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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 시복 추진
제1차 심포지엄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의 생애와 조선 선교 배경
2023. 12. 2 토요일. 서울대교구청 3층 대회의실 14~18시
제1차 심포지엄 일정
개회사 구요비 주교(시복시성위원회 위원장)
제1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 : 탄생에서 선교사 임명까지
허보록 Philippe BLOT 신부(파리외방전교회 부지부장)
제2주제
시암 대목구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와 조선 선교지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제3주제
조선대목구 설립 전후의 중국 교회 상황
최병욱(강원대학교)
제4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둘러싼 논란 검토
조선교회 구성원들의 입장과 반응을 중심으로
방상근(교회사연구자)
제5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선교 여정과 선종, 유해 이장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종합 토론
좌장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 역사와고문서전문가위원회 위원장)
토론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박광용(가톨릭대학교)
장정란(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폐회사 박선용 신부(시복시성위원회 부위원장)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초대 조선교구장
시복시성 기도문
모든 성인들의 덕행으로 찬미와 영광 받으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성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성인성녀들을 공경하여 그 표양을 본받게
하셨나이다.
조선 선교를 자청한 뒤 온갖 고난과 질병을 극복하면서
오로지 조선에 들어가 선교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온 삶을 봉헌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로에 의지하여 청하오니
저희들이 거룩한 순교정신을 본받아
신망애 향주삼덕에 뿌리를 박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도록 도와주소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로로 저희를 이 세상에서 보호하시며
저희의 마음속 지향을 들어 허락하심으로써
(잠깐 침묵 중에 기도의 지향을 아뢴다.)
당신 권능을 드러내시고 저희가 희망하는 대로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가 복자와 성인들 대열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한국의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2008. 7. 1.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인준
2023. 3. 23.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수정 승인
제5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선교 여정과 선종, 유해 이장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1. 머리말
2. 선교 여정 : 페낭에서 서만자까지
1) 페낭에서 산서 주교관까지의 여정
2) 산서 주교관 요양
3) 달단 여정과 서만자 교우촌 생활
3. 마가자 선종과 유해 이장
1) 서만자 출발과 마가자 선종(1835)
2) 유해 이장(1931)과 원묘비 발견(2006)
4. 맺음말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선교 여정과 선종, 유해 이장
1. 머리말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첫째, 말레이시아의 페낭(Penang)에서 중국 하북성의 서만자(西灣子)까지 이어진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바르톨로메오, 1792~1835) 주교의 조선 선교 여정,
둘째, 1835년 10월 7일 서만자를 출발한 뒤 10월 19일 내몽고 마가자(馬架子) 부락에 도착하여 이튿날 선종하기까지의 내용,
셋째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기해 이루어진 서울로의 유해 이장과 2006년도의 원묘비 발견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체류했던 중국 각지의 교우촌이나 선교 중심지인데, 대부분 기존의 연구들을 통해 정확히 확인되었다.
따라서 본고는 새로운 연구 결과물이 아니라 기존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종합 보고서와 같은 형식으로 이해해 주면 좋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서 남겨놓은 선교 여정 즉 마지막 선교 발자취를 일목요연하게 이해시켜 주고 있다.
둘째, 시복 절차에서 반드시 필요한 하느님의 종과 관련한 현장 검증 즉 묘지,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 사용했던 침실, 경배 장소 등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셋째,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복을 위한 자발적인 기도와 공경 운동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본고에서 가장 기본 자료로 삼은 것은, 개포동 성당의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위원회에서 발간한 다음의 세 가지 자료집이다. ①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이하 『서한집』으로 약칭함), ②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이하 『여행기』로 약칭함), ③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사업의 징검다리 : 현양 사업과 이장기, 그리고 순례길』(이하 『이장기』로 약칭함).1) 아울러 조현범의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원문 대역본으로 발간한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차기진의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자리를 찾아서」, 이길재의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등이 본고를 작성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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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양모·윤종국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 정양모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가톨릭출판사, 2007 ; 천주교 개포동 성당 현양위원회,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사업의 징검다리 : 현양 사업과 이장기, 그리고 순례길』, 천주교 개포동 성당, 2006.
2) 차기진,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자리를 찾아서」, 『가톨릭평화신문』 834~836호, 2005. 8. 14~28 ; 한국교회사연구 소,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동 연구소, 2008 ;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건 체류」, 『마백락 선생 교회사 연구 50주년 기념 논총 ‘발로 쓰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분도출판사, 2011 ;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취를 찾아서 산서를 떠돌다」, 『김성태 신부 고희 기념 논총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문화’』,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 이길재,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16~33」, 『가톨릭평화신문』 1420~1445호(2017. 6. 25~12. 25). 한편 일부 사진 자료들은 옛 개포동 성당 현양위원회(아녜스, 릴리안, 제노비아 자매님)와 평화신문사의 이길재 기자에게서 제공받았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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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교 여정 : 페낭에서 서만자까지
(1832. 8~1835. 10)
1832년 7월에 여행 준비를 마치고 8월 4일 말레이시아 페낭을 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브
뤼기에르 주교의 선교 여정은 서부 달단(韃靼, Tartarie)3) 즉 내몽고의 마가자 교우촌에서 선종하는 1835년 10월 20일까지 3년 2개월여 동안 이어졌다. 이에 앞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을 떠나기 한달 전인 1832년 7월 초에 여행기를 작성하기 시작하였고, 1835년 8월 7일 하북성의 서만자 교우촌을 출발하기 이틀 전에 이를 종결하였다. 3년 1개월여에 걸쳐 작성된 이 여행기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교 여정은 물론 경유지의 교회 상황 특히 복건·절강·산동·산서·하북 지역 천주교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생생한 자료가 된다.
여행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선교 여정은, 첫째, 1832년 8월에서 1833년 10월까지 이어지는 페낭에서 산서성 구급촌(九汲村)에 있는 살베티(Joachim Salvetti,1769~1843)주교관까지의 여정, 둘째, 1833년 10월에서 이듬해 9월까지 계속된 구급촌 주교관에서의 요양 생활, 셋째, 1834년 9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이어지는 달단 여정과 서만자 교우촌에서의 생활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은 데다가 열병으로 인해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 여정은 첫 번 째의 선교 여정, 그중에서도 남경 근처를 출발한 때부터 산서성에 이르는 1833년 7~10월까지의 3개월 동안이었다.
