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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의 제1관문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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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국사의 첫번째문인 안국문(외삼문) : 강원 강릉의 객사문을 모방해서 만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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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지시로 "낙성대"라는 자연석 세움, 글씨는 박정희 휘호임, 1974년 6월 10일 세움. 낙성대는 별이 내려온 곳이라는 뜻. 강감찬 어머니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품속에 와서 안기는 태몽을 꾸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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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성대 자연석 건립경위 내용 : 박정희대통령께서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장군의 나라를 위한 슬기와 용맹을 이 나라 안보의 의표로 삼게 하시고자 장군이 출생하신 이곳 관악산기슭에 새로 유적지를 조성토록 분부하고 "낙성대(落星垈)"라는 휘호를 하사 하시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그 뜻을 받들어 1974년 6월 10일 이곳에 안국사 안국문 사적비 등을 건립하고 박대통령
께서 하사하신 휘호를 이 자연석에 각자하여 오늘의 낙성대를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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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탑식의 3층석탑(고려시대, 13세기 추정) : 그동안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64년 보수하고 1972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4호로 지정. 서울시에서는 1974년 봉천동 218-14번지에 있던 석탑을 여기로 이전 하고 그 옛터에는 유허비(2m, 1974년)를 세워 사적지임을 표시함(서울특별시기념물 제3호 지정됨). "강감찬낙성대"라는 글씨가 새겨진 3층석탑. 탑높이 4,48m, 임란때 탑 한층을 빼내 한층을 낮추고 탑안에 보물을 도굴했다는 일화 전해짐. 탑주위 병품바위, 선돌바위 파손시킴. 탑의 동쪽 구릉을 파내 땅의 혈맥을 끊었다 함. 탑 주변마을을 탑골이라 했다 함. 강감찬 묘 : 충북 청원 옥산면 국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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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강감찬장군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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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강감찬장군 사적비 비문 : 1974년 6월 10일, 노산 이은상 짓고, 일중 김충현 쓰고, 서울특별시장 양택식 세움.
- 비문 내용 : 한국 민족의 역사상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고려일대를 통하여 가장 뛰어난 이는 실로 강감찬 장군이시다.
그는 일찍이 고려 정종 3년 서기 948년에 금주 지금 봉천동에서 태조의 건국공신 궁진의 아들로 태어나니 때는 바야흐로 중원대륙 동몽고지대에 사나운 유목민들인 거란이 일어나 고려와 맞선 어려운시대 이었다.
거란군이 성종 12년 서기 993년에 처음 치구해 왔을때에는 재상 서희의 능란한 외교로 물리쳤었고 그로부터 17년뒤 현종1년 서기 1010년 겨울에 그들이 다시 4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므로 고려에서도 강조장군이 30만명을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패전하자 조정에서는 항복할 것을 의논했을 때 오직 예부시랑 강감찬이 왕을 피난케 하고 항전할 것을 역설하여 적을 물리치니 때에 그의 나이 64세 였다.
그는 본시 문관출신으로서 학문과 지략이 탁월한 위에 문무를 겸비한 이라 왕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 오다가 현종 9년 서기 1018년 그의 나이 71세 되던 해에 재상을 겸한 재서 서경유수가 되어 평안도로 내려가니 압록강 동쪽 의주 선천, 용천, 철산, 곽산, 귀성 등 여섯 고을의 성을 지키며 거란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함 이엇다.
그러자 거란장수 소배압이 10만명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오므로 강감찬이 상원수 강민첨이 부원수가 되어 안주로 부터 의주까지에 20만명을 풀어 진을 치고 또 기병 1만 2천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다음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동쪽 냇물을 가로 막았다가 적들이 오자 깁자기 물을 터서 적군을 크게 패했더니 이듬해 정월 적들은 또다시 다른 길로 송경 가까이 쳐들어 왔다가 쫒겨 가며 귀성 고을을 지나가게 되었었다. 때는 3월 곳은 귀성의 동쪽을 판 그날따라 풍우는 남쪽에서 몰아 오고 깃발은 바람결에 북쪽을 향하는 지라 장군은 기세를 타고 적군을 여지없이 무찌르니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는 사이 적들의 시체는 들을 덮었고 활과 낙타와 갑주와 온갖병기들 조차 수 없이 노획하니 이야말로 고려일때를 통해 가장 이름난 승첩이었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우봉영파역에 이르자 왕은 비단장막을 치고 풍악을 잡히며 개선 장군을 환영하면서 72세 노장군의 백발에 금꽃 여덟가지를 꽂아 주며 왼손으로 손목을 잡고 바른손으로는 술잔을 권했으며 함께 도성으로 들어오자 국민의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했었고 왕은 그에게 영광스런 공신호를 내려 주었다.
장군은 73세에 조정에서 물러나 성밖 동쪽 마을에 조용히 은거하며 낙도교거집과 구선집을 저술했으며 현종 22년 서기 1031년 8월에 세상을 여의니 84세요 인헌이라 시호 하고 현종 묘정에 배향했었다.
그로부터 6백여년이 지나는 동안 역사는 흘러 갔건만 민족의 영웅이 끼친 큰 공적이야 잊을 길이 없으므로 여기 장군의 유적지에 사적비를 세워 자손만대에 전하여 우리 민족의 영광과 긍지를 삼으려 한다./노산 이은상 지음, 일중 김충현 씀, 서울시장 양택상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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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감찬장군 사적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