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속과 회한의 경계에서】
김지연 시집 (밤에 건너온 편지) - 너라서 아프다
글/ 김부회 시인, 문학평론가
들어가며
시는 언어의 총화라는 말이 있다. 언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달 수단이며 동시에 언술 행위를 통하여 자신 내면의 소릴 진단하고 지나온 삶의 곡진한 이야기들을 성찰하여 내면의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라면 목적일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시를 쓰는 목적에 대하여 질문을 하면 거창하거나 혹은 명예욕 등에 기인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과연 우리가 시를 쓰는 목적은 무엇인지? 아니 독자는 시를 읽는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 문학적 가치와 시적 질감이라는 타성적인 이야기는 과감하게 배제하고 본질적인 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를 읽거나 쓰는 목적은 자기반성이며 일종의 자기 연민과 같은 회한悔恨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것은 회한이라는 말이다. 회한이란 뉘우치며 반성한다는 의미다. 살면서 우린 많은 것들에서 그저 생각 없이 스쳐 보내는 것이 많다. 그것은 관계에서 비롯된 타성이라는 현실적인 삶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곡의 시간을 보내고 어느 한 지점에서 뒤안길을 되돌아볼 때,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 회한이다. 회한의 대상은 관계 중에서도 가족관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아내, 남편, 이 모든 관계가 항상 온전하고 원활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여하한 경우에서 나와 대상의 관계 중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것이며 당시에는 모를지언정 때가 되면 어느 지점에서 회한에 서러워하거나 후회하거나 눈물 흘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산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하고 산다. 하지만 정작 사람은 누구나 실수나 잘못에 대한 반성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것을 채워주는 일, 누구나 실수나 잘못에 대한 반성을 하게 만드는 일, 그것이 글을 쓰는 최종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독자는 시를 읽으며 살아온 날의 궤적을 더듬어 본다는 것, 같이 공감하고 느끼며 소통한다는 것이 어쩌면 시문학이라는 장르에서 가장 매력적인 팩트일 것이다. 시는 철학이 아니며, 시는 과학이 아니며, 시는 정치나 경제가 아닌 인간 본연의 심성, 즉물적인 서정의 본향을 지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상상도, 어떤 성찰도, 어떤 화두도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관계에서 파생된 또 다른 관계와 관계 사이 드러나지 않은 본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는 것과 동일한 위대한 일이다. 시집을 내는 이유가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한다. 내가 나를 바라본 시선, 그 시선 어딘가에 존재하는 나도 모르고 지내온 내 내면의 모습을 진솔하게 꺼내 담담하게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미지의 존재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이다.
문장에 속지 말아야 한다. 행간이 품고 있는 시적 질감에 포위되어 난해한 비문을 함부로 꺼내지 말아야 한다. 포장지 이전에 중요한 것이 알맹이다. 문학의 궁극적 가치 판단과 기준은 문장에 있지 않다. 문장을 쓴 사람의 진정성에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다. 불교 선종에서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기에 언어나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쩌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불립문자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문장을 글로 쓰는데 어찌 문자나 언어에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당연히 들겠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시에서 말하는 울림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쇄된 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단어를 선택해 문장을 만든, 행간을 만든 시인의 가슴속 언약이 그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추정하는 일, 그것을 공감하는 일, 그것을 나의 반성과 성찰에 대한 기본 토대로 삼는 일, 이 모두가 시를 쓰거나 읽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번에 발간하는 김지연 시인의 시집 (밤에 건너온 편지)는 총 4부로 구성되었다,칠십여 편의 작품들 모두, 가진 심상의 깊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작품들이다. 비교적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작품의 면면은 긴 문장 보다 쓰기가 더 힘들다. 시는 짧아질수록 무게가 더 나가는 것이 통상적인 현상이다. 함축이라는 시적 요소를 가진 것이 시라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모두 다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 상의 문제로 인하여 그중 가장 인간적이며 가장 서정적이며 가장 김지연 시인을 대변할 수 있는 작품을 몇 편을 필자의 임의로 선별하여, 시인이 추구하는 세계와 동시에 시인이 꿈꾸는 세계의 본질, 그리고 회한의 깊이와 무게를 가늠해 보고 싶다. 평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빙의憑依다. 필자 글의 감각이 김지연 시인과 연결되어 하나의 synopsis를 만드는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거나 두루뭉술 문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쓴 그 지점 시인의 가슴을 읽어내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살펴보기
