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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을 마치는 나실인과 축복권
민 6:13-27
13 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 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14 그는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되 번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와
15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릴 것이요
16 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17 화목제물로 숫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아울러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요
18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19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의 머리 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숫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20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받들어올린 2)넓적다리는 성물이라 다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니라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
21 이는 곧 서원한 나실인이 자기의 몸을 구별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헌물을 드림과 행할 법이며 이외에도 힘이 미치는 대로 하려니와 그가 서원한 대로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법을 따라 할 것이니라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 6:13-27 / [나실인 기간이 다 찼을 때] 나실인으로 헌신하여 지내는 기간이 다 찼을 때에는 이러한 의식을 올려야 한다. 그 나실인은 만남의 장막문 앞으로 나아와 14) 여호와께 예물을 바쳐야 한다. 번제물로 일년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일년된 흠없는 암양을, 화목제물로 흠없는 숫양 한 마리를 바쳐야 한다. 15) 또한 누룩을 넣지 않은 떡 한 광주리,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과자,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발라 구운 속이 비어 있는 과자를 곡식제물, 전제물과 함께 바쳐라. 16) 그러면 제사장은 이것을 받아서 그 나실인의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여호와께 바치고 17) 숫양 한마리와 누룩을 넣지 않은 떡 한 바구니를 화목제물로 여호와께 바치고 곡식제물과 전제물도 여호와께 바쳐라. 18) 나실인은 만남의 장막문 앞에서 머리털을 밀어 화목제물 밑에서 타고 있는 불 위에 그것을 집어넣어라. 19) 이렇게 나실인이 여호와께 헌신하던 기간 동안 기른 머리를 자른 뒤에는 제사장은 제물로 바친 삶은 숫양의 가슴과 광주리에서 꺼낸 누룩을 넣지 않은 떡 한 개와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발라 구운 속이 빈 과자 한 개를 그 나실인의 손에 쥐어 주어라. 20) 그런 뒤 그것을 여호와께 흔들어 바쳐라. 그렇게 흔들어서 바친 예물은 거룩한 예물이 된다. 흔들어서 바친 그 숫양의 가슴뿐만 아니라 그 뒷다리까지도 모두 제사장의 차지가 된다. 그는 이러한 의식을 올린 뒤부터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 21) 이상은 여호와께 헌신하기로 작정하여 자기 몸을 거룩하게 바친 나실인이 지켜야 할 법이다. 앞에서 말한 예물은 꼭 그대로 바쳐야 한다. 이렇게 규정한 것 외에도 더 바치기로 서약하였으면 나실인은 그 서약대로 예물을 바쳐야 한다' 22) [제사장의 축복문]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할 때에는 이렇게 하라고 알려 주어라. 24) `여호와께서 네게 복 내리시고 너를 지켜주시길 비노라. 25) 여호와께서 너를 따뜻이 대해 주시고 네게 은총 베푸시길 비노라. 26) 여호와께서 따뜻한 눈길로 너를 감싸 주시고 네게 평화가 깃들게 하시길 비노라.' 27) 이렇게 아론과 그 아들들이 내 이름으로 축복하면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 될 것입니다. 이를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이 나실인 제도입니다. 앞 단락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과 성별을 위한 여러 금지 명령들이 제시되었습니다(1-12). 이어 본문에서는 서원 기간을 마친 나실인이 지정된 의식을 통해 일상으로 돌아가는 절차를 보여줍니다. 즉 서원의 의무조항에서 일상의 자유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백성들에게 축복하라는 내용의 말을 해 줍니다.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13-21) 서원 기간이 끝난 나실인이 지정된 의식 절차를 통해 그 서원과 의무조항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이때 속죄제와 번제, 화목제와 소제와 전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는 곧 자신의 헌신기간 동안 부지불식간에 지은 죄를 해결 받고, 또 온전한 헌신을 가능케 했던 은혜에 감사하며,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이뤄가겠다는 다짐을 위해 드려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생애를 바친 헌신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는 겸손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드높이는 감사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22-27) 제사장의 축도권에 대한 말씀입니다. 모세는 제사장들이 백성을 축복할 때 쓸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 축복은 3문장으로 각각 ‘여호와는’으로부터 시작하여 ‘너’로 마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는 말씀은 물질적 축복을 말하고 죄악과 대적으로부터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는 말씀은 하나님에게 만족과 은혜로움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번영과 안전과 평강을 주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 되면 그가 누구며, 어떤 상황에 부닥치든 하나님의 보호와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가 혹 시련과 질곡의 순간을 만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보호와 의지를 증명하시려는 방편으로 제공했을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당신의 축복을 백성에게 전할 중재자로서 제사장들을 택하시고 그 고유 임무 중 하나로 축도권을 위임하였습니다.
적용: 제사장이 번제보다 속죄제를 먼저 드린 것은 죄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는 헌신 이전에 해결해야 할 죄의 문제는 없는지요(렘 31:34; 요일 1:9)?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것을 온전히 지킨 일들과 그렇지 못한 일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당신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벧전 2:9) 세상을 향하여 축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잠언 4장 19절에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악인의 길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는 잘못 가운데 살고 있지 않은지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내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마음의 전반을 맡기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 세상의 유혹을 이기며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 6:1-27 / 박조준 목사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 은 하늘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영적 축복으로 그의 백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백성이 이와 같은 신령한 축복을 체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지 못하고 사 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어두움에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서 돌 아오라 돌아오면 산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셔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추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이와 같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복을 주셔 서 그의 백성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십니다. 이런 축복을 계속 부어 주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 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의 축복을 전달할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론을 정하시고 모세에게 그를 가르치도록 명하셨습니다. 아론은 제사를 드리고 중보를 행할 뿐 아니라 축복을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들을 보면 자기 자손에게 매우 합당한 축복을 선언하였습니다. 야곱이 자기의 열 두 아들에게 행한 축복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을 선언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하는 축복의 기도를 받고 돌아가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축복하기 위해서 사람을 택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와 같은 면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는 아론과 그 자손들의 원형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적 임무를 수행하실 때 그의 백성을 계속 축복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는 산상보훈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이 있을지어다 라 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전생에는 한 마디로 축복의 연속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시며 축복하시고 선행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심으로 공생애를 마치셨는데 그 때도 예수님은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고 떠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근심할 필요가 없습 니다. 비록 무서운 고통의 구름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시더라도 언제나 그럴 것이 아니고 이 어 두운 구름이 걷히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저 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축복이 남아 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론을 택하셨습니다. 아무에게나 주시는 축복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기 위해서 임명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신 축복도 그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영생을 주시 기 위하여 작정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런 축복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저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주가 그의 백 성인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축복이 무엇입니까? 첫째, 이 축복은 제사장을 통해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누구나 하는 일이 다 아닙니다. 아론 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도록 그 임무를 부여 받은 것입니다. 희생 제물의 피가 묻은 손이 축 복을 주기 위해서 펼쳐져 있었습니다. 1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은 그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께 서 나아갔습니다. 그 때는 반드시 피가 동반되었습니다.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축복의 소리가 우리 귀에 들려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제물을 잡 는 것과 피를 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적인 축복을 주시게 됩 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없는 제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고, 축복을 위한 거룩한 통로가 되 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에게 어떤 축복도 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이 축복은 중보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네게 복을 주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 한다 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바라는 내용입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백성을 위해서 중보 사역을 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으로서 항상 자기의 택한 백성을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의 백성인 우리도 예수 그 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믿는 우리를 위하여 간곡히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 니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시다는 사실 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하실 것입니다.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 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 에 살면서도 안전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기도가 있으므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이길 수 가 있습니다. 우리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대언자가 되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셋째, 이 축복은 계속되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한 사람의 생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 다. 아론이 죽고 그의 아들들이 그 직책을 계승한 것처럼 이 축복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나 갑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옛날 자기 백 성에게 있었던 것같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 시작했을 때 우리에게 임했고 중단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지금도 아침 이슬같이 우 리에게 임하고 곡식의 성숙기에 필요로 하는 황금비같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축복하고 계십니다. 태양 빛은 언제나 꼭 같습니다. 그러나 안개와 구름이 태양 빛을 가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은 언제나 꼭 같이 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 세속적인 것 과 죄과 안개와 같이 되어서 하나님의 빛을 가리웁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한 마음은 변 함이 없습니다. 넷째, 이 축복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축복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4절 이 하를 보세요.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모든 축복은 하나님에게서 직접 왔습니다. 아론 은 단순히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었습니다.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시어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이 되게 하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말씀이 여러분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구하세요. 여러분이 믿으시는 축복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축복으로 만족지 마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세요.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어떤 복을 주십니까? 이 복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사 람이 주는 축복이란 한 줌의 동전과 같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너무나 풍성하기 때문에 은 이나 금으로도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영광을 가져다 줍니다.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실 때 얼마나 안전합니까?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비출 때 얼마나 아름답고 복이 됩니까? 뿐 만 아니라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크신 은혜입니까? 우리 하나님의 은혜는 한이 없으십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하나님이 얼굴이 우리를 향 해서 드셨다는 것은 놀라운 친교를 의미합니다.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주신 평강은 놀라운 평강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한 참 평강, 우리 마음의 평강입니다. 이 하나님 이 약속하신 축복을 자세히 보세요. 여호와의 성호가 세 번이나 언급이 되었습니다.여호와는 네 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 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세 번으로 표현된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것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을 가리킵니다. 세 분의 이름을 들어서 축복하지만 거기에는 한 분 여호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은 첫 번째 기록한 여호와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르켰고, 두 번째 기록한 여호와는 아들 예수 그 리스도를 말씀했고, 세 번째 기록한 여호와는 성령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축복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축복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 주 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친절하게 보살펴 주십니다.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라는 말씀이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큰 시험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죄많은 세상과 싸울 때 그 세상의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밤으로 낮으로 지켜 주시며 영혼과 육신을 보호하시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 주십니다. 하나 님은 우리의 산성이 되십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아들의 축복은 은혜의 기쁨을 말해 주는 축복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 을지어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이 두 절 말씀이 그 사실 을 말해 줍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총을 말합니다. 이 은총이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함께 하 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얼굴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 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이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얼굴 모습이 평강과 안위를 가져다 주시는 얼굴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 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빛날 때 그 찬란한 모습을 어디 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우리 주님의 은혜가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바 랍니다. 성령의 축복은 평안의 교제가 있는 축복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비추시는 하나님의 얼굴은 평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고 얼굴을 비추신다는 것은 우리와 친교를 맺으신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세상 사람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지만 하나 님의 얼굴을 대하였을 때는 평강의 빛이 빛납니다. 저는 성령께서 주님을 위하여 힘쓰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그 얼굴을 향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래서 여러분이 내가 주의 얼굴을 보았나이다. 세상 사람이 나를 비난하고 책할지라도, 흘기는 눈으로 보거나 멸시의 눈으로 본다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겠나이다. 주님이 얼굴을 드사 저에게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라는 간증을 다 하실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미소를 지으 실 때 사람의 안색이 변할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보혜사 성령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충만히 임 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축복의 대상이 복수가 아니고 단 수입니다. 너희들에게 가 아니고 네게 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나로 보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은 여호와께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유 다와 베냐민 등을 축복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신 것이 아니라 회중 전체를 하나로 보고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라고 한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이름을 하나 하 나 불러 가며 주께서 축복하시기를 원합니다 하지 않고 공개석상에서 여러분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축복하여도 이 축복은 여러분 각자에게 의미가 부여됩니다. 우리 각자가 이런 큰 축복의 전체 속에 포함되어서 각자의 분깃을 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이 축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7절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신 말씀을 생각하겠습니 다. 어떤 이는 이 구절을 거룩한 아멘 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자기의 사명을 이해할 뿐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제사장의 축복에 효력이 있게 만드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신 분이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요한 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이 우리를 너희가 내 것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영광이요,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축복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 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왜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기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 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는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사장과 왕으로 삼으신 자기 백성들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일에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이 말 씀은 정말 묘한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의 백성이 재물이 많을 때 그 많은 재물이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재물이 없어진다 해도 그 보상으로 천 배의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까지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도 우리를 보살펴 주셨습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도 돌봐 주셨습니다. 우리가 슬픔에 싸였을 때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축복 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하십니다. 하나님의 음 성을 들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다 이 런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영적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종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서 우 리를 축복하도록 하셨고 성령을 통해서 지금도 친히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축복하며 삽시다
민6:22-27 / 오세원 목사
어떤 선교사님의 글을 읽었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쿠바 아바나 “산따 페”라는 교회 (Iglesia Santa Fe)가 있는데 이 교회는 쿠바 수도 아바나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산따 페는 25,000명의 주민으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 이름입니다. 그렇지만 200만 아바나를 향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라고 합니다. 8년 전에 란디(Randy)와 제니(Yenny) 목사 부부가 산따 페 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고 있습니다. 란디 목사 부부는 2003년 아바나 시의 까사 블랑까(Casa Blanca)에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했는데, 그 교회의 표어가 “Bendecidos para Bendecir”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 위하여 주님의 축복받은 자들입니다.”(We are blessed to Bless)라는 뜻으로 월 10불의 봉급으로 살아가는 쿠바기독교인으로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도전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그렇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습니까? 복을 받아 살면서도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에는 인색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자기보다도 남에게 축복을 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죄인된 인간이지만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것을 많이 주시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임의로 복을 주시기도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서로가 복을 빌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축복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복을 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복을 빌어줄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복을 받기에만 급급합니다. 복을 빌어줄 줄 모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남이 잘되라고 빌어주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예배 마지막 순서에는 축도를 합니다. 축도는 복을 비는 기도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축도 내용으로써,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설명 드리면 아론을 비롯한 제자들은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즉 축복하라고 일러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축복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축복이 제사장이 성도들, 즉 백성들에게 축복한 내용으로 이것이 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목사가 예배 끝에 드리는 축도는 고린도후서13:13절 말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내용을 골자로 해서 다른 수식어를 첨가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내용보다는 본문의 내용이 하나님이 직접 일러주신 축복의 내용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축도가 진정 축복의 기도라면 오늘 읽은 민수기 내용으로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개업이나 입택이나 아니면 특별한 심방을 할 때는 이 내용으로 마지막 축도로 대체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민수기를 통해서 주신 말씀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축복하라고 하시면서 빌어야 할 복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복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24절 말씀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하셨습니다.
복을 주시는데 지키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보면 늘 외세에 침략을 받은 민족입니다. 구스, 앗수르, 에돔, 아람, 미디안, 블레셋,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 등 시대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채찍과 막대기로 이방 나라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지금도 주위에 애굽과 아랍나라들 틈바구니 속에서 긴장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의 민족 형성사를 보면 족장시대에 야곱의 70명 식구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430년 동안 살면서 히브리민족을 형성하여 장정만 60여만 명이 되어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고, 결국 바벨론에 70년 포로생활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정신을 차리는듯 했지만 결국 메시야를 믿지 않음으로 인해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망하여 나라 없이 약1880년 가까지 지내다가 1948년에 비로소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1700만명 정도 되지만 이스라엘에는 지난해 기준으로 770만명 정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제 1순위가 ‘여호와가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지켜주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축복기도를 드릴 때,
‘여호와께서 너를 지키시기를 원합니다’고 축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가정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직장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사업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오늘날은 특히 여호와의 돌보심과 지키심을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여호와께서 당신의 자녀를 지키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마음을 지켜주시길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가정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마음을 지키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가족을 위해 축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오늘도 너의 생명을 지켜주시길 바란다’
‘여호와께서 오늘도 당신의 생명을 지켜주시길 바란다’
‘여호와께서 오늘도 당신과, 너와 동행하시길 원합니다’
둘째, ‘은혜를 받는 삶이 되라’고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25절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속에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축복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안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모든 것이 다 형통합니다. 모든 것이 다 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은혜베푸시도록 축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힘든 고난의 일이라도 하나님이 주셨다면 그 고난은 반드시 은혜로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것이 좋은 일인가요, 안좋은 일인가요? 지금도 고향이나 고국을 떠나는 것, 부모와 형제를 떠나 멀리가는 것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옛말에는 처갓집과 정낭, 즉 화장실은 멀리 있어야 된다고 한적은 있으나 요즘은 어떻습니까? 친정과 화장실은 가까이 있을수록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버집을 떠난 것이 복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요셉이 형님들에 의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상인들에게 팔려간 것이 복입니까? 고난입니까? 누가 봐도 축복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은 요셉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가족들을 기근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유대민족을 형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작은 나라임이 원망과 불평의 요소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나일강변에 버려진 것이 축복이었습니까? 저주였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곧 바로궁으로 가서 궁궐에서 40년 동안 살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기생 라합의 팔자가 축복이었습니까? 저주였습니까? 그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갔습니다.
베드로가 어부로 성장한 것이 원망과 불평꺼리였습니까? 복이었습니까? 처음에 살아갈 때는 혹시 불평과 원망꺼리였는지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은 것이 징계였습니까? 축복이었습니까? 순교를 아무나 합니까? 순교할 수 있었으니 축복이요 은혜였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면 전화위복이 됩니다. 오히려 그것이 인생을 새롭게 하거나 아름답게 화려하게 영광스럽게 만듭니다.
모압 여인 룻이 유대 남자와 결혼했다가 금방 자녀도 없이 죽어버렸고 거기다가 홀 시어머니를 모셔야 할 때 복이었습니까? 저주였습니까? 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룻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서 결국 예수님의 조상의 반열에 들어갔습니다.
조용기 목사님, 나겸일 목사님이 폐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당시에는 혹시 고통이었고 두려움이었는지 몰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순복음교회, 인천주안장로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김삼환 목사님이 공장 사장이 장로님이셔서 공장에서 교회를 만들어서 운영하였는데 목사님이 공장 경영이 어려워져서 임지도 없이 교회에서 나오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명일동 시내버스 500번 종점에 개척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 오늘의 명성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한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은혜를 입으면 삶이 형통하며 행복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축복합시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합니다”라는 복을 빌어야 합니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렇게 축복합시다.
