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포해전 1592년 5월 7일(음)
옥포해전은 1592년 5월 7일(음)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이 연합하여 옥포만에서 일본함대를 물리친 조선수군의 첫 해전이자 승전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경상도 지역의 수군이 와해된 가운데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제반 준비를 철저히 한 후 휘하 함대를 이끌고 5월 4일 전라좌수영을 출발하였다.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경상도 당포에서 판옥선 4척, 협선 2척을 거느린 원균지휘의 경상우수군과 합류한 후 5월 6일 밤을 거제도 송미포에서 보냈다.
5월 7일 새벽에 발선하여 천성·가덕으로 향하던 중 옥포만에 적선이 있다는 척후장의 보고를 받고는 옥포만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옥포선창에는 일본군선 30여 척이 정박해 있었고, 일본군들은 포구를 분탕질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휘하 장졸들에게 침착하게 전투에 임할 것을 지시한 후 적선을 향해 접근했다. 조선수군 함대를 발견한 일본군선 중 6척이 다가옴에 따라 조선수군은 이순신의 지휘 하에 일심분발하여 총포와 활을 쏘아 일본군선 26척을 분멸시켰다. 26척 중 전라좌수군이 21척을, 경상우수군이 5척을 분멸시켰다.
이어서 벌어진 합포(현재 창원 진해구 행암 학개마을) 앞바다에서 5척의 적선을 분멸시켰고, 5월 8일에는 적진포(현재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로 추정) 앞바다에서 13척을 분멸시켰다. 이상과 같이 가장 규모가 큰 옥포해전과 이후 벌어진 합포, 적진포해전을 통틀어 조선수군의 제1차 출전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옥포해전에 참가한 장수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수군 장졸 중 모두를 살펴볼 수는 없고 다음의 기준을 가지고 작성하였다.
1. 옥포해전에 참전한 장수 중 기록상 뚜렷한 전과를 거둔 사람에 한함
2. 전과를 거둔 장수 중 자료가 어느 정도 보이고 지위가 높은 장수 위주로 작성
3. 제목은 당시의 직책과 장수 이름을 알림
4. 본문 첫째 줄은 장수명(한자이름, 생존기간)을 표시하고 자와 본관, 거주 지를 언급하는 것으
로 통일하였음
5. 가급적 중간에 옥포해전의 전과를 반드시 명기하였음. 이를 강조해야 자료 작성의 가치가 있음
《경상우수군 장수들》
1. 영등포만호 우치적
우치적(禹致績, 1560~1628)의 본관은 단양(丹陽)이고 주 거주지는 한성이었다. 1583년(선조 16) 알성시(謁聖試) 무과에 병과(丙科) 14위로 합격하였다. 여러 무관직을 거쳐 1592년에 경상우수영 소속인 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가 되었다.
그 해 4월에 일본군선이 경상도해안의 각 수군진포(水軍鎭浦)를 급습하자, 수사인 원균의 지휘하에 적선 10여척을 쳐부수는 데 공을 세웠다. 5월 7일의 옥포해전에서는 옥포만호 이운룡(李雲龍)과 함께 선봉에서 연합함대를 인도하였으며, 이 해전에서 다른 경상우수군 장수들과 합력하여 적선 5척을 분멸시켰다.
이후 많은 해전에서 경상우수군의 선봉장으로서 크게 활동하였고, 적에게 잡혀 있던 우리 백성들을 다수 구해내었다. 1596년에 순천부사가 되었으며, 1598년에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는 데 큰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여러 중요 보직을 거쳤고, 1611년에는 제10대 삼도수군통제사(1611.8~1614.2)로 복무하였으며, 1628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순직하였다.
2. 옥포만호 이운룡
이운룡(李雲龍, 1563~1610)의 자는 경현(景見)이며, 본관은 재령(載寧)이고 주거주지는 청도(淸道)였다. 1584년(선조 17) 갑신(甲申) 무과 별시(別試)에 병과(丙科) 85위로 급제한 후 1587년 선전관에 임명되고, 1589년 정월에 옥포만호로 임명되었다.
