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조선후기의 실학자 중에서도 경세치용파의 종사(宗師)인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의 학문을 계승ㆍ발전시켜 경세치용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이며, 사상가이다. 다산이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현실문제에 눈을 돌려 그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게 된 그의 실학사상을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그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이 그의 경전 주석에 나타난 경학사상이다. 따라서 그의 방대한 경학 관계 저술은 ‘다산학’의 형성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다산 경학의 요체는 또한 강력한 <실천지향성>을 그 전제조건으로 하는 동시에 그 필수불가결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즉 <실증ㆍ실천> 이라는 개념은 그의 경학세계의 구성에 있어 핵심적인 초석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증ㆍ실천>이라는 실학적 개념은 그의 문제의식을 총체적이자 집약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다산은 고증학의 학문방법인 합리적, 실증적 태도에 적극적인 수용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의 청학에 대한 주석방법론적인 측면에서의 수용태도는 육경사서를 저술함에 있어 취하고 있는 인증(引證) 방법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논어고금주』를 주석함에 있어 한대의 훈고학, 송유(宋儒)의 성리학적 제설(諸說), 청유의 고증학적 경전주석 태도를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에서 수용하고 있다. 다산은 비록 청대 고증학의 과학정신에 입각한 방법론에 찬동하고 있지만, 그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청유의 경전해석에 대해 자기의 독자적 견해와 상합될 때는 이를 수용, 자신의 주석을 지지하는 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자기의 주견(主見)과 배치될 때는 객관적인 방법으로 비판을 가했다.
또한 다산은 경전의 인증방법에서 알 수 있듯이 청대 고증학을 수용함에 있어 경전연구의 주된 방법론으로써 그 당시의 청대 고증학자들 보다 진일보한 고증적 방법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경전해석 성향에 있어서는 객관적이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여, 경전의 원의(原義)에 부합된 것은 취하였으나 이에 어긋난 것은 과감하게 배척하여 변석(辨析) 하고 있음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다산은 고증적 방법을 한층 더 고양(高揚)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다산은 비록 그가 직면하였던 정치적 상황의 구조적인 제약 때문에 자신의 경륜을 직접 현실에 적용시켜 볼 기회를 끝내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시대적 전환기를 살았던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실천, 즉 <이론적 실천(경학세계의 실천)>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고 본다.
본 논고를 통하여 필자는 다산이 자신의 경학적 저술의 하나인『논어고금주』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의 실학적ㆍ고증적 경학세계를 개진하였으며, 나아가 그것이『논어집주』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자의 경학과는 어떤 성향을 지니는가를 고증학적 관점에서 몇 가지 측면으로 분석, 검토해 보았다. 이를 통하여 다산의 실학적 경전주석의 한 단면(斷面)이 그의 경학 세계에 있어 고증적 해석성향과 일맥상통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I. 머리말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후기의 실학자 중에서도 경세치용파의 종사인 성호 이익(1681-1763)의 학문을 계승ㆍ발전시켜 경세치용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이며, 사상가이다.
다산이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현실문제에 눈을 돌려 그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게 된 그의 실학사상을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그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이 그의 경전 주석에 나타난 경학사상(經學思想)이다. 따라서 그의 방대한 경학 관계 저술은 ‘다산학’의 형성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다산은 경세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있을 뿐 아니라 경학에 있어서도 독자적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다산의 경전주석은 거의 모든 유교경전을 검토의 대상으로 한 본격적 경전주석으로 경전주석의 전통이 미약한 한국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경전에 대한 단순한 부연설명이 아니라 기존주석들에 대한 취사선택 속에서 자신의 독창적 관점에 의해 경학체계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성을 지닌다.