‘지금 겪는 일이 하나님 은혜의 통로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힘내세요’
‘지금 겪는 일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바울의 경우 서신을 쓸 때 처음 인사와 마지막 인사의 경우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습니까?
성경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쓰임 받을만한 조건을 갖추어서 쓰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단점과 약점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왕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솔로몬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도 엘리사도 약점은 다 있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마태 등 모든 제자들이 다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쓰임 받았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됩니다. 저의 경우도 가만히 살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제가 먼저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시편141편 5절에 보면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고백합니다. 의인이 다윗을 칠지라도 그것을 은혜로 여기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사람입니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 여러분들의 모든 삶에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좌우 옆과 앞뒤 성도들에게도 서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행복한 삶 되십시오”
셋째, 평강의 복을 빌어라고 하셨습니다.
26절 말씀,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이스라엘의 인사는 “샬롬”입니다. 이 단어가 평화, 평강입니다. 이스라엘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평안한 날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항상 평안이 필요했습니다. 옛날 보릿고개를 겪어야했던 시절의 우리나라 인사말에는 ‘진지 드셨습니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인사한 것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아마도 밤 사이에 무슨 일이 많이 발생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쟁이 일어났던지 아니면 쉽게 잘 죽었던지 했을 것입니다. 사실 마음의 평강이 중요합니다.
“평화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영혼을 덮으소서”
사실 아무리 전쟁이 발생하여 포탄이 퍼붓고 있어도 마음에 평강이 찾아오면 문제다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의식주 고민 없고 잘 살아도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 불행한 것입니다.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왜 우울증이 옵니까? 마음에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지 평강을 빌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도님에게 평강주시기를 원합니다’
미국의 커싱 목사님은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성대에 이상이 생겨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말을 할 수 없으니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득불 강단을 떠나게 된 커싱 목사님은 크게 낙심이 되었습니다. 목사의 생명이 성대입니다. 요즘도 성대 결절 같은 병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목이 조금 탁해져도 말하는 사람도, 듣는 성도들도 힘이 드는데 말을 할 수 없다면 이것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커싱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소리를 거두어 가셨지만 분명 이 세상에서 해야 할 다른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커싱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응답이 왔습니다. 설교 대신에 찬송시를 써보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커싱 목사님은 한 번도 찬송시를 써본 적이 없지만 펜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에게 탁월한 영감과 시적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목사님은 주옥같은 찬송시를 써내려갔는데 목사님이 남긴 찬송시가 오늘날까지 300여 편이나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찬송가 419장입니다.
1절 주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켜 주시니 거기서 평안히 쉬리로다
주날개 밑 평안하다 그 사랑 끊을자 뉘뇨 / 주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2절 주날개 밑 나의 피난처 되니 거기서 쉬기를 원하노라
세상이 나를 위로치 못하나 거기서 평화를 누리리라
주날개 밑 평안하다 그 사랑끊을자 뉘뇨 / 주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우리는 항상 평안을 빌어야 합니다. 삶이 부요치 않더라도 마음에 평강이 찾아옴은 행복입니다.
어느 화가가 예수님의 형상을 그리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습니다. 한 교회에서 은혜가 충만한 청년이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의 모습을 그렸는데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악마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데 어느 한 젊은이가 골목길에서 소망을 잃고 절망 가운데 만취가 되어 비틀거리면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이 화가는 젊은이한테 당신의 얼굴을 그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의 대답에 화가는 기가 막혔습니다. “당신은 몇 년 전에 찬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던 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오늘 내 모습은 이렇게 비참하게 변했군요.”
화가는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며 마음에 평안이 있을 때는 예수님의 얼굴처럼 빛나지만, 하나님을 떠나는 시간부터 악마의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천국이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지옥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평안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과 그리고 우리 교회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 중요한 구절이 27절입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축복하면 우리가 빈 복을 그들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창세기12장 2-3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에게 복을 비는 자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먼저 복을 비십시오. 복의 통로가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축복하십시오. 교회에서는 먼저 담임목사에게 축복하십시오. 부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에게 축복하십시오. 장로님들에게 축복하십시오. 앞장서서 섬기는 안수집사님, 권사님들에게 축복하십시오. 부모님에게 축복하십시오. 자녀들에게 마음껏 축복하십시오. 그러면 복을 비는 사람에게도 복을 주십니다. 사실은 복을 빌고 싶지 않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들에게도 복을 빌어야 합니다.
로마서12장 14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할렐루야!
사실 사도 바울의 경우 서신을 보낼 때 인사말을 보면 축복의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1장2,3절 보면 예수 안에서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후서 시작도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13장13절 마지막절인데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구절은 예배 마지막 순서로 목사가 성도들을 향하여 선포하는 축도의 내용입니다. 에베소서1:2절, 빌립보서1:2절, 골로새서1:2절에도 보면 고린도전서에 사용했던 구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축복도 구체적이면 좋습니다. 제가 인사를 길게 시킬 수 없어서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로 하지만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마음껏 축복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그 빌어주는 복을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마지막에 드리는 축복기도는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축복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레위기9장 22-2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이 말씀을 보면 아무리 바빠도 축도받기 전에 예배의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아니 큰 손해입니다. 그 예배는 드려진 예배가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항상 축복하며 삽시다. 마음껏 축복하며 삽시다.
주님의 미소
민 6:22-27 / 노경모 목사
주님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성도들이라면 모두들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주님의 얼굴을 그립니다. 인자하신 모습으로, 근엄하신 모습으로, 해맑은 모습으로, 공의가 가득찬 모습으로, 세싱 죄를 지고 가시는 아주 지치신 모습으로.. 다양하게 그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화(聖畵)라고 합니다. 거룩한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요즈음은 흑인의 모습으로 그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주님을 이렇게 한 번 그려봅니다. 우리를 향해 항상 미소를 짓고 계시는 주님.. 어린 애기를 보십시오. 대소변을 시도 때도 없이 싸기도 하며, 울기로 하고, 엄마를 귀찮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애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순간적으로 엄마가 얼굴이 이그러지기도 하지만 애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있습니다. 애기가 재롱을 피우고, 애기가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기만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로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항상 근엄하게, 어떤 때는 꾸짖고 책망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이 무섭고 겁이 나고 두렵기도 합니다. 죄송하기도 하고, 아주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기가 힘들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할 수 있는 권한에 대한 규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이 권한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종종 축도할 때 이 말씀을 믿고, 이 말씀으로 축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여러분들을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고. 축복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하셨기 때문에, 저는 믿음로 당당하고 담대하게 이 축복을 여러분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과 23절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바로 27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그런데 어떻게 축복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바로 24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축복의 내용이 네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기를 원한다.
둘째, 하나님이 너를 지키시기를 원한다.
셋째, 하나님께서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다.
넷째, 하나님께서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한다.
여러분 축복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시지요? ‘축(祝’)이라는 말은 ‘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축복(祝福)이라는 말은 복을 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복을 빕니다. 그런데 세 번째, 네 번째 축복의 내용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바로 ‘얼굴’이라는 말입니다. 누구의 얼굴을 말하지요, 네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축복하는 내용 중에서 하나님의 얼굴이 반복되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합니다.
세 번 째 축복,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는 말씀을 살펴보면 이 축복이 얼마나 우리에게 다정다감하게 다가오는 축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를 ‘주님께서 당신들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로 번역하고 있고요, 현대어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너를 따뜻이 대해 주시고’로 변역하고 있고,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웃으시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밝은 얼굴은 어떠한 얼굴을 말할까요? 따뜻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요? 공동번역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웃는 얼굴’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백성을 위하여 축복할 때, “내가 웃는 얼굴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바로 보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넣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향하여 하나님이 웃으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다.
야단치는 하나님, 엄하신 하나님, 우리의 잘못을 찾아내시려고 형사 같은 눈으로 꼼꼼히 살펴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여 웃으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항상 바라보시고 계시되 웃으시는 얼굴로 바라보십니다. 아멘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은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는 말을 ‘여호와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주시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치 엄마 아빠가 애기를,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많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도 많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항상 웃으시고 귀엽게 보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이상의 축복의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축복을 말씀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의 얼마나 평안하고 즐겁고 기쁘고 좋습니까? 이 축복이 우리게 선포되어 질 때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염려와 근심, 걱정과 두려움, 고통과 고민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지게 될 줄 믿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네 번째 축복의 말씀도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 우리를 고이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고이 보신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정성을 다하여 본다.’는 말입니다’ ‘따뜻하게 본다.’는 말입니다. 그럼으로 네 번째 축복의 내용은 ‘우리에 대해서 정성을 다하는 얼굴로, 따뜻한 얼굴로 바라보시고 평강을 주시기를 빈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만든 말이 아니라 이렇게 축복하라고 하나님이 일러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설교가 주님의 미소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은 슬쩍 미소만 지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해맑게 웃으시기도 하고, 활짝 웃으시기도 합니다. 큰 소리를 내서 웃으시기도 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너무 좋아서 쓰러질 정도로 웃으십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스바냐 3장 17절을 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즐겁게 노래를 부르시고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때문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너무나 기뻐서 배꼽을 잡으시고 소리 내서 크게 웃으시는 하나님의 얼굴 모습이 보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인해서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갑니다. 물론 이 스바냐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50년 전에 쓰여졌지만, 스바냐는 용서받고 치유받고 회복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언적으로 미리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기뻐하시며, 이들 때문에 얼마나 즐겁게 웃으시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우리들을 바라보시며 얼마나 좋아하시고 웃으실까요? 웃으시는 소리가 들립니까? 웃으시는 모습이 보이십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보시고 웃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다같이 스바냐 3장 17절의 찬양을 합시다.
어떤 분이 수련회가 가서 소그룹으로 모여서 그날 배운 것들을 나누고 더 깊이 묵상하는 여유를 가지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때 그 조의 리더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 찬양합시다. 음…… 그런데 우리 돌아가면서 좋으신 이란 말 대신 각자 다른 말로 바꿔서 고백해 봅시다.”
찬양이 시작되었고 첫 번째 사람은 ‘공의의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찬양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흠…… 난 무슨 성품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나? 아! 내가 아는 하나님의 성품은 한 가지뿐이지! 사랑의 하나님! 그래, 내가 가장 확실히 느끼고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지..’ 근데 어라? 앞 사람이 해 버렸습니다. 이 분은 당황했습니다. ‘그럼 난 뭐라고 해야 하냐?’
그렇게 갑작스레 다가온 그 분의 차례에서 그분은 무의식적으로 한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웃으시는 하나님, 웃으시는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누군가의 감탄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감탄이 웃으시는 하나님을 연상하면서 흘러나온 것인지 3음절의 자리에 4음절을 끼어 맞춰 넣은 박치의 노력에 감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내 무의식에서 본 하나님은 그렇게 웃으시는 하나님이셨다고 이분은 고백을 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날에 하나님은 그렇게 웃으셨을 것입니다. 만물을 하나하나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으셨던 하나님은 자기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신 아담과 하와를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얼마나 좋아서 웃으셨을까? 하나님은 당신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을 바라보시며 심히 좋아하시고 웃으셨던 그 하나님, 오늘 저와 여러분을 보고 웃고 계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뭐가 걱정입니까? 뭐가 염려입니까? 뭐가 두렵습니까? 뭐가 불안합니가? 뭐가 답답합니까? 뭐가 고민입니까? 왜 잠이 안옵니까? 왜 소화가 안됩니까? 왜 낙심하십니까? 왜 좌절하십니까? 왜 주저앉습니까? 왜 뒤로 물러갑니까?
나를 고이, 사랑스러이, 따뜻하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네가 너에게 복을 주마, 네가 너를 지켜주마,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마, 네가 너에게 평강을 주마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하나님의 3중 축복
민 6:22-27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3중 축복”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3중 축복”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예배를 끝마칠 때마다 목사님들이 하시는 축복기도가 성경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이처럼 신약의 축도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은 구약시대 예배 시에 대제사장들이 사용한 축복기도문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축도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철저하게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축복하십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축복하십니다.” 다같이 22절과 23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해도 하나님의 성품없이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고하라. 대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삼중 축복을 선포하라. 그리하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직접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축복의 도구로 쓰시고 그들에게 축복의 언어를 주셔서 자기 백성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성도들을 향한 축복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우리들 마음속에도 축복이 가득 차고, 우리의 입술도 축복의 언어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6장 45절에서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말씀 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1장 35-37절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내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한 없는 축복을 받은 저와 여러분 모두다 마음에 선을 쌓으시고 진정 입술로 축복하는 주의 택한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디즈니랜드를 창설한 사람은 월트 디즈니입니다. 이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만화를 그려서 생계를 유지하다가 우여 곡절 끝에 광고 대행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소질이 없다고 하는 이유로 곧바로 해고를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여섯 달 동안 실업자가 되어 집세도 내지 못하고 방황하던 중, 어느 날 교회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울고 있는 월트 디즈니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축복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다른 사람은 형제님을 버릴지 몰라도 하나님은 결단코 형제님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는 이 말씀에 크나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목사님께서 교회 창고에서 잠을 자도록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창고에 들어가서 잠을 자려는데 생쥐들이 찍찍 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아닙니까? 다른 때 같았으면 엄청나게 짜증나고 신경질 났을 터인데 그 생쥐들의 모습이 그렇게도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생쥐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미키 마우스입니다. 미키 마우스야말로 동물 캐릭터로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캐릭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55,000명의 종업원을 가진 어마어마한 디즈니랜드를 만들게 되었으며 지금도 세상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복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들고 승리자로 만들어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우리를 축복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도 팔복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사역 또한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함입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해방해 주시고, 슬픔이 있는 자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축복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함이요, 부활 승천하신 것도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한없이 축복해 주시던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본받는 자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에 주의 축복으로 가득차고, 입술의 언어도 늘 언제나 주의 축복으로 넘쳐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축복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축복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27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그들은 이 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축복의 언어는 전혀 내용 없는 공허한 언어가 아닙니다. 반드시 현실적인 실체로 나타납니다. 아론의 축복이 반드시 현실적인 실체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보증하는 이유는 첫째, 축복의 도구가 하나님이 직접 택하신 도구라는 것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대제사장으로 혹은 제사장으로 자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둘째, 그들의 축복의 언어도 그들 스스로가 고안해낸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에 직접 넣어 주신 언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이렇게 단언적으로 선언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축복은 현실적으로 반드시 성취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과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는 과연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대제사장 아론은 바로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론을 통해서 축복해 주셨듯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신령한 복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런 축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혹시나 축복인줄 알았던 것도 도리어 복이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렸는데 아침 상번제를 드리고 나서 백성에게 축복의 말을 했으며 저녁 상번제를 마치고 나서는 백성을 축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축복하시는 분은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진정 저와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육 간에 진정 축복 받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절대로 사람을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물질을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제 제 동기 목사 창립예배에 갔다가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 동기 목사가 광진교회에서 5년간 부목사로 있다가 부평에 예향교회를 개척했는데요? 광진교회 민경설 목사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저에게 주신 두 가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 가지고 꿈을 꾸라는 것입니다. 내 믿음, 내 계획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믿음 가지고 꿈을 꾸면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믿음 가지고 꿈을 꾸시는 2008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주신 믿음 일진대 그 꿈이 반드시 이루어 질 줄로 믿습니다.
둘째는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끝까지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을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열매 맺는 축복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열매 맺는 축복을 주심을 믿으시고 주님만을 의지할 때에 누르고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3중 축복을 주십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은 3중 축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3중 축복이란 무슨 뜻일까요? 쉽게 말하자면 복에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복을 주신다고 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문자 그대로 보면 무릎을 꿇고 섬긴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인이 주인을 섬길 때에 물 한 잔을 따라도 무릎을 꿇고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섬기시는 모습이 바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언제나 무릎을 꿇고 섬기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는 얼마나 황공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감격스럽고 황공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무릎을 꿇고 가장 낮은 자세로 우리를 섬겨주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이 3중 축복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고 할 때 솔직히 우리는 제일 먼저 물질적인 축복을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물질의 축복을 주시면 그 물질을 통해 도와주고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합니다. 주여, 물질의 축복을 주옵소서!”
여러분,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정에 축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이 잘 되기를 원합니다. 살고 있는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인정받고 좋은 평판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건강의 축복과 장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직장에서도 인정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축복을 원하는 것은 결단코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축복을 원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은 그 색깔이 조금 다릅니다.
첫 번째 축복은 보호의 축복(Blessing of protection)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보호의 축복” 24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지킨다고 하는 말은 목자가 양을 지키듯 울타리를 치고 갖가지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참으로 얼마나 위험한 세상인지 모릅니다. 육신적으로 위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걸어 다녀도 위험하고, 차타고 다녀도 위험합니다. 언제 내 혈관이 막힐지 모릅니다. 언제 내 심장박동이 중지될지도 모릅니다. 언제 내 몸의 세포가 암세포로 변할지 모르는 세상 입니다.
더 더군다나 영적으로도 위험한 세상 입니다. 잘못된 말 한마디를 타고 악령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잘못 본 장면 하나를 가지고 악령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사탄 마귀가 악령들을 통해서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고자 얼마나 역사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육신적으로도 위험하고 영적으로도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기적입니다. 오늘도 살아서 눈뜨고 호흡하고 예배하는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이런 위험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시는 보호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축복은 은혜의 축복(Blessing of grace)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은혜의 축복” 2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성경은 은혜의 개념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향해 얼굴을 돌리시고 환한 빛을 비추어 주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호와께서 우리를 향해 얼굴을 돌리시고 진노하시고 화를 내신다면 우리에게 과연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호와께서 우리를 향해 얼굴을 돌리시고 환한 빛을 비추어 주시는 바로 이것이 은혜의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마치 구름이 잔뜩 낀 날이 지나가고, 밤이 지난 후에 따뜻한 햇볕이 비추이는 상쾌한 아침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더욱 밝아 보일 것입니다. 파란색은 더욱 파랗게 보일 것이요, 녹색은 더욱 신선해 보일 것입니다.