옥포만호로 3년째 근무하던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근무지인 옥포해전에 참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는 선봉장으로 임전하여 다른 경상우수군과 함께 적선 5척을 분멸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 뒤 한산대첩 등 여러 해전에 참가, 진두에서 용감히 싸워 적군의 내양(內洋) 진출을 막아 우리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에 공을 크게 세웠다. 웅천현감과 동래부사직을 거친 후 1596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에 승진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주도하였다. 1604년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1605년 내직으로는 도총부 부총관·비변사 당상관을 지내고, 외직으로는 제 7대 삼도수군통제사(1605.9~1607.6)에 임명되어 복무하면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청도의 금호서원(琴湖書院)과 의령의 기강서원(歧江書院)에 제향되었다.
3. 지세포만호 한백록
한백록(韓百祿, 1555-1592)의 자는 수지(綬之)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춘천 서면 당산리(棠山里) 출생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부모에게 효도하였으며, 경전과 병서 읽기에 익숙했다. 장성해서는 손자(孫子)·오자(吳子)의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무인의 길에 뜻을 두었다.
1580년(선조 13) 경진(庚辰) 알성무과(謁聖武科)에 급제하였다. 진잠현감(鎭岑縣監)직을 수행하면서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며 병기를 수리 보완하여 사졸훈련에 힘쓰던 중 거제현 관하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에 보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이 함락되자 조정에서는 한백록을 부산진 첨절제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부산이 적의 수중에 놓여 있어서 부임치 못하고 지세포만호로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경상우수사의 요청에 따라 경상도를 구원하러 온 전라좌수군과 당포에서 합류하였는데 이때 그는 옥포만호 이운룡, 영등포만호 우치적과 함께 판옥선 2척에 나눠 타고 참전하였다. 이어서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는 일본군선 5척을 다른 경상도 수군 장졸들과 함께 분멸시켰다.
안타깝게도 그해 7월 8일에 있었던 한산도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후 부상을 당했다가 회복되지 못한 채 미조항 부근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등으로 책록(策錄)되었고, 1811년에 충장(忠壯)의 시호가 내려졌다.
4. 남해현령 기효근
기효근(奇孝謹, 1542~1597)의 자는 숙흠(叔欽)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어려서 예문(藝文)을 배우고 서법에 능했으나 성격이 호방하여 무과를 택하였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당시 오랫동안 평화가 계속되자 무비가 소홀하였으므로 왕의 명을 받들어 주와 군의 군비를 두루 점검하였다. 1590년 남해현령으로 부임하여 전선과 병기를 수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다수 경상우수군이 흩어진 상태에서도 기효근은 주장 원균의 소집령에 부응하여 여러 해전에 참가하였다. 옥포해전을 앞두고 같은 남해현 소속의 미조항첨사 김승룡(金勝龍), 평산포권관 김축(金軸) 등과 함께 판옥선 1척을 이끌고 경상우수군함대의 세력을 형성하였다. 옥포해전에 참가하여 경상우수군 소속의 여러 장수와 함께 5척의 적선을 분멸시키는 전공을 거두었다. 이후 여러 해전에서 선봉이 되어 큰 공을 세웠으므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병으로 현령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적병을 만나 어머니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추록되고 개백군(皆伯君)에 추봉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5. 소비포권관 이영남
이영남(李英男, 1563~1598)의 자는 사수(士秀)이고, 본관은 양성(陽城)이며. 현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기전리에서 태어났다.
1584년(선조 17)에 갑신 별시무과에 응시하여 병과 163위로 합격하였다. 초기관직으로는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막연히 북방에서 군관으로 근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92년 임진왜란 개전 당시에는 경상우수군의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이었다. 그는 전라좌수사 이순신과의 연합 함대 구성을 요청하는 청병 사절로 활동하여 일을 성사시켰다. 옥포해전에 참전하여 다른 경상우수군 장수들과 함께 5척의 적선을 분멸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영남은 원균 휘하였지만 이순신이 각별히 신뢰한 장수이다. 이영남도 원균보다 이순신을 더욱 존경하였다. 이영남은 소비포권관직을 3년간 수행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후 태안군수를 거쳐 1595년에는 북방으로 전직되어 강계부판관(江界府判官)을 역임한 후 장흥부사,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의 조방장 등으로 활약하다가 1598년에 가리포첨사로 옮겼다. 그리고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종전 후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일등에 녹훈되었다. 1621년에는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고금도의 충무사(忠武祠)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기전리에 있다.