다산의 경학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구조로 설명되는 다산의 사상체계에 있어서 수기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경세론이 치인의 영역에서 외적인 실천체계를 이루는데 대해 경학은 이를 뒷받침하는 내적인 이론체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다산의 경학에는 다산의 사상적 입장과 세계관이 직접적으로 반영되고 있으며 그 내용은 탈성리학적인 성격으로 요약된다. 곧 다산은 당시의 지배적 사상체계인 성리학의 관념론적 사유구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틀을 경전에 대한 주석을 통해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산의 이러한 사상적 지향은 17세기 이래 대두된 성리학 일변도의 사상적 풍토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상적 방향을 모색하려는 사상적 분위기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것이며, 동시에 다산이 활동한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격변하는 시대적 상황과 이에 따른 새로운 사상적 요구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산이 자기 생애의 후반을 실학에 관한 많은 저술과 방대한 경학 관계 저술에 몰두한 것은, 바로 그의 실학과 경학이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하나의 공통적인 성격을 지니면서 ‘다산학’을 형성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다산학’의 형성에, 또 그의 실학과 경학의 표리 관계에 대해서도 엄밀히 말한다면 그의 경학이 토대가 되어 있다. 다산이 현실에 눈을 돌려 현실 개혁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한 그의 대표적 실학 저술이 ‘일표이서(一表二書)’라고 하면, 그의 이러한 실학적 저술이 있기까지 사상적으로 그의 독창적인 경학의 세계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그의 모든 저작물의 저술 연대에서 볼 때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그에게는 유교경전을 해석한 경학에 관한 저술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 ‘일표이서’의 저술이 나온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가 쓴『가계(家誡)』에,
대개 책을 저술하는 법은 경적이 종(宗)이 되고, 그 다음은 경세제민의 학문이어야 하며, 외적을 막을 수 있는 관방(關防)이나 기구 같은 것을 마련하는 것도 또한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된다.
라고 한 글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다산학’은 그의 경학과 실학이 전후 표리의 연관 선상에서 검토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산의 경학에 관한 저술 가운데『논어고금주』를 중심으로 그의 경전주석세계(經典註釋世界)의 성향에 대하여 고증적 관점을 중심으로 일 단면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또한, 이 연구에서는 하나의 시대적 전환기를 살았던 지식인으로서 다산이 자신의 경학적 저술의 하나인『논어고금주』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의 실학적, 실증적 경학세계를 개진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 것이『논어집주』에서 나타나고 있는 청유(淸儒)의 고증학과 정ㆍ주(程ㆍ朱)의 경학과는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를 분석, 검토하고자 한다.
Ⅱ. 다산 경학의 고증학 수용태도
청학은 송명이학의 주관적, 관념적, 신비적인 구학풍에 대응하여 객관적, 실증적, 합리적인 신학풍아래 ‘복고’를 표방하며 전개된 이른바 고증학이라고 통칭되는 청대 학술을 말한다. 이러한 고증학은 일반적으로 고염무로부터 시작된다. 고증학의 특색은 첫째 그 연구방법이 귀납적이고 과학적이라는 것이며, 둘째 옛날 학자들의 학설을 답습하는데 그치지 않고 독창적 주장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며, 셋째 치용(致用)의 정신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고증학은 고염무에 의해 창도된 이후 혜동(惠棟), 대진(戴震), 단옥재(段玉裁), 왕염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 완원(阮元) 등에 의해 발전되었다. 정통파의 학풍은 스스로 자신의 주지만을 고수하여 고증을 위하여 고증하였고 경학을 위하여 경학을 하였는데, 그 특색은 대략 ① 하나의 뜻을 확립하는 것은 반드시 증거에 의함, ② 옛 것을 숭상하여 증거를 선택, ③ 하나의 증거로써 정설을 삼지 아니하고 반증주의(反證主義)를 채택, ④ 증거의 은폐나 곡해의 금지, ⑤ 비교 연구에 의한 법칙 탐색, ⑥ 구설 인용시 반드시 명기, ⑦ 의견이 맞지 않으면 서로 쟁변하여 해결, ⑧ 변쟁의 범위에 대한 정확한 설정과 독실하고 온후한 언어사용, ⑨ 전문적이며 좁고 깊은 연구, ⑩ 문체의 박실하고 간결함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학풍을 스스로 박학(樸學)이라 칭하였으며, 그 학문의 중심은 경학(經學)이었다.