또한 온 세상은 더욱더 따뜻해 보일 것입니다. 햇볕도 신선하고 따뜻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사도 따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온 세상이 생명과 활기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햇빛만 밝게 비춰주어도 세상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춰 주신다면 우리 피조물들은 생기를 얻을 뿐만 아니라 얼마나 새 힘과 용기를 가지겠습니까?
죄가 있는 자는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슬픔이 있는 자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무능한 자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소망이 없는 자는 소망을 얻게 됩니다. 망한 자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얼굴빛을 비추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번째 축복은 평강의 축복(Blessing of peace)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평강의 축복” 다같이 26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부요를 누리고, 아무리 존귀를 누린다고 해도 심령의 평안이 없으면 그것은 크나 큰 폐단일수 밖에 없습니다. 전도서 6장 2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니 다른 사람이 누리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부요와 재물과 존귀를 얻어도 그것을 누릴 만한 평강이 없다면 이는 곧 악한 병인 것입니다. 전도서 6장 6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갈 것뿐이 아니냐?”
여러분? 천년의 갑절, 2천년을 산다 할지라도 심령의 낙과 평강을 누리지 못하면 결국 그의 가는 길은 사망길이라는 것입니다. 재벌의 딸도 평강이 없으니까 자기 생명을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평강의 축복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평강은 샬롬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나 평화를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평안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환경과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도 고물을 베개하고 주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환경 속에서도 평안이 있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박국 3:16절에서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고 환난의 소식이 들리므로 창자와 입술이 떨리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고 창고에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노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 안에 있으면 참된 평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강을 원하신다면 우리는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절과 7절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그렇습니다. 여호와 샬롬! 2008년 새해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의 축복이 큰빛광성교회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도 샬롬의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대제사장의 축복기도를 읽으면서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축복기도를 할 때에 분명 이스라엘 백성 여러 명을 놓고 축복 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축복의 말씀은 언제나 단수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며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단수입니다. 너희들에게 복을 주시고 너희들을 지키시기를 원한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25절에도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라고 말씀하셨지 “너희들에게 비추사”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이 또한 단수입니다. 복수가 아닙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놓고 축복했음에도 단수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하나로 보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 되는데서 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 주님 안에서 한 세례를 받았으며, 한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 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진정 하나가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호의 축복, 은혜의 축복, 평강의 축복을 내려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얼굴빛을 비추어 주사 여러분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대제사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 주셨던 하나님의 3중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되어 진정 복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제사장의 축복과 하나님의 강복
민 6:22-27
‟아 하나님의 은혜로”
유대 랍비들이 그 백성들에게 제사장의 축복에 관해 가르쳐 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행여 이 초라한 제사장이 나에게 무슨 축복을 베풀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에게 복을 주시는 이는 이 제사장이 아니라, 이 제사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오늘의 본문 민수기 6:22-27은 ‘제사장의 축복’ (The Priestly Blessing)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의 축복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강복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제사장의 축복과 하나님의 강복, 민족의 큰 명절인 설날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인 줄 믿습니다.
1.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지키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레위 자손을 제사장으로 택하신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것으로써 회막에서의 제사를 집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백성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것입니다(신21:5). 이러한 축복 기도는 모세 시대에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창14:19)과 바로를 축복한 야곱(창47:7)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축복을 하게 하시고 강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6:24에 하나님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라며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복’(베라카)은 현세적이고 내세적인 모든 복으로써 영혼과 육신과 범사가 잘 되는 전인적인 복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지키신다’ (솨마르)는 것은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친다’는 뜻으로 ‘세심하고 철저한 보호와 보존’으로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보호(시37:28)뿐 아니라 가난과 질병, 재난과 전쟁으로부터의 보존(시33:19; 76:3)까지도 의미합니다. 이같은 복을 원치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하고 이 광야 같은 세상을 행진해가야하는 우리들에게도 절실히 요청되는 가장 전인적이고 안전한 하나님의 강복인 줄 믿습니다.
미국 테네시 주에 생명보험회사로 큰 성공을 거둔 윌비 박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일리노이 주의 스프링필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크게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마다 그는 사무엘상 2:30을 읽어 주면서, 그 말씀 대로 살기로 결심한 것이 그 비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I will honor those who honor me, and I will treat with contempt those who despise me.)
윌비 박사는 이 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신의를 지키기로 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첫 번째 약속으로 정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큰 생명보험 회사의 사장이 되었고 그의 사업은 더욱 크게 번창하였으며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복과 보호를 약속하고 보장하신 말씀이 말라기 3:10-12에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신 것은 주일 성수와 십일조 봉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드리되 ‘온전한 십일조’(full amount of your tithes)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집에’(in my house) 곧 교회에 (to the temple)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도 왕 같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노니” 라며 축복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되 하늘 문들을(the windows of heaven) 열어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부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시되 메뚜기 곧 ‘먹어치우는 자들이’ 여러분의 사업을 망치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시며, 모든 행사가 다 형통하게(시1:3) 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 성수와 온전한 십일조 봉헌 등을 통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그 얼굴을 여러분에게 비추사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여 세우신 제사장들에게 그 백성을 축복할 수 있도록 축복권을 위임해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복을 비는 사명을 위임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위임받은 축복권은 복을 주는 특권을 위임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을 주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시고 복의 주체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6:27)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축복을 빌 때만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6:25-26에 하나님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라며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이란 하나님의 전인격과 성품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가리우거나 감춘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절망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레17:10; 신31:17; 욥13:24). 반면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에게 향하여 드사 빛을 비추신다(오르, 영광스러운)는 것은 생명과 구원과 희열과 영광이 찬란히 비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와 평강의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은혜(하난, 카리스)는 선물과 축복, 기쁨과 감사입니다. 그리고 평강(살롬)은 평안과 안전, 건강과 행복을 뜻합니다. 이는 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가장 포괄적이고 완전한 하나님의 강복인 줄 믿습니다.
역사풍속화가 김학수(1919-2009)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50년 12월 4일 31세 때 부인과 4남매를 이북에 남겨둔 채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예수 믿는 남편이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평양에서 백두산 아랫 마을 혜산으로 쫓겨 갔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다행이 되어서 그들은 평양 시민 가운데 생존했던 사람이 10퍼센트도 되지 않았을 때 무사히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큰 딸에게 “아버지가 잠시 다녀올테니 엄마와 잘 있으라” 는 말을 남기고 떠났는데 결국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족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자책감을 달랠 수 없었던 그는 39세 때 극심한 신경쇠약에 걸려 ‘회복불능’ 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병석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저는 부유한 삶을 택하기 보다 나사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난하게 살다 주님 곁으로 가겠으니 제발 신앙만은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님께서 한번만 살려주시면 오로지 그림을 통해서 귀한 것을 남기는 작업을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화와 기독교 역사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40여 명의 전쟁 고아들을 데려다 한 집에서 살거나 돌봄으로 자기 자식인양 키웠습니다. 이들 가운데 미국연합장로교 총회장에 오른 이승만 목사를 비롯하여 10여 명의 목사와 교수와 장관과 사업가 등이 배출되었습니다. 90세가 넘도록 평생을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살으신 혜촌 김학수 장로님은 “만약에 신앙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나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간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인’ (I am the worst of them. 딤전1:15) 그에게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그의 감사와 감격을 디모데전서1:14에 아주 분명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아멘!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는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 (his abundant grace)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믿음과 사랑도 풍성하게 주십니다. 이런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평강도 주시는 하나님이심에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도 왕 같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라며 축복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얼굴을 향하여 드사 빛을 비추시고 은혜와 평강을 주시되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게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어디서나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히12:2).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여러분에게 향하여 드시고 빛을 비추사 은혜와 평강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레위기 9:23에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였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는 제사장이 축복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빛으로 온 백성에게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아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지키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여러분에게로 향하여 드사 빛을 비추사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민 6:22-27 / 양향모 목사(광성교회)
추석 명절을 맞이해서 고향에 가실 분들은 조심해서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고향에 가서 가족들 일가친척들 반갑게 만나시고 좋은 음식들 많이 드시고 행복한 시간들 되시기 바랍니다. 추석은 한가위라고 하는데 ‘한’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인데 “8월의 한가운데 큰 날” 혹은 “가을의 한가운데 큰 날”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추석의 유래가 여러 가지 있는데 아마도 가을 추수를 앞두고 조상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묘도 하고 제사도 드리는 특별한 날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기를 맞이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보리농사를 지어서 드리는 초실절 혹은 맥추절이 있고 가을 농사를 지어 감사를 드리는 수장절 혹은 초막절이라고 하여서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를 드리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추석이 성경의 추수감사절과는 좀 다르지만 추수를 앞두고 조장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보아서 비슷한 성격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만 그것이 변질이 되어서 조상신이나 귀신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 성도들은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우리에게 주시고 특별히 농사를 잘 짓도록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절하게 주셨음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가을 들녘에 곡식들이 익어가고 과일들이 익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답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추석을 보내야 합니다.
명절이 되면 서로에게 복을 빌어서 행복한 삶을 살라고 기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하게 복을 비는 축복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많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축복이란 참 좋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복, 축복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복을 받기 위해서 노력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문제는 그 축복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축복 받기를 원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 반대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참된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로 축복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복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의 전통을 따라 다섯 가지의 복을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복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오복이라고 합니다. 장수하는 것, 부자가 되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덕을 행하는 것, 자기에게 주어진 수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병사나 사고사가 아닌)을 오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자식이 많은 것, 치아가 건강한 것 등을 넣기도 합니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복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것이 복이고 하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복을 빌면서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는 복이 임하시기를 바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나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을 조심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여호와나 하나님 대신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빈다는 말을 축복한다고 말했습니다. 축복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는 말로 썼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축복할 축복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지시하여 백성들에게 이런 복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 복들을 살펴보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을 복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낸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 처음 시작할 때 인구조사를 하였고 끝날 무렵인 40년 후에 다시 인구조사를 하였습니다. 이 두 인구조사 기간 동안을 기록하였다고 하여 백성들의 수를 기록한 민수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먹을 것도 없고 편히 쉴 집도 없는 광야에서의 삶이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삶을 잘 견디고 통과한 사람은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서 살게 되고 견디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 광야에서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떤 어려운 문제도 다 해결이 됐습니다. 그러나 잠시라도 떠나시면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흔히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광야에서의 삶에 비유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고 포기하고 떠나면 그 좋은 것을 잃게 됩니다. 그런 우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때만 이 믿음을 지키고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노라
본문 22-24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이 백성에게 빌어야 할 가장 중요한 축복문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아야 할 가장 큰 복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입니다. 수많은 질병을 일으키는 병균들이 수시로 침투하려고 노리고 있습니다. 교통사고 화재 이런저런 사고들도 우리 주변에 수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좋지 않은 불행한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위험 속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때와 지켜주지 않으실 때의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원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이런 사고만이 아닙니다. 수시로 변하는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이 마음에서 결정이 됩니다. 마음이 악한 마음이 되면 악한 일을 하게 되고 선한 마음을 가지면 선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죄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주변에는 사탄의 사주를 받는 거짓선생들, 이단, 하나님을 거부하는 악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세력들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를 파괴하고 인생들이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만듭니다. 자유라는 미끼를 가지고 접근을 하지만 사실은 자유가 아닌 비참한 상태가 되게 만듭니다. 그런 나쁜 사람들의 유혹에서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지키는 일은 우리의 힘으로 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때 온갖 죄의 유혹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지켜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믿음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변하지 않도록 믿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믿음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제일 큰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실 때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셔서 여러분들을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든 사고에서 모든 질병에서 모든 어려움에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본문 25절에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고 그 상으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비교하면 조금 잘 하는 사람도 있고 조금 못하는 사람도 있어서 구별이 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 다 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무엇을 해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시키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킬만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만 바라야 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길 뿐입니다.
이 은혜를 받는 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외면을 해버리시면 우리가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긍휼히 여기셔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힘만 가지고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돈을 벌거나 출세를 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운이 따라야 잘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잘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죄에서 멸망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필수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언약은 행위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복을 주시기도 하고 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 행위언약 속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죄인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두 가지 잘 한 것은 있지만 총체적으로는 다 죄인이라는 평가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그런 특별한 사람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의 행위로서는 의롭다고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은혜언약 속에서 삽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위를 통하여 의에 이르지 못함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나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시고 승천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가 가장 크고 귀한 은혜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슨 큰일을 하지 못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시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의롭지 못하고 죄를 많이 지었어도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본문 26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평강이라고 했습니다. ‘평안’ ‘평화’로도 해석하는 이 평강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면 살롬이라고 인사를 하는데 그 살롬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의 평강이라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좋아하는 복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원수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관계로 남아 있어서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를 범한 인간을 반드시 벌하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범한 인간이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바로 저주를 받고 죽임을 당해야만 합니다.
구약시대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방법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이 그 짐승처럼 죽임을 당해야 하는 흉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의 제사를 드린 후에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있어도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왔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해 주신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때 우리 인간 사이에도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사는 우리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싸우고 빼앗고 시기하고 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서로 도와주고 사로 잘 되게 해주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그런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수많은 전쟁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나라의 전쟁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적대관계를 만들고 서로 싸우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런 전쟁의 시대에서 서로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시고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살게 해 주심으로 평화를 누리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로 미워하고 사로 다투는 일이 없는 평화로운 삶이 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27절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하는 일은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저도 매일같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축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복을 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축복합니다.
그 축복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여러분들을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여러분에게 참된 평강이 임하십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복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이 사는 일평생동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평화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며 사는 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라
민수기 6장 22-27절 / 이한규 목사
< 하나님이 주시는 복 >
본문에는 이스라엘 제사장의 축도가 나온다. 당시 축도 권한은 대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만 있었다(23절). 본문 24-26절의 축도를 보면 세 구절이 모두 ‘여호와는’이란 단어로 시작된다. 복의 원천은 여호와 하나님이란 암시다. 어떤 주석가는 ‘여호와는’이란 세 번 언급된 표현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암시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당시 대제사장이 ‘여호와는’이라고 언급할 때 첫째, 둘째, 셋째 언급의 악센트가 다 달랐다고 주장한다.
본문이 언급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복이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 것이다. 본문 24절을 보라.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은 모든 복의 근원이시면서 사탄, 대적, 가난, 재앙, 질병으로부터 지켜 주신다. 사람이나 돈은 사람을 지켜 줄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 사람을 온전히 지켜 주실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것이다. 본문 25절을 보라.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의 얼굴이란 표현은 하나님을 생생하게 표현하려는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감추시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고 자신의 얼굴을 비추시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소망적인 상황이다. 결국 하나님의 얼굴 방향이 은혜 유무를 좌우하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내게 비추심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내가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은혜다.
셋째, 하나님이 평강 주시는 것이다. 본문 26절을 보라.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셨다는 것은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셨다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의사와 행동을 나타내는 묘사로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나의 대한 사랑과 관심은 나의 외적인 평화와 내적인 평강의 최대 원천이다. 결론적으로 참된 복은 ‘보호해 주시고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가지는 복이다.
<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라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면 복을 주겠다고 하셨다(27절). 그 말씀은 2가지 핵심 메시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고 소중히 여기라는 메시지다.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은 나의 기도와 축복이 하나님께 상달되게 하는 핵심 통로로서 그 이름들이 빠진 기도와 축복은 공허한 주문으로 끝난다. 둘째, 축복의 말은 제사장의 입에서 선포되지만 축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메시지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남에게 축복의 말을 많이 해 주라.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만이 축복 기도를 해 줄 수 있었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누구나 남을 축복해 줄 수 있다. 축복의 말과 기도를 받는 존재로 머물지 말고 축복의 말과 기도를 해 주는 존재가 되도록 나의 입술에서 복된 신앙 언어가 많이 나가게 하라.
가끔 보면 성도의 입술에서 나오는 신앙 언어가 남의 상한 마음에 식초를 붓는 폭력적인 언어가 된다. 욥의 고난 중에 세 친구가 와서 한 정죄와 비판은 그에게 매우 폭력적으로 들려졌을 것이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 불릴 정도로 의로운 존재였고 하나님도 그 사실을 인정하셨다. 그런 사람이 고통스런 현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 혹은 신앙이란 이름을 빌어 하는 다수의 폭력적인 말을 몸으로 맞이할 때 그의 상처와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나의 입술 때문에 누군가가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이 없게 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일은 더욱 없게 하라. 복 받고 벌 받는 문제에 대해 쉽게 단정하거나 결론을 내리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나의 축복의 말로 누군가가 자기 현실을 극복하도록 도우라. 현실에 일일이 대응해 문제와 해답을 찾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교만한 태도를 가지면 끊임없이 생겨나는 의문의 현실을 이겨낼 수 없다. 그저 축복의 말을 통해 현실을 이겨내게 하는 믿음과 천국 평안이 그의 삶과 마음에 임하도록 일조하라.
여호와의 복
민 6:22-27 / 윤사무엚 목사
요절: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주제: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복을 받아 복을 전달하는 복덩이가 되자
찬송: 28장, 489장(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500장(주 음성 외에는)
교독: 1번(시편1편), 예배의 부름: 시편 128편, 예전색: 초록색
우리가 하나님의 복 받은 사람이 되고 이 복을 이웃에게 부지런히 나눠줍시다. 본문 말씀은 대제사장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강복한 내용으로 삼위일체적 복입니다.
24절은 지키심의 복(성부), 25절은 은혜의 복(성자), 26절은 평강의 복(성령)입니다. 신약시대에는 고후 13:13에서 성자 예수님의 은혜, 성부 하나님의 사랑, 성령 하나님의 교제(코이노니아)를 강복합니다. 축도할 때 이 두가지 모두 사용해도 좋습니다.
히브리어 ‘브라카’는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gift’(선물) 곧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은사)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대로 (1) 생명의 기업 (2) 땅의 기업 (3) 교제(지킴)의 기업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말씀 25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은혜(chen)란 헨(chen, 동사 chanan)은 '하난'(호의, 자비, 긍휼,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란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말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호의나 자비(긍휼, 은혜)를 베푸는 말로 사용 되었습니다. 이 말은 구약 (개역)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은혜), 또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과분한 호의(렘 31:2)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롬 12:1에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란 말이 은혜라는 말입니다.