6. 경상우수사 원균
원균(元均, 1540~1597)의 자는 평중(平仲)이며, 본관은 원주이다. 1567년(선조즉위년) 정묘(丁卯) 무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한 후 처음에는 함경도 조산보만호가 되어 오랑캐를 치는 데 공로가 있었다. 1583년 조산만호로 있으면서 니탕개난 진압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워 부령부사로 승진했다. 그 후 종성부사로 있을 때 시행된 시전부락 토벌전(1587. 1)에도 참가했다. 이때 이미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로서 ‘우위 1계원장’의 중요 직책을 수행하였는데,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우위 우화열장’의 전투편제로 함께 전투에 임했다.
그 후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우수사로 근무하면서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그리고 첫 해전인 옥포해전 때부터 이순신의 전라좌수군과 연합하여 해전에 임했다. 그 당시 그가 거느린 전선 수는 10척 미만으로 초기에는 3~4척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단독으로는 전투를 수행하지 못하고 대부분 이순신, 이억기 등의 전라도 수군과 연합하여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후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제도가 생긴 이후 이순신과 많은 갈등이 있었다. 이로 인해 1594년 12월에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전보되었다가 1596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 근무하던 중 이순신이 파직되면서 1597년 2월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직에 보직되었다. 그해 7월 16일에 있었던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함으로써 조선수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그 역시 전사하고 말았다.
1604년 이순신·권율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일등으로 책록되어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원릉군(原陵君)에 추봉되었다.
《전라좌수군 장수들》
1. 광양현감 어영담
어영담(魚泳潭, 1532~1594)의 본관은 함종(咸從)이고 주 거주지는 함안(咸安)이었다. 1564년(명종 19)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무과에 병과(丙科) 3위로 합격하였다.
그는 과거하기 전에 이미 전라좌수사 관할 여도진의 만호가 되었고, 급제 후에는 사천현감 등 영남해안 여러 진에서 근무하였다. 영남의 해로사정에 통달했기 때문에 전라도수군함대가 영남 바다를 드나들며 수색 토벌할 때 그의 수로 안내에 힘입은 바가 컸다.
전라좌수군이 경상도 지역으로 출발할 때 어영담은 전라좌수군 함대의 중부장(中部將)이 되어 해로에 대한 정보의 제공뿐만 아니라 함대의 지휘관으로서 전투에 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옥포해전에서는 일본군 중선 2척과 소선 2척을 격침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많은 해전에 참전하여 전라좌수군의 핵심 장수로서 제 몫을 다했다. 이순신은 이러한 어영담에 대해 조정에 올리는 장계를 통하여 ‘호남 한 쪽이 이제까지 보전하게 된 것은 이 사람의 일부분의 힘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라고 평가하였다. 1594년에는 조방장으로 임명되어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였다. 그러나 어영담은 불행하게도 전염병에 걸려 자신의 포부를 다 펼쳐보지도 못한 채 병사하고 말았다.
2. 낙안군수 신호
신호(申浩, 1539~1597)의 자는 언원(彦源)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선대 때부터 전라도 고부에 옮겨 살았다.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역임하다가 무용(武勇)이 뛰어나다 하여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에 임명되었다. 북방에서 변경을 지킨지 몇 년이 되자 왕은 너무 오래 고생이 많다 하여 도총부도사를 삼았다.
임진왜란 직전에 전라좌수사 관할인 낙안군수로 보직되어 옥포해전에는 좌부장(左部將)의 전투편제로 참전하여 적의 대선 1척을 격침시켰고, 적의 수급도 1급을 베는 공을 세웠다. 이후 그는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서 한산대첩 등 여러 해전에서 전공을 세워 통정대부로 승진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교룡산성수어사(蛟龍山城守禦使)로 있다가 남원성(南原城)이 일본군에게 포위되자 이를 구원하러 갔다가 전사하였다.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고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남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무장(武壯)이다.
