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이광수는 <신생新生>이라는 잡지에서,
조선 문학을 위하여서는 태학관(太學館)은 이야기책을 보는 촌가의 사랑방만 못하고 대제학, 부제학은 무당과 기생만 못한 것이다. 조선 문학이란 무엇이뇨. 조선 문으로 쓴 것이다. 10,1
생성(生成) 당시의 궁체에는 흘림체라는 글씨꼴이 있을 수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궁체라는 것은 수렴청전을 하는 대왕대비인 정희왕후에게서 비롯된, 매우 엄격하고 근엄한 상황에서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70여 년 후 문정왕후가 또 10년에 가까운 오랜 동안 섭정을 했기 때문에 이 궁체는 그 원형을 지키면서 발전해 갔던 것이다.
그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 소설문학의 대중화로 독자들의 수가 크게 늘게 되자 세책방(貰冊房)이라는 새로운 업종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세책방에서는 남성들의 글씨보다는, 아담하고 정교하고 섬세하게 쓴 읽기 편한 궁녀들의 글씨를 선호하는 독자들을 생각해서 소설 필사의 축을 궁녀들에게로 돌리게 되었다.
그래서 세책방에서는 휴가를 나오는 궁녀들과 접촉해서 그들에게 소설필사의 청탁을 하게 되었고, 궁녀들은 궁핍한 삶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그 청을 받아 필사를 하게 된다. 그러나 허락된 휴가는 짧고 써야할 분량은 많은 터라 서두르지 않을 수 없고, 그러자니 운필에 속도를 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필연으로 흘림이라는 서체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궁체의 자체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것이 곧 궁체의 흘림이라는 한 독특한 자체(字體)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48,9
이 기록[이옥李鈺의 문집]으로 미루어 적어도 영조 시대에는 궁체라는 말이 씌어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1910년부터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여 1920년에 펴낸 조선총독부 편 <조선어사전>에 의하며, 궁체를 '여관(女官)'이 학습하는 언문의 자체'라고 풀이하고 있다.
<조선어사전>은 한일대역사전이다. .... <조선어사전>은 우리의 고유어, 한자어 등을 수집 정리하였던 것이지마는 일본이 식민지 통치를 위한 기초 조사의 일환이었다. 우리의 오랜 관습과 제도를 조사 검토해서 그것을 통치에 활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그들은 우리의 고도서, 고문서 뿐 아니라 금석문의 자료까지 수집 연구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당시 총독부의 가장 긴요한, 가장 큰 사업이었다는 것이다. 50
①궁체는 궁녀들이 쓴 글씨체이다.
궁체는 궁네들이 쓴 글씨체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궁체라고 아무나 다 이 궁체를 썼던 것은 아니다. 이 궁체는 지밀에 소속된 궁녀들이 배우고 익힌 글씨인데 그 익히는 과정이 특수하다 할 만하다. 4세라는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온 아기나인들이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면서 글씨공부는 해야만 하는데 그날 쓴 그 분량이 계획된 소정의 분량 만큼에 미치지 못하였거나, 또는 글씨의 질이 바라던 만큼의 수준에 다다르지 않으면 밥도 주지 않고 글씨 쓰기 공부를 시켰던, 가혹하리만큼 엄한 교육과정을 거쳐서 쓸 수 있게 된 결과물이 바로 궁체인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궁 안의 다른 부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지밀에서만의 서예 교육인 것이고 그 산물인 것이다.
궁 안에는 약 500명 안팎의 궁녀들이 있다. 이들이 왕과 왕비를 비롯해서 윗전으로는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들을 받들고, 아래로는 세자와 빈궁을 위시해서 왕의 자녀들인 대군과 공주, 또 후궁과 그 몸에서 태어난 군과 옹주들의 시중을 들고 있는데, 이 가운데 약 10%에 해당하는 인원이 지밀에 속하는 궁녀들이고 이들이 쓰는 글씨체가 바로 이 궁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궁체란 지밀에 속했던 궁녀들의 한글 붓글씨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52,3
현종조(1660~1674)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궁체는 숙종조(1675~1720)에서 단아한 듯하면서 필력이 살아있는 숙종어필, 인형왕후어필에서 더욱 발전된 글씨로 변하였다.