다산이 고증적, 객관적, 과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청학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자기의 소장서를 비롯하여 사전(師傳)의 서(書), 경연시(經筵時) 강(講)했던 서책, 규장각 출입시에 열람한 책, 그와 교유한 학자들로부터 얻은 책들을 통해서 가능했다. 특히 그는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의 이른바 북학파(北學派) 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그들에 의해 전래된 청조문물에 접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입연사행(入燕使行)으로 다녀오면서 가져온 각종서적을 통해 청유(淸儒)의 저술을 바로 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청학의 추향(趨向)과 그 주요학자의 학문적 경향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산이 청대의 어느 학자로부터 어느 정도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저작 중에 인용된 글이 청학과 상관된 곳이 매우 많다는 점, 즉『여유당전서』중에 인용된 청유의 언사와 그들 언사와의 관계가 많은 것으로 보아 그 영향관계를 어느 정도 가늠하여 인정할 수 있다.
다산의『여유당전서』에는 청대학자들이 다수 인용되고 있다. 이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고염무에 관해서는 시문(詩文) 3회, 상서(尙書) 5회, 상례(喪禮) 27 회, 사서(논어고금주) 8회, 법정(法政) 2회 등 모두 45회
(2) 모기령에 관해서는 시문집 4회, 상서 22회, 악서(樂書) 17회, 사서 134회 등 185회
(3) 염약거에 관해서는 상서 153회, 사서 1회, 상례 1회 등 155회
(4) 서건학에 관해서는 시문집 2회, 상례 125회 등 127회
(5) 이광지에 관해서는 오직 역학(易學)에 관해서만 28회
(6) 만사대, 만사동 형제에 관해서는 모두가 상례에 관계된 것으로 만 사대 16회, 만사동 19회
(7) 기타 고미 8회, 요제항(姚際恒) 4회, 황종희, 김성탄(金聖歎) 각 3 회
이외에도 전겸익, 대진, 송감, 안원, 이공, 호위, 주학령, 왕원, 주이준, 고사기, 원매, 우동, 옹방강, 완원, 장연옥, 왕민호 등이 1, 2회씩 언급되고 있다.
위의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다산의 육경사서의 주석 중에 고염무, 염약거, 서건학, 이광지, 만사대 등의 글을 인용하거나 그들의 말과 관계된 구절이 많으며, 그 밖에 옹방강(翁方綱)ㆍ완원(阮元) 등 20여 인의 글이 조금씩 인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산의 육경사서의 저술에 있어서 인용학자의 수는 방대하지만, 청대의 서적을 인용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다산이 청학을 수용하는 태도에 있어서, 그 비평정신과 고증태도에만 청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뿐이지 다산의 많은 저술과 같은 내용에 있어서는 청학의 영향이 미흡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소극적인 원용 또는 피상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저술의 전성기를 학계와 소원(疏遠)된 유배지에서 보낸 탓으로 새로 전래되던 청학을 직접 접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산은 고증학의 학문방법인 합리적, 실증적 태도에 적극적인 수용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의 청학에 대한 주석방법론적인 측면에서의 수용태도는 육경사서를 저술함에 있어 취하고 있는 引證 방법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대학공의(大學公議)』에서는「인증(引證)」,「고정(考訂)」,「답난(答難)」으로 고증의 기초로 삼고「안(案)」,「의(議)」로써 자기 판단을 서술하고 있다.『맹자요의(孟子要議)』에서는「인증」,「고이(考異)」의 고증학적 방법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의 저서 중 가장 방대한 저서인『논어고금주』에서는「인증」,「질의」,「고이」난(欄)을 통해 원의(原義)를 변석하고 있으며,「보왈(補曰)」,「박왈(駁曰)」이라 하여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또한『상서고훈』과『매씨서평』에서는「고정」,「고이」,「고증」,「고변(考辨)」,「정왈(訂曰)」등의 난을 통하여 고증하고 있다.