셋째로 ‘브라카’는 또한 '평화' 곧 샬롬이란 뜻도 갖습니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의 내용이 샬롬이라는 것입니다. 샬롬은 모든 관계의 온전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나와 하나님, 이웃, 자신, 그리고 자연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브라카 berakah, 동사는 barak “무릎을 꿇다” 즉 복을 받는 자세 뜻)은 (1) 자녀 축복: “생육, 번영, 충만”이다. 많은 자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2) 땅의 축복: 땅을 기업으로 주시며 형통케 하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3) 교제 축복: 하나님의 사람에게 복을 주시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을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신다는 것이다. 임마누엘의 은총이 임합니다.
창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창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sanctified it: because that in it he had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created and made."
아브라함을 불러주실 때,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And I will make of thee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thee. 창 12:2)하셨습니다. 75세인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그에게는 소망이 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오래 살았지만 자식을 주시지 않아 하나님께 언제 후사를 주시겠나이까? 질문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로 확신시켜 주시니 아브라함이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땅을 유업으로 주신다며 언약을 체결하십니다(창 15:8~17).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던 순간 천사를 통해 아브라함이 칼을 든 손을 멈추게 하시고, 가라사대 “내가 나를 가르켜 멩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제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6~18)
이삭이 흉년이 들어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갔을때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하시면서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창 26:1~5)
아버지의 장자축복을 받고 밧단아람으로 가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나타나셔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창 28:13~14)
야곱이 이집트에 가서 요셉이 낳은 두 손자(므낫세, 에브라임)에게 축복할 때 우수를 둘째 손자 에브라임(Ephraim, 뜻이 “창성함”)위에 얻고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아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창 48:15~16)
400년간 이집트 고센 땅에서 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족장에게 약속하신대로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사 70명 야곱의 자손이 장정 60만(전체 인구는 200~300만 추산)으로 기하급수 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출 1:7)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10번 불평하고 시험하는 바람에 장정 60만은 모두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나안 땅에 입성할 때 장정이 60만 1730명 된 것을 보면(민 26:51) 40년 동안 장정만 60만 인구가 다시 태어나 생육하고 번성하였습니다. 오히려 1730명이 증가했습니다. 고센땅에서는 400년 만에 60만으로 증가했고, 광야에서는 40년 만에 60만이 죽고 60만 인구가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복 개념에는 자녀의 풍성한 생산과 땅을 유업(신명기)으로 받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을 괴롭히면 하나님의 재앙이 임합니다. 자기가 쏜 화살에 자신이 맞습니다. 자기가 쏜 총알이 오발되어 자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을 복 빌면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 민 24:9)고 하십니다.
창세기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여기서 다섯 번 나오는 복입니다. 천지 창조하실 때 복 주심과 노아 홍수 후 계절 질서를 약속하신 후 처음 나오는 복입니다. 이스라엘 족장사는 복으로 시작합니다.
요셉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이 보디발의 집에, 또한 궁중 감옥에 임하십니다(창 39:3~5, 23).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창 39: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주의 집에 거하는 자는 복이 임합니다. 주님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시 84:4~5) 이런 사람은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며,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갑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시 84:12)
룻기는 축복이 많이 나옵니다. 룻의 봉사는 생명을 얻고 계보를 이어갑니다.
룻1장 8절 나오미가 두 자부를 위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2: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서로 복을 빌어줌)
룻 2:12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2:19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룻이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시모에게 알게 하여 가로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20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2:19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룻이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시모에게 알게 하여 가로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20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늙은 시모 나오미는 죽으나 사나 룻에게 복을 빌어준다
3:1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3:10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4: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4: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심지어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민 24:9, 롬 12:1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8) 저주와 심판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예수님께서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고전 4:4).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 5:9),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약 3:18)
약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부지런히 서로 축복합시다. 자녀, 교회, 성도, 목회자, 나라,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프로 야구할 때 7회 초가 마쳐지고 홈팀이 공격하기 전 God bless America. 노래를 부릅니다. 9.11사태 이후 생겨난 풍속이지만, 미국민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스포츠 경기가 시작되기 전, 독립기념일 때 “성조기여 영원하라” 국가를 부를 때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만세” 애국가도 나라를 위해 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국내인보다는 특히 해외에서 이 애국가를 부르면 교포들이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납니다.
이런 복이 임하도록 야베스처럼 기도합시다 야베스는 어렵게 태어났지만 어릴적부터 복에 대한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랬더니 형제들 가운데 존귀한 자가 되어 ㅆ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And Jabez called on the God of Israel, saying,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Oh that thou wouldest bless me indeed,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and enlarge my coast,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and that thine hand might be with me,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and that thou wouldest keep me from evil, that it may not grieve me!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And God granted him that which he requested.” (대상 4:9~10)
다같이 민수기 6장 24~26을 낭독하며 서로 복을 빌으시기 바랍니다.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The LORD bless thee, and keep thee: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thee, and be gracious unto thee: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아멘 The LORD lift up his countenance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라
민수기 6장 22-27절 / 이한규 목사
< 하나님이 주시는 복 >
본문에는 이스라엘 제사장의 축도가 나온다. 당시 축도 권한은 대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만 있었다(23절). 본문 24-26절의 축도를 보면 세 구절이 모두 ‘여호와는’이란 단어로 시작된다. 복의 원천은 여호와 하나님이란 암시다. 어떤 주석가는 ‘여호와는’이란 세 번 언급된 표현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암시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당시 대제사장이 ‘여호와는’이라고 언급할 때 첫째, 둘째, 셋째 언급의 악센트가 다 달랐다고 주장한다.
본문이 언급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복이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 것이다. 본문 24절을 보라.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은 모든 복의 근원이시면서 사탄, 대적, 가난, 재앙, 질병으로부터 지켜 주신다. 사람이나 돈은 사람을 지켜 줄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 사람을 온전히 지켜 주실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것이다. 본문 25절을 보라.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의 얼굴이란 표현은 하나님을 생생하게 표현하려는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감추시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고 자신의 얼굴을 비추시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소망적인 상황이다. 결국 하나님의 얼굴 방향이 은혜 유무를 좌우하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내게 비추심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내가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은혜다.
셋째, 하나님이 평강 주시는 것이다. 본문 26절을 보라.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셨다는 것은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셨다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의사와 행동을 나타내는 묘사로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나의 대한 사랑과 관심은 나의 외적인 평화와 내적인 평강의 최대 원천이다. 결론적으로 참된 복은 ‘보호해 주시고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가지는 복이다.
<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라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면 복을 주겠다고 하셨다(27절). 그 말씀은 2가지 핵심 메시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고 소중히 여기라는 메시지다.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은 나의 기도와 축복이 하나님께 상달되게 하는 핵심 통로로서 그 이름들이 빠진 기도와 축복은 공허한 주문으로 끝난다. 둘째, 축복의 말은 제사장의 입에서 선포되지만 축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메시지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남에게 축복의 말을 많이 해 주라.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만이 축복 기도를 해 줄 수 있었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누구나 남을 축복해 줄 수 있다. 축복의 말과 기도를 받는 존재로 머물지 말고 축복의 말과 기도를 해 주는 존재가 되도록 나의 입술에서 복된 신앙 언어가 많이 나가게 하라.
가끔 보면 성도의 입술에서 나오는 신앙 언어가 남의 상한 마음에 식초를 붓는 폭력적인 언어가 된다. 욥의 고난 중에 세 친구가 와서 한 정죄와 비판은 그에게 매우 폭력적으로 들려졌을 것이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 불릴 정도로 의로운 존재였고 하나님도 그 사실을 인정하셨다. 그런 사람이 고통스런 현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 혹은 신앙이란 이름을 빌어 하는 다수의 폭력적인 말을 몸으로 맞이할 때 그의 상처와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나의 입술 때문에 누군가가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이 없게 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일은 더욱 없게 하라. 복 받고 벌 받는 문제에 대해 쉽게 단정하거나 결론을 내리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나의 축복의 말로 누군가가 자기 현실을 극복하도록 도우라. 현실에 일일이 대응해 문제와 해답을 찾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교만한 태도를 가지면 끊임없이 생겨나는 의문의 현실을 이겨낼 수 없다. 그저 축복의 말을 통해 현실을 이겨내게 하는 믿음과 천국 평안이 그의 삶과 마음에 임하도록 일조하라.
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민 6:22-27 / 유영설 목사
새롭게 다가오는 한해는 희망찬 한해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신념이나 판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내 신념과 판단이 옳은지 하나님께 묻고 또 묻는 영적인 삶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이전인 1~21절까지는 제사를 강조하는 나실인 서원을,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제사장이 제사하는 백성을 축복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제사의 내용인 나실인 법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구별하여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각자 마음의 소원을 품는 이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별하여 정결하게 해야 됩니다. 이것이 축복을 구하는 자, 축복을 받는 자의 옳은 자세입니다. 여러분들을 축복하시려고 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별하고 정결케 함으로 어떤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1. 복을 주시고 지키시는 하나님(24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제사장이 축복하도록 한 첫 번째가 “복을 주시고”입니다. 그런데 “네게 복을 주시고”라는 말 뒤에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말씀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이것은 중요함을 나타낼 때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너를 지키시는 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무엇을 지켜주시는 것이 복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실인 서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간절한 소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몸을 구별하고 여호와께 몸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지키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합니다. 이것은 ‘서원’한 것을 지켜달라는 뜻입니다.
새해에 무엇을 소원합니까? 내가 이루고 싶고 얻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지만 오늘말씀에서는 나실인 서원처럼 자신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정결한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25절). 여기서 은혜는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비춰주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밝은 얼굴을 비추시는 것은 개인과 공동체에 구원과 생명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나실인 서원을 한 자는 하나님이 밝은 얼굴로 대해주신다고 했습니다.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에게는 공로와 댓가를 따지지 않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티벳 불교나 불교의 윤회사상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공로가 있어야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모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는 서원의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요, 서원의 과정, 즉 나실인으로 구별되고 정결한 삶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결심을 할 때 우리의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밝은 얼굴로 대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 그래서 그것이 은혜입니다.
3. 하나님이 평강을 주신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신다.(26절) 이세상에서 평화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며 평화로워야 일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먼저 기억할 것은 평강은 하나님의 얼굴에서 온다는 점입니다.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자가 평화를 이루는 자들입니다.
나실인 서원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사장은 평화를 축복했습니다. 그 평화의 축복이 하나님의 얼굴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평화를 축복하는 것은 나실인 서원하는 사람들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불안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의심은 불신이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해의 삶 가운데 소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서원과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나실인 서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제사장 축복의 세 번째 내용은 평강인데 서원에 믿음을 더함으로 서원이 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고 계심으로 평화가 임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화로 금년에 내가 서원한 것을 이루어가는 성도가 되어야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체험한 나 때문에 가족이 평화롭고 직장이 평화롭고 교회가 평화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축복에 있어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1)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축복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축복은 체계적이고 질서있게 나타납니다.
2)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손을 통하기는 했으나 모두 하나님께로 나옵니다. 이 모든 축복은 나실인 서원을 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요 사랑이었습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삶 현장에 가까이 계셔서 나실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고 계심으로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승리하는 한해,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게 복을 주시고
민 6:22-27 / 김광일 목사
조창인 작가는 본래 장래가 촉망되던 기자였습니다. 어느 날 취재한 사건이 잘못되면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이 수감된 감방으로 가게 되었는데 두려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한번은 두목이 그를 부릅니다. “너 교회 다녀?” “안 다닙니다.” “찬송 아는 것 있어?” “잘 모릅니다.” “그럼, 성경은 읽어 봤어?” “예, 성경을 다 읽지는 않았고 대학 다닐 때 서양 문화사 시간에 관심이 있어서 신약성경만 읽어보았습니다.” “그럼, 됐어. 오늘부터 예배인도하고 설교도 해.” 거절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시키는 대로 찬송 부르고 억지로 설교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폭 두목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가 놀랐습니다.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저 사람이 나를 놀리나?” 그러다가 독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혼자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폭 두목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소서 라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동안 지적 교만으로 성경을 무시하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살아왔지만 이제 성경을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믿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읽어나가자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시인하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연루되었던 사건이 해결되면서 감옥에서 나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아내와 같이 교회에 다니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기자 생활을 못하고 작가로 나섰지만 실패하고 7년동안 반백수로 지냈습니다. 그렇지만 아내와 함께 믿음으로 극복하여 나갔습니다. 글을 쓰면서 매 순간 자신의 지적 교만과 한계를 고백하며 철저하게 하나님의 지혜와 도우심을 구하는 작가로 변해 갔습니다. 그는 글을 쓰며 한계에 부닥칠 때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앞에 엎드려 능력을 부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10만의 독자를 붙여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 드러나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기도하며 쓴 소설이 나오자 하나님께서 무려 150만 독자를 붙여 주셔서 베스트셀러가 되게 하셨습니다. 기도로 만들어진 그 소설은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낸 ‘가시고기’ 라는 작품입니다. 조창인 작가는 간증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매순간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고 축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선지자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의 축도를 통해 약속하신 축복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원하시며, 원하노라’ 라는 구절입니다. 즉 보호와 은혜, 평강은 우리들이 받기 원하는 축복의 내용이지만 본문에 보니 보호, 은혜, 평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원하노라’ 의 시제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고, 지키고 계시고, 앞으로도 지켜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축복은 우리가 받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것이라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그렇게 축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기 원하시는 내용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지키시기를 원하며
랍비 시몬 벤 요하이(Simeon ben Yoḥai)의 제자 중 하나가 외국에 나가 큰 부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질투했습니다. 랍비는 제자들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랍비는 제자들을 데리고 골짜기로 갔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후 외쳤습니다. “골짜기여, 골짜기여, 금화로 가득 차 흘러라!” 골짜기는 갑자기 눈이 부시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랍비는 제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돈이 탐나는 사람은 갖고 가거라. 그러나 지금 이 돈을 갖고 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실거야” 제자들은 아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어도 여호와께서 지켜주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이 유대인을 세계에서 뛰어난 민족으로 축복받도록 만든 것입니다.
본문 24절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은 선택하시고 부르신 백성의 필요를 따라 풍성한 복을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복의 근원자이십니다. 여기의 '지키다'의 히브리어 '솨마르'는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 라는 뜻입니다. 즉 세심하고도 철저하게, 주의 깊게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보호 뿐 아니라 가난과 재앙과 각종 질병 및 전쟁으로부터의 보호까지 의미합니다. 향후 죽음의 땅 광야를 행진해야 하며 사나운 이방 세력과 맞부딪쳐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이 절실히 요구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목적하고 광야 같은 세상을 행진해 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보호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이 없이는 한시라도 쓰러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전적으로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눈동자 같이 지키시며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지키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을 서로 축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베푸시기를 원하며
피터 하밀(pete hamill)의 저서 ‘행복의 노란 손수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플로리다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움츠린 주인공 윌리가 앉아 있습니다. 허름한 옷과 덥수록한 수염, 굳게 닫힌 입술의 그에게 한 소녀가 접근하여 어렵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윌리는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뉴욕 교도소에서 4년 동안 복역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가 힘이 들까봐 자신을 떠나 새로운 삶을 택해도 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형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아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혹 나를 기다렸다면 내가 집에 가는 날 집 앞 떡갈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달아달라고. 하지만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면 노란 손수건을 달지 말아달라고. 노란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내 인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버스가 마을에 이르자 승객들은 손에 땀을 쥐며 떡갈나무가 보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이 환영의 깃발처럼 떡갈나무에서 춤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환영도 이와 같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고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와 봉사와 전도와 찬양으로 은혜 받은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고 못 드립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기의 '얼굴을 비춘다' 는 것은 사심이 없이 온 마음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친 감정이 없이 다가와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는 궁극적인 이유는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은혜'의 히브리어 '하난'은 '긍휼히 여기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한량없는 사랑입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왔고, 또한 살아가고 있으며 그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크게 보면 크게 볼수록 신앙생활이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자신을 작게 보면 주님이 크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나는 죄인이다' 할 때에 의로운 주님을 보게 될 것이고, '나는 부족하다' 할 때에 완전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려면 잘난 것도 버려야 되고 못난 것도 버려야 됩니다. 가난해도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을 바라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식함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질병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주시기를 원하며
25년 동안 출판계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쉬는 날도 없이 일하다 심한 허리디스크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가던 아내가 누워서 심심하니 책이나 읽으라며 성경책을 주었습니다. 특히 잠언을 읽으라고 펼쳐 주었습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성경을 읽게 된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며 책을 많이 읽고 원고 교정도 하였지만, 별 감동이 없었는데 잠언서를 읽는 순간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잠언 8장 32절 “내 말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이 임하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말씀을 읽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 강하게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잠언만 읽은 것이 아니라 전도서도 읽고 시편도 읽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자 더 이상 누워서 허송세월을 할 수 없었습니다. 새벽기도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참석하는 동안 낫기 힘든 허리디스크가 치료되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믿음을 갖게 되면서 그는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를 위해서 일했지만 이제부터 하나님을 위해 일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배운 것이 출판일밖에 없으니 문서 선교하는 출판사를 세우고자 계획하고, 규장 문화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슬비 전도편지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경영이 어려워서 빚더미에 올라앉기도 했지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나니 마음에 평강이 넘치고 어려운 고비도 넘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양재동에 규장 문화사 사옥도 신축하고 베스트셀러를 많이 내어 흥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규장 문화사 대표 여운학 장로입니다.
본문 26절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평강의 ’샬롬‘은 안전, 건강, 번창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쁨과 생의 환희가 샘솟듯 솟아오르는 역동적 평강을 가리킵니다. 평강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축복의 절정으로 이루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평강은 이스라엘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평강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선포한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평강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죄와 불의를 멸하시고 그를 믿는 이들에게 억제할 수 없는 평강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모시고 사는 것이 평강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그 복을 계속 지켜주시기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환경에 따라 변하는 마음이 아니라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이요, 그 복을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부디 서로 축복하여 보호의 복, 은혜의 복, 평강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의 제사장
민 6:22-27 / 김진홍 목사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이런 말을 나눴습니다.
