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미암아
영원토록 기억한다는 게 가능할까. 영원하다는 건 사라지지 않는 거고, 세상에 사라지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고작 실체도 없는 기억 따위가 감히 영원(永遠)할 수 있을까. 때 묻지 않는 추억이란 없고, 생각이란 대체로 길을 잃으며, 대부분의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사람이 달에 간지 벌써 오십 년이 흘렀지만, 인류는 아직도 시간을 초월하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근데 그렇다면, 영원할 것도 아닌데, 인간은 왜 기억이라는 걸 하고 사는 것일까. 아직 궁금한 게 많다. 납득하지 못하면 한 걸음도 발을 떼지 않았던 미운 다섯에서 크게 자라지 못했다. 어릴 적 살던 동네를 다시 찾았다. 세상의 온갖 것들을 사랑하고 또 그것들이 모두 영원할 거라 믿었던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그맘때의 나는, 왜 그렇게 쉽게 사랑에 빠졌고 또 철없이 아무거나 믿었을까. 어떻게, 모든 순간을 기억할 것이라 생각했을까.
웰컴 투 다솜 타운.
기억하는 최초의 보금자리였다. 무학 다솜 타운. 근데 우린 그냥 그곳을 ‘다솜’이라 불렀다. 다들 현관문을 열어두고 살던 게 당연했던 나날이었다. 요즘은 집 앞 택배를 들여올 때 빼곤 잘 사용하지 않는 도어 스토퍼도 그땐 매일같이 사용했다. 옆집 음식 냄새에 우리 집 저녁 반찬거리를 생각했고, 옆집의 우편물을 함께 가져 올라가 직접 건네주기도 했다. 자전거엔 도통 자물쇠를 거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이웃집 자전거의 바퀴가 네발에서 세발, 그리고 두발이 되는 모습을 보며 세월을 가늠했을 뿐이었다.
복도식 아파트였는데, 길게 쭉 뻗은 복도를 슬리퍼를 신고 내달려도 뭐라고 하는 어른이 없었다. 다만 그러다 넘어지면 얼른 일으켜 세워 무르팍에 연고를 발라주는 할머니가 있었고, 슬리퍼를 신고 뛰어다녀 그렇다며 엉덩이를 털어주는 아저씨가 있었을 뿐이다. 옆집 사는 사람들의 이름은 몰랐어도 얼굴은 다 알았다. 15층에 살았는데 나는 1506호. 할머니는 1509호, 아저씨는 1502호에 살았다. 할머니 집엔 나보다 어린 다섯 살 영호가 살았고 아저씨 집에 고삼 미정이 언니가 살았다. 영호의 초등학교 입학식도, 미정이 언니의 취업도 축하해 줬다. 그땐 이웃집의 경사를 우리 집의 경사처럼 축하했다. 케이크 한 조각 나눠 먹은 재미로, 그들의 축복을 내게 생긴 행운처럼 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이가 많이 사는 동네였다. 한 집 걸러 한 집마다 애를 키웠다는 말을 서슴지 않게 내뱉을 수 있을 정도. 근처에 인접한 학교만 총 세 곳이었다. 학진 초등학교, 엄궁 중학교, 학장 중학교. 학진초를 졸업하면 무작위로 엄궁중이나 학장중을 갔다. 물론 중학교에 들어갔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 시절 우리는 그냥, 모두 동네 친구였다. 아파트 1동과 2동에 있는 두 곳의 놀이터를 수시로 오가며 친구들을 만났다. 어슬렁 돌아다니면 어느새 열댓 명은 쉽게 모였다. 초등학교가 끝나는 이른 오후, 집에 가방을 내려두는 순간부터 마음이 붕 떴다. 놀 생각에 하루하루가 새롭게 짜릿했다.