『매씨서평』중에는「수집(蒐輯)」,「의거(依據)」,「표취(剽取)」「표절(剽竊) 」,「변란(變亂)」,「답습(踏襲)」,「오루(誤漏)」,「수식(修飾)」,「수연(蒐衍)」,「유의(謬義)」,「수개(蒐改)」,「수환(蒐換)」,「할열(割裂)」,「표습(剽襲)」,「고복(考覆)」,「오용(誤用)」,「수취(蒐取)」,「방표(旁剽)」,「수증(蒐增)」,「원안(吲安)」,「증오(證誤)」,「표개(剽改)」,「고이(考異)」,「산고(散考)」등의 난에서 선유지설(先儒之說)을 인용하여 진정한 경의(經義)의 탐구를 위하여 고증을 통하여 변위(辨僞)하고 있다.
요컨대 다산이 한위 이래로 모든 선유들의 경전주석서를 고증하여 경전의 고의나 원의를 밝히는 것을 경학연구의 목표로 삼았듯이, 청학수용에 있어서도 선택적이며,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는 곧 비록 청대의 고증학적 방법론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청학의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 반드시 동의하고 있지는 않다는 다산의 고증학 수용태도라고 하겠다.
Ⅲ.『논어고금주』의 체재(體裁)
『논어고금주』는 전 40권으로 다산이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때의 저술이다.『연보』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나이 52세가 되던 해인 1813년 겨울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대체로 초고의 완성은 이 시기라고 하겠으나, 현존하는『논어고금주』를 살펴보면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다산 자신과 그 제자 또는 후학들의 수정ㆍ보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산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36년 신조선사에서 간행한『여유당전서』에는 제2집 경집(經集) 제7권에서 제16권까지가『논어고금주』인데, 전 10권으로 편집하여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앞서 나온 필사본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여유당집』에는『논어고금주』가 전 40권으로 되어 있어 다산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의 권수와 일치한다.
『논어고금주』는 다산의 경학 관계 저술 중에서도 가장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저술이다. 그는『논어』에 관한 고금의 주석을 모아 수록하여 선유들의 해석을 검토ㆍ비판하고 이에 자신의 창의적인 경전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그 체제부터 살펴보면, 권두에<원의총괄(原義總括)>이라 하여『논어』 총 482장(주자의 분장임) 가운데 175장을 뽑아서 열거하고 이에 대해 논변한다고 되어 있다.『사암연보(俟菴年譜)』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논어』에 대해서는 이의(異議)가 워낙 많아<원의총괄>을 두었다.「학이」편에서부터「요왈」편까지 원의를 총괄한 것이 175則이 되는데, 이것은 다 만 그 대강만 들었을 뿐이다.
다산은 당초부터 실로『논어』전편에 대해 기본적으로 새로운 주석을 의도하였고, 특히 175장에 대해서는 그의 실학과 관련해서 경학의 창의적인 실학적 세계관을 전개하고 있다.
다산은『논어』20편을 종래 주자가 482장으로 분장한 것을 488장으로 분장하고,<향당(鄕黨)>편도 구설(舊說)에는 1장을 나누어 17절로 했던 것을 34절로 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논어고금주』에 수록한 고주(古註)와 금주(今註)는 많은 고금의 주석을 수집ㆍ열람하고 취사선택하여, 그 가운데 고주로서 대표가 될 만한 것으로 3세기 중엽에 한ㆍ위의 대표적인 논어학자 공안국ㆍ포함ㆍ마륭(馬融)ㆍ정현ㆍ왕숙ㆍ진군ㆍ주생렬 등의 고주를 모아 위(魏)의 하안(何晏; 190-249)이 자신의 견해를 첨가하여 주석한『논어집해(論語集解)』와 양(梁) 황간(皇侃; 488-545)의『논어의소(論語義疏)』와 송(宋) 형병(邢昺; 932-1010)의『논어정의』에 나오는 주석을 고주의 대표로 수록했다.