“가정예배는 우리 가정을 코팅하는 것이다.”
종이를 코팅하면 구겨지지 않습니다.
종이를 코팅하면 더렵혀지지 않습니다.
종이를 코팅하면 찢어지지 않습니다.
종이를 코팅하면 물에 젖지 않습니다.
종이를 코팅하면 원형 그대로 오래 간직할 수 있습니다.
가정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은혜가 가정을 덮어서 코팅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장자가 죽는 재앙이 임했을 때 문설주와 문 인방에 어린양의 피가 있는 가정은 그 재앙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문설주와 문 인방에 어린양의 피가 있다는 것은 그 가정에 예배가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드려진 가정을 하나님의 은혜가 덮었습니다.
1. 유대인의 가정예배
유대인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금요일 저녁에는 가정예배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되어 그 다음날 토요일 저녁까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금요일 저녁식사는 하나의 만찬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저녁식사 준비를 위해 시장을 보러 갈 땐 자녀들을 꼭 데리고 갑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지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시장에 데리고 갈 시간이 있으면 공부시켜야지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시장에 갈 때,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시장 보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때 아이들은 장사하는 법을 배우고, 비즈니스를 배우게 됩니다.
우편주문방식으로 홈쇼핑을 제일 먼저 창안한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시어즈, 세계 최초의 프랜차이즈 방식으로 만든 던킨 도넛, 미국 최초의 청바지 리바이스, 캘빈 클라인, 게스, 죠다쉬, 폴로, 모두 다 유대인이 만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려서부터 자녀들을 데리고 시장을 다니며 장사하는 법과 시장의 흐름을 터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식사 전에 꼭 예배를 드립니다.
식사 전에 예배를 드리면 참을성이 길러지겠지요?
보통 아이들은 맛있는 음식을 보면 손이 먼저 갑니다.
그러나 유대인 가정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예배드리고 나서 음식을 먹게 합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를 가르칩니다.
아무리 배고파도 하나님 제일주의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제일주의입니다.
어릴 때부터 내면의 조급함을 다스릴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식사를 할 때 식탁에 아버지의 의자가 지정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출장을 가시게 되면 식사자리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아버지의 자리를 자녀가 차지할 수 없습니다.
가정의 제사장은 아버지입니다.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있고 없고를 떠나, 높고 낮고를 떠나, 아버지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가정예배를 드릴 때 꼭 헌금을 합니다.
‘푸쉬케’라는 동전 항아리가 있어서 거기에다가 꼭 돈을 넣습니다.
어린이들은 동전을 넣고, 어른들은 지폐를 넣습니다.
그 헌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습니다.
유대인들은 전 세계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누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5천명의 것을 혼자 먹어치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노력으로 5천명을 먹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성공한 사람일까요?
5천명을 먹이는 사람이지요!
여러분은 5천명을 먹이는 사람이 되길 축원합니다.
그들은 음식을 축복합니다.
이것을 ‘하 모찌’라고 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에모토 마사루’라고 하는 사람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을 써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물에게 ‘감사하다, 고맙다’라고 축복하면 물의 결정이 육각형으로 뚜렷하게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우리 몸의 70%는 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좋은 말을 하면 우리 몸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불평을 하고, 남을 욕하면 몸이 이상해집니다.
몸이 피로를 느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그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물과 음식에 축복을 합니다.
우리나라 어른들도 벌써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음식 투정하면 체한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맞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을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고, 이웃을 원망하는 것이다. 음식은 하나님이 주시고, 이웃의 수고를 통해서 우리의 밥상에 올라온 것이다. 그러니까 음식에 불평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요, 이웃의 배려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먼저 음식에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음식이라고, 귀한 음식이라고, 정성되게 마련한 음식이라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식사를 한 다음에는 부모와 자녀가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가족 간에 대화가 없습니다.
어른들은 TV를 켜놓고 밥을 먹습니다.
식사할 때 TV를 켜놓는 것은 독약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TV가 가족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주범입니다.
아이들은 인터넷 하면서 밥을 먹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금요일에 예배를 먼저 드리고, 온 집안 식구가 함께 식사를 하고, 그리고 디저트를 먹으면서 대화 시간을 가집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들이 대화를 합니다.
미국에서 그렇게 많이 팔리는 허쉬 초콜릿은 유대인이 만든 것입니다.
하겐다즈, 베스킨 라빈스, 벤&제라 아이스크림도 디저트용으로 유대인이 만든 것입니다.
세계적인 기업들이지요.
밥 먹고 앉아서 자녀들과 대화할 때 먹을 것이 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이 디저트를 개발한 것입니다.
그 제품들이 세계 시장을 석권한 것입니다.
가정예배를 드리고 나서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씩이라도 30분, 1시간씩 대화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들 간의 대화가 막히니까 자녀들이 잘못되고,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가정예배는 자녀교육의 중요한 교육현장입니다.
누가복음 2장 7절에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강보는 아기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간난 아기의 몸을 감싸는 천입니다.
유대 여인들은 아기를 임신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수놓아 강보를 만듭니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놓은 천으로 아기의 몸을 감쌉니다.
의미가 있지 않아요?
유대인들은 세 살부터 열 살까지의 아이들에게 모세오경, 토라를 외우게 합니다.
성경구절을 최소한 100구절을 외우게 합니다.
그러면 인생의 어려움이 닥쳐올 때, 성경구절이 그 사람을 구원해낸다는 것입니다.
시련을 당하고, 어려움이 오고, 환란이 와도 자기가 외우는 성경 100구절이 그 사람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2. 가정의 제사장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가정의 제사장인 부모님이 자녀를 축복해야할 내용입니다.
한 구절씩 살펴보겠습니다.
① 24절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네게 복을 준다.’는 말은 ‘네가 복이다’라는 뜻입니다.
네가 복덩이가 된다는 말입니다.
며느리가 들어와 집안이 잘되면 그 며느리를 복덩이라고 하잖아요?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체가 복입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도 그랬습니다.
요셉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애굽 나라가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복덩이가 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복은 영적인 복과 현실적인 복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28:4-6절을 보십시오.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히6:14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② 24절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말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질병, 재해로부터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경호원이 철통 같이 보호합니다.
그런데 케네디 대통령은 결국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인간이 지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뭘, 어떻게 지키겠어요?
따라서 하나님이 보호하고 지키신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신32:10절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시91:7절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가정예배는 여러분의 가정을 코팅하는 것입니다.
③ 25절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얼굴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 능력, 사랑, 지혜 등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저주의 표현이었습니다.
고난 중에 있던 욥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욥 13:24절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여러분, 다음의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하길 바랍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성도는 가로막은 홍해를 가르는 재미로 산다.’
‘성도는 방해하는 여리고성 무너뜨리는 재미로 산다.’
‘성도는 날아가는 메추라기를 떨어뜨리는 재미로 산다.’
‘성도는 성난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는 재미로 산다.’ 아멘.
하나님께서 항상 여러분을 향하여 얼굴을 비추셔서 이런 재미를 맛보시길 축원합니다.
④ 26절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평강, 샬롬’입니다.
이것은 전쟁이 없고 풍랑이 없는 소극적인 평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아주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평강을 말합니다.
‘풍랑이 일지라도 잠잠케 하시고, 병들지라도 고쳐주시고, 주릴지라도 먹을 것도 주시고, 얽힌 문제가 있을지라도 해결해 주시는, 그래서 우리에게 평강이 임하도록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평안하지 않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음이 평안하지 않는데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음이 평안하지 않는데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시4: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24-26절을 다시 보십시오.
‘네게’라고 하면 자녀의 이름을 거기에 넣어보십니다.
그리고 한번 축복해보십시오.
“여호와는 OOO에게 복을 주시고 OOO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ㅇ에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OOO에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여러분은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매일 자녀들에게 이렇게 축복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와 평강이 늘 넘쳐나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지난번 ‘존 웨슬리 회심 성회’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배웠습니다.
두 주먹을 쥐고, 파르르 떨면서 외쳐야 합니다.
“더 이상 요 모양 요 꼴로 살 수 없다. 축복 받아야겠다.”
이렇게 복을 빌리
민 6:22-27 / 유승훈 목사
<제사장의 축복 선언>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라.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빌 때에는 다음과 같이 빌라고 하여라. 주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켜 주시며, 주께서 너를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너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께서 너를 고이 보시어서, 너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그들이 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축복하면, 내가 친히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주겠다". (민수기 6:22-27)
여러분은 하루에 얼마나 말을 한다고 보십니까?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하루에 만 번 정도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많이 말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횟수라고 여겨지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하는 말들이 어떤 내용의 말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는 말입니까? 아니면 의미 없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말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남의 마음을 요동하게 하고 분쟁을 일으키는 말입니까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내가 한 말 가운데 나 아닌 이웃을 위로하고 축복하는 말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살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 여기에 대한 연구조사 결과는 아직 본 일이 없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 이 나라 사람들은 정치 지도자이건 교육가이건 사업가이건 상관없이, 아첨하는 말이나 인사의 말을 제외하고는 남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축복하는 말을 하는 경우가 정서 상 별로 없지 않나 생각됩니다. 상대방을 욕하고 비방하고 깍아내는 말은 열심히 잘 하는 것 같으나, 남의 말이나 하는 일을 칭찬하고, 높이 평가해주고 축복하는 말은 잘 하지 못하는 것이 이 민족의 성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참으로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해 왔던 말을 되짚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하루에 축복하는 말을 얼마나 하십니까? 하루 온종일 하는 말의 내용을 보면 '...하지 마라', '왜 그러니', '안돼', '너 혼난다' 등의 말뿐이니, 아이들이 부모님을 잔소리꾼으로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웃에 대하여 어떻게 말을 하고 계십니까? 왠지 부정적인 마음들로 꼬이고 꼬여서, 무조건 비판하고 정죄하는 말에 길들여져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심령 상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경우에 따라서는 걱정을 하고 반대를 하고 비판해야 할 때도 있지만,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남을 축복하고, 이웃의 평안을 비는 말을 많이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전도 여행에 내보시면서, 제자들에게 마 10:11-13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복을 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롬 12:1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을 향하여 복을 빌고 평안을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값없이 받아,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할 도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축복해야 하는 것이 도리요 마땅한 의무이므로, 날마다의 생활 자체가 축복하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18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씀하기를, "주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삶 가운데서 이웃과 더불어 화목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사명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웃들을 위하여 화평의 복을 얼마나 빌어주며 살아왔는지 ?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2차대전이 한창일 때, 영국과 독일 병사들이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급기야 육탄전이 벌어졌습니다. 한 영국군 병사가 독일군 병사를 총검으로 찔렀습니다. 칼에 찔린 병사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요한복음서를 꺼내더니 자신을 찌른 병사에게 건네주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이것을 가지고 먹고 마셔서 영원히 살기를 바랍니다"라고 하고는 죽었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 그 잘난 동네 축구를 하다가도 지게 되면 흥분을 하여 아무 상관없는 상대편 동네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하는 생각을 하다가, 깨닫기를 아하 ! '자신을 찔러 죽이는 사람을 향해 복을 빌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구나!'하는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는 조금만 손해를 준다고 생각이 되도, 바락바락 대들고, 같이 저주하며 인과응보의 원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용서하고 축복하려는 자세로 삶을 사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말에 복을 비는 말이 날마다 많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제부터는 이렇게 이웃들에게 복을 빌며 사세요. 본문 민수기 6:22-27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하시는 축복의 선언문으로,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라.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빌 때에는 다음과 같이 빌라고 하여라. 주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켜 주시며, 주께서 너를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너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께서 너를 고이 보시어서, 너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그들이 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축복하면, 내가 친히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주겠다"라고 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축복하면, 내가 친히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주겠다' 라고 약속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아론과 그 아들들, 곧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축복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실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되고 굉장한 약속입니까 ? 세상의 군주나 정치인들이 자기의 이름과 지위를 걸고 한 약속이라고 해도, 대단한 것인데, 전혀 당신의 약속을 파기하신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이니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제사장들이 복을 빈대로 그대로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 이처럼 주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복을 비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제사장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군으로 택함을 받고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복을 빌면서 말하기를, '주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켜 주시며, 주께서 너를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너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께서 너를 고이 보시어서, 너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제사장의 빈대로 응답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 (그렇다고 믿으시면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제사장으로서의 권한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마틴 루터가 만인제사직의 교리를 말했기 飁문이 아니라, 이미 베드로 사도가 벧전 2:5에서 말하기를,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했고, 벧전 2:9에서는 말하기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거룩한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는 존재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존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을 가지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 제사를 여호와께 드리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므로 인류를 위한 영원한 대속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가로막힌 휘장을 열으신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가로막힌 죄악의 담장을 헐어버리시므로써,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과 희생을 통하여 열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만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이 값없이 얻은 구원의 길을 함께 달려가자고 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웃들을 이 구원의 길로 안내하는 것은 곧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그렇다고 믿으시면 아멘) 그래서 성겅은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든지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있는 제사장 자격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마포중앙교회 교인들은 모두 제사장의 자격을 가진 존재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성도 여러분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 제사장의 역할은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것, 미운 사람을 위하여 평안을 비는 것,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비는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2002년, 금년 한해도 바라기는 껄끄러운 이들까지도 포함하여 이웃들을 위하여 복을 빌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해야할 복은 무엇이겠습니까 ?
오늘은 그 점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이웃들을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이웃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복을 주시기 원한다'는 것은 단지 풍성한 물질만 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과 신령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이고 전인적으로 풍성케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실 뿐만 아니라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시기까지'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을 얼마나 받았는가 ?만이 중요한 것만이 아니라, 받은 것을 어떻게 지키고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실제로 지키면서 잘 사용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받은 복을 지키려할 때 강한 도전이 있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실 뿐 아니라 지켜주시기를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달라고만 기도하지 마세요. 주시고, 그것을 다스리고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반드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키다'라는 히브리말은 '솨마르'로, 울타리를 쳐서 원수의 손에서 보호해주시기를 기원하는 의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그 동산을 하나님께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키셨다'는 말이 바로 이 '지키다'는 말에 해당합니다. 거기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더 이상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철저히 지킴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받은 것은 많지만 이 지켜주심이 없으면 차라리 받지 않은 것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키심과 인도하심이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이러한 지켜주심을 통해 인도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이 당신을 지켜 주시는 것이 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지켜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닥쳐도 두려워 떨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헤릿그스'란 성도가, 어느 날 악인들에게 쫓기다가 다급한 나머지 굴에 들어가 숨었습니다. 그때 거미가 나와서 굴 입구에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거미줄이 다 되어 갈 무렵에 악인들이 나타나 굴속을 수색하려고 하다가 거미줄을 보더니 "여긴 없어"하면서 지나가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화를 면한 '헤릿그스'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친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신다면, 깊은 굴도 거미줄과 같을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은 거미줄도 깊은 굴과 같더라"고 했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안전하게 보이는 굴이라도 거미줄처럼 연약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보잘 것 없는 거미줄도 깊은 굴과 같이 안전한 피난처가 된다는 말입니다. 신자들의 삶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시는 복된 삶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람쥐는 작고 연약한 짐승이지만 결코 맹수에게 잡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람쥐는 2가지 기발한 호신책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재빠르게 나무 가지를 타고 날아가듯이 몸을 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나운 짐승이나 몸집이 큰 동물이 습격해오면, 커다란 바위틈 속으로 숨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납고 강한 짐승이라도 나무를 타고 달아나는 다람쥐를 잡을 수는 없고, 바위틈 속에 숨어버린 다람쥐를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고 나약한 다람쥐에게는 나무 가지가 생명 줄과도 같고, 거대한 바위산이 천연의 요새와도 같습니다.
세상 풍파에 시달리는 인생들에게, 생명줄과도 같고 요새와도 같은 것을 찾는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품]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맹수와 같은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줄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든든한 바위와도 같은 하나님의 품속으로 피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모든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은 날, 삼하 22:2-3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고 했습니다.
차를 타는 사람은 반드시 안전띠를 착용해야 하듯이, 믿음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안전한 안전띠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매어주시는 벨트는 이 세상의 벨트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권력의 벨트, 지식의 벨트, 물질의 벨트로 든든하게 매었다 하더라도, 그런 밸트는 하루아침에 끊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매어주시는 밸트는 영생을 보장합니다. 그래서 시편 121편에서 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언제나 눈동자처럼 지켜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복이 여기 모인 여러분에게 있어지고, 그리고 이웃들에게도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총 있기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고 복을 비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웃들에게 얼굴을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도해야합니다. 그렇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나 아닌 이웃들에게 하나님께서 넘치는 은혜를 베푸시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에서 모세에게 말하기를, 제사장들은 기도하기를, '주께서 너를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너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께서 너를 고이 보시어서, 너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얼굴'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의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너를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라는 것은 마치 임금 되시는 아버지가 국사가 다망함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아주 활기차고 좋은 마음가짐으로 왕자들을 만나주면서, 왕자들에게 너희들의 고민하는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으시고,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뜻을 얼굴로 보여주시는 모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인자하심과 사랑과 은혜를 이웃들에게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의 근원이 되는 존재들입니다. 복음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이웃들에게 내가 받은 복이 임하기를 기도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따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얼굴을 돌리면 얼마나 차갑고 냉정한 줄 아십니까? 늘 마음을 주던 사람이 얼굴을 외면할 때 그 고통을 느껴보셨습니까? 부부가 싸우면 서로 외면합니다. 집에 들어와도 본 척도 하지 않을 때, 그때 썰렁함은 한 겨울의 추위와 같습니다. 춥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신다면 어떠할까요? 이것을 아는 다윗은 범죄한 후에 여호와께 간절하게 호소하기를,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간절한 호소는, '주님의 따스한 얼굴을 내게 비춰주시고, 내 안에 새로운 영을 허락해 주세요. 주님께서 성신을 거둬 가시고 영원히 얼굴을 돌리시면 나는 살수가 없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이 자신에게서 돌아 설까봐 무척이나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비추시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은 큰 축복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과 인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밝은 얼굴을 비춰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입술이 열릴 때마다 '당신에게 여호와께서 밝은 얼굴을 보이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는 축복의 말을 하며 한 해를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웃들에게 여호와께서 평화를 주시기를 기도해야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이웃에게 평화가 있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마 5:9에서 말씀하시기를,'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주께서 너를 고이 보시어서, 너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빌라'고 했습니다.