3. 여도권관 김인영
김인영(金仁英, 1543~?)의 자는 덕부(德夫)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주 거주지는 해남(海南)이었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41세 되던 1583년(선조 16) 계미(癸未) 별시(別試) 무과에 병과(丙科) 322위로 합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사 관할 여도 권관(呂島權管)으로서 전라좌수군의 좌척후장(左斥候將)이 되어 옥포해전에 참전하여 일본군 중선 1척을 쳐부수었다. 이어 당포해전 때에는 우별도장(右別都將)으로 크게 활약하고, 한산도해전과 1594년 3월의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때는 우척후장(右斥候將)으로 참전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문벌이 낮고 중앙에 밀어주는 세력이 없어서 벼슬이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에 올랐을 뿐이었다. 이에 이순신이 조정에 계문(啓文 :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서 왕에게 올리는 글)을 올려 포상을 청하기도 하였다.
1597년(선조 30)에는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자,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뒤에 현감에 제수되었다.
3. 사도첨사 김완
김완(金浣, 1546~1607)은 영천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부터 골격이 장대하고 날렵하여 용맹스러운 가운데 선비의 기풍이 있었다. 성장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학문과 글씨, 시문과 서한이 뛰어났지만, 과거에는 운이 없었다. 그리하여 무과준비로 방향을 바꿔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하여 1589년에는 선전관을 지냈다. 그 후 1591년에 전라좌수사 관할 사도첨사(蛇渡僉使)로 보직되어 이순신의 막하가 되었다.
옥포해전에서는 우척후장(右斥候將)을 맡아서 옥포만에 있는 일본군선들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신기전을 쏘아 알림으로써 해전승리에 기여하였고, 적의 대선 1척을 격침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이순신 휘하에서 수많은 해전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김완은 1597년 7월 16일의 칠천량해전에 조방장으로 참가하여 고군분투하면서 적선 수척을 격침시킨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발견되어 포로가 되었다가 1598년 4월에 일본에서 탈출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4. 녹도만호 정운
정운(鄭運, 1543~1592)의 자는 창진(昌辰)이고, 본관은 하동이며 전라도 영암군(현 해남군) 옥천면 건교촌에서 태어났다. 7세 때에 정충보국(貞忠報國, 절개가 곧고 충성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의 네 글자를 패도(佩刀)에 새겨 스스로 맹세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효도로써 봉양하였고, 문무에 모두 힘써 오직 도의를 따랐다고 한다.
1570년(선조 3)에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길주, 명천 등지 및 유원진을 거쳐 1580년에 금갑도 권관과 거산찰방을 역임하였다. 1583년에 강령현감, 1584년에 웅천현감을 거쳐 1585년에 제주목 판관을 역임하였는데 어디서나 강직하고 정의를 지키기 때문에 상사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곤 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에 녹도만호로 부임한 후 옥포해전에서는 후부장(後部將)으로 참전하여 일본군 중선 2척을 분멸시켰다. 이후 임진년의 수많은 해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워 절충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안타깝게도 임진년 9월 1일 부산포해전에서 앞장서 전투를 독려하다가 적이 쏜 대철환에 머리를 맞고 전사하였다. 정운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통곡하며, “국가가 오른 팔을 잃었다.”하고, 글을 지어 제사지냈다.
조정에서는 특별히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증직하고 녹도 이대원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1796년에 추가로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1798년에 충장(忠壯) 시호를 받았으며, 같은 해에 왕명으로 순절비를 몰운대에 세웠다.
5. 방답첨사 이순신
이순신(李純信, 1554~1611)은 종실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자는 입부(立夫)이며 어려서부터 학업에는 취미가 없고 무예를 익혔다. 25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온성판관‧의주판관을 거쳐 혜산진 첨절제사로 오랑캐들을 무찔렀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 1월 10일 방답첨사로 부임한 그는 충무공 이순신이 가장 신임하였던 핵심참모의 한 사람이었다. 원균의 구원요청이 있게 되었을 때 이순신이 가장 먼저 불러 상의한 고급 지휘관이었다. 옥포해전에는 함대의 가장 중요한 직책인 중위장(中衛將)을 맡아 지휘하면서 일본군 대선 1척을 격침시켰다.