"드디어 궁중에서 쓰인 서체가 표본이 되어 새로운 서체가 보편화되었으니, 이것이 소위 '궁체'라고 일컬어졌으며, 숙종 대엔 그 완성을 보았으리라는 실증을 숙종과 인현왕후 필적에서 볼 수 있으며, 전자는 웅장한 남필의 상징이며, 후자는 섬세한 여필의 표본이 된다고 볼 수 있다."56,7
(2) 궁체와 관련된 궁녀
궁체와 관련되는 궁녀로는 지밀에 속하는 궁녀들이다. 지밀을 그 명칭이 말하듯이 대궐 안에서도 이른바 금중(禁中)인, 가장 중요하여 말 한마디 새어나가지 못한다는 엄밀한 곳인 왕과 왕비, 대비들이 생활하는 구중궁궐의 가장 깊은 곳인, 침전 쪽까지의 수발을 담당하는 궁녀들을 말한다. 지밀상궁, 시녀상궁들은 왕과 왕비 등 윗전들의 신변보호와 기거, 의식, 그리고 침수에 따르는 모든 것을 살필 뿐 아니라 시중을 들면서 내전의 물품관리, 내시부, 내의원, 전선사 등과 중요한 교섭을 담당하고 또 궁중의 대소행상인 가례, 회갑과 같은 경사, 진연, 진작 그리고 묘견례(廟見禮), 다례 등 제례 때 윗전을 쉬위하고 전도하는 임무, 또는 서적의 관리와 글 읽기와 쓰기를 담당한다. 이 외에 이들은 각 종실과 외척들의 집에 내리는 하사품의 관리와 대소사에 따르는 일까지를 담당하며, 때로는 왕비나 대비의 특사로 그 친정에의 연락을 담당하는 봉명상궁이 역할도 담당하고, 왕의 사친을 모시는 사당에도 배치되기도 한다. 62,3
2) 상궁 조두대
조씨[상궁 조두대]는 어려서 광평대군의 가비(家卑)로 궁 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한문을 잘 알고 있었고 이두에도 능통하였다. 세조 때부터 여러 가지 일들을 맡아보았고 그런 것으로 인하여 왕의 각별한 사람도 받게 되더니 멋대로 권세를 부리게 되었다. 108
전언(典言) 조씨는 어려서 광평대군의 가비로 들어갔으나 광평대군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조씨는 그곳을 나와 광평의 둘째 형인 수양대군 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궁 안에서 궁녀들의 이동은 특별한 사정과 연결된다. 그 중 하나는 그들이 뫼시고 있던 웃전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이루어진다. 112
이런 정황으로 보아 광평대군에게 딸려 있던 조씨도 응당 방출되었어야 했겠지만 그가 워낙 영특하고 한문 뿐 아니라 이두, 범어(梵語)에도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익히 아는 수양대군은 그를 발탁하여 자기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한 것이다.
그 후 그는 수양대군의 글 심부름꾼으로 생활하였기에 <석보상절>이나 <월인석보>를 인출하는 데에도 간여했던 것으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뒤이은 <능엄경언해> 때에도 그는 당대의 명사들과 자리를 같이하면서 활동하였는데 그 때 조상궁의 직급은 전언이었다. 전언은 종칠품으로 상궁들의 품계 10개 중에서 6번째에 해당하는 품계이다.
이후 그는 세조 밑에서 7년 동안 글 심부름을 하였고, 세조가 승하한 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동조에서 정원으로 오가는 문서를 담당했다. 그러다가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기 석 달 전에 그는 소혜왕후가 펴낸 발문을 썼다.