그리고 금주로서는 주자의『논어집주』에 나오는 주석과 그 가운데도 주자의 주석을 주로 수록하였다. 이밖에도 많은 학자가『논어』에 관해 언급한 글을 광범하게 수집ㆍ논평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명대의 사상가 이탁오(李卓吾; 1527-1602)의『분서(焚書)』와『사서평(四書評)』에 나오는 글을 7곳에 인용하여 논평하였고, 청대 고증학의 개조인 고염무(1613- 1682)의『일지록』등에 나오는 글을 7곳, 모기령(1623-1716)의 경집에 나오는 주석을 62곳에 수록ㆍ논평하였다. 특히 다산의 진취적이고 폭넓은 학문 수용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미쳐서,『논어고금주』에는 일본의 고학파 이등유정(伊藤維楨; 1627-1705), 호(號) 인재(仁齋)의 『논어고의(論語古義)』를 2곳, 적생쌍송(荻生雙松; 1666-1728), 호(號) 조래(徂徠)의『논어징(論語徵)』을 43곳, 태재순(太宰純; 1680-1747), 호(號) 춘대(春臺)의『논어고훈외전(論語古訓外傳)』을 무려 112곳에 수록 하여 논평하고 있다.
다산은 이와 같이 많은 주석 자료를 수집하여 수록한 후에, 이에 대하여 시시비비를 가려 ‘보왈(補曰)’ ‘박왈(駁曰)’ ‘용안(鏞案)’ ‘질의(質疑)’ 등의 형식을 설정하여 논평과 반박 및 자기의 견해 제시 등을 통해 그가 지향하고자 한 새로운 경전 세계를 확립하였는데, 이것은 고주의 세계도 아니며, 금주의 세계도 아니다. 그는 고주와 금주를 동시에 비판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유(漢儒)는 경(經)을 주석하면서 옛것을 상고함을 法으로 삼았으나 명변(明辨)이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참위사설(讖緯邪說)까지도 함께 수록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학이불사(學而不思)’의 폐단이요. 후유(後儒)는 경을 해석하면서 궁리하는 것을 주로 삼고 고거(考據)함에는 소원(疏遠)하였다. 그래서 제도 명물(名物)에는 어긋남이 있었으니, 이는 ‘사이불학(思而不學)’의 폐단이다.
이는 다산이 한유의 신비주의적 경향과 송유의 관념주의적 경향을 지양하고 그 새로운 경전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다. 그의 새로운 경전 세계는 ‘수사학(공맹지학)’으로의 회귀가 아니며, 현실에 바탕을 둔 합리적이고 실학적(實學的)인 세계의 지향이다. 다산 경학의 일련의 경향은 당시의 정치적ㆍ사회적 여건에 비판의 합리성을 수반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므로, 경전 주석의 곳곳에서, 특히 성리학적 주석에 대해 ‘수사(洙泗)의 구(舊)가 아니다’위의 책, 2,『중용자잠(中庸自箴)』권1, 46쪽, “비수사지구(非洙泗之舊).”위의 책, 2,『中庸自箴』권1, 46쪽, “非洙泗之舊.”라든지 ‘수사의 논(論)과는 어긋난다.’ 라든지 ‘고경(古經)에는 결코 이런 말이 없다’라면서 공맹을 비롯한 옛 성현의 권위를 빌려 중세적 관념론을 부정함으로 써 실증ㆍ실용이라는 새로운 입장에서 자기의 독자적인 경전 세계를 재창조한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