본문 26절의 말씀을 한글 개역은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라고 번역을 했고, 표준 새번역은 '너를 고이 보시어서'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인간을 향하여 든다는 것', 그리고 '고이 보아주신다는 것'은 아주 특별하고도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의 기도, 즉 성도의 기도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통하여 평화의 복이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의 관심만 임하면, 혼란 가운데서도 평화가 이루어지고, 난리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으며, 살 소망이 없는 가운데서도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의 종노릇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자, 모세를 보내셔서 고통 당하는 히브리 백성들을 파라오의 학정과 노역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의 침공을 받아 모든 유다의 도성들을 빼앗기고, 오직 예루살렘만 남았을 때에,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교만하고 방자한 편지를 그대로 들고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가 고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자 하룻저녁에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명이 죽임을 당하고, 유다는 그 전쟁에서 승전하고, 산헤립은 고향으로 돌아가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거라사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에게 주님 예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군대귀신을 그에게서 나오게 하시자 그 미쳤던 사람이 온전해져서 열 성읍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을 평화하게 하고, 주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자가 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관심만 함께 하면 그 인생은 복된 사람이 됩니다. 다른 것 다 있어도 하나님의 관심이 없으면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갈등과 고통과 불행한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수아 리프맨'이라는 소설가가 쓴 '마음의 평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젊은 주인공이 어떤 노인을 찾아가서 자기의 소원을 말합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젊은이가 말하기를,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물이며, 셋째는 미모이며, 넷째는 재능이고, 다섯째는 권력이고, 여섯째는 명예입니다"라고 했더니, 자기 소원을 말하는 이 청년의 말을 들으면서 쳐다보던 노인이 말하기를, "청년, 그것이 자네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은가? 거기에서 평화가 없으면 아무 것도 즐길 수가 없다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복입니다. 평안은 삶의 가장 근본적인 필수요소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물질에서 얻습니까? 아니면 사람에게서 얻습니까? 아닙니다, 평화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 14:27에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고후 13:117에서 말하기를,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평화의 복을 이웃들에게 주시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평화의 복이 여기 모인 여러분들에게 더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웃들을 향해 본문 말씀대로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축복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복을 비는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펠바하라는 분의 "복을 비는 마음"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축복이라는 말로 복을 비는 마음은, 쟁기가 지나간 그 자리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밀 이삭들 틈에서도 꽃들이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에, 마음에 평화가 생겨나며, 여유가 있습니다. 남을 스스로 배려할 수 있고,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 수 있으며, 선한 것이 승리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고, 애통해 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고, 인생 여정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복을 비는 사람이 최종 승리자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골고다 언덕에서 마지막 승자는 누구입니까? '골고다'는 '해골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그 언덕, 그 골짜기는 죄수들의 형장이요, 죄인들의 무덤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로마 병사들을 시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순간,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사렛 사람 예수 소동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저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의 이 십자가상에서의 기도는 골고다 언덕의 사건, 다시 말해서 십자가 사건이 끝이 아님을 아셨기 飁문에 하신 간구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원수를 향해 축복하셨습니다. 이 원수들을 용서하시고, 오히려 축복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예수께서 승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해골이라는 언덕을 생명의 골짜기로 바꾸셨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죽음의 골짜기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시작되는 골짜기가 되었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구원하시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사랑과 축복으로 승리하셨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복을 빌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27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신 이름으로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이요, 한번도 당신의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신 약속입니다. 그냥 인사치레로 복을 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복을 빌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복을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세요,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것을, 그리고 야곱이 자신의 열두 아들에게 축복한 모든 내용을 하나님께서는 다 들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자녀와 이웃들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게 응답해주실 것입니다.(그렇다고 믿으시면 아멘) 그리고 내가 이웃을 위하여 빈 복이 나에게도 돌아온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복을 빌면 그것이 나에게도 돌아옵니다.
'화니 크로스비'라는 미국의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가 있었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나의 갈 길 다 가도록'등 약 2천여 편의 은혜롭고 감동적인 찬송시를 쓴 분입니다. 이 분이 생후 6개월만에 병으로 시력을 잃고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92년 동안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은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그녀는 늘 만나는 사람에게 "당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이라고 인사를 했는데, 그는 노년에 말하기를, "이 인사로 은총을 받은 건 저였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이웃을 위하여 축복할 때, 한 영혼이 살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살뿐 아니라, 나 또한 하나님의 복을 얻게됩니다. 이미 새로운 해가 시작된지 두 주간이 되었습니다. 서로 축복하며 사랑하는 사이가 될 때에 하나님의 축복과 평화와 그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실현될 줄 믿습니다. 금년에도 이 나라와 한국 교계와 마포중앙교회가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화평한 세상을 만드는 일이요,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을 후손과 후배들에게 남겨주지 않는 일이요, 서로 불신하고 시비하고 원망하지 않고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 일에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복을 비는 말 한마디가 여러분의 자녀와 이웃은 물론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사장의 축복기도
민 6:22-27 / 마경훈 목사
이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복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복과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세상적인 복과 하나님이 주신 복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사회성에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복은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이 되는 복입니다. 둘째, 윤리성에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복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내가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바르고 깨끗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살면서 받는 복입니다. 셋째, 과정성에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복은 과정이 없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복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수고와 노력과 땀이 있습니다. 넷째, 지속성의 차이입니다. 세상적인 복은 풀과 같습니다. 급속히 자라지만 잠시 후에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백향목이 자라는 것처럼 더딘 것 같으나 백향목처럼 지속적입니다.
오늘 말씀은 제사장의 축복을 통해서 임하는 하나님의 복을 살펴보겠습니다.
1.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24절)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복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24에 ‘원하며’, 25절에 ‘원하며’, 26절에 ‘원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신28:1에 보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며 살면 분야는 다르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서 세계 모든 민족 위에서 뛰어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서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들의 미움을 받아 상인들에게 팔려서 종으로 애굽에 가게 되었습니다. 종살이를 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종살이를 하면서도 옥살이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고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감옥에 있는 요셉을 꺼내어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7년 풍년에 7년 흉년을 준비하게하셔서 세계를 먹여 살리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구원의 복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모셔드리면 구원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구원 이외의 모든 복도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모든 복을 준비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면 예비 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신11:26-28에 보면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2.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24절)
여기서 "지키다"라는 말은 원래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친다"라는 뜻입니다. 가시로 담장을 친다는 말은 어떤 대적도 막아주신다는 철저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수마귀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마귀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은 성도를 멸망시키려고 갖은 수법을 다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신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음악 소리가 나면 우상 앞에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절을 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단은 그들의 정적들을 통하여 왕에게 고소하게 했으며, 결국 그들은 7배나 되는 풀무불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불속에 나타나셔서 다니엘의 세 친구를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사를 통해서 지켜 주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능력의 천사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있던 도단성을 아람 군대가 포위했을 때 두려워하던 게하시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엘리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도단성을 포위하고 있던 아람 군대를 하나님의 천사들이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유월절에 죽음의 천사들이 애굽 전역의 장자들을 죽일 때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집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피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것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해 줍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안팎으로 역청을 발랐습니다. 홍수가나서 물이 범람하지만 노아의 홍수는 물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역청이 예수님의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나 자신이나 가족들 그리고 교회를 주의 보혈로 덮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역사하는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키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작열하는 태양으로부터 지켜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추위로부터 지켜주셨던 것처럼 지금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에이 엘 길 박사님은 살인자로부터 보호 받은 간증을 합니다. 길 박사님이 사모님과 함께 산장에서 내려올 때 성령께서 사모님에게 영분별과 지식의 말씀을 통하여 앞에 위험이 있음을 말씀하셨고 살인강도가 나타났을 때 도망칠 것을 말씀하셔서 해를 받지 않았던 일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제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교회를 왔다가 화재로부터 보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3.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25절)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왜냐하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개인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다면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나에게 비취신다고 말하는데 살후1:9에 보면 하나님의 얼굴을 떠나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생각해봐도 은혜를 입는 것이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매로 다스릴 것인가 사랑으로 다스릴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많이 합니다. 매 없이 사랑만으로 다스리는 것은 자녀를 망치는 일이 됩니다. 잘못에 대해서 반드시 징계를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눈물이 쏙 나도록 징계를 할 필요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가혹한 징계는 아이를 망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탈옥수 신창원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창원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가 키웠습니다. 신창원이 남의 밭에서 수박 하나 훔쳐 먹었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소년원에다 집어넣었습니다. 소년원에 가서 오히려 아이의 성격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많은 범죄를 배워서 그 후 계속 범죄를 하다가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조금만 더 은혜로 자식을 키웠다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정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정을 명문가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제일 좋은 방법은 가족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아들 이삭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손자 야곱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대를 이어 입은 아브라함의 가문은 명문가가 된 것입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국가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단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은혜를 입는 것은 논에 물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물 없는 논은 모내기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모종을 심어도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듯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진리는 은혜로 생명이 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진리를 들을 때 은혜가 임하여 그 진리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듣고도 강퍅하여 주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들이 강퍅했던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유럽의 격언 가운데 “젖소는 물을 마신 후에 그 물로 아름다운 젖을 만든다. 그러나 뱀은 물을 마신 후 그 물로 독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 중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평강은 샬롬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나 평화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환경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도 고물을 베개하고 주무셨다. 주님에게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평안이 있었습니다. 하바국 선지자는 합3:16절에서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고 환난의 소식이 들리므로 창자와 입술이 떨리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고 창고에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평강은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롬14:17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합니다. 성령 안에서 평강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화를 원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빌4:6,7에 기도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평화를 사람 때문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 마음의 평화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사람 앞에 말하는 것은 당장은 위로가 되지만 참된 평강을 주지는 않습니다. 인디언들에게는 재미있는 풍습이 하나 있습니다. 화, 분노로 소리 지르고 싶을 때에는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에 가서 구멍을 파고 엎드려 소리를 지르고 실컷 욕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구멍을 흙으로 덮고 돌아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나아가서소리지르고 울기도 해야 합니다.
자신의 무능력함 때문에 평강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수록 하나님 안으로 깊이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5병2어의 축복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는 능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5.그들은 축복할지니(27절).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축복할 것을 말씀하신 후에 제사장들이 축복해야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옛 히브리 학자들은 "복을 주시는 것은 제사장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있고 제사장은 그 입을 대신하여 전달하는 것이라 하여 제사장의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경시하지 말찌니라"고 했습니다.
예배의 순서 가운데 축도가 있습니다. 축도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목사가 주의 이름으로 성도들을 위하여 복을 빌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면 목사와 성도들의 관계와 교회생활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목사는 성도들이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하도록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보면 정말 우러나와서 복을 빌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은 복된 성도라고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복을 빌어주고 싶어도 도저히 복을 빌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복보다 매가 유익인 경우도 있습니다. 목사가마음껏 복을 빌 수 있는 성도는 복 있습니다.
인권과 축복의 근거
민 6:22-27 / 김경호 목사
우리 인간은 저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저마다 인격의 차이도 있구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차이도 상당합니다. 이런 차이들을 보노라면 우리는 “어떻게 같은 사람인데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 차이에 따라 그것이 아주 작은 차이라도 각 사람이 사회에서 받는 대접 또한 천차만별입니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와 견주어 사람을 골라 써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차이를 발견하는 기술이 다양하고 세밀해 졌으며 그에 따른 인간의 가치평가 역시도 천차만별입니다. 이런 차이를 중심으로 생각할 때 인권이란 말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우주진화 과정을 하루로 계산한다면 오늘의 호모 사피엔스(인류)가 출현한 것은 23시 59분 59초라고 합니다. 우리들 각자는 상이한 다른 점 보다는 99.9%가 같은 점을 가지고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미세한 나머지 0.1%의 차이점을 극대화 시켜 보고 그 차이에 근거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평가하시는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구약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가 아닌가’ 하는 기준 외에는 자꾸 우리들의 동질성을 강조해 나갑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명령, 법이 제시되는 근거로 “너희가 에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기억하라!” 라거나 “광야로 돌아가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 사이에 어떤 차별이 생기기 전의 사회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인간의 동질성에 호소하며 모두가 공통으로 갖아야 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가 아닌가의 기준마저도 철폐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당시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을 잘 준수한다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이 민중을 정죄하는 것을 보시고 오히려 종교적으로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민중의 편에 서셔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 평가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공적에 의거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거한다는 선언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사장의 축복선언문입니다.
“주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켜 주시며
주께서 너를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너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께서 너를 고이 보시어서
너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민 6, 24-26)
여기서 주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지켜 주시는 근거는 우리 자신의 이러저러한 업적, 공적, 공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결정적으로 우리를 곱게 보아주시는 주님의 너그러움 때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인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그분께서 우리를 곱게 보아주시는 은총에 근거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 사랑과 은총에 근거해서 우리는 우리들의 인권을 주장할 수 있는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배고픈 사람은 그 배고픔 자체로 먹을 수 있는 권리를 갖습니다. 우리는 입을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저마다 쾌적한 주거 환경에서 거주할 주거의 권리가 있고, 가족은 물론 주변의 이웃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룰 권리가 있으며, 저마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자신의 명예를 지켜갈 권리가 있으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자신을 방어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자유로운 의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리(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들 사이에 여러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차별적인 대우를 받아야 할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우리들이 누려야 ‘권리의 총량’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총량’이기도 합니다.
요즈음 아프간 전쟁등을 보면 그야말로 강대국이 무법천지의 오만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달 일본교회의 초청을 받고 한국교회의 여장로회 대표로 일본을 방문해서 그동안 일제가 행해온 한국인에 대한 만행의 역사를 더듬고 오신 홍종희 장로님의 생생한 증언을 듣기로 하겠습니다.
함께 하는 사랑
민 6:22-27 / 오창우 목사
여러분 오늘 교회에 잘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사랑과 큰 은혜로 우리와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고백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지난번 러시아선교보고대로 러시아에서는 군대에서 예수를 믿으면 제대가 빨라 진다고합니다. 그 이유는 전쟁하고 싸우는 것은 마귀사탄의 짓이니 멈춰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군 선교라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태원선교사님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백부장도 군인이었는데 예수 잘 믿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군대에서도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러시아에 가셔서 군 선교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러시아의 가장 큰 교단이 정교회입니다. 강태원선교사님이 그 교단장부터 군 선교 관계자들을 지난 2월에 초청을 했습니다. 한국에 와서는 한국교회의 군 선교 현황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이 우리 군 선교 현황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러시아에 가서도 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이번 8월에 개신교의 3개 교단의 총회장들의 부부를 모셔서 한국교회의 군 선교 현황을 보여드리니 이번에도 많은 것을 깨닫고 많은 정보를 가져갔습니다. 이렇게 강태원선교사님이 러시아의 군 선교에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이런 성과가 있었던 것은 성도님들의 끊임없는 기도 때문입니다. 앞으로 더 큰 변화를 위해서 성도 여러분이 러시아 군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쉬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는 말로 하는 사랑으로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몸으로 하는 사랑으로 ‘함께하는 사랑’을 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나는 한 구절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남녀도 사랑을 하다보면 결혼을 하듯이 사랑의 결정체는 함께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결코 축구 선진국이 아닌데도 4강에 들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함께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수와 선수끼리 손발이 맞아 혼연일체가 되었고, 감독과 선수, 선수와 응원하는 국민들이 하나가 되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힘을 보여 준 결과입니다. 이는 가정에서도 사랑하는 가족일수록 자주 모이고 그렇지 않는 가족일수록 모이는데 힘쓰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때의 비극은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라고 성경에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함께 한다는 것은 사랑을 하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 사랑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하는 사랑으로 이 민족이나 교회나 가정 앞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하시는 축복의 선언문입니다. 이 축복하는 내용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축복의 말씀을 통해서 "함께 하는 사랑을 어떻게 하느냐?" 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을까? 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을 통해 3가지 축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함께하는 사랑은 첫째 지켜주는 사랑입니다.
24절 말씀을 같이 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했는데, '지키다'라는 말은 "가시로 울타리를 친다.“ 는 뜻입니다. 담이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담이라는 것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것이 바로 함께하는 사랑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지켜주는 사랑을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 한분이 밤에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답니다. 감사하게도 꿈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바닷가 모래사장을 거닐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뒤를 돌아보라고 해서 뒤를 보았더니 모래사장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자 보거라, 저기 저 발자국이 바로 너와 나의 발자국이다!”
‘그렇구나! 예수님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시더니 정말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생각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혼자 걸어간 발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어느 때인가를 꼽아 보았더니 자기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데요.
“예수님 저기를 보세요. 한사람의 발자국 밖에는 찍혀 있지 않습니다. 그 때는 제가 가장 힘들 때 였는데, 주님은 어디에 가시고 나 혼자만 고난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자세히 보거라 그 발자국이 누구의 것인지... 그 발자국은 네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것이다! 나는 한번도 너를 떠나 본적이 없었다. 네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내가 너를 업고 갔기 때문에 하나의 발자국만이 있는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자식들을 사랑하시니까 업어주시잖아요? 가끔 사랑하는 연인들끼리도 업어달라고 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우면 "내가 엎어줄게!" 라고들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절대로 혼자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고 우리가 힘이 들거나 어려울 때는 우리를 업어 주시고 그 고난의 길을 대신 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그저 ‘같이 산다!’ 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어서 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자의 굴에서, 풀무불 속에서도 지켜주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엘리사가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를 당했을 때도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셔서 지켜주셨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갔지만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모든 일이 형통했고 애굽의 총리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유월절에 죽음의 천사들이 애굽 전역의 장자들을 죽일 때,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집은 그냥 넘어갔던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우리 성도들을 보호하는 것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을 사탄의 공격에서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심으로 구원을 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작열하는 태양으로부터 지켜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추위로부터 지켜주셨던 것처럼 지금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켜 주시고 계십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이처럼 지킨다는 것은 그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이 되어 주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로 간다는 것입니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할렐루야!
