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새 가족
염민숙
우리는 바닥이 얇은 집을 지었다. 깊이는 시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았다. 지하에 재료들이 있었지만 꺼내 쓰지 않았고 수시로 꺼지는 바닥에 걸려 아이들이 넘어졌다.
서로를 지적하는 손가락질이 다투어 퍼덕였으므로 인내심은 깊어지지 못하고 날아갔다. 금 밖으로 서로를 밀쳐내며 둥지 밖을 떠돌다 보면 틈새는 더 벌어졌다.
자잘하게 쌓은 자갈돌 같은 신뢰 없이, 불안이나 불만 사이를 채우는 모래같이 찹찹한 다정 없이, 우리는 바닥이 얇은 집에서 오래 흔들렸다.
서늘한 눈짓에도 시드는 나뭇잎만큼의 허용과 나뭇가지만큼의 이해 조금뿐. 흉금을 털어놓기 전 아이들은 손에 가시를 움켜쥐고 둥지를 떠나갔다.
우리는 자라지 않는 어린 새를 품고 살았다. 지하에 숨긴 어린 나는 시간이 지나도 자라지 않았고 꺼지는 바닥에 걸려 아비 어미가 넘어졌다.
밥의 배경
염민숙
밥이 늦다고 집을 나가는 거야?
먹어도 배가 고픈 금 간 항아리야, 당신은
기다림에 먹히고 나면 평생이 허기지지
개양귀비에 취해 집을 나간 아버지 대신
치맛자락 동여매고 일하던 어머니가
발꿈치 피나도록 울어야 젖을 줬다면서?
젖먹이 까무러지는 울음이 담을 넘고
산자락을 올라 나무하는 어머니를 불러왔다니
한 상 차려내는 어머니 같아서
한없이 품어줄 젖가슴 같아서 당신은
어쩐지 이끌려 따라간 엄마들이 많았지
새고 있는 허기까지 채워주던 엄마들이
벌써 그 속을 다 파먹히고 나동그라진 거야?
제 꼬리를 물고 도는 만다라 속 뱀처럼
밑바닥이 닮아 손잡기에 더 익숙한
‘너무 사랑하는 여자들’*이
당신을 먹이고 먹히다 버려졌잖아
거죽만 남을 거라 그려 본 대로
귀 막고 달려온 엄마들이 까맣게 말라가잖아
금 간 기억에 울음이 덧입혀 있어서
어떤 눈물에도 꿈쩍 않는 배경이 있어, 당신은
*너무 사랑하는 여자들 : 로빈 노우드 지음 북로드 출판사
포클레인 기사 정씨
염민숙
산길은 산을 따라
굽어지는 길이다
비탈에 직립한 자작나무와 다르게
사람의 길은 굽잇길 따라 돌아간다
정씨 포클레인 삽으로 산자락 긁어내린다
날것의 돌덩이들 파낸다
흙속에서 산의 자세를 바로잡던
흙의 뼈들이 굴러 나온다
처음 나온 뼈가 손을 벨 것처럼 날카롭다
이제 막 굴러서 무차별로 쌓인다
낮은 데는 메우고
높은 곳은 깎아
평평하게 하는 것이 길을 내는 일
포클레인 운전대에 앉아
빙글빙글 돌아가며
포클레인 삽으로 돌덩이 들어붓는다
흙의 뼈들이 다시 묻히기 전
공중을 꽉 잡아주려고
흰 뼈를 키우고 있는 자작나무를 올려다본다
늘어서서 공중을 붙잡은 뼈들이
바깥을 더 둘러보기도 전에 다시 묻히는
흙의 뼈들을 내려다본다
길이 있어야 오지
뼈에 새겨진 눈금 같은 약속도 길이 있어야 만나지
무너져야 길이 나는 곳에서
금오상가 김씨 아주머니
염민숙
여보, 당신은 봤을 거야
제사상 차려놓고 탕국 가져오는 사이에
맡아놓은 옆집 개와 우리 개가
나물 빼고 산적이랑 전을 싹 먹어버린 것!
나 혼자 얼마나 먹겠나 했더니 개들이 먹었잖아
아쉬운 대로 탕국에 메 한 그릇으로
이런 제사는 마치는 걸로 하자고
생전엔 막힌 하수구 같던 당신이
이해가 되다니 그곳이 좋은 데인가?
오늘내일하는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나 직장 떨어지면 보험 하나 없이
어찌 사냐고 이왕 가는 길
금요일에 가라해서 섭섭했어? 아니지?
그동안 머리채 잡히고 발길에 채인 거
그날에 다 용서가 되더라고
당신 덕에 일요일 장사 치르고
월요일 상가청소 차질 없이 나갔잖아
사람들이 오르내리는데도
계단 신주를 금처럼 닦고 닦았지
계단청소 화장실 청소만 잘해도
밥이 나오고 옷이 나오는데
돌이라도 번쩍이게 닦을 거야 나는,
구룡령 서어나무
염민숙
남의 손에 이끌려 산을 오르는 것은
막막한 미움에 창문을 내는 일
철모 쓴 고집에 불을 켜는 일
혼잣말을 한마디 한마디 잘라내는 일
중턱까지 오르니 서어나무 잎이
좁쌀 막걸리 색으로 물들고 있다
막걸리 단지처럼 신음 부풀다가
문장으로 잇기 전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할머니의 할머니 같은 서어나무에 기대니
산에 산이 겹치며 눈시울이 뜨겁다
이끼 앉은 줄기에 손을 얹으니
하늘 가득한 잎만큼이나 견디고 견뎌야
한평생이 지날 것이라고
전언같이 서어나무 잎이 내려왔다
잠 못 드는 낮밤을 바람결에 펼쳐놓고
아름드리 둥치를 어루만졌다
남을 용서하는 것이 잘못을 덮는 것이
마음 한도를 넘는 일이라
옷을 껴입어도 오한이 났다
-『모던포엠』 2022. 6 '이달의 작가'
염민숙
2015년 〈머니투데이〉 등단
시집 『시라시』 발견. 2017
새얼문학. 해시 동인. 인천시인협회 회원.
첫댓글 흔들리는 집들을 붙잡고 있는 힘은 어디서 올까 생각합니다.
염민숙 선생님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그 시선을 따라가 봅니다.
공간이 거처가 되고 마침내 집이 되기까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