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회 8월 문화답사
효창공원 나들이는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소였던 효창원이 지금은 백범김구 묘와 임정요인 묘, 삼의사 묘와 백범기념관과 효창운동장이 이 자리하고 있는 효창공원의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 나들이입니다.
● 모이는 일시 : 2019년 8월 13일(화) 오전10시
● 모이는 장소 :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 10번 출구 안에서 만남.
● 나들이 행선지 : 숙대입구역~효창공원~사명대사동상~임정요인묘~삼의사묘~의열사~
백범김구묘~백범기념관~이봉창 생가터~점심
● 소요 시간 : 3시간 정도
● 준비물 : 간식 및 음료 및 우의(비가와도 진행합니다.)
● 참고 : 점심식사는 효창공원역 부근이나 공덕역 주변 식당에서 합니다.
●문의 및 진행 : 최병규 010-5208-6275
● 용산
용산의 지명이 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백제 기루왕21년(A.D97)으로 그해 4월에 한강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산세에 용이 서려 있는 것 같은 형체라 붙여진 이름이기도 합니다.
용산이란 글자 그대로 용같은 형체의 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의 명칭이 되기도 한 용산은 도성 서쪽 모악의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가 약현과 만리현을 지나서 서쪽으로 한강변을 향하여 꾸불꾸불 나아간 모양이 마치 용이 몸을 비틀어 나아간 것 같고, 또 한강변 지금의 용산구와 마포구의 경계에서는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한 것에서 얻어진 이름
이곳의 산세(山勢)가 용이 서리어 있는 형체와 같다고 하여 그 지명이 생겼다고 하는 설이 있고, 한강에서 두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용산구는 고려 말기 이전에는 과주(현 시흥군)에 속해 있었으며, 고려 숙종 7년(1102)에는 고관을 파견하여 도읍지의 여부를 살피도록 했으며, 그 뒤 충렬왕 12년(1286)에 부원현이라 하였다.
● 청파동
청파(靑坡)라는 이름은 '푸른 언덕'이라는 뜻인데, 청파동이 연화봉(蓮花峰)이라는 푸른 야산에 위치한 데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조선 세종 때 명인인 청파 기건이 거주하였던 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청파동에 미나리꽝이 많았다고 했는데 이는 도성사람들을 소비자로 삼아 미나리 재배가 성했음을 알 수 있다.
● 숙명여학교
1906 05. 22 조선황실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경선궁慶善宮)로부터 용동궁지龍洞宮趾(구 교사대지)와 경비보조를 받아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정경부인 이정숙李貞淑 여사 취임.
1907 05. 영친왕궁英親王宮으로부터 황해도 재령군, 신천군, 은율군, 안악군, 경기도 파주군,
전라남도 완도군 소재 농경지 1,000여 정보를 받다.
1908 12 .‘명신고등여학교明新高等女學校’로 개칭하다.
1909 05. ‘숙명고등여학교淑明高等女學校’로 개칭하다.
1910 04.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기예과를 병설하다.
1911 11.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로 개칭하다.
1912 01. 경선궁 및 영친왕이 제공한 황해도, 전라남도, 경기도 등 3도내 신천, 은율, 안악, 재령, 파주, 완도 등 6군의 농경지 수익금으로 ‘재단법인 숙명학원’을 설립하다.
1915 03. 강습과를 병설하다.
1938 05. 이왕직 장관으로부터 학교 부지 6,471평을 무상임대 승낙 받다.
12. 재단법인 숙명학원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淑明女子專門學校’를 현 교지(교사 314평)에 창립하 고, 가정과 · 기예과 · 전수과를 두다(21일). 기숙사 부지 1,390.3평을 구황실로 부터 양여받다.
1939 04. 가정과 · 기예과에 각 40명, 전수과에 50명의 학생을 선발, 개교하다(20일).
1940 09. 본관, 소강당 및 기숙사(총건평 1,618평)를 신축하다.
1945 11. 법학박사 임숙재 선생 교장에 취임하다.
1948 05.22. 숙명자자대학‘淑明女子大學’으로 승격. 문학부: 국문학과·영문학과·미술학과·음악학과
이학부: 이학과 ·가사학과를 두다.
1955 03.09. 종합대학교로 승격, 문리과대학에 국문학과·영문학과·교육학과·가정학과, 정경대학에 정치외 교학과·경제학과, 음악대학에 음악학과, 약학대학에 약학과의 4개 대학 및 대학원 석사학위 과정에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가정학과를 설치하다. 법학박사 임숙재 선생 초대 총장 에 취임하다.