용기의 언덕엔 깍두기가 산다
초딩은 그냥 잘 먹고 잘 노는 게 효도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도 알았는지 모르겠다. 매일 놀기만 했다. 자전거, 인라인, 킥보드. 엄마가 셋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을 때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인라인을 골랐다. 엄마는 어차피 사줘야 한다면 키가 커도, 발이 커져도 탈 수 있는 자전거나 킥보드를 샀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여덟 살의 똥고집은 앞뒤가 없었다. 집 근처 이마트 3층의 나이키 매장 오른쪽 운동기구 코너. 거기 두 번째 진열대에 놓여 있던 바퀴 세 개 인라인을 콕 집어 사달라 졸랐다. 한 철 장난감으로 비싸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만 해도 스물이 넘어서도 인라인을 탈 줄 알았다. 엄마는 끝까지 제일 안정성이 떨어지는 걸 굳이 사야겠냐 두어 번 더 물었지만, 반짝반짝 눈에 총기가 뚜렷한 막내딸의 치기를 유쾌하게 넘어가 줬다. 불특정 다수가 차고 넘쳤던 마트 한가운데서 등을 눕히고 울기 전에 대부분의 고집을 인내해 줬던 엄마를 알았기에, 다치지 말란 약속에도 굳게 손가락을 걸었다. 물론, 수두룩하게 다쳐 돌아가긴 했었다. 사실 다치지 않고 노는 게 가능한 여덟 살이란 존재할 수가 없었으니.
다솜 1동에서 2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작은 언덕을 용기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각자의 탈것을 준비해서 점심을 먹고 내리막 앞에 서면 그때야 비로소 겁쟁이 놀이가 시작된다. 언덕을 완벽하게 내려가야 성공이었다. 그땐 겁쟁이가 제일 무서운 별명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도 불공평한 건 있었다. 세 발 자적거와 킥보드, 인라인. 그중 무엇도 난이도로는 인라인을 따라올 수가 없었다. 손잡이가 있는 탈 것 보다야 양다리 끝에 고작 바퀴 하나 달고 속도를 이겨내야 하는 인라인의 위험도가 큰 게 당연했으니. 하지만 동네 친구들 사이 인기템은 킥보드였어서, 고작 나 하나 가지고 있는 인라인으로 부당함을 토로해봤자 먹힐 리 없었다. 물론 다행스러운 건, 그때 우리에겐 깍두기라는 룰이 있었다는 거다. 용기의 언덕에서 미끄러졌어도, 겁쟁이 놀이에서 졌어도. 우린 넘어진 애를 일으켜 깍두기로 위장시켜 줬다. 그러니까 그 게임의 실체란, 모두가 이기진 못해도 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게임.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살짝 과격한 놀이, 딱 그뿐.
깍두기는 놀이터 뒤편에서도 활기를 잃는 법이 없었다. 우린 모두 동네 친구였지만 모두 같은 나이였냐고 묻는다면, 그럴 리가. 그땐 친구의 동생도, 친구의 언니나 오빠도 모두 친구였다. 때문에 언니의 친구들과 놀 때면 내가 깍두기, 친구의 동생을 끼워 놀 때면 그 동생이 깍두기였다. 이를테면 깍두기는 아무도 놀릴 수 없는 코딱지. 그런 거와 다름이 없었달까. (코딱지 같은 게, 라는 말이 내가 처음 배운 약자 지칭 용어였다.) 경찰과 도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네 멀리 타기. 내가 좋아했던 건 그렇게 세 개의 게임이었는데, 웃기게도 가장 잘하는 건 땅따먹기였다. 땅따먹기를 잘하는 꿀팁을 아마 나만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땅따먹기의 관건은 돌이었다. 놀이터 흙바닥에서 돌을 줍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위장 스파이 마냥 화단을 거니는 척 돌을 주웠다. 모래사장 바닥에 간간히 박혀있는 자갈 보다 화단의 돌이 더 납작하고 뭉툭했다. 돌이 숫자 칸 안에 정확히 떨어지려면 데구르르, 구르지 않을 정도로 판판해야 했다. 꼭 마음에 드는 돌을 찾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땐 나와 가장 친한 친구 몇만 아는 아파트 입구 보물섬에 돌을 숨기고 언제라도 땅따먹기를 하는 날에 다시 가져다 썼다.