그 후 많은 해전에서 중위장, 전부장 등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그 공로로 절충장군(정3품 당상관)에 올라 충청수사가 되었다가 유도방호대장(留都防護大將)이 되어 서호(경기도 수원에 있는 못)에 주둔, 서울 방어의 책임을 졌다.
칠천량해전 후 이순신이 통제사에 복직되자 다시 수사가 되어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가 경상우수사의 직책으로 중위장이 되어 노량해전에서 결사적으로 싸웠다. 1604년 선무 3등공신으로 책록되었으며, 인조 때에 좌찬성이 증직되고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6. 흥양현감 배흥립
배흥립(裵興立, 1546~1608)의 자는 백기(伯起)이고,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1572년(선조 5) 무과 별시(別試)에 응시하여 을과 12위로 급제하여 선전관과 결성(結城)‧흥양(興陽) 등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흥양현감으로 복무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첫 출전인 옥포해전에서 전부장(前部將)으로 참전하여 일본군 대선 2척을 격침시키는 큰 전공을 세웠다. 이어서 제2차출전(사천·당포·당항포·율포해전)에서는 후부장(後部將)으로 참전하였고, 한산도‧부산포‧웅포해전에 참전하였다. 특히 제1차 출전에서 3차출전 기간 동안 매 해전마다 적의 대선을 격침시키는 등 그 공이 매우 컸다. 그 공을 인정받아 그해 8월에 광양 현감 어영담(魚泳潭)과 함께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되었다. 임진왜란 강화기 때에는 군량미 획득을 위해 흥양의 도양장에 둔전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데 크게 힘썼다.
정유재란기에는 이순신과 함께 수군재건에 힘써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노량해전에도 조방장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충청수사, 충청병사 등을 거쳤고, 1607년 총관(摠管)으로 영흥대도호부에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였다. 시호는 효숙(孝肅)이다.
7. 훈련봉사 나대용
나대용(羅大用, 1556~1612)의 자는 시망(時望)이고 본관은 금성(錦城)이다.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기상이 괴위(魁偉, 얼굴생김이 위대함)하고 도량과 재간이 넓고 컸다. 어려서 경적을 공부하여 일찍 문장을 성취하였고, 활쏘기와 말타기도 잘하여 칼과 창을 쓰는 것이 귀신과 같았다. 1583년(선조 16)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봉사라는 미관말직으로 있으면서 윗사람을 찾아뵙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아는 이가 드물었다.
그 후 1591년 종제 나치용과 함께 이순신을 찾아 조선(造船) 담당 군관이 되었다. 거북선 제작에 착수한 후 1년이 지난 1592년 3월에 완성을 보았다. 나대용은 조선기술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전략전술과 지략에도 뛰어났다. 옥포해전에서는 유군장(遊軍將)으로 참전하여 일본군 대선을 2척이나 격침시켰다. 이후 이순신 휘하에서 수많은 해전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전쟁 후에는 순찰사 한효순의 휘하 장교가 되어 새 전선인 창선(槍船)을 창안 제조하였으며, 이어 남해현령으로 있을 때에는 쾌속정인 해추선(海鰌船)을 발명 제조하였다. 통정대부에 이어 경기수사에 승진되었으나 사천해전 때 입은 전상이 악화되어 부임치 못하고 1612년 향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8. 좌수영 군관 이언량
이언량(李彦良,?~1598)은 영해이씨(寧海李氏)의 시조이며, 자는 충민(忠敏)이다. 거주지는 개령으로 어려서부터 힘이 세어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지략도 있었다. 1588년(선조 21)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훈련원 첨정(僉正)에까지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재산 중 상당부분을 염출하여 이순신의 막하로 가서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나대용 등과 함께 거북선을 만들었고, 돌격장으로 추대되었다. 그해 5월 7일의 옥포해전에서 돌격장(突擊將)의 임무로 참전하여 적의 대선 1척을 분멸시켰다.
이후 5월 29일의 사천해전부터는 거북선 돌격장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당포, 견내량, 부산, 당항포 등 전투에서 최선봉 돌격장으로서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앞장서서 일본군선을 수없이 격침시켰다. 그런 전공으로 훈련원 주부가 되고 다시 초계군수를 지내고 부호군(副護軍)으로 승진되었다.