그야말로 시련과 고통의 강물을 건너면서 “힘내자! 오늘은 죽지 말아야지.”4) 하는 다짐을 수없이 되뇌던 시간이었다. 이제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 달 이상 체류하면서 생활하였고,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던 주요 경유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곳에서 이루어진 조치 및 관련 사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페낭에서 산서 주교관까지의 여정(1832. 8~1833. 10)
1832년 7월 25일 시암 대목구의 클레망소(P.J.M. Clémenceau, 1806~1864) 신부에게 뱃삯을 빌려 싱가포르행 배에 승선할 수 있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8월 4일 페낭을 출발했으며,5) 1년 2개월의 여정 끝에 1833년 10월 10일 산서 구급촌의 주교관에 도착하였다. 이때까지 브뤼기에르 주교가 1개월 이상 체류한 지역은 모두 네 곳이다.
① 마카오 포교성성 극동 대표부(63일 혹은 64일간 체류) : 1832년 10월 18일 마카오에 도착하여 12월 19일(혹은 20일) 복건을 향해 출발할 때까지 63일(혹은 64일간) 이곳에 체류하였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이때 주교가 체류한 곳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아니라 포교성성 대표부였고, 그곳 대표는 움피에레스(Raffaele Umpierres, 1823~1837 재임) 신부였다.6) 브뤼기에르 주교가 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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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프랑스 선교사들이 말하는 달단(타타르)은 서쪽으로 만리장성이 지나는 산서성 접경인 하북성 북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요동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그들은 심양(봉천)이 달단의 중심지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요동 지역을 ‘동부 달단’, 심양 서쪽에서 산서성까지를 ‘서부 달단’이라고 불렀다.
4) 「브뤼기에르 주교가 프랑스 에르(Aire) 교구 총대리 부스케(Bousquet) 신부에게 보낸 1835년 9월 28일 자 서한」, 서한집, 341면 ; 여행기, 182면.
5) 여행기, 91~92면. 이때 샤스탕(J. Chastan, 鄭 야고보) 신부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고,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에게 적당한 시기를 기약하였다.
6) 여행기, 108면. 움피에레스 신부는 마르키니(Giambattista Marchini, Battistino, 1786~1823 재임) 신부의 뒤를 이어 마카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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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성성 대표부를 찾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페낭에 있을 때 움피에레스 신부에게서 “조선으로 가고 싶으면 지금 당장 떠나십시오. 주교님의 조선 입국을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7)라는 서한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카오에 도착한 지 3일 만인 1832년 10월 21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의 르그레즈와(Pierre Louis Legrégeois, 1801~1866) 대표 신부로부터8) 포교성성 차관이 보낸 교황 칙서2통(1831년 9월 9일 자) 및 포교성성 차관을 통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베푼 특별 권한(1831년 7월 17일자)을 수령하였다.9)
이어 10월 20일 이후에는 마카오 참사위원 총대리의 요청으로 견진성사 및 서품식을 집전했으며,10) 11월 9일에는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11)에게 서한을 발송하여 “조선대목구의 사목을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해 주도록” 요청하였다.12) 1832년 11월 10일에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신부들에게 서한을 발송하여 “조선 선교 회피 공한의 오류를 12가지로 지적하면서 항의”했고,13)
1832년 11월 23일에는 연락원 왕(Vang, Vam 혹은 Taou) 요셉을 북경으로 파견하면서 남경교구장과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14) 신부에게 전하는 서한 및 첫 번째 사목 서한(1832년 윤9월 26일 작성, 양력 11월 18일)을 조선 교우들에게 발송하였다.15)
이때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과 함께 여행할 선교사들을 만나 함께 다음 행선지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곳은 복건(福建, Fokien)대목구장 스페인 도미니코회의 카르페나 디아즈(R.J. Carpena Díaz, 1760~1849) 주교가 있는 곳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후 디아즈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을 소개하고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생각된다.
② 복안 주교관(58일간 체류) :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12월 19일 혹은 20일 복건대목구장이 보내준 배에 승선하였다. 일행으로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사천 선교사 모방(P. Maubant, 羅 베드로) 신부, 프랑스 라자로회원 라리브(Laribe) 신부, 포르투갈 에보라(Évora) 교구 출신의 강남 선교사인 라자로회원 2명, 산서로 가는 나폴리 교구의 포교성성 선교사인 프란치스코 회원 알퐁소-마리 디 도나토(A.M. di Donato, 1783~1848) 신부였다.16)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이 복건대목구장 디아즈 주교의 주교관에 도착한 것은 1833년 3월 1일이었
다. 그 주교관은 푸간(Fougan) 즉 지금의 복안(현 복건성 宁德市 福安市), 정확히는 복안시 하백석진(下白石鎭) 정두촌(丁頭村)에 있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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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신부가 되었다.
7) 여행기, 82면.
8) 서한집, 166면.
9) 서한집, 155·158면 ; 여행기, 108면. “선교사들의 특별 권한은 선교지에 도착한 날부터 행사할 수 있다.”는 1832년 10월 21일자 부기가 첨부된 특별 권한의 내용은, 서한집, 159~165면 참조.
10) 여행기, 110면.
11) 당시의 포교성성 장관은 Carlo Maria Cardinal Pedicini(1769~1843, 1831~1834 재임)이었다.
12) 서한집, 156~157면.
13) 서한집, 166~182면.
14) 여항덕 신부는 1834년 1월 4일(음력 1833년 11월 25일) 조선에 입국하여 1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가 조선에 입국할 당시에 택한 이름은 유방제(劉方濟)였다.
