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6일 토요일
추억지키기
ㅡ김탁환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마루에 가방을 던지고 부리나케 달려간 곳은 마래산 밑 밭이다. 분명 엄마가 계실 것이다. 아직 파릇한 보리밭 귀퉁이에서 채소들을 새로 심을 두덕을 갈무리하고 계실 것이다. 나도 하겠다고 호미며 곡괭이를 쳐들지만 이내 힘이 딸려 밭가에 앉기 일쑤다. 고추며 상추며 쑥갓이 곧 자리를 잡을 것이다. 언덕엔 호박도 입택을 할 것이다. 보리를 베는 날은 손 빠른 동네 농꾼들이 모여 하하호호 즐거운 한나절을 보리를베고, 감자 넣은 갈치조림으로 두둑해진 배에 막걸리도 한잔 씩 걸칠 것이다. 그 터에 곧 콩이 부쩍부쩍 자라고 엄마는 땡볕에 김 매느라 바쁠 것이다. 나는 언덕 터주대감 뽕나무 오디를 옴싹옴싹 입에 털어넣으며 조단조단 풀이름도 물어가며 그것들이 뽑혀져 나가는 걸 안타까워했다. 나는 풍년대(개망초)로 혼자 빠끔살이를 하고 쇠비름 연노랑꽃도 어루만졌다. 저녁 어스름이 서서히 그림자를 길게 깔아줄 때. 감꽃을 밟으며 마을로 내려오곤 했다. 나는 김준태 시인의 '감꽃' 이라는 시가 짧고 간결하고 깊이가 있어서 참 좋아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이때 추억이 큰 작용을 한 것 같다.
여름이 한창 무르익을 때는 옥수수가 손을 내밀어 주었고, 언니 친구들은 아직 밑이 들지 않은 고구마를 뒤적이곤 했다. 그즈음 저녁마다 집 앞 와상에서 고구마순을 벗기는 일로 분주했다. 다음 날 아침 역전 시장에 팔로 나가야 했기에 마을 아낙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그때 엄마는 파는 일에 서툴렀고 한쪽 손이 없는 옥배아짐이 대신 팔아주었다. 공장에 다니다가 손을 잃은 아짐이었다.
호박죽 쑤기에 적당한 호박이 삐죽삐죽 얼굴을 내밀때 늦은 호박잎과 아직 조그맣게 달린 어린 호박으로 된장국을 끓여주시던 요리사 엄마. 깊은 가을 고구마를 캐던 날도 동료 농부들이 도왔고, 얼큰한 우럭 매운탕에 어김없이 막걸리가 후식으로 얹어졌다. 그날 나는 대야에 가득 담긴 고구마를 동네사람 집에 이어다 주는 일로 늦은 저녁까지 보내야 했다. 방 윗목엔 고구마 뒤주가 턱하니 자리잡었다. 겨울 내 점심을 책임질 소중한 녀석들이었다. 겨울이 끝나갈 즈음 남은 녀석들은 시내 튀김집으로 팔려가고, 무강에서 순이 나오고 고구마순으로 무침, 찌개깔개, 김치로도 톡톡히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나는 가을을 거두고 나면 같이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알아가고 감동하곤 했다. 고구마를 남기없이 싹 캐지 않는다. 두어 도랑은 큰 것만 캐고 작은 것은 남긴다. 배추를 캘 때도 고추를 딸 때도 모르고 흘린 것처럼 놔 둔다. 나는 궁금했다. 마을 사람 중 밭이 없는 조금 짠한 사람들더러 캐먹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밭 가진 사람 대부분이 그런다는 걸 나는 뒤늦게 알았다.
지금 나는 한 평 남짓되는 텃밭을 가지고 있다. 딸기, 고추, 쑥갓, 상추, 토마토, 가지. 인디언감자. 파프리카~ 생각만 해도 오지다. 언덕에는 호박과 머위로 그득하다. 더운 날이 계속되어도 풍년이었다. 넓지는 않아도 그만해도 부자다. 호박, 고추, 토마토, 소불, 가지는 많아서 이웃과 나눠먹었다.
나는 이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다. 지금은 엑스포 때문에 어릴 적 우리밭에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잊을 수없는 아름다운 추억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도시소설가 김탁환씨가 일본 규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미생물 연구자이자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농부, 농부과학자, 미실란의 대표 이동현씨를 만나 우정을 나누는 과정이 나와 있다.
