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 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52 기독교철학06 요한복음 4
2013년 윤홍식의 요한복음 강의 4강-진정한 기도(1: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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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예수님이 성부랑 성자를 구분했죠. 어떻게 구분하는지 보세요.
[17.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말을 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의 영을 통해 성령과 진리를 각성하면, 예수님이 성령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을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니면 내 말을 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즉 성자의 에고가 그냥 일방적으로 하는 얘기인지 성부의 명령을 받아서 성자가 하는 건지 이걸 구분해야 된다는 겁니다. 성자의 에고도 결국 못 믿을 존재라는 게 이 말에는 있지 않나요? 성자의 에고도 못 믿어요. 에고는 다 똑같아요. 혼은 누구나 차가운 쇠공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이 위대한 건요 인간과 똑같은 혼, 그 무지와 아집에 휩싸여 있는 혼을 성령의 열기로 정화시켰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 방향으로 선만 실천하는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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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혼을 다듬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와서 강조한 것도 뭐였습니까? 아테네 사람들한테. “당신의 혼을 최선의 모습으로 만들어라.” 이게 관건입니다. 영은, 다이몬은, 원래 신성해요 성령은. 성령을 훈련시킬 게 아니고요 혼을 훈련시켜야 돼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뭐라고 합니까? “내 혼이 하는 얘기면 나도 권하지 않겠는데 아버지가 하라고 하네.” 이렇게 얘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아셔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랑 혼이 달라서 예수님 혼은 금으로 만들어져 있고 우리 혼은 아마 잡철로 만들어져 있나 보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해도 성자가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조건을 똑같이 하고 오셨지. 모범을 보여주겠다고 오는 분이요 몰래 다른 거 하나 또 챙겨 들고 오시면 이게 말이 안 되죠. “내가 모범을 보여주마.” 하면서 칼싸움하는 데 총 들고 오시면 안 되잖아요. 칼싸움을 하시려면 칼로 모범을 보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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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혼은 똑같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예수님도 “내 말은 믿지 말더라도 아버지 말은 믿어야 되지 않냐?” 이게 지금 늘 일관된 논리입니다. 그러니까 성부랑 성자를 정확히 구분하세요. 성자는 인간과 똑같은 그 인간의 혼을 성령으로 경영하신 분을 성자라고 하는 거고 성령은 그 순수한 영 자체를 말하는 거고요. 성부, 아버지 자리를 말하는 거고요. 그래서 18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18.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보내신 분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성자는 성부에 의해 성스러워진다. 성자는 성부의 분신일 뿐이다!)]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니. 혼으로, 자신의 에고로만, 자기의 생각 자기의 감정 자기의 오감을 가지고, 이걸 가지고 무슨 얘기를 한다면 혼, 그 사람의 영광을 위한 거지만, 자신을 보내신 분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거짓이 없다. 그러니까 이 인간의 혼은 어떻다는 얘기입니까? 에고 뜻대로 해서는 안 되고 아버지 뜻대로 쓸 때 진실하고 거짓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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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혼이 완벽해져요. 이거 대단한 겁니다. 성자는 성부에 의해서 성스러워진다. 성자는 성부의 분신일 뿐이라는 걸 아셔야 돼요. 성자는 이 성령의 화신인 겁니다, 혼을 통해서 표현한. 이게 인간이 해결해야 할 문제예요. 인간은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거고,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아버지의 뜻을 지상에 구현하기 위한 아버지의 자녀들이고 분신들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제일 모범생 아들이 자녀가 하나 있지 않겠습니까?, 제일 FM대로 살아가는.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성자. 성부랑 성자는 다르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아셔야 돼요. 지금 이런 얘기도 엄청 충격적인 얘기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를 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시면 이런 방식의 이해가 좀 낯서실 수 있는데. 이해가 잘 안 되셨죠? 이렇게 이해해야 이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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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예수님이 하는 성부랑 성자에 대한 가르침들이 다 이해가 돼요. 그래서 저는 그런 메일을 많이 받았어요. 저 때문에 삼위일체가 이해가 됐다고, 교회 다니는 분들한테 많이 받았어요. 너무 자명하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이해하셔야 돼요. 그래서 성부 성령은요 원래 퍼펙트해요. 완벽해요. 문제는 성자입니다. 인간이 힘든 이유는 성자가 없어서예요. 주변에 성자가 없죠. 양심대로 살아가는 분이 귀해요. 그래서 예수님 같은 분이 귀한 거고 예전 4대 성인들이 귀한 겁니다 양심 그대로 살아가는 그런 성자들이 나오셔야 되고 지금 이 요한복음에서는 성자 중의 성자로 지금 예수님을 보고 있죠, 제가 화엄경에서 말하는 10지 보살이다라고 한. 10보살이라는 거는 궁극의 보살입니다. 불교식으로는 뭡니까? 여기가 영이 불성이고, 혼은 지금 부처의 자녀죠. 그러니까 불자(佛子)라고 합니다. 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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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자녀. 성자(聖子)랑 똑같아요. 부처의 자녀. 그래서 불자 그러면 보살들입니다 화엄경에서. 부처의 분신들, 불성의 분신들. 비로자나불이라는 위대한 우주적인 불성, 비로자나불은 교회로 말하면요 성부예요. 성부 성령. 우주적인 그런 이 신령한 어떤 무형의 영이죠. 그러면 누가 귀합니까? 불성은요 우주에 꽉 차 있지만 인간이 죄를 계속 짓고 있고. 죄 짓지 말고 이렇게 살아라고 보여줄 보살이 없다면 혼을 지닌, 중생성을 지닌 불성. 즉 불성이 이 중생성을 입으면 뭐라고 합니까? 보살 그럽니다. 보리와 살타. 보리는 우리말 보다랑 같아요. 진리를 본다는 뜻이에요. 살타는 우리말 산다는 뜻입니다. 살아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합치면 보리살타입니다. 보고 사는 사람. 깨달은 중생을 뜻해요. 깨달은 중생이 귀한 겁니다. 그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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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에서는요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으로만 풀었어요 보살을. 그러니까 부처가 돼서 깨달으면, 혼을 버리고 성령에 안주하는 걸 우리가 열반이라고 봤습니다. 이 영을 양심이라고만 보는 게 아니라, 초기불교에서는 이 양심을 열반이라고 봤거든요. 이 열반의 자리에 그대로 들어가고 끝나는 겁니다. 혼은 생각 감정 오감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얘네들은 버리고, “상락아정의 영원한 극락세계는, 진정한 극락세계는 참나 뿐이다” 해가지고 자성정토라고 하죠. 내 본성이 극락이다 해서 여기 들어가는 게 목표였습니다. 유형의 극락이 아니라 순수 무형의 이 극락자리 열반자리에 들어가는 걸 목표로 했기 때문에 초기불교는 절대 중생성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보살 개념을 확장시킵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이 아니라 깨달은 중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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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깨달음과 중생성은 영원히 함께 가야 된다. 중생성이 없으면 우리는 중생을 도와줄 수가 없다.” 성자로서 자각을 하는 겁니다. 초기불교를 기독교식으로 얘기하면요 성부 성령과 합일이 되고 끝나는 걸 추구하는 게 초기불교라면, 성자로서 우뚝 서가지고 온 우주를 경영하겠다고 하면은 성자의 위치를 정확히 설명한 게 대승불교입니다. 기독교로 불교를 설명한다면. 이해되시죠.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성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성부 성령과 합일이 중요한 거지. 근데 대승불교에 오면은 성자가 중요합니다. 보살이 중요해져요. 부처라는 존재는 무형의 불성이 돼버리고요. 쓰는 용어가 달라집니다. 초기불교에서 부처는 석가모니였고 성령과 합일을 한 사람을 말했다면 이 대승불교에서 부처 그러면요 불성을 말해요. 비로자나불. 무형의, 인격이 아닙니다. 불성, 우리 안에 있는 불성을 인격화시켜서 부처라고 불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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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추구하는 목표는 보살이 목표입니다. 부처가 목표가 아니에요. 보살은 이미 부처거든요 불성의 구현자이기 때문에. 이해되십니까? 하지만 중생성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살이 목표예요. 초기불교와 후대 불교는요. 초기불교가 소승화된 게 소승불교인데 초기불교나 소승불교랑 대승불교는 입장이 다릅니다. 이제 불교도 잠깐 이해하시고 넘어가 보세요. 이러면 이제 종교 간의 대화도 더 쉽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다 보면요 자기 종교도 잘 보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설명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 그것도 궁극의 보살, 10지 보살이라는 존재는 온 우주를 경영하는 최고의 경지의 보살이에요. 그 보살과 닮아 있어요. 극락의 주인이거든요 10지 보살이면. 색구경천(色究竟天)이라고 하는 최고의 현상계 중에 최고의 현상계, 천국이죠. 천국 중의 천국의 리더가 누구냐 하면 10지 보살이에요. 10이라는 건 1부터 10까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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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수로 봤을 때 10은 극치의 수죠. 완전 수. 10이라는 거는 요즘 게임으로 치면 만렙, 궁극의 레벨에 있는 보살이라는 겁니다. 이 존재가 다른 모든 보살보다 맏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모든 성인 중에 독생자다. 하나님의 자녀인데 우리도 다 굳이 왜 예수님만을 유일한 자녀라고 얘기할까요? 제일 아버지를 닮았다는 겁니다. 타고나기를 그런 게 아니라. 기독교식으로는 타고나길 그렇다고 이해해도 돼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아무튼 제일 닮았다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수행을 많이 해서 닮았다. 결국은 결론은 똑같죠. 제일 불성 그대로인 존재가, 이 지구가 아니죠, 이 우주에는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 지구도 다 관리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뭐죠? 불교랑 기독교가 추구하는 경전들의 내용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이 특히나 극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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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가자는 얘기를 하기 때문에 이 불교의 극락도 좀 이해하셔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불교는 그럼 어떻게 얘기하는 거냐?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누구냐? 화엄경에서 10지 보살이에요. 10지 보살에 대해서 한번 들어보실래요? 화엄경 10지품에요.