15) 여행기, 110~111면.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사목 서한의 라틴어 서한은, 서한집, 183~184면을 참조. 한편 당시 북경에 머물고 있던 남경교구장 가예타니 피레스 페레이라(Cajetani Pires Pereira, 1763~1838) 주교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서는 조선대목구장 임명소식과 조선 향발 여정 등을 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16) 여행기, 1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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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 3월 9일에는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를 찾아와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4월 3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총대리 신부의 초대를 받아 복안 신학교를 방문하였고, 부활절에는 신자들과 함께 장엄 미사를 봉헌 하였다.18) 한편 「모방 신부가 파리 신학교 지도자들에게 보낸 1833년 6
월 14일 자 서한」에 따르면, 서한 작성지였던 복건 신학교가 위치한 곳이‘케젠(Kesen)’으로 나오는데, 이곳은 지금의 복안시 계담진(溪潭鎭)의 계전촌(溪塡村, Xitiancun)으로 밝혀졌다.19)
▲ 현재의 정두촌 성당
브뤼기에르 주교는 4월 18일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아홉 가지 권한을 요청하고, 일곱가지 문제에 대해 문의하였다.20) 이 무렵 그가 다음 행선지로 정한 곳은 남경(南京)이었다.
③ 강남 숙소(54일간 체류) : 브뤼기에르 주교가 남경을 향해 배에 승선한 것은 1833년 4월 23일이고, 복안을 떠난 것은 4월 27일이었다. 그는 남경교구의 총대리 카스트로 에 무라(João de França Castro e Moura, 趙若望, 1804~1868) 신부에게 보내는 복건대목구장의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1833년 5월 12일 절강성 북부의 히아푸(Hia pou)라는 항구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일본으로 가는 중국 배를 만날 수 있는 곳이고, 황제 운하 즉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 : 북경~항 주)를 이용하여 남경으로 갈 수 있는 곳이었다.21)
이 히아푸로 추정되는 곳으로는, 첫째, 절강성 영파시의 해포진(寧波市 鎮海區 蟹浦鎭, 현 澥浦鎭)22)이 있고, 둘째로 절강성 가흥시의 사포진(嘉興市 平湖市 乍浦鎭)23)이 있다. 전자의 해포진은 절동운하(浙東運河 : 항주~영파 甬江口)를 이용할 수 있는 항구이며, 후자의 사포진은 경항대운하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브뤼기에르 여행기에 기록된 여행 기간에서 볼 때, 히아포는 남경에 더 가까운 가흥시의 사포(乍浦)가 맞는 것으로 생각된다.
1833년 5월15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강남운하 옆의 농가에 도착하였고, 이튿날 그곳에서 주님 승
천 대축일 미사를 집전한 뒤 다시 출발하여 5월 18일 강남 숙소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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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건 체류」, 234~235면. 「모방 신부가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1833년 5월 6일 자 서한」 (A-MEP, Vol. 1260, ff. 5~8)의 작성지 ‘팅타오(Ting-tao)’가 바로 ‘정두촌’이다. 1696년에 설정된 복건대목구는 1790년 복건·절강·강서대목구가 되었다가 1838년 복건과 절강·강서대목구로 분할되었다. 디아즈 주교는 1801년 복건대목구 보좌 주교로 임명되어 1803년 서품되었으며, 1812년 10월 복건대목구장을 승계하였고, 1849년 팅타오(정두촌)에서 선종하였다(http://www.bishops -in-china.com/).
18) 여행기, 137~138면.
19) 조현범, 앞의 글, 236~237면.
20) 서한집, 231~237면.
21) 여행기, 143·160면.
22)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취를 찾아서 산서를 떠돌다」, 70~72면에는 히아포를 ‘하포(霞浦, 복건성 寧德市 하포현)’라고 설명하였다. 아마도 이는 해포(澥浦)의 착오로 보인다.
23) 한국교회사연구소, 『브뤼기에르 여행기, 123면의 각주 6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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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곳에서 54일을 체류하게 된다. 우선 그는 남경교구의 총대리 카스트로 에 무라 신부와 만나 23일에 헤어졌고, 이후에는 라자로회(遣使會) 선교사 2명도 만났다.24)
그러면 이 ‘강남 숙소’는 어디를 말하는가?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곳을 ‘강남 제일 남쪽 도시 중의 하나인 상난푸(Chang nan fou)’ 혹은 ‘유럽인들이 남경이라고 부르는 강남 동부’라고 표현하였다.25)
일찍이 최석우(안드레아) 몬시뇰은 이곳을 “아마 강남 지방에 있던 어느 작은 마을이었을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26) 여행기 앞뒤의 여행 기록에서 볼 때, 주교의 강남 숙소는 양자강으로 통하는 황제운하(즉 경항대운하), 구체적으로 진강(鎭江)·소주·항주로 이어지는 ‘강남운하에 도착하기 위해 7일 정도 작은 운하를 통과해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27)
강남 숙소에 체류하는 동안 브뤼기에르 주교는 「북경의 남경 주교관 주인이 보낸 서한」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조선 사람들이 주교님을 모시게 되어 기쁨의 절정에 달해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고 한다.28) 이어 그는 1833년 6월 26일 남경교구장 페레이라 주교의 편지 몇 통을 갖고 강남으로 귀환한 왕 요셉과 상봉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레이라 주교가 이때까지는 호의적이었지만, 점차 태도가 돌변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29)
④ 산동」직예 교우촌 와병(35일간 체류) : 1833년 7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새로 만난 안내자들과 함께 북경을 향해 출발하였다. 도 바오로 노인, 라틴어 소통자 양 요한, 왕 요셉이 그들이었다. 이때 브뤼기에르 주교는 해로를 원했지만, 여기에 끼어든 중국인 신부는 ‘선장과 선원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 육로를 주장하였고, 왕 요셉도 해로 여행을 말렸다고 한다.30)
▲ 와병 추정지
1833년 7월 27~28일 주교 일행은 경항대운하를 이용하여 양자강에 도착하였고, 29일에는 남경 근처를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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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여행기, 149~151면. 카스트로 신부는 1840년 8월 28일 직예 주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25) 여행기, 144·151면.