● 순헌황귀비
고종의 비(妃)이며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친모인 순헌황귀비(귀비 엄씨)는 6세 때 입궁해 명성황후를 모시는 상궁으로 일했다. 1895년 을미시해(명성황후 시해) 직후 고종의 부름을 받았고, 1986년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귀인-순빈-순비를 거쳐 1903년 황귀비 직위를 받게 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제실(帝室)재산정리국을 설치해 황실 재산을 국유화하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순헌황귀비는 황실 재산을 일제에 뺏길 수 없으며 이를 여성교육에 투자하자고 생각하게 된다. 황귀비는 1906년 왕후의 소유였던 용동궁(현재 종로구 수송동) 부지와 개인재산을 내놓아 명신여학교를 설립한다. 이것이 현재 숙명학원의 전신이다.
명신여학교는 1909년 숙명고등여학교,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했고, 1912년 재단법인 숙명학원(淑明學園)이 설립됐다. 숙명학원은 1910년 영친왕궁으로부터 황해도 신천군·은율군·재령군·안악군, 경기도 파주군, 전라남도 완도군 등에 있는 농경지 1천여 정보를 하사받았으며, 1912년 그 재산과 농경지 수익금을 포함한 자산으로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숙명학원은 1938년 5월 황실재산관리기관인 이왕직에서 용산 황실 땅 6471평에 대한 ‘영구무상사용승낙서’를 교부받았고, 같은 해 12월 현재 위치에 숙명여자전문학교(현 숙명여대)를 설립한다. 기존의 용동궁 부지에는 숙명여고가 자리 잡고 있다가 1980년 강남 도곡동으로 옮겨갔다. 현재 재단법인 숙명학원은 숙명여중·숙명여고·숙명여대를 운영하고 있으며 설립자는 순헌황귀비이다.
● 효창공원
용산 중에서도 제일가는 명승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 효창동에 있는 효창공원이라 할 수 있다.
효창동은 성저 10리의 용산방 만리창계에 들어있었다.
효창동이란 이름은 바로 이곳에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소인 효창원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문효세자는 정조의 첫째 아들로 정조6년 9월에 창덕궁에서 태어났고 정조8년 8월 세자로 책봉됐는데 정조10년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곳 효창동은 당시는 고양군 율목동(栗木洞)이라고 했는데 문효세자의 묘소는 처음에는 효창묘라고 했다가 고종7년에 효창원으로 승격됐다.
처음의 효창묘의 규모는 상당히 컸던 것으로 동쪽은 주교대로에 접하고 서쪽은 공덕리, 신촌, 남쪽은 율곡정 삼성현, 북쪽은 봉황정이라고 돼 있었다.
또 효창원에는 문효세자의 묘소뿐만 아니라 의빈(宜嬪) 성씨의 묘도 있었다.
의빈 성씨는 정조의 후궁으로 문효세자의 생모가 되는 분이다.
정조 10년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나던 해 9월에 세상을 떠났다.
의빈 성씨는 온순하고 정숙한 분으로 정조는 의빈 성씨를 몹시 총예하고 있었으며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를 잃고 난 다음에는 자주 이 효창원에 거둥했으며 묘비에 새긴 정조의 글을 보더라도 정조가 고인을 추모하는 정이 얼마나 지극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또 효창원에는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의 묘도 있었고 순조의 첫째 딸이며 숙의 박씨의 소생인 영온옹주(永溫翁主)의 묘소도 있었다.
문효세자의 묘를 비롯해서 의빈 성씨의 묘소며 숙의 박씨, 영온옹주의 묘는 해방을 전후해서 모두 서오릉 경내로 이전이 됐는데, 이 효창원은 그 전에도 일제의 침략으로 많은 수모와 상처를 안고 있었다.
일제는 1884년 6월에 동학혁명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오오시마(大島)소장이 이끄는 혼성여단이 이곳 효창원 만리창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만리창계곡, 이태원동, 서빙고 등지에 분산주둔하고 원효로 4가 근처에 병참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대도(大島)여단은 우리나라의 갑오개혁을 강요하면서 무력적인 위협을 한 부대였고 또 청일전쟁의 선도적 역할을 한 부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서울에 와 있던 일본인 거류민들은 대도여단이 입성을 하자 제각기 일장기를 들고 미친 듯이 환영을 했고 이 일대의 동명을 그들 맘대로 여단장인 오오시마,즉 대도(大島)의 이름을 따서 대도정(大島町)이라고까지 했다.
