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 그날의 숨결을 찾아서<1>
<2024년 3월 2일>
기미년 3월 1일,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세계 만방에 선포한 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민족대표는 태화관에서,
학생과 시민들은 탑골공원에서 발표와 함께 "대한독립 만세!",
그 함성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들불같이 퍼져나가고
해외까지 이어진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그날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그날의 그 숨결을
그날의 현장에서 그날로 되돌아가서 생생하게
애오라지 한마음으로 오롯이 느끼고 싶다.
탑골공원 ~ 삼일독립선언광장(태화관 터) ~ 보성사 ~ 덕수궁 ~
중명전 ~ 딜쿠샤 ~ 서대문 독립공원(삼일독립선언 기념탑 등등)
만남의 장소 / 종로3가역
탑골공원
[탑골공원]
[탑골공원]은 고려 때 사찰 [흥복사]를 세조가 중창하여 [원각사] 건립, 연산군은 일부 당우를 헐어 내거나 고쳐 연회장이나
기생들의 숙소로 활용, 중종 때는 아예 당우를 모두 없애고 탑과 원각사비만 남았으며 민가가 탑 부근까지 들어선 상태로 방치,
1890년대 영국인 브라운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최초의 근대공원 조성.(1897년 조성으로 보기도 한다.)
탑이 있어 흔히 [파고다공원], 또는 [탑동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2년 [탑골공원]으로 명칭 변경.
※ 한자로는 [塔谷]으로 쓴다. 혹자는 원각사 10층 석탑이 뼈처럼 생겼다하여 [塔骨]로 쓰기도 하지만 ~~~, 웃고 말지요.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공원은 1888년 인천에 조성된 외국인을 위한 [각국공원 (현재 자유공원)].
누구는 외국인을 위한 것이란 이유로 [탑골공원]을 최초로 보기도 한다.
[삼일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학생과 시민 4천 ~ 5천여명이 집결하여, 예정 시간인 오후 2시는 다가오는데 민족 대표는 오지 않고 ~~~,
독립운동가 정재용(1886~1976 당시 33세 / 경신중 졸업)님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선도한다,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 ~~~."
독립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들불같이 일어나고,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 등 전국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일제는 4월 15일 제암리교회 학살 같은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29명이 사망하고 민가 30여채 燒失.
이런 사태를 파악하고 전 세계에 보도하는데 앞장 선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나,
앨버트 테일러(AP통신원 /광산업자, 딜쿠샤 집 주인, 양화진 선교사 묘역) 등에 대한 고마움도 우리는 함께 기억하자.
♣ 민족대표는 예정했던 탑골공원에 많은 군중 집결로 일경에 연행되는 과정 등에서 폭력사태로 번질 우려 등을 감안,
태화관에 따로 모여 오후 2시 독립선언서 낭독 및 대한독립만세 삼창 후, 종로 경찰서에 연락하여 의연하게 연행된다.
※ 2024년 3월 1일 오후 2시(1919년 당시와 같은 시각), 종로구 주관 탑골공원에서 열린 105주년 삼일절 기념행사에서는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105년 전 조국 독립을 염원한 33살 청년 정재용의 모습을 구현하고
그의 증손자 정연규(33)씨가 함께 읽는 방식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 위 표지판에 "4~5천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12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이곳의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는 표기는 바로잡아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탑골공원 정문인 남문은 일제 강점기에 솟을 삼문을 헐고 석조 기둥(門柵)으로 바꾼다.
이때 세워진 정문은 서울대 법과대학 교문 기둥을 거쳐 현재는 서울사대 부설초등학교 교문 기둥으로 일부 남아 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교문
[삼일운동 기념탑]은 기념탑 앞쪽으로 어르신 여러분이 앉아 계서서 좌측 끝부분만 촬영.
[독립선언서]
아래쪽 흰 글씨, "이곳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가 낭독하고 배포했던 기미독립선언서"란 표기는 맞지않다.
삼일운동 105주년을 맞이하여 행정안전부도 이런 실수를 한다. 제발 정신 좀 차립시다.(사진 참조)
"1919년 3월 1일, 만주 하얼빈에서 시작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선언과 동시에 만주, 한국, 일본 등에서 일어난 대규모 항일 독립운동입니다"
기미 삼일운동은 1919년 3월 1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은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을 창설하여,
4월 11일 임시의정원에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초대 국무총리로 하여 상해임시정부를 결성했다.