26) 최석우 몬시뇰은 “1833년 6월 26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북경에서 돌아온 왕 요셉을 만난 곳은 정확히 소주(蘇州)”였다고 하면서도 “아마 강남 지방에 있던 어느 작은 마을이었을 것이다.”라는 단서를 붙였다(「왕 요셉이 북경에서 작성하여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1833년 1월 18일 자 서한과 3월 26일 자 서한의 사본」 ; 최석우,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한국교회사연구소, 142면 및 각주 396). 위의 글에서 인용한 왕 요셉의 서한은 브뤼기에르 주교와 만난 1833년 6월 26일 이전에 작성된 서한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토대로 둘이 만난 장소를 ‘소주’로 설명하는 것은 모순인 것 같다.
27) 여행기, 160면.
28) 여행기, 148면.
29) 여행기, 154·157면.
30) 여행기, 15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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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열병이 낫지 않은 상태에서 남경을 떠나면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7
월 31일에 하륙한 뒤 절강성에서 산서성까지 뻗어있는 화북평원을 종단한 그들은 8월 13일에 황하를 건너 산동에 도착하였다. 이때 안내자들은 더러운 바지 한 벌, 적삼 한 벌, 챙 넓은 밀짚모자, 눈가리개 등을 이용하여 브뤼기에르 주교를 가난한 중국인 행색으로 꾸몄다. 8월 17일 황하 지류를 건너면서 주교가 열병으로 겪은 고통은 다음 내용에 잘 드러난다.
“내가 누워 있던 널빤지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가 배 바닥에 물이 스며든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계속 해서 손가락을 물로 적셔서 그것으로 혀와 입술을 축였습니다. 그때 나는 사악한 부자를 떠올리며(루카 16,19-31), 내 처지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힘내자. 오늘은 죽지 말아야지.”31)
8월 26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동과 직예(直隸) 접경의 한 교우촌32)에 도착하여 35일 동안을 대부분 병상에서 지내야만 하였다.33) 이 산동· 직예 접경의 교우촌을 오늘날의 하북성 헌현(獻縣) 교구청자리(현 하북성 滄州市 獻縣)로 추정하기도 한다.34) 그러나 헌현은 옛 황하의 명청고도(明淸故道)에서 너무 멀다는 점에서 주교의 체류지로 보기 어렵다.
주교가 머물렀던 산동·직예 교우촌은 황하 너머 즉 명나라 때의 황하고도 너머에 있는 현 산동성 하택시(菏澤市)의 ‘조현(曹縣)~장색진(莊寨鎮)~동명현(東明縣) 지역’일 것이다.
8월 28일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의 움피에레스 신부와 르그레즈와 신부 공동 명의로 서한을 발송하였다. 이때 안내자들이나 교우촌 유지들은 ‘체포와 박해의 위험’을 이유로 주교의 북경행을 반대하면서 산서나 호광(湖廣 : 호남·호북성), 혹은 마카오 귀환을 종용하였다.
그러던 차에 9월 22일 북경에 파견했던 교우들이 귀환하였고, 주교는 그들로부터 페레이라 주교의 전교비와 편지 한 통을 수령하였다. 이 편지에서 페레이라 주교는 “주교님은 산서로 가셔야 합니다. 주교님의 목숨은 지금 하느님과 중국인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산서행을 권유하였다.35)
결국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러한 의견에 따라 북경행을 포기하고 산서대목구로 발길을 돌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목적지는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사목하고 있던 산서 주교관이었다.
2) 산서 주교관 요양(1833. 10~1834. 9)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이 산동(직예) 교우촌을 출발하여 산서로 향한 것은 1833년 9월 29일이었다. 이틀 뒤에 그들은 페레이라 주교가 보낸 안내자를 만났으며, 10월 6일에는 산서 초입의 세관을 통과하였고, 10월 10일에는 마침내 산서대목구장(즉 호광·섬서·산서대목구장)이 거처하는 주교관에 도착하였다.36)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듬해 9월 22일까지 ‘11개월 12일 동안’ 이곳에 체류하면서 요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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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여행기, 181~182면.
32) 서한집, 243면에는 ‘산동’, 245면에는 ‘직예’로 나온다. 당시 중국에서는 북경 주변의 하북·하남·산동성과 천진 등을 합쳐 ‘북직 예’라고 하였다.
33) 여행기, 186~192면. 1833년 8월 26일 파리외방전교회에서는 조선 선교를 수락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월 19일 서만자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의 서한을 받고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서한집, 303면). 한편 브뤼기에르 주교의 직예·산동 체류가 ‘신자 들에 의한 억류’로 와전되기도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갈등」, 『교회사연구』 44, 2016, 204~205면).
34) 이길재,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25」, 『가톨릭평화신문』 1435호(2017. 10. 15).
35) 여행기, 189·191면.
36) 여행기, 192~198면 ; 서한집, 249~250면. 산서대목구는 1696년 10월 15일 남경교구에서 분리 설정(초대 대목구장 : Turco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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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산서대목구장은 이탈리아 출신의 프란치스코회원 살베티 주교였다. 그러면 그의 주교관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위치에 대해 훗날 그곳을 경유하게 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L. Imbert, 范世亨, 1796~1839) 주교는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평요(平遙, 산서성 太原市 晋中市 평요현)에서 기현(祁峴, 현 진중시 기현)까지는 4리외(lieues, 즉 40리)밖에 되지 않는다. 기현까지 3리(里)가 남은 지점 도로의 왼쪽 2리 거리에 정원의 울타리, 곧 백색 담이 보이는데, 그곳이 산서대목구장 주교님이 계신 곳이다.”37)
이처럼 살베티 주교의 주교관은 지금의 진중시 기현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진중시 기현의 구급촌(九汲村)이다. 살베티 주교의 묘지명에도 “1843년 기현 구급촌 선종”으로 기록되어 있다.38)
구급촌 주교관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살베티 주교와 함께 마카오에서 복안까지 함께 배를
탄 적이 있던 알퐁소 디 도나토 신부와 상봉하였다. 이후 3일 뒤인 10월 13일에는 도 바오로 노인과 양 요한, 페레이라 주교가 보낸 안내자들이 고향으로 귀환하였고, 11월 11일에는 왕 요셉이 북경과 산동을 거쳐 산서에 도착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1월 18일에 왕 요셉을 다시 북경으로 파견했으며, 그는 다음 해 3월 10일에야 산서로 귀환하였다.