[* 화엄경 10지품. 영혼육 갖춘 10지 보살은 성자, 영인 비로자나불은 성부! 불자여, 전륜성왕이 낳은 태자로서 어머니가 정비이며, 몸이 전륜성왕의 상호를 두루 갖추어서, 전륜성왕이 태자로 하여금 흰 코끼리의 황금보좌에 앉게 하고, … 4대해의 물을 길러다가 황금 병에 넣어서, 왕이 이 병을 잡고 태자의 정수리에 물을 부으면, 이것을 ‘왕의 직책을 받은 지위’(受王職位)라고 하며, 관정을 한 찰제리(크샤트리아)의 왕의 무리에 속하게 되며, 능히 10가지 선한 길을 갖추고 행하여 ‘전륜성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보살이 직책을 받음도 이와 같아서, 모든 부처의 ‘지혜의 물’이 그 정수리에 부어지게 되니, ‘직책을 받음’이라고 이르며, 여래의 10가지 힘을 갖추게 되니 ‘부처’의 무리에 속하게 된다(여래의 직책을 받은 지위, 受職之位). 불자여, 이것을 ‘위대한 지혜의 직책을 받음’이라고 이른다.]
영혼육 중생성을 갖추고 있는 10지 보살은 성자고, 순수한 영인 비로자나불은 성부겠죠. 화엄경 10지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불자여, 이미 보살을 말해요. 부처의 자녀여,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는 건 인도에서 제일 위대한 왕이에요. 인도의 단군 같은 존재입니다. 전륜성왕이라는 게 륜이 바퀴 륜(輪)자거든요. 이 전륜성왕은요 요즘 보면 UFO예요. 이게 불경에 나옵니다 UFO가. 전륜성왕이 아침에 딱 일어나서 나오면 륜이 돌고 있대요. 앞에서 궁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금륜 은륜 여러 개가 있어요. 그걸 타고 한순간에 사해를 다 돌면서 백성들을 통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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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운전할 전(轉)자 써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합니다. 바퀴를 돌리는 왕이라는 뜻이에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이 바퀴를 돌린다는 거는 지금 그래서 전륜성왕은 통치하는 바퀴를 돌리죠. 그러니까 부처는 전륜성왕하고 상대되는 개념인데 전륜성왕도 부처가 갖는 모습을 다 갖고 있어요. 32상호라는 위대한 인물이 지니는 모습을 싹 갖고 있어요. 그런데 이제 정치 쪽으로 가면 전륜성왕이 되는 거고, 종교로 가면은 부처가 되는 겁니다. 스승은 부처, 임금은 전륜성왕 그래요. 그래서 석가모니 태어났을 때도 예언이 그랬잖아요. 정치를 하면 전륜성왕이고 나가면, 출가를 하면 부처가 될 거다. 그 당시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전륜성왕에 대해서. 전륜성왕은 세속에 있는 사실은 성자죠. 사실은 세속에 있는 성자인데 정치를 하는 성자예요. 그래서 부처랑 전륜성왕 개념을 합쳐야 원래의 기독교적인 메시아 개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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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메시아는 뭐냐면요 예수님한테 기대하는 거는 내성외왕 안으로는 부처 같은 성인이면서 밖으로는 전륜성왕, 통치자이기를 바라는 거죠. 비슷한 발상이니까 이렇게 엮어봤습니다. 전륜성왕 그러면 위대한 왕이에요. 이 전륜성왕은 무기로서의 바퀴를 굴리니까, 통치의 바퀴를 굴리니까 부처는 뭘 굴린다고 했습니까? 법륜을 굴린다는 말을 쓴 거예요. 지금 전륜성왕에 지금 상대되는 개념으로 얘기를 한 겁니다. 석가모니는 법륜을 굴리셨다. 그래서 법륜을 굴리셨다 해서 전법륜(轉法輪) 그러죠. 이 전륜성왕이랑 지금 부처는요 그 모양만 다르지 사실은 같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돌아가실 때 자신의 “장례를 어떻게 할까요?”라고 할 때 뭐라고 했냐면 “전륜성왕의 법대로 해주라” 그랬어요. 이해되시죠. 동양에서도 공자는 스승이고 옛날 요순은 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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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통치자까지 한 성인과 교사로서만 살다 간 성인을 동양에서도 구분합니다. 주자의 대학장구(大學章句) 서문 보면 하늘이 백성을 사랑하셔서 군(君)과 사(師)를 보내주셨다 이래요. 그럼 군은 임금, 사는 스승이니까 군은 전륜성왕, 사는 부처죠. 이게 모든 문명에 다 있다고요 이게 인도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에도 군은 누구죠? 다윗과 솔로몬 같은 왕, 그다음에 사는 누구죠?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예언자. 근데 메시아는 이 두 개를 다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다 똑같아요. 인류는 보편적으로 위대한 스승이면서 존경할 만한 스승이면서 통치까지 해주시는 그런 위대한 존재를 바라기 때문에 전륜성왕과 이 부처도 그런 걸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들 때도 전륜성왕의 예를 설명해주고 보살 얘기를 해요. 화엄경에서 10지가 되는 존재는 전륜성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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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를 낳아가지고 어머니가 올바른 정비(正妃)이고 몸이 전륜성왕의 상호까지 다 갖고 있어야 돼요. 부처가 갖는 그런 모습을 다 가져야 돼요. 그런 존재로서 전륜성왕이 태자로 하여금 흰 코끼리의 황금 보좌에 앉게 하고. 그러니까 전륜성왕의 자격이 있는 태자라는 겁니다. 어머니가 정비라는 건 후궁이 아니라는 얘기죠. 제대로 된 정비한테 태어난, 모양이 훌륭한 전륜성왕의 자녀가 올바로 자라게 되면 이제 임금을 물려줘야 될 때가 오겠죠. 그때 무슨 의식을 하냐면요 사방의 대해 물을 길러다가 황금 병에 넣어가지고 왕이 이 병을 잡고 태자의 정수리에 물을 부어주면서 관정식(灌頂式)을 해요. 그러면서 이렇게 물을 부어주면서 이제 왕으로 임명하는데 그게 왕의 직책을 받는 직위라고 해서 수왕직위(受王職位)라고 한문으로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요. 이게 받을 수(受)자입니다.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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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王)의 직(職)을. 왕의 직을 받은 자리(位), 이게 지금 관정식을 하는 건데요. 관정식 때 이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전륜성왕도 그렇게 한다. 세속의 왕도 이렇게 한다. 그러면서 관정을 한 이 찰제리(刹帝利), 한문으로 찰제리 그러면 이게 인도말로 지금 크샤트리아예요. 브라만 그 아래 계급이죠. 왕족, 정치하는 계급, 찰제리의 무리에 속하게 된다. 이제 당당한 왕이 된다. 능히 10가지 선한 길을 갖추며. 전륜성왕도 10선은 행해요. 10가지 선을 행하기 때문에 그래서 전륜성왕이 된다. 진정한 왕이 된다. 즉 보세요. 태자가 관정의식을 치르고 왕의 직위를 받아서 왕이 되는 게 관정식이라면, 10지 보살은 어떤 존재라는 겁니까? 보살이 당당하게 관정식을 받고 이제 부처로서 활동한다는 겁니다. 보세요. 이 10지 보살은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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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을 받음도 이와 같으니 모든 부처의 지혜의 물이, 이게 유형의 물이 아니죠. 지혜의 물, 물은 원래 지혜를 상징하니까 지혜의 물이 정수리에 부어지면서 직책을 받게 되면서 여래의 10가지 힘을 다 갖추게 되니, 부처나 할 수 있는 10가지 힘을 싹 쓸 수가 있어요. 이제 부처의 무리에 속하게 된다. 아까 태자가 왕이 됐듯이 보살은 이제 부처로서 등극을 한다. 그런데 10지 보살이에요. 신기하죠. 이미 부처예요. 그런데 10지 보살이다. 여래의 직책을 받는 지위라고 해서 화엄경에서 뭐라고 하냐면요 수직지위(守職職位). 지금 왕이라는 칭호만 빼고 수직지위라고 합니다 이 10지 보살 자리를. 이것을 위대한 지혜의 직책을 받음, 여래의 직책을 받았다 하는 거다. 자 보세요. 불교에서 10지 보살은요 분명히 보살인데, 중생성을 갖고 있는데 불성 그대로 살기 때문에 부처랑 똑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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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지 보살이 사실은 정식 부처예요. 우주에서 진짜 부처고. 하지만 보살은 모두 부처예요. 불성을 쓰기 때문에. 똑같은 성부와 성령이 안에 있기 때문에. 하지만 성자로서 등급을 매기자면 1레벨부터 10레벨이 있는데 궁극의 10레벨의 이 존재는 진짜 부처 중의 부처예요. 보살 중의 보살이에요. 그래서 이런 10지 보살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게 화엄경 이론입니다. 이 화엄경의 이론하고 요한복음을 맞춰보면 지금 예수님은 10지 보살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이해되십니까? 성부 성령의 온전한 구현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관정의식에 상응하는 게 이스라엘은 뭘 하죠? 기름을 부어줘요 왕한테.