거꾸로 기미삼일운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영향을 주었다.
삼일운동은 국제적으로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1918년 11월경), 대내적으로는 1919년 1월 21일 고종 승하,
일본의 독살설이 퍼지기도 하고,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 중심으로 동경 YMCA에서 [동경유학생대한독립선언]이 있었고,
국내에서는 그나마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가 조금은 수월한 종교지도자 중심으로 거족적인 대한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협의,
날짜는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고종황제의 인산일(因山日)인 3월 3일로 내정, 그러나 전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는 의견으로
3월 1일(3월 2일은 일요일이라 기독교인 배려)로 정하고 최종 민족대표 33인 서명(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 확정,
독립선언서 작성은 최남선, 공약3장은 한용운이 추가, 그리고 협의 과정에서는 48인 정도였으나 최남선 등 일부 서명에는 불참.
민족대표 손병희 선생 동상
그날의 울분과 함성을 기억하며 [독립선언서] 낭독 후 만세삼창
[원각사지 10층 석탑] 국보.
* 2021년 11월 문화재에 지정번호를 없애기 전에는 국보 2호였으며,
고려 때 불탑, [경천사지 10층석탑- 국보]과 같은 대리석 재질로 너무나 닮은 꼴이다.
[원각사비] 보물. *** 그전에 보물 3호였다.
이제는 문화재에 지정번호가 없어졌지만 그래도 옛날식으로 탑골공원 관련 국보와 보물을 챙겨 보자.
국보 제1호 숭례문, 제2호 원각사지 십층 석탑, 제3호는 북한산 비봉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1호는 흥인지문, 제2호는 보신각 종(보신각 종은 원각사의 종이었으니, 결국 원각사는 국보 2호, 보물 2호, 3호를 남김)
*** 보신각 종(보물 2호)은 세조 14년(1468) 원각사의 종으로 제작, 광해군 11년(1619) 보신각으로 옮겨졌으며,
1985년 수명을 다하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 중.(출발연도는 달라도 조선 왕조는 518년, 종의 수명은 517년)
*** 현재 보신각에는 에밀레종을 모델로 1985년 새로 제작한 종을 사용 중임.
[피맛골 주점촌]이란 간판을 왜 떼어냈을까. 공사에 방해가 될 것 같지도 않은데 ~~~.
허리우드 상가와 인사동길 갈림길.
인사동길로 접어들면 금방 [승동교회] 표지판이 보인다.(90% 세일 간판 옆)
[승동교회], 1919년 삼일운동 관련, 기독학생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위한 회의를 주로 했던 교회
예배당 입구 계단 옆의 표지석. 2월 23일 학생측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소각하고, 2월 28일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
*** 교회 건물은 1902년 11월 9일 준공, 삼일독립운동으로 인해 이 교회는 일제로 부터 많은 수난을 겪게 된다
'아름다운 차(茶)박물관'이 있는 인사동길로 접어들면, 1919년 당시 태화관이 있었던 순화궁터가 나온다.
[순화궁 터]는 헌종이 가장 사랑한 경빈 김씨(1832~1907, 김재청의 딸)가 헌종 사후, 궁에서 나와 살았던 사저.
*** 조선 24대 헌종(재세 : 1827~1849, 재위 : 1834~1849)은 효현왕후 死後 효정왕후를 다시 맞이했지만,
경빈 김씨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낙선재에 경빈 김씨를 위한 '석복헌'까지 지었으나, 겨우 2년만에 승하,
후사 없이 18세에 사가로 나와 76세까지 쓸쓸한 일생을 보낸다.
[3.1독립선언광장] *** 태화빌딩 앞.
1919년 3월 1일 2시, 민족대표 33인 중 29인(4인 불참)이 태화관(별유천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용운 님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후, 일본 경찰에 의연하게 연행된다. 이는 손병희 선생이
최린으로 하여금, 태화관 주인 안순환을 시켜 시간에 맞추어 일본 경찰에게 전화를 걸도록 미리 조치한 결과.
※ 태화관은 명월관의 분점으로, 궁내부 주임관을 지낸 안순환이 1909년 궁중요리 전문 요릿집 명월관을 개점,
1918년 명월관이 소실 되어, 명월관의 분점으로 당시 이완용의 소유가 된 순화궁 터에 태화관을 차린다.
