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안향교 현판
교궁(학교)문화재 등록기
본 향교는 조선 태종 3년에 비로소 세운 이래 600여 년의 그 역사를 상고하건대
임진왜란 때에는 현감 평강 전씨 전유형께서 소 여물통 3개를 초청 고개에 묻어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여 청안의 성인을 모신 사당(청안향교)이 무사하였다.
병자호란 때엔 다행히 현감 박지화의 어짐에 힘입어 또한 무사하였다.
6.25 한국전쟁을 당하여서는 현내 인동 장씨 장순영이 늦은 밤에 열성의 신주(여러 사람의 신주)를 땅에 묻어 편안하게 하였고 수복 후 다시 봉안하였다.
세운 후 600여 년 동안 한 번도 피해가 없었다.
[原文]
校宮文化財登錄記
本鄕校李朝太宗三年建始以來六百有年矣 考其史略
龍蛇之亂縣監平康人全有亨埋牛槽三箇於椒井峙賊不敢犯淸安聖廟無事
丁卯丙子之亂幸賴縣監朴枝華之賢亦無事
當六二五之亂縣內仁同人張順榮暮夜埋安列聖神主修復後奉安
建始六百有年一無被害
● 전유형 [ 全有亨 ]
요약
조선 중기 문신. 명나라에서 쌀 10만 석을 요구하자 특차사로 명나라에 가서 감량시켰고, 광해군 때 형조참판을 지냈다. 의술에도 능하여《오장도》를 그렸다.
본관 평강(平康). 자 숙가(叔嘉). 호 학송(鶴松). 시호 의민(義敏). 괴산(槐山)의 유생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1594년 청안현감(淸安縣監)이 되었다. 1605년 정시문과에 장원, 이듬해 감찰에 발탁되고, 이때 명(明)나라에서 쌀 10만 석(石)을 요구하자 특차사(特差使)로 명나라에 가서 감량(減量) 시켰고, 광해군 때 형조참판을 지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유형 [全有亨]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박지화 [ 朴枝華 ]
요약
조선 중기의 학자. 기수학에 뛰어나 명종 때 으뜸가는 학자로 꼽혔고 문집 《수암유고》, 저서 《사례집설》이 있다.
정선 박씨의 시조. 자 군실(君實). 호 수암(守菴). 서경덕(徐敬德)의 문인. 유(儒) ·불(佛) ·선(仙)에 모두 조예가 깊고, 특히 기수학(氣數學)에 뛰어나 명종 때 으뜸가는 학자로 꼽혔다. 어려서부터 명산(名山)을 즐겨 찾았으며, 솔잎을 따먹고 생식을 하였다. 일찍이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벼슬은 현감(縣監)을 지냈을 뿐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친구인 정굉(鄭宏)과 함께 백운산(白雲山)으로 피란하였다가, 왜병(倭兵)이 가까이 닥치자 두보(杜甫)의 오언율(五言律) 한 수를 써서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그 아래 물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 《수암유고》, 저서 《사례집설(四禮集說)》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지화 [朴枝華]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