다솜 1동 탐험대대
보물섬. 거기서 내 인생 최초의 ‘비밀’이 시작됐다. 아파트 입구에서 놀이터로 빠지는 뒷길을 그대로 따라 올라가면 외딴 섬 같은 곳이 하나 있었는데, 원래의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곳에 비밀을 묻기 시작했다. 지금과는 달리 높은 수풀과 웃자란 잔디들 덕에 안이 가려졌던 터라, 나무와 풀을 헤집고 그 위를 오르는 것부터가 보물섬 원정의 첫걸음이었다. 겨우 손바닥 하나보다 컸던 작은 발바닥으로 힘차게 돌을 디디는 폼이 당시엔 제법 특급 스파이와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 모래사장이 있었던 놀이터엔 버려진 모종삽이 하나씩 뒹굴곤 했는데, 그걸 주워다 보물섬에 숨겨뒀던 것이 비밀의 시작이었다. 주인 잃은 모종삽을 한 동네의 것으로 남겨두지 않고 독점하겠다는 건, 당시 시대 분위기에선 꽤나 이기적인 행위였으니. 어린 나이에 처음 맛본 비밀의 맛은 그렇게 연이어 몸집을 부풀렸다. 모종삽 다음은 돌이었고, 네잎클로버였고, 세뱃돈이었다. 할머니한테 받은 만 원짜리 한 장을 흙바닥에 숨기는 일이란, 여덟 살이 누릴 수 있었던 가장 쾌락적인 일탈이 아니었을까. 보물섬 원정의 마지막은 열 살이 지나던 겨울 즈음에 끝났지만, 아직도 기억하는 한 가지가 있다. 삐뚜룸한 돌 몇 개를 소란스럽게 내려와 친구와 눈이 마주치면 마치 약속이라도 되는 양 동시에 입가로 올렸던 검지, 그리고 입 밖으로 내뱉는 조용한 감탄사. 쉿. …쉬잇. 우린 그곳에 참 소중한 것들을 숨겨두곤 했다.
어린아이의 발이 얼마나 컸겠냐마는, 그 시절 우린 그 짧고 통통한 다리로 많은 곳을 다녔다. 다솜은 꽤나 긴 오르막의 중턱에 있었기 때문에 밑의 도로까지 5분 정도의 거리를 쭉 걸어 내려가야 했는데, 동네를 주름잡던 꼬맹이들은 그 길을 쉽게 내려가는 법이 없었다. 명색이 땅꼬마인데, 놀이터에서만 놀 턱이 있나. 보물섬 원정이 비밀스럽게 가는 나들이었다면, 내리막 원정은 아주 중요한 주간 계획 중 하나였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티끌 같은 용돈을 주머니에 고이 넣어둔 채로 모이면 우리는 일제히 각자의 머리를 중앙으로 모았다. 그리곤 아주 조용히 속삭이는 것이다. ‘얼마 가져왔어?’, ‘나 사천 원, 너는?’‘나도. 야, 일단 오늘은 피카츄 꼭 먹어야 돼.’ 긴밀하고 민첩하게 이루어지는 대화는 보통 그런 쪽이었다. 피카츄를 먹을지, 핫바를 먹을지. 그땐 그런 것에 하루치의 행복이 몽땅 저당 잡혀 있었다.
하지만 고작 열 몇 살 먹은 아이들이 내리막길 가장 끝단의 분식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유별난 먹성을 참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내리막 원정대의 최초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다솜 마트. 사실 구멍가게, 그런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그곳은 아이들을 위한 온갖 불량식품과 어른들을 위한 생필품이 균형을 이루던 곳이었다. 거기서 천 원을 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폴로부터 손에 쥐기 시작하면 슈퍼의 큰손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장님이 마실에서 돌아온다. 구태여 가격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종종걸음으로 조금만 돌아다니면 끝인 작은 슈퍼 매대 앞의 불량식품 가격 정돈, 동네 아이들의 상식이었다. 간단하게 나나콘과 차카니의 값을 치러내면 다음 군것질을 위해 발길을 옮기기 적당했다.
아파트 입구의 슈퍼를 지나쳐 내려가면 곧장 빵집이었다. 빵집 앞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빵사 아저씨의 손 위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다 올려두는 게 당시 초딩들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조용한 듯 시끄러운 풍경이 달린 빵집의 문은 꼭 한 번씩 당기고 나서야 제대로 밀기 일쑤라, 우린 그곳에서 항상 새 우는 소리를 길게 들었다. 초딩들의 베스트 셀러는 당연히 피자빵이었고 스테디 셀러는 초코 쿠키였으니, 사실 빵집에선 시간 낭비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게다가 빵집은 아이들을 유독 예뻐하던 사장님이 하나씩 나눠주던 슈크림이라는 콩고물을 위한 루트에 불과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약삭빠른 꼬맹이 집단 같지만, 잘 짜인 계획 아래 움직이던 초딩들은 갈 길이 바빴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리막 원정대의 다음 일정은 빵집 바로 아래, 만화책 대여점에서 이어진다. 그땐 모두가 만화를 봤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선 만화도 영화도 소설도 모두 대여점의 손안에서 굴러갔다. 사실 윗 형제들의 만화책 반납 심부름을 원정대에 끼워 넣는 셈이었지만, 우린 모두 누군가의 동생들이었음으로 암묵적인 합의는 쉽게 이루어졌다. 게다가 ‘무서운 게 딱 좋아’, ‘코믹 메이플 스토리’, ‘위기 탈출 넘버원’ 등의 어린이 만화책 시리즈의 신간을 꼼꼼히 확인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됐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어린아이의 힘으론 잘 밀리지도 않았던 바퀴 달린 원목 책장을 괜히 들쑤셔 보는 걸로 그곳의 일정은 끝이었다. 심부름으로 수행한 형제들의 반납 만화책에 나도 모르던 연체비가 붙어 있었다면 예상치 못한 지출을 감내해야 했지만, 이후에 두 배로 불려 받으면 그만이었다. 우리 집의 기준에선, 막냇동생의 그 정도 거짓말은 애교로 타협 보는 수준이었기에 어쩔 땐 소소한 용돈벌이가 되기도 했다.