1834년 4월 1일에는 전해 12월에 복안을 떠났던 모방 신부가 북경에 도착하였다. 이어 그는 6월
8일 달단의 시완쯔(Xiwanze) 즉 서만자(西灣子)로 출발하였다. 그 지방 사람들이 시방(Sivang)이라고도 부르는 마을로, 현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 숭례구(崇禮區)의 서만자진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일찍이 마카오에 있을 때 라자로회 대표부의 토레토(Jean Baptiste Torrete) 대표 신부를 만나 서만자 교우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고, 서만자의 라자로회 선교사 쉬에(Sué, 薛) 신부 즉 리치(Schema Ricci, 薛瑪竇 마태오, 1780~1860)신부로부터 ‘환영한다.’는 긍정적인 답장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에 앞서 주교는 1834년 5월 12일 왕 요셉을 서만자 교우촌으로 보냈다. 왕 요셉은 5월 27일 그곳에서 리치 신부를 만난 뒤 변문으로 출발하였다.39)
서만자 교우촌은 1829년에 북경을 떠난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새롭게 마련한 선교 센터가 있는 곳이었다.40)
▲ 현재의 구급촌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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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롤로 주교)되었으며, 1762년 호광·섬서·산서대목구로 변경되었다.
37) 수원교회사연구소 엮음, 「사천성에서 달단 지방의 서만자로 가는 여정」,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1, 191면.
38)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취를 찾아서 산서를 떠돌다」, 90~92면. 진중시는 현 유차교구(楡次敎區=晋中교구)의 중심지로, 1931년 6월 17일에 지목구로 설정되었다.
39) 여행기, 211~2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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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한 발 더 가까운 이곳을 다음 목적지로 생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1834년 8월 29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이 보낸 1833년 10월 25일(양력 12월 6일) 자 서한」 2통을 수령하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희망적인 이야기보다는 서양인이 지니는 조선 입국의 어려움, 교황 사절을 통한 외교적 교섭의 필요성 등만이 언급되어 있었다.41) 9월 8일에는 왕 요셉이 산서로 귀환하면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다시 한번 서만자의 리치 신부가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주교는 서만자 행을 결심하였고, 9월 22일 ‘자비와 온정의 확실한 증거들을 보여주었던’ 살베티 주교와 도나타 신부에게 하직을 고하였다.
3) 달단 여정과 서만자 교우촌 생활(1834. 9~1835. 10)
① 조선 교우들과의 접촉
1834년 9월 22일 산서 구급촌을 출발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달단 여정을 시작하여 9월 29일 만리 장성 지선에 도착하였고, 10월 7일에는 ‘장자커우(Chantchakeou, 張家口)’를 통해 만리장성을 통과한 뒤 10월 8일 서만자(Sivang) 교우촌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를 맞이해 준 사람은 중국인 라자리스트 리치(薛 마태오) 신부와 복안을 떠난 뒤로는 만날 수 없었던 모방 신부였다.42) 주교가 이곳 서만자에서 생활한 기간은 ‘1년’이었다.
당시 서만자에는 리치 신부가 북경에서 이전해 온 예비 신학교가 있었고, 새 성당도 짓고 있었다. 11월 13일에는 9월 17일 산서에서 북경으로 파견되었던 왕 요셉이 서만자로 귀환하였다. 이듬해인 1835년 1월 9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왕 요셉에게 위임장 및 편지를 써서 북경의 조선 교우들에게 파견하였다. 주교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여러분들의 결정이 어떠하든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서 위임받은 선교 의무를 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음력 11월 중에 조선 국경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문을 두드릴 것이고, 교우 여러분들 스스로 청하자 하늘이 자비를 베풀어 보내주시는 주교를 받아들일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수천 명의 교우들 중에 적어도 한 명쯤은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습니다.”43)
▲ 조선 교우들의 1834년 12월 23일 자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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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서만자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700년이었으며, 명말에는 이곳을 ‘대동구(大東沟)’라고 불렀다. 1829년 북경 북당에 있던 프랑스 라자로회의 리치 신부 등이 박해를 피해 선교 센터를 만리장성 밖의 서만자로 이전하였다. 1840년 8월 28일 몽고대목구가 설립(초대 대목구장 : J.M. Mouly 주교)된 뒤 서만자에 주교좌가 설치되었으며, 1883년 동몽고·중몽고·남서몽고대목구로 분리되면서 중몽고대목구 주교좌는 서만자 성당, 남서몽고대목구 주교좌는 포두(包头) 이십사경지(二十四顷地), 동몽고대목구 주교좌는 조양(朝阳) 송수취자(松树嘴子)에 설치되었다
(https://baike.baidu.com/item/西湾子天主教堂 및 天主教西湾子教区).
41) 여행기, 218~220면, 357~365면.
42) 여행기, 239~243면. 브뤼기에르 주교가 만리장성을 통과한 ‘장가구’는 정확히 장가구의 ‘대경문(大境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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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는 이처럼 자신의 선교 여정은 교황의 칙서를 따르는 의무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밝히고, 이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어떠한 난관과 방해가 있더라도 반드시 조선에 입국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짧지만 더없이 강렬한 표현이었다.