성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는 20세가 되면 군대도 가고, 선거권을 가지고 대통령, 국회의원을 뽑을 수 있는 권한이 생깁니다. 나라를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삶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해 지고 성인이 되는 것은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교회가 하는 일을 책임져 줄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복음사업을 위해서 일하는 주의 종들을 책임져 줄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켜준다는 것은 '잘하나 못하나 한번 보자!'하면서 감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도청사건 때문에 온 국민들이 예민해 있습니다. 혹시 내 통화도 누군가가 감시하듯이 도청하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감시자가 아닙니다. 지켜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안 성인식
그런데 아메리카 인디안 성인식도 이와 같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안을 아시지요?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자기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그 용감하게 싸웠던 민족 말입니다. 어떻게 이분들이 용감한지 아시나요? 성인식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성인식은 어두운 밤에 깊은 산속에 혼자 들어가 밤을 새우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사나운 맹수가 나올 것 같고... 여하튼 아메리카 인디안은 성인으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밤을 지새웁니다. 그런데 이들의 성인의식을 보면 단순하게는 밤을 지새우는 강심장이 되라고 하는 것인데요. 자세히 드려다 보면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자녀들이 성인식을 위해 깜깜한 밤을 지새우고 밤이 지나 새벽이 오면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보이는가? 하면 아버지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들이 성인식을 위해 깊은 산속에 들어가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뒤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혹시 사나운 맹수가 아들을 해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아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지켰다는 사실을 아는 아들은 결코 외롭지 않은 것입니다.
진정한 성인의 의미는 나이를 먹고 밤을 지새우는 담대한 마음, 그리고 튼튼한 몸이나 지식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자녀라도 관심을 갖고 지켜 줄줄 아는 사람이 비로소 성인임을 아버지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켜주는 범위가 점점 커져 가족에서 지역, 더 나아가 나라를 위해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성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해병대가 용감한 이유 중에 하나도 단순히 고된 훈련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 동료애가 크다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서로가 책임져 주는 동료애에 있다는 겁니다. 전쟁에 나가 싸우다 전우가 죽으면 그 시체를 동료가 책임을 지고 가져온다고 합니다. 나 혼자 살기도 힘들지만 목숨을 바쳐 동료를 지켜 주는 동료애가 용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모습을 초대교회의 생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령의 충만을 받은 성도들에게 나타난 첫 번째 나타난 현상은 바로 지켜주는 것으로 많은 핍박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8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고 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게 되었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다음에는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갖고 가진 것을 나눔으로 지켜 준 것입니다.
말씀을 계속 보게 되면 43절로 47절에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못 박히실 때 어머니를 제자인 요한에게 부탁을 합니다. “네 어머니다”
우리 교회가 대를 이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네 어머니다! 만이 아니라 네 아들이다! 네 딸이다!” 하면서 책임을 져 주기 위해 대를 이어 가는 교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족에 대해서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 줄줄 아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젊은이들은 교회에 계신 어르신들이 다 내 어머니, 아버지라고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청년들이, 아이들이 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을 하시면서 귀하게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켜 주는 것, 서로를 책임져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번은 딸아이가 병원에 입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힘들지 조금만 참아라!” 하니까 딸은 “아니에요 힘들지 않아요! 견딜 만해요” "수술해서 아프고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힘들지 않니?" 하니까 딸이 환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셨잖아요."
옆에 있던 엄마가 말하기를
"얘 교회도 있어. 널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하는데"
아이의 얼굴에서 눈물이 나더라구요.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같이 있어 주는 것! 만도 힘이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 줌으로서 지켜주는,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우리교회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의 삶 속에 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하는 사랑은 둘째 은혜를 베풀어주는 사랑입니다.
25절 말씀을 같이 보십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이 세상에 은혜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그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 부족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고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얼굴을 비춘다는 말은 밝은 얼굴로 대하신다는 말씀인데, 그 밝은 얼굴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살후1:8-9절을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떠나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다윗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입니다.
시편 51편9절로 13절을 보게 되면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 오리이다"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우리아를 죽게 하는 살인죄를 범한 후에 그 사실이 발각이 되자, 여호와께 간절하게 호소할 때도 하나님의 얼굴을 돌리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얼굴을 돌리지 말라는 것은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그 은혜를 받아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죄와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살아 날 수 있습니다.
은혜가 필요한 사람
몇 년 전 탈옥수 신창원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창원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가 키웠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신창원이 남의 밭에서 수박 하나 훔쳐 먹었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교육을 잘 시키려고 소년원에다 집어넣었습니다. 소년원에 가서 오히려 아이의 성격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많은 범죄를 배워서 그 후 계속 범죄를 하다가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조금만 더 은혜로 자식을 키웠다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은혜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 닮는 삶
일본의 가가와 도요이꼬 목사님은 참으로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는 빈민굴 전도를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살인자, 도박꾼, 창녀,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전도하고 구제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일하는 현장을 보겠다며 가가와 도요이꼬 목사님의 친구 되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친구가 와서 보니 그 현실이 너무도 한심한 것이었습니다. 겨우 몇 명 몸을 파는 창녀와 도박꾼을 앉혀 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노라니, 어떤 청년이 와서 예배드리고 있는 창녀를 불러냅니다. 그런가 하면 술 취한 사람이 들어와서는 돌을 던져 얼굴에 상처를 냅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예배가 끝난 후 어떤 사람이, 예배에 참석해 주었으니 그 대가로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도박할 돈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가가와 도요이꼬 선생은 그러면 그렇거니 하고 또 돈을 주어 보냅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던 친구는 “자네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군, 이건 위선이야! 이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며 사회적으로 옳은 것인가? 도대체 어쩌려고 이 소망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건가? 이건 오히려 악을 조장하고 있는 거잖아!” 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가가와 도요이꼬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다만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조금 흉내 내서 하고 있을 뿐이지. 그래도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믿어 주는 길밖에 도리가 없지 않나?”라고 했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얼굴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는 끝까지 믿어 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국가도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단체도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은혜를 입는 것은 논에 물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물 없는 논은 모내기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모종을 심어도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듯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책망이나 비판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퍅해 지는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해서 입니다. 유럽의 격언 가운데 “젖소는 물을 마신 후에 그 물로 아름다운 젖을 만든다. 그러나 뱀은 물을 마신 후 그 물로 독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를 주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하는 사랑은 셋째로 평화를 주는 사랑입니다.
26절을 같이 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어떤 남성이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하와이를 여행가고 싶은데 다리를 놓아 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이 “야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구나, 좀 쉬운 것을 요구해 보라”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도무지 내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내 아내의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은 기분이 좋았다가 어느 날은 똑같은 말을 했는데도 신경질을 부립니다. 어떻게 해줘야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요? 지혜를 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이 사람아, 하와이 가는 길을 4차선으로 해줄까 6차선으로 해줄까.”
미국본토에서 태평양을 넘어 다리를 놓는 것이 여자의 마음을 아는 것보다 쉽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여성의 심리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까?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냥 그대로 보아 주는 것이 평강하는 길입니다.
본문 26절의 말씀을 한글 개역은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라고 번역을 했고, 표준 새번역은 '너를 고이 보시어서'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고이 보아 준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아 준다’는 것입니다.
어제 버스 정류장에서 한 아이가 제 앞을 왔다 갔다 합니다. 한 3살 쯤 되었을까요? 저는 그 아이에게 싱끗 웃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는 아이를 안고는 "야! 예쁘지, 아이고 예뻐 죽겠네.." 얼마나 예뻐하는지... 바닥에 있는 짐을 발로 차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냥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 아이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대통령입니까? 부자입니까? 대학교 교수입니까? 뭐가 그리 예쁩니까? 무엇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예쁩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서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바라만 봐도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고이 보아 주는 것입니다. 예쁘다고 하는 것, 사랑하는 것, 장난을 치고 말썽을 피워도 예쁜 것이 고이 보아 주는 것입니다. 고이 보아 주는 것은 상대방 그대로를 보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야 말로 함께하는 사랑이 되는 법입니다.
어르신들을 보면 '이렇게 하면 더 좋은데.. 저렇게 하면 더 맛있는데 이런 옷을 입으면 더 멋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노인은 노인의 마음이 있고 아이들은 아이들의 마음이 있고, 젊은이들은 젊은이들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 취향이나 입맛이 많이 다른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도 말을 안드니까 이런 어르신을 보며 "우리 아버지는 내 말을 안들어" 하면서 울기까지 하시는 분이 계시더라구요. 그러더니 하루는 "노인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해주는 것이 최고야"라고 하더라구요.
가끔 예배시간에 모자 쓴 젊은이들을 보게 됩니다. 청년부 담당하시는 목사님께서 "요즘에는 모자가 머리에 쓴 것이 아니라 모자도 옷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서로가 다 마음에 들고 보기 좋겠습니까? 맘에 안들더라도 그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는 것이 고이 보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기를 원하면, 아니 평강 주시기를 원하면 그대로 보아 주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갑자기 앞으로 세치기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왜 저러나?' 하면 그 때부터 내 마음에 평강이 깨집니다. 분노가 생기게 됩니다. ‘가다가 사고나 나라. 가서 부딪쳐 버릴까? 신고를 해 버릴까?’ 분명한 것은 그대로 보지 않고 ‘왜 저러나?’하기 시작하면 평강은 없어집니다. 좋은 차를 타고 있어도 말입니다. 반대로 “그럴 수도 있지. 바쁜가 보다! 나도 그런 적이 있는데..., 비켜 주는 사람을 보면 참 고맙더라!” 하면 마음에 평강이 옵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보아 주시는 분입니다.
아담의 경우를 보세요. 하와를 만들어 주시니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면서 기뻐합니다. 제가 누구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얼마나 기뻐하는지 좋아합니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런데 선물을 준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까? 그러면 다음에 또 선물을 주고 싶어 할까요? 아닙니다. 감사할 줄도 모른다고 그런 사람에게는 다시는 선물을 안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아담이 하와를 주었다고 아담이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담을 사랑하시 잖아요. 그래서 함께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었을 때도 당장 내려가서 책망이나 죄를 물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대로 보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려면 그대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그대로 보시고 사랑을 하십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기도 중에나 묵상 중에 하나님이 고이 보아 주시는 것을 말입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일을 묵상 중에, 하나님은 저를 쳐다보며 웃고 계시는 모습 말입니다. 저 역시 하나님을 쳐다보며 웃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서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평강이 있고 기도나 묵상의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죄가 있으면 있는 대로 보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평강이 임하는 법입니다.
지난 주간에 황신권씨의 ‘야생초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 중에 선인장을 키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이 교도소에서 선인장을 키웁니다. 그런데 2년이 되도록 자라는 기미가 안보이는 것입니다. 2년이 지나고 7월이 들어 날이 따뜻해지니까 자라지 않던 선인장이 하루가 다르게 크는 겁니다. 몰라 볼 정도로 큰 다는 것입니다. 이 분의 말씀은 때가 되면 자란다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되면 자랄 것을 믿고 기다려 주고 보아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만이 아닙니다. 부모님도 , 젊은이들도 다 그 때가 있습니다. 그대로 인정하고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내가 변하게 해 달라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에 선두 주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먼저 사랑해야 상대방도 변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변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 우리의 자녀들의 눈에 비친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가 변하면 자연히 아이들도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을 위해 기도 한 것처럼 때가 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할 뿐 입니다. 그러면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또 미국가정사역연구소에서 '자녀들이 부모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10가지이유'를 조사했습니다. 요점은 부모가 모범을 보여야지 자녀들도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① 주일이나 교회행사를 무시하고 여행을 떠날 때
② 예배시간에 시계를 몇 번씩 쳐다볼 때
③ 자녀 앞에서 목회자의 허물을 이야기할 때
④ 십일조와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
⑤ 교회에 대해 애착심이 없을 때
⑥ 예배시간에 지각할 때
⑦ 문제가 생길 때만 불규칙하게 기도할 때
⑧ 여러 핑계로 교회봉사를 하지 않을 때
⑨ 자녀들을 교회에 오래 있지 못하게 할 때
⑩ 실천보다는 말만 앞세울 때입니다
내가 변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내가 우리의 교회와 가정에 우리의 일터에서 지켜주는 책임져 주는 담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를 줘야 하고 평화를 주기 위해서 있는 그대로 보아 주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시는 놀라운 축복이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이웃들에게 지켜 주심으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의 밝은 얼굴을 비춰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있는 그대로를 고이 보아 주심으로 평강을 누리는 복을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 함께하는 사랑을 통하여 복을 나누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
민 6:22-27 / 강용규 목사
오늘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 대해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아놀드 토인비가 사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랑은 두 가지다. 하나는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랑이다. 다른 하나는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 마음이 사랑이다. 주고 싶어 하는 사랑은 자신을 헌신하며 남을 섬기는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랑은 자신을 위하는 이기적인 사랑이다. 첫째의 사랑이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면, 둘째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의 본성은 이 두 가지 사랑 중에 주고 싶어 하는 사랑이며, 자신을 헌신하고 섬기는 사랑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아낌없이 흘려 죽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버럭’이라는 단어가 무려 330번이 나옵니다. ‘버럭’이라는 말은 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 22절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 1장 28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이브에게 복을 주시되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라.” 9장 1절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 12장 2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되 그 생육이 중다하고 그 이름이 창대케 되며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다.” 앞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 두 번째는 복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게 하사 평강으로 인도하신다.” 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실 때 바로의 군대도, 홍해 바다도 그 축복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 40년 생활도, 요단강도, 여리고 성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은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인 사랑과 축복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역대상 4장 10절에서 야베스는 “하나님,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를 보호하사 우리를 지켜주셔서 우리에게 근심이 없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야곱도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께 “나를 축복하시지 않으시면 나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야곱을 축복하셔서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데, 구태여 소리를 지르며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르짖어 기도하라. 그러면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억울한 과부가 매일같이 강청하니 악한 재판장일지라도 그것을 들어주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조용히 기도하든, 부르짖어 기도하든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느냐’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과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계시록 1장 3절에 “읽는 자도 복이 있고, 듣는 자도 복이 있고, 지켜 행하는 자도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시편의 시작인 시편 1편은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야말로 축복받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시한 빌 게이츠는 자신의 재산 중에 95프로는 사회에 환원하고, 5프로만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남긴다고 합니다. 이렇게 빌 게이츠가 자신의 재산을 기쁘게 남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던 그 배경에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빌 게이츠의 어머니는 그에게 어렸을 때부터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외우게 했습니다. 그는 산상수훈의 말씀 중에 “주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되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이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 즉 사랑과 축복을 말씀을 묵상함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은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순종이었습니다. 이삭은 자신이 번제물로 드려지는 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따라 모리아 산으로 오릅니다. 순종으로 이삭은 하나님께로부터 그 해 농사에서 백배의 축복을 받았고,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사울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울도 처음부터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축복을 받던 그가 저주를 받았던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축복의 통로는 신명기 14장에서 알 수 있듯이 나그네, 고아, 과부들을 돌볼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 복이 깨질 것 같고, 망할 것 같고, 어려울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형통함의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려운 때이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인 우리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본성이 기도와, 말씀과, 순종과, 어려운 사람 돕는 일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다
민 6:22-27 / 황광민 목사
어떤 분이 독일에서 추석을 맞았습니다. 어느 가정을 방문하여 함께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국내뉴스가 끝나고 국제소식을 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제뉴스의 서두에 아나운서가 한국에서 들어온 소식을 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이라는 말이 귀에 번쩍 뜨였습니다. 그때 텔레비전에서는 추석에 고향을 찾아가는 귀성인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기차표를 사려고 길게 줄을 서서 밤을 새우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주차장이 되어버린 고속도로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그는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다고 합니다. '이 방송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나운서의 평은 생각 밖이었습니다. 조상의 묘에 성묘하고 부모,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행렬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부모 형제를 잠깐 만나기 위해 저렇게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유럽에도 없는 풍습입니다. 휴가를 가는 행렬은 있지만 고향을 찾는 행렬은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 좋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추석을 보내면서 민수기 6장22절-27절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아멘. 오늘은 이 약속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복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복 받을 만한 곳이면 찾아갑니다. 산에도 찾아갑니다. 절에도 찾아갑니다. 달보고 빌기도 합니다. 큰 나무 밑에 엎드려 절하며 복을 빕니다. 그래서 우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미신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복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헛된 것을 찾아 복을 빌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행복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만 인간은 참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참 행복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모심으로 시작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의 거룩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행복은 시작됩니다.
추석은 조상들에게 감사하는 추수감사제입니다. 햇곡식을 거두어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립니다. 일종이 추수감사제사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조상에게 감사하는 추석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추수감사절로 만들려고 할 때 문화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추석과는 별도로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조상들이 복을 주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조상들을 단순히 효도차원에서 공경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조상 공경이 조상숭배의 차원이 되면 곤란합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제사를 반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복을 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부지런히 증거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송아지를 섬기는 바알의 종교가 복을 주는 줄 알고 믿을 때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바알의 종교는 농경문화의 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농사짓는 일에 집중하였을 때 농경문화의 신인 바알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바알이 비를 내려주어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알의 종교를 치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엘리야의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세벨 왕후의 영향으로 바알의 종교가 극성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3년 간 비를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기우제를 지내도 소용없었습니다. 바알 종교의 제사장들이 열심히 제사를 드리며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닫으신 하늘을 열 수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엘리야는 바알의 제사장 450명과 갈멜산에서 세기의 대결을 갖습니다. 어떤 신이 참 신인지를 증명하는 대결이었습니다. 그 날 하나님은 엘리야가 쌓은 제단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바알을 위한 제단에는 아무 응답이 없었으나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만이 살아 계신 참 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이제 하늘 문을 열고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습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늘에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올랐습니다. 엘리야는 그 구름을 보고 아합왕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큰비가 올 것이니 빨리 왕궁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는 손바닥만한 구름밖에 없는데 그렇게 말했습니다.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고 있는데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비를 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더니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비가 내렸습니다. 인생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둘째, 축복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축복은 하나님께 복을 내려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내려 주시기를 빌 때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십니다. 축복의 말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2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아멘. 우리가 축복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처럼 축복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축복의 말에 힘이 있는 것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말 자체에 힘이 있지 않습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고 인사할 때 하나님께서 복 많이 주시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축복할 수는 있으나 복을 줄 수 없습니다. 복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아무튼 축복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피차에 축복의 말을 많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축복의 날이 얼마나 능력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의 자녀들에 대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유다에게 한 축복의 말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유다에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세기49:8-10).
