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일본에서 2009년에 나온
‘천국 여권’이 불티나게 팔린 적이 있다.
천국 여권에 자신의 사진을 붙인 뒤
이름 생년월일 주소 전화번호를 써넣고,
아랫부분에는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한 가지 소원을 적는다.
그리고 쓰레기를 줍거나 전철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등
착한 일을 할 때마다 여권의 주인은
스티커 북에서 스티커를 떼어
여권 속의 빈칸에 붙여나간다.
여권의 빈칸이 스티커로 꽉 차는 날
그가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거기엔 단서가 있다.
천국 여권에는 천사의
세 가지 부탁이 있는데 소원을 이루려면
믿어야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고,
나쁜 것을 소원하지 말아야 한다.
선행을 하고도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결국 믿어야 한다는 것은 께름칙한 일이다.
선행을 하고도 믿어야 한다는
이중 지출이 마음 내키지 않는 것이다.
나의 노력을 들여 선을 행했으면 되지
왜 또 믿어야 하는가?
어떤 무속인이 돈을 받고 부적을 써준 뒤에
‘소원이 성취될 것을 믿어야
부적이 효력을 발한다’고 말한다면
그 무속인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돈을 주고 자동차를 산 사람이
의심 없이 자동차를 타고 달리듯이,
소원 성취를 위해 부적을 샀으면
믿을 것 없이 부적을 붙이고
소원을 기다리기만 하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선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도
믿어야 한다든지,
돈을 내고 샀는데도 믿어야 한다면
그것은 가짜이다.
내가 기독교를 싫어했던 것은
창조가 틀리고 진화가 맞기 때문이 아니었다.
창조도 논리적이 아니지만
진화도 논리적이 아니다.
하나님을 없는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나면
나의 존재도 부정해야 되는
엄청난 일을 감당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의 삶이 바르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비기독교인의 삶도 바르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동정녀 탄생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때문도 아니다.
동정녀 탄생도 믿을 수 없지만
빅뱅을 일으킨 특이점(Singularity)과
특이점을 폭발시킨 힘이 저절로 생겨났다는 것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내가 기독교를 싫어했던 것은
단지 ‘믿으라’는 말 때문이었다.
아내와 결혼한 후
여러 번 ‘사랑한다’는 말을 했지만,
한번도 ‘여보, 나를 믿어줘’라고 말한 적이 없다.
남편이 아내에게 ‘나를 믿으라’고 한다거나,
아내가 남편에게 ‘나를 믿으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 가정은 깨어질 위험에 있다는 뜻이다.
나를 믿으라는 말은
믿지 못할 짓을 했을 경우에 하는 말이다.
믿으라고 하는 것은
통상 사기꾼의 주문(注文)이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
제1호가 믿음이다.
가끔 비행기를 타지만,
비행기가 떨어지지 않을 것을 믿고 타지 않는다.
매일 자동차를 타지만
사고 나지 않을 것을 믿고 타지 않는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률이다.
비행기 사고가 날 확률이 140만 대 1이라고 하니까,
게다가 죽을 확률은
로또에 당첨되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니까.
내가 로또에 당첨될 사람은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실은 그런 생각도 하지 않고 비행기를 타고 자동차를 탄다.
이렇게 믿음이 필요 없는 세상에서
왜 기독교는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가?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끝내고
<신의 언어>을 쓰면서 콜린스 박사는
왜 믿어야 하는 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자연계 바깥에 존재할 것이며
따라서 과학은 신을 배우기에 적절한 도구가 아니다.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서
이해하기 시작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하며,
최종적 결론은 증거가 아닌 믿음을 기초로 할 것이다.”18
성경의 신은 자연계 바깥에 계시는 존재이므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요,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분이라는 말이다.
콜린스의 말이 그럴 듯 하지만,
성경이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이 왜 믿음을 요구하는 지를 알려면
세상이 사용하는 믿음과
성경이 사용하는 믿음의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햔다.
성경의 믿음
성경이 당당하게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믿음은 사실에 대한 자기 확신이지만,
성경의 믿음은 ‘예수만 바라보는’ 것,
즉 신앙,이요 예수만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또 다른 말은 사랑이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불해야 할 값을
예수께서 갚으셨으므로
구원이 나의 행위와 관계없이 이루어진다는
이 기발하고도 합법적인 생각은
인간의 두뇌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구원을 위해 나의 행위가 배제된다는
기발한 생각은 기독교의 독점적인 사상이다.
세상에선 인간의 소원 때문에
확신의 확신을 거듭하지만,
성경 세계에선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를 믿고 바라본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누구를 우선순위에 둔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둔 곳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것에 대하여 콜린스 박사는 말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세상에는 오로지 하나의 신앙과 그것을 실천하는
자신감 넘치는 신도들로 가득 찰 것이다.
그때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이유로
믿음을 선택할 자유를 박탈당한 세상을 상상해보라.”19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어서 믿어야 한다면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을 자유의 영역에 두셨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매일 벼락을 치고 천둥을 울려댄다면,
혹은 구하는대로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은 믿지 않을 수 없는 분이 된다.
하나님이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 영역이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는 영역에 계시다면
그곳은 자유가 박탈된 곳이다.
믿으라는말은
믿고 믿지 않는 것은 자유라는 말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인간의 믿음에 맡기셨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손으로 만져보지 않은 것은
수십 리 밖에 있고,
스스로 붙잡을 수 없는 것은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스스로 헤아리지 않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달지 않은 것은 무게가 없고,
스스로 부어 만들지 않은 돈은
통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지.”20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려 하면
악마까지도 비웃는다.
그러나 시각 장애인에게
빛과 관계없는 시야가 있듯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오감(五感)과 관계없는 시야가 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일이
삶 속에 생동감 있게 연출되는 것을 본다.
진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에만 보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곧 진실을 보는 눈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죽어야 할 분이었지만,
사랑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이었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예수를 사랑의 눈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성경의 믿음은
사랑의 또 다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