[* 그리스도(Christ)
히브리어 ‘메시아’의 그리스어 번역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구세주’를 의미함.]
그래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의 그리스 번역어인데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라는 뜻 자체가 메시아라는 뜻이고 무슨 뜻이냐?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구세주, 예언자이면서 왕, 완벽한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이렇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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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이 얘기를 왜 했냐면요 아무리 불성 그대로 구현했지만 보살은 보살이고 부처는 부처죠 엄밀히 말하면. 그래서 이 무형의 비로자나불과 이 몸과 생각 감정을 지닌 보살은 차별이 또 있겠죠. 왜냐하면 이 존재는 차가운 혼을 따뜻하게 덥힌 존재지 이 차가운 혼조차 없는 그냥 불덩어리인 성령을 말하는 건 아니거든요, 불성을. 그러니까 화엄경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 화엄경(십지품).
해탈월 보살이 물었다. “불자여, 만약 10지 보살의 신통경계가 이와 같다면, 부처의 신통력은 어떠합니까?” 금강장 보살이 말하였다. “불자여, 비유하자면 한 사람이 있어 4방의 천하에서 한 덩어리의 흙을 취하여 말하기를 ‘끝이 없는 세계의 큰 땅이 많은가? 이 한 덩어리의 흙이 많은가?’라고 하였다. 내가 그대의 질문을 보면 이와 같을 뿐이다. 여래의 지혜는 끝이 없고 동등한 이가 없다. 어떻게 보살과 더불어 비교할 수 있겠는가?”]
화엄경 10지품에요. 해탈월 보살이 물어요. 불자여, 만약 10지 보살이 그렇게 위대하다면 부처의 신통은 어떻습니까? 10지 보살이 이미 부처급이라면 그러면 비로자나불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라고 물어보는 겁니다. 그럼 금강장보살이 뭐라고 대답하냐면요 불자여, 비유하자면 한 사람이 사방에 천하에서 한 덩어리 흙을 딱, 이 손에 흙 하나를 쥐어요. 그리고 취하여 말하기를 “이 흙이 많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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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흙이 많냐?”라고 한다면 비교가 되겠는가 이거죠. 내가 그대의 질문을 보면 이와 같다. 여래의 지혜는 끝이 없고 동등한 이가 없다. 어떻게 보살과 더불어 말을 하겠는가? 뭡니까? 갑자기 부처라고 했다가 또 형편없이 얘기하죠. 이게 그 감각이에요. 보살은 혼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비로자나불하고는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불성 그 자체랑은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 한 개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비교가 이렇게 안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똑같은 흙은 흙이기 때문에 부처는 부처다는 겁니다. 이해되세요? 이래서 예수님이 겸사(謙辭)를 할 때 “어떻게 나를 거기다 비유하느냐? 성부한테 나를 왜 비교하느냐?”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개체성 입장에서는. 하지만 불성을 따른다는 입장에서는 완벽한 구현자인 겁니다. 묘하죠 말이? 개체성 안의 그 조건 하에서는 완벽하다는 겁니다. 이걸 아셔야 돼요. 대승불교도 이걸 잘 이해를 못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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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도 이걸 잘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꺼번에 둘을 다, 한꺼번에 두 종교에 다 지금 설명을 해드리는 겁니다. 이걸 이해 못하시면요 인간의 목표가 정확하게 서지질 않아요. 여러분은 신이 되셔야 되는 게 아니고 여러분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법신이 되려고 공부하시는 게 아니에요. 위대한 화신(化身)과 보신(報身)이 되려고 하는 겁니다. 위대한 중생성을 갖춘 존재가 되시려고 공부하시는 거예요. 불교에서는 이걸, 법신(法身)이라 그래요 진리 그 자체는. 근데 이 혼의 세계에서는 보신이니 화신이니 그래요. 혼의 세계는 공부한 만큼 닦이니까 보신이고, 뿌린 대로 거두는 몸이라는 뜻에서 보신, 인과응보해서 보신. 화신, 몸뚱이를 지니고 있다는 측면에서 화신. 그래서 여러분의 혼은 닦여서 보신과 화신이 되는 거지 법신이 되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법신은 진리, 무형의 진리 자체를 말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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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혼과 육의 세계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혼과 육은 진리와 함께, 법신과 함께 위대해지는 게 목표입니다. 그래서 목적을 분명히 정하세요. 그래서 여러분은 위대한 혼을 갖춰야만, 위대한 이 육신을 갖춰야만 중생을 도와줄 수가 있고 함께할 수도 있어요. 이 육신을 꼭 이 육신만 생각하지 마세요. 보이지 않는 육신도 있어요. 종교나 철학에서 얘기하는 이 성자들이 갖는 영원한 몸은 이 육신은 아니에요. 이건 지구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수명이 한 100년 안팎입니다. 이걸 오래 쓰는 게 아니고 에너지로서의 몸을 가져요. 그게 이제 영혼육이 온전해진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돌아가실 때 육신은 돌아가셨지만 그 에너지로서의 몸을 얻는 겁니다. 그래서 그 몸이라야 이제 우리가 천국 가서 또 활동하는 거죠. 이 육신을 지구 걸 갖고 가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영적인 몸으로 거듭나라는 얘기를 지금 요한복음 시작부터 했던 거고요. 자 이해되시죠?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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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와 성자 성령의 구분 좀 정확히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표가 뭡니까? 성부와 성령은 우리 안에 이미 퍼펙트해요. 성부와 성령을 어떻게 닦겠다는 게 아니에요. 우리 목표는 성자가 되자는 거예요. 성부와 성령을 구현한 정도가 이 성자의 정도죠. 이해되시죠? 성부와 성령을 찾고 하나가 되려고 노력해서 여러분이 위대한 성자가 되는 것. 그게 예수님이 내가 길이요 진리니까 날 따르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을 따라야 돼요. 예수님이 걸으신 길, 성자의 길을 가셔야 됩니다. 성부와 성령이 되기 위해서 공부하시는 게 아니에요. 성부와 성령은 이미 퍼펙트하게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어요. 이해되시죠? 불교로 얘기하면 그겁니다. 이 불성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불성을 중생성을 통해 구현하려는 게 목표지. 불성은 원래 완벽하게 주어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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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한테. 이 관점이 서야 이 현상계를 개조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현상계에서 창조적인 리더들이 나오려면요 불성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 나와야 되는데 자꾸 불성과의 합일에서 만족해버리는, 이런 성자들이 나오니까 세상이 안 바뀌는 겁니다. 선은 선이다. 악은 악이다. 얘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귀한 겁니다 세상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참 의미를 아신다면 우리는 성부 성령과 하나로 통하는 성자가 돼야 된다는 겁니다. 이 목표를 분명히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있어요. 아홉 번째 8장 12절에서 19절 보시죠.