왕 요셉은 1835년 1월 19일 조선 교우들을 만나 협의한 뒤 1월 26일 여러 장의 편지들을 가지고 서만자로 귀환하였다. 세바스티아노와 조선 교우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음력 1834년 11월 서한, 세바스티아노 등이 남경 주교에게 보낸 1834년 말 서한, (여항덕) 파치피코 신부가 남경 주교에게 보낸 1834년 11월 18일 자 라틴어 서한, 파치피코 신부가 (소) 바르톨로메오와 왕 요셉 형제에게 보낸 1834년 11월 18일 자 서한, 조선 교우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내는 1834년 12월 23일(양력 1835년 1월 21일) 자 서한 등이었다.44)
특히 맨 뒤의 1834년 12월 23일(양력 1835년 1월 21일) 자서한에서 조선 교우들은 “1835년 음력 11월에 교우들을 변문으로 보내 주교님을 영접할 것인데, 서로 알아보는 자호(字號)는 ‘만신(萬信)’으로 하자.”45)고 약속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러한 약속에 크게 고무되었다. 그는 1월 29일 왕 요셉을 다시 한번 북경으로 파견했으며, 2월 7일 왕 요셉은 조선 교우들과 만나 몇 가지 물건과 약속한 돈을 조선 교우들에게 넘겨주고, 조선 교우들로부터 편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할 때 갈아입을 조선 옷을 수령하였다.46)
▲ 옛 서만자 성당(왼쪽)과 현재의 서만자 성당
② 산서 회장 장희의 활동과 박해 소식
1835년 2월 25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남경에 맡겨둔 물품을 수거해 오도록 왕 요셉을 남경으로 파견하였다. 주교는 3월 1일에는 조선 교우들이 북경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했으며, 3월 30일에는 요동의 변문에 연락소를 개설하도록 요청하기 위해 산서 회장 ‘장희(Tchang hi)’에게 연락원을 파견했다는 이야기도 적었다.47)
1835년 5월 11일 서만자에 도착한 산서 회장 장희는 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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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여행기, 293면.
44) 여행기, 277~296면.
45) 여행기, 294~296면, 381~384면.
46) 여행기, 309~314면, 387~394면.
47) 여행기, 323~324면. 산서 회장 장희에 대해서는 「모방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들에게 보낸 1836년 4월 4일 자 서한」(A-MEP V. 1260, f. 78)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상교우서』 52, 수원교회사연구소, 2016년 가을,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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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연락원 2명과 함께 동부 달단 지역인 요동으로 출발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6월 5일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천교구 선교사 앵베르
신부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48)
1835년 6월 17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박해와 체포령 소식을 듣고는 마을 뒤의 토굴로 피신했다가
6월 23일 거처로 귀환하였다. 6월 26일에도 다시 한번 박해 소식을 듣고는 산속 오두막으로 피신했다가 7월 3일 거처로 귀환하였다.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7월 12일 라자로회 선교사 물리(J.M. Mouly, 孟振生, 1807~1868) 신부가 서만자에 도착하였다.49)
▲ 서만자의 토굴집
1835년 9월 8일에는 남경에 갔던 왕 요셉이 귀환했으며, 9월 28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친구인 프
랑스 에르 교구 총대리 부스케(Bousquet) 신부에게 편지를 작성하면서 이렇게 전하였다. “드디어 조선 교우들이 도착하면 저희는 시련과 고통의 강물이 흐르는 약속의 땅 조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말입니다.”50)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입국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명하면서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다.
1835년 10월 1일에는 산서 회장 장희가 변문 장터에서 5리 되는곳에 연락소를 임대해 놓은 뒤 서만자로 귀환하였다. 그 이튿날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 신학교 교장 랑글르와(C. Langlois, 1767~1851)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관심을 보여 온 앵베르 신부를 “교구장 서리나 부주교로 삼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51)
이제 조선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이를 위한 준비가 하나씩 마련되고 있었다. 1835년 10월 5일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는 “요동 지방 일부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해 주도록 교황 성하께 촉구해 야 한다.”는 당부로 끝을 맺었다.52)
10월 6일에는 마카오의 르그레즈와 대표 신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서한도 작성하였다.53) 시련의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을지라도 거기에는 하느님의 자비로 얻게 될 희망도 보이고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영원히 희망으로만 남을 그 희망을 찾아서 조선으로 가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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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서한집, 256면.
49) 여행기, 336면.
50) 서한집, 341면.
51) 여행기, 347면 ; 서한집, 352면.
52) 여행기 348~349면.
53) 서한집, 353~35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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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가자 선종과 유해 이장
1) 서만자 출발과 마가자 선종(1835. 10)
1835년 10월 7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모방 신부와 작별하고, 중국인 라자리스트 고(R.P. Ko) 신부 및 연락원들과 함께 서만자 교우촌을 출발하였다. 첫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산서 회장 장희가 말한 대로, 장희의 고향이자 그의 집(혹은 장희의 친척 집)이 있던 마가자(馬架子)라는 교우촌이었다.54) 그러나 주교의 몸은 완전치 않았다. 다리가 부었다가 가라앉는 것으로 보아서 ‘수종증(水腫症)에 걸렸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두통도 심하여 출발 2~3일 전에는 구토까지 하였고, 동상도 걸렸다.55)
「모방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와 파리 본부 신부들에게 보낸 1835년 11월 9일 자 서한」56)에 따르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출발 다음 날인 10월 8일 우하오(Ou Hao) 즉 오호(현 장가구시 숭례구 五號村) 마을에 도착하여 이튿날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0월 10일 다시 길을 떠난 주교 일행은 10월 15일 라마미아오(Lamamiao) 즉 라마묘(喇嘛廟, 현 내몽고자치구 시린궈러맹[锡林郭勒盟] 多倫縣의 옛 이름)에 도착하여 다시 휴식을 취하였다.
주교 일행이 첫 번째 목적지인 마가자 교우촌에 도착한 것은 1835년 10월 19일이었다. 마가자(현 동산향)는 피엘리쿠(Pielikeou)57) 즉 한자로는 별납구(別拉溝)라고 표기하는 교우촌으로, 현재의 내몽고 자치구 적봉시(赤峰市) 송산구(松山區) 동산향(東山鄕)이 바로 그곳이다.
