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 . 54
척송 송명진 시인
지난 2010년 1월 9일 밤,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 13호실 영안실에서 한 시인을 영결(永訣)하는 시제(詩祭)를 위해서 많은 시인들이 모였었다. ‘돌아돌아 착한 미소로 / 돌아돌아 연초록 진실과 더불어 청렴한 청학처럼 / 돌아돌아 반천 년의 침묵만을 남기시고 훌쩍 / 떠나신 척송 송명진 선생님’ 이라는 조시(弔詩)를 낭랑하게 읽어 내리던 동료시인이 오열을 참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었다.
척송(尺松) 송명진(宋明珍) 시인은 문화예술 창달에 혼신의 정열을 쏟다가 63세를 일기로 운명을 달리 하고 말았다. 마침 김남조 선생도 동석해서 심금을 울리는 조사(弔辭)를 해주어서 장내는 더욱 엄숙해졌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1980년대 중반 한국 예총에 들어가서 각 지역의 지부 업무를 담당하면서 그가 여수지부 사무국장으로서 자주 예총 본부를 들락거릴 때였다. 그는 패기에 차 있었고 핸섬한 체격에 언행이 일치하는 멋쟁이 청년이었다.
그는 예총 행사를 여수로 유치해서 여수를 알리는 일과 동시에 여수시민들의 예술 향수를 위해서 불철주야 서울을 왕래하고 있었다. 그는 문학도여서 『월간문학』에 시작품을 응모해서 가작을 받았다가 내가 근무하는 예총『예술세계』에 당선하여 정식 등단한 시인이다.
그는 시민들을 위한 정서함양 강연회를 유치해서 서울시립대학교의 한명희 교수를 모시고 내가 직접 여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시민회관을 만장(滿場)한 가운데 국악평론가인 한명희(그는 ‘비목’ 작사가였다.) 교수의 우리 민족 음악인 국악을 장단을 맞추어가면서 진행한 열강은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우리는 밤을 새워 술을 마시면서 한국의 예술과 예총의 발전을 위한 토론을 하고 여수 예술인들과 교감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는 당시 여수예총 사무국장으로 재임하면서 시도 열심히 쓰는 시인이어서 나와는 교분이 남다르게 두터웠다.
그는 1947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 향리 여수에서 생활했다. 1985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여수지부장에 취임하여 제26회 한국문인협회 문학심포지엄을 유치, 개최하여 지역문학 발전과 활성화에 노력했다. 이후 상경하여 서울 혜화동에 도서출판 ‘혜화당’을 설립하여 문화출판에 심혈을 기울였다.
1990년 나의 제3시집『백지였으면 좋겠다』를 이 ‘혜화당’에서 ‘혜화당시선 5’로 발간하고 당해 연도 문예진흥기금을 수혜하게 되고 문협에서 수여하는 ‘윤동주문학상’ 우수상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는 다시 1997년 6월 16일에 격월간 『정신과표현』을 창간하여 당시 잡지계에서 파격적이라고 할 만한 격조 높은 문예잡지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여기에는 현장 화가들의 그림과 사진 및 무용, 연극, 영화, 음악 등 공연예술을 문학과 접목하는 독창적이면서도 총괄적인 종합지로 정착시켰다.
그리고 예술인의 사랑방이자 갤러리인 카페 ‘리몽’을 열어 시화전, 미술전시회, 시낭송회, 출판기념회 및 시인포럼 세미나 등을 위한 무대로 예술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2008년에는 한국시인협회 이사로 선임되어 ‘바다가 시인을 부른다’라는 캐치프레이져를 내건 전국시인대회를 여수에서 개최하여 여수문학에 활기를 충족시키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상처를 사랑하면 꽃피듯 생살이 돋나요 / 죄를 사랑하면 절망 끝에서 꽃이 피나요 / 어둠을 사랑하면 죽어서도 다시 살아나나요 / 슬픔과 고통을 사랑하면 웃음이 되나요 / 불의를 사랑하면 정의가 되나요 / 거짓을 사랑하면 진실이 되나요 / 늙음을 사랑하면 고목에서도 열매를 얻을 수 있나요 / 기다림을 사랑하면 기쁨이 되나요 //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하면 시가 피나요 / 어머니 / 먹구름과 천둥 / 사랑하면 비꽃이 피나요.