효창원 일대는 대도여단이 주둔하면서 일본인 거류민들의 수효도 늘어나고 아예 그들의 집단부락이 생기게 됐다.
한일합방 후에도 이곳에 터전을 잡은 일인들은 효창원의 동북쪽 일부를 토지와 수목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1924년 6월부터 15년간 이왕직으로부터 무상으로 임대를 받아 약간의 시설을 하고 효창공원을 만들었다.
그들은 공원 남쪽에 대도여단이 주둔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공원 서북쪽에 기념비를 세우고 동쪽 작은 언덕마루에는 정오를 알리는 일본군의 오포터가 있어서 서울 장안에 시각을 알리는 일을 맡았는데 나중에는 남대문 안에 있는 소방소의 사이렌으로 대치하게 되자 오포는 폐지가 됐다.
그런데 이 효창공원에 설치됐던 대포는 일본에서 만들어 보낸 것으로 대포 포신에 제작한 사람의 성명을 음각했는데 그 성에는 백제성을 가진 사람이 네 명이나 있었다는 것이다.
주조공의 성이 백제라는 것은 그들의 조상이 바로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의 국가형성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들의 후손이 틀림없는 것으로 이 대포를 주조할 때 지휘를 한 사람의 성이 백제였던 것이다.
일본의 대도여단이 효창원 근처에 주둔하고 있을 때 야전병원의 약제사로 있던 사람으로 이궁충팔(二宮忠八), 즉 니노미야라는 자가 비행기를 처음으로 고안 연구해서 군 작전에 사용하도록 건의했지만 당시는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7년에 일본국내에서 이충이란 사람의 발명공로가 표창이 되고 유명해지니까 1932년에 이충이를 아는 몇몇 사람이 효창국민학교 서쪽에 '실용적 비행기 발명자'라는 기념비를 세우는 등 법석을 떤 일이 있었다.
일제가 물러간 다음에 이 효창원에는 항일운동으로 순국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세 의사의 묘소를 쓰게 된 것이다.
지금 세 의사의 묘소 바로 아래쪽에는 잔디가 잘 자라지 않는 둥근 테두리 자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문효세자의 묘를 쓸 때 사용했던 흰 회가 굳어서 된 것이라고 했다.
해방 이듬해 세 의사 묘를 조성하는 공사를 할 때 문효세자의 묘가 있던 자리 앞을 파다가 곡괭이 끝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파보니 큰 석함이 출토되었는데 그 속에는 문효세자가 가지고 놀던 것으로 추측되는 장난감과 쓰던 물건이 그득히 들어 있었다.
효창공원의 정문을 들어서서 동쪽으로 30미터쯤 가면 임시정부 요인의 묘소가 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해방되던 날까지 러령 또는 만주로, 중국 땅으로 전전하면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선생, 군사부장 조성환 선생, 그리고 차리석 선생의 묘소가 있다.
또 정문에서 북쪽으로 30미터쯤 올라가면 세 의사의 묘소가 있다.
세 의사의 유해가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것은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7월초였다.
이때 세 의사의 유해를 모시고 귀국한 분은 역시 백정기 의사와 함께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고 부중(府中)형무소에 복역중 해방으로 출옥했던 광복회장 이강훈 선생이다.
세 의사 묘는 오른쪽으로 백정기 의사,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의 순으로 모셔졌다.
백정기 의사는 1924년 일본천황을 암살하기 위해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실패하고, 1933년 상해 홍구공원에서 주중 일본대사를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옥사했다.
윤봉길 의사는 1926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에서 김구 선생이 지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1932년 김구 선생으로부터 폭탄을 받아 일본천황의 생일축연과 상해사변전승 기념식장인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거류민 단장과 일본군 사령관이 그 자리에서 죽고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거사직후 체포되어 일본 오오사카로 후송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했다.
이봉창 의사는 1931년 상해로 건너가 일본천황의 암살을 모색하다가 그 다음해 1월에 일본천황과 만주국황제 부의가 관병식을 갖고 궁성으로 들어가려는데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신 분이다.
