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달레이는 미얀마의 실질적인 제2의 도시다. 양곤이 가장 큰 도시이고,
그 다음이 만달레이이다. 이 도시는 버마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였다.
만달레이는 1857년 2월 13일에 민돈 왕이 만달레이 언덕 기슭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면서
세워졌다. 새로운 수도의 면적은 66km²였고 4개의 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413헥타르 면적의 성은 2,032m 길이의 성벽과 너비 64m, 깊이 4.57m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벽을 따라 169m 간격으로 감시를 위한 금빛 물부리가 달린 포탑이 서있었다.
각각의 방향으로 3개의 문과 해자를 건너는 5개의 다리가 있었다.
1857년 6월에 옛 아마라푸라의 궁전은 해체되어 코끼리를 통해 만달레이 언덕의 새로운 위치로
이전되었고 2년 후인 1859년 5월 23일에 완공되었다.
26년 후인 1885년 11월 28일,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의 패배로 미얀마가 영국령 인도에
병합됨에 따라 만달레이는 왕조 시대의 최후의 수도가 되었다.(이상 위키백과)
1885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과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으면서도 만달레이는
미얀마의 문화와 교육,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943년부터 만달레이 성을 접수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궁궐 내에 병참 기지를 만들어
운영하였으며,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만달레이 성의 건물은 대부분은 소실되고 말았다.
미얀마 군부에 의해 일부 복원이 되었으나 기둥 위에 양철 지붕을 씌운 그야말로 껍데기만
되살려놓은 형상이라 보는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성에는 지금도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성에 들어가려면 외국인의 경우 오로지
동쪽 성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하고, 여권을 통한 신분 확인을 군인들로부터 받아야 한다.
만달레이 시내는 1980년대 두 차례의 대형 화재로 도시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으며,
이 때 중국의 윈난(운남)성에서 중국인들이 대거 유입, 현재 만달레이 인구의 30~4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인 유입 또한 미얀마 군부가
도시 재건을 이유로 용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미얀마는 군부가 통치를 시작한 1962년 이전까지만 해도
동남아의 최대 부국이었다. 1962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60년 가까운 세월을 독재를 하면서 미얀마를 동남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대체로 국민들은 정치를 모른다. 그래서 위정자는 선정 아니면 악정을 하게 마련이다.
선정이란 국민을 위한 정치이고, 악정이란 국민보다는 자신의 영달을 먼저 챙기는 정치를 말한다. 둘 사이의 차이는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극명한 것이다.
오늘날의 만달레이는 인구 100만 명이 살고 있는 약간은 복잡한 도시이다.
시내 간선 도로는 하루 종일 교통 체증이 계속된다. 동남아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오토바이, 차 등이 뒤엉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교통사고의 위험이 높다.
이곳 날씨는 특이하게도 남쪽으로 약 300km 떨어져 있는 수도 네피도보다 덥고 습하다.
다른 지역의 우기는 6월 말로 끝나지만 만달레이는 9월까지 스콜성 비가 내린다.
골프에 대한 열정과 동경심이 가득했던 일행은 낮 12시 반 무렵 공항에서 내리자
공항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몽몽(묘띠하)의 차에 올라 호텔로 갔다.
미얀마는 렌트카 시장이 아직 형성되지 않아 차를 빌리려면 지인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여장을 풀자마자 골프장을 찾아 나섰다. 시간 상 9홀 이상을 돌 수가 없어서
만달레이 성 북쪽에 있는 쉐 만 타웅 골프 리조트로 갔다.
만달레이 힐(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이 골프장은 올 1월만 해도 9홀만 개장되어 있었고,
나머지 9홀은 공사중이었는데 18홀이 완성된 모양이다. 그런데 그린피 등 경비가 예사롭지 않다.
9홀에 무려 41$이다. 그린피, 캐디피, 트레일러(캐디백용 수레)를 포함한 가격이라
국내보다야 싸긴하지만 이 나라 물가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외국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 가격으로 골프를 즐길 미얀마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운트의 아가씨는 올드 코스로 할 건지, 뉴 코스로 돌건지를 선택하라고 했다.
올드 코스에는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뉴 코스로 들어갔다.