대망의 분식집은 내리막의 가장 끝단, 엄궁 중학교의 바로 옆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어떤 군것질을 하느냐는 하루치 행복도를 결정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닭꼬치, 피카츄, 핫바, 컵떡볶이 등. 수많은 분식이 있었지만 우린 모두 그곳에서만큼은 각자의 취향을 존중했다. 개인적으론 닭꼬치는 필수였고 때때로 추가 컵볶이를 먹는 일이 잦았다. 떡볶이만 단독으로 먹을 땐 천원 치, 각기 꼬치류와 함께 먹을 땐 오백 원짜리 컵볶이가 국룰이었다. 물론 숯불 닭꼬치는 오리지널 기본 소스로, 피카츄와 핫바는 케첩 한 바퀴, 머스터드 한 바퀴를 둘러야 한다는 공식도 더불어 존재했다.
학교 옆 분식점은 문방구를 겸하기도 했다. 이 말은 즉, 모든 것은 군것질을 위해서였지만 마치 학교 준비물을 미리미리 사두는 성실한 어린이인 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집이 멀었던 진짜 이모보다 더 자주 봤었던 분식점 이모는 근방의 모든 학교 준비물을 꿰고 있었다. 당연히 준비물은 날마다 다르고 학년마다 달랐지만, 어쩐지 이모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학기 초에는 충효 일기와 실내화를, 학기 중에는 찰흙과 각도기를 이모 덕분에 잘 챙길 수 있었다. 그때의 이모는 모든 학생들의 친구였고 성실한 어린이인 척 굴기의 숨은 조력자였달까.
내리막의 중턱에서 버스가 다니는 도로의 끝에 내려가기까지 어른의 걸음으로 오 분 남짓. 여덟 살 꼬마의 걸음으론 십 분. 차례로 슈퍼와 빵집, 만화책 대여점과 분식점을 지나쳤으니 내리막 원정의 최종 소요 시간은 대략 삼십 분. 우린 그 삼십 분 동안 쉬지 않고 다리를 굴렸다. 그리 낮지 않은 경사의 길을 두 명씩 손잡고 내려가던 우리의 발바닥에선 필히, ‘도도도’ 그런 소리가 났을 게 분명했다.
‘종합’ 학원
열 살이 됐을 때던가. 천방지축으로 놀러만 다니는 막내딸을 더 이상 귀엽게 봐줄 수가 없던 어머니 덕에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학원. 사실 부모님의 본격적인 맞벌이가 시작됐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긴 했지만, 어쨌든 학교 수업을 마치고 곧장 학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맘때 학원은 종합 학원이 유행이었다. 과목별 종합이 아니라, 장르별 종합. 즉, 학원이라는 큰 공간 안에 교실을 여럿으로 나누어 한편에선 미술을, 반대편에선 주판을, 또 맞은편에선 음악을 가르치는 식이었다. 학원 하나를 등록하면 부모님이 퇴근하는 저녁 6시 전까지, 사교육을 씹고 뜯고 맛볼 수 있던 것이다.