--「시(詩)」전문
그는 특이하게 잡지에 열정을 바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시집은 한 권도 상재하지 않았다. 위의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에 대한 ‘상처’와 ‘생살’, ‘슬픔’과 ‘웃음’, ‘불의’와 ‘정의’, ‘거짓’과 ‘진실’, 등 시적상황의 대칭으로 묘사하면서 의문형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있다.
이러한 시법은 그가 존재(혹은 자아)를 인식하면서 성찰하기 전에 형성된 어떤 고뇌와 갈등에 대한 해법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내재된 다양한 현실적인 문제에 접근하려는 시점에서 생성하는 그의 심저(心底)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2010년 1월 8일 그동안의 병마와 싸우다가 그의 투지(鬪志)였던 『정신과표현』통권 76호 발간을 사흘 앞두고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의 향리인 여수에서 영면하고 있다.
선생은 출판물 자체를 예술품으로 만드는 천직에 계셨지만 당신을 위해서는 단 한 권의 저작 저술도 책으로 펴내지 않았습니다. 격월간 『정신과표현』과 13년간, 수천 명에 달하는 문사의 이름을 올렸으나 정작 당신의 작품을 싣는 데는 인색했습니다. 도서출한 ‘혜화당’과 문예지『정신과표현』의 푸르렀던 날들은 선생과 더불어 대가없이 흘러갔습니다. 참으로 허탈하게 우리는 당신의 뒤에 남아 이렇게나마 추모시집을 헌정하게 되어 위안을 얻습니다. 선생님께 존경과 사랑을 바칩니다.
그가 떠난지 1주기를 맞이하여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배와 후학들(주로 『정신과표현』출신들 중심) 40명이 모여서 추모시집 『착한미소』를 발간하고 헌정하는 행사가 여수에서 열였다.
대전대 황정산 교수는 이 시집 해설「사이의 미학」이란 글에서 ‘사물과 사물들,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배치와 관계를 알았던 사람이다. <사이의 미학> 바로 이것이 송명진 시인이 가진 멋과 예술의 요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작품「금이 가다」중에서 ‘꽃잎과 꽃잎 사이의 거리다 / 물소리와 물소리의 틈이다 / 햇살과 바람이 사이로 물고 물리는 관계식이다 / 잠재한 힘들의 반응 속에 / 큰일을 치룬 작은 것들의 아픔이다’라는 어조로 유추해보면 이 ‘사이의 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다양한 사유(思惟)가 필요하게 된다.
그와 나는 대학로에서 자주 만나서 술도 자주 마셨다. 개인적이건 문학적이건 간에 그는 남다른 지식을 소유했다고 본다. 그는 다방면에서 대화의 주체가 된다. 내가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에 출마했을 때 많은 조언과 격려를 해서 당선하는 영광도 안았다.
그런데 하루는 『정신과표현』에 발표된 작품을 가지고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학생들에게 최영미의 시 한 편을 읽어주는 시간 / 아아 컴퓨터와 씹할 수 있다면! / 낭독을 마치자 / 한 여학생이 씹이 뭐냐고 / 어느 나라 말이냐고 물었다’는 것과 같이 입에 담지 못할 언어로 시라고 써놓은 이아무개에 대해서 아무런 제재나 조치도 없이 그냥 게재했느냐고 내가 따졌다.
그는 궁색한 변명으로 ‘술이나 마시자’고 딴청을 부렸다. 시인은 우리 말과 글을 가장 사랑해야 되고 시적 주제가 하나의 교시적인 메시지로 전달되어야지 마구잡이로 언어를 농락해도 되느냐는 것이 나의 지론이기에 그와 나는 취기(醉氣)와 함께 설왕설래했던 기억이 새롭지만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