이 골프장은 페어웨이며 그린이 비교적 잘 관리되어 있었고 전장이 그리 길지 않아 걸어서
돌기에도 별 무리가 없었다. 단 전통의학대학교 쪽 길에 인접한 한 코스에는 도로 쪽으로
공이 날아갈 것에 대비한 그물 등 차단 시설이 쳐져 있지 않아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동반자 중 한 명이 차가 다니는 길 쪽으로 볼을 보냈는데(골프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고의는 절대로 아님) 다행히 그 순간에는 차가 없었다. 휴~.
라운딩 후 호텔로 돌아오면서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을 하다가 오션슈퍼센터로 갔다.
오션슈퍼센타는 우리나라의 이마트나 롯데마트, 홈플러스와 같은 미얀마에서 가장 많은
체인을 갖고 있는 대형할인매장이다. 이 매장 안에 미얀마에 진출해 있는
한국 식당 중 허즈(Her's)가 그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피도의 오션 센터에는 허즈가 있다. 그러나 만달레이에는 없었다. 롯데리아가 있었지만 그곳은 우리 늙은이들의 취향은 아니고.
그냥 술 몇 병을 사들고 나왔다. 기실 미얀마는 주세가 없어서 술값이 엄청 싸다.
특히 위스키, 럼, 진 같은 소위 양주는 우리의 소주값 정도 밖에 하지 않는다.
호텔로 가면서 적당한 식당을 찾아보자고 무작정 길을 가다가 우연히 눈에 띈 Korean BBQ.
차를 급정거시키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 쳐들어가다시피 해서 식당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가장자리에 양념 국물이 있고 거기에 각종 야채를 담궈 삶으면서 동시에 볼록 솟은 가운데에
고기를 얹어 구워먹는 방식이다. 이게 한국식인지는 나도 확신하지 못하겠는데 어쨋든
식당 안에는 한국인이라고는 우리 일행 밖에 없고 나머지는 죄다 미얀마인이었다.
허기 때문에 맛있게 먹었다. 사들고 간 럼주며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뒷꼭지가 개운하지 못했다.
우리나라 식당에서 술을 가져가서 마셔봐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러나 미얀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잔까지 챙겨주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식당에서 파는 술값과 슈퍼에서 파는 값이
거의 같거나 비슷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자격지심에 맥주 한 병 시켜 먹었다.
만달레이는 버마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였으며, 이후 1885년부터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60년 가까운 식민지 생활을 거친 끝에 2차 대전 중에서는 일본에게 점령당했다.
그래서인지 외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도시 구획이다. 거리의 이름을 무슨 동 하는 식이 아닌 차례대로
번호를 붙여서 몇 번가 하는 식으로 부른다. 이를테면 오션슈퍼센터는 73번가에 있다.
골프장이 많은 것도 한 예가 아닌가 싶다.
만달레이에는 기존의 3개 골프장(만달레이 성 안에 있는 군인 전용 골프장 제외) 외에
최근 또 하나의 골프장이 생겼다고 한다.
우리가 묵었던 A1호텔에서 본 83번가, 호텔은 32번가와 만나는 지점에 있다.
군데군데 많은 고층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었으나 비계가 대나무로 되어 있어 안전상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만달레이 이틀 째는 오전부터 골프장을 찾아 나섰다.
만달레이 공대 근처에 골프장이 있다는 사실을 구글 지도에서 발견하고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구글 지도에서 예다군타웅(Yedaguntaung) 골프장 클럽으로 목적지 검색을 한 다음
'몽몽 고고!'(몽몽은 운전 기사 이름).
시내를 벗어나자 갑자기 좁은 1차선 도로가 나온다. 시골 냄새가 물씬 난다.
이런 길로 골프장에 간다고? 이건 아닌데, 골프장 진입로는 대체로 아주 잘 닦여져 있는데
무슨 골프장이 이래? 일행은 쉴새없이 중얼거리면서 흔들리는 몸을 가누기 바빴다.
결국 목적지 예다군타웅 골프클럽에 도착하긴 했다. 그런데 이해가 안되는 문제가 생겼다.
그린피를 미얀마 돈으로 달라고 했다. 우리에겐 달러 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왜 달러는 안되냐고 물으니 그냥 안된다고 했다. 짯이 없어 공을 못치게 생겼다고 했더니
그건 너네 문제야 하는 식이다. 굴러들어오는 돈을 왜 마다하는 건지...