이 책은 곡성에 있는 밥카페 '飯하다' 에 우연히 들른 직가가 거기 밥맛에 깜짝 놀라서 싹뜬 이야기다. 농부 이동현에 반한 작가 김탁환과 그 김탁환에게 함께 반한 이동현의 특별한 교감기(交感記) 다.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고립되어 홀로 상처를 입는다면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이 벽이 어디 한두 개에 그치겠는가. 역설적이게도 나만 벽에 부딪히진 않았다는 확인과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함께 덤벼들 수 있다는 깨달음이 묘한 위안과 힘을 주기도 한다. 작가가 그런 사람으로 찾은 이동현 대표.
그는 미치오교수가 주신 세 가지 지침이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연구하라! 교육하라! 봉사하라!
이 대표가 농부로 살아야겠다는 것은, 새벽녘 어둠이 채 사라지지 않은 들로 나가고 저물녘 노을이 깔린 들에서 돌아오는 기쁨과 안타까움과 쓰라림을 가슴에 품고 하루하루를 살겠다는 다짐이다. 산을 옮긴 어리석은 늙은이 우공이 하루하루와 다르지 않다.
농부 이동현대표가 운영하는 농업회사 법인 미실란!
다르다고 물리치지 않고 느리다고 타박하지 않고 어리다고 얕보지 않고 늙었다고 무시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 저마다 걸어온 삶거대해지기를 꿈꾸지 않는다. 결실을 꿈꾸되 가을까지 땀 흘려 일한 만큼만 갖는다. 다 갖지 않고 직원과 이웃과 동식물과 나눈다. 거대한 존재를 만나더라도 주눅들지 않는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미실란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꾸린다. 손 내밀 사람을 찾고 내민 손을 기꺼이 잡는다. 따스하다.
작가 김탁환이 이동현 농부에게 반한 것은 특별히 논 사람(벼) , 우렁이, 물뱀, 참새와 대화하는실재상황인 것이다. 그는 김탁환에게 곡성 들판 곳곳에서 '아름답지요?' 질문을 자주한다. 우리가 미처 알지못한 아름다움, 압도적이어서 말을 잃게 만드는 아름다움이 거기 있었던 같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은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쏟았고 쏟고 있으며 쏟으려하는가. 얼마나 자주 소중함을 되새기며 새로운 다짐을 보태는가. 세상 풍파가 거셀수록 내 살의 중심으로 돌아와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은 나도 내마음의 오가리를 열고 씨나락을 품어야겠댜고 작가는 맹세한다
나는 미실란에서 어린이 체험학습을 통해 모내기도 배우고 우렁이도 만져보고 메뚜기도 잡으면서 함께 사는 동식물과 교감하게 하는 게 참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봄 가을로 정기적으로 음악회를 열어 지역 주민과 하나가 되는 계기를 자주 갖는다는 게 놀랍기만하다. 작가는 음악을 들으면 사람들에게 얼마 전에 들었는데 기뻤다라고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그 역할을 다한다고 믿는다. 복음이란 것은 만남 속에 있는 것으로 그 밖에는 없다고 강조한다.
끝으로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숫자가 아니라 내용이다, 돈이나 명예는 수단이며 더 중요한 가치는 행복인 것이다라고 맺는다. 나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가. 또 내가 사는 마을은 어떤 마을은 어떤 마을이 되어야 마을 사람들 모두 행복할까~~
프란치스코 교황도, 무위당 장일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저자)도 연암 박지원도 나락 한 알에서 우주를 발견했다. 사람에 따라 장소에 따라 감조하는 부분은 달랐지만, 항상 나와 세계의 연결을 전제로 두었다. 나의 고통이고 만인의 고통이다. 나의 아름다움이고 우리의 아름다움이고 만인의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운 고통이고 고통스러운 아름다우이다. 교실바닥의 아름다움을 지키듯 곡성이 아름다움을 지키듯 지구의 아름다움을 지켜온 사람의 걸음에 내 걸음을 맞춰 적정하게 걷고 싶다. 길은 또다시 시작이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아름다운 경험을 했다. 곡성이라는 자그마한 고장을 세세하게 알았고 미실란의 창창한 미래를 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글쓰기와 농부 이동현의 작지만 탄턴한 남은 생도 밝고 아름답다는 생각에 젖었다. 한가지 덤은 내가 미실란표 발아현미를 샀다는것이다. 발아현미누릉지도 두 개 보너스로 받았다. 고소하고 찰진 현미밥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