그런데 보십시오. 이 말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유다는 12지파 중에 으뜸이 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왕이 나왔습니다. 모든 지파가 유다지파에게 굴복하였습니다. 모든 지파가 유다지파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유다지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야곱의 축복의 말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처럼 축복의 말은 힘이 있습니다. 축복의 말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복을 받습니다.
25-2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축복기도의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말은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와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시고 환하게 웃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사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을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야 복을 받습니다. 저주받아야 할 사람에게 축복을 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축복 받을 사람에게 저주를 해도 소용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축복 받을 사람에게 저주하면 그 저주는 되돌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저주받을 사람에게라도 축복하면 그 축복이 되돌아옵니다.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축복의 말을 받으면 큰복을 받게 됩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내가 네게 말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신4:40). 또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요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시112:1-2).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축복의 말이 열매를 맺습니다. 아무리 축복기도를 받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복을 받습니다. 같이 축도를 받아도 복 받을 사람이 있고 복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어 많은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넷째, 우리 모두 축복의 사람이 됩시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축복의 말을 전해야 하는 제사장들입니다. 구약과는 달리 우리 모두가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모두 제사장으로서 축복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본문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당시는 그들이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모두 제사장들입니다. 모든 성도가 축복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축복의 말을 해봅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제 끝으로 축복의 사람이 되는데 필요한 몇 가지 기본요소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첫째는 의미 있는 접촉입니다. 축복의 말을 할 때 말로만 하지말고 의미 있는 접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옆사람과 손을 잡고 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어린 자녀들에게는 안아 주면서 하면 더욱 좋습니다.
둘째는 상대에 대한 가치부여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축복하다'라는 말의 언어적 의미는 '경의를 표하다'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존귀하게 여길 때 가능합니다. 상대방을 무시하면서 축복이 되겠습니까? 상대방이 복을 받아 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해 줄 때 축복이 진정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훌륭한 미래에 대한 암시입니다. 축복할 때 우리는 상대방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정해주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대부분 가정에서는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암시를 주십시오. 그 말이 축복에 도움이 됩니다.
축복하는 부모가 되라!
민 6:22-27 / 오정호 목사
미국 교사들의 통계를 보면 학생 훈육지도의 대상이 40년대와 90년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줍니다. (*괄호안은 90년대의 훈육지도 대상입니다) 1위 순서를 지켜 말할 것(마약하지 말 것), 2위 껌을 씹지 말 것(술을 절제할 것), 3위 시끄럽게 떠들지 말 것(임신만은 피할 것), 4위 복도의 질서를 지킬 것(자살하지 말 것), 5위 새치기하지 말 것(강간을 조심할 것), 6위 복장위반하지 말 것(강도질하지 말 것), 7위 휴지를 버리지 말 것(폭행하지 말 것) 40년대의 훈육대상이 90년대에 비하면 얼마나 소박합니까? 그만큼 우리 자녀들이 처한 현실이 심각해 졌고, 자녀들의 마음의 쓴뿌리가 커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녀들의 마음의 상처와 쓴뿌리는 가정에서 비롯된다는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이 상처는 어떻게 치료받습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축복하는 부모, 이웃, 스승, 목회자를 통하여 치유받습니다.
본문은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기도입니다(24-26절). 본문 각 절의 주어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가 복을 받기 원하는 것 보다 먼저 우리가 복을 받는 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22절). 복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십니다.
제사장의 직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축복의 대리자와 전달자로 쓰임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가정의 영적 제사장이 되어 자녀를 축복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부모입니다. 자녀를 육적으로 낳았고 육적인 필요를 채워준다고 해서 온전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권이 자신을 통하여 자녀에게 전달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온전한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권을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1. 축복의 언어를 통해서입니다(24-26절).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의 저자로 알려진 스웨덴 출신의 30대 여성인 레나마리아가 얼마전 내한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태어났을 때 양쪽 팔이 없고 왼쪽다리는 오른쪽 다리의 절반 길이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부모의 능력으로 양육할 수 없다는 판단아래 아동보호소에 위탁할 것을 부모에게 권유했지만 부모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레나마리아에게 "애야 너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축복의 선물이야, 우리는 너를 이 세상의 누구보다 사랑한단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과 축복의 언어는 어린 레나마리아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건강한 영혼과 자아상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부모는 레나 마리아가 노래를 잘하는 은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해주어 아름다운 노래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감동과 도전을 주고 상처를 치유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자녀를 육신으로 건강하게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영혼과 자아상을 갖도록 양육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자녀문제의 90%이상이 대화의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대화의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순기능의 가정에는 서로를 존중하고 마음을 열어 솔직하게 나누는 대화가 있습니다. 서로 격려하는 사랑과 축복의 언어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얼마나 축복과 사랑과 인정과 확신을 주는 따뜻한 언어를 자녀들에게 사용하셨습니까? 우리는 용어를 사용할 때 '너 때문에'라는 수직적인 언어보다는 '나 때문에'라는 수평적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우리 부모들이 입을 열 때마다 자녀를 살리고 자녀에게 자존감과 축복을 주는 언어의 사용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축복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자녀의 삶과 가치관은 부모의 삶을 통해 영향을 받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가장 먼저 만나는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23장에 등장하는 여호야김 왕은 열조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여호야긴도 그 부친의 모든 행동을 본받아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합니다. 우리의 자녀는 부모가 보여주는 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모델이기 때문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부모를 통하여 영향을 받고 인생의 본보기를 삼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어떻게 보여지고 있습니까?
자녀들이 부모의 인생을 회상할 때 "우리 부모는 진정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회인으로서, 믿음의 사람으로서 축복된 삶을 사셨다"는 아름다운 기억이 있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자녀들을 향한 메시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영적전투와 중보기도자로 널리 알려진 신디 제이콥스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징계를 유발하는 부모의 죄악"에 대해 4가지를 언급했습니다. ① 사술에 종사하거나 비술을 행하는 것 ② 비밀 사교집단에 가입하는 것 ③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것 ④ 중독증이나 죄 된 습관에 빠지는 것입니다. 또 미국가정사역연구소에서 '자녀들이 부모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10가지이유'를 조사했는데 ① 주일이나 교회행사를 무시하고 여행을 떠날 때 ② 예배시간에 시계를 몇 번씩 쳐다볼 때 ③ 자녀 앞에서 목회자의 허물을 이야기할 때 ④ 십일조와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 ⑤ 교회에 대해 애착심이 없을 때 ⑥ 예배시간에 지각할 때 ⑦ 문제가 생길때만 불규칙하게 기도할 때 ⑧ 여러 핑계로 교회봉사를 하지 않을 때 ⑨ 자녀들을 교회에 오래 있지 못하게 할 때 ⑩ 실천보다는 말만 앞세울 때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눈에 비친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부모의 삶 자체를 축복으로 물려주는 좋은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신앙과 경건과 구제는 반드시 그 자손에게 복이 될 줄 믿습니다(시편37:25).
3.축복의 기도를 통해서입니다(27절).
기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삶과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나의 태도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전투는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기도하지 않고서 어떻게 자녀양육에 승리할 수 있습니까? 자녀와 다음세대를 위하여 기도의 손을 높이 드는 부모가 있고 교사가 있는 가정과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하루 7시간을 TV 앞에 앉아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대화시간은 5분도 채 되지 않습니다. 가정의 제사장인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과 대화하십시오.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들을 인정해주시고 격려해주십시오. 가정의 축복의 대리자로 쓰임받으십시오.
미국 부시대통령의 어머니 바바라 부시 여사가 한 대학교의 졸업식에서 축사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의사와 변호사와 사업가, 교수, 직장인으로서로 책임을 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하는 배우자와 자녀와 친구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투자가 될 것입니다. 시험에 한번 재판에 한번 실패, 거래처 한곳 더 열지 못한다해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배우자와 친구와 부모와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했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사회의 성공여부는 백악관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자신과 자녀의 행복을 위하여 생명을 택하십시오(신명기30:19). 자녀를 축복하는 언어와 모범을 보이는 삶과 자녀를 위한 기도를 회복하여 축복의 전달자로 쓰임받는 부모가 되십시오.
대제사장의 3중 축복
민 6:22-28 / 피영민 목사
서론
오늘 말씀은 구약시대의 예배 시에 사용한 축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예배를 드리고 나면 축도를 하게 됩니다. 목회자들이 맨 마지막에 축도를 하게 되는 데 그 근거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신약시대의 축도입니다. 신약의 축도에는 성부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약시대의 축도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가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민수기 6장 22-27절의 말씀에도 우리는 여러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철저하게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축복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첫째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도 하나님의 성품이 없이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 하나님의 일을 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두 가지 목적으로 구원을 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고하라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삼중의 축복을 해라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직접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축복의 도구로 쓰시고 그들에게 축복의 언어를 주시고 그 두 가지를 도구로 해서 자기 백성들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성도들을 향한 축복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마음속에도 축복이 가득 차고, 입술의 언어도 축복의 언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6장 45절에서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또 마태복음 11장 35-37절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내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첫째로 마음에 선을 쌓으시고 둘째로 입술로 축복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디즈니랜드를 창설한 사람은 월트 디즈니입니다. 이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만화를 그려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광고 대행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소질이 없다고 하는 이유로 해고당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달 동안 실업자가 되어 집세도 내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목사님이 울고 있는 월트 디즈니에게 다가와서 축복의 말씀을 했습니다. “형제여 다른 사람은 자네를 버릴지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형제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십시오.” 그 말씀에 용기를 얻었지만 월트 디즈니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교회 창고에서 잠을 자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창고에서 생쥐들이 돌아다닙니다. 그때 월트 디즈니는 생쥐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미키 마우스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동물 캐릭터로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캐릭터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55,000명의 종업원을 가진 어마어마한 디즈니랜드를 만들게 되었고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축복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키고 사람을 새롭게 만들고 사람을 승리자로 만들어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우리를 축복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우리를 축복하시는 생애입니다. 예수님의 전 말씀도 산상수훈이 팔복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사역도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함입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해방하시고, 슬픔이 있는 자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축복하시기 위한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함이요, 부활 승천하신 것도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을 닮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축복으로 가득하고 입술의 언어에도 축복으로 가득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대제사장의 축복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27절 말씀에 “그들은 이 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축복의 언어는 내용 없는 공허한 언어가 아닙니다. 반드시 현실적인 실체로 나타납니다. 아론의 축복이 반드시 현실적인 실체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보증하는 이유는, 첫째로 축복의 도구가 하나님이 직접 택하신 도구라는 것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대제사장으로 혹은 제사장으로 자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의 축복의 언어도 그들 스스로가 고안해낸 언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입에 그 언어를 집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이렇게 단언적으로 선언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축복은 현실적으로 반드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과 오늘 우리를 사는 우리들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대제사장 아론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론을 통해서 축복해 주셨듯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축복해 주십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하나님은 모든 신령한 복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런 축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혹시나 축복인줄 알았던 것도 도리어 복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전통에 따르게 되면 대제사장은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렸습니다. 아침 상번제를 드리고 나서 백성에게 축복의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녁 상번제를 마치고 나서는 백성을 축복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축복하시는 분은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축복하시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육간에 축복 받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사람 의지하지 마십시오. 물질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을 의지하시고 예수님을 붙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999년도에 500만 달러를 수출해서 수출훈장을 받은 올해 44세의 이레전자산업 정문식 사장이 있습니다. 이분은 휴대폰 충전기를 만들었고 초소형 무선 전화기를 생산해서 수출을 많이 했습니다. 이분이 처음에 신림동에서 시작해서 처음에는 가내 수공업을 했는데 전선을 가공하는 공업을 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래서 29살이 되던 1900년에 한강으로 갔습니다. 가서 발을 담갔습니다. ‘이제는 내가 죽어야겠다. 뛰어 내려야겠다.’라고 생각하는데 그 때 갑자기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성도들끼리 서로 인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는 순간 이 사람이 한강물에서 발을 뺐습니다. 그리고는 생각했습니다. ‘아 주님이 계시는구나.’ 그래서 이분이 정신을 차리고 교회로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날이 마침 금요일 밤이었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금요철야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 없이 사업을 했었습니다. 어려서 내가 교회 다녔지만 지금까지 내가 예수님과 동행하지 아니하고 내가 노력해서 복을 받겠다고 노력을 하다가 이렇게 망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축복해 주시기 원하나이다” 기도하는데 마음에 “네가 한강에 빠져 죽을 용기가 있으면 죽을 용기를 가지고 한번 살아봐라.” 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가지고 이 사람이 죽을 용기를 다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나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사업을 하겠다” 다짐하고 사업을 시작해서 9년 만에 대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에 이레전자산업은 500만 달러를 수출하는 수출훈장을 받게 된 것입니다. 축복은 영적인 복이든, 물질의 복이든, 육적인 복이든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되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아니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3중 축복의 내용
대제사장이 축복을 할 때에 축복의 내용은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기서 복을 주신다고 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문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섬긴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인이 주인을 섬길 때에 물 한잔을 따라도 무릎을 꿇고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화요일 크로스웨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언제나 무릎을 꿇고 섬기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바로 그 모습이 복을 주신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는 얼마나 황공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감격스럽고 황공스러운 일입니까? 축복하신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무릎을 꿇고 섬긴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를 축복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다고 할 때 우리는 아마 물질적인 축복을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이 땅에서 잘 살고 남도 도와주고 유산도 남기고 그렇게 물질의 복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가정적인 축복을 원하실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이 잘 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또 살고 있는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인정받고 좋은 평판을 누리시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또 좋은 건강을 누리고 장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출세해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 되지 않는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원하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축복을 원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그 색깔이 조금 다릅니다. 언어의 색깔이 조금 다릅니다.
첫 번째 축복은 보호의 축복(Blessing of protection)입니다. “너를 지키시기를 원한다.”(24절) 여기서 지킨다고 하는 것은 목자가 양을 지키듯이 울타리를 치고 갖가지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참으로 얼마나 위험한 세상입니까? 육신적으로 위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걸어 다녀도 위험하고, 차타고 다녀도 위험합니다. 언제 내 혈관이 막힐지 모릅니다. 언제 내 심장박동이 중지될지 모르는 겁니다. 언제 내 몸의 세포가 변화되어 암세포로 변할지 모르는 겁니다.
더더구나 영적으로도 위험한 세상인 것입니다. 잘못된 말 한마디를 타고 악령이 들어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잘못 본 장면 하나를 가지고 악령에 사로잡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이요, 공중 권세잡은 자는 마귀요, 마귀는 악령들을 통해서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고자 얼마나 역사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적으로도 위험하고 영적으로도 위험한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기적입니다. 오늘도 살아서 눈뜨고 호흡하고 예배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런 위험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이처럼 여러분을 보호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축복은 은혜의 축복(Blessing of grace)입니다. 25절을 같이 읽어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기서 은혜의 개념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얼굴을 우리를 향해 돌리시고 환한 빛을 비추어 주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향해 얼굴을 돌리시고 진노하시고 화를 내신다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께서 얼굴을 우리를 향해 돌리시고 환한 빛을 비추어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름이 잔뜩 낀 날이 지나가고, 밤이 지난 후에 따뜻한 햇볕이 비추는 상쾌한 아침과 같습니다. 온 세상이 더욱 밝아 보일 것입니다. 파란색은 더욱 파랗게 보일 것이고, 녹색은 더욱 신선해 보일 것입니다. 온 세상은 더욱더 따듯해 보일 것입니다. 햇빛도 신선하고 따듯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사도 따듯할 것입니다. 온 세상은 더욱 따듯해집니다. 온 세상이 생명과 활기로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햇빛만 비춰 주어도 세상이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얼굴빛을 비추어 주신다면 리 피조물들은 얼마나 용기를 얻고 얼마나 생기를 얻고 얼마나 새 힘을 얻겠습니까? 죄가 있는 자는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슬픔이 있는 자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무능력한 자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소망 없는 자는 소망을 얻게 됩니다. 망한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얼굴빛을 비추어 주시고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축복은 평강의 복(Blessing of peace)입니다. 26절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사람이 아무리 부요를누리고 아무리 존귀를 누리고 해도 심령의 평안이 없으면 그것은 큰 폐단입니다. 전도서 6장 2절에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니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부요와 재물과 존귀를 얻어도 그것을 누릴 만한 평강이 없다면 그것은 악한 병입니다. 전도서 6장 6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갈 것뿐이 아니냐” 천년의 갑절, 2천년을 산다 할지라도 심령의 낙과 평강을 누리지 못하면 결국 그의 가는 길은 사망길이라는 것입니다. 재벌의 딸도 평강이 없으니까 자기 생명을 싫어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평강의 복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우리강남중앙침례교회가 이런 평강의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이런 평강의 복이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저는 이 축도를 볼 때에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축복기도를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 여러 명을 놓고 축복 합니다. 그런데 이 축복의 말씀은 언제나 단수로 기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며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단수입니다. 너희들에게 복을 주시고 너희들을 지키시기를 원한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25절에도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라고 말씀 하셨지“너희들에게 비추사”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향하여 드사,” 단수입니다. 복수가 아닙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놓고 축복할 때에 단수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하나로 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 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 주를 모시고 한 침례를 받았고 한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되 보호의 축복과 은혜의 축복과 평강의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지키시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얼굴빛을 비추어 주사 여러분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얼굴을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간절히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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