광복회장 이강훈 선생은 종신형을 받고 부중형무소에 복역 중 해방으로 석방되자 일본에서 독립투사 박열 선생과 함께 재일동포의 귀국 알선과 조선인연맹을 조직해서 교포들을 지도하다가 세 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시는 일을 실현하려고 무척 애를 쓰신 분이다.
당시 백정기 의사의 유해는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이봉창 의사는 동경근교에 매장돼 있는 것이 확인됐으나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찾을 길이 없어 애타게 찾던 중에, 윤의사 의거 때 상해에서 피살된 백목(白木)대장의 저택 문앞에 유해가 묻혀있는 것을 알고 간신히 발굴해서 해방 이듬해 7월초에 함께 모시고 귀국을 할 수가 있었다.
삼의사 묘나 임시정부 요인의 묘소나 모두가 김구 선생이 귀국한 직후에 자리를 잡아두었던 것이라고 하는데 김구 선생은 자신의 운명도 예견했던지 자신의 묘자리도 지정해서 나무로 표시해 두었다고 한다.
김구선생은 매일 아침 일찍이 이곳 세 의사 묘에 참배하였는데 그 때마다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에게 맡기고 떠난 회중시계를 제단 위에 올려놓고 오랫동안 묵념을 올리고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삼의사 묘 왼쪽 끝에는 또 하나의 무덤이 보이는데 이것은 장차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모셔놓기 위해서 봉분을 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묘소 주변에는 무궁화도 잘 가꾸어져 있어서 참배객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세 의사 묘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가 있다.
김구 선생 묘에서 북동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북한 반공투사위령탑이 서 있다. 이 위령탑은 효창공원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이 비는 1969년 10월19일 평양수복기념일에 세워졌는데 함경남도에서 반공폭동을 일으키고 순국한 179명의 선열의 이름이 적혀 있다.
효창공원 동쪽 언덕 위는 청파동2가가 되는데 이곳에는 어린이놀이터와 노인정이 있고 놀이터 안에는 원효대사의 동상이 용산강을 바라보며 높이 서 있다.
어쨌든 효창공원에서 느끼는 것은 순국선열을 모신 곳답게 수목이 가꾸어져 있고 자연보호가 잘 돼 있다는 것이다.
효창공원 안을 흐르는 계곡물은 예전에는 능개천이라고 해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덧 탁류가 돼버리고 말았다.
주변환경과 자연보호가 잘돼 있는 효창공원 안을 흐르는 계곡물이 탁류가 된 데에는 어딘가 그 계곡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효창동을 하마비동이라고 부르던 일이 있는데 이것은 여기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하마비가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효창원이 있었기 때문인데 언제 누가 그랬는지 이 근처의 개축공사를 할 때 리어카에 실어다가 내다버렸다 한다. 출처 - 이규태의 –서울정도 600년에서-
● 효창원孝昌園(문효세자)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 1786년(정조 10), 1870년(고종 7), 1944년
효창원은 조선 22대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의 원이다. 효창원은 처음 조선시대에 세자의 묘제 형식에 맞게 조성하여 정자각, 비각,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1944년에 서삼릉으로 이장하면서 원침에 있는 석물과 신도비, 표석만 옮겨오게 되었다. 신도비는 입구에 세웠다.
1786년(정조 10)에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양 율목동(栗木洞)(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묘를 조성하였다. 묘소의 이름은 효창묘(孝昌墓)로 하였다가 1870년(고종 7)에 원의 이름을 효창원(孝昌園)으로 격상하였다. 이후 1944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 문효세자(文孝世子) 이야기
문효세자(재세 : 1782년 음력 9월 7일 ~ 1786년 음력 5월 11일)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로 1782년(정조 6)에 태어났다. 1784년(정조 8)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2년 뒤인 1786년(정조 10)에 홍역이 발병하여 창덕궁 별당에서 5세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 시호는 온효(溫孝)라 하였다가, 최종으로 시호를 문효(文孝)라 하였다.
● 정조의 후궁 의빈성씨
출생일 1753년 음력 7월 8일 사망일 1786년 음력 9월 14일 미시(오후 1~3시)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중희당
매장지 의빈창녕성씨지묘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효창원 →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후궁묘)
의빈 성씨 宜嬪 成氏
지위 의빈, 안현궁, 의빈궁
이름 휘 성덕임(成德任)
별호
상의 성씨 (尙儀 成氏, 1780~1782.9)
소용 성씨 (昭容 成氏, 1782.9~1783.2)
의빈 성씨 (宜嬪 成氏, 1783.2~사후)
이저 (貳邸, 1784.8~?)