[9. 8:12~19.
12. 예수님께서 다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그리스도, 성자, 사람의 아들)이다. 누구든 나를 따르는 자는, 다시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성자죠. 나는 성자다라고 얘기하신 거예요. 나는 성자다. 성부 성령 그대로 살아가는 존재니까 나는 그 자체로 불덩이다. 내 영혼육은 불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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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랑 내 몸뚱이랑 같이 있는 사람도 깨어날 거다. 왜냐? 나는 내 몸뚱이까지도 다 깨어 있기 때문에. 이해되세요? 성령의 불씨가 있기 때문에 영혼육이 온전해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당하게 내가 빛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겁니다. 누구든 나를 따르는 자는 다시는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내 행동을 본받고 자신의 성령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그 어둠에 빠지지 않겠죠.
[13.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지금 당신은 자기 자신을 내세워 증언하고 있으니 당신이 하는 말은 근거가 없소.”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지금 당신은 자기 자신을 내세워 증언하고 있으니 당신 말은 근거가 없소. 지금 이스라엘에서는요 그 당시에 증언은 최소한 2명이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 혼자 증언한 거 아니냐. 그러니까 그 증언은 무효다라고 하니까
[14.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길 “내가 나 자신을 내세워 증언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므로, 나의 증언은 참되다. 그러나 그대들은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 한다.”라고 하셨다.(나는 인류에게 영생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하늘에서 왔음.)]
예수님이 내가 내 자신을 내세워 증언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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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으므로 나의 증언은 참되다. 그러나 그대들은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셨다. 지금 나는 나의 뿌리인 하느님을 알고 얘기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이 삶이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는 삶이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또 이 지상에서 나는 가서 또 하늘나라로 갈 거고. 이걸 명확히 알고 있는 내가 하는 얘기기 때문에 이 말은 힘이 있다 이겁니다. 근데 너희들은 내가 지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니까, 그 얘기는 사실 너희들은 너희의 성령을 모른다는 겁니다. 나를 모르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대들은 그대들의 양심과 성령의 소리를 못 듣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대들의 말보다는 내 말이 맞다라는 얘기를 한 건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뭐라고 하시냐면
[15. 그대들은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나,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아버지 뜻에 따라 심판할 뿐, 개인적 심판 없음)]
그대들은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나, 너희들 마음대로 너희들 꼴리는 대로 얘기하지만 나는 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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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대로 심판하지 않는다. 아버지 뜻대로만 하는 거죠. 심판을 안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러 온 부분도 있거든요. 예수님이 이런 얘기하세요. 심판할 게 너무 많다 이런 얘기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악에 대한 심판이죠. 그게 또 구원이에요. 이 심판을요 벌 주는 거로만 이해하시면 안 돼요. 악은 악이다라고 말하는 게 심판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건강해질 수가 있거든요. 환자가 왔으면 의사는 심판을 해줘야 돼요. “이거는 지금 아픈 겁니다. 당신 지금 병 걸렸습니다”라고 얘기해 주는 것도 심판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치료해서 이렇게 사십시오.” 거기에 구원이 있기 때문에 심판과 구원은 둘이 아닌데요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지금 에고의 입장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내가 뭔 억하심정(抑何心情)이 있다고 당신들을 심판하느냐? 아버지의 뜻대로 얘기할 뿐이다”라는 거죠.
[16. 그러나 만약 내가 심판을 한다면 나의 판단은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심판을 한다면 난 할 거다. 나의 판단은 옳을 것이다. 내가 하는 심판은 옳을 것이다. 내가 병이 있다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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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병이 있는 거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뜻대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7.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일치하면 유효하다고 쓰여 있다. 18. 나는 나에 대해 증언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해 증언하신다.”]
너희도 말했듯이 두 명이 증언을 하면 맞지 않느냐 이거죠. 아버지랑 내가 같이 증언하면 내 말도 참될 거다 하는 거죠.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일치하면 유효하다고 했다. 나는 나에 대해 증언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해 증언한다. 사실은 지금 둘이 증언하는 거다. 이런 말이 뭐 먹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의 논리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죠. 예수님도 이렇게 얘기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계셨구나. 예수님이 뭔 생각하시는지 이해하셔야 돼요. 그렇게 우리도 생각을 해야 되거든요. 그게 예수님을 따르는 거죠. 예수님은 뭔 일 할 때마다 계속 지금 내 뜻과 아버지 뜻을 구분하죠. 구분하셔야 돼요. 이걸 갖다가 “아 그것도 분별심이다. 나누지 마라” 이렇게 하시면 안 돼요. 나눌 건 나눠야 돼요. 그래야 그게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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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하는 거예요. 아버지 입장이 뭔지 분명히 알아야 돼요. 그래야 내 에고를, 내 이원성을 아버지 뜻대로 초월성과 하나로 맞추는 거죠. 그러면 초월성 보리(菩提), 이원성 살타(薩埵)가가 합쳐지면서 보살(菩薩)이라는 위대한 성인이 나옵니다. 성자, 성부와 그 성부의 분신으로서 성자, 이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늘 예수님은 지금 이렇게 이원적으로 생각하고 계세요. 이걸 가지고 이원성에 빠졌다고 하실래요? 아니죠. 예수님은 늘 이원적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절대계와 현상계, 아버지와 아버지의 자녀.