과학이나 수학 등의 이과 과목을 싫어했던 성정은 단언컨대 천성이었다. 어려서부터 호불호가 강력했던 꼬맹이가 가장 지루한 시간을 보냈던 공간은 수학실이었다. 수학실에선 주판을 배웠다. 기억하기론 우리가 주판을 배웠던 마지막 세대 쯤이라, 사실 그 중요성이 그리 대단치는 않았지만. 또 역설적으로 우리 부모님의 세대가 주판을 가장 열성적으로 배운 세대라, 당시는 주판이 어쨌든 필수였다. 가로가 긴 주판을 왼손으로 붙들고 펜 하나를 손가락에 끼운 오른손으로 주판알을 옮기는 주산 자세가 아직도 선명하다. ‘오 원이요, 구 원이요, 십칠 원이요, 이십구 원이면~?’선생님의 딴딴하고 까랑한 목소리가 교실을 채우면 공간이 온통 주판알 움직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물론 수학에 재능도, 열정도 딱히 없는 아이들은 마냥 쉬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주판의 진가는 쉬는 시간에 드러났다. 주판을 바닥에 놓고 발을 올려 킥보드처럼 타고 다닌 적 없는 초딩이란 어불성설이었다.
반대로, 예술 계열에 지대한 흥미를 가졌던 것도 필시 천성이었다고 할 만했다. 매주 학원 미술 시간을 제일 기다렸다. 학교에서 흔히 쓰는 크레파스나 찰흙, 파스텔 같은 미술 도구가 아닌 물감. 물감을 너무 좋아했었다. 수채화, 아크릴, 유화. 어린아이가 쓰기엔 다소 비싸고 어려운 재료도 잔뜩 쓸 수 있었다. 물론 수업이 끝난 후 미술 선생님을 도와 교실을 깨끗하게 청소하기로 한 비밀 약속이 있었지만, 그 자세한 내용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엄수 중이라 짧게 줄인다. 미술에 큰 재능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원래 공부든, 예술이든. 재능이 필요한 어떤 재주들은 스스로가 자기 그릇의 크기를 어느 정도 짐작하기 마련이었다. 나 역시도 그랬지만, 미술은 좀처럼 포기가 어려웠다. 붓 끝을 팔레트에 지분거리면 이내 쫓아오는 색채와 물 머금은 스케치북의 표면과 그림이 다 마르길 기다리는 한가로운 시간들을 좋아했다. 손바닥 두어 개가 고작 들어갈 만한 작은 그림판 위에 수놓았던 미숙한 세계를 계속 열망했다. 다 지난 일이지만, 그맘때 나는 화가를 욕심내곤 했었다.
음악실은 학원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연주를 간단히 선보일 수 있는 작은 단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엔 피아노실 세 개가, 왼쪽엔 장구와 북 등을 가지런히 세워둔 전통실 두 개가, 입구엔 리코더와 단소 올려둔 테이블이 있었다. 날마다 원하는 악기를 선택하면 선생님이 악보와 연습 횟수를 알려주는 식이었다. 보통의 아이들은 대부분 연습이 빨리 끝나는 리코더나 학교 음악 시간에 시험을 보는 단소를 선택하는 편이었다. 물론 나 또한 강경 리코더 파였다. 악기를 연주하는 데에는 흥미도, 역량도 없어 빨리 끝내고 노는 게 좋았다. 때문에 포도의 색을 채우거나 사과의 이파리를 그리는 두 가지 연습 체크 방식 중 전자를 택하는 편이기도 했다. 간단한 실선 두 개면 체크 표시가 남는 사과 이파리를 그리는 것보다야, 포도의 색을 채우는 게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했고, 그 덕에 연습 한 번에 포도 두 개를 색칠해도 티가 잘 나지 않았으니. 어차피 유난히 간이 큰 아이들이 연습 한 번에 색칠 네 개를 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지간해서 양심을 지키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 시절 우린 리코더를 코로도 부를 정도의 리코더 세미 프로였다. 약간의 거짓말로 불린 연습 횟수 정도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아마도. ……아니면, 어쩔 수 없고.
학원은 초등학교 고학년들의 놀이터였다. 더 이상 킥보드를 들고 용기의 언덕에 서 있기엔 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긴 열 살 초반의 아이들이 모이던 곳. 친구들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학원에 등록한 옆 동네 친구를 사귀던 곳, 학교가 방학할 때면 점심밥까지 챙겨주던 조금은 이상한 곳. 그러니까 어쩌면, 보육시설을 가장한 합법적 놀이터. 이른바, 진짜 ‘종합 학원’ 우린 거기서 종종 따분했고 때때로 지겨웠지만, 대체로 즐거웠다. 킥보드가 없으면 주판을 대신 삼았고, 흰 도화지에 물이 맺히고 마르는 지루한 시간 동안 꿈을 꿨고, 휴식이라는 대의를 위해 양심을 접어두기도 했다. 올바른 청소년으로, 훌륭한 어른으로 자리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배움이나 얻었을지라도, 퇴근 시간이 한참 남은 부모님을 기다리며 홀로 티비를 보던 시간엔 감히 비할 바가 못 됐다. 원장님, 그렇게 부르곤 했던 선생님의 얼굴이 지금도 생각나는 걸 보면, 학원은 분명 정 없는 교육 시설 같은 게 아니었다. 학원은 우리를 돌봤다. 적어도 나는, 학교보단 학원을 좋아했다.