안현궁 (安峴宮, 사후)
의빈궁 (宜嬪宮, 사후)
의빈 성덕임(宜嬪 成德任)은 1753년(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증 찬성 성윤우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임씨로 통례원 종6품 인의로 재직한 임종주의 딸이다.
아버지 성윤우는 본래 승지 한준증의 청지기인데 한준증이 사망한 뒤 홍봉한의 청지기가 되었다. 그러던 중 한준증의 양자 한문홍 덕분에 한때 재령의 군수가 되었지만, 몹시 가난해서 쌀과 피륙을 위해 아문(급이 높은 관청을 통틀어 이름)의 고직(관아 창고를 지키고 감시함)에게 이따금 궁색한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7천 냥을 횡령해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고문당했다. 곧 혜경궁이 성덕임을 궁녀로 거두어 친히 길렀고 성덕임은 혜경궁을 모셨다.
1766년(영조 42년),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승은을 내리자 울면서 세손빈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며 죽음을 맹세했다.
궁녀가 승은을 거부하는 일은 죽어 마땅할 만큼 큰 죄지만 정조는 그 뜻을 받아들이고 재촉하지 않았다. 성덕임이 자라자 혜경궁은 정조를 지극하게 따르라고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1780년에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렸지만 거듭 사양했다. 이에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크게 꾸짖고 벌을 내리자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이고 후궁이 되었다.
●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
별호 궁인 박씨 (宮人 朴氏)
남편 : 순조 (純祖, 1790년~1834년, 재위:1800년~1834년)
딸 : 영온옹주 (永溫翁主, 1817년~1829년)
사망일 1854년 음력 6월 30일
매장지 숙의 박씨 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숙의 박씨(淑儀 朴氏, ? ~ 1854년 음력 6월 30일)는 조선의 제23대 왕 순조의 후궁이다.
본관은 밀양이다. 원래 궁인 신분으로, 순조의 승은을 입은 후 1817년(순조 17년) 10월 11일 새벽 딸(영온옹주)을 낳아 종2품 숙의에 봉해졌다. 그러나 유일한 소생인 영온옹주는 태어난 후 병을 자주 앓고 말을 잘 하지 못하였고, 1829년(순조 29년) 음력 4월 8일 1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숙의 박씨는 1854년(철종 5년) 음력 6월 30일에 사망하였다. 사후 효창원(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에 장지를 마련하였다. 이곳은 현재의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 인근인데, 일제 강점기 말엽인 1945년 3월에 강제 이장되어 현재 박씨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 경내에 있다. 그녀의 묘는 서삼릉 전 지역이 사적으로 지정될 때 함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다.
● 영온 옹주(永溫翁主)
아버지 : 제23대 순조(純祖, 1790년~1834년, 재위: 1800년~1834년)
어머니 : 숙의 박씨(淑儀 朴氏, ?~1854년)
1817년(순조 17년) 음력 10월 11일 새벽 조선의 제23대 왕인 순조와 그 후궁 숙의 박씨의 딸로 태어났다. 성은 이, 본관은 전주이다. 문조(효명세자, 헌종의 아버지) 등과는 이복 남매간이다.
영온옹주의 생모 숙의 박씨는 밀양 박씨 출신이다. 원래 궁인 신분이었다가 순조의 승은을 입고 영온옹주를 낳자, 1817년(순조 17년) 음력 10월 11일 종2품 숙의에 봉작되었다.
11살 때인 1827년(순조 27년) 음력 6월 10일 영온옹주(永溫翁主)에 책봉되고 여러가지 물품을 하사받았으나, 불과 2년 후인 1829년(순조 29년) 음력 4월 8일 13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순조의 자식들은 적자녀 2남 3녀는 물론, 유일한 서녀인 영온옹주까지 모두 요절하고 말았다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영온옹주는 태어날 때부터 병을 자주 앓았고 말도 잘 못 했다고 한다. 이러한 옹주를 이복 오빠인 효명세자가 유달리 불쌍히 여겨 항상 어루만져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옹주가 요절하자 효명세자가 매우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 자모(慈母)의 정경(情境)은 더욱 슬프게 여길 만하다." 라고 하였다. 한편 이 효명세자 역시 영온옹주가 사망한지 약 1년 뒤인 1830년(순조 30년) 음력 5월 6일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영온옹주의 묘소는 효창원(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에서 동쪽으로 99보 되는 지점에 만들어졌다. 이 자리는 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일대인데, 일제 강점기 때 이곳에 있던 모든 무덤이 옮겨지면서 영온옹주의 묘도 함께 이장되었다. 현재는 생모 숙의 박씨의 묘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 삼의사 묘
▶ 이봉창의사
1901년 8월 10일 서울. 사망 1932년 10월 10일
천도교가 세운 서울 용산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한학 공부를 하다 1913년 일본인 과자점의 점원으로 들어갔다.