사실 우리는 환율도 모르고 미얀마에 갔다. 지난 1월에 1달러 당 1,300짯으로
환전했던 기억 밖에는. 어쨋든 환차액을 노렸으면 은행 다녀올 오토바이 기름값은
충분히 벌고도 남았을 터인데, 안되는 것은 안되는 나라라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이 바보들, 은행가면 1달러에 1,440짯(미얀마 화폐 단위)으로 바꿔준다.
우리에게는 1,300짯만 쳐주면 되고... 쩝.)
예다군타웅 골프장 요금표
외국인의 경우 18홀 그린피 31,500짯, 카트 역시 31,500짯, 캐디팁 1만 짯 계 73,000짯.
카트 대신 걸으면 트롤리값 2,000짯을 부담하면 되니까 1인당 43,500짯이면 된다.
참고로 미얀마 골프장은 인근의 다른 나라처럼 카트를 타고 페어웨이를 마음대로 휘젖고
다닐 수가 없다. 대부분의 미얀마 골프장이 그렇다.
미얀마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무시브(No, 없다의 뜻)라니 저들의 경제적 궁핍의
한 이유를 알만 했다. 이날의 골프장은 어제의 그 골프장, 18홀에 82$을 주었다.
이 골프장은 달러를 냉큼냉큼 잘 받았다. 물론 환 차액도 챙겼을 테고.
어쨋든 비싼 쉐만타웅 골프장에서 1인당 130$ 도합 650$이란 거금을 쓰는 바람에
나머지 여정에서 마음을 졸여야 했다.
골프 라운드를 마치고 오후에 우베인 다리로 갔다. 일행 중 한 사람은 과음과 피로로
넉다운이 되어 호텔에 남고, 씩씩한 네 명만 나섰다. 호텔 카운터에서 일몰 시간이
6시 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4시 반에 호텔을 출발, 차가 많이 밀렸지만
다행히 해가 하늘에 걸려 있는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많이 끼여 있었고
호수의 물은 다리의 다리를 3/4이상 삼키고 있었다. 지난 겨울의 건기와는
달리 발 바로 아래에 물이 출렁대는 150년짜리, 1.2km 길이의 목재 다리를 왕복했다.
미얀마 사람들은 동남아에서도 가장 혹독하게 한류에 물들어 있는 듯 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밍글라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면
'안녕하세요?'라는 응대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특유의 해맑은 미소는
무뚝뚝함에 젖어 있는 한국 사람의 간을 빼놓는다.
미얀마의 석양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공기 오염이 되지 않은 탓일 것이다.
다리 위에서 만난 이 아가씨들은 한국어를 아주 유창하게 했다.
어디서 배웠냐니까 드라마 보고 배웠단다. 이 사진 찍고 '잘 가!' 했는데
얼마 안가서 쪼르르 달려와서 이렇게 손가락 포즈를 요구한다.
'아저씨는 이렇게 E, 아저씨는 이렇게 X, 또 아저씨는 요렇게 O',
그리고 나보고는 '아저씨는 이렇게 ♡(스몰 하트)'
저들 폰으로 사진을 찍고는 안녕히 가세요 하고는 가버린다. 명랑한 녀석들.
페북 아이디나 따둘 걸...
석양을 찍기 위해 배를 대절한 사람들도 꽤 많다.
그러고보니 그 사람들이 들고 있는 카메라는 제법 있어(?) 보인다.
다리 양안에는 무수한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들이 있다.
우리 일행은 짜욱도지 파고다 쪽 호숫가에 있는 야자수나무 지붕의 레스토랑에서
볶음밥과 맥주를 시켜 먹었다. 미얀마의 음식값은 상대적으로 비싼 맥주값을
포함해서 5명이 먹고도 2만짯 남짓이면 해결되었다.
휴양도시 핀우린(Pyin Oo Lwin)이다
핀우린에는 사관학교가 있고, 국립 깐도지 정원이 있다.
여름이라도 최고 기온이 30도를 잘 넘지 않는다. 여름에 미얀마에서 지내기에 이보다
좋은 도시는 없을 것 같다.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도 이곳의 좋은 기후를 알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여름이면 뜨거운 만달레이를 떠나 이곳에 정부를 옮기고 업무를 봤다.
당시의 경비사령관이던 제이 메이의 성을 따고 도시란 의미의 묘를 붙여
메이 묘(May Myo)라고 불렀다. 그후 미얀마 군부는 핀우린으로 개칭했다.
해발 1,070미터(3,510ft) 고지이며, 만달레이에서 동북쪽으로 67km 떨어져 있다.