[19. 그러자 그들이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에 있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 서 답하시길 “그대들은 나를 모르고, 나의 아버지도 모른다. 만약 그대들이 나를 알았다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면 나를 통해서 아버지도 온전히 알 수 있음)]
그러자 그들이 “당신의 아버가지 어디에 있소?”라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길 그대들은 나를 모른다. 내가 지금 성령 그대로 얘기하고 있는 거, 성부 뜻 그대로 얘기하고 있는 걸 모르고 나의 아버지도 모른다. 성자를 모르니 성부도 모른다. 만약 그대들이 나를 알았다면, 성자를 알았다면 성부도 이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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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해되시죠? 왜냐? 성자는요 아버지 뜻 그대로 사는 사람인데 우리가 성자를 보고 비방해요. 당신 이상하다라고 비방한다는 건요 아버지를 모르는 거죠. 지금 성자를 모르는 게 문제가 아니고 양심이 뭔지 모르니까 양심대로 사는 사람을 비방하는 거죠. 양심이 뭔지 알았다면 양심대로 사는 사람을 비방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성자를 비방하는 건 사실은 성부를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모른다는 겁니다 성부가 어떤 존재인지. 이제 같은 논리 지겨우시죠? 예수님 말씀도 이제 슬슬 자꾸 같은 얘기만 하시네. 이래요. 성인은요 같은 얘기만 계속하세요. 또 재밌는 얘기인 양 또 하세요. 또 시작해요. 근데 예수님이 완전히 새로운 얘기를 할 수 없는 이유가 뭔지 아시겠어요? 아버지 뜻만 얘기하니까요. 이 사람이 재밌는 걸 추구한 사람이라면 오늘은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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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랑 성령을 위치를 바꿔서 설명해 보고 막 마음대로 해도 되죠, 재미있게만 해주면 되니까. 하지만 이분은 아버지 뜻 그대로 진리만 얘기해 주는 분이기 때문에 일관성이 있고 한결같은 얘기만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어요. 왜냐하면 상황 상황에서 영감을 드러내는 말이고 그 상황에서 울려 퍼지는 하늘의 소리를 대변하기 때문에 지루하다고 말할 수 없는 그 힘이 또 있죠. 자명함이 있고. 이 차이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뭔 얘기를 해도요 이 상황에 맞는 진리의 말을 아버지 뜻이 뭔지 알고 얘기를 하면 재밌고요. 여기 아버지 뜻이 이렇게 써 있는 글로 된 걸 아무리 우리가 서로 읽어도요 읽으면서 우리가 양심을 전혀 모르고 양심의 그 울림이 없이 얘기하고 있다면요 아버지 뜻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재미가 없습니다. 하는 사람도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하고요. 듣는 사람도 “내가 저걸 왜 듣고 있지?” 하는 이런 장이 펼쳐질 거고, 양심에서 제가 제 양심의 울림이 있는 대로 말씀을 드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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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양심도 또 울림이 있어서, 양심이 재미있어 하기 때문에 재미있어요. 욕심이 재미있어 하는 게 아닌데 양심끼리의 공명 때문에 재미있어집니다. 이런 것도 이해하시면 재밌죠. 이런 게 하나 있고 그런데 좀 이렇게 그냥 지나가면 섭섭하니까, 우리가 아버지 안에서는 완전해지거든요. 이렇게 뭐죠 한계가 많은 에고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에고도 그렇죠. 자신의 영광만 추구하면 문제가 있는 이 에고도 아버지의 영광을 추구하면 진실하고 거짓됨이 없어진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 맛을 좀 체험해 보실래요. 지금 이 아버지와 만나는 작업을 해보겠습니다. 이게 늘 제가 하던 거예요. “또 뭐 재밌는 거 있으려나?” 하지 마시고 제가 또 막 지어내면 재미가 없죠. 그거는 영적으로는 재미가 없죠. 그래서 늘 같은 건데 이번엔 느낌을 살짝 바꿔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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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버전으로. “몰라 괜찮아” 대신 “아버지” 하세요. 아버지 하면서 몰라 하세요. 눈 감으시고 지금 몇 시인지 모릅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요. 어떠한 생각과 감정도 다 내려놓으시고 몰라 하세요. 오직 아버지만 찾고 아버지에만 집중하겠습니다. 모른다 하시고요. “아버지”라고 한 번씩 얘기하시면서 자신의 존재감에만 집중하십시오. 아버지는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성스러운 영이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감 외에 다른 게 아닙니다. “내가 존재한다”라는 이게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요 아버지라고 부르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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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재한다는 그 느낌”에만 집중해 보세요. 다른 거는 다 내려놓으십시오. 몰라 괜찮아라고 하시고요. 오직 존재한다는 그 느낌에만 집중하십시오. 내가 존재한다는 건 그 자체로 신성한 거고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안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어떠한 불만도 없고요. 어떠한 부족함도 없습니다. 평안과 고요와 만족만 흐를 겁니다. 그 평안과 고요를 누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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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존재한다는 그 느낌에만 집중하시고 일체를 모른다라고 하십시오. 일체의 피조물에 대해서는 모른다라고 하세요. 우리가 찾는 존재는 아버지니까요. 아버지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아버지 안에서 모든 부정한 건 정화되고 모든 탁한 것들은 맑아질 것입니다. 여러분 몸 전체가 깨어난다는 걸 느껴보시고요. 몸 전체가 맑아진다는 걸 느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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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안에서 정화된다는 걸 느껴보세요. 생각도 감정도 오감도 모두 성령과 함께할 때는, 아버지와 함께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투명할 겁니다. 이 느낌들 느껴보세요. 순수한 “나”라는 존재로서 존재해 보시고요 그 존재감 속에서는 모든 생각 감정 오감도 모두 완전하다는 것을 느껴보십시오. 자 저를 보시고요. 어떠세요? 이런 느낌이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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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요, 우리 마음 안에서 아버지의 영역은요 여러분이 손댈 수 없는 영역이어야 합니다. 생각 감정 오감은 여러분이 계속 바꿀 수가 있어요. 여러분이 조작을 하고 계세요. 생각 감정 오감이 아니에요. 아버지는 조작할 수가 없는 자리여야 돼요. 그래서 생각 감정 오감을 다 내려놓고 계시면 여러분이 존재한다는 것만 남습니다. 존재한다는 건 여러분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만든 것도 아니고요. 여러분이 바꿀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조금도 힘쓸 수 없는 그 자리가 아버지 자리입니다. 이 존재한다는 중심점을 정확히 찾고 나시면요, 지금도 느껴보세요. 지금도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느끼시면서 제 얘기를 들으세요. 그러면요 이 일체의 이 세상과도 하나로 꿰뚫어지는 그 느낌이 있고요 나의 생각 감정 오감도 다 그런 신성의 도구라는 느낌이 일어나실 겁니다 자연스럽게. 집착을 하지 않고 쓸 수 있는 힘이 생겨요. 생각 감정 오감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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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전부인데 한 걸음 떨어져서 이 아버지 자리에서 보기 때문에 전체가 나의 도구가 되고요. 내가 쓰는, 잘 써서 아버지의 뜻을 구현하기 위한 재료로 보이게 될 겁니다. 그러면 완전해져요. 생각 감정 오감이라는 이 제한되고, 이 죄 많고, 무지와 아집에 찌들어 있는 이 물건이 아버지와 함께 돌아갈 때는 이게 지혜와 자비의, 선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거죠. 이거를 온몸으로 지금 체득하시지 않으시면요, 말로만 들어서는 절대 도움이 안 됩니다. 말로만 듣고요 “아 그렇지” 하시면요 여러분이 악의 유혹을 느낄 때 막을 수가 없어요 그 힘으로는, 그 정도로는. 바로 성령을 불러낼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바로 여러분 존재의 중심과 하나가 될 수 있어야만 여러분은 생각과 감정과 오감을 성령의 뜻대로 쓸 수가 있는 그런 힘을 갖게 되세요. 평소에 계속 연습을 하시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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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에 그게 나오겠습니까? 여러분이 욕망대로 하고 싶고 여러분이 편견대로 막 하고 싶을 때, 그때 “성령의 뜻은 그게 아니지”라는 걸 알고 성령의 뜻대로 이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은 망가지는 인간관계를 다시 세우고 파탄에 이를 수도 있는 이 가정을 다시 일으키는 힘, 직장에서 악이 창궐할 때 선을 구현할 수 있는 이 힘은요 이 사회와 인류 전체 어떤 삶을 바꿀 수 있는 그런 힘은요 이 성령에서 나와요. 작은 불씨에서 나오는데 이 불씨가 없단 말이죠. 나한테는 불씨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겁니다. 없어질 물건이 아닌데. 그럴 때는 이렇게 모든 걸 내려놓고 아버지를 부르시면서 침묵하세요. 그러면 내 안에 존재감이 아버지기 때문에 환하게 드러납니다. 존재한다는 거 외에 어떤 것도 다 오염돼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안의 여러분의 존재. 그래서 하나님이 “내 이름은 나는 있다는 거다”라고 얘기하신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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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난 존재한다. 그것만이 신성입니다. 나는 존재한다는 그 자리, 나의 현존을 느끼신다면 여러분의 중심 자리, 그 현존의 느낌이 있다면요 여러분의 모든 삶은 다시 중심을 잡게 되고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가 있습니다. 이 간단한 기법을 5분만, 잠깐씩 5분씩만 시간을 내서 한 번씩 해주세요 수시로. 여러분의 삶이 다시 중심을 찾게 됩니다. 잘못된 게 있으면 드러나게 돼 있어요. 올바른 방향이 있으면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이게 가장 실질적인 팁입니다. 이걸 안 하고 그냥 경전만 읽으셔도 도움이 안 돼요. 모든 걸 내려놓고, 자 보세요. 모든 걸 내려놓고요. 내가 쥐고 있는 모든 소유물, 가난이니 무소유니 밖으로 찾지 마시고요. 이게 진짜 가난이고 진짜 무소유입니다. 진짜 가난은요 내 욕심을 다 내려놓고 아버지한테 집중해 주는 거예요. 진짜 무소유는 내가 쥐고 있는 쓸데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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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들을 다 내려놓고 이 참나 자리에다가 혼신을 다해서 집중해 주는 겁니다. 이게 최고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고 경배예요. 아버지를 돌아봐주지를 않으면서 자꾸 아버지만 입으로 얘기하면서 밖으로만 밖으로만 아버지를 찾아서 밖으로 달리는 행위에서는 절대로 구원이 올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안에 계세요. 우리 안에. 우리 생각과 감정 오감의 그 근원에 계세요. 밖으로 찾아가시면 안 되고 중심 자리를 찾아가야죠. 그러니까 가난이니 무소유니 하는 게 귀한 가치가 되는 거지 이런 식의 가난과 무소유가 아니라면 이 형식적인 가난과 무소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삶만 더 고달프게 하지. 영적인 가난과 영적인 무소유가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모든 걸 내려놓으시고, 지금 단 5분이지만 모든 걸 내려놓으시고 순수한 나라는 존재감에, 아버지 자리에 경배하셨잖아요. 이게 최고의 기도고요. 진정한 기도가 이루어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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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에서 힘이 나오게 돼 있어요. 영적인 힘이 나옵니다. 악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요. 선은 선이라고 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그 힘으로 하루를 또 살아가세요. 기도하시고 그 힘을 쓰시고. 아버지와. 기도라는 거는 이 성령의 충전을 받는 겁니다. 성령으로 내 혼을 충전시키고 그다음에 그 혼을 써가지고 죄로 빠질 수 있는 내 혼을 건져서, 죄에서 건져서 악을 이겨내는 방향으로 그 혼을 쓰신다면 여러분은 위대한 성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자질이 충분해요. 예수님이 “우리도 다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얘기를 하신 거죠. “나만 자녀가 아니고 너희도 자녀다. 제발 그걸 알아라. 내가 모범을 보여줄게. 내 길을 따라서 너희도 자녀가 되라.” 이게 예수님이 다녀가신 목적이고 요한복음에서 인용되고 있는 예수님의 실제 육성은 다 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또 하나 더 해볼게요. 이것까지 하고 끝낼 것 같은데요. 열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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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21절에서 30절이요.