멍울
그날
아침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실타래 같은 머릿속
긴 숨으로 정돈하며 나서는 길
다시 안아보고 싶은 영혼의 그림자
물들인 고운 볼
몸 부비며 흔들던 바람은
봄을 내려놓았다
긴 호흡에 속박하는 향기
흥건한 맘 매달은 아쉬움
떨어지는 꽃잎과 자취는 감추어졌다
맑은 햇살 쏟아지는 길 따라
실낱같이 야위어 가던 뒷모습
삶의 눈물 가슴을 뚫고
흩어지는 꽃비 맞으며 저만큼 웃고 서 있다
한 조각 그리움으로 하늘 오르는 사연
아직도 가슴 속에 어머니가 사시는데
날 더러 어쩌라고
『멍울』전문
멍울의 사전적 정의는 몇 가지 있지만 김지연 시집 속 멍울의 의미는 어떤 충격으로 인하여 생긴 마음의 상처나 고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어느 날 아침, 불쑥 잊고 살던 그리움이 불씨를 당겼다. 봄바람이 볼을 부비고 마음을 흔드는 저편에 동구 밖을 나서는 내가 보인다.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회상하지 않았는데 불현듯 내가 보이고 그 뒤편에 손 흔들어주는 어머니가 보인다. 나는 어딜 가고 있는지? 어머니는 어딜 가는 나를 배웅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장면이 반복해서 눈시울에 멈추거나 다시 필름을 상영하거나 이제는 오래된 일인데, 잊어도 벌써 잊은 줄 알았는데, 그 기억의 실루엣은 시인의 가슴 정원 어디쯤에서 어머니를 숨겨 두었다 이제 보여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지럼증을 느낀다. 회한이 밀려든다. 어머니의 회한일지 나의 회한인지 판단할 수 없지만 그 회한의 관계는 이미 육체의 실종과 더불어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무게로 남아 있다. 그날, 시인이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뿐이다. 「날 더러 어쩌라고」어쩌겠다가 아닌, 어쩌라고 속에는 지독한 회한과 연민이 들어있다. 한국적 서정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린 말이다, 어머니는 가고 없는데 지금 날 더러 어쩌라고, 어머니 팔에 기대 잠들고 싶은데 날 더러 어쩌라고, 어머니 지어준 밥에 풋고추를 곁들어 맛있는 점심을 같이하고 싶은데 날 더러 어쩌라고, 어머니 손을 잡고 들꽃을 보러 벌판으로 나가고 싶은데 지금 날 더러 어쩌라고. 결구 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김지연의 모든 시가 그렇듯 수사적인 비만이 없다. 문장이 화려하거나 CinemaScope 하지 않다. 다만, 마른 가슴을 쥐어짜는 이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런 것이 소통이고 공감이고 울림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시는 철학이나 정치, 경제가 아니다. 토속적 서정의 한恨이다.
자화상
너와 마주 서는 밤
여름비가 걸어오고 있었다
열다섯 소년의 몸부림은
허공의 길에서 빗금을 치고
어둠만을 삼키고 있었다
답 없는 갈망에 애절한 꿈은
빗속에 길을 내며 가고 있었다
숨어 있는 밀어 하나 가슴을 열고
쏟아내는 너만의 밤
인연의 끄나풀 없었더라면
애증의 긴 그림자도 없었을 것을
『자화상』전문
시인의 말에서 김지연 시인은 외아들에 대한 연민과 사춘기 아들에 대한 방황에 대하여 마음고생한 것. 그 방황을 다잡기 위해 모든 것을 접고 아이의 모든 것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그때의 시련과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느낀 외로움과 아픔의 연속적인 시간에 대한 회한에 대하여 글로 엮는다고 말했다. 시인이 말한 대로 어쩌면 모든 부모가 겪었을 그 아픔의 시간에 대하여, 아픔이 주는 진정한 아픔을 아들에게 속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달을 보며 자신의 자화상을 만들어 내는 시인의 모습은 답 없는 갈망에 대한 애절한 꿈/ 쏟아지는 빗속에 길을 내는 듯한 질주/로 잘 그려져 있다. 열다섯 소년의 몸부림을 보는 어머니의 시선은 아릿하다 못해 뭉크의 절규를 떠올리게 한다. 아들이 허공에 빗금을 치고 어둠을 삼키는 모습을 보는 어미의 가슴은 이미 몸에 난 칼집 속으로 소금을 얹는 행위가 되고 급기야 인연이라는 것에 대하여 괴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이라는 글로 표현했다. 애증이라는 말로 사랑을 에둘러 말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모든 부모가 그렇듯 자식 앞에 이기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통제하고 반석 위에 서는 것을 도와줘야 하는 것이 도리다. 그 인생의 섭리 앞에 무기력한 어미의 모습을, 눈물을, 그리고 희망이라는 보이지 않는 싹을 틔워내야 하는 감정은 보통 사람의 자화상이다. 더 많은 문장을 끌어와도 결국은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더 많은 질감을 보태도 회색이 될 뿐이다. 인연의 끄나풀/ 이 한 문장에 어미의 아픔이 소금처럼 배어있다. 어미의 여린 몸에 듬뿍. 이러한 모습은 『무죄 1』이라는 시에서도 다시 한번 분신 공양하듯 자신을 태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죄 1
침묵의 밤이 나를 집어삼킨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아들의 절규
입으로 흘러나오는 기억
자존감을 짓밟은 너의 외마디
어디에서 시작되었던 것일까
생각이란 바늘이
아들의 빈방을 열고 서 있다.