핀우린으로 가는 길은 해발 70미터인 만달레이에서 거의 1,000미터를 지그재그로 수직 상승한다. 길은 당연히 험하다.
핀우린에는 2개의 골프장이 있는데 하나는 군인들 몫인 모양이다.
정보를 찾아봐도 당췌 나오질 않는다.
사관학교가 있으니 당연히 사관학교에 속하는 골프장이 있을 터.
핀우린 골프클럽은 작년에 한번 들렀다 그냥 나왔던 기억이 있다.
당시는 아침에다 안개가 끼여 있었고, 잔디가 열대지방 특유의 잎이 아주 크고 질진 소위
떡잔디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통과할 상황이 아니다.
요금 계산대에 갔더니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담당 아가씨가 영어를 할 줄 모른다.
말이 안통하니 우리 일행은 못본 척하고 미얀마인들만 계산 처리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다행히 잘 생기고 젊은 한 미얀마인이 우리를 동시 통역으로 도와주었다.
그린피, 캐디피, 트레일러, 볼 캐디 피 등 몽땅 다 합쳐 믿을 수 없는 가격을 제시했다.
1인당 20,000짯 즉, 2만원도 안되는 금액이었다. 오호! 통쾌! 상쾌!
골프장은 전장이 아주 길었다. 좌우로 정글같은 숲이 있어서 그곳으로 들어가면 OB 설정이 안되어 있어도 그냥 언플레이어블 선언하고 벌타 받고 나오는 것이 현명했다. 잔디도 보통 잔디에 간간이 떡잔디가 섞여있는 정도로 경기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가성비가 아주 우수한 골프장이었다.
이튿날도 그 골프장에 가서 한 나절을 신나게 보냈다.
핀우린에는 명소가 있다. 그 곳은 바로 국립 깐도지 정원! 엄청나게 넓은 정원이다. 호수가 있고, 숲이 있고 나비, 화석 박물관이 있다.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으며, 가지각색의 꽃들이 잘 가꾸어져 있고 호수에는 백조가 노닐고 있다. 이 정원 역시 영국인들의 쉼터로 조성된 것이다.
핀우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략 10만 명 가량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는 인도인, 방글라데시인, 중국인이 아주 많다. 인도인, 방글라데시인은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이 차출해왔던 사람들이고, 중국인은 최근에 유입되어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핀우린에 있는 또 하나의 명소, 닷토 짜잇 폭포다.
핀우린 쪽에서 흘러온 물이 갑자기 푹 파인 협곡을 만나 막무가내로 떨어지는 폭포다. 한 번도 아니고 대략 여섯 번 쯤 내동댕이쳐지는 물줄기다.
네피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관광 인프라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다운타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도시는 공무원과 군인들을 위한 도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도 우리 일행에게는 유일한 즐길거리 골프가 있다.
우리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골프를 했다.
이 골프장은 핀우린 만큼은 아니지만 가성비가 좋다. 그린피 28불, 캐디피 1만짯,
트레일러 2천 짯 해서 약 4만원이면 18홀을 즐길 수 있다.
페어웨이와 그린의 관리 상태는 최상이다. 캐디는 1인 1캐디, 볼을 봐주는 캐디가 따로 있다.
핀마나에서 동쪽으로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군사, 대학의 도시 예진이 나온다.
군사 지역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어서 그냥 창밖으로만 보고 지나친다.
큰 연병장이 있고, 위엄이 있어보이는 건물들이 띄엄띄엄 눈에 들어온다.
여기는 예진농대, 예진임업대, 예진수의대 등 세 개의 대학이 붙어 있는 곳이다.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젊은이들의 차림새부터가 상큼하다.
예진에서의 목적지이다. 무슨 잡초밭 같지 않은가? 논인가 싶기도 하고...
어쨋든 여기는 골프장이다. 페어웨이는 헤비 러프가 되어 있었다.
입장료가 3,000짯에서 2,000짯으로 내린 이유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렸다.
세 홀 쯤 치다가 돌아나왔다. 당췌 공을 치면 그 공은 다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냐고? 이걸 골프장이라고 돈받고 치게 하느냐? 총무는 골이 났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부수입원이 이 골프장이었는데 이제 더 이상 부수입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여러운 마음이 들었든지 안마를 해준다.
1,000짯이라도 벌어야 하는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