이 마을은 2004년 7월 6일 다음에 설명하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원무덤 자리와 함께 정확히 확인되었다.58) 당시에 이용된 자료는 다음에 수록한 파리외방전교회의 ‘만주 선교 지도(Mission de Mandchourie)’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마을에서 보름 동안 체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마저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이튿날인 10월 20일 그분께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자신의 품으로 불러들이신 것이다.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10월 20일 저녁), 주교님께 면도를 해드린 다음에 중국식으로 머리를 다듬는 조발을 마무리하는 순간 갑자기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소리를 지르셨답니다. (중국어로 Ho Ya Yaille) 이어 침상에 쓰러져 프랑스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셨는데, 이것이 주교님의 마지막 말씀이었답니다. 옆에 있던 고신부가 급히 달려갔으나 주교님은 한마디 말씀도 하지 못하셨답니다. 이에 고 신부는 병자성사를 드리고 전대사를 베푼 다음 옆에서 임종을 돕는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저녁 8시 15분경에 주교님은 하느님께 당신 영혼을 바치셨다고 합니다.”59)
그때까지 서만자에 남아 있던 모방 신부는 1835년 11월 1일 마가자로 갔다가 돌아온 연락원 2명으로부터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소식을 전해 들었다. 즉시 길을 떠난 모방 신부는 11월 17일 마가자에 도착하였고, 18~19일에는 고 신부와 함께 ‘망자를 위한 저녁 기도’를 바치고 연미사를 봉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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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모방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부에 보낸 1836년 4월 4일 자 서한」, 『상교우서』 52, 33면.
55) 서한집, 322·358·362면.
56) 서한집, 361~368면.
57) 모방 신부는 마가자를 pielikeou로 적고 있으며,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지도에는 이곳이 Pie-lie-keou로 기록되어 있다.
58) 차기진,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자리를 찾아서」, 『가톨릭평화신문』 834호(2005. 8. 14).
59) 서한집, 363~36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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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일에는 유해를 소성당에 안치하였고, 11월 21일, 곧 성모 자헌 축일이 되는 토요일 에는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 미사를 봉헌하고 장례 예식서에 따라 주교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그런 다음 “장희 씨와 그의 친척들에게 무덤 옆에 비석을 세우고 여기에 주교님의 중국식 성(姓)인 소(蘇) 자를 새기게 했으며, 주교님의 직책, 연세, 돌아가신 때도 새기도록” 부탁하였다.60)
모방 신부는 이후 조선 여정을 계속하여 1836년 1월 13일 마침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 땅에 발을 디딘 최초의 서양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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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모방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부에 보낸 1836년 4월 4일 자 서한」, 『상교우서』 52, 33~34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비에는 주교의 성[蘇]과 함께 직책[首鐸], 선종 날짜[道光十五年八月二十九日, 양력 10월 20일]가 기록되었다.
61) 마가자(피엘리쿠) 인근에 있는 ‘흑수’로는 현 조양시 건평현(建平县) 흑수진(黑水鎭)이 있는데, 마가자와는 직선거리로 13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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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해 이장(1931. 8~10)과 원묘비 발견(2006. 1)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지 60여 년이 지난 1897년 11월 29일에는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관의 부속 의사 마티뇽(Matignon, 프로테스탄트 신자) 박사가 펠리고(Pé-li-gô) 즉 마가자 부락을 방문했다가 직접 촬영한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사진을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G.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에게 전달하였다.62) 이에 앞서 마티뇽 박사는 같은 해 4월 12일과 19일 서울에서 뮈텔 주교와 만난 적이 있었다.63)
1931년 서울대목구에서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중국 달단 지역 어딘가에 안장되어 있을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서울로 이장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라리보(A.Larribeau, 元亨根, 1883~1974) 주교는 1931년 8월 8일 자로 송수취자(松树嘴子, 현 조양시 朝陽縣 東大屯鄕 士毅村)64)의 동몽고대목구장 즉 제홀(Jehol, 熱河)대목구장65)인성모성심회의 아벨(Con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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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가 된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만주 선교 지도에 표기된 흑수는, 그 위치상에서 추정해 볼 때 서요하(西遼河)의 상류인 적봉 북 쪽의 서납목륜하(西拉木倫河[시라무룬허])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62) 이장기, 57~59면. 마티뇽 박사가 찍은 사진은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의 뮈텔 문서 안에 들어 있다.
63) 뮈텔 주교 일기, 1897년 4월 12일 및 4월 19·20일.
64) 송수취자(松树嘴子)는 1960년대에 사의촌(士毅村)으로 개칭되었다.
65) 동몽고(제홀)대목구는 현 금주(Jinzhou[錦州])교구의 전신으로, 1883년에 설정되었으며, 당시 열하(热河)성 전체 및 봉천(奉天)성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초대 대목구장는 벨기에 출신의 성모성심회 선교사 루체(Théodore-Herman Rutjes, 呂繼賢, 1844~1896) 주교였다. 1932년 1월 21일에는 여기에서 적봉(赤峰) 대목구가 분리 설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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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els, 葉步司, 1856~1942) 주교에게 서한을 발송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서울로 이장하기를 희망한다.” 고 전하였다. 이에 아벨 주교는 8월 16일 “유해 봉송에 적극 협조할 것이고, 마가자 사제들에게 유해를 발굴하도록 하겠다.”고 답하였다.66)
9월 4일에는 차오(Tchao, 조 루카) 신부 등 마가자 성당 사제들 4명이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에서 유해를 발굴한 뒤 유해 상자에 서명하였고, 9월 14일에는 마가자
성당 사제가 유해 상자를 가지고 송수취자 주교관에 도착하였다. 이에 아벨 주교는 서울의 라리보 주교 및 금주(錦州) 본당 코르동(Cordon) 신부에게 서한을 발송하면서 “대목구청의 알베르(Albers) 신부가 유해 상자를 금주 성당으로 봉송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9월 17일 유해 상자를 받은 코르동 신부는 마르카데(Marcadé) 신부, 리갈(Rigal) 신부와 함께 세관 통과를 위해 유해 상자를 열고 재포장하였다.67)
1931년 9월 17일 오후 7시 45분 코르동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 상자를 들고 묵덴 즉 봉천(奉天, 현 瀋陽)대목구청으로 가서 블루아(J.M. Blois, 衛 요한, 1881~1946) 주교에게 인계하였다. 그 이튿날 봉천의 프랑스 영사 크레펭(P. Crépin)은 서울대목구에서 알려온 대로 프와요(G. Poyaud, 表光東, 1877~1950) 신부가 봉송하게 될 유해 상자 확인서를 발급했으며, 블루아 주교는 뮈텔 주교에게 서한을 발송하면서 “유해가 정해진 날짜 즉 9월 24~25일 서울에 도착할 수 있기를” 염원하였다.68)
프와요 신부는 유해 상자를 서울로 가져가기 위해 9월 21일 이전에 봉천에 도착하였다.