나를 지키는 기억일수록 더 견고한
여덟부터 열셋. 그 사이의 시간이 믿기 어려울 만큼 선명하다. 옆집 할머니의 손자와 땅따먹기의 룰과 불량식품들의 이름과 코믹 메이플 스토리 12권의 내용과 학원의 구조와 원장 선생님의 얼굴까지. 모두 아득히 멀다 해도 부정하기 어려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모조리 뚜렷하다. 생각을 곱씹을수록 더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만화책 대여점의 간판 색깔과 주판의 크기와 학원까지 가는 지름길의 위치 같은 것. 또 어쩌면, 매일같이 뒤집어썼던 모래사장 흙먼지의 냄새와 학원 미술 선생님의 목소리와 입술 새로 빠졌던 단소의 바람 같은 것까지도.
때 묻지 않는 추억이란 없고, 생각이란 대체로 길을 잃으며, 대부분의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케케묵고 빛을 잃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쉽게 빠져버린 사랑과 철없이 믿어버린 사람은 영원이라도 할 것처럼 꾸준히 선명한가. 사실 아직도 그 이유를 제대로 알 순 없다. 다만, 철없이 모든 걸 사랑하고 쉽게 아무나 믿었던 그 시절을 짧게 회상해 본 결과, 나름의 결론이 딱 하나로 이어졌다. 나를 지키는 기억은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영원을 추구한다고.
열셋 이후 중학교에 입학하며 하루의 행복을 고작 군것질에 저당 잡힐 수 없는 신세가 됐다. 용돈 조금 버는 일로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고, 손잡이도 없는 탈 것 따위에 안전을 맡기면 안 된다는 걸 알았고, 친구들과 놀기만 하면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클수록, 세계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내 부족함이 너무 잘 보였고 행복해지려면 애를 써야 했다. 그래서 돈 없이, 시간 낭비 없이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른이 될수록, 더 꾸준히 어린 시절의 기억을 파먹었다. 그러면 너무 불행하다가도 곧장 그 진탕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무모하고 어리석었던 시절이 갖은 애를 쓰며 사는 나를 번번이 일으켰다. 여전히 기억이 영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우리는 살아야 하고 버텨야 하기에, 좀먹는 나를 살릴만한 대단히 사랑하는 기억을 평생에 걸쳐서 계속 끄집어내야 한다. 모든 삶의 순간이 항상 행복할 순 없기에 행복했던 시절을 꾸준히 되삼켜야 한다. 공고한 삶을 위해 나를 지키는 기억이 최대한 온전하도록, 안온한 기억 속에서 우리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사랑을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도, 영원을 추구해야 한다. 게다가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소중한 삶의 기억을 그렇게 꾸준히 보살피다 보면, 언젠가 정말로 시간을 초월해 영원에 닿을 수 있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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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놀라지는 않으셨을지 걱정입미다.
수필인데 분량도 많고 사진까지 있다늬... 보통이 아니죠 아무래도.
긴글 읽어주시느라 고생하셨어유
이 글은! 제가 어린 시절의 추억, 그중에서도 중학교 입학 전인 유소년부터 열셋의 기억을 너무나 사랑하는 관계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사를 어려서부터 아주 많이 다녔는데 그중에서도 다솜에서 살았던 시간을 정말 좋아했어요.
제일 걱정 없이 놀면서도 발이 크기 시작해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시절 같달까요.
제가 기억이나 추억, 순간과 영원. 뭐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는 건 친구들이면 다들 알 것 같아요.
관련 수필도 많이 썼었죠. 근데 전 이 글이 그 고민들에 대한 마침표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기억은 영원할 수 없겠지만, 나를 지키는 기억들을 잘 골라내어 다듬어 보관하고
그 잘 보관한 기억을 힘들 때마다 꺼내 먹으며 살아가기들 바랍니다.
정말 모르잖아요. 시간이 영원을 초월하는 순간까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두요.
사랑합니다요들. 다음엔 저희 집에서 봐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알러뷰쏘마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