 했다.
한번 뚫린 혈관은 반나절동안 지혈이
안된다. 그래서 정신이 알딸딸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