노량해전에서도 이순신의 군관으로 참전하여 돌격장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였다. 격전과 혼전이 계속되는 와중에 몸을 잊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가 적 탄환에 맞았다. 그는 생포되기가 싫어서 스스로 몸을 물에 던져 전사하고 말았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훈록되었으며, 울산(蔚山)의 충의사(忠義祠)에 배향되었다.
9. 전라좌수사 이순신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자는 여해(汝諧)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한성 건천동에서 4남 1녀의 셋째로 태어났다. 어려서 문관의 꿈을 갖고 유학(儒學)에 매진하다가 22세에 무과로 진로를 바꾸면서 많은 병서를 탐독하였다. 32세인 1576년(선조9)에 병자(丙子) 식년 무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였다.
동구비보 권관을 시작으로 훈련원 장무관, 발포만호, 조산보만호, 정읍현감 등을 역임한 후 1591년 2월엔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복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좌수군을 이끌고 경상도 지역의 일본수군을 연파하였다. 제1차 출전 첫 번째 해전인 옥포해전을 잘 지휘하여 적선 26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수십 회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전쟁을 극복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정헌대부까지 승진하였고, 1593년 8월에는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의 초대 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 2월 일본군의 간계에 속은 조정의 오판으로 인해 파직되어 투옥된 후 백의종군했다가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흩어진 수군을 수습하여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3척밖에 없던 허약해진 수군전력을 60여 척 규모로 증강시켰다. 1598년 구원군으로 참전한 명나라 수군과 함께 노량해전을 지휘하던 중 승리가 결정적인 순간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1604년 선무일등공신에 녹훈되었고, 1643년에는 충무(忠武)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에는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격군님. 옥포해전과 해전 참가 장수들에 대해서 잘 배웠습니다.
늦은 밤 좋은 학습자료를 올려주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전에 작성해 놓은 것을 올려본 것 뿐이랍니다.
이렇게 잘 요약해서 올려주시니 머리에 쏙쏙 입력이 잘됩니다.. 답사 다니면서 본 지형을 상기해가며 읽어보기도 하고 이배사 회원님들을 생각하며 닉에 대한 공부도 해봅니다. 종종 올려 주세요.
사명대사님이 원하신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총무님의 비위를 거슬리면 격군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까요>ㅎ
좋은 자료이옵니다!
이리 꼼꼼히도..
회원분들을 생각하시는 격군님의 애정이 들어있사옵니다!
읍!
갑자기 작성한 것 아니라 제법 된 것이라서...ㅎ
지난번 골든벨 행사에서 나온 인물들이 낯이 익습니다..
공부는 해도해도 끝이 없건만..돌아서면 가물가물..
'청춘' 그자체만 빼고 별거 아니다하건만...
뇌세포만이라도 돌려주오!!!
죽어버린 뇌세포를 생각 안하면 됩니다.
공부 잘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새내기처럼 오랫만에 공부하는 기분입니다. 느선해진 학습자세를 전환시켜주시어 고맙습니다.
느슨하긴요. 겸손의 말씀을...ㅎ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반복교육..공부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모처럼 카페에 들어오니 공부할게 너무 많군요~~~글자들이 날 피해 도망다니니
잡으러 다니기가 숨이찹니다. 헉헉^^잘보았습니다.
아..드뎌 통제사님이 복귀하셨군요. 쌍수로 환영합니다.
공부잘했읍니다.
감사합니다.
옥포대첩기념공원에 근무왔습니다 ^.~ 공책에 빼끼고 앉았 습니다 ㅇ ㅎㅎ ㅎ
저역시 무슨시험이던 안되요 ~ 여군이 꿈이였었는데 ...
위 내용은 거제의 옥포해전지에 조성된 이순신길에 입간판 형태로 세워져 있죠?
@격군(格軍) ㅎㅎㅎ
한가지 궁금점...
왜선중에서 대선이라함은 안택선으로 보면되는건가요..
대선이 반드시 안택선은 아니라고 합니다. 관선 중에서도 큰 관선은 대선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다만 층각대선은 안택선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보고 있습니다. 무한 반복만이 내 머리에 지식이 남을듯 하옵니다
옥포만호 이운룡장군께서 재령이씨 저의 조상이시네요. 공부 잘 하고 갑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