태화빌딩 안쪽에 걸려 있는 1919년 3월 1일 당시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 태화정에 모인 민족대표 29명.
*** 33인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 *** 태화관 불참자 4명은 지방 주재 등으로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 독립선언서는 육당 최남선이 작성하였으나, 민족대표가 되는 것은 극구 사양.
[삼일독립선언유적지]
*** 2001년인가, 이걸 보고 언젠가 고쳐지겠거니 하고 매년 그냥 지나쳤는데, 이제는 한마디 해야겠다.
"이 집터는 본래 중종 때 순화공주의 궁터"라 했으나 중종은 5명의 공주와 6명의 옹주를 두었으나 순화공주는 없으며,
아니 조선에는 순화공주가 없었다. 순화궁(順和宮)은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궁호(宮號)였으며, 그 이전 이 집터와 관련은
세종의 막내 영응대군의 딸 길안현주(사위 구수영),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 구씨 탄생, 조선 후기에 김흥근 소유, 경빈 김씨가 헌종 사후, 궁에서 나와 살았으며, 그 이후 이윤용, 이완용 소유, 명월관 화재로 1918년 안순환이 이완용의 양해를 얻어
태화관을 차렸으며, 1919년 3월 1일 태화관 <별유천지>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 난처해진 이완용은
1920년 재단법인 남감리교회에 매각하였다.
[민영환 선생 자결 터]
1905년 11월 18일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 폐기 주장이 결국 실패로 끝나자,
11월 30일 새벽 6시 국민, 외교사절,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이곳에서 자결하였다.
종각역 4번출구 [보신각]
보신각은 조선시대 도성의 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알리거나 화재 등 긴급 상황 발생을 알리는 종각.
*** 현재의 종각은 세종 때의 규모로 1979년 새로 신축, 현재의 종은 1985년 제작
*** 조선 시대에는 5경(새벽 4시)에 33번(罷漏)-불교 33天 관련-, 2경(밤 10시)에 28번(人定)-별자리 관련-을 쳤다.
보신각 부근은 1919년 3월 1일, 3.1독립만세운동의 중심지로 4월 23일 한성정부를 선포한 곳.
조계사 앞쪽에 충정공 민영환 집터 표지석. *** 조계사가 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것은 1937년이다.
우정총국 회화나무
조계사의 대웅전 옆 백송(白松)은 천연기념물 제9호(1962년 12월 지정)
대웅전을 건너면, 1919년 2월 27일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터]. 보성사는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보성학교 인쇄 포함)
1919년 당시, 보성사 사장 이종일 선생(민족대표 33인) 동상, *** 일제는 3.1독립운동으로 격분, 보성사를 완전히 불태워 버린다.
이 작은 보성사 터에 각종 표석이 즐비하다. 중동학교 옛터, 숙명여학교 터, 대한매일신보 사옥터, 신흥대학 터 등.
안국동사거리
열린 송현 녹지광장
[경복궁 동십자각] 경복궁의 궁담[宮墻]으로 동남 모서리에 위치했던 망루로서 1880년 무렵에 건립.
경복궁 월대를 정비하면서 담장까지 새 단장
지난번 [서울 정릉] 탐방 때 들렀던 정릉의 원찰 [흥천사]의 종 , 보물인 [흥천사명 동종]이 한때 광화문 문루에 걸리기도 했다.
*** 지금은 경복궁 창고에 보관 중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중에 드러난 지층과 사헌부 터.
***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서울의 오랜 역사를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의 정원.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서울 高宗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碑)
쉽게 말해, 비각 안에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보존되어 있다.
부민관은 경성부가 행사, 공연을 위해 세운 극장, 1935년 준공. 1954년부터 국회의사당, 1970년대 중반 세종문회회관 별관,
1991년부터 서울시의회 건물로 사용 중.
서울시청,
*** 새 청사 건물이 파도를 모티브로 했다는 설도 있고 ~~~, 보기에 따라서는 열효율 등 문제가 많은 건물 같기도 하고 ~~~.
왼쪽은 덕수궁 뒷길, 가운데 영국대사관 정문, 오른쪽은 경운궁 양이재(왕족 자녀 교육기관)로 현재 성공회 주교관으로 사용.
이후의 일정 사진은 2편에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