『무죄 1』전문
생각이라는 바늘이/ 아들의 빈방을 열고 서 있다/라는 결구가 깊은 울림을 준다. 누구나 경험한 일이지만, 특히 내게는 더 아프게 다가오는 과거의 일들. 그 앞에서 뾰족한 바늘 하나 들고 서 있는 어미의 모습은 다분히 우리의 정서를 자극한다. 제목을 무죄라고 하였다. 혐의가 누구에게 있는가? 아들에게? 나에게? 우리에게? 사회에게? 어쩌면 우리 모두는 아들의 방황에 공조한 방임자이며 혐의자이며 동시에 죄를 물을 수 없는 무혐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김지연 시인은 말한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던 것일까? 그 답은 누구도 할 수 없다. 관계라는 것의 설정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시작하거나 종료하거나 할 때가 많은 법이다. 그래서 인연의 끄나풀로 치부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섭리 가운데 존재하는 것은 인연이며 관계다. 종속된 관계에서 평등된 관계로 전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잘못과 방황은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어떤 식이든 마무리 지어야 한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방관하거나 방임하면 안 되는 것이 자식의 일이다. 모든 부모는 무죄이면서 유죄다. 모든 아들은 유죄이면서 무죄다. 그 최종 심판은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다. 그땐 그랬었지 하며 웃음으로 치부할 수 있는 그런 어미와 아들이 되길 간절하게 바란다.
그날 2
반쯤 눈 비벼 아침의 눈을 떴나!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사위가 고요하다
엄마는 어디 가고
옆집에서 비럭잠을 자고 온 나는
상황을 알 턱이 없다
밤새 구르는 요강단지 치우던 엄마 생각에
내심 가슴이 쪼그라들었던 날
빈 가슴에 반달이 떴다
똥 기저귀 들고 나가 냇물에 흔들어 본다
용서랄지 무서움이랄지 아직 모르는 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밥을 지어 보았는데
밥이 아닌 죽이 되어 버렸다
쌀이 부푸는 줄도 모르고
한 컵은 엄마 밥 두 컵은 동생 밥
칭찬은커녕 반타작 되었던 그날
지금도 잊히지 않은
내 생의 어느 이야기 속의 그날
『그날 2』전문
해설의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회상에 대한 기억의 단편이다. 사람의 뇌는 그 깊은 속을 알 수가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느닷없이 주머니 속에서 유리구슬 꺼내듯 꺼내 투명하게 어떤 날의 상황을 종종 보여주곤 한다. 이런 일이 있었는지, 이날 이랬는지 지금도 선명하게 보이면서도 환상이나 몽환이 아닐까 싶은 일도 많은 법이다. 기억이라는 유리구슬 속에는 유독 보고 싶어 하는 장면만 보이는 경우가 있으며, 그 반대로 보고 싶지 않은 장면만 보여주는 유리구슬도 있다. 우리 호주머니 속 유리구슬은 어떤 유리구슬일지는 구슬 주인의 선택이다. 무엇을 어떻게 담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이 없으면 보기 싫은 것도 보이게 마련이고, 확고한 신념으로 열심히 생을 위해 달려온 사람이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될 것이 인생이다. 어느 날 친구 집에서 자고 온 아침, 엄마가 없다. 기겁하게 놀란 빈 가슴에 반달이 뜨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밥을 지었는데 죽이 되었다는, 그래서 반타작 되었던 아릿한 날의 기억.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선명하게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과 냇물에 흔들던 똥 기저귀, 쌀이 부푸는지도 모르던 푸릇한 날의 이야기. 이 모든 과거가 나의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마치 나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들 속의 나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며 동시에 행복이다. 사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뒤를 볼 겨를이 없다. 푸릇한 한 시절의 내가 보이지 않고, 이제 와 다 늙은 내가 보인다. 거울 속의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기도 한 것이다. 그런 긍정과 부정의 간극 사이에서 보이는 그날의 장면과 풍경들은 지금을 살아가고 견디게 하는 필연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서러운 날, 아픈 날, 가슴이 막혀 울고 싶은 날, 주머니 속 유리구슬을 꺼내 보자. 천천히 들여다보면 그날이 보인다. 내가 보고 싶은 그날, 내가 가고 싶은 나라의 그날, 갈 수 없는 나라의 그날이 보인다. 시는 어쩌면 그날을 보여주는 유리구슬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그날 속에는 내가 존재한다. 인식이 아닌 실존으로, 실존이 아닌 꿈으로, 꿈이 아닌 회한으로. 그 회한의 한자락 가운데 어머니가 있고, 아들이 있고, 어머니를 닮은 내가 있고, 뭉게뭉게 그리움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하늘이 있다. 그런 시인의 마음을 꼭 담아 보여주는 한 편의 시가 있어 소개한다.