[10. 8:21~30.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나는 떠난다. 그대들이 나를 찾을 것이나, 그대들은 자신의 죄 안에서 죽으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대들은 올 수 없다.”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나는 떠난다. 그대들이 나를 찾을 것이나 그대들은 자신의 죄 안에서 죽으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대들은 올 수 없다. 지금 유대인들한테 하는 얘기입니다. 그대들은 자신의 죄 안에서 죽으리라. 너희는 지금 욕심을 따르는 삶으로 일관되고 있다. 지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양심을 따르는 나는 지금 갈 곳이 따로 있다. 내가 가는 곳에 그대들은 올 수 없다. 왜냐? 욕심을 따르니까요. 어둠을 따르니까 빛의 세상에 올 수가 없죠.
[22. 이 말을 듣고 유대인이 물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들은 올 수 없다’는 말은 자살을 하겠다는 뜻인가?”]
이 말을 듣고 유대인이 물었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그대들은 올 수 없다”라는 말은 자살하겠다는 뜻이냐? 전혀 이거는 뭐 뭔 또라이예요? 말귀를 못 알아먹어도 이렇게 못 알아먹으면 안 되죠.
[23.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 속하나,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서 난 이, 성령의 화신인 성자. 아버지의 왕국에서 지상에 내려온 성자.)]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얼마나 답답하신지 지금 느껴지세요? 예수님의 입장. 지금 이런 사람한테도 예수님은요 가르치겠다고 오셔서 혼신을 다해서 얘기하셨어요. 그러니까 이게 보살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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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이라는 겁니다. 이게 진짜 보살이에요. 어떻게든 가르쳐주려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 속하나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존재고, 영적으로는요. 또 나는 어디서 왔다는 얘기입니까? 하늘에서 왔다. 하늘나라 천국에서 왔다. 천국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너희들 도와주려고 왔다.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라. 안 그러면 난 곧 가야 되는데 내 말 좀 들어라. 아무도 못 건지고 가면 온 보람이 없잖아요.
[24. 그래서 그대들이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내가 스스로 있음”(나의 현존, 성령의 현존)을 믿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정녕 자신의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각자 자신의 내면의 성령을 각성해야 함.)]
그래서 그대들이 죄 속에 죽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내가 스스로 있음”을 믿지 않는다면. 여기서 I Am이에요. 이걸 지금 기존 성경에는 뭐라고 번역하냐면 “내가 그 임을” 이런 식으로 번역하죠. “내가 그 존재임을 믿어라. 내가 메시아라는 걸 믿어라.” 이 정도로만 푸는데요. 그런 뜻이 아니고 보십시오. “내가 스스로 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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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다는 걸 알아라.” 즉 뭡니까? I Am은 여러분의 영이에요. 여러분이요 여러분 각자가 내가 스스로 있다 하는 그걸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있음이라는 I Am은 신의 이름이에요. 여호와가 모세한테 말할 때 “I Am THAT I Am.” 그랬잖아요. 나는 I Am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I Am을 안다면” 이런 뜻입니다. 너희들이 그대들 안에 있는 이 현존, 신의 현존을 그대들은 정녕 믿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정녕 자신의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제발 그대 안에 있는 신성을 알아라”는 이 뜻을 지금 그냥 “내가 메시아라는 걸 안 믿으면 죽을 거다” 이 정도로 풀어버리면 안 되겠죠? 심오한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심오한 얘기를 던지신 거예요. “I Am을 알아라.” 그대의 현존. 이 현존을 생각해 보세요. 보세요. 생각 감정 오감은 무상하고 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 있는데 현존 자체, 영 자체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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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 속에 들어와 있지 않아요. 여러분의 위대한 신비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신비예요. 여러분 마음이 현상계랑 함께 수작하는 부분만 보면 계속 변하는 것 같죠?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내가 존재한다는 그 느낌이요. 그것만 안 변해요. 요놈은 시간에 영향을 안 받는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제한된 시간을 가지고 연구해도 시간에 영향을 전혀 안 받는 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마음에는. 이걸 지금 돌아보지 않고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대들 안에 현존, 늘 똑같은 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여여(如如)한 자리가 있어요. “거기를 안다면, 거기가 아버지 자리이기 때문에 거기를 안다면 그대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도마복음에서 막 하십니다. 지금 요한복음에서는 이 정도로 얘기했는데 도마복음 가면요 “그 자리만 안다면 죽지 않을 수 있다. 거기가 생명 자리다.” 여러분의 생명 자리예요. 변하지 않는다는 건 영원하다는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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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에 영원히 변치 않는 생명 그 자체의 자리가 여러분이 날마다 쓰고 사는 그 마음 안에 있다는 거예요. 사실 여러분의 존재의 본질이에요. 그래서 그 자리를 성령이라고 하고 성부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밖에서 들어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에요 애초에. 그럼 여러분이 성령이 안 들어왔는데도 잘 살고 있었다면 성령은 필요가 없죠. 성령이라는 자리는요 성령이 없이는 피조물이 굴러갈 수 없는 자리여야 됩니다. 그 조물주가 아니고는 피조물이 운행할 수가 없어야 돼요. 그런 중심점이 하나님 자리인데 하나님 없이 잘 살고 있다가 하나님이 밖에서 들어왔다고 믿으라고 하면은 그거는 잘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그런 어떤 하나의 상징이지 사람들이 얼마나 당시 우매했습니까? 우매한 사람들한테 설명하는 방편이에요. 성령이 있다는 걸 믿을 형편이 아닌 거예요. “옜다, 성령 받아라” 해서 좀 뭔가 신비해지면 “성령, 너 들어왔다. 잘 살아라.” 이렇게라도 지금 쓰는 방편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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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다 있는 건데. 이해되시죠? 자동차 고쳐달라고 하는데 모르는 사람한테는요 뭐가 문제인지도 몰라요. 이게 이상 없다고 해도 안 믿어요. 뭐라도 손을 대줘야지 믿지. 뭘 이렇게 좀 옮겨주고 이렇게 해서 “고쳤네” 하면 이제 그때 믿죠. 이해되세요? 병원 갔는데 “괜찮다고 가라”고 해도요 “뭐라도 좀 해주세요.” 막 이러면 좀 대충 하는 척이라도, 청진기라도 좀 대주고 뭘 해야 내가 고쳐서 됐다고 믿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았다라는 뭔가 있지 않으면요 나는 못 믿겠다는 사람들한테 성령을 자꾸 밖에서 들어온 것처럼 이렇게 얘기하실 때도 있지만, 본질은요 “그대 안에 이미 천국은 있다.” 이게 정답 아닙니까? 성령은 그런 겁니다. I Am이 어떻게 밖에서 들어올 수가 있어요? 여러분의 존재 자체인데. “여러분이 여러분 존재 자체를 안다면요 죄 안 짓고 살 거다.” 즉 예수님은 뭔 얘기를 하십니까? 여러분의 존재, 궁극의 존재, 현존이 그대로 뭐라는 겁니까? 즉 참나가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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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이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왜 참나인데 죄를 안 지을까요? 양심이니까요. 참나가 양심이니까요. 이런 얘기도 다 있는 겁니다. 그대들은 아래에서 왔다는 건요 뭡니까? 나는 지금 천국에서 내려왔고 그대들은 지상에서만 살고 있었다는 뜻도 되고요. 두 가지 뜻이 다 있습니다. 나는 성령대로 살고 너희들은 욕심대로 살고 있다. 욕심이 지상이고 성령이 하늘이거든요 이 구조에서는. 혼대로만 살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영대로 살기 때문에 나는 위에서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대들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 얘기는 다른 말로 예수님이 천국에서 왔다는 걸 모른다는 것만 의미하는 게 아니고요 성령을 모른다는 걸 의미합니다. 아버지를 모른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대들이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스스로 있음”을 알아야만 그대들은 죄를 안 지을 것이다.
