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43)
5.대학시절(신과대학)
70년대 초 나의 대학시절은 매캐한 최루탄연기와 통기타노래, 한쪽에서는 데모와, 한쪽에서는 낭만의 선율이 흐르는 이중적 변주곡이었다.
연세대는 당시 교문이 없는 유일한 대학이었다. 그것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자유와 낭만이 넘치는 교풍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면이었다. 대학 캠퍼스 뒤에는 웅장한 안산(鞍山, 무악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학생들에게 사색과 휴식의 드넓은 숲인 청송대(靑松臺)는 4계절에 걸쳐 철철이 새 옷으로 단장하여, 아름답기 이를 데 없었다. 봄 축제 때면 연세교육방송국(YBS)이 KBS와 공동으로 선남선녀들이 모인 청송대에서 동화속 분위기의 숲속의 향연을 공연했다. 교내각종 행사와 공연장인 노천강당과 교문에서 문과대 앞 언더우드 동상에 이르는 백양나무 길인 백양로(白楊路)는 연세의 상징이었다. 또한 연세 춘추사 앞에 있는 윤동주 동상과 시비(詩碑)는 연세인의 정신적 지주였다.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모교는 다른 대학에 없는 채플(예배시간)이 일주일에 한번 대학별로 있었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하기 싫어하는 학생이나 타종교를 믿는 학생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교목실에서는 온갖 지혜를 짜내었다. 출석체크를 하거나, 남학생 좌석 옆에는 여학생을 배치하거나, 설교강사를 목사보다는 사회저명인사, 심지어는 당시 불교계의 유명 스님인 청담대선사를 초대하기도 했다,
지나놓고 보니 그 때 채플에 많이 빠진 것이 후회된다. 왜냐하면 강의실의 명강의보다, 채플시간에 초청된 사회명사들의 설교가 나의 향후 인생에 끼치는 영향이 더 컸기 때문이다. 강의실에서 결코 배울 수 없는 펄떡펄떡 뛰고, 살아 있는 지식을 습득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1학년 들은 채플 강사 중 기억나는 분은 당시 전문경영인으로 명성을 떨친 박승찬 금성사 사장이었는데, 그는 채플 설교 후 얼마 안 있어 판교 인터체인지에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또 한 분은 함병춘 전 주미대사였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 분도 그 후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다가 아웅산 묘소 폭발사고 때 아깝게도 순직했다.
[에피소드110]
대학에 들어가서는 성격이 바뀌는 것 같았다. 고교 때는 나는 내성적이고 은둔 형이었다. 그러나 고향의 옛 초등학교나 중학 동창을 만나게 되고, 입시지옥에서 해방되면서 외향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엄밀하게 MBTI성격유형으로 보면 겉으로는 외향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론 내향적 사고형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내향적인 면이 페르소나(가면)에 의해서 속으로 감추어졌다고 할까....
나는 그동안 억눌려져 있었던 이성에 대한 호기심, 담배와 술 등이 어우러져 공부보다는 대인관계에 치중했다. 나는 고교 때와 마찬가지로 학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때는 누가 “무슨 과를 다니느냐?” 고 물으면 “하늘대학, 하늘과에 다닌다.” 고 다소 자조(自嘲)적인 대답도 하였다. 지금은 내가 신과대학을 나온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입시 커트라인이 낮았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껴 대학 배지도 달지 않고 다녔다. 사귀는 친구들도 세칭 교내일류 단과대학인 상대나 의대 학생들과 어울려 지냈다.
나의 그러한 행동은 지금 생각하면 좀 병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 좀 더 본질적이고, 더 깊은 원인은 어릴 때 형제간에 있었던 치열한 경쟁 심리에서 연원(淵源)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아무튼 연세대 재학 중에 많은 연대의 인재(人材)들과 교제했다. 그 중에는 평생 친구가 된 노영대(상경대,무역업, 빌딩소유주)군, 노영진(미국 LA거주, 사업)군, 유원덕(전자공학과, 사업, 빌딩소유주)군, 김성수(영문과, 사업)군, 강성룡(상경대, 75년 연대 전체 수석졸업. 위스컨신 주립대 경영학박사, 교수)군, 서준규(의과대, 인하대 의대 교수)군, 이상열(의과대, 신촌세브란스 병원 안과과장 역임, 연세의과대 교수)군, 그리고 요즘 최근에 친하게 된 차명진(이과대, 대한항공 워싱턴지사장, 동 국제담당 임원. 현 Pacific Air Agency 대표)군 등 모두 열심히 자기 기량을 발휘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그런데, 삶을 오랫동안 살아나가다 보니 인간의 인격과 지성과 인품의 성숙도에 따라서 자신의 인격과 상대방의 인격이 살아오는 과정에서 처음과 나중이 격차가 나는 수가 있다.
이런 상황을 맞이할 때 대화를 지속하기 곤란할 때가 있다. 따라서 나이가 들면 때로는 가치관이 달라지고, 관찰력도 날카로워 지기 때문에 비록 과거의 허물없는 오랜 친구라도 현재에 이르러 소원해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런 문제가 나에게만 해당하는 문제일까?
졸업 후 험난한 사회생활을 동고동락, 애환을 같이 나누었던 오랜 나의 친구 노영대는 내가 주선해 신촌로타리 근방 대지 다방에서 연대 간호학과 동급생들과 미팅을 가졌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그 당시 그의 미팅 파트너였던 부산 경남여고 출신 간호학과 S양을 강남 세브란스에서 우연히 재회했다. 그녀는 당시 미혼 독신으로 강남 세브란스의 중환자실 수간호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노영대는 아련했던 추억의 옛날 얘기를 나누며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S양은 간호학과 재학 중에 나와 같이 육사 다니던 친구 면회를 간 적도 있었다. 그녀는 그 후 강남 세브란스에서 간호부장을 하다가 명예롭게 정년퇴임을 했다. 나의 미팅 파트너였던 대구 중앙초교 동창인 간호학과 C양은 나의 맏형수가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입원실 복도에서 우연히 재회했다. 그녀는 간호학과 졸업 후 간호사 직업을 포기하고 가정주부로만 살았고, 배우자는 당시 한국일보 기자라고 하였다.
(강광우 자서전 내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