1931년 9월 21일 저녁, 블루아 주교는 프와요 신부에게 유해 상자를 인계하였고, 프와요 신부는 9월 22일 장엄 연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런 다음 이튿날 봉천을 출발했으며, 안봉선(봉천~안동)과 경의선(서울~신의주) 철도를 이용하여 9월 24일 10시경, 서울 주교관에 도착하였다.69)
이렇게 하여 브뤼기에르 주교는 유해가 되어 생전에 그토록 들어가고자 했던 조선 땅의 서울 주교관에 도착하였다. 1835년 10월 20일 머나먼 마가자 교우촌에서 선종한 지 96년 만이었다. 이후 주교의 유해는 약 20일 동안 주교관에 안치되었다.
1931년 10월 14일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가 새로 마련된 관에 입관되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10월 15일에는 명동 대성당에서 장엄 연미사가 봉헌되었으며, 자동차와 상여로 운구되어 용산 삼호정(三湖亭) 교회 묘역에 예절대로 안장되었다. 당시의 교회 기록에서는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소 주교의 백골을 중국 직예성(熱河省의 잘못) 마가즈 혹 뻴니구라고도 하는 곳에서 옮겨왔는데, 비록 96년 된 백골이나 모든 골격이 다 완전할 뿐만 아니라 두발과 또는 그 머리에 덮었던 비단 모자까지 썩지 않았으니, 귀한 시체이므로 귀하게 보존되었다.……이번 달 15일 오전 9시에 두 분 주교께서 대례 연미사를 거행하시고 사도 예절을 마친 후 자동차 상여에 모시어 용산 삼호정 교회 묘역으로 발인할 때……묘역 근처에 이르러서는 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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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이장기, 61면.
67) 이장기, 65·67·79면.
68) 이장기, 83, 85~87면.
69) 이장기, 89면 ; 『경향잡지』 25권 718호, 1931.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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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교우들이 미리 가져온 교회식 조선 상여에 옮겨 모시고 묘역에 들어가서 모든 주교·신부 무덤 가운데에 예절대로 안장하였다.”70)
이후 마가자 무덤과 묘비는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러다가 문화대혁명 초기인 1967년경 마가자 인근의 대장방촌(大杖房村) 구판협동조합 건축 때 그 지방 사람들이 주교의 묘비를 옮겨와 섬돌로 사용하였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2004년 7월 6일에는 차기진이 동산(東山) 즉 옛 마가자에서 브뤼기에르 주교 원무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12월에는 대장방촌의 구판협동조합 매입자인 왕자춘(王子春)이 묘비 섬돌을 확인하고 동산 천주당(주임 : 武樹剛 신부)에 알렸다.
이에 그곳의 이금도(李金濤) 신부는 2006년 1월 10일 대장방촌으로 가서 원묘비를 촬영한 뒤 12일 성당으로 이전했으며, 1월 15일 개포동 성당 염수의(요셉) 신부에게 이 소식을 전하면서 메일로 사진을 전송하였다. 차기진이 이 묘비 사진과 마티뇽 박사의 묘비 사진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대조 확인한 것은 1월 18일이었다.71)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4. 맺음말
브뤼기에르 주교는 말레이시아 페낭을 출발하기 전인 1832년 7월 초부터 여행기를 작성하기 시작하여 하북성의 서만자 교우촌을 출발하기 이틀 전인 1835년 8월 5일에 이를 종결하였다.
이 여행기에 따르면 그의 선교 여정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페낭에서 산서 주교관까지의 여정(1832. 8~1833. 10)으로, 이때 주교가 한 달 이상 체류한 곳은, 마카오의 포교성성 대표부, 지금의 복건성 복안시 정두촌(丁頭村)에 있던 도미니코회 디아즈 주교의 주교관, 정확한 장소를 확인할 수 없는 강남 숙소와 산동·직예 접경의 교우촌이었다. 그 동안 주교는 연락원 왕 요셉을 북경으로 보내 조선 교우들은 물론 남경교구장 페레이라 주교와 연락 하였다. 그는 강남 여정 이후 극심한 열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조선을 향한 희망만은 결코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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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경향잡지』 25권 719호, 1931. 10. 15.
71) 이장기, 36~38면 155~16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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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산서 주교관에서의 요양 기간(1833년 10월~1834년 9월)이다. 이곳은 프란치스코회의 살베티 주교가 거처하던 곳으로, 지금의 산서성 진중시 기현(祁峴)의 구급촌(九汲村)에 있었다. 여기에서도 북경에 오는 조선 교우들과의 연락은 계속되었다.
세 번째는 서만자 생활(1834년 9월~1835년 10월)이다. 라자로회 선교사들의 선교 센터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숭례구 서만자진(西灣子鎭)이다. 이곳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시 한번 조선 교우들에게 전하였고, ‘음력 11월 변문에서 주교님을 영접하겠다.’는 희망적인 회신을 받았다.
다음으로 살펴본 것은 1835년 10월 7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를 출발한 뒤 10월 20일 내몽고 마가자 부락에서 선종하기까지의 내용이다. 마가자는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송산구 동산향(東山鄕)으로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지도에는 Pie-lie-keou(別拉溝)로 나온다. 그는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춤으로써 그토록 바라던 조선 입국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주교의 원무덤 자리는 2004년 7월 6일에 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살펴본 것은 1931년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의 서울 이장 과정과 2006년도의 원묘비 발견에 관한 내용이다. 개포동 성당 현양위원회에서 발간한 이장기의 내용을 요약·정리하면서 필자의 경험을 덧붙여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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