[25.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길 “처음부터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셨다.]
그들이 물어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돌겠네 하는 거죠. 처음부터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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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언성이 좀 높아지셨겠죠. 내가 아까부터 뭐라고 하디? 이제 이거죠. 나는 지금 계속 하늘에서 왔다. 나는 성령의 대변인이다. 계속 얘기하고 계시죠. 누군데요 당신? 이제 계속 딴 얘기를 합니다.
[26. 나는 그대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참되시므로, 나는 그분으로부터 들은 것을 세상에 전할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지금 할 얘기 되게 많다. 가르쳐줘야 될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러나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참되심으로 나는 그분으로부터 들은 것을 세상에 전할 따름이다. 내가 심판도 많이 하고 그대들 지적도 많이 하겠지만 제발 알아줘라. 내가 지금 자의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양심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다는 거예요. 찜찜하니까. 찜찜하니까 지금 또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너가 무슨 명예나 어떤 이득 때문에 그러지?”라고 나를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아닌데. 내가 단순하게 메시아라는 명성을 얻으려고, 권력을 얻으려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싶어서 지금 그래서 하는 얘기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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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체 하고 싶어서 그대들보다 내가 뛰어난 존재라는 걸 과시하려고 이러는 게 아니고, 나는 아버지 뜻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금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27.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끝내 소통 실패죠. 대화는 안 듣죠. 그래서 예수님께 다시 한 번 말씀합니다.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온전한 아버지의 분신인 성자를 모두가 빛으로 맞이한 뒤에야, 나의 길을 모범으로 삼아 따른 뒤에야) ‘내가 스스로 있음’(나의 현존, 성령의 현존, 양심의 현존)을 알게 될 것이며, 내가 나의 말을 한 적이 없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을 말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혜와 사랑의 실현인 양심의 실현과 영생의 실현.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스스로의 성령을 깨닫고, 양심을 실현하고 영적 육체를 얻어, 진정한 영생을 이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들어 올린다는 게 뭔 뜻인지 지난번에 말씀드렸죠. 모세 때 청동 뱀을 이렇게 들어 올려서 청동 뱀을 본 사람들이 다 병을 나았거든요. 단순히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닙니다. 들어 올린다는 건요 십자가에 매달려서 이렇게 들어 올려지는 그 예수님의 그런 모습도 지금 상징하고 있는 거지만 들어 올려진다는 뜻은요 우뚝 서서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기만 하고 그 빛을 받으면 모두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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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모두 성령의 화신인 나, 성자의 빛을 받아야만 내가 걸은 길을 걸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에요. 이걸 단순히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보고 이렇게 “아!” 하면 구원받는 게 아니고요. “믿습니다.” 하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지금 예수님의 이 말은요 “제발 내가 걸었던 길을 따르라”는 얘기죠. 이렇게 예수님이 지금 답답해서 얘기를 하시는데 속 편하게 “예수님 믿으면 되죠?” 이렇게 얘기하면, 이 당시에 그런 얘기 꺼내시면 뭔 얘기 들을까요? “너는 어디 딴 데서 왔냐? 지금 내가 한 얘기 안 들었냐?”고 하시겠죠.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대 안에 있는 현존을 찾아야만, 그대 안에 있는 신성을 찾아야만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라고 계속 얘기하고 계시는데 거기다 대고 “그냥 예수님! 이렇게 기도하면 되나요?” 그러면 지적받겠죠. 이걸 정확히 아셔야 돼요. 너희들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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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아버지의 분신인 성자를 모두가 빛으로 맞이해서 그 길을 따른 뒤에야, 모범을 삼아야만, 보세요, 그다음에 또 나옵니다. 또 나와요. 내가 “스스로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성자가 걸은 길을 따라 걸을 때 그대들도 성령이 각성될 거다. 그대들 안에 있는 신성을 만나게 될 거다. 그래야 내가 나의 말을 한 적이 없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논리가 분명하죠. 여러분은 여러분의 양심을 못 찾으면요 예수님이 뭔 얘기했는지 영원히 모르십니다. 지금 그 얘기예요, 제가 도와드리면. 이해되죠?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있는 양심의 소리, 성령의 소리를 못 들으면요 영원히 아버지도 알 수가 없고 예수님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예수님만이 아니라 모든 성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그렇게 살다가 가셨는지? 왜 개인의 그런 효율성을 추구하지 않고 전체적인 효율성을 추구하다 살다 가셨는지? 절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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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사랑의 실현인 양심의 실현, 그리고 영생의 실현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야만 스스로 성령을 깨닫고 양심을 실천하고 영적인 육체를 얻어서 진정한 영생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고, 그래야 그런 존재들이 사는 천국에 갈 수가 있습니다. 천국 가려고 하는 분은 천국 못 갑니다. 지상에서 아버지 뜻만 온전히 실천한 사람이 천국 가는 거지 천국 가고 싶어서 선행을 하는 분은 절대 천국을 못 갑니다. 천국 가고 싶어서 선행한 사람은 누구죠? 바리새파. 전혀 달라요. 지금 여러분은 바리새파의 신앙을 하고 계신 거 아닌지 돌아보셔야 됩니다. 천국 가려고 선행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성령의 뜻이니까 하는 거지. 그러다 보면 성령의 뜻을 온전히 구현한 존재들만 사는 천국에 가는 거죠. 본말(本末)이 바뀌어있으면 못 갑니다. “그게 그거 같은데요.” 그게 그게 아니에요.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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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저는 안 된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죠. 예수님이 그래도 뭐 돈을 많이 내면 간다든가 뭐 이렇게 뭘 해놓으셨어야 되는데 길을 열어놓으셨어야 되는데 그런 말을 안 하셨잖아요. “주여 주여 하고 기적을 부리고 병을 고쳐도 나는 너희들 모른다라고 말하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허툰 꼼수를 부려선 안 되는 겁니다. “이 정도 하고 되겠지” 하면 안 되고요. 완전히 자기를 내려놔야 돼요. 진짜 영적으로 가난하셔야 천국 갈 수 있다고요. 천국 갈 생각을 갖고 계시다면 이미 아닌 거예요 그건. 그런 분들이 가는 세계가 아니거든요 천국은. 예수님 같은 위대한 보살들이, 성인들이 가시는 세계지 인간적인 욕심으로 충만한 분들이 가는 세계가 아닙니다. 무지와 욕심에 충만한 분들이 가는 세계는 천국 말고 따로 있죠. 거기로 가요.
[29. 나를 보내신 그분은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홀로 남겨두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그분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기 때문이다.” (성부의 영, 즉 성령, 양심이 늘 성자 안에 거하면서 지혜와 사랑으로 인도하심.) 30.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게 되었다.]