1917년 용산 원효로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화전(和田) 상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1919년 해고당하였다. 1920년에는 용산역 만선철도(滿鮮鐵道)의 기차운전견습소의 역부(驛夫)를 지냈다. 이어 같은 해 전철수(轉轍手)와 연결수(連結手)가 되었다. 1921경 한·일 간의 임금 격차 문제에 눈을 뜨고 항일의식이 싹텄다. 1924년 4월 위의 직책에서 해고당하였다.
1924년 9월 자택에 항일 단체인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 동 총무가 되었다. 다음 해 형 범태(範泰)와 같이 조카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판(大阪)에서 철공소직원으로 근무하다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기노시타(木下昌藏)로 바꾸었다. 이후 동경과 대판 등지를 전전하며 가스회사에서 노동을 하는 등 막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1926년에는 병고(兵庫)에서 1년간 일본인 표구사의 보조원으로 생계를 꾸렸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방랑 생활보다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갔다. 1931년 1월 한국인 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호소했으나 민단 간부들이 그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겨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김구(金九)가 그의 진의를 알고 자신이 조직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시켜, 이봉창의 소신대로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자금이 여의치 못해, 월급 80원을 받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인쇄소와 악기점에서 일하며 확실하게 준비를 하였다. 원로 이동녕의 승인하에 김구도 군자금모집을 펴던 중 재미 동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거사를 촉진시켰다.
당시 중국군 대령으로 복무하던 왕웅(王雄), 즉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해 상해공병창에서 수류탄 1개를 구입하고 김현(金鉉)으로부터 또다시 수류탄 1개를 입수하였다. 이 수류탄을 받은 즉시 거사자금 300원을 가지고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동생인 안공근(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친 뒤 17일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명중을 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어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누가에(犬養) 내각이 총사퇴하고 다수의 경호 관련자가 문책당하였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0일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후 푸저우(福州)에 주둔하던 일본 군대와 경찰이 국민일보사를 습격, 파괴함과 동시에 중국 정부에 엄중 항의하는 등 중·일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인 자객을 산 뒤 일본 일련종(一蓮宗)의 승려 한 명을 암살하게 하여, 이를 빌미로 제1차상해사변(第一次上海事變)을 일으키는 등 그 파급 양상이 심각하였다.
이봉창 [李奉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백정기 의사
출생 1896년(고종3) 1월 19일 사망 1934년 6월 5일
1896년 1월 19일 전북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현재 부안읍 신운리)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2년 7세때 정읍군 영원면 갈선리(현재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했다. 한문을 공부, 19세 때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왔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그 후 동지들과 경인(京仁)간의 일본 군사시설 파괴를 공작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본적지와 행적을 속여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각지를 몰래 다니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 일본 군사시설 파괴에 전력하였으며, 1924년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도쿄에 갔으나 실패하였다. 같은 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 1924년 상하이로 가서 우당 이회영, 화암 정현섭, 우근 유자명, 회관 이을규, 우관 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 데 참가하여, 조선 대표로 출석하였다고 우관문존년보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기관지인 정의공보를 비밀리에 발행하였는데, 그 잡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었으나 유자명 등 여러 아나키스트 동지로부터 후원을 받아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약 1년간 공동병실에서 요양생활을 하여 완치되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하여 흑색공포단(BTP)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강화하여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당시에 구파 의사도 동일한 시도를 준비했었으나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실패하였다.
1933년 3월 상하이 훙커우(虹口)에서 정현섭, 원심창, 이강훈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암살하려고 모의하다가 육삼정(六三亭)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상해 일본 총영사 보고문에서 일본 경찰의 세밀한 사전 체포계획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컨대 아마 의거가 사전에 누군가에게 누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나가사키 법원에서 백정기 의사와 원심창은 무기징역을,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았다. 백정기 의사는 이사하야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옥사(獄死)하였다.(위키백과)
▶ 윤봉길 의사
출생 1908, 충남 예산 사망 1932.12.19
본관은 파평(坡平). 본명은 우의(禹儀). 호는 매헌(梅軒). 충청남도 예산 출신. 아버지는 황(璜)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원상(元祥)이다.