가슴앓이
골목 외등 빛으로
비추어지는 봄비
기다림을 씻어 내려
못다 부르고 만 나의 노래
너의 목소리도 모습도
비에 젖은 상처이지만
오늘 이 시간이 지나면
목마른 갈증은 해소되려는지
혹시나 행여나 하는 기다림
등 뒤에선 선홍빛 통증이 인다
아들, 상처가 있는 아들, 상처를 극복하길 바라는 어미, 골목 외등과 봄비의 묘한 조화가 애처로움을 보태준다. 아들에 대한 나의 노래는 다 하지 못한 노래이며 아들의 상처는 비가 되어 내리고 있다. 그래도 어미는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다. 혹시나, 행여나, 기대 섞어 봄비를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이 아프다. 아프다는 말은 몸이 아플 때보다 마음이 아플 때 더 많이 아프다. 아픔은 아픈 사람보다 아픔을 바라보는 사람이 더 아픈 법이다. 살면서 겪어야 하는 선홍빛 통증의 실체가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실망과 좌절감은 거대한 해일처럼 해안을 잠식할 것이다. 어미가 쌓아놓은 방벽을 뚫고 거침없이 파고드는 쓰나미와 같은. 그래도 본문의 말과 같이 오늘 이 시간이 지나면/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가면 긍정의 힘이 작용할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내일을 기다리는 시간이 당장은 아프지만 더 많은 보람을 느낄 어느 날의 어느 순간을 위해 통증을 참아내는 것이 김지연 시인이 시를 쓰고 시집으로 엮어 츨간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것이 시의 본질이라면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고 유명해지기 위한 것이 아닌, 하고 싶은 말을 정제된 말투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것. 시인이 추구하는 서정의 본질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맺으며
김지연 시인의 시집 제목을 새삼 보게 된다. 『밤에 건너온 편지』라는 제목 밑 소제목에 『너라서 아프다』는 부제를 달았다. 낮이 아닌 밤에 건너온 편지는 어둠을 지나왔기에 언어의 정제가 되어있다. 어둠이라는 터널을 건너왔기에 밝음이라는 터널의 끝을 소망하는지도 모른다. 생의 긴 터널을 지나오면서 그 안에 담긴 모든 사연을 편지라고 하면 그 터널의 끝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깊은 어둠이 아닌, 푸른 햇살일 것이다. 너라서 아픈 것이 아니라 너를 보는 내가 더 아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부제에서 김지연 시인의 삶의 모럴과 정체성을 발견한다. 시문학의 가치는 문장이 아니다. 비틀며 꼬아서 카오스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담대하고 솔직한 진술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난한 삶의 여정에서 때론 힘에 부쳐 지칠 때 김지연 시인의 시집 일독을 권한다. 그 속에는 나와 우리 이웃이 살아온 가계의 내력이 호롱불처럼 희미하지만 오랫동안 나를 비추고 있을 것이다. 시는 치유의 방편이며 힐링의 수단이다. 그것이 시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부회)
김지연 시인 프로필
전북 전주, 문학애 등단, 환경창작문학상, 시와 늪 작가상, 전북 재능 시 낭송협회 회원, 시집(너라서 아프다) (밤에 건너 온 편지202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