나를 보내신 그분은 나와 함께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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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홀로 남겨두지 않으신다. 나를 떠나실 수가 없죠. 나의 본질인데, I Am인데요. 나의 본질이기 때문에 나를 절대로 혼자 두게 하지 않는다. 나의 혼과 영이 분리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영원히 그건 분리 안 돼요. 보세요. 지옥에 가는 사람도 영과 혼은 갖고 갑니다. 육과 분리된 거지. 혼과 영은 절대로 분리될 수가 없는 물건입니다. 다만 진정한 영생이라는 건 영혼의 육까지, 새로운 영적인 육체까지 하나 더 갖는 걸 말하는 거지 영과 혼은 원래 분리될 수가 없어요. 왜냐면 보세요. 생각이라는 게 “나”라는 게 없는데 생각이 있을 수가 있나요? “나는 생각한다”이기 때문에 영이 “나”라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가 없으면 생각도 없어요. 즉 영이 없으면 혼이 없기 때문에, 영이 없는 혼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건 아닌 겁니다. 그런데요 혼이 없는 육체는 있죠. 시체도 시체는 남아 있죠. 근데 혼은요 영이 없으면 작동을 할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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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그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요. 그래서 영혼은 함께 다닌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합쳐서 “영혼” 그러지 않습니까? 영혼은 이건 누구나 영생이에요. 하느님이 만든 영혼은 영원한 겁니다. 하나님이 파괴하면 모를까요. 파괴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혼은 영원한 거라는 걸 아셔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옥 갈 걱정도 하는 겁니다. 영혼이 영원하니까 걱정하는 거지 영혼이 죽어버리면 지옥도 걱정이 없죠. 마음대로 살다 가면 그만인 건데. 없어질 때 다 없어지면 끝이니까. 이게 영혼이 영원하기 때문에 걱정인 거예요. 보세요. 혼이 죽고 영만 영원하다면 여러분도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생각 감정을 혼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옥 가도 지옥 구경도 못해요 여러분은 혼이 없다면. 영혼이 안 죽기 때문에 문제인 거예요. 영혼이 창조된 이상은 안 사라지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 하에서는 사라지는지 모르겠는데요. 극악한 사이코패스들은 1년에 몇 명씩 제거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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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혼이 살아있기 때문에 문제인 겁니다. 지옥, 지옥을 왜 겪게 될까요? 별게 아닙니다. 지옥과 천국은 진짜 별게 아니에요. 혼이 착한 생각 착한 감정 착한 실천을 했다면 이 혼은 만족감을 갖고 있겠죠. 그 만족감이 높은 영혼들이 사는 세계가 천국인 거고요. 죄를 많이 지었다면 어떨까요? 죄책감 속에 시달리겠죠. 죄책감이 많이 느끼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지옥이에요. 그럼 그 사람들은요 없는 고통도, 불지옥도 만들어서 겪습니다. 여러분이 무슨 작은 죄를 짓잖아요. 그 죄책감 때문에요 그 상이 나타나요. 밤새 시달리고 악몽을 꾸고 합니다. 똑같아요. 여러분 꿈속에 나온 존재들이 진짜 사람인가요? 꿈속에서 꼭 사람처럼 와서 말도 하고 여러분 괴롭히고 다 하죠. 즉 지옥 가 있는 영혼들은 우리가 간단하게 생각해도 악몽을 계속 꾸고 계시지 않을까요? 본인이 본인을 괴+롭히고 있는 겁니다 계속. 본인의 영이, 즉 성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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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을, 뉘우치고 스스로 각성할 때까지 고통을 주게 돼 있다고요. 여러분은 사실 이런 의미에서 지옥 안 갈 방법이 없는 거죠. 영혼이 영원하다면 여러분은 죄를 많이 지은 분은 괴로움을 겪게 돼 있는 거고 선을 많이 지은 분은 그 평안을 만족을 얻게 돼 있는 거죠. 이거는 그냥 공식이죠. 여기에 대해서 무슨 의심하실 그런 게 없어요. 다 연구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영성단체들이 죄 짓고 벌 안 받는 법을 연구하고 계세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거는 저기 지옥에다 자리 하나 맡아놓는 거랑 똑같은 행위입니다. 내 것 맡고 내 친구 것도 맡아 놓고. 다 이렇게 서로 맡아가면서 도와주지 마시고 천국 갈 길을 열으셔야죠. 그런 생각 안 하는 거예요. “내가 남 피해 준 거 있으면 참회합니다. 내가 온몸으로 갚겠습니다.”라고 얘기를 하는 게 여러분이 천국 갈 길을 여는 거고요. “죄는 내가 많이 지은 것 같지만 그게 저한테 다 온다 그러면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하는 분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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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뜻에 정면으로 거부하고 계신 겁니다. 그런 분들이 가는 곳이 따로 있다고요. 극단적인 예지만 천국과 지옥을 이런 감각으로 보셔야 됩니다. 그러면은 잠이 오세요, 지금? 이렇게 게을리 함부로 사실 수가 있어요? 하나라도 더 선을 하려고 노력하시지 않을까요? 그런 분이 가는 세계가 천국이라는 거예요. 이런 기본 감각이 안 돼 있는 이런 종교인, 진짜 심각한 겁니다. 이런 도덕성이 없는 종교인, 기본적인 도덕성의 감각마저 없는 종교인들이요 전 세계를 역사상 수없이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힘들게 했고, 자기랑 사상이 다른 사람을 마녀라고 해가지고, 이단이라고 해가지고 죽였습니다. 그 역사를 또 되풀이하고 있어요. 지금 나아진 게 아니에요. 마녀사냥 조롱하죠. “얼마나 우매했으면 저렇게 살았을까?” 하면서 또 또 입만 열면 “저거 빨갱이다. 저거 뭐다. 수구꼴통이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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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서로를 또 이단이라고 규정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똑같아요. 여러분한테 힘만 주어지면요 화형식 할 걸요 상대방이 적이라고 규정하고 나면요 사람 심리가 그 적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걸 바라게 돼 있어요. 보면 힘들거든요. 그렇죠. 부처님이 얘기하셨잖아요. “미워하지 마라. 봐서 괴롭다. 좋아하지 마라. 못 봐서 괴롭다.” 이게 기본 룰이기 때문에요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 미워함이요 이념적으로 미워하게 되면요 이제 화해할 길은 없거든요. 결국 화해할 길이 없는 적은요 없어져 주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그래서 극단적인 형태의 그런 예전의 마녀 재판이 벌어진 겁니다. 우리도 똑같이 또 할 수 있어요. 얼마든지 조건만 주어지면. 그러니까 잘 살다가 관동대지진 때 어땠습니까 일본인들이? 지진 난 걸 갑자기 한국인들한테 책임을 돌려서 그때 얼마가 죽었습니까? 꽤 죽었죠. 어마어마한 수를 죽여요. 살인을 해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죠. 딱 그 상황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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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야가 확 좁아지면서 이 못된 본성이 꿈틀하는 겁니다. 그러면요 또 똑같은 짓을 한다는 거예요. 일본군이 잔인하다고 욕하지만 우리가 또 베트남 가서 했죠. 이 조건만 주어지면 또 한다니까요. 그래서 지금 그런 조건이 없어서 우리가 지금 못하고 있는 거지 조건만 오면요 또 할 수 있는 그 힘을 갖고 있어요. 반대로 지옥 갈 힘이 있다면 천국 갈 힘도 있겠죠. 반대로 그런 상황에서요 예수님처럼, 부처님처럼 할 힘도 갖고 있어요. 이쪽에 물을 주고 키우지 않으면요 그게 습이 되지 않으면요 위기의 순간에 평소에 닦아온 습대로 하게 돼 있거든요. 좋은 선한 습관 뿌린 대로 거두는 게 이겁니다. 선한 습관에다가 힘을 많이 실어주시고 끝없이 황금률을 지키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깨어 있으시려고 노력하시고요. 안 그러면요 위기의 순간에 내 안에서 도깨비가 나옵니다. 무지와 아집의 결정체가 나와요. 성자가 아니라 악자라고 해야 되나요?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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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의 자녀가 돼요 그 순간에. 그래서 예수님이 비판할 때 “독사의 자식들아. 너의 아비는 마귀다” 그러잖아요. 실제로 그 안에 성령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마귀의 뜻을 따르고 있는 마귀의 분신처럼 살아가니까 마귀의 자녀라고 한 겁니다, 별다른 게 아니고. 그 사람도 한 생각 돌이키면 도로 성자가 될 수 있어요. 이런 걸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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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52 기독교철학06 요한복음 4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