1918년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성의(聖儀)와 한학을 공부했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 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 해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해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29년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해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했으며, 그 해 1월 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해 2월 18일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해 성황리에 마치게 되자 일제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구애받지 않고 지방 농민들을 규합해 자활적 농촌진흥을 위해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또,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 바탕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1930년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신념이 가득찬 편지를 남기고 채 3월 6일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 그 곳에서 김태식(金泰植)·한일진(韓一眞) 등의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해 12월에 단신으로 다롄(大連)을 거쳐 중국 칭다오(靑島)로 건너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다. 이곳에서 세탁소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을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상해로 갔다.
상해 프랑스조계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우선 생계를 위해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 해 겨울에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1월 8일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 일대는 복잡한 상황에 빠졌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이때 일본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윤봉길은 이 해 봄 야채상으로 가장해서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였다.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김구의 주관 하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의 협의와 동의 아래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식장에 참석해 왕웅(王雄, 본명은 金弘一)이 만들어 폭발시험까지 했던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때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大阪)위수형무소에 수감, 가나자와(金澤)에서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안중근 의사
출생 1879년 9월 2일 사망 1910년 3월 26일
구한 말의 교육가·의병장·의사(義士)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망명을 결심 상해로 갔으나국내에서 교육 등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깨닫고 다음 해에 귀국,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습니다.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시작하여 1909년 10월 26일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저격하였습니다.
일본군에서 잡혀서도 그의 태도와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에 일본인 재판관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으며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 현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효창공원 안에 그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 놓은 허묘가 있고, 용산구 관내의 남산중턱에는 안중근 동산과 기념관이 있습니다.
● 임정요인 묘
▶ 이동녕(李東寧)(1869∼1940)선생
독립운동가로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개회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고 1906년 만주 북간도로건너가 이상설·이준 등과 용정에서 「서구의 숙」을 설립,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상동학교를 설립,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습니다.1910년 이시영·이강영과 함께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는데 이 학교가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13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을 주도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의 외곽 단체로 대한광복전선의 결성에 참가하는 등 항일전에 투신하여 일생 동안 조국의 광복운동을 하다가 1940년 중국 사변성에서 병사하였습니다.
조국 광복 후 1948년 사회장으로 봉환식을 거행하였으며 효창공원에 안장하였습니다.
▶ 차이석(車利錫)(1881∼1948)선생
차이석은 일명 서입환이고 호는 동암이며, 평북 선천 출신입니다.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평양 대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인재육성에 전력하였습니다. 1911년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옥고를 치뤘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1935년 2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그 때 비서장에 선출되어 1945년까지 재임하다가 중경에서 병사했습니다.
김구의 주선으로 1947년 유해가 운구되어 용산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 조성환(曺成煥)(1875∼1945)선생
조성환 1875~1948
1900년 26세때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가 발각, 사형을 선고받은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 칙명으로 3년만에 석방된 후, 1907년 안창호·양기택·이갑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습니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가 만주를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 암살을 기도하다가 실패하여 거제도에 유배되었으나 1년만에 석방된 뒤,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망명, 서일·현천묵·김좌진등과 군부를 조직하고 1919년 12월에 북로군정서를 개편하여 군사부장에 취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39년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중국정부와 협력하여 광복군 창설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임시정부요인과 함께 환국한 뒤 한국장교단장·대한독립촉성회위원장·성균관부총재 등을 역임하다 1948년 병사하여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 백범김구(白凡金九) 1876~1949
독립운동가, 정치가로 1896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는다 하고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1898년 탈옥하였습니다. 1909년 안악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 국무령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 무력활동을 지휘했습니다. 1940년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여 항일 무장부대를 편성하고 1941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임전태세에 돌입 군사훈련을 지휘 하던 중 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1945년11월 환국,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1948년 남한에서만의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UN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 4월19일 평양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시련을 맞았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세워진 뒤에도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1946년 6월26일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에는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습니다. 사단법인 백범기념사업회가 효창동 5의 38에 위치해 있다.
※ 상기 내용은 수집된 자료를 정리 편집하여 올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