능엄경언해 사업에 종사하던 때 종칠품의 전언이었던 조상궁은 13년만에 내훈의 서발을 쓰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때 그는 궁녀로서는 최고품계인 정5품 상의(尙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조상궁은 2,3년마다 한 품계씩 승진을 한 셈이다. 말하자면 조상궁은 세조, 예종, 그리고 성종 등 삼대를 받든 상궁으로 왕실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기에 엄격하였던 소혜왕후도 그에게 내훈의 발문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112,3
그런데 조상궁의 경우는 특수하다. 철에 따라 의복을 주었고 양식을 준 것을 제쳐놓고라도 그에게는 사역을 면제해주는 복호(復戶)가 있었을 뿐 아니라 신분을 상승시키는 이른바 종양(從良)이 있었고, 더 나아가 그 가족에게 겸사복이라는 벼슬까지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일찍이 없었던 특전이었다. 118
소혜왕후는 도원군의 아내로 간택되고 수양대군의 며느리가 되면서 조상궁과 만나게 되었다. 그 후 이들은 평생을 함께 지냈지만 상전과 시중이라는 신분관계는 지켜졌으나 하는 일이 같은 경우가 많았다.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으로 <석보상절>을 지을 때도 함께 도왔고, 또 <능엄경언해>를 펴낼 때에도 함께 일을 하였다. 이들은 남편 없이 세조 내외를 섬겼고 또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때에도 글과 글씨로 서로 도왔다. 뿐만 아니라 <내훈>을 펴낼 때에도 함께 하였으니 인연도 그런 인연은 드물다 하겠다. 119
이런 몇 가지 면을 고려할 때 세조가 조상궁에게 내린 공로의 상이란 다른 상궁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승진시켰다는 점이며, 성종 때에는 조상궁의 집안 뿐 아니라 오라비까지 종량하여 벼슬까지 주었다는 점이다. 또 연산군도 왕위에 오르면서 이내 조상궁의 사촌남매들에게까지 은전을 베풀려고 한 것은 연산군이 어린 시절 조상궁에게서 받은 도움에 대한 보답을 하려고 했다는 점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120
의례에는 연회와 제사가 있으며, 이 중 사람과 사람끼리 모여서 친교하는 것을 '잔치', 사람과 귀신의 모임을 '제사'라고 한다. 여기에서 제사 때 신에게 바치는 노래와 잔치 때 성군에게 바치는 노래를 악장이라하고, 잔치를 벌이면서 사람들끼리 즐기기 위해 부르는 노래는 시조, 가사라 한다. 136
요즈음 규방에서 서로들 다투듯 능사로 삼는 것은 패설을 읽는 일이다. 패설의 수가 날마다 늘고 달마다 불어나서 그 수효가 천백여종에 달하기에 이르렀다. 거간꾼들은 이런 책을 깨끗이 필사하여 빌려주고는 그 값을 받아 이익을 챙긴다. 부녀들은 식견이 없는 터이라 비녀나 팔찌를 팔거나 아니면 빚을 얻어서 그 책들을 빌려와 긴 날을 소일하고돌 한다. _ 체제공, 여사서서 200
6) 발전기의 문화
(1) 김씨부인의 상언(上言)
이 상언의 소재 이이명의 처 김씨부인이 국왕 영조에게 올린 것이다. 여기의 김씨부인이란 서포 김만중의 딸이다. .... 이 상언은 18세기 초엽의 글로서 귀족적 품위가 느껴지며, 논리적인 전개, 당시의 언어, 예의를 갖춘 글 그리고 글씨의 단정성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김씨 부인이 상언을 한 사실은 두 번 나타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영조 원년 5월이고, 그 후 2년 뒤 다시 두 번째가 이루어진 것이다. 첫 번 째의 것은 남아 있는 것이 없어 확실치 않으나 2차 상언이 증명하듯 1차의 그것 역시 한글일 것으로 추측된다. .... 이런 점으로 미루어 언문도 경우에 따라서는 한문 못지 않은 공문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49~251
동관: 붉은 빛의 대붓. 옛날 여사(女史)가 궁중의 정령(政令)과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할 때 쓰던 붓. 275
선유(仙遊): 사람의 죽음에 대한 높임말. 277
음즐: 하늘이 암암리에 백성을 안정시킴. 281
회극(會極): 왕도를 지켜 공평무사한 정치를 하게 되면 인심이 임금에게로 귀의하여 오게 된다는 뜻임.<서경